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17 세계빈곤퇴치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Self-portrait' and 'The Green Vineyard', 1888
2011 - 고흐는 가고 없는데…자살? 타살? 설왕설래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인상파 화가인 빈센트 반고흐가 정말 자살을 한 것일까?
‘고흐의 자살’은 그동안 예술사학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통해왔지만, 사실은 타살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17일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 두 사람이 10년에 걸친 연구 끝에 “고흐는 자살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고 주장해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흐는 1890년 5월 프랑스 북부의 한 마을에서 파리 근교 오베르로 가는 도중 총상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졌다. 예술사학자들은 오랜 기간 정신병과 우울증을 앓아왔다는 점 등으로 미뤄, 고흐가 자신의 가슴에 스스로 총을 쏜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스티븐 나이페와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는 10년동안 20여명의 번역사 및 연구자들과 함께 그동안 번역되지 않았던 고흐의 편지 수천건 등을 조사해 “고흐는 자살한 게 아니라 불량 총을 갖고 놀던 2명의 소년들이 우발적으로 쏜 총에 맞아 사망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주장이 담긴 책을 내놨다.
나이페 등은 “고흐의 지인들은 고흐가 소년들이 우발적으로 쏜 총을 맞고서도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총을 쏜 것으로 하기로 결정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타살설’의 근거로, 고흐가 자살을 시도한 것이라면 총알의 각도가 비스듬하지 않고 직선으로 나타났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고흐가 정신병을 앓았기 때문에 총을 구하기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소 총기를 지녔다는 이야기도 찾아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먼길을 가던 고흐가 여정 중간에 굳이 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쏠 이유가 없다고 이들은 지적했다. 자살하려 했다면 아예 자신이 머물던 마을이나 목적지 둘 중 하나에서 총을 사용하는 게 더 낫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고흐는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한겨레 20111018 21:09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501372.html
2009 - 영화 '바바리안 프린세스' 하와이 상영
HIFF '바바리안 프린세스' 관심 속 상영
/하와이 KBFD TV 2009-10-19
http://www.localkorean.com/news/view.cfm?view_seq=4407&start=70&news_type=4
2008 - 안중근 국제학술대회 '동북아 평화와 안중근 의거 재조명' (17~18일)
10월 26일은 안중근(1879~1910)이 만주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지 99년이 되는 날이다. 이 사건은 동북아시아 근현대사에 '의거'로 또렷이 기록됐지만, 일찍이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던 안중근의 사상은 세월 속에 희미해졌다. 안중근ㆍ하얼빈학회(공동회장 이태진, 조동성 서울대 교수)와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은 사상사의 지평에서 안중근을 바라보는 국제학술회의 '동북아 평화와 안중근 의거 재조명'을 17, 18일 열었다. 안중근 사상이 현재의 동북아 정세에 던지는 함의 등이 다양한 각도로 조명됐다.■ 이토 저격과 보수적 평화주의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이토 저격과 안중근의 평화사상 사이의 연결 고리를 탐색한다. 일견 모순되는 둘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이 교수는 안중근이 옥중에서 탈고한 '동양평화론'을 파고든다. 이 저술은 안중근이 일본의 침략주의를 비판하면서, 뜻밖에도 그 변화 가능성을 천황제에서 찾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안중근은 러일전쟁 개전 시 천황이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보장한다'고 천명한 것에 긍정적이었다. 안중근은 이토 등 일본 수뇌부가 천황을 속이고 천황의 뜻을 왜곡, 침략정책을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했다.그의 또다른 옥중 서술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조 가운데 첫째가 1867년 이토가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를 시살한 것이라는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
따라서 침략정책을 기획ㆍ수행한 이토를 제거하는 것은 일본이 국제 정의의 편으로 돌아서게 하는 시발점이며, 진정한 동양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1차 행동이었다고 이 교수는 분석한다. "유교적 세계관과 윤리관이 천주교의 평화주의와 어울려 안중근 사상의 기저를 이뤘다"는 것이다.■ 낭만적 레지스탕스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는 안중근이 연해주 일대에서 지도한 의병운동의 궤적을 통해 그의 사상을 역추적한다.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은 계몽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서북 지역의 천주교 지도자들은 엄격한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했다. 따라서 안중근은 만주로 망명, 그곳에서 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도 여타 의병세력과 화합하지 못했다. 그는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지 않는다"는 '만국공법'의 정신에 따라 풀어주곤 했는데, 그것은 다른 의병 세력이 안중근을 멀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안중근은 독립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일제를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의병들의 일반적 분위기와 달리, 투쟁이 단기간에 성공을 거둘 수 없으며 계몽운동이 포함된 대일항전을 장기간 지속해야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병 연설에서도 침략의 최종 책임자인 천황을 규탄하지 않고 이토의 침략정책만을 비판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오 교수는 "생사가 달린 전투 중에도 다소 낭만적인 성향을 드러냈으며, 작전이나 포로 대우에서 종교적이며 평화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동북아 평화체제의 실천방략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한 세기가 지난 현재의 동북아 질서에도 강한 시사점을 던지는 안중근의 국제정세 인식에 주목한다. 비록 뒷날 후회하고 있지만, 안중근은 러일정쟁을 서양 열강과 동양의 대결이라는 '황백대결'로 보았다. 천주교 신자이던 안중근마저 기독교 열강에 반감을 품을 정도로 당시 계몽주의 계열 지식인들의 반 서방주의는 극심했다. 서 교수는 "안중근의 국제정세 인식은 동양주의, 인종주의에 입각해 있었고 서양 열강에 대한 반감은 일본에 대한 경계의식을 상쇄할 만큼 확실했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안중근의 이런 동양중심주의는 현재의 관점에서 놀랍도록 혁신적인 평화체제 구상으로 이어진다. 안중근은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여순항을 중국에 돌려준 뒤, 일본 중국 한국 3국이 공동 관리하는 평화체제를 제안한다. 이곳에서는 3국 공용 화폐를 쓰고 2개국 이상의 언어를 구상하는 청년들로 연합 군대를 편성하자는 것이다. 유럽연합의 탄생을 연상케 하는 구상을 했던 안중근은, 그러나 1907년 이후 정세 판단을 달리해 무장 투쟁에 나선다. 서 교수는 이것 또한 "국제여론의 반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토 암살을 채택한 탁월한 전략가적 면모"라고 논문을 맺었다.
