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辭 回憶
글-德田 이응철
운동장 상록조회가 열리는 날이면 늘 흥분한다.
조회뿐만 아니라 각종 행사가 열릴 때면
식이 끝날 때가지 사회자를 긴장하며 지켜보는 일종의 알레르기 같은 병이
작년 B고등학교에서부터 있다.
지금 근무하는 이 학교는 각종 큰 행사를 사회자와 교무를 별도로 이원화되어 있어 전문성이 엿보이지만 대개 일선 학교에선 교무가 모든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전에 근무하던 학교는 남녀공학으로 작년까지 일곱 번의 졸업생을 배출한 신설학교로 처음 교무를 맡고 보니 교무과가 바쁜 곳임을 절감했다.
학교 규모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어느 학교나 대개 교무란 역할이 전체 일과 연관되어 늘 엄청난 잡무에 시달리며 하루를 마감한다.
교무부서는 매일 아침 전체 직원회의와 학년 협의회, 주임 협의회를 주관한다.
마이크 시설, 장소, 좌석까지 체크해야 한다. 뿐만 아니다. 전 직원의 출결을 속히 파악하여 보강을 지시하고 오후가 되면 학급일지와 출석부를 대조하여 일일이 사고와 병결을 구분해 결재를 올리고 교무일지, 주간 계획서와 당시 초과 근무일지를 결재 올리는 등 눈코 뜰새없는 부서이다.
그렇다고 교무자리가 동료들한테 퍽이나 존경을 받는 자리는 더욱 아니다. 오히려 무슨 일 때면 와서 한마디씩 툭툭 던지며 갑논을박하며, 교장과 교감도 걸핏하면 책임을 추궁하는 자리가 또한 교무이다.
물론 몇 년 안에 승진 후보자로 근무점수 1등 수를 받기 위해 1, 2년 맡는 사람들에겐 두말할 것도 없이 좋은 자리지만, 교감하고 거리가 먼 젊은 내게 본 수업까지 잠식당해 본의 아니게 학생들께 미안하고 스트레스만 가중되는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작년 B고 졸업식 때였다. 졸업식은 학사업무 중 가장 손꼽히는 행사이다. 졸업 사정회부터 졸업장 쓰기, 각종 상장 상품 준비하기, 식장 꾸미기, 학사보고 및 안내장 발부 등 눈 코 뜰 새 없었다. 18학급이라 지시사항도 순환되지 않아 몇 번씩 재촉을 해야 되며, 대외상도 가부를 확인해 통보해야 하는 어려움 또한 많다.
졸업식 준비는 순조롭게 잘 되어 갔다. 초창기라 강당이 없어 학교 운동장에서 행사를 치루어야 하기에 유난히 날씨가 관건이 된다.
다행히 포근했다. 답시와 송시도 사전 지도가 잘 되고, 해마다 책임을 전가하던 회고사도 덕 많은 선생이 작성해, 닷새 전에 붓글씨로 써서 빨간 리본을 매어 모셔 놓지 않았던가!
교무통을 자청하던 교감의 지적으로 학사보고서도 수없이 교정과 인쇄를 반복하고, 수상자들을 불러 예행연습까지 치러 그야말로 졸업식 준비는 물샐 틈 없이 완벽했다.
준비성이 세포 속까지 스며들어 저녁이면 거울 앞에 서서 목소리를 조정해 가며 시나리오를 통달하곤 했다.
“다음은 육성회장 상입니다. 학습태도가 바르고 솔선수범한 3-5 김정식 앞으로 나오기 바랍니다.” 라고 외쳐 아내가 잠결에 벌떡 일어나 무슨 일이냐고 하던 해프닝도 몇 번 있었다.
그래도 기뻤다. 학교만기가 되어 희망한 모교로 전보가 무난해, 이번 행사만 잘 되면 5년간의 유종의 미를 오롯이 거두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 자신감마저 팽배해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상장과 상품을 최종 확인하고, 선정된 내빈께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등 최종 마무리 지었다.
이튿날 11시 졸업식 -
일찍 졸업생과 재학생을 모아 예행연습을 또 했다. 찬바람 없는 따스한 겨울 날씨도 한몫했다. 많은 학부모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운동장 본부석이 차고 넘쳤다. 졸업식이 많이 해도 특별활동 운영 시범학교라 협조한 내빈들을 모시다 보니 초만원이었다.
졸업식은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신년도 대학 합격률이 좋아 학사보고를 하시는 교감선생님께서도 우쭐하며 숫자를 강조하셨고, 그때마다 우뢰와 같은 박수로 미소담은 답례를 받곤 했다.
사회 보는 분위기도 야외치고 잡혀 있었다. 대내상과 대외 상을 시상하고 이제 학교장이 어머니 회장과 육성회장에게 주는 감사패 순서만 남았다.
“다음은 학교장 감사패 전달이 있겠습니다.”
