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독립운동가 소개 - 이중혁(李重赫)|전북출신 독립운동가 소개2007.09.27 00:52
전주보훈지청
이중혁(李重赫)
- 1899.12.11~1936.12. 1
- 애족장(90)
전북 전주(全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 전북 임실군(任實郡) 강진면(江津面) 갈담(葛潭)장터에서 엄길영(嚴吉永)과 함께 장날에 운집한 다수의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활동하다가 피체되었다. 1919년 4월 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았다. 1919년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35년 중국(中國) 북경(北京)에서 항일투쟁을 하던중 일본군에 피체되어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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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혁(李重赫) 1899년 강진면 방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나이로 3·1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면 민을 지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년형을 언도 받았다. 불행히도 선생의 후예를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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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님의 글입니다.
>우당 이회영선생님의 사위 되는 이중혁(독립운동가.이규선의 남편)씨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습니다. > > 저희 아버님은 이중혁선생(이회영선생님의 사위)의 아들로 4살 부터 고아가 되었습니다.4살때에 이회영선생님의 사위인 이중혁씨가 독립운동중 총살(당시나이 32세) 된 연락을 받게 되었고 일본순사들의 감시를 피해 가족들이 흩어져 고아로 살아 오셨습니다. > > 그후 아버님의 (이건기)형제는 모두 고아원으로 가고 지금까지 >부모 형제를 모두 찾지 못하던중 1990년에 전북임실에서 이중혁씨의 >독립운동기록을 발견하여 확인 하던중 이건기씨의 외할아버지가 >이회영선생임을 알게되었습니다. > >이건기씨는 독립후 이시영씨를 찾아 뵙고 "제가 이중혁씨의 아들입니다"하니 "니가 중혁의 아들이구나" 하셨다고 합니다. > > 저희가 알고 싶은 것은 이중혁씨의 독립운동의 뿌리와 집안의 뿌리를 알고 싶습니다. > > 아래 사항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이규선 (이회영선생의 딸) 의 사진이나 삶의 소식 후손들이 있다면 > 아버님(이건기씨)의 형제들이기에 찾고 싶습니다. >2. 가족들(이규동선생)의 이규선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3. 이규선씨의 동생 이규남씨에 대한 최근 소식 >4. 이분들이 이회영선생님의 가족에 빠진 이유도 알려 주시면 > 감사하겠습니다. >5. 서간도 시종기를 읽고 싶은데 모두 품절이 되었습니다. > 혹시 우당기념관에 가면 있는지요. > >추신 : 저의 아버지 (이건기)가 이종찬의원님과 수년전 잠시 면회중 > 이규선씨에 대한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 이규남씨도 확인을 해 주시면서 우리 이모님이라고 하셨다고 > 합니다. > ~~~~~~~~~~~
경기 파주(坡州) 사람이다. 변호사였던 그는 1920년 7월 경성(京城)에서 노농회(勞農會)를 조직하여 군자금 수합활동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지원하였다. 1921년 3월에 임시정부 재무총장(財務總長) 이시영(李始榮) 명의의 조선독립운동자금공채(朝鮮獨立運動資金公債) 12,200원분을 어대선(魚大善)으로부터 인수받아 동년 3월 경성의 윤 철(尹喆)에게 넘겨주었다. 그후 전국에 걸쳐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하다가 1921년 4월 21일 일경에 피체되어 1921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