/안중근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 08.10.23
http://www.danji12.com/bbs.html?Table=ins_
bbs9&mode=view&uid=83&page=6§ion=
2007 - 남북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서 시작
제16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17일부터 금강산에서 시작됐다.
오는 22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나눠 진행되는 이번 상봉행사에서는 17일부터 19일까지 1차로 북측 97명이 재남(在南) 가족 404명을 만나고 20일부터 22일까지는 남측 94명이 재북(在北) 가족 219명을 만난다.
행사는 첫째 날에 단체상봉과 만찬, 둘째 날 개별상봉과 공동중식 및 삼일포 참관, 마지막날 작별상봉 순으로 진행된다.
특히 이번 상봉행사 1회차 남북 단장을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장재언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장이 각각 맡음에 따라 회담을 통해 이달 초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이산가족 상봉확대와 영상편지 교환사업의 구체적 방안이 마련될지 여부가 주목된다.
한편 남북은 2000년 정상회담 이후 15차례에 걸쳐 이산가족 대면 상봉행사를 실시해 모두 3천188가족(1만5천381명)이 상봉을 했다.
연합뉴스 /한겨레 2007-10-17 오후 03:36:33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243655.html
- James Watson and Francis Crick
2007 - DNA구조 발견 왓슨 박사 인종차별 발언
‘흑인은 백인보다 지능 떨어진다’?
DNA구조 발견 왓슨 박사 인종차별 발언 ‘들썩’
1962년 디엔에이(DNA) 구조를 발견해 현대과학에 한 획을 그은 미국 제임스 왓슨(79) 박사가 ‘흑인들은 백인보다 지능이 떨어진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다.
그는 영국 〈선데이타임스〉와 지난 14일치 인터뷰에서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관적”이라며 “우리의 모든 사회 정책은 흑인들의 지능이 백인들과 똑같다는 사실에 기초해 수립되지만 모든 연구결과는 실제로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인간이 똑같다고 여기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구지만, “흑인 직원들을 다뤄 본 사람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며 인간 지능의 차이를 만드는 유전자가 10년만에 발견될 수 있다고 말했다. 왓슨은 다음주 나오는 자신의 책에서도 “진화 과정에서 지리적으로 갈라졌는데도 인간의 지능이 똑같이 진화했다고 기대할 어떤 명확한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번 인터뷰는 런던 과학박물관 강연 등을 위해 17일 왓슨이 영국을 방문하기 앞서 이뤄졌다.
왓슨은 암과 유전자 분야에서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1962년 노벨 의학상을 받았지만, 성과 인종에 대한 차별적 시각으로 수차례 논란을 일으켰다. 1990년에도 미국 정치학자 찰스 머레이가 지능은 유전적이며, 인종 간에 차이가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쳐 비슷한 논란이 불붙은 바 있다.
영국 하원 내무특별위원회 키스 배즈 위원장은 〈인디펜던트〉 17일치 인터뷰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룬 과학자가 이처럼 근거없고, 비과학적이며 극단적으로 모욕적인 발언을 하다니 유감”이라며 “과학계가 왓슨의 개인적 편견으로 보이는 주장을 단호히 거부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인종차별 반대 단체들은 왓슨의 발언이 인종 증오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지 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한겨레 2007-10-17 오후 07:40:57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243755.html
1997 - 체 게바라의 유해, 쿠바의 산타클라라 기념관에 안장
체 게바라/그의 정신이 그립다
지난 10월17일 쿠바 산타클라라 기념관에는 ‘20세기 최고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유해가 안장됐다. 그가 지난 67년 10월8일 볼리비아 전장에서 숨진 지 30년 만의 일이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세계의 모순을 치료하는 것이 급하다” 고 판단했던 아르헨티나 출신의 이 혁명가는 피델·라울 카스트로 형제와 함께 58년 쿠바혁명을 성공시켰다. 이어 그는 쿠바에서의 안정된 삶을 버 리고 콩고(현 콩고민주공화국)와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전선을 뛰어다니 다 39살 젊은 나이로 전장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 뒤 32년 동안 세상은 너무도 변했다.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주의국가는 이미 쿠바와 북한 등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또 그가 주창한 게릴라전도 이미 ‘변혁수단’으로서의 효용가치를 상당 부분 잃은 상태다.
그러나 30주기인 올해 게바라는 “이 세상엔 변하지 않는 그 무엇도 있다 ”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는 무엇보다 올 한해 전세계를 뜨겁게 달 궜던 ‘게바라 추모열기’에서 확인된다. 그 열기는 게바라의 혁명의 고 향 쿠바를 넘고 남미 대륙을 돌아 유럽과 미국 등지에까지 뜨겁게 달궜다 . 쿠바에서는 그에 대한 공식추모기간을 선포했고, 남미의 대학생들은 그 를 추모하는 대륙종단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또 그가 사살당한 볼리비아 는 그를 추모하는 행렬로 성지가 되기도 했다.
물론 이 뜨거운 열기는 ‘게바라의 혁명방식’을 되살리기 위한 것은 아 니었다. 다만 영웅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민중들은 ‘게바라의 혁 명정신’이 그리웠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죽은 지 30년이 된 게 바라가 우리들 곁에 가까이 다가왔던 것이다.
