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진보적으로 산다는 것
사회자= 오늘 주어진 테마는 '진보란 무엇인가, 한국사회에서 진보적 의식을 갖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삶의 자세,소박한 인생관에서 정치적 시야까지 삶의 자양분이 되는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강연자가 누구인지는 다 아실 겁니다. 조용필이 오빠 부대를 이끈 이래 진보 진영의 홍빠(청중웃음) 스타 지식인들이 많습니다만 진보 지식인 중에 진정한 스타라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지금 홍세화 선생님은 조마조마하시면서 '저는 자꾸 버벅대요'그러시는데 (청중웃음) 우리가 도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뭘 궁금해 하는지 사전에 잠깐 얘기하면 좋겠는데요. 홍세화 선생께 어떤 얘기를 듣고 싶으십니까?
청중1= 반갑습니다. 저는 대학 새니기입니다. 대학에 오기 전에는 많은 기대를 갖게 되는데 막상 대학에 와서 보니까 이제까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면들이 참 많았습니다. 실망한 부분도 많았고요. 기대치에 못 미치는 부분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해봤지만 혼자서는 해결 안 되는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새내기 때 어떻게 대학 생활을 보내셨는지, 새내기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홍세화= 제 대학 생활은 워낙 독재 세력이 쿠데타 군사독재로 집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참 침울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헛함이랄까 그런 게 있었습니다. 고픈 사람이 뭔가 탐구하는 모습을 찾기 어려워 보이는데, 사회 상황이 바뀌기도 했지만 역시 과거에 비해서 사회 구성원들이 물질적 욕구에 스스로 복속하고 있는 면도 무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스스로 자신의 사회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긴장보다는 물질적 욕구에 일차적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국 대학생들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새내기 분들께 바라는 것은 두 가집니다. 우선 대학생으로서 이제 출발한다고 할 때 무지함에서 벗어나라는 것, 한국사회 구성원이자 대학생으로서 한국사회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혼자 힘으로 어럽다고 하면 동아리라든지 이런 것으로 같이 공부하고 활동하는 것을 1학년 때부터 시작했으면 합니다.
두번째는 첫 번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인데 한국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항체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프랑스 땅에서 23년을 보낸 뒤 돌아와서 물신이 이 사회를 얼마나 지배하고 있는가를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예를 들면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따위의 광고가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상황, 즉 사람이 부동산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부동산이 사람을 평가할 만큼 인간의 가치가 소유물에 의해 평가되고 압도되는 상황에서, 이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인간성의 항체를 갖추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노동에 의한 인간 소외뿐만 아니라 물신 지배에 의한 인간 소외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철학이 필요합니다.
사회자= 여러분 스스로 나는 보수적이다. 진보적이다. 한번 나눠봅시다. 아주 단순하게. 나는 보수적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 손들어주세요. 나는 진보적인 것 같다. 손 안 드는 분이 꽤 되는군요. 나는 극좌다.(청중웃음) 극좌 손 들어보세요. 안 잡아갑니다. 나는 극우다. (청중웃음) 한 분도 없다니요. 길에는 많던데. 그러니까 여기서 보자면 왼쪽이 조금 더 많고 오른쪽이 그래도 적잖게 있는데 입장 표명을 유보하는 분들이 더 다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국사회 속에서 어떤 방향성, 입장과 신념을 갖는다는 것은 어렵고 까다로운 과제라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홍세화 선생이 생각하는 진보, 진정한 진보의 의미가 뭔지 설명해주시면서 여러 가지 의문거리를 던져주실 겁니다. 강연에 이어서 여러분의 질의응답 활발하게 이어지길 기대하면서 문을 열겠습니다.
반공화주의자의 뿌리
진보라는 것을 결국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운동적 측면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진보라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바뀌는 만큼 담보된다고 봅니다.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바뀌는 만큼 진보하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한국사회는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의 반영입니다.
탄핵 사태를 비롯하여 지역주의 현상, 고문을 교사한 혐의가 있는 사람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 등 모든 정치 사회 현상들은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반영된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 사회 현상의 저변에 흐르는 것은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입니다.
그래서 결국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바뀌는 그만큼 사회는 진보하는 것인데, 그런 측면에서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의 화두를 꺼내서 얘기하지요. 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헌번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한국사회에서 이것이 얼마나, 어떻게 배반당해왔는지 따져보고 그것을 통하여 한국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자신의 존재의 요구조차 스스로 거부하는 의식화가 이루어져왔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당연히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입니다. 그런데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인 우리들은 과연 공화국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교육받기라고 했던가, 공화국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단순히 하나의 지배 형태, 왕 대신 대통령을 뽑는다는 것에 머물러 있을 만큼, 공화국에 대하여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공화국은 영어로는 리퍼블릭(republic)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공"개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공교육, 의료의 공공성, 토지의 공개념에서의 '공'도 모두 퍼블릭 개념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나라의 정체성을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했으면서도, 또 영어로는 아예 '민주'를 생략하고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라고 리퍼블릭을 주장하면서도,가장 중요한 핵심 요체인 퍼블릭 개념이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점에서 사회 구성원들에게서 조차 민주공화국 이념은 철저히 배반당해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것은 수구 세력의 헤게모니와 관련지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민주공화국임에도 그와 같은 정체성에 대하여 공유하고 있는 긍정적 가치도 없고, 그 출발점인 공개념도 제대로 서 있지 않습니다. 예컨대 공교육을 제대로 하자, 또는 토지 공개념을 제대로 세우자고 했을 때 바로 "빨갱이다" "좌파적 발상이다" "사회주의적 발상이다" 말하는 것 자체가 그만큼 공화국으로서의 공개념이 정립되지 못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수구 세력들이 반세기 동안 헤게모니를 쥐어오면서 나타난 결과이고, 그래서 거기에서 헤어나오는 것이 중요한 진보의 과제가 됩니다.
