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ie - Gnossienne No. 6 - 7
사티 - 그노시엔느 6번 - 7번
Erik Satie [1866 ~ 1925]
Bojan Gorisek -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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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o 6
2. No 7
에릭 사티 그노시엔느
1889년부터 1893년 사이에 5번, 1번, 2번, 3번, 4번, 6번 순으로 작곡되었다. 제5번의 경우 특히 오른손 연주가 화려하고 왼손은 사티가 1889년 대(大)전람회에서 들었던 이국적 음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동양적' 스케일을 사용한다. 이 작품들은 모두, 조옮김과 조바꿈에서 작은 악절을 반복하는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마딧줄을 전부 삭제한 것은 아마도 중세의 악보와 기보법(記譜法)에 대한 사티의 깊은 관심에서 비롯된 듯 하다. 연주자를 위한 기묘한 지시사항을 적어놓았는데 이러한 법은 1917년경 까지 계속되었다.
이 곡은 짐노페디(GYMNOPEDIE) 보다 훨씬 대중적(?)인 모습을 띄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19세기 말엽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morden하기도 하고 마치 현대 Newage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사티는 거의 최악에 가까운 빈민굴로 자발적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집니다. 가난한 이유도 있겠지만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한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출가한 수도승처럼 인간 세상을 오히려 관조의 시선으로 조망하고 싶었던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에게 삶은 하나의 실험이자 꿈의 공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끊임없는 새로운 소재들이 필요했던 것 이런지 모르지요. 그것이 속세의 낮은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빈곤과 기이함으로 보였을지라도 사티는 기꺼이 구도승처럼 나서서, 한 시대를 앞서는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에릭 사티 그노시엔느
Gnossiennes
에릭 사티의 초기 피아노 작품으로, 1893년에 〈세 개의 그노시엔느〉(Trois Gnossiennes)라는 제목으로 세 곡이 먼저 출판되었고, 사후에 발견된 작품들은 4, 5, 6번으로 1968년에 출판되었다. 〈짐노페디〉와 유사하게 왼손이 연주하는 화음 위로 부유하는 오른손의 선율로 구성된다.
<그노시엔느>는 침묵과 통하는 음악이다. 그 침묵은 단순함을 향한 열망이기도 하다. 짧은 악절을 쉼 없이 반복하다, 어느새 사라지는 단순하고도 흐릿한 존재감으로 마침표를 찍는 순간까지. 따라서 그노시엔느는 단순한 패턴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는 현대 음악의 중요한 흐름인 시간을 초월한 음악이기도 하며, ‘침묵’과 ‘영원’을 두루 함의하고 있는 ‘미니멀’ 음악의 선구로 평가받기도 한다. 또한 사티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노시엔느의 악보엔 마딧줄이 없다. 선율의 흐름이 규칙적인 마디에 종속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영향으로 보여지는데, 그노시엔느의 공통점은 저음부의 완전화음 위를 선법적인 색체를 띤 선율 또는 그 단편이 진행되어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저음의 첫째 박자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화음에 의지하면서 일종의 흔들림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만 그노시엔느의 묘미를 살려낼 수 있다.
새로운 용어
사티는 ‘그노시엔느’라는 이름을 작곡의 새로운 ‘유형’을 지시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사티는 자신의 곡에 기이한 제목을 붙이기로 유명한데, 그노시엔느는 사티가 새로 만들어낸 경우이다. 어원과 관련하여서는 그노시엔느 1번을 작곡할 즈음 사티가 영지(靈知, gnosis)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크레타 섬의 문명의 중심지였던 크노소스(knossos)와의 관련성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제목 뿐 아니라 이 곡의 악보에 표기된 지시어(멀리서부터, 자신의 내면에게 집요하게 질문하며, 통찰력으로 스스로를 무장하여 등)도 상당히 재미있고, 기괴하기도 하다.
옛것과 지금의 것, 동양의 것과 서양의 것
이 곡의 악보에는 조표나 마디줄 등이 모두 생략되어 있는데, 중세 시대에 상대적인 음고만을 표기하던 기보법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작은악절들의 전조와 이조가 반복된다. 작품 일부에서는 ‘동양적’인 스케일이 사용되는데, 사티가 1889년 대박람회에서 이국의 음악을 접한 영향일 것이다.
ⓒ 음악세계 & 음악사연구회(사)
그노시엔느
Gnossien, Gnossienne
명사 및 형용사. 고대 지리에 있어서의 그노스 주민. 그노스 또는 그노스인의. 크레타인을 가리켜 그노스인이라고도 한다. 사티는 먼 옛날을 연상시키는 말을 발견해 냈다. 속세를 벗어난 듯한 인상을 주는 말이다. '짐노페디'못지않게 '그노시엔느'도 침묵의 음악이라 할 수 있다. 드뷔시 음악의 침묵이 의도적인 것이라면 사티 음악의 침묵은 無와 통하는 것이다. 드뷔시의 음악이 종종 '울창한 숲 속의 잠자는 공간을 비상'하고 있는 데 비해 사티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듯한 느낌을 준다. '세개의 그노시엔느'는 사티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강박 관념, 또는 자기도취적인 측면을 잘 표현한 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간을 초월한 음악의 좋은 예이다. 도입부도 없고 종결부도 없는 음악이며, 때도 없이 시작되고 결코 끝나지 않는 음악이기도 하다.
사티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노시엔느'의 악보에도 마딧줄이 없다. 선율의 흐름이 규칙적인 마디의 테두리에 익숙하지 않으며 마디줄이 없는 것은 그레고리안 성가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노시엔느'는 3곡으로 완결되었다. 이외에도 5곡의 그노시엔이 이미 씌어져 있기는 했으나 오랫동안 출판되지 않았고 사티 자신이 출판한 곡의 타이틀은 3개의 그노시엔느 뿐이다. 세 곡의 공통점은 저음부의 완전화음 위를 선법적인 색채를 띈 선율 또는 그 단편이 진행되어 가는 것이다.
사티는 먼 옛날을 연상시키는 말을 발견해 냈다. 속세를 벗어난 듯한 인상을 주는 말이다. '짐노페디'못지않게 '그노시엔느'도 침묵의 음악이라 할 수 있다. 드뷔시 음악의 침묵이 의도적인 것이라면 사티 음악의 침묵은 無와 통하는 것이다. 드뷔시의 음악이 종종 '울창한 숲 속의 잠자는 공간을 비상'하고 있는 데 비해 사티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듯한 느낌을 준다.