김보근 기자 /한겨레21 1998년01월01일 제 189호
http://www.hani.co.kr/hankr21/K_98110189/98110189_012.html
1992 - 세계빈곤퇴치의날
[오늘의 경제소사/ 10월 17일] <1526> 세계빈곤퇴치의날
1987년 10월17일, 프랑스 트로카데로 광장. 세계인권선언이 발표(1948년)된 장소이기에 '인권광장'으로도 불리는 이곳에 10만명의 시위군중이 모여들었다. 평생을 빈곤퇴치운동에 바친 조셉 레신스키 신부(당시 70세)가 주도한 '절대빈곤퇴치운동 기념비' 개막행사를 위해서다.빈곤과 폭력ㆍ기아의 희생자들을 기리고 빈곤탈출만큼 중요한 인권신장은 없다는 목소리를 드높인 지 5년 만인 1992년, 유엔은 매년 10월17일을 '세계 빈곤퇴치의 날'로 정하고 절대적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제적인 노력을 할 것을 결의했다. 국제적인 관심으로 빈곤은 줄어들고 있을까. 장담하기 어렵다.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하루 수입이 1달러 미만인 극빈인구가 11억5,000만명, 2달러 미만인 빈곤인구는 28억명에 이른다. 왜 가난할까.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답하기에는 현실이 가혹하다. 세계 인구의 80%가 하루 10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연명한다는 세계은행 통계를 들어 가난한 나라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구조적 빈곤론도 확산되고 있다.21세기 들어 빈곤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극빈계층이 국경을 넘어 '제4세계'라는 이름을 조직화하는 경향을 띠는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2030년까지 빈곤인구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노력에도 '절대빈곤'에 따른 저항과 계층 간 충돌을 방지한다는 목적이 깔려 있는 셈이다.
문제는 돈이다. 빈곤인구를 반감시키는 데 들어갈 390억달러를 각국별 경제력에 맞춰 분담할 경우 한국인은 1인당 23달러를 부담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실업과 양극화 심화로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빈곤해지는 우리네 형편이 더욱 걱정스럽다.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0/16 18:09:42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0/e2009101618094297490.htm
1983 -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레몽 아롱(Aron, Raymond) 사망
아롱 [Aron, Raymond-Claude-Ferdinand, 1905.3.14~1983.10.17]
프랑스 철학자 아롱 사망
프랑스의 대표적인 보수정치 평론가이자 철학자인 레이몽 아롱이 1983년 10월 17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78세였다. 아롱은 이날 명예훼손 사건과 관련, 증언을 마치고 법정을 나선뒤 곧바로 길거리에 쓰러져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뒀다.
언론인 사회학자 철학자 및 정치사상가로 프랑스 지성을 대표해온 아롱은 50여 년간 정치평론을 써오면서 어느 일당에도 치우치지 않았지만 보수적인 정치시각을 저변에 깔고 있었다.
아롱은 1905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1924년에는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아롱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La France Libre)`의 주필로 활동했고, 1945년에는 `현대(Les Temps modernes)`를 창간했고, 콩바(Combat)와 피가로(Le Figaro) 등의 잡지 논설 기자로 활동했다. 또한 1957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교수로 사회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아롱은 반마르크스주의자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관을 비판했고, 공업화 사회에 대해 연구했다. 주요저서는 `지식인들의 아편(L’Opium des intellectuels)이 있다. /조선
1980 -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로마 교황을 방문해 448년 만에 화해
지중해지방을 순방중인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1926~ ) 영국여왕이 1980년 10월 17일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920~2005)를 공식방문했다. 여왕은 교황과 40분간에 걸친 회담을 하고난 후 교황이 1982년 계획하고 있는 영국 방문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1534년 영국이 로마교회로부터 독립한 이래 가톨릭교도와 유혈전쟁이 반복되어 왔지만 최근들어 관계개선의 기운이 높아져 1960년에는 영국 국교회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바티간을 방문한 바 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의 최고권자가 로마교황을 공식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448년 만의 화해를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조선
1973 - 제1차 오일쇼크
사우디아라비아를 주축으로, 아랍산유국을 회원으로 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유대교 명절인 1973년 10월 17일 욤 키푸르를 기해 석유금수조치를 발표했다.OPEC는 회원국의 산유량을 23% 줄이고 미국 등 이스라엘 지원국가에는 원유를 대주지 않기로 했다. 미국행 원유선적이 완전히 금지됐고 이스라엘이 1967년 전쟁으로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 철수할 때까지 원유생산을 줄이고 판매제한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원유가도 배럴당 3달러로 올렸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원유가는 또 70%나 올랐다. 이듬해 1월 원유가는 드디어 배럴당 11.56달러로 뛰었다. 미국은 자동차 제한속도를 80Km 이하로 낮췄고 영국은 주3일 근무제를 실시했다.국내상황은 심각한 정치상황과 맞물려 더욱 암울했다. 학교는 조기방학에 들어갔고 전기료는 8%에서 40%까지 뛰었다. 이듬해 3월 OPEC는 석유금수조치를 해제했지만 상처는 심했다. 자원민족주의가 세계사 전면에 강력하게 부상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조선
1972 - 박정희 '10월 유신' 선포 박정희, ‘10.17 대통령특별선언’ 발표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오후 7시를 기해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라디오 중계를 통해 4개 비상조치를 선포하는 ‘10.17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10월 유신(維新)’을 선포한 것이다.