그러면 수구 세력이 어떻게 반세기 동안 헤게모니를 쥐어올 수 있었고 그것은 또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는지 따져봐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지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일제 부역 세력들, 흔히 친일파라고 부르는 세력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경우는 나치 부역 세력을 철저히 정리했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제 부역 세력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일제 부역 세력이 분단 이후에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정리되지 못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경영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일제 부역 세력은 자기 일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하여 민족을 배반한 사람들입니다.자신의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해 민족을 배반했던 세력이 민주공화국을 지배했습니다. 민주공화국이라고 허울 좋게 이름을 붙이고 그 민주공화국의 공적 부분을 온통 틀어쥐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 국방,경찰, 법조, 교육, 언론 등 나라의 모든 공적 부분을 틀어쥐게 된 상황에서 허울 좋게 민주공화국을 내세웠지만 그 출발점인 공익성, 공공성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분단을 이용해서 민족과 보수를 참칭하게 됩니다.지금까지 그 문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탄핵 정국 역시 이와 관련된 상징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국회 법사위를 대표해서 헌법재판소에 탄핵 의결서를 전달한 두 의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을 극력 반대하면서 끝내 누더기로 만든 장본인이고, 또 한 사람은 바로 유신 헌법을 기초한 의원으로서 이른바 초원복집사건의 장본인입니다.
일제 부역에 뿌리를 둔 그리고 군사독재로 이어진 세력들이 패권적 지역주의와 결합하여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민족과 보수를 참칭했지만 실은 철저히 사적 이익에만 충실한 집단이었습니다. 민족적 정통성이 없으니까 미국의 힘에 절대적으로 의존했고, 분단이 고착되기를 바라면 당연히 남북 사이에 긴장이 완화되는 것을 가로막아왔습니다.
분단을 이용해서 냉전 의식을 사회 구성원들에게 집어넣고 그것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지역주의를 강고하게 결합하여 사적 이익을 계속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과정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개혁의 과제일 뿐 아니라 진보의 일차적 과제입니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
민족적 정통성도 없는 수구세력이 반세기 동안 지배해올 수 있었던 것은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전일적인 의식화가 있기 때문입니다.사회 구성원들이 그들, 수구 세력에게 스스로 복속하도록 하는 의식화를 말합니다. 흔히 운동권에서 의식화라는 말을 하지요. 국가 권력을 장악한 그 세력들이, 그래서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온통 틀어쥔 그들이 우리가 말하는 의식화와는 정반대 방향의 의식화를 전일적, 체계적으로 행해왔던 것입니다. 가령 저는 국가주의 교육을 통하여 국민학교 시절부터 반공 교육, 친미 사대 의식화 교육을 철두철미하게 받았습니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신 분들, 한국땅에 태어나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특수한 임무를 띠고 태어나신 분들이 여기에도 계실 겁니다.(청중웃음) 아주 어려서부터 전일적이며 체계적인 국가주의 교육에 의한 의식화가 있었고 대중매체를 틀어쥔 수구세력의 끊임없는 헤게모니가 계속 작동되어오면서 결국은 사회 구성원들이 제 돈 들여가면서 교육과정을 통해 자기를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 진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사회에서 무상교육, 무상의료는 언제쯤 실현될 수 있을까? 저는 빠르면 8년,느리면 12년 후에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 담긴 전망을 해봅니다. 마르크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존재와 의식의 관계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의식을 갖는가에 대한 출발점은 그 존재 자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데카르트의 선언을 알고 있습니다."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모든 존재는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은 의식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는 정치,사회의식이 있습니다. 그 의식의 기본 출발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과연 국가여야 하는가, 아니면 존재 자체여야 하는가, 한국은 철저히 국가 중심이었습니다. 국가 중심에 의한 의식 형성과 끊임없는 세뇌, 그로 인해 자기 존재가 실종되어버리는, 결국에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의식화가 일어났다는 거지요.
진보운동이나 사회운동에 관계된 분들은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한국에 1,400만 노동자가 있다고, 400만 농민이 있다고, 400만 도시빈민이 있다고, 그들은 어제보다 오늘,오늘보다 내일이 더 낫길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사회 변화의 주체입니다. 그러면 왜 1,400만 노동자가 있다, 400만의 농민이 있다, 그렇게 말하는가, 그에 상응하는 의식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가 노동자라면 노동자의 일상, 노동자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당연히 노동자의 의식을 가져야 되는 겁입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1,400만 노동자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노동자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은 극소수입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가 왜 한국사회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을까요?
앞서 무상교육,무상의료를 말했습니다만, 유럽에서 무상교육 같은 것은 오히려 민족주의 우파.보수 세력이 마련해놓은 것입니다. 국방도 중요하지만 경제력이 받쳐주면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바로 시행하자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의 주장이었습니다.