'세개의 그노시엔느'는 사티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강박 관념, 또는 자기도취적인 측면을 잘 표현한 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간을 초월한 음악의 좋은 예이다. 도입부도 없고 종결부도 없는 음악이며, 때도 없이 시작되고 결코 끝나지 않는 음악이기도 하다. 사티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노시엔느'의 악보에도 마딧줄이 없다. 선율의 흐름이 규칙적인 마디의 테두리에 익숙하지 않으며 마디줄이 없는 것은 그레고리안 성가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노시엔느'는 3곡으로 완결되었다. 이외에도 5곡의 그노시엔이 이미 씌어져 있기는 했으나 오랫동안 출판되지 않았고 사티 자신이 출판한 곡의 타이틀은 3개의 그노시엔느 뿐이다. 세 곡의 공통점은 저음부의 완전화음 위를 선법적인 색채를 띈 선율 또는 그 단편이 진행되어 가는 것이다. 이 세곡은 연속 연주되는 것이 좋다. 멋진 둘째 곡이라도 첫째곡에 이르러서 연주하지 않으며 생기가 줄어들고 매력이 감소한다. '짐노페디'와 마찬가지로 ' 그노시엔느'도 저음의 첫째박에 의뢰하지 않고 화음에 의뢰하면서 일종의 흔들림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연주할 때 아름다운 음의 울림, 화려한 터치에 덧붙여 선율의 흐름을 소중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쇼팽을 연주하는 듯한 기분이면 된다.
사티는 어려서 신비 사상에 관한 기초를 공부했는데, 고대 ‘크레타’섬의 의식적인 춤을 표현한 것에서 힌트를 얻어 ‘그노시엔느’란 이름을 지었다. 또 다른 의미로, 영지주의는 나스티시즘(Gnosticism)을 뜻에 따라 번역한 것이다. 음을 따라 ‘그노시스’파 또는 ‘그노시즘’이라고도 한다. ‘영지주의자’, ‘영지주의파’ 또는 ‘영지주의적’이라고 번역되는 나스틱(Gnostic)이라는 낱말은 그리스어로 “신비적이고 계시적이며 밀교적인 지식 또는 깨달음”을 뜻하는 그노시스(gnosis)로부터 따온 것으로, 이 낱말은 고대의 영지주의 종교 운동의 반대자들이 이 운동에 속하는 사람 또는 단체를 지칭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 당시에 이 종교 운동의 분파들 중 기독교 계통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단순히 기독교인이라 불렀다. 한글 번역어인 ‘영지주의’라는 낱말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靈知’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영적 지식’, ‘영적인 앎’ 또는 ‘프네우마(Divine Spirit)를 아는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예술가
에릭 사티, 6개의 그노시엔느
사티가 젊은 시절에 떠돌았던 몽마르트르 언덕과 캬바레 ‘검은 고양이’, 또 사티의 어린 시절과 그의 음악에 담긴 ‘중세적 명상’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함께 들었던 곡은 사티의 초기작이었던 <3개의 짐노페디>였지요. 사실, 사티에 대한 언급은 그렇게 한 편의 글로 마무리할까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거론해야 할 음악가, 또 들어야 할 음악이 많아서였습니다. 한데 뭔가 영 아쉽고 찜찜했습니다. 사티는 생존했던 시절보다 20세기 중후반 이후에 그 존재가 더욱 빛나기 시작했고, 피아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는 레퍼토리는 아니지만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물론 대중이 좋아하는 곡은 사티의 음악 중에서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칼럼의 목적은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보편적인 곡들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염두를 굴리던 차에 어젯밤 TV에서 사티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물론 우연의 일치였겠습니다만, 어느 CF에선가 아주 귀에 익은 사티의 선율, <6개의 그노시엔느>(6 Gnossiennes) 중에서 첫곡인 ‘Lent’(느리게)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애청곡들을 한 곡씩 짚어나가겠다는 이 지면에서 <6개의 그노시엔느>를 빼놓고 가긴 어렵습니다. 이 곡은 앞서 들었던 <3개의 짐노페디> 직후에 작곡됐습니다. 처음 출판했을 때는 <3개의 그노시엔느>였지만 사티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전기 작가였던 로베르 카비(Robert Caby, 1905~1992)가 3곡을 더 출판해 지금은 <6개의 그노시엔느>로 전해집니다. 작곡 시기는 1889년부터 1897년까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이 곡도 앞서 들었던 <3개의 짐노페디>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이고 중세적인 명상, 어찌 보자면 뉴 에이지 풍의 분위기가 짙은 음악입니다.
일단 <6개의 그노시엔느>의 각 곡 머리에 사티가 붙여 놓은 지시어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 3 4곡에는 ‘Lent’라고 적혀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느리게’라는 뜻이지요. 한데 2곡에는 ‘Avec etonnement’(놀라움을 가지고)라는 독특한 지시어가 놓여 있습니다. 5곡의 ‘Modere’(절제해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6곡의 머리에 놓여 있는 ‘Avec conviction et avec une tristesse rigoureuse’(확신과 절대적 슬픔을 가지고)는 또 한번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사실 이 정도는 약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곡 중간의 지시어들은 더 특이합니다.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 같은, 어찌 보자면 해괴망측한 언어들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렇듯이 사티는 당시까지만 해도 악보에서 주로 사용하던 이탈리아어를 완전히 배제한 채 엉뚱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프랑스어를 사용합니다. 그런 경향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강해집니다.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난 담배가 없네. 다행히 담배를 피우지 않는군’ 같은 언어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아예 곡 자체의 제목도 점점 도발적으로 짓기 시작합니다. 1910년대에 들어서면 ‘뻔뻔함’ ‘유쾌한 절망’ ‘바싹 마른 태아’ ‘개를 위한 엉성한 전주곡’ 같은 제목의 곡들이 태어납니다. 그밖에도 사티의 특이한 언어 사용법은 좁은 지면에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 많습니다. 물론 사티가 공연히 장난을 친 것은 아니겠지요. 악보에 등장하는 그의 엉뚱하고 파격적인 언어들은 ‘의미있는 장난’이라고 해석할 만합니다. 당시의 음악적 주류, 혹은 기존의 고정관념에 대한 냉소와 풍자라고 해야 할 겁니다. 요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도발적인 현대성을 느끼게 할 정도입니다.
사티는 개(강아지)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서른 두 살의 사티는 파리 근교의 빈민굴 아르퀘이유로 이사해 5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칩거하는데, 일부러 집 안에 사람을 들이지 않았는지 아니면 사티를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는 방문객도 일체 없었다고 합니다. 유일한 가족(?)이 강아지들이었다고 하지요. 사티는 길거리의 유기견들을 집으로 데려와 주린 배를 채워주고 함께 놀았습니다. 친구인 시인 장 콕토에겐 이렇게 말했지요. “난 개들을 위한 음악을 쓸 거라네.”
사티의 음악적 개성을 좀더 살펴보기 위해서는 1893년에 작곡한 <벡사시옹>(Vexations, 짜증)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보는 딱 한 페이지에 불과한데, ‘이 모티브를 진지하고 부담스러운 자세로 840번 반복하시오’라는 지시가 맨 윗자리에 적혀 있습니다.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해괴한 음악’이었습니다. 물론 아무도 악보의 지시대로 완주하지 못했지요. 대략 18시간이 걸리는 연주를 감내할 피아니스트도 없었거니와, 그 긴 시간 동안 단순하고 반복적인 선율에 귀를 기울일 청중도 없었던 까닭입니다. 처음으로 그 곡이 연주된 해는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인 1963년이었지요. 누가 했을까요? 이 곡을 감히 무대에서 연주하려는 생각을 품었던 이는 역시 존 케이지(1912~1992)였습니다.
