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sutta(경)가닥들에서 정의된 상기(sati) - 상기와 떠올림(vitakka)의 차이
“비구가 이렇게 그 시기에 멀어진 채로 거처하면서 그 법을 잇따라-기억하고 잇따라-떠올립니다. 그 시기에 비구에게는 ‘상기’라는 깨닫는 통로가 시작됩니다.”(상5-300)
이 정의는 ‘일곱 가지 깨닫는 통로들’(七覺支, 念·擇法·靜進·喜·輕安·定·捨)의 하나로서 상기를 정의한 것이다. 인용문에서 ‘잇따라-기억하다’라는 단어는 앞의 인용문에서도 쓰였고 상기를 강하게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여기 인용문에서는 이 단어에 바로 이어서 ‘잇따라-떠올리다’(anu-vitakketi)라는 단어가 쓰였다. 지금까지 상기의 개념이 잘 잡히지 않은 큰 원인 중에 하나는 이 ‘잇따라-떠올리다’라는 단어의 개념을 잘 잡아내지 못한 것에 있었다.
‘떠올리다’에 해당하는 ‘vitakketi’는 ‘분리되어서(vi) 사유하다(takketi).’로 파자된다.
이것은 툭 떨어져 나온 생각을 말하려는 것이다. 한 단어로 ‘떠올리다’라는 말이다. 명사형은 ‘vitakka’(떠올리기, 尋, 覺)이다. 각묵 스님은 이 명사형을 문맥에 따라 ‘일으킨 생각’ 혹은 ‘사유’로 번역했지만 인용문의 ‘anu-vitakketi’는 ‘계속해서 고찰하다’로 번역했다.
전재성 박사는 명사형 ‘vitakka’를 ‘사유’라고 번역했지만 인용문의 ‘anu-vitakketi’도 ‘사유하다’로 번역했다. 모두 변별력이 떨어지는 번역들이다.
‘vitakka’에 대해서는 해석식의 번역이지만 각묵 스님의 ‘일으킨 생각’이 뜻으로는 맞는 번역이다. 그렇다면 ‘anu-vitakketi’는 ‘계속해서 생각을 일으키다.’라고 했어야 일관성 있는 번역이었을 것이다. ‘vitakketi’는 일반적인 어형으로만 봐서는 사역형(-eti)이다.
그래서 ‘떠오르다’라기보다 ‘떠올리다’가 어형상 맞다. 이것의 명사형은 첫 번째 명상의 구성요소이기도 한데 거기에서는 수행 주제를 애써 떠올린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역시 ‘떠올리기’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vitakka’는 일부러 떠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에 대해서도 표현한다.(대표적으로 「중간 부류」 제19번 경(가닥)인 「두 종류의 떠올림 가닥」과 제20번 가닥인 「떠올림을 가라앉힘 가닥」에서 쓰였다. 맛1-497, 507)상기는 기억과 항상 연관되어 있지만 떠올림은 기억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경우에도 쓰인다.
새로운 발상이 문득 떠오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vitakka’는 이 한 단어로 ‘떠오름’과 ‘떠올리기’를 다 표현한다. 일반적 평서형인 ‘vitakkati’(떠오르다)라는 단어는 없는 것을 보면 더욱 확실하다. 다시 말해 ‘vitakka’ 즉, ‘떠올림’이란 ‘떠오르는 생각’(떠오름)이자 ‘떠올린 생각’(떠올리기)이라고 이해하고 문맥에 맞게 번역하거나 해석해야 한다.
부처님은 어렸을 적에 농경제에서 양육강식에 의한 죽음을 목격하고 조용하게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첫 번째 명상’(初禪)에 들었다. 나중에 이때의 일을 떠올리고는 그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잇따라-식별하게 되었다.(맛2-180)
첫 번째 명상은 ‘떠올리기’와 ‘살펴보기’(vicāra, 伺, 觀)를 통해 들어가게 된다. 부처님의 유년 시절 첫 번째 명상에서 떠올리기의 대상은 호흡이 아니라 ‘약육강식으로 인한 죽음’이었다.
이것이 명상 주제였다. 그것에 대해 골똘히 살펴보다가 첫 번째 명상에 든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알아차린 ‘깨달음을 위한 길’은 호흡법이 아니라 명상법을 말하는 것이다.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즐거움은 욕망들과도 다르고 안 좋은 법들과도 다른데 내가 왜 그런 즐거움을 두려워한단 말인가?’”(맛2-181)
여기에서 ‘그런 즐거움’(tassa sukhassa)이란 첫 번째 명상의 즐거움을 말한다. 이 내용은 인위적인 호흡법에 실패한 경험담을 말한 직후에 유년 시절 체험한 첫 번째 명상에 대해 평가하는 부분이다. 유년 시절에 닦은 수행법이 호흡법이었다면 인위적인 호흡법의 잘못된 점을 상대적으로 평가하고 올바른 호흡법에 대한 통찰을 서술했어야 마땅했다.