지금 한국의 교육은 과잉 상태입니다. 물적 토대가 부족해서 무상교육을 실현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의료도 굴절된 형태로 과잉되어 있습니다.우리의 경제력은 무상교육,무상의료를 가능하게 할 만한 수준에 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을 못하는 건 순전히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 때문입니다. 집안에 병자가 생기면 당연히 병 걱정부터 해야 하는데 그에 앞서 돈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중에도 많이 계실 겁니다.그 존재들은 무상교육에 비상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 교육비 때문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은 무상교육에 비상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의 요구인 무상의료, 무상교육를 정치적 으로 선택해 마땅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누가 파놓은 함정입니까? 누가 해놓은 의식화의 결과입니까? 이런 점을 한번 짚어보자는 것입니다.
한국사회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갖고 있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언제 그런 의식을 갖게 됐을까요. 어느 시점에 그때까지 갖고 있었던 의식이 뒤집히게 되었을 겁니다. 어떤 특별한 기회가 있어서, 전일적 국가주의 교육과 대중매체에 의해 형성된 의식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것을 반전시킨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늘날 진보의 화두 중에서 중요한 것은 의식화가 아니라 "탈의식화 입니다" 수구세력이 장악해온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로 인해 형성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에 대한 탈의식화 과정이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생존의 덫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발점이 거기 있습니다. 자유인들, 생존의 덫에 걸리지 않고 자아를 실현하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소외노동이 아닌 즐거이 할 수 있는 노동을 통하여 생존이 담보되는 자유인들의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저는 궁극적으로 진보의 몫이라고 봅니다.
그 출발점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민족적 정체성은 말할 것도 없고 계급적 정체성에 대해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탈의식화 문제를 제기해보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한국사회는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의 반영입니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우선 민주공화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통하여 자유나 평등, 인권이나 연대와 같은 긍정적 가치를 공유하도록 하는 것, 또 잘못된 의식화에 대한 탈의식화를 통하여 자기 존재에 상응하는 민족적 정체성과 계급적 정체성을 갖도록 하는 것도 진보의 몫입니다.
진보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쉬운 길이라면 누구나 갔을 것이고 진보라는 말 자체에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진보는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스피노자도 지적했듯이 사람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일일지언정 한번 형성된 의식은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그것을 바꾸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바뀌는 그만큼 진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보는 그야말로 느린 걸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역사가 지향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떳떳하고 묵묵하게 걸어가는 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보가 가는 길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 것이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사회자= 간단히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중에 수구를 다르게 표현할 때 극우라고 표현하는 게 맞습니까?
홍세화= 이데올로기적 지향으로 보면 극우하고 밀접하게 만나지요.
사회자= 그 다음에 진보하고 개혁이라는 용어의 혼란 문제인데요. 개혁은 좌파의 개혁도 있고 우파의 개혁도 있는데 진보라고 하면 다분히 사회주의적 이상, 정책과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움직임과 연관이 있다고 봐도 될까요?
홍세화= 그렇습니다. 한국사회라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 결국은 진보냐, 자유주의 보수 세력의 개혁이냐 하는 문제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느냐, 수용하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자유주의 보수 세력이나 진정한 보수 세력, 예를 들어 김구 선생 같은 분은 진정한 보수주의자고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 흐름이 수구 세력에 의해 거세되면서 우리가 지금 이런 상황에 와 있는 것이지요. 진정한 보수 세력과 수구 세력을 구분하는 아주 좋은 리트머스 시험지는 국가보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수구세력, 보수 세력, 진보세력을 통속적으로 구분하는 말이 있습니다. 수구는 어제가 좋았던 세력이고 보수는 오늘이 좋은 세력이며, 진보는 내일이 좋은 세력입니다. 탄핵을 주도 세력은 어제가 좋았던 수구세력이고, 열린우리당은 오늘이 좋은 보수 세력이며, 민주노동당은 내일이 좋은 진보세력이지요.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 보수와 수구 사이에는 국가보안법이 가로놓여 있다고, 거칠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자= 리버럴과 보수주의를 우리 사회에서 구별할 수 있을까요?
홍세화= 리버럴이라는 건 자유주의인데 그걸 가를 수는 있겠지요. 수구 세력이 끊임없이 자기가 보수라는 식으로 말해왔기 때문에 그것과 구분하기 위해서 자유주의 보수 세력이라고 말하면 좀더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회자= 논의의 필요상 개념의 문제, 그것이 지시하는 바와 연관된 질문을 우선적으로 하고 이후에 논의를 조금씩 전개해 나가기로 하지요.
공화국의 의미
청중1= 민주공화국이라고 할때 민주는 이해하기 쉬운 편인데 공화국이라는 것은 모호하다 싶습니다. 좀더 명확하게 표현해주실 수 있을까요?