물론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18시간을 연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두 몇 명인지 확인하긴 어려우나 그날 연주회장에서는 꽤 여러 명의 피아니스트들이 ‘릴레이 연주’로 840회의 반복을 이어갔고, 나름대로 사티의 작곡 의도가 그럴싸하게 재현됐다고 합니다. 예컨대 어떤 피아니스트는 느리게 또 어떤 피아니스트는 빠르게 연주했고, 부드럽게 연주하면서 나름의 선율을 구사하려고 애쓰는 피아니스트가 있었는가 하면, 또 어떤 피아니스트는 사티가 적어 놓은 음표들을 아주 기계적으로 재현했다고 합니다. 물론 ‘삑사리’라고 불리는 실수들도 간간이 튀어나왔겠지요. 다시 말해 악보는 똑같았어도 피아니스트마다 각양각색의 연주가 펼쳐졌다고 전해집니다. 5달러를 내고 연주회장에 들어선 청중의 태도도 가지각색이었겠지요. 먹고 싶은 사람은 먹고, 자고 싶은 사람은 잤습니다. 책을 읽거나 친구와 잡담을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연주회 중간에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지요. ‘우연성’과 ‘일상성’의 옹호자인 존 케이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당히 짜릿한 연주회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 다른 장면을 떠올려보지요. 1920년 3월 8일, 파리의 바르바장즈 갤러리(Barbazanges Gallery)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막스 자콥(1876∼1944)의 연극을 공연하던 중간에 사티가 작곡한 <가구음악>(Musique d’ameublement) 이 초연됐습니다. 이 곡도 <벡사시옹>처럼 짧은 프레이즈를 계속 반복하는 음악인데, 말하자면 연극의 중간휴식을 위한 ‘배경음악’이었습니다. 한데 그날 공연의 프로그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관객들은 음악이 흐르는 동안 연주에 절대 신경 쓰지 말 것. 걸어 다니고 이야기하고 음료수를 마실 것.’
하지만 사티의 의도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연주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관객에게도 그 ‘지시’는 이상하고 낯설었겠지요. 연주자들은 단순한 프레이즈를 계속 반복하는 행위를 어색해했고 청중은 제자리에 꼿꼿이 앉아 음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결국 사티는 화를 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연주회장(갤러리의 전시공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연주자들에게 “계속 연주해”라고 소리쳤고, 관객에게는 “음악을 듣지 마시오!”라고 외쳤다고 하지요.
그것은 일종의 ‘반(反)예술 선언’이었습니다. <벡사시옹>도 그렇고 <가구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티에게 예술은 거창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여야 했습니다. 예술가들의 과잉된 자의식, 혹은 청중이나 관객이 예술을 경배하는 태도, 그 모든 것을 사티는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물론 20세기로 접어든 그 시대에, 사티와 유사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동료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또 있었지요. 예컨대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와 시인 장 콕토, 화가 파블로 피카소, 사진작가 만 레이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시인 장 콕토는 발언은 그들의 예술관을 짐작케 합니다. 콕토는 이렇게 말하지요. “구름, 파도, 물의 요정, 밤의 향기를 이제 집어치우자. 우리는 지상에 뿌리내린 일상의 음악을 필요로 한다.” 화가 피카소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남겼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피카소는 사티가 1917년 작곡했던 발레음악 <퍼레이드>의 무대미술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내 그림에 끌어들인 대상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물건이다. 물주전자, 맥주컵, 담배 파이프, 쌈지담배 한 꾸러미, 그릇, 갈대로 엮은 방석이 놓여 있는 부엌 의자, 늘 대하는 식탁 등. 나는 그 누구도 듣지 못했거나 변형시킬 수는 더더욱 없는 희귀한 대상을 얻어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중략) 예를 들면 나는 루이 15세의 안락의자를 절대로 그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대상이지 ‘누구나’를 위한 대상은 아니다.”
사티가 추구했던 ‘예술의 일상성’은 기존의 음악적 구조와 장식을 내팽개친 ‘앙상한 음악’에 대한 집착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기존의 음악적 주류들, 예컨대 바그너풍의 ‘중후장대함’이나 드뷔시풍의 ‘모호함’에 대한 반발이자 풍자였지요. 그렇게 사티는 당대의 주류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갔던 음악가였습니다.
알콜 중독으로 인한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사티는 극음악과 성악곡들, 피아노 독주 외의 기악곡들도 여럿 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주로 애청되는 곡들은 비교적 초기의 피아노곡들입니다. <4개의 오지브> <3개의 사랑방드> <3개의 짐노페디> <6개의 그노시엔느> 등입니다. 중세의 그레고리오 성가를 연상시키는, 신비하면서도 단순한 선율이 반복적으로 펼쳐지지요. 명상적이기도 하고, 어찌 보자면 약간 몽환적이기도 한 음악들입니다.
<6개의 그노시엔느>에 등장하는 ‘그노시엔느’는 그리스 남쪽의 섬 크레타, 혹은 ‘크레타 사람의 춤’을 뜻합니다. 아마 듣기에 어려운 곡은 없을 겁니다. 1곡 ‘Lent’는 TV CF에서까지 사용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곡입니다. 2곡 ‘놀라움을 가지고’도 사실 놀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앞 곡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나머지 곡들도 그렇습니다. 4곡에서 왼손으로 짚어나가는 저음이 살짝 무거워지는 듯하다가 5곡에서는 좀더 환한 느낌으로 돌아옵니다. 사티는 6곡에서 ‘절대적 슬픔’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밑으로 무겁게 가라앉는 슬픔은 아닙니다. <6개의 그노시엔느>는 침묵과 음악의 중간쯤에서,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드러냅니다.
글/문학수
추천음반
짐노페디 & 그노시엔느
•연주자 Aldo Ciccolini
•녹음연도 1983년
•레이블 EMI 7243 5 67260 2 4
에릭 사티는 라투르의 시 「오래된 것들」의 몇 줄에 영감을 얻어 《짐노페디》를 작곡했다. 시인은 사티의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것 같다.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웠던 사티는 평생 극단적인 평가를 감수하며 살았다. 그는 원래 하던 공부에서 실패하고 패배자라는 오명을 안았지만, 이를 떨쳐내고 서른아홉에 음악 공부를 시작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드뷔시는 처음에는 그를 존경했지만 나중에는 배척했고, 라벨은 그를 지지했으며, 콕토는 그를 우상화했다. 1911년 그가 시작한 혁신은 비로소 인정받게 되었지만, 평생 동안 당했던 무시와 그로 인한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던 그에게 보상이 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는 결국 1925년에 눈을 감았다.