명상, 즉 선(禪, jhāna)이란 ‘조용하게 골똘히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일상적으로 쓰이던 단어였다. 격의법으로 차용한 것이다.
그래서 한역에서 ‘靜慮’(정려, 조용히 생각함) 혹은 ‘思惟修’(사유수, 사유 수행)라고 의역되었다. 아무 뜻도 없는 음역이자 중국 선불교의 왜곡된 개념이 스며든 ‘선’(禪)이라는 번역과 고정됨(定, samādhi)이라는 뜻을 덧붙인 ‘선정’(禪定)이라는 번역은 삼가야 한다.
‘참선’(參禪)도 ‘참구(參究)하는 선’인 간화선을 지시하는 단어이므로 구별해서 써야 한다. 모두 ‘명상’(jhāna, 冥想)이라는 본래의 뜻과 취지를 덮어버릴 수 있는 번역어들이다.
그런데 명상을 통한 수행의 경지에서 생각이 전혀 불가능하다면 ‘명상’이라는 단어로 그 경지를 표현했을 리가 없다. 그러했다면 ‘無禪’(a-jhāna, 명상 없음, 골똘히 생각할 수 없음)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네 가지 명상들’은 예컨대 무상·고·무아를 분석관찰로 작업하기 용이한 고정됨(삼매)이기 때문에 명상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주1) 아비담마 철학처럼 무조건 모든 명상이나 고정됨에서 빠져나온 다음에야 분석관찰할 수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편견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다른 고정됨과는 달리 ‘인지가 있지도 없지도 않은 영역’(제4선)과 상수멸은 그 속에서 관찰과 깨달음이 불가능하므로 빠져나온 다음에야 다루어질 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은 쓸데없는 말이거나 편협한 말이 된다.(앙5-472를 보라.)
명상의 단계들은 명상이 가능하니까 명상이라고 칭한 것이다. 자신이 잠깐 경험한 고정됨만이 고정됨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편견이다.
‘달성’(samāpatti, 等至, 사마발제)된 차원으로서의 고정됨의 상태라야 분석관찰이 용이한 것이지 겨우 잠깐 체험하는 고정됨에서 분석관찰할 힘과 여유는 잘 생기지 않을 수밖에 없다. 후대의 어떤 큰스님의 말이라도 표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전세계적으로 모든 고정됨에 대해서 통달한 분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다들 자신의 경지를 솔직하게 낱낱이 밝히지 않으며 가르친다. 대중의 지도자 격으로 나설 때에는 마하가섭처럼 자신의 체험과 현재의 경지를 솔직하게 낱낱이 밝혀야 한다.(상2-518~)
다만,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란 부처님 말씀과 정합적으로 맞아떨어지는 말이어야 한다. 나머지는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스님의 말이라도 참고만 하고 신중히 보류하면서 부처님 말씀과 하나하나 맞춰보아야 한다. 이것이 ‘중대한 한정’이다.(디2-243)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일종의 생각거리인 명상 주제에 대해 부처님의 유년 시절처럼 명상한다고 해서 첫 번째 명상에 쉽게 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처님은 전생에 이미 고정됨을 많이 수행했기에 금생에 가능한 방법만 알려주면 곧바로 해당되는 고정됨을 달성하셨다.
어렸을 적에 닦은 명상법이 바른 호흡법이었다면 부처님은 금세 네 번째 명상에 도달해서 깨달음을 이루었을 것이다.
답바 존자는 7세에 불법을 만나자마자 금세 동격과를 이루었다. 부처님은 더욱 그러했을 분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덕이 없는 자들은 이리저리 생각하게 되는 명상 주제보다 단일한 개념이나 하나의 인상이나 일정한 변화의 단위를 명상 주제로, 즉 떠올리는 대상으로 삼는 것이 첫 번째 명상에 들기 쉬울 뿐만 아니라 같은 방법으로 계속하기만 하면 그 이상의 명상 단계에도 오를 수 있다.