라고 발표를 한 다음, 내 깐에는 여유가 있다고 다음 순서들을 살펴보는 순간, 아뿔싸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회고사를 챙겨 나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갑자기 하늘이 캄캄했다. 혹시나 하고 상품을 보조하던 여선생에게 눈짓해도 없다고 손짓한다. 큰일이다. 이런 낭패가 ... 감사패는 두 번째 수상자 어머니회장 순서였다. 이런 낭패 속에서 왜 그리 빨리 시간이 가는지-본부석 뒤에 서 계시던 교감 선생님께서 낌새를 눈치 채시고 어쩔 줄을 모르신다.
“제 교무실 책상 서랍이나 책꽂이에 붉은 리봉으로 묶인 회고사 좀 찾아다 주세요”
라며 급히 귓속말로 전했다. 사실 단상 본부에서 사회보다 말고 뛰어 갈 작정도 아니고, 발 빠른 체육 선생을 교무실로 보냈다. 가져 오겠지 하며 감사패 문맥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곁눈질로 보니 체육선생은 저 밑에서 없다는 신호만 계속 보내는 것이 아닌가! 이 노릇을 어쩐담? 분명히 서랍에 있는데-, 겨우내 준비한 공든 탑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입술이 마르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진땀이 나고 현기증이 인다. 이제 어머니 회장이 학생에게 시상만 끝나면 학교장의 회고사 차례가 아닌가! 그 사이에도 계속 교무실로 선생들을 보내도 번번이 없다고 한다. 큰일이다. 교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좌불안석이다. 당연하다. 도대체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단 말인가?
어머니 회장상 문맥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사회자 마음은 곧 닥쳐올 사태로 완전 제 정신이 아니었다. 방법이 무엇인가? 학부모까지 약 천 여명이 지켜보는 이 축복받은 졸업식장이 이제 잠시 후면 펑크가 날 일촉즉발이다. 어머니 회장이 상을 주고 자리로 돌아온다. 큰일이다.
드디어 교장 선생님 회고사 차례였다.
올 것이 온 것이다. 난 침착하게 교장 좌석에 가서 나직한 목소리로 지금 교무실에 두고 온 회고사를 찾는 중이니 잠깐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성품이 대쪽같은 교장선생님은 듣고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시간은 자꾸 흐르기만 했다. 졸업 식장에서 아무리 언변이 좋은 교장 선생님이라도 즉석연설이 가능할 것인가? 눈을 지그시 감고 계시는 교장 선생님 머리칼이 한줄기 겨울바람이 스친다.
잠시 침묵에 안타까운 시선만이 본부석으로 향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여명의 학생들과 학부모들! 그러나 이젠 더 지체할 수 없는 긴박한 시간임을 오감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한단 말인가? 회고사를 생략할 수도 없고 실로 난감했다.
아! 바로 그때였다.
교무실에서 운동장으로 오는 국기봉 밑에 인파를 헤치고 개선장군처럼, 아니 황영조 선수처럼 높이 손을 쳐들고 급히 달려오는 선생이 있었다. 첫눈에 붉은 리본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보니 틀림없는 회고사였다. 목 메이도록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드디어 나는 이성으로 흥분을 억제하고 천천히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외쳤다.
“다음은 학교장 회고사가 있겠습니다.”
학생회장의 우렁찬 구령소리와 함께 사태를 함께 우려한 본부석의 전체 직원과 내빈께서는 단상에 방금 올려진 빨간 리본으로 묶은 회고사로 시선을 집중하며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전전긍긍하시던 교장 선생님께서도 단상에 올라 준비된 회고사를 또박또박 읽으시며, 졸업생을 뜨겁게 격려하셨고, 그래서 제 7회 빛나는 졸업식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넘기고 끝났다. 정녕 신의 축복이었다.
후일담이지만 두 번씩이나 회고사를 못 찾다가 마지막으로 책상 위 고무판을 무심코 들쳐봤더니 그 속에 나온 게 아닌가! 회고사를 찾은 선생님의 기지와 발 빠른 체육선생이 모든 행사를 살린 것이다.
그날 저녁 회식장소에 온통 회고사 사건이 단연 화제였다. 물론 수고했다는 선생님들의 한잔 술에 취했지만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밥이 모래알 같아 끼니를 굶어야 했다.
몇 년 전 담임을 맡을 때만해도 나는 그 누구보다도 준비성에 대해 입이 닳도록 강조해 왔다. 지각을 하거나 교복이 단정치 못한 학생, 수학여행, 소풍 행사 때 덜컹거려 사고 친 학생한테 사전에 레드니스(Readiness)를 무기로 얼마나 채근했던가!
또한 우산과 지갑, 모자가 집에 붙어나질 않아 건망증 많은 아내에게 때마다 핀잔을 주던 자신에 대해 경종을 울린 좋은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그날 졸업식장에서 끝내 회고사를 못 찾을 경우를 대비해서 눈을 감고 차분히 머릿속에 연설문을 준비하셨다는 교장 선생님의 귀뜸 또한 시린 하늘가에 번지는 매화 향처럼 오래 오래 기억 저편의 갈피 속에 꽂혀있다.(끝)
첫댓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재미있게 봤습니다. 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