이에 따라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활동이 중지됐으며, 헌법의 일부 효력이 정지되고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됐다. 11월 21일 국민투표가 실시됐으나, 정부가 유신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지도계몽반을 편성해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인 결과, 헌법개정안은 91.9%의 투표율과 91.5%의 높은 찬성률로 통과됐다. 총유권자 84%가 찬성한 수치였다. 이렇게 확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11월 2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과 그 시행령을 공포하고 이어 12월 15일 2,359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 23일 대의원들의 투표를 통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제8대 대통령으로 다시 뽑았고, 박대통령은 12월 27일 제4공화국 첫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조선
[책갈피 속의 오늘]1972년 ‘10월 유신’ 선포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군홧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지금은 겨울인가/한밤중인가.’ (양성우의 시 ‘겨울공화국’ 중 일부)시인 양성우는 장기 집권 체제에 들어간 1970년대의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겨울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국 근대화’라는 구호 앞에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사실상 박탈당했던 어둡고 암울했던 시기, 그것은 모든 것이 움츠러드는 겨울일 수밖에 없었다.‘겨울공화국’은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박 대통령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른바 ‘10월 유신(維新)’ 체제의 등장이었다.박 대통령은 이날 TV와 라디오를 통해 10분간 발표한 특별 선언에서 “나 개인은 조국 통일과 민족 중흥의 제단 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 지 오래”라며 ‘평화 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구현하기 위해’ 국회 해산과 정당 활동 중지, 헌법 기능의 비상국무회의 수행 등 비상조치를 단행했다.그는 특히 민족(21번), 통일(19번), 평화(18번), 조국(14번) 등의 단어를 동원해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안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겠다”고까지 하면서 국민에게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을 강요했다.그러나 중앙청과 국회의사당 앞에 탱크가 등장하고 언론은 사전검열을 받고 대학은 문을 닫은 ‘10월 유신’의 핵심은 대통령 종신제였다. 국민이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이 간접 선출되고 그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지명하는 유신체제는 대의기관인 국회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리고 대통령의 손에는 ‘긴급조치’라는 칼이 주어졌다. 즉 절대독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무리한 욕망은 반드시 파멸을 불러오는 법. 1973년 유신헌법 개정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시작된 민주세력의 반독재 투쟁은 1975년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1976년 민주구국선언, 1979년 부마(釜馬)항쟁 등을 불러왔다. 이런 투쟁은 결국 권력 내부의 분열로 귀결돼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시해(弑害)되면서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다.독재체제는 항상 영원할 것 같아 보이지만 종언(終焉)은 한순간에 찾아온다는 역사의 진리는 유신체제에도 예외는 아니었던 셈이다.김동철 정치전문기자 eastphil@donga.com /동아일보 2005-10-17 10:1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3&oid=020&aid=0000319798
1969 - 박정희 대통령 3선 개헌안 국민투표
[역사속의 오늘] 3선개헌안 국민투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정부여당은 공화당 의원 108명을 비롯해 122명의 개헌지지선을 확보, 1969년 8월 개헌안을 정식 제출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3선 개헌에 동의한 의원의 의원직을 박탈하기 위하여 9월 7일 당을 해산하고 ‘신민회’라는 이름의 국회교섭단체로 등록했다. 9월 13일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에 회부되었고 야당의원들은 개헌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서 점거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9월 14일 새벽 2시쯤 여당계 의원 122명은 야당 의원들을 피해 국회 제3별관에 모여 기명투표방식으로 참석의원 전원 찬성으로 개헌안을 변칙통과시켰다. 밖에는 기동경찰 1천200여명이 통행을 차단하고 있었다. 개헌안 주요 내용은 대통령의 3선 연임 허용,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결의 요건 강화, 국회의원의 행정부 장·차관 겸직 허용 등이다.
그 후 1969년 10월 17일 헌법개정안 국민투표가 실시, 총유권자의 77.1%가 참여해 65.1%의 찬성으로 개헌이 확정되었다. 이 개헌으로 박정희는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72년 유신체제 수립으로 장기집권이 가능했다.
정보관리부 성일권 /매일신문 2008년 10월 1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7523&yy=2008
1967 -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사망
푸이 [溥儀, 1906.2.7~1967.10.17]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 사망
일생에 세번이나 황제 자리에 올랐던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1967년 10월 17일, 파란 많은 61년의 생을 마쳤다.
1908년 두 살의 나이로 황제자리에 올라 신해혁명으로 재위 4년 만인 1912년 황제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개인의 비극으로만 끝난 일이 아니었다. 286년간 지켜온 사직(社稷)과 2000년 이상을 유지해온 황제 지배체제도 함께 무너져내린 천지개벽이었다. 1917년에 한 군벌의 쿠데타로 잠시 황제자리를 되찾았으나 ‘12일 천하’일 뿐이었다.
중국 침략을 노리는 일본에 ‘청조 부흥’의 환상에 젖어 있는 푸이야말로 최고의 홍보상품이었다. 1924년에 일본 조계를 찾아온 푸이에게 일본은 지극정성을 다했다. 1932년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워 꼭두각시 황제 자리를 선물하고 두 번이나 일본을 방문케 해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마련함으로써 행여라도 그의 환상이 깨지지 않도록 각별히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은 그에게도 파멸이었다. /조선
1956 - 영국 콜더홀 원자력발전소 개소(본격적인 원자력발전소 시대 개막)
본격적인 원자력발전소 시대가 열렸다. 영국은 1956년 10월 17일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최초로 콜다홀 원자력발전소를 개소했다. 소련이 이미 2년 전부터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고 있지만, 출력이 5천 킬로와트에 불과해 9만2천 킬로와트인 콜다홀원전에 비하면 실험적인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콜다홀 원전을 실용규모의 원자력발전소로는 `세계최초`라고 설명한다.