《짐노페디》는 고대 그리스의 체조와 같은 춤의 반주로 사용되었을 법한 음악으로 묘사된다. 연주곡들은 모두 부드럽고 매혹적인 선율의 왈츠 곡들로, 고전적인 피아노 연주를 완전히 뒤엎어 놓았다. 이런 모습에서 음조, 화음 구조, 강약 조절 등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셀시와 글래스의 작풍 출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노시엔느》(이 단어는 사티가 만들었다)는 이런 아이디어를 한층 더 발전시킨 곡들이다.
이 곡들의 연주를 들어보면 신선한 해석은 드물다. 연주회에서 연주할 곡이 아니라 치료에나 적합하도록 연주한 음반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알도 치콜리니의 연주는 단연 돋보인다. 그는 이 작품들에 녹아 있는 사티의 진솔하면서도 천재적인 음악성을 인정함으로써 뛰어난 연주를 할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짐노페디 & 그노시엔느
사티의 음악
사티의 음악을 들으면 언제나 일요일 같다. 모처럼 화창한 겨울 하루, 마당에 서 있는 나무의 긴 그림자가 오지호의 그림처럼 이편으로 건너와 처마를 거쳐 지붕에 이르는 동안의 그 시간을 묘사한 듯한 그의 음악은 그래서 혼자만의 젖어 있는 시선을 표시하고 안내한다. 커피를 한 잔 놓고,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되는 책을 한 권 손에 쥐고 앉는다. 어두워 가는 창가를 바라보고 있다. 불빛이 돋아오는 창 밖 풍경은 내면으로부터 어떤 음악을 부르는데 그것이 바로 내게는 <세 개의 짐노페디와 피아노 작품>(파스칼 로제 피아노, 데카)이란 앨범이다. 그래서 그렇게 자주 들었다. 건너편의 성의 불빛과 말라버린 담쟁이 넝쿨들, 수척해 뵈는 십자가 아래의 빈 그네. 음악은 자꾸만 내면의 모퉁이 길을 걸어나온다.
사티의 음악은 모차르트와도 베토벤과도 다르다. 바그너와도 브람스와도 리스트와도 차이코프스키와도 다르다. 드뷔시와도 라벨과도 쇤베르크와도 다르다. 고독이라는 말이 있다. 무슨 말일까. 인간의 창조 행위의 원초적 캔버스라고 해야 할까? 고독 위에 있는 그의 음악은 어느 누구와도 잘 닿지 않는 은자의 음악 같다. 그의 음악이 내 가슴속에 멈추었다가 피처럼 흐르는 것은 우선 거창하지 않고 소품이기 때문이다. 늘 혼자 있을 때만 들으라는 음악 같아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나보다 아흔 아홉 살이 더 많은 이 작곡가. 박명욱이 정리한 사티에 대한 문건에 의하면 실제로 사티 생전에 그의 집을 들어가 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스스로 상아탑이라고 이름 붙인 파리 교외의 누추한 거리 중심에 있는 한 건물의 3층에 위치한 자신의 거처에서 그는 그 누구의 방문도 허용하지 않고 죽기 전까지 27년간을 혼자 고독하고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실제로 그는 차비마저도 없어서 가끔 파리 시내까지 걸어서 나와야만 했다). 그의 사후에 들어가 본 그의 집에는 구석구석에 쳐진 거미줄과 고장난 피아노 뚜껑 밑에 감춰진 쓰레기들과 잡동사니들이 가득 메웠다고 한다.
이 현대 음악의 선구자로 존중된 20세기 음악계의 이단적 존재 에릭 사티의 내면을 관류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재능에 대한 긍지와 자부 대신에 끔찍한 고독이었던 것이다. 끊임없는 음악적 실험과 기행과 떠들썩한 스캔들로 점철된 그의 삶의 외적 드라마에 의해 가리워진 그의 내실은 저 무인지경의 황량한 섬과 다를 바 없었다. 일급의 예술가들이 그의 주위에서 명멸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추종했으나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는 해학과 조롱과 익살로 그 암울한 내부를 가리고 스스로 택한 가난과 고립 속에서 쓸쓸하게 살다 죽어갔다. 한때 몽마르트의 예술가들의 회합장소였던 카페의 피아니스트로 일하며 작곡한 샹송들은 파리 대중음악에 크게 기여한 작품들이라고 한다. 그가 얼마나 해학적이고도 신비주의적 작곡가였는지는 그의 작품 제목들을 열거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차가운 작품들> <한 마리 개를 위한 물렁물렁한 진짜 전주곡> <바싹 마른 태아> <성가신 과오> <지긋지긋한 고상한 왈츠> 등등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노시엔느>라니! 그뿐 아니라 그의 악보에는 통상적인 연주 표시 대신 "놀라움을 지니고"라든가 "이가 아픈 꾀꼬리 같이" 등의 말들이 씌어 있었다고 한다.
창 밖 나뭇가지에서 저녁 새가 운다. 눈이 너무 많이 와 먹을 것이 없는 모양이다. 눈이 녹으면서 떨어지던 낙숫물 소리도 다시 저녁이 되어 얼어붙었다. 일부는 고드름이 되었을 것이다. 새의 소리도 얼어붙을 것만 같다. 사티의 음악은 우리에게 백석이거나 김종삼의 시처럼 거창하지 않지만 깊이 울림을 주는 음악이다. 이 저녁을 사티라면 어떻게 악보로 번역해 음악으로 만들까. 그리고 어떻게 연주하라고 적어 넣었을까. '휘어진 소나무 가지를 지나가는 바람소리처럼'이라고 적지는 않았을까?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의 <짐노페디>는 1888년 그가 22세 때 쓴 초기 작품이다. <짐노페디>는 고대 스파르타의 연중행사인 제전의 명칭으로, 나체의 젊은이들이 여러 날 동안 합창과 군무로 신을 찬양했던 행사였다. 사티는 이 고대제전의 춤추는 광경을 피아노 모음곡으로 재현해냈다. 그것은 몽상적인 취향이면서 동시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는 발상이기도 하다.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지만, 이 조용한 피아노 곡을 듣노라면 역설적이게도 사티만큼 침묵과 정적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작곡가가 드물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티의 음반으로는 프랑스 출신의 파스칼 로제가 연주한 것이 데카에서 나왔고, 필립스 음반으로는 라인버트 리우의 것이 있다. 구하기 쉽지 않은 음반 중에 알도 치콜리니가 연주한 이엠아이 음반과 신진인 파스칼 로제의 연주는 사티 음악의 맑고 깨끗한 음색을 자연스럽게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장석남/ 시인
에릭 사티 (Eric Satie, 1866-1925, 프랑스)
사티는 기존 음악계가 쌓아놓은 신조나 미학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살아간 '세기말의 반항아'였다. 그는 낭만주의나 인상주의에 반대하여 감정의 표출을 절제한 채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음악들을 써냈다. 괴팍한 아이디어와 신랄한 유머, 그리고 신비주의와 순수에 대한 이념이 그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만들어냈다. 파리음악원을 마친 후 1884년부터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작곡계에 뛰어든 그는 <오지브>(1886) <사라방드>(1887) <짐노페디>(1888) 등을 통해 단선 성가풍의 투명한 음악들을 선보였다.