홍세화= 원래 공화국은 레스 푸불리카라는 라틴어에서 온 겁니다. 그리고 이 라틴어가 뜻하는 바는 '공적인 일'입니다. 그 공적인 일을 자유로운 시민들이 같이 해결하려는 것, 그게 출발점입니다. 더 정확히 공화국을 표현하자면,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익을 목표로 하는 사회로서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국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철저한 사익 추구집단, 사적 이익을 위해서 민족을 배반한 사람들이 공화국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기본적인 공공성,사회 공공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인식조차 이 사회에 자리 잡혀 있지못하다는 겁니다. '공적인 일'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는 공화국이라는 것을 밖에서 들여왔는데 전혀 그것이 자리 잡지 못하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끊임없는 질서의식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의 공화국 시민의식을 형성하지 못하게 했다는 점도 덧붙여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근대의 공화국은 잘 아시다시피 부르주아 혁명을 통하여 형성됩니다. 부르주아 혁명, 시민혁명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봉건사회 구체제를 강하게 유지시켰던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고, 지유와 평등 이념을 발전시킨 게 근대 시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육을 통해 자유와 평등보다는 안보나 질서를 강조합니다.결국 공화국이라는 틀속에서 우리가 보듬어야 할 가치들을 지키고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사회자= 공화국의 가치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숙고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공화국이라는 틀이 우리가 피 흘려서 쌓아올린 게 아니고 우리에게 던져진 것이기 때문 아닙니까? 이제 비로소 그와 관련된 것을 생각하는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질문을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이라는 허상
청중2= 자녀를 양육하는 중년 세대로 현실적 측면에서 다람쥐 쳇바퀴 같은 교육 시스템을 끝없이 맹종해야 되는 건지 탈피해야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사교육 비용을 충당하는 건 사실 정상적인 수입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교육문제에 있어 진보적인 시각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 있을까요? 생활인의 진보를 위해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회자= 질문에 공감이 가는 게 신분 질서를 재생산하는 장치 중에 아주 중요한 게 교육제도 아니껬습니까? 홍세화 선생님께서는 교육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홍세화= 참 심각합니다. 이렇게 우리 아이들을 학대할 수 있는지, 잠도 안 재우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게 뭘까요? 우리의 교육은 그런 엄청난 억압 과정을 통해서 능력도 없고 책임의식도 없는, 특권의식에 가득 찬 엘리트를 만들어냅니다. 이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할 수 없다고 봅니다. '내가 잘나서 경쟁에서 이겼다'는 특권의식,그리고 그동안 투자했던 사교육비에 대한 보상 심리, 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한국사회 엘리트들에게서는 사회적 책임의식이나 환원의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 점에서 무상교육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선 사회 상태를 부드럽게 만들어줍니다. 그 자체로 계층간 연대의 실현이며 세대간 연대의 실현인 무상교육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사회의 혜택을 받아 교육자본을 형성하도록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회적 책임의식과 환원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작용합니다.
우리 현실은 정반대지요. 개인이 사교육비까지 쳐들여야 하는 현실 속에서 교육자본을 통해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사회적 책임의식이나 환원의식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상교육과 함께 대학 서열화를 깨는 게 우리 교육의 급박한 과제하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대학 서열화를 깨는 게 과제라고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하는 얘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대학교수를 추첨으로 들어간다든지 하는 식으로 극단적인 평준화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사회가 요구하는 서열적 욕구, 사회적 자원의 배분 문제들에 대해 학교가 그 기능을 못하게 되면 다른 데서 그런 역활을 수행하게 되고 오히려 더 부정적인 상황으로 갈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대학의 서열화 폐지가 서열화에 대한 사회적 수요를 대체해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겁니다.
홍세화=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지 않아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일어납니다. 오히려 대학이 평준화되었을 때 공정한 경쟁이 가능합니다. 대학 입학 시점에 서열이 결정되고 서울대를 정점으로 몇 개 대학이 권력,부,지위를 독과점하는 것이 사회적 자원의 올바른 배분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들의 경쟁력은 국내 경쟁력이지 국제 경쟁력이 아닙니다.
대학의 경쟁력은 학문의 경쟁력인데, 외국 대학에서 학위를 받는 것을 당연시할 만큼 한국 대학의 학문 경쟁력은 없습니다. 공평성과 경쟁력을 위해서도 대학 평준화를 제기하는 것인데, 사립 대학이 너무 많은 현실을 고려하여 우선 국공립 대학만이라도 평준화하자는 과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독일이나 프랑스는 대학이 모두 국립이고 평준화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육이 서열화된 대학 때문에 왜곡되고 학생,학부모, 교사의 교육 3주체가 모두 고통을 받고 있다면 당연히 바꾸어야 합니다. 사회 구성원이 의지로 선택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교육을 통하여 모두 계층 상승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학부모들이 똑같이 '내 자식이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공부만 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국은 경제적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자식에게 교육자본까지 덤으로 대물림하는 구조로 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경제적 자본만 대물림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엄청난 사교육 등에 의하여 경제적 자본은 물론이고 교육자본까지 덤으로 물려주게 되기 때문에 빈익빈 부익부가 더 강화되는 상황에 와 있는 거지요.