여왕은 "이 새로운 동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데 우리가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인류복지를 위한 우리의 가장 큰 공헌의 하나일 것이다"며 가동을 축하했다. 에너지 자원이 부족한 영국은 1955년에 10년간 총출력 200만 킬로와트의 원자력발전소 17기를 건설한다는 장기계획을 수립했으며, 콜다홀 원전은 그 첫 번째 결실이었다. /조선
[책갈피 속의 오늘]1956년 英세계 첫 원전 가동
본격적인 원자력 발전은 영국에서 시작됐다.
영국은 1956년 10월 17일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콜더홀(Calder Hall) 발전소 개소식을 가졌다.
옛 소련이 이보다 2년 앞서 원자력발전을 하고 있었지만 총출력이 5000kW에 불과해 9만2000kW인 콜더홀 원전에 비하면 ‘실험실 수준’에 불과했다. 콜더홀이 실질적인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새로운 동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인류 복지를 위한 우리의 가장 큰 공헌 중 하나일 것”이라는 말로 콜더홀 원전의 가동을 축하했다.
에너지 자원이 부족한 영국은 1955년에 10년간 총출력 200만 kW의 원자력발전소 17기를 건설한다는 장기 계획을 수립했는데, 콜더홀 원전은 바로 그 첫 번째 결실이었다.
뢴트겐이 1895년 X선을 발견하면서부터 인류는 물질의 구조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질량에너지 등가법칙을 규명해 물질에 대한 미시적 세계의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그 후 채드윅은 중성자 발견과 함께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1942년 페르미가 설계한 CP-1이라는 원자로에서 세계 최초로 우라늄 핵분열 연쇄반응 실험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많은 국가에서 원자력발전에 관한 연구개발이 시작됐고 1956년 영국 콜더홀 원자력발전소가 세계 최초로 상업운전을 시작한 것이다.
물을 끓여 만든 증기의 힘으로 터빈을 돌려 발전을 한다는 점에서는 화력발전이나 원자력발전은 똑같다. 하지만 화력발전은 석유나 석탄을 태운 열로 증기를 만들지만 원자력발전은 우라늄이 핵 분열할 때 나온 열로 증기를 만든다. 원전에서는 원자로가 화력발전의 보일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원자로는 우라늄이 핵 분열하여 에너지를 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보일러라고 할 수 있다. 원자로는 원자핵분열 연쇄반응이 서서히 일어나도록 하면서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를 안전하게 뽑아 쓸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부존자원이 부족한 한국도 1978년 원자력발전을 시작해 올해로 30년째를 맞았고 세계 6위의 ‘원자력 선진국’으로 성장했다.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 /동아일보 2008-10-17 03:03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81017/8645053/1
1954 - 네루 인도 총리, 호치민 방문 인도의 초대 총리 네루(Nehru, Jawaharlal, 1889~1964)가 북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했다.시민들은 네루 총리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며 네루 총리의 하노이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네루 총리는 북베트남 지도자 호치민(胡志明, 1890~1969)과 강대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맞설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YTN
- '한국에서의 학살' 109.5×209.5㎝, 1951, 파리 피카소미술관
1950 - 한국전쟁 중 '신천대학살' 일어남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반에 걸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암흑기였다. 죄 없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좌우익의 대립으로 무참히 죽어갔다. 미군에 의해 400여 명의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노근리 사건, 700여명의 거창 주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국방군에 의해 학살당한 거창 양민 사건, 인민군들이 우익을 처형한 인민재판 등. 전쟁 중 광기 어린 학살은 황해도 신천리에서 아비규환의 절정에 이른다.
1950년 10월 17일부터 같은 해 12월 7일까지 황해도 신천에서는 당시 군 인구의 약 4분의 1이었던 3만 5000여 명이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전 세계 언론은 신천대학살을 집중 보도하였고, 이것을 소재로 현대 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는 '조선에서의 대학살'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피카소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군인들의 총칼 앞에 벌거벗겨진 여인과 어린아이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섬뜩하게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은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그린 '게르니카'와 함께 대량 학살의 잔인성을 폭로하는 피카소의 대표적 반전 작품이 되었다. 피카소는 프랑스의 공산당원이었으며, 자신의 그림을 공산주의자의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레닌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스탈린의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북한은 신천대학살을 미군의 만행이라고 주장하며, 신천박물관을 세워서 반미의식을 고취시키는 장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신천대학살이 좌우익간의 충돌이 빚은 비극으로, 미군에 의한 만행이라고 단정할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좌우익간의 충돌이란 신천지역의 기독교인을 주축으로 구성된 반공청년단이 봉기하여 빨갱이와 그 가족들을 무참히 살상하였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작가 황석영은 그의 소설 <손님>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적대적 대립이 신천에서 상호학살의 계기가 되었다고 조명한다.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두 손님인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신천에서 그 손님의 역할을 바꿀 때마다 어떻게 학살을 정당화하였는가 냉정하게 밝히고 있다. ...
최상한 집사 schoi1@fau.edu 플로리다아틀란틱대학 행정학과 객원교수 글쓴이: 최상한 집사, 남부플로리다한인연합감리교회 FL 올린 날: 2007년 12월 5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http://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12524
(참고) 거장 '피카소'가 그린 한국전쟁의 참상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 솔직히 그림 볼 줄 모르는 '투데이'에게 피카소는 기괴하고 파격적인 그림과 난해한 메세지,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그림 가격을 연상케 할 뿐이다. 게다가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그림을 남겼다는 사실도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1951년 제작된 '한국에서의 학살'이 바로 그것. 왼쪽에는 발가벗겨 진채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총을 겨눈 무장군인들이 있는 단순한 구도로 그려진 이 그림은 스페인 내전을 테마로 한 저 유명한 '게르니카'와 함께 피로 얼룩진 전쟁과 그 파괴의 현장을 그림을 통해 항거한 피카소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한다.'한국에서의 학살'은 1950년 당시 전세계 여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천대학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신천대학살'이란 한국전이 한창이던 50년 10월17일부터 같은해 12월 7일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는 당시 군 인구의 약 4분의1인 3만5383명이 비극적인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이 비극은 그러나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지만, 전쟁 당사자였던 남북한과 미국 모두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어 그 학살범이 누구인지 아직 확정짓지 못한채 묻혀있다고 한다.