1890년에 몽마르트로 이사간 그는 기괴한 옷을 입고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 시기부터 드뷔시와 친교를 가졌으며, 또한 신비주의적 비밀결사인 <장미십자교단>의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장미십자교단의 종소리>와 같은 작품을 써냈다. 그는 <지휘자 예수의 예술 메트로폴리탄 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유일한 교인이 된 적도 있다. 1898년 파리를 떠나 아르쾨유로 간 그는 조그만 방에 기거하면서 죽는 날까지 살았다.
항상 아마추어로 취급 받는데 대해 불만을 느낀 사티는 1905년엔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알베르트 루셀에게 다시 음악을 배웠으나 그의 음악은 과대망상증, 기벽증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1917년에 콕토의 대본과 피카소의 무대장치에 의한 발레 <파라드>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의 가치는 반전되었다. 시대를 초월한 대담한 수법과 혁신적인 사티의 사상은 미래파의 출현을 예고해주었고,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독특한 개성의 천재
20세기 초기 프랑스의 음악계에서 수수께기 같은 인물이 에릭 사티이다. 그는 그 당시 풍미하던 여러 양식에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군데도 끝까지 속해있지 않았던 기인이었다.
‘에릭 사티’하면 그가 붙인 이상한 표제들(엉성한 진짜 전주곡, 바싹 마른 태아 등)과 악보상에 연주자들엑 요구한 기이한 주석들(혀끝으로, 잠시 홀로되기, 마음을 열라!)과 극도로 절제도 간결하고 경제적인 음악작품들도 기억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 중에서 나타난 혁신적인 화성과 익살스럽다고만 하기에는 고도로 정화된 시성들은 그를 여느 다른 작곡가들과 분명히 분별 지어주는 그만이 가진 독특한 개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까운 친구들조차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에릭 사티. 요즈음 음악도들에게는 이름이나 한번 겨우 들어본 듯한 정도이다. 그의 생애와 작품경향을 통하여 천재가 가진 여러 가지 껍질들을 벗겨내는 작업은 사티에 대한 순수한 매력과 호기심을 발동시키게 한다.
회색 벨벳 양복의 기인
1866년 5월 1일 프랑스 Honfleur라는 소도시에서 프랑스 선박 중개인 알프레드 사티와 스코틀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티는 다섯 살 때 파리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죽자 조부모의 손에 맡겨졌고, 다시 조부모의 사망으로 파리로 돌아온 그는 피아니스트이며 아마추어 낭만 작곡가였던 새엄마를 만나게 된다. 그때부터 실상 그의 비공식적인 음악공부가 시작된다. 열세살때엔 파리 콘서바토리에 들어감으로 정식으로 음악공부가 시작되지만, -그의 생활기록부에는 “재능은 있으나 너무나 게으르고 결석이 잦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결국 수준에 못미치게 도어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예를 들자면 피아노 교사는 그에게 “피아노를 그만두고 작곡에 전념하는게 어떻겠느냐”라고 하고, 작곡 교사는 그에게 “작곡 보다는 피아노에 전념해 보라”고 하는 식이었다. 그후 열아홉살 때 마티아스의 피아노 클래스에도 참가했으나, 그도 “곡 하나 배우는데 3개월 걸림, 초견 불가능”이라고 평가했다. 그렇게 맞지 않는 공부를 계속하고자 했던 것은 5년동안 의무로 치루어야 하는 병역 의무를 학생인 경우는 1년으로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33기 보병으로 입대한 군대생활마저도 반 이상은 기관지염으로 병원에서 보내개게 된다. 그후 스물 한 살때는 무척 싫어했던 계모가 있는 집을 나와 몽마르뜨의 카바레에서 가수의 반주를 막데 된 것이 일생동안 그의 주요한 생계 수단이 된다. 이 당시 샤브리에의 영향을 받아 <3개의 사라반드>를 작곡하고, 그 이듬해 <3개의 짐노페디>를 작곡하게 된다.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는 파리의 모든 음악가들에게 놀라운 충격을 안겨준 사건으로 사티도 여기서 영향을 받아 동양적인 느낌이 가미된 <3개의 그노시엔>을 작곡하게 된다. 그후 신비적 종교·그레고리안 챤트·고딕예술·성자들의 생애에 심취되어 작품으로 표출시키기도 했던 그는 특히 24세 때는 장미십자종단주의의 신비적 비법에 심취되기 시작하여, 그곳의 공식작곡가가 되면서 현학적 계시에 심취하게 된다. 그후 수년 동안 작곡한 곡들은 <장미십자종단 회원의 팔파프>, <영웅적인 천국문의 전주곡> 등으로 신비스러운 사티의 모습을 충실하게 그려준다.