사회 구성원들 중에 서민들은 모두 '나는 이렇게 살지만 내 자식만큼은 나처럼 살게 하지 않겠다'고 없는 돈에 엄청난 사교육비를 치르고 있습니다. 성공할 확률이 로또 복권에 당첨될 확률밖에 되지 않는데도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거기에 매진하고 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사회를 규정하는 틀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런 환상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에 계층간 소득 편차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겁니다. 왜 의사,변호사는 이렇게 소득이 높고 노동자는 낮은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지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내 자식은 교육을 통해 신분상승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계층화가 고착될 때 - 앞으로 더 그렇게 될 텐데 -노동자,농민,서민이 그런 잘못된 인식을 갖지 않고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이 자식을 위하는 길임을 알게 될 때 불평등 구조나 소득 편차에 대한 문제 제기와 싸움이 가능하겠지요. 그런 점에서도 서열화된 대학과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 교육은 한국사회 지배 구조에 아주 중요한 틀로 작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사회자= 진보적 가치,어떻게 하는 게 진보이고 왜 진보를 해야 되는지에 관련된 질문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건강한 보수의 의미
청중3= 사회 진보는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의 진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서 군사독재 시절에는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 층들은 사회 참여, 정치 이야기 하면 진부한 이야기를 한다고들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사회 개개인의 의식의 진보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두번째는 진정한 보수란 무엇인가 고민이 됩니다. 진정한 보수란 어떤 개념이고 진정한 보수 세력은 과연 있는가, 진정한 보수 세력으로 가기 위한 당을 열린 우리당이라고 한다면 그것과 민주노동당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요. 대학때 열심히 고민을 나누고 살았던 선배나 동기들을 만나서 술자리를 하게 되면 많이 싸워요. 열린우리당에 대해 역설하는 선배가 있는가 하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측에서 여기에 반박하고 이라크 파병이나 칠레 협정을 예로 들면서 싸우는데요. 혼란스럽기도 하고 그 둘의 관계에 따라서 사회적 변화,의식의 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두 세력은 같이 손을 잡고 가야 되는데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을 비난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그건 것들에 대한 선생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홍세화= 두 번째 질문에 먼저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열린우리당이 이번 탄핵 정국을 통하여 제가 기대해온 자유주의 보수정당으로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틀림없이 앞으로 국가보안법 반대와 같은 것이 충분히 의제화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 지지자나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이 꼭 알아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지금까지 일제 치하,분단,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인 정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다름의 관계를 항상 부정하는 관계에 익숙합니다.나하고 너하고 의견이 다르면 서로 극복해야 한다는 관계에 익숙한 것인데 다름의 관계는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경쟁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즉 수구 세력에 대해서는 같이 연합해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경쟁하는 관계, 진정한 보수 세력이 그런 토대 정도는 마련했어야 한다는 겁니다. 국가보안법 얘기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인데 그만큼 한국사회가 권위주의나 물리력,독재와 민주 - 반민주 구도 속에서 다른 관계를 서로 부정하는 게 습속화된 부분도 있다는 데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흔히 얘기하듯 합리적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지 극복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게 중요하고 이 부분은 앞으로 가시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 질문, 사회 참여도 하고 있지 않고 점점 탈정치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변화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운동이지요. 수구 세력, 정확히 말해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은 사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대단히 성실합니다. 이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마치 광신자들이 광신이어서 아주 열성적으로 보이듯이, 노름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밤을 새워서 합니다. (청중웃음) 왜냐하면 '인 마이 포켓'이거든요. 사익 추구 집단, 아주 성실해요.
제가 한겨레에 있습니다만 신문업계에 C일보라는 데가 있습니다. 아주 성실합니다. (청중웃음) 일사불란함을 보여주거든요.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성실해야 합니다.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 출발점 세가지가 있습니다. 조직, 학습, 선전이 그것입니다.사회를 바꾸려면 혼자서는 어려우니까 같은 생각을 갖거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조직하는 것이고, 나와 우리를 바꾸기 위해 학습하는 것이고, 이웃을 바꾸기 위해서 설득하고 선전하는 거지요. 달리 특별한 왕도가 있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의식 변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질문자의 질문에 녹아 있는 것 중 하나는 진보적 가치가 소중한 것 못지 않게 건강한 보수의 의미가 있지 않은가,거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홍세화= 물론이지요. 그래서 이번 탄핵 정국은 한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전기가 마련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수구와 보수가 결별하는, 수구와 뭉뚱그려져왔던 보수가 진정한 보수 세력의 제모습을 뚜렷이 보이게 되는 상황이고 그것은 가짜 보수들이 주장해왔던 자유와 민주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당 이름이 자유와 민주를 합친 당이 있습니다. (청중웃음)
그 당이 과연 한국의 자유와 민주를 위해서 뭘 해왔는가, 가꾸로 해왔거든요.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는 커녕 독재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유와 민주, 이것을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정립시킬 수 있는 보수 세력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입니다. 그런 면에서도 지금의 상황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적 삶의 가치
청중4=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진보의 매력이 무엇인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한 보수당 국회의원은 자기도 10년 전엔 진보였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어제의 진보가 내일의 진보일 수 있나 생각해봤습니다. 선생님은 프랑스에서 진보였습니까, 보수였습니까? 한국사회에서 복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이 모든 게 해결되고 나면 다음에는 뭘 위해서 사실 건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홍세화= 20대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또 40대가 되어서도 계속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사람도 바보라는 말이있습니다만 저는 우선 제 정서가 진보에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정서적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만약 프랑스 사회였다면 저는 사회주의자였겠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사민주의자로 만족합니다. 그람시가 말했듯이 소수가 혁명적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다수의 생각을 조금 바꾸는 것보다 혁명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21세기에 있어서 그의 말은 진리하고 봅니다. 한국사회의 현 단계가 사회구성원들이 존재의 정체성에 상응하지 않는 의식들을 걷어내야 하는 단계라고 할 때, 무상의료 무상교육 같은 것만이라도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이루어진다면 그것으로 저는 행복할 겁니다.
또 하나, 복지가 이루어진 다음에 또 뭐가 있겠느냐는 질문이 었었는데요. 구체적인 사회 모델을 그려놓고 거기로 향해 가는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합니다.그 이후에도 또 고통과 불평등은 계속 있을 겁니다. 지금의 사회 구성원들이 겪는 고통과 불평등을 덜어내기 위한 끊임없는 싸움이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선생님, 그 질문 속에는 우리 시대의 정서가 그대로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옛날에는 '진보가 뭐가 매력입니까' 하는 질문은 사실 나올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진보는 그 자체가 감동이었으니까요. 70~80년대 불의 앞에 자기를 던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용기 없고 부족해서 차마 못할지언정 그걸 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당위에 대해선 의심할 바가 없었지요.