부처님 유년 시절의 명상법으로는 염불(즉, ‘부처님을 잇따라 상기하기’, Buddha anu-sati, 佛隨念)처럼 첫 번째 명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부처를 이룬 후에 제시한 공부법을 표준으로 삼아야지 대승불교처럼 보살 시절의 수행법을 표준으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주1). 네 번째 명상을 달성한 상태에 대해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묘사한다. “그가 이렇게 마음이 고정되고, 청정하고, 지극히 맑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러워지고, 작업할 만하고, 확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서 마음을 앎과 봄으로 지향하고 기울입니다.”(디1-246) 여기에서 ‘작업할 만하고’(작업할 만한 상태에서, kammaniye)라고 한 것은 여섯 가지 뛰어난 앎들을 이루는 작업 모두를 말하는 것이지만 관찰, 특히 분석관찰 작업을 하기에 용이한 상태라는 말이다. 또한 처소격(~e, ~에)으로 쓰인 것은 ‘그러한 상태 속에서’ 혹은 ‘그 때에’ 작업이 이루어짐을 나타낸 것이다. 경에서는 분석관찰의 내용은 다를지라도 네 번째 명상 속에서 그 작업이 이루어짐을 항상 위의 정형구에서의 처소격을 통해서 나타낸다. 네 가지 무방해물의 고정됨은 윗단계로 오를수록 인지가 제약됨에 따라 식별과 알아차림도 제약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가능성도 제약된다. 반면에 네 번째 명상이 깨달음을 이루기에 가장 적절한 고정됨의 강도를 가졌기 때문에 위의 정형구가 항상 네 번째 명상에서 쓰였던 것이다.
첫댓글 딱까 혹은 위딱까-는 기본적인 위치는 구행(언어적 행위)입니다.
우리말로 '생각'으로 밖에 번역할 수 없지만
우리말 '생각'이라는 표현의 범주가 너무 넓어서 적당한 번역어는 아니지만 '생각' 정도의 어감으로 이해하면 되지 싶습니다.
다만 골똘히 생각함(참선/명상)---처럼
//명상을 통한 수행의 경지에서 생각이 전혀 불가능하다면 ‘명상’이라는 단어로 그 경지를 표현했을 리가 없다.//
---에서 생각이 전혀 불가능----이라는 표현이 구행(어행)이라는 의미라면
제2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즉 구행이 멸한 선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인위적인 호흡법에 실패한 경험담을 말한 직후에
유년 시절 체험한 첫 번째 명상에 대해 평가하는 부분이다.]....라고 이해될 만한 경문은 없지 싶습니다.
단어의 어감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것은 봄봄도 그렇습니다만
//고정됨(定, samādhi)이라는 뜻//...........
삼매를 고정됨이라고 이해할 만한 경문은 없습니다.
흔히들 심일경(성)/마음이 한 곳에 집중함-----으로 번역하거나 이해하는 설명들이 많지만
삼매는 특정 대상에 대한 집중이라는 의미가 아니지 싶습니다.
그렇지요.
명상(선정)이 쉬운거는 아닙니다.
실제 호흡명상에서 초선의 경지는 '언어의 그침'은 뜨오르는 스토리들의 그침 즉, '오개(akusala) 나태의 멈춤'을 구행의 그침에 의미하지요.
그것은 위딱카와 위짜라에 집중하게 되면 불선법들이 그치게 된답니다.^^
또, 위딱까는 숨의 닿음(신-촉 결박)에 대한 '일으킨 생각'이고요. 위짜라는 그것에 대한 지속적인 고찰이 되지요.
이선은 이들 위딱까 위짜라의 그침 즉, 숨에 대한 인위적인 생각의 그침이더군요...
이제 숨은 미세하게 감지 될 정도로 고요하겠지요.
일으킨 생각 위짜라와 지속적인 고찰로 부터 얻은 희열마저 삼선에서 내려놓습니다.
즉, 삼선은 들숨 날숨에 일치하는 마음 즉, 심일경에 따른 희열 마저도 그치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온이 일어나거나 사라지는 등을 ...사마디에 접근을...
수시간 동안 자신의 숨 쉬는 몸과 마음의 형성들이 일어나 그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오염을 버리고 싶은 수행자의 일이랍니다...
그냥 명상jhana에
도움이 되시라고... 몇글자를 적었습니다.
위따까란 법의 가장 작은 요소로서 명칭, 개념 등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위짜라는 지속하는 사유의 과정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인 사유와 숙고가 아닌
감각적 단속과 오장애를 벗어난 이후의 사유와 숙고입니다.
초선을 경험하면 바깥 세계는 사라지고 사유와 숙고의 경계만이 인지됩니다.
사념처 수행을 통하여 확인가능 합니다.