20세기 최고의 화가가 우리의 역사를 그렸다고 해 원초적인 호기심에서 찾아본 작품은 그러나 역사를 모르고, 나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았던 '투데이'의 모습을 반성케 한다./중앙일보 2004.02.20 10:38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98932
1950 - 터어키군, 부산항 도착
터키는 18세기 오토만 제국 당시부터 러시아의 팽창주의와 대결해 왔다. 유엔이 북한의 남침에 대한민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이후, 터키정부는 유엔군에 참전하여 1개 보병여단을 한국에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터키 육군 당국은 터키 육군 제 28보병사단 예하 제 241보병연대와 제 2기갑여단 예하 제 2포병대대를 기간으로 새로운 여단을 편성하였으며, 터키 제 8군단 예하 제 4군관구에서 공병, 수송, 의무, 병기, 통신 등의 지원부대를 차출, 여단에 추가하여 독립적인 작전이 가능하도록 하였다.타신 야즈시 Tahsin Yazici 장군 휘하의 5,090명의 군인들로 구성된 제 1터키여단은 1950년 9월 25-27일 이스켄데룬에서 출항하여 1950년 10월 17-19일 부산에 도착하였고, 일주일간 미국제 무기에 대한 교육을 받은 후 미 육군 제 25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터키군은 1950년 11월 26-30일 현재 북한에 위치한 군우리에서 적군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중공군의 전진을 막으며 지연전을 감행하다가, 12월 영등포 부근에서 철수를 중지하고, 미 육군 제 9군단 제 2보병사단에서 작전을 수행한 후, 다시 미 제25사단의 작전지휘 아래 들어갔다. 미국 정부는 군우리 전투에 대해서 터키여단에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하였다.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였던 1951년 1월 25-27일의, 서울에서 남쪽 약 40킬로미터 지점의 용인 김양장리 전투를 매우 중요한 승리로 이끌었으며, 김양장리 전투 이후 터키부대에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이 수여되었다. 또한, 미국도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하였다.
터키들여다보기 / 강용수 2002-02-06
http://www.turkeypa.com/bbs/read.cgi?board=looking&y_number=1
1945 - 이승만 첫 방송 연설,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정당 방송'의 활성화미군이 장악한 방송체제하에서도 라디오는 국내 정치인들의 대국민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활용되었다. 1945년 10월 17일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저녁 8시 30분 서울중앙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였다. 그 후에도 이승만은 11월 7일 소위 인민공화국의 주석 취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방송, 그리고 11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 방송등을 비롯해 방송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김구도 귀국 후 제일 먼저 11월 24일 전국민에 대한 인사를 중앙방송을 통해 내보냈다. 원로 방송인 노정팔은 그의 저서 ‘한국 방송과 50년’에서 김구의 '귀국 제일성'방송에 얽힌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담당 아나운서는 김구 선생을 어떻게 소개할것인가를 몹시 고민했다. 미 군정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임시정부 주석'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처럼 '김구씨'라고만 소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지도자‘ 김구 선생의 제일성, 국민에게 고하는 인사 말씀을 보내 드리겠습니다.'라고 소개했다. 누가 봐도 잘 소개한 것 이라고 생각 되나, 그 다음 날 미국 고문관은 이의를 제기했다. '왜 어제 김구씨 방송 때 그저 김구씨라고만 소개하지 않고 우리들의 지도자라고 했느냐? 지금 38선 이남을 통치하는 것은 미 군정뿐이니 어떤 정당이나 지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책임을 추궁했다."미군의 방송 통제와 관련된 또 하나의 사례를 들자면 1946년 7월에 일어난 우리나라 방송기자 제1호라 할 문제안의 파면 사건일 것이다. 문제안은 원래 아나운서였는데 해방 후 취재의 필요성을 느낀 터라 기자로 발령을 받아 활동을 하게 되었다. 문제안의 파면 사건에 대해 원로 방송인 유병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문제안이 방송국을 떠나게 된 이유는 자의가 아니라 미 군정청 공보처장 뉴먼대령에 의해서 파면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파면당하기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적어 보면, 신탁통치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을 때 문제안 기자는 돈암장 이승만, 경교장 김구 선생을 비롯한 한민단, 한독당, 근로인민당 및 공산당에 이르기까지 두루 돌아다니면서 인터뷰 기사를 만들어 1시간 방송할 뉴스 원고를 써 미군 방송 감독관의 검열을 요청했더니, 중요한 방송이니 공보처장의 검열을 받아야 된다고 원고를 들고 중앙청으로 간 후 그 원고는 어디 갔는지 오늘날까지 오리문중이 됐다. 문제안은 하루종일 고생을 하면서 만든 원고인데 왜 방송이 안 되느냐고 그 날도 다음 날도 검열을 독촉했으나 끝내 소식이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 검열관과 자주 충돌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미군 감독관이 방송개선 방안을 적어 내라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문제안 기자는 자신의 기사가 원문조차도 없어진 사건을 직설적으로 따졌다. 결국 문제안 기자는 현실 파악을 제대로 할줄 모르는 기자로 내몰려 1946년 7월 25일 아침 10시에 미 군정청 공보처장으로부터 직접 파면 통고를 받게 되었다."그런 통제에도 불구하고 '정당 방송'은 1947년 8월에 폐지될 때까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18일자의 4월분 방송통계를 보면 한 달 동안에 서울방송국에서 방송한 총 연설 횟수가 27회인데 그 가운데 '정당 방송 시간'에 이루어진 각 정당의 선전 방송 횟수는 12회에 달했다고 한다. 정당 방송 시간에는 좌, 우익 정당 모두 골고루 방송 시간을 배정 받았는데, 이와 관련 원로 방송인 유병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좌, 우익 정당의 정당 방송은 그 내용이 청취자의 귀를 자극하는 데 충분할 만큰 이색적인 것도 있었다. 때로는 방송국이 좌익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게 할 염려도 없지 않아 방송국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것을 예방하고자 묘안을 냈다. 즉, '정당 방송'이 끝날 즈음에 아나운서가 '지금 들으신 방송 내용은 연사의 의사이며, 본 방송국의 의사가 아닙니다.' 라는 멘트를 꼭 삽입했다. ... 한번은 이승만 박사가 정당 방송 시간에 방송을 했는데 방송 끝에 '지금 들으신 방송 내용은 연사의 의사이고 본 방송국의 의사가 아닙니다.'라는 아나운서 멘트를 내보나자 이승만 박사가 화를 내며 '항의문'을 방송국에 보낸 일이 있었다."1945년 12월 1일부터는 KBS가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2월 24일부터 시작된 VOA(미국의 소리 방송)조선어 방송을 아침과 저녁 2회에 걸쳐 중계하였다. 이후 KBS 아나운서들은 VOA파견 근무를 실시하였는데, KBS의 VOA중계는 1971년 3월 31까지 계속됐다.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 강준만) /이정환닷컴 2001/12/26(수) http://www.leejeonghwan.com/cgi-bin/read.cgi?board=reading&y_number=100