가장 똑똑했던 사람, 멋있는 사람이 운동에 투신을 했지요. 누가 봐도 진보에 동참한다는 건 굉장히 근사하고 바라만 봐도 감동적인 일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건 옛날 이야기 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보자면 상대적 잉여로 인해서 많은 것이 채워지니까 가령 홍세화 선생님 같은 분,특별하고 지사적이고 선비같은 경우 아니면 좀 거친 사람들이 가는 길, 또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목소리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지요.
그게 생각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 물어봅니다. "왜 진보가 매력 있지요? 왜 하고싶어 하지요" 우리에게 정말 진보가 좋은 것이구나. 진보를 해야겠구나, 그쪽에 가고 싶다 이런 게 감각적으로 정서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시대 분위기라는 것을 많이 감안하셔야 될 겁니다
홍세화= 그렇게 된 건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사회문화적 소양을 고양시키기 위한 긴장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제 젊은 시절의 헛헛함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우선 사회구성원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과 대면하면서 자기의 인간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모색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선 대다수 경우 죽었습니다.
원인을 추정해보면 하나는 물론 물신입니다. 물신 지배.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하지요. 지금 한국사회는 곳간은 분명히 차 있는데 사회 상태는 더욱 험악하고 인심은 더 각박해져 있습니다. 물신이 지배하고 있는, 인간의 가치가 사회문화적 소양이나 교양,일관성이라든가 상식 등으로 평가되는 게 아니라 순전히 그가 가진 물질로 평가됩니다. 그런 만큼 인간으로서의 긴장은 당연히 사리지지요.
또 하나는 좀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도 보는데, 제가 대학 평준화를 강조하는 이유이기도합니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일생에 걸쳐서 딱 두번 학습 노동을 합니다. 대학 입학할 때까지. 그 다음엔 취직할 때까지, 그 외에는 대다수가 자신의 사회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공부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대학 입학과 취직할 때 순위와 승패가 결정되고, 이를 만회할 수 있는 게 고시니까 많은 사람들이 고시에 매달립니다. 자신을 성숙시키려는 모색이 죽어버린 이런 상황 때문에 결국은 진보에 대해서도 관심 자체가 없어지는 경향이 나오지 않나 생각합니다.
청중5= 저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닌 386세대입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분노했고 촛불시위도 참석했습니다. 제가 다니는 영어학원에서 만나는 20대 초반의 친구들한테 어번 탄핵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했는데 양쪽을 싸잡아 비난하더니 "나는 관심 없고 투표도 안 하겠다" 는 반응을 보여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 주변의 어린 후배들, 20대 초중반 여대생들과 얘기해보면 부모나 국가의 권위에서 자유로운 생각을 하면서도 정치에는 무관심합니다.
아까 새내기들에게 충고하실 때 많이 찾아다니라고 하셨는데, 그건 '너희들 너무 공부 안 한다'는 식으로, 개인적인 문제로만 치부하는 건 아닐까요? 결국은 교육의 문제가 아닌지, 어떻게 해야 탈정치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 묻고 싶습니다.
홍세화= 탈정치화나 정치 혐오라는 것도 정치의 한 모습입니다. 탈정치든 정치 혐오든 결국은 기존 정치를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반응을 보인는 20대들, 그것도 결국은 물신이 지배하기 때문에 나타난 모습이라고 봅니다. 물신에 대한 인간의 항체가 중요합니다."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는 광고에 의하면 사람이 부동산을 평가하는게 아니라 부동산에 의해 사람이 평가됩니다.
그런 광고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만큼 우리에게 인간성의 항체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프랑스에서는 그런 광고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법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그런 공격적 물신주의를 배격하는 것이지요. 대중매체나 교육이 인간의 가치를 부동산이나 물질적 가치로 평가하는 것에 대해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이 중요합니다. 물신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인문적 소양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더불어 교육은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을 길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우선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 가르치는게 너무나 당연한데 제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존재에 상응하는 의식이라는 것과 관련해서 저의 두 아이의 예를 말씀드리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제 아이들은 1979년, 제가 프랑스에 갔을 때 우리 나이로 여섯 살, 세 살이었습니다. 큰 아이는 가자마자 바로 프랑스 유치학교를 다녔고 둘 다 대학원까지 마치게 됐습니다. 그 사회에서는 극우파조차도 무상교육에 대해서 딴족을 걸지 않습니다. 극우파가 딴죽을 거는 건 '왜 외국인한테도 그런 혜택을 주느냐'하는 것입니다.
딸아이는 고 1 때 자기는 사민주의자라고 밝혔습니다. 그때 아들이 중 1 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던 녀석이 2년 후인 중 3 때 고 3인 누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한미디 했습니다. "누나는 개량주의자야" (청중웃음) 자기는 사회주의자다 이거지요. 그럴 만큼 교육과정 안에서, 가령 중학교 3학년 프랑스어 시간에 에밀졸라의 노동소설을 같이 읽고 토론한다든지 하면서 역사나 철학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후 한 10년이 지났는데 제 딸은 아직도 사민주의자입니다.