그러던 중 몽마르뜨에서 만난 드뷔시와 알게 되어 25년간이나 지속되는 긴 우정을 나누는데,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친구관계를 넘어 서로를 깊이 흡수하는 특수한 관계였다. 선천적으로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독립적 기질이 강하고,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자존심이 강하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그의 성격을 그의 음악속에 잘 형성되고 있었다. 1997년도의 몽마르뜨는 변하고 있었다. 전원적이고 시골풍의 느낌은 사라져가고 새로운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1898년 사티는 32세 되던 해 그의 얼마되지 않는 짐을 싸들고 파리 남부의 근교인 Arcueil-Cachan로 이사하게 된다. 이때에 그는 자신의 외형을 바꾸기 시작한다. 그의 길던 머리를 자르고 보헤미안적인 차림새를 벗어버리고, 12개의 똑같은 회색 벨벳 양복을 입은 멋진 신사가 되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외형이 말쑥한 신사로 탈바꿈한 그 시기가 사실은 그에게는 생애 중 가장 불행했던 기간으로 여전히 몽마르뜨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 하루종일 걸어서 파리로 출근했다가는 이른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는게 15년동안 계속되었다. 이 당시를 반영하는 듯한 음악으로 ‘배 형태에 의한 세 개의 곡’ ‘바싹마른 태아’등으로 대부분이 카바레 선율의 편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또같은 회색 벨벳 양복을 언제나 입고 다녔기 때문에 Arcueil에 살던 어린이들은 그를 ‘벨벳 양복의 신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의 이 회색 벨벳 양복은 한번 입고 나서는 해질 때까지 계속 입다가 못쓰게 되면 버리고 또 입고하기를 계속, 결국 그중 여섯벌은 입지도 못하고 말았다. 그의 기이한 행적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날 미요가 길거리에서 우산을 옆에 낀 채 비를 맞고 오는 그를 만나게 되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우산을 젖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와서라고 대답했다고 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방에서는 수십개의 우산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1905년 경인 사티가 40세 되던 해에 그는 자신의 테크닉에 너무나 한계를 느끼게 되어 이미 오래 전에 포기했던 학교로 돌아간다. 스콜라 칸토룸에서 댕디와 루셀의 문하에서 대우법, 푸가, 관현악법 등을 배우고 3년 후, 드디어 학위를 따게 된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성격과 고집은 어쩔 수 없었던지 역시 그 지식들은 그의 강한 개성 속에 흡수되어버린다. 그후 45세가 되던 1911년에 접어들면서 그의 생애는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라벨이 그의 <사라방드>를 연주하고, 두달 후 드뷔시가 짐노페디의 2곡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여 지휘하게 되자, 사티 자신도 크게 놀랄만큼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마침 라벨 음악의 뛰어난 해석자이기도 한, 리카르도 비네스가 사태의 음악으로 독주회를 열게 되자 갑자기 그의 음악을 출판하겠다고 몰려드는 바람에 그는 곧 기묘한 제목들과 괴상한 주석들을 달아놓은 유머러스한 피아노 시리를 발표한다. 이때를 기하여 그의 오래된 작품들도 한꺼번에 빛을 보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후의 사태의 명성을 높인 사람은 장 콕토였다. 문학과 희곡작가인 그는 유명한 연주가를 통해 사티의 작품을 알리는 한편, 자신의 시나리오에 사티의 음악, 피카소의 무대미술, 무용의 디아길러를 동원하여 전위발레 퍼레이드를 만들어 낸다. 이 공연 후,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어 8일간이나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으나, 이로써 사티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런 계기로 사티 주위에 젊은 음악가들의 기수인 ‘Les Nouveaux Jeunes'란 작곡가 그룹이 모이게 되고, 이 요원들이 1920년에는 저널리스트이자 음악학자인 헨리 콜렛에 의해 임의적으로 6인조(Lex Six)로 되는 것이다.
1917년에는 그의 생애 최대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칸타타 소크라테스>를 작곡한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를 번역한 것을 과함하게 줄여서 4명의 소프라노와 작은 오케스트라로 구성된 것으로 음악자체는 너무나 평온하고 단순하다 못해 속은 기분을 줄 정도여서ㅓ 첫 공연에는 말이 많았으나, 1920년 스트라빈스키가 들어보고 난 후, 프랑스 음악은 비제, 샤브리에와 사티라고 극찬할 정도였으므로 그의 명성은 드디어 절정에 다달랐음이 확인된다. 그 이후엔 그의 양식이 점점 더 다양해져서 미요와 함께 가기구음악이라는 독특한 형식과 개념을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낸다. 가구음악이란 한마디로 거실에 있는 안락의자와도 같이 연주자 자신의 기분여하에 따라 취할 수도, 말 수도 없는 음악이다. 이러한 경향은 반인상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후에 ‘6인조’의 미요와 플랭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 감상의 배제, 경제적인 구성, 간결한 조성과 선율 등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만년에는 그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고 술에 취하는 날이 많아지고 점점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게 된다. 1925년 6월 1일 간경화증으로 사망하게 되자, 미요와 그의 동생은 Arcueil에 있는 30년 동안 관리인 한번 들여보내지 않았던 그의 방에 들어가서 너무나 텅빈 것을 보고 놀란다. 침대와 의자와 책상, 반쯤 비어 있는 벽장에는 입다 남은 12개의 회색양복이 쌓여 있었고 망가진 피아노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초기 습작 시절부터 모아논 자필악보들과 엄청난 양의 서류들이 불에 타고 있었는데, 놀랜 미요가 이들 중 악보를 끄집어 내었던 일은 음악사에 감사할 만한 일이다.
쉽게 구분되지 않은 장르
한 작곡가가 스타일이 자신을 벗어나기가 여느 사람의 경우 참 힘든데 비해 사티는 천재답게 여러 양식을 종횡무진한 것처럼 보인다. 20대 초반에는 기하학적인 고대선율과 그리스적인 피아노곡들, 20대 후반에는 장미십자가 종단의 곡들로 작곡되었으므로 신비적·종교적이었고, 30대엔 주로 카바레 슭?위주의 편곡들, 40대엔 명성으로 인해 자신감이 생겨 사티 특위의 괴짜이며 유머러스한 피아노 곡을 다산했다. 50대엔 중요한 발레 작품 3개와 칸타타인 <소크라테스>, 성악곡 및 후기피아노 곡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양식을 산출했다.
이중 대표적이 몇 곡만 살펴보면, 초기에 작곡한 3개의 사라방드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9도 병해 진행이 나타나며, 3개의 짐노페디<그노시엔>에서는 또다른 기하학적 세계로 안내한다. 짐노페디란 그 말뜻이 의미하듯이 고대 그리스의 종교 축제에서 젊은이들이 추던 의식적인 춤으로 이를 상상해 볼 때 ‘어느 그리스의 새벽 하늘 아래 소년들이 벌거벗은 채로 아라베스크 풍의 춤을 우아하게 너울대는 모습’이라고 누군가 표현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피아노 곡들이 3개씩 묶여져 있는 것인데, J.S.Bach가 ‘3’이란 숫자에 의미를 두었고, 18세기 작곡가들이 3의 배수인 6, 12, 24등으로 곡을 그룹지었던 것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었다고 보겠다. 어쨌든 3이란 삼위일체설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그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음엔 틀림없을 것 같다.
스캔들을 일으켰던 <파라드>란 전위발레음악에서는 악보에 적힌 악기구성에 타이프라이터와 시렌이 등장하기도 한다. 칸타타(소크라테스>는 또다른 영역으로 인상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으며, 특이한 것은 곡 중 클라이막스라고 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임종시 다른 음악에서 당연히 나왔음직한 극적인 요소 대신 단순한 Plain Song Lineol Ostinato Bass위에 적막하게 진행하는 것이 오히려 너무나 밀도 있게 느껴져 통렬한 기분이 될 정도이다. 후기 피아노 소나타인 <관료적인 소나티나>는 클레멘티의 피아노 양식을 parap hrase한 신고전주의 작품이며, 가장 진지하고 성의를 보인 5개의 녹턴은 고도의 수학적인 수치로 만들어진 중요한 곡이다.
특이한 미학
위에 열거한 작품만으로도 우리는 사티를 어느 한 양식에 묶어둘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흑자는 그를 음악계의 피카소라고 하여 피카소의 반인상주의 정신과 그의 음악을 같은 맥락으로 보았으며, 그의 <파라드>란 전위발레 음악은 아예 큐비즘이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그의 다양성은 그의 영향을 받은 작곡가들의 분류가 각각 듸뷔시와 라벨 및 미요와 플랭, 나아가서 현대 전위음악 작곡가인 존 케이지에 이르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이 무엇보다도 찬탄해 마지않던 공통된 요소는 그의 음악에 나타나는 명료함, 절제, 순수함 및 장식이 없는 비수사학적인 특성이었다. 오늘날까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티는 어쨌든 간에 음악 미학에서도 특이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사티 음악이 주는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한 어떤 이의 비유를 들어 이 글을 마치기로 하자.