1920 - 미국의 영화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Clift, Montgomery) 출생
클리프트 [Clift, Montgomery,1920.10.17~1966.7.23]
미국의 영화배우.
1920년 10월 17일 미국 네브래스카(Nebraska)주 오마하(Omaha)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에드워드 몽고메리 클리프트(Edward Montgomery Clift)이다. "몬티"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오마하 국립은행의 부은행장이었던 아버지 윌리엄 브룩스 클리프트(William Brooks Clift)와 어머니 에설 포기(Ethel Fogg )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 로베르타와 형이 한 명 있었다. 13살 때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하여 10년간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1948년에 출연한 영화 데뷔작《추적 The search》(1948)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후에도 《젊은이의 양지 A place in the sun》(1951),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1953), 《뉘른베르크 재판 Judgement at nuremberg》(1961)으로 모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하였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출연한 《애정이 꽃피는 나무 Raintree country》는 4년만에 출연한 작품으로 출연중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끝까지 촬영을 마친 영화이다. 제임스 딘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에덴의 동쪽》의 출연을 거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술과 마약에 중독되는 등 건강에 문제가 많았으며 1966년 7월 23일 45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네이버
- Republic, 19181918 - 헝가리 독립 선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헝가리는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쪽에 서서 참전하였다. 대전 말기인 1918년 10월에는 좌익 계열의 카롤리가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분리와 공화제 실시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카롤리 정부는 휴전 처리에 실패하여 단명으로 끝나고, 그 대신 B.쿤을 중심으로 하는 헝가리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쿤 정부도 루마니아군의 침입으로 수개월 만에 붕괴되고 구(舊)제국의 해군제독인 M.호르티 등 우익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헝가리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0년 6월 트리아농 조약으로 옛 영토의 약 72%, 인구의 60% 이상, 경제력의 80% 이상을 상실하였는데, 이것은 실지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운동을 조장하였고 나아가서는 독일·이탈리아 중심 구도에 접근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naver
1915 -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Miller, Arthur) 출생
밀러 [Miller, Arthur, 1915.10.17~2005.2.10]
[역사속의 오늘] 극작가 아서 밀러 출생
‘세일즈맨의 죽음’. 원래 전원생활과 노동을 좋아했던 어느 세일즈맨의 마지막을 그려낸 작품이다. 1949년 발표해 초연한 이래 2년간 계속 상연됐다. 퓰리처상·연극비평가상·앙투아네트 페리상 등 3대상을 수상한 최초의 작품이 될 정도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 연극계 최대 걸작의 하나로 꼽힌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1915년 10월 17일 뉴욕 출생의 아서 밀러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 작품을 비롯해 밀러는 직업 일선에서 배운 보통 사람들의 삶을 작품 속에 많이 등장시켰다. 이는 대공황으로 집안이 몰락해 고교 졸업 후 접시 닦기·사환·운전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만 했던 자신의 삶과 연관이 있다.
미시간대 연극과도 고학으로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재학 시절 쓴 몇 편의 희곡으로 상을 받아 자신을 얻었다. 뉴욕시에서 라디오 드라마를 쓰는 틈틈이 희곡을 쓰던 중 ‘모두가 나의 아들’(1947)이 비평가와 관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05년 2월 10일 밀러가 타계하자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들은 11일 공연에 앞서 극장 앞의 전등을 껐다 켜면서 그를 추모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6년 10월 1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5745&yy=2006
1913 - 미국의 저널리스트 조지 포크(Polk, George) 출생
포크 [Polk, George, 1913.10.17~1948.5.]
George Polk (17 October 1913, Fort Worth, Texas - May 1948) was an American journalist for CBS who disappeared in Greece and was found dead a few days later on Sunday May 16, 1948, shot at point-blank range in the back of the head, and with hands and feet tied. Polk was covering the civil war in Greece between the right wing government and communists and had been critical of both sides. He alleged that a few officials in the Greek government had embezzled up to $250,000 in foreign aid (equivalent to $2.3 million in 2011 dollars) from the Truman Administration, a charge that was never proved.