아들은 3년 동안 외도를 했는데, 무정부주의자였다가 (청중웃음) 다시 사회주의자가 됐습니다. 교육과정, 사회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덧붙여서 과연 앞서 말한 그 20대들이 탈의식화된 것일까, 여기 계신 분들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사회주의, 사민주의 논쟁이 한국사회에서 참 무의미한 것은 대다수는 사회주의와 사민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 구성원들 대다수는 사민주의든 사회주의든 '사'자 들어간 것은 우선 나쁘고, 한국사회에 안맞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탈의식화가 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도 교육은 근본적인 문제부터 출발하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청중6= 90여 일 있으면 대학에서 쫓겨나는 학생입니다. 졸업을 한다는 말입니다. (청중웃음) 이제 졸업하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하고 친구들은 하나 둘씩 고시원에 간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상태가 됐습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열심히 사는 게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면에서 진보의 열차에 동승하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의식화라고 느껴지지 않을까요?
또 한가지 질문을 드리자면 제가 만약에 아버지에게 사회주의자입니다. 하면 (청중웃음) 이렇게 웃고 마는 반응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사회주의자다 사민주의자다 이런 자기 규정이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진보다 보수다 규정하는 것도 애매하고 구체적인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선배들과 얘기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언어적인 문제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 아니지, 새롭게 언어적으로 규정해서 새로운 정체성을 줘야 하는 건 아니지 궁금합니다.
홍세화= 두 번째 질문부터 답하자면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가령 상당히 긍정적 가치나 세력이나 이것을 대변하기 위한 말을 새롭게 사용한다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 유효할 수 있을까. 그것이 우선 적절한가, 유효한가 하는 문제도 한번 짚어봐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오히려 질문하신 것에 관련해서, 앞서 제 아이의 경우 먼저 자신의 지향을 규정하고 나서 상대에 대해 얘기했습니다만 우리는 자기 규정은 하지 않으면서 상대에 대해 규정은 잘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반성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진보의 열차에 올라타는 것이 또 다른 의미에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 아니냐, 흥미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을 바라보는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의 문제가 녹아있는 것으로 보이네요. 저는 삶의 의미는 궁긍적으로 자아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 거예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자기가 속한 사회에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궁극적인 인간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일차적인 조건이 바로 생존이지요. 우리 사회가 해방된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은 자아를 실현하기에 앞서 우선 생존을 고민해야 하고 결국은 생존 때문에 자아 실현을 포기하게 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진보도 엄밀히 말해서 소외 노동을 벗어나 자아를 실현하면서 생존이 담보되는 자유인의 공동체를 지향한다고 할 때 저는 이 진보의 열차에 올라타는 것이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라고 보지 않습니다.
경쟁과 물신주의 대신 연대의식을
청중= 40대 중반의 직장인입니다. 예전에 군대를 갔다 오니까 1982년도엔가 대학에서 처음으로 성조기를 태우더라구요. 저희 고등학교 후배가 태웠는데 '저거 진짜 빨갱이구나'했지요. (청중웃음) 그렇게 사회주의가 뭔지 자본주의가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 전혀 개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자유경제주의는 능력대로 받는 체제이고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만 받는 것이 사회주의입니다.
여기에는 사유 재산을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도 포함되겠지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개념이 맞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지금 중국과 북한, 유럽 각국은 어떻게 볼 수 있을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것은 이제 제 의견입니다만 물신주의,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한 이유는 우리가 사회주의의 장점을 전혀 배우지 못해서가 아닐까하는데요, 자본주의의 장점인 작자생존 약육강식,경쟁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식으로 교육받기 때문에 나눔의 문화라든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홍세화=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같습니다. 말하는 사람마다 그 개념이 다르고 세분하면 백개가 넘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1848년 프랑스에서 2월혁명이 일어나면서 앙시앵 레짐(구체제)이 완전히 무너지는 과정에서 자유주의가 나오고 거기에 대한 안티테제로 사회주의가 제시됩니다. 당연히 자유주의가 자유를 중심으로 경쟁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면 사회주의는 평등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입니다.
프랑스나 독일이 어떤 사민주의적 내용을 갖고 있느냐, 또 그 사회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중국이나 북한을 사회주의로 규정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러한 문제들보다 한국사회의 모순과 불평등과 부패, 불의 등을 고쳐나가는 , 오늘의 현실을 바꾸는 것에 출발점을 두자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물신주의, 적자생존,약육강식과 경쟁에 관해 말씀하셨는데요. 우리의 교육과정은 경쟁의식으로 무장하게 만들지 연대의식 같은 것을 갖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유치학교 아이들이 3년 동안 학교를 다니는데 그동안 경쟁하는 공부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학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게 경쟁입니다. 가정을 떠나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회가 경쟁사회입니다.부모도 유치원에 가는 아이에게 점수를 강요합니다. 점수보다 몇 등이냐가 더 중요하지요.
이에 반해 프랑스는 아이들이 인성이 형성되는 시기에 같이 놀게 만드는 사회입니다. 결국은 개인주의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65퍼센트의 사회 구성원에게 자신의 소득의 일부를 떼어내서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비,교육비,주택보조비를 부담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말하는 연대의식이 있다는 것이지요. 프랑스에는 "사람은 어렸을 때 형성된다" 는 교육 금언이 있습니다. 교육과정에서 꼭 사회주의적 요소가 아니더라도 당연히 있어야 되는 것을 우리는 하고 있지 못합니다.
청중8= 선생님이 한국에 오실 때 제일 걱정하신 게 '한국의 습성에 자기 감정이 무뎌지지 않을까'였다는 내용을 어는 책자에서 본 것 같습니다. 아까 보수와 진보가 서로를 인정하고 경쟁해야 한다는 말씀과 연관해서 만약 선생님께서 프랑스에 계셨더라면 결코 경쟁 상대로 보시지 않았을 대상을 한국적인 상황에서 경쟁 상대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가 묻고 싶습니다.