“사티의 음악이 주는 신의 숨 같은 맛에 길들여지면 쇼팽의 샴페인이나 브람스의 독한 맥주 맛이 더 이상 성에 안 찰 수도 있다.
30년 뒤에야 배달된 러브레터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에릭 사티가 예술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죽은 지 38년 만이다. 에릭 사티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 것은 가난과 독신이었다. 그는 평생 ‘무슈 르 포브르’ 즉, ‘가난뱅이 씨’라고 불릴 만큼 가난했으며 단 한 번의 연애를 끝으로 독신으로 살았다. 묻혀 있던 그를 다시 발견한 것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이었다.
1963년, 루이 말 감독은 자신의 영화 <도깨비불>의 영화음악으로 사티의 피아노 곡을 사용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아름다운 이 음악은 대체 누가 작곡한 거지? 뭐? 사티라고? 도대체 그가 누구야?’ 하며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마치 두껍고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올라가듯 툭툭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짐노페디>나 <그노시엔>. 큰 소리로 외치는 게 아니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피아노 소리. 에릭 사티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파리 몽마르트르로 이사 온 시골 청년 사티는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곤궁한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술집에서 처음 쉬잔 발라동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 당시 이미 유명했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사티는 절대로 겁먹을 것 같지 않은 야생의 냄새를 풍기는 그녀를 보며 ‘섣불리 손댔다가는 깨물릴 것 같군’ 하는 생각을 한다. 쉬잔 역시 로트레크의 어깨 너머로 사티를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만난 건 2년 뒤의 일이다.
그가 한평생 사랑했던 여자, 쉬잔 발라동.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르누아르, 퓌비 드 샤반의 모델이며 그들의 연인이기도 했던 쉬잔. 사티는 그녀를 사랑했다. 사티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 둘의 모습은 거울처럼 닮아 있었다.
사티가 몽마르트르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소년 위트릴로는 쉬잔이 열여덟 살 때 낳은 사생아다. 사티가 쉬잔과 사귈 때, 사티의 집 문 앞에다 사티가 좋아하던 떠돌이 개를 죽여 상자에 담아 놓아두었던 소년. 그러나 먼 훗날, 부자와 결혼을 앞둔 쉬잔을 두고 사티가 몽마르트르를 떠나려고 할 때 함께 가게 해 달라며 사티에게 매달렸던 소년. 그 소년이 훗날 ‘몽마르트르의 화가’라고 불렸던, 몽마르트르에서 살고 몽마르트르에서 죽은 화가 위트릴로이다.
그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지만 쉬잔은 평생 그를 냉대했다. 그러나 위트릴로에게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위트릴로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고 쉬잔은 사티를 사랑했고 사티는 일곱 살 때 죽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사티와 쉬잔이 헤어진 건 어머니 때문이다. 르누아르의 모델을 하면서 그의 그림을 흉내내기 시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워 가던 쉬잔은 사티에게 모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들의 동거는 반년 동안 지속된다. 어느 날 쉬잔과 사랑을 나누고 있던 사티는 맞은편 거울 속에서 벌거벗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된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벌거벗은 쉬잔이 “당신, 갑자기 왜 그래요?”라며 묻는다. 그날 이후로 사티는 쉬잔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사티의 초상화를 완성한 쉬잔이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걸 그릴 때 내 몸과 마음이 참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어쩐지 이건 내가 그린 게 아니라, 내 몸 속에 들어온 당신 어머니가 그린 것 같아요.”
헤어지고 두 달 뒤 사티는 쉬잔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소.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오.’ 그 뒤 사티는 애달프고 슬픈 음악들을 계속 작곡하였지만 한동안 압생트라는 독한 술에 빠져 살았다.
쉬잔은 그녀의 소망대로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로 성공했다. 사티는 59세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아르크에 있던 그의 방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 한 묶음이 발견되었다.
수신인은 모두 쉬잔 발라동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쉬잔과 그의 아들 위트릴로와 개 한 마리가 나란히 있는. 그리고 뒷면에는 ‘사랑스러운 쉬잔 발라동의 사진’이라는 사티의 고딕 필체가 남아 있는. 이 사진 속에 사티는 보이지 않는다. 사티가 죽은 뒤 이 사진을 건네받은 쉬잔이 개줄을 쥐고 있던 맨 왼쪽 사티의 모습을 도려낸 것이다. 30여 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배달된 사티의 편지를 받은, 61세의 유명인사 쉬잔은 이렇게 고백한다.
“솟아나는 추억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그 말줄임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숨겨진 의미 때문에 쉬잔은 사진 속 사티의 모습을 도려내 버렸던 것일까. 쉬잔을 떠올리며 작곡할 때, 사티는 생각했다. 쉬잔을 육체적으로는 소유할 수 없었지만 예술적으로는 가질 수 있다, 라고.
결국 쉬잔에 대한 사티의 예술적 소유는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티의 음악, 즉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연애. 사티가 쉬잔을 만난 건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였다.
글: 소설가 조경란
미니멀리즘 음악의 선구자 에릭 사티
Alfred Eric Leslie Satie
미니멀리즘과 큐비즘의 개념을 음악에 도입한 매우 독창적인 작곡가로 드뷔시, 라벨, 풀랑을 비롯한 20세기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에릭 사티는 1866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옹플뢰르에서 태어났다. 음악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웠으며, 13살 때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교수로부터 '형편없음. 앞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한 상태'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학교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1882년에 퇴학을 당했고, 그로부터 3년 후에 다시 학교에 들어갔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1886년, 마지못해 군에 입대한 사티는 몇 달 후 일부러 기관지염에 걸려 제대했다. 그 후 아버지 집에서 나와 집시들이 많이 사는 몽마르트르로 이사했다. 이때부터 생계를 위해 〈검은 고양이〉라는 이름의 카바레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1888년에 대표작 〈세 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édies)〉를 발표했으며, 1890년에는 드뷔시를 만나 음악의 혁명가로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1891년, 사티는 장미십자교단 운동의 개척자 조세핀 펠라당에 감명을 받아 이 교단의 신자가 되었다. 한때 이를 위해 〈별의 아들들(Le fils des étoiles)〉, 〈장미십자교단의 3개의 종소리(Sonneries de la Rose+Croix)〉, 〈천국의 영웅적인 문의 전주곡(Prélude de La Porte héroïque du ciel)〉을 작곡할 정도로 열성이었으나 나중에 교단 사람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교단에서 탈퇴했다. 그 후 그는 스스로 예수예술의 수도교회라는 교단을 창설해 이 교단의 유일한 신자가 되었으며, 직접 교구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1898년, 경제적으로 더 궁핍해진 사티는 방값이 싼 파리 남부 아르퀴유로 이사했다. 스스로 '미천한 우리의 여인'이라고 이름 붙인 초라한 집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이 무렵 그는 작곡가로서 기법적인 한계를 느꼈다. 보다 전문적이고 집중적인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1905년 댕디가 운영하는 스콜라 칸토룸에 들어갔다. 파리 음악원 때와는 달리 열심히 공부한 결과, 1908년에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1912년, 작곡가 라벨이 사티의 작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사티의 새로운 작품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젊은 작곡가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프랑스 6인조로 발전했다. 이들의 정신적 지원으로 사티는 음악적 신념을 고수할 수 있었다.
