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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관보 제1161호 1930년 11월 12일 ○ 산업 토지개량 ◉ 조선공유수면매립령에 의거 처분사항 농업용, 공유수면 매립처분사항 좌와 같이 매립공사 준공인가 ▫ 준공인가연월일과 번호 소화5년 11월 12일개 제495호 ▫ 매립지 소재지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진내리 ▫ 수면 종류 간사(干瀉) ▫ 지목 ▫ 준공면적/개인 논 7,496평 대지 165평 제방 801평 계 8,462평 ▫ 매립지 취득자 주소 성명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진내리 남궁비(南宮棐) ▫ 비고 대정7년 9월 21일 전남 제33호 대부 분 |
일제강점기 법성면장 명단
순위 |
재임기간 |
이 름 |
비 고 |
초대 |
1919년-1924년 |
장대호(張大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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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
1925년-1927년 |
박종관(朴鍾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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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
1928년-1931년 |
남궁비(南宮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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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
1933년-1934년 |
최상곤(崔相坤) |
※1932년 결원 |
5대 |
1935년-1945년 |
김현욱(金顯旭) |
※1940년 金子忠根으로 개명 |
▲ 발파된 흔적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에 굼방모탱이에서 조아머리까지 제방을 쌓기 위해,
사면불상 아래 바위을 발파해 방축용 석제로 썼다.
오빡구미에 대해서는 그 지명의 유래가 여러 갈래로 전한다.
▲상전벽해(桑田碧海)된 옥밭구미
한때 전설의 고향이라는 납양특집이 인기를 끌던 시절, 라디오 인지 TV인지 이곳의 이야기가 각색되어 방송을 탔다고 도, 전하는 곳이다.
오빡구미 지명의 유래는 대략 다음의 3가지가 전래되고 있다.
▲ 옥밭구미 샘
오(吳)씨와 박(朴)씨는 큰 부자가 되었는데 김(金)씨만 아직 큰 성공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오(吳)씨와 박(朴)씨, 김(金)씨가 살면 큰 복을 받을 땅이라서 오박금이라는데 서 생긴 지명이라고도 하고, 주변의 땅이 기름진 땅이라는데 서 유래되어 옥전(玉田)이라고 도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또 다른 지명 유래는 한약제로도 쓰이고, 옛날에 목기류나 각종 가구 등에 다양하게 쓰였던 칠의 주재료인 옻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 곳이라 하여 옻밭구미라고 하였다는 설이다.
구미란 해변 가 안으로 푹 패어 들어간 곳을 일컫는 말로, 이와 같은 지형을 만(灣)의 형국이라 하는데, 옻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었던 곳이라 옻밭구미라 하였는지, 아니면 토질이 비옥하고 양지바른 곳이라 옥밭(玉田)구미라 하였는지 단언할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에 굼방모탱이를 매축했던 남궁비(南宮棐) 면장이 이곳에서 살았는데 일제강점기에 다마다(玉田)로 창씨개명한 점으로 미루어 법성향지의 해석과 달리 옥밭(玉田)구미가 맞은 듯, 하다.
“상목 과 등간”
▲ 사면불상 오르막 길, 초입
조아머리 나루터에서 도래지 쪽으로 가는 계단 끝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묘역 옆, 소로를 따라 올랐다.
조아머리 나루에서 박경삼(朴敬三) 객주(客主)비를 둘러보고 도래지 쪽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 곧 바로 오른쪽 묘역을 지나 사면불상 앞에 이르러 목냉기 쪽을 내려 보면 조그만 항로표지등이 보인다.
그 일대를 상목이라 하는데, 이곳은 가와사끼(川崎)가 목냉기 제방을 막기 전에는 법성포 후사 면을 흐르는 구암천과 지아닐 앞을 지나 법성포구 앞으로 흐르는 와탄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라 고개미 같은 치어가 잘 잡히는 곳, 가장 으뜸으로 고기가 잘 잡이는 곳, 이라 하여 상목이라 부른다.
▲ 사면불상에서 본, 상목과 도다이라 부르는 등간(燈竿)
홍농의 칠곡리와 백수의 구수리를 잇게 될 다리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나 상류의 토사가 급속히 밀려 머지않아 칠곡리와 구수리가 맞닿을 것 같다.
▲ 법성포 등간
1941년 10월 4일 자 칠곡리 등간의 조선총독부 관보
1941년 9월 20일, 이곳 상목에 등간(燈竿)이 세워졌는데, 법성포 사람들은 이 등간을 도우다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도우다이는 등대의 일본 말 표기로 이곳 상목에 설치한 것은 등대가 아니고 등간(燈竿)이다.
등간(燈竿)은 기둥 끝에 등불을 달아 이곳 상목과 같이 암초의 위험이 있는 곳에 야간 항행의 안전을 위한 표지다.
상목의 이 등간이 설치되었던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철구조가 아니었고. 흰색 원형 목구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주 좋은 조아머리(左右頭), ......”
사면불상 아래, 자리했던 조아머리(左右頭) 마을은 인도 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시대, 법성포에 처음 발을 딛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마을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개발된 상징적인 곳이지, 마라난타 존자가 동진의 사신들과 함께 백제 땅을 처음 밟은 곳이란 의미는 아니다.
마라난타 존자가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추리는 물론 법성포로 최초 도래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명문화된 문헌이 현재까진 없다.