경쟁 대상인 보수와 극복 대상인 수구를 구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국가보안법에 대한 입장을 들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제 생각엔 국가보안법도 중요하지만, 노동자에 대한 관점에 의해서 극복 대상인 수구와 경쟁 대상인 보수를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거든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프랑스에 계셨더러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을 한국에 와서 생활하다 보니까 양심의 칼날이 좀 무뎌지셔서 (청중웃음) 그런 판단을 하신 건 아닌지요.
홍세화= 노동자의 처지에서 볼 때에는 제가 말한 경쟁대상도 결국 극복대상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질문 같습니다.앞서 제가 만약 프랑스에 있었더라면 사회주의자겠지만 한국에 있기 때문에 사민주의자로 만족한다고 했는데 그 안에 지금 질문하신 것에 상응하는 답변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제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서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수구에 맞서는 반수구 연합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경쟁 대상을 극복 대상으로 삼는 것은 우리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수가 아무리 혁명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도 그것은 다수의 생각을 조금 바꾸는 것보다 혁명적이지 않다" 는 그람시의 말을 다시 인용하고 싶습니다.
청중9= 어떤 당에 소속되어 있진 않지만 노동자라는 의식은 갖고 있습니다.그런데 이번에도 지난 대선 때와 마찬가지로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당이 이번에도 그쪽으로 밀리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일하면서 주위 사람들 만나서 얘기해보면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 많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바라는 진보는 그쪽으로 휩쓸려서 10년 20년 아니라 50년 100년 뒤에도 그 가치를 찾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런 점이 고민돕니다.
홍세화= 이 문제는 조금 동태적으로 파악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몽준의 해프닝에 의해서 권영길 후보에게 갈 표가 어느 정도 노무현 후보에게 갔던 이런 전철이 이번 탄핵 정국에서 또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신 거 같은데 두 가지 측면에서 그때와 다릅니다. 대선이 아니고 총선이라는 점, 또 하나의 차이는 수구세력의 역화가 이번에는 아주 뚜렷하게 보이기 때문에 더 동태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무현 지지세력과 진보 세력이 정해져 있는 파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정해진 파이를 나눠 갖는 구조가 아니라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수구세력이 약화되면서 점차 가운데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어떵 결과를 얻을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만 전보 정치 세력이 국회에 진출하는 물꼬를 틀 것이라는 점에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꼬를 트기 어려웠지 일단 물꼬만 트이면 진보 정치 세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하리라고 봅니다. 10년,20년,정도만 기다리면 될 겁니다. 거것을 얼마나 더 당길 수 있는가. 그것이 우리의 과제이겠지요.
우리 사회의 지식인
청중10= 저는 04학번 새내기입니다. 간단한 질문 두 가지만 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고 둘째는 선생님의 책을 다 읽어봤는데, 선생님처럼 글을 잘 쓰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청중웃음)
사회자= 사회자로서는 오늘의 질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질문입니다.(청중웃음)
홍세화=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은, 한국에서는 찾기가 어려울 것 같고.......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역시 민주노동당의 사람들이 좋을 것 같고,,.....이 질문은 좀 피해 가고 싶네요. 그리고 제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어느 소설가 선배가 한 말 중에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글이 어디서 나오느냐, 엉덩이에서 나온다" 죽치고 앉아서 쓰고 또 쓰고 고쳐 쓰고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끊임없이 써보고 남에게 보여주어서 교정도 받고,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봤자 쓸데없고 죽치고 써보는 게 중요하다. 이 말엔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견문을 넓혀야겠지요. 폭넓은 독서와 성찰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저도 몇 가지 간단하게 질문을 드립니다. 정치인을 비롯한 몇몇 활동가들에 대한 견해를 여쭙겠습니다. 일단 유시민 의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청중웃음)
홍세화= 저 같은 사람은 한국 정치에 정서적으로 맞지 않아서 뛰어들 용기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글을 쓰던 분이 현실 정치판에 뛰어들어간 점에 대해서는 존경스럽게 생각합니다. (청중웃음)
사회자= 허무하게 들리네요..뭔가 하실 말씀을 닫아두고 하신 말씀 아닌가요?
홍세화= 정치적 지향은 저하고 다르니까 서로 상대를 인정하면서 경쟁하는 관계이고요. 그리고 정서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현실정치에 들어가서 바꿔보려는 점도 한국사회에서는 꼭 필요한 부분이지요. 그런 면에서 존경한다는데 뭐가 잘못입니까?
사회자= 알겠습니다. 몇 분만 더 덧붙여 질문 드리지요. 진중권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홍세화= 진중권씨는 저와 정치적 지향이 아주 가깝습니다. 그분은 그야말로 천재적 소질을갖고 있지요. 글쓰기 얘기가 나왔는데 글도 아주 잘 쓰고, 그에 비하면 저는 엉덩이의 힘을 정말 많이 빌립니다. 삶의 정서적인 측면이 저하고 다르지요. 진중권씨는 어떤 면에서 모난 반응들을 보이는데 천재성의 반영이라고 봅니다. 그것도 그분의 정서로 우리가 받아들여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에서 아주 필요한 존재이고요. 그 스타일 때문에 글을 매도해선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댓글 인쇄해가요. 다운로드 자료실에 있는 글들은 인쇄하기 참 부담스런 분량 ㄷㄷㄷ.
p.s 항상 수고 하시는 강철님, 감사합니다.
몇번을 읽어도 새로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