@형성의 바탕을 초월한다 //일반적인 사유와 숙고가 아닌
감각적 단속과 오장애를 벗어난 이후의 사유와 숙고입니다.//
6심6사는 66법(욕계 애지 연기)의 막장이고
초선의 심사는 감각적 욕망(욕계)를 <최소한 일시적이라도 벗어난 상태에서의> 심사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무조건 모든 명상이나 고정됨에서 빠져나온 다음에야 분석관찰할 수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편견이다.//
----고정됨 등의 표현만 제외한다면 (다만 고정됨이란 표현이 어떤 의미로 사용하신 것인지는 좀더 논의가 있어야 할 듯)
봄봄이 본 카페에서 주장한 내용과 동일한 내용으로 생각됩니다.
소소한 지적이지만 /Buddha anu-sati, 佛隨念/-----에서 사띠라는 의미에서는 anu-s-sati라는 표현이 맞지 싶습니다.
//그가 이렇게 마음이 고정되고, 청정하고, 지극히 맑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러워지고,
작업할 만하고, 확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서//---------라는 표현은 흔히 색계 제4선 이후에 나타나는데
이러한 단어들은 가장 이상적인
삼매 상태(앎과 봄/아빈냐로 달성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를 서술할 때 나타나는 표현이지 싶습니다.
위 //작업할 만하고//.... 는 우리말 '능력이 있는 ' - '유능한'이라는 의미이지 싶습니다.
애들 말로는 '포텐-' ^^
초불에서는 '활발발 ?'
가능하시다면
// ‘명상’(jhāna, 冥想)이라는 본래의 뜻//----에서
jhāna의 의미를 부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atītaṃ kho, cunda, addhānaṃ ārabbha tathāgatassa satānusāri ñāṇaṃ hoti;
so yāvatakaṃ ākaṅkhati tāvatakaṃ anussarati.
쭌다여, 과거에 대해서 여래에게는 이전의 것을 기억하는 알음알이249)가 있다.
그는 원하는 만큼 무엇이든지 기억한다.
249) '이전의 것을 기억하는 알음알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satānusāriviññāṇa인데 마음챙긴 것을 따라서 기억하는 알음알이'라 직역할 수 있다. 주석서에서는 '전생을 기억하는 것과 함께 하는(pubbenivāsa-anussati-sampayuttaka) 지혜(ñāṇa)'로 설명하고 있어서(DA.iii.914) 이렇게 옮겼다.
*출처에 따라 위냐냐/냐냐
Tassa mayhaṃ, aggivessana, etadahosi –
‘abhijānāmi kho panāhaṃ pitu sakkassa kammante sītāya jambucchāyāya nisinn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tā.
Tassa mayhaṃ Aggivessana satānusāriviññāṇaṃ ahosi:
esova maggo bodhāyāti. -
악기웨사나여, 그런 나에게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가 생겨났다.
'이것은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라고.
@봄봄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 의 경문
satānusāriviññāṇa는
//마음챙긴 것을 따라서 기억하는 알음알이//'라는 것이 올바른 직역이겠죠.
바로 위의 주석에 있네요^^
이 주석을 한 분도 '붓다고사'일테죠.
@mindsati //따라서 기억하는//
anu-s-sarati와 anu--sarati는 다른 표현이지 싶습니다.
기억과 관련된 복합어에서는 -s-가 하나 더 들어가야 되지 싶습니다.
따라 흐르다. 따라 기억하다- 차이이지 싶습니다.
@봄봄 허참!....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의 원래 번역
//마음챙긴 것을 따라서 기억하는 알음알이(
satānusāriviññāṇa )//의 한개 경문에는
마음챙김 sati와 기억 sara 모두가 포함된게 아닌가요?
@mindsati 어휘들이 초불에 가깝네요!
@mindsati [satānusāriviññāṇa인데 마음챙긴 것을 따라서 기억하는 알음알이'라 직역할 수 있다. ]에서
중간에 <따라서 기억하는>-( 기억하는) 빠져야 맞지 싶습니다.
anusārin:a. 随行する,随従する. cf. anusarati. dhammānusārin 随法行. saddhānusārin 随信行
anusarati:[anu + sar + a] goes after; follows.
anussarati,[Vedic anusmarati,anu + smṛ] to remember,recollect,have memory of
@봄봄 sati를 기억(sara)에 늘 주장하시든데 !....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의 원래 번역
//마음챙긴 것을 따라서 기억하는 알음알이(satānusāriviññāṇa )//의 한개 경문에는
마음챙김 sati와 기억 sara 모두가 포함된게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