1998년, 영광군의 학술용역보고서에 제시된 법성포도래근거는 3가지인데, 그 하나가 조선시대 법성진의 마지막 첨사였던 권인하 첨사가 1895년에 편찬하여 규장각에서 발간한 법성진진지에 수록된 [법성진 대통재(待通峙)의 중국교역로 설]이고, 그 다음이 [법성포, 아무포, 부용포 등의 지명연기설], 마지막 하나가 [굼방모탱이 불두에 얽힌 설화]다.
그러나 마라난타 존자가 백제 땅을 밟은 해가 서기 384년인데, [법성진 대통재(待通峙)의 중국교역로 설]은 이로부터 1500여년이나 지난 조선시대이야기이고, 백제성터가 용성리 성촌에 있는 점, 또, [법성포, 아무포, 부용포 등의 지명], 역시 마라난타 도래 후 600여 년이나 지난, 불교를 국교로 했던 고려시대 때(고려 성종, 서기 992년) 지명인 점, 또 [굼방모탱이 불두] 역시 영광군 문화유적분포조사 때, 백제시대 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 이곳에 백제불교도래지를 조성하기 위해 영광군에서 학술 고증한 법성포도래근거, 모두가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어떻든 관광명소 화된 조아머리는 법성창의 초입이자 공음면 석교리에 있었던 무장현(茂長縣) 선착장의 초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명이다.
조선 정조 13년, 서기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 제6책 전라도 편에 수록된 이곳의 지명은 좌우두(左右頭)다.
칠산에서 들어오는 배가 이곳에 이르러 왼쪽(左) 바닷길로 가면 무장현 선착장에 이르고, 오른쪽(右)으로 뱃길을 잡으면 법성창에 이른다는 뜻이다.
이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대통재(待通峙)를 소의 머리로, 이곳을 좌우두(左牛頭), 즉 소머리의 왼쪽 편에 해당되는 곳으로, 우유머리를 우우두(右牛頭), 즉 소머리의 오른쪽 편으로, 숲쟁이를 소 허리로, 구시미를 소의 밥 구시로, 메물고지를 소의 여물통 형국으로 알고 살았다. 아마 이런 연유로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에 법성포의 형국을 수중와우(水中臥牛)의 형국으로 묘사했는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 말, 공출이 극성을 부리던 시절, 쇠붙이들을 모두 강제로 공출해 갔다. 그러나 이곳의 농악 기들은 강제공출의 위기를 면했다.
‘이곳이 소머리의 왼쪽 형국의 마을인데, 소의 목에서 쇠 풍경(風磬)(핑경)소리가 나듯, 이 마을에서 농악소리가 멎으면 법성포가 망한다.’는 마을 사람들의 항변에 풍수지리설을 신봉하는 일본사람들이 손을 대지 못하고 물러섰기 때문이다.
이곳 조아머리는 활배로 도 유명한 곳이었다.
이 마을 앞 상목은 민물과 바닷물이 합류되고, 물살이 급한 지역으로. 활배라는 배를 부리기에 아주 좋은 여건을 구비하고 있는 어장이다. 그래서 다른 마을의 배들까지 이 마을 앞으로 몰려들어 서로 좋은 곳에 어장을 꾸리려고 다툼이 많아 자리추첨을 하여야 했다.
활배는 물 때 따라 물목에 그물을 바쳐 고기를 잡는 어로방식이라 물목이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일대를 3등분하여 제일 좋은 어장을 상목이라 하였고, 제일 나쁜 곳을 하목, 기타 지역을 중목으로 분류해 추첨결과에 따라 활배를 쳤다.
그래서 한 때 이곳을 ‘안주 좋은 조아머리’라 하였고, 일옹대(一翁待) 전설과 더불어 융성했던 물 건너 백수 구시미 주막들의 여색을 빗대어 ‘X 좋은 구시미’라 하기도 했다.
“대통재”
사면불상의 능선 길을 따라 가파른 길로 올라서면 대통재(待通峙) 정상의 정자에 이른다.
▲ 대통재 꼭대기에서 自以와 如常
고산자(古山子) 김정호는 1861년에 그린 대동여지도에 이곳을 待通峙로 표기했고, 권인하 법성첨사는 1895년에 편찬된 법성진진지에 大通峙라 썼다.
대통치(待通峙)와 대통치(大通峙)는 한글 음역은 같으나 한문표기로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지명이다.
고산자가 대동여지도에 표기한 대통재는 기다릴 대(待)자를 써 사신을 기다리는 고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이 보다 260여 년 뒤에 권인하 법성진 첨사는 이곳을 큰 대(大)자를 써 중국의 사신들이 넘나드는 고개라는 사대적인 의미의 지명을 썼다.
또한, 이곳은 한말의 유학자 구계 박민순의 ‘서호12경’에 수록된 ‘통치낙조(通峙落照)’나 1929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수록된 초정 조의현의 ‘속 법성포 풍물시’에 등장하는 '서해낙조' 현장이기도 하다.
▲ 초정 조의현의 ‘속 법성포 풍물시’의 ‘서산에 지는 해’
첫댓글 Wow![~](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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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머린줄 알았어요~~수협조합~??ㅎㅎ~객주비는 지금 있는건가요~???
하교길 이글거리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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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우에 .... 무엇이든 마지막 때란 저럴테지![~](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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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머리 나루터에 객주비가 있는데 사진에서 보듯이 파란페인트 덧칠이되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