1915년에 시인 장 콕토를 만났다. 본래 은둔형 외톨이었던 사티는 장 콕토를 만나면서 다른 예술가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1917년, 사티는 장 콕토가 대본을 쓰고, 피카소가 무대 장치를 맡은 〈퍼레이드〉라는 발레극에 음악을 붙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평면적인 오케스트레이션과 기계적인 리듬, 기본적인 테마의 반복, 타이프라이터와 사이렌 소리 같은 잡음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이를 참지 못한 사티는 평론가에게 욕설이 든 편지를 보냈으며, 이 때문에 고소를 당해 8일 동안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평론가들의 반감에도 젊은 예술가들은 사티를 음악적인 스승으로 받들었다. 사티 역시 이들에게 자신의 정신을 물려받은 새로운 음악의 탄생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 그 후 젊은이들의 관심은 당시 음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스트라빈스키로 옮겨 갔다. 사티는 체념한 듯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왔다.
이렇게 좌절을 맛보며 사티는 누추하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누구의 방문도 허용하지 않고 혼자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지나친 음주로 인한 간경화로 1925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티의 음악은 과거에 대한 반항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당대를 풍미하던 낭만주의 음악은 물론, 바그너, 드뷔시, 인상주의에도 반기를 들었다. 그는 복잡하고 현학적인 음악, 아카데믹한 음악, 웅변적인 음악, 감정 과잉의 음악, 감각만을 앞세운 음악을 싫어했다. 그러면서 그가 추구한 단 하나의 이상은 바로 '단순함'이었다. 그는 음악 속에서 일체의 군더더기를 몰아내고 간결하고 명쾌함을 추구했다.
흔히 사티의 음악을 가구음악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흘려버리듯 듣는 음악을 의미한다. 카바레의 손님이 자신이 치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연주를 멈추고 "제 음악은 집중해서 듣는 음악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에서 그의 음악관을 알 수 있다.
사티의 음악은 짧고 간결하다. 전곡의 연주 시간이 3분 남짓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의 대표작인 〈세 개의 짐노페디〉도 길이가 짧다. 이 곡은 사티가 1888년 플로베르의 소설 《살랑보》를 읽고 작곡한 것이다. 짐노페디는 고대 그리스에서 행해졌던 의식 중 하나인데, 이 의식에서는 젊은이들이 나체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피아노 독주곡이지만 제1곡과 제3곡은 드뷔시에 의해, 제2곡은 리처드 존스에 의해 관현악곡으로 편곡되어 널리 연주된다. 사티는 각각의 곡에 템포와 분위기를 지정해 놓았는데, 제1곡은 느리고 비통하게, 제2곡은 느리고 슬프게, 제3곡은 느리고 장중하게 연주하도록 했다. 세 곡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음악적으로 볼 때 세 곡이 하나의 카테고리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리듬, 박자, 선율 진행, 형식, 분위기에서 서로 차이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왼손의 반주는 미묘한 화음을 느린 템포로 계속 반복하고, 오른손의 멜로디는 단선율을 느리게 연주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똑같은 리듬과 단순한 멜로디가 단조로운 인상을 주지만, 그 단순함 속에서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되는 곡이다.
사티는 '검은 고양이'라는 카바레와 '클루'라는 선술집의 피아니스트로 일하며 여기서 연주할 수 있는 가벼운 살롱음악이나 샹송을 많이 작곡했다. 오늘날 널리 불리고 있는 샹송 〈당신을 원해요(Je tu veux)〉도 이런 곡 중 하나이다.
당신을 원해요.
금빛 천사여, 도취된 열매여, 마력의 눈동자여,
나에게 그대 몸을 맡겨요.
당신을 원해요.
당신은 반드시 내 것이 될 거예요.
나의 여인이여, 어서 와서 내 고독을 봐 주세요.
우리는 최고의 행복을 맞을 거예요.
그런데 그 순간을 기다리기가 힘들군요.
멜로디 어디에서도 클래식 음악의 고상함이나 고급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으며, 누구나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가벼운 샹송이다.
사티의 작품 중에는 기발한 발상으로 주목받는 곡이 있다. 1893년에 발표한 〈짜증(Vexation)〉이라는 피아노곡이다. 이 곡의 악보는 한 페이지밖에 안 된다. 하지만 사티는 이것을 840번이나 반복하라고 악보에 써 놓았다. 이 지시에 따라 연주하면 전곡을 연주하는 데 대략 13시간 40분이 걸린다. 그래서인지 사티가 살아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전곡이 연주된 적이 없다.
사티는 음악을 통해 풍자와 해학을 즐기기도 했다. 그는 〈관료적인 소나티네〉, 〈차가운 소곡집〉, 〈엉성한 진짜 변주곡―개(犬)를 위하여〉, 〈배(梨) 모양을 한 세 개의 곡〉, 〈끝에서 두 번째 사상〉 등 작품에 기발한 제목을 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1913년에 작곡한 피아노곡 〈바싹 말라버린 태아(Embryons desseches)〉도 특이한 제목을 갖고 있다. 제1곡 〈해삼〉은 돌멩이나 바위 위에 붙어 고양이처럼 그르렁대는 해삼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사티는 생 말로에서 해삼의 모습을 관찰했는데, 이것을 암시하기 위해 생 말로의 노래 선율로 곡을 시작한다. 제2곡 〈갑각류〉는 쇼팽의 〈장송 행진곡〉을 패러디한 것이다. 하지만 사티는 악보에 이 곡을 슈베르트의 마주르카라고 써 놓았다. 빤한 사실을 살짝 왜곡함으로써 뜻밖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려는 것이다. 제3곡 〈게〉는 개펄 위를 빠르게 걸으며 능숙하게 사냥하는 게의 모습을 빠른 템포의 경쾌한 터치로 그렸다. 뒤로 갈수록 속도가 느려지다가 나중에 단호한 코다로 끝난다.
그 밖의 작품으로 〈그노시엔느〉, 〈가난한 자를 위한 미사〉, 〈까다로운 귀부인을 위한 세 개의 왈츠〉, 교향적 극음악 〈소크라테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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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에릭 사티 그노시엔느 : Olga Scheps|작성자 필유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