He had been particularly outspoken in his criticism of the Truman government's unqualified support for the rightist authoritarian regime in Greece. In the late 1970s, the story emerged as to how AMAG (American Mission for Aid to Greece) authorities helped the Greek police frame two young communists for his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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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in months of his death, a group of American journalists instigated the George Polk Awards for outstanding radio or television journalism. These awards were modeled after the Pulitzer Prize which is awarded for outstanding print journalism in newspapers.
Criticism
http://en.wikipedia.org/wiki/George_Polk
George Polk Awards
The George Polk Awards in Journalism are a series of American journalism awards presented annually by Long Island University in New York in the United States.
History
The George Polk Awards were established in 1948 in memory of George Polk, a CBS correspondent who was killed covering the Greek Civil War. In 2009, John Darnton was named curator of the George Polk Awards.
Winners
http://en.wikipedia.org/wiki/George_Polk_Awards
1912 - 교황 요한 바오로 1세(Johannes Paulus I) 출생
요한 바오로 1세 [Joannes Paulus I, 1912.10.17~1978.9.28]
1912년 10월 17일에 이탈리아의 포르노 디 카날레(Forno di Canale)에 있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벨루노(Belluno)의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935년에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벨루노 교구 신학교에서 부학장을 맡아 도덕신학·교회법·교회미술 등을 지도하였다. 1948년에 벨루노의 주교 총대리가 되었다. 1958년에 교황 요한 23(Joannes XXIII)로부터 비토리오 베네토(Vittorio Veneto)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969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게 베네치아(Venezia)의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973년에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978년 8월 6일에 바오로 6세가 세상을 떠난 후, 콘클라베가 열린 지 이틀 만에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전임 교황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를 기념하여 요한 바오로 1세로 이름을 정하였다. 그는 외교나 학문보다는 목회를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온화한 이미지로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교황 최초로 대관식을 거부하였다. 또 세속 권력의 상징인 삼중관을 뉴욕 경매에 부쳐 수익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였다. 교황에 오른 지 33일 만인 1978년 9월 28일에 서거하였다. 사인은 심장발작이나 폐색전으로 추정되었다. /naver
1898 - 네덜란드의 작가 시몬 베스트데이크(Vestdijk, Simon) 출생
베스트데이크(페스트데이크) [Vestdijk, Simon, 1898.10.17~1971.3.23]
하를링겐 출생.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배우고, 처음에 시인으로 문단에 나왔으나, 곧 《이나 담만에게 돌아가다》(1931) 《비서 씨의 지옥여행》(1936) 《성 세바스찬》(1939) 《블라스밴드의 뜰》(1950) 등의 심리소설을 발표하였다. 또 에스파냐의 화가 그레코의 생애를 그린 《제5의 봉인(封印)》(1937)을 비롯하여, 《필라토의 만년(晩年)》(1938) 《아일랜드의 밤》(1946) 《배화교도(拜火敎徒)》(1947) 등의 역사소설도 썼으며, 그 밖에 시 ·문예평론 ·수필 등이 있다. /naver
- Poland, 5000 Zlotych (Banknote)
1849 - 폴란드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프레데리크 쇼팽(Chopin, Frédéric) 사망
쇼팽 [Chopin, Frédéric-François, 1810.3.1~1849.10.17]
폴란드의 작곡가 쇼팽 사망
폴란드가 낳은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 1849년 10월 17일 파리에서 39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음악에 있어서 새롭고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한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쇼팽은 1810년 폴란드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세 때 피아노 기초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12세 때 바르샤바 음악 학교 교장인 엘스너에게 정식으로 작곡 교육을 받았다. 엘스너는 쇼팽의 독창성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했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독보적인 인물이 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5세 때 그는 처녀작 '론도 작품 1'을 출판했고, 18세 때 베를린을 방문해 유럽 음악계를 견문했다. 다음해에는 유럽 음악의 중심지 빈으로 가서 독주회를 열었다.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파리에 정착, 음악가로서 지휘를 굳혀 갔다. 26세 때 리스트의 소개로 쇼팽은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진취적인 여류 소설가 조르쥬 상드를 만났다. 그때 이미 그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섬세하고 내성적인 기질의 쇼팽은 남장을 하고 엽연초를 피우는 6세 연상의 상드의 극진한 병간호를 받으며 작곡에 전념했다. 이 무렵, 쇼팽의 병세는 악화됐지만 주옥같은 명곡들이 많이 작곡됐다.쇼팽의 작품에는 가곡과 첼로소나타, 피아노삼중주곡 등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약 200곡에 이르는 피아노곡이다. 그리고 협주곡 2곡, 소나타 3곡 이외에 전주곡·연습곡·발라드·야상곡·즉흥곡·왈츠·폴로네즈·마주르카 등의 낭만파적인 소품이 압도적으로 많은 점이 특징이다. /조선
1817 - 이슬람계 교육자, 법률가, 작가 아마드 칸(Ahmad Khan, Syad) 출생
아마드 칸 [Ahmad Khan, Syad, 1817.10.17~1898.3.27]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의 알리가르에 있는 앵글로-모하메드동양대학을 설립했고, 19세기 후반에는 인도의 이슬람교 부흥운동의 배후세력을 앞장서서 지도하기도 했다. 우르두어로 저술된 그의 저작들로는 〈모하메드의 생애에 관한 에세이 Essays on the Life of Mohammed〉(1870)와 성서와 〈코란〉에 대한 해설서들이 있다. 1888년에는 인도성(印度星) 훈작사작위를 받았다.
사이이드의 가족은 진보적이었지만, 쇠약해가는 무굴 왕조의 높은 신임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는 무굴 왕조의 정부로부터 허가를 얻어 수도승이 되었다. 외조부는 무굴 왕조에서 전성기 때 2번이나 총리를 지냈으며, 또한 동인도회사에서 비중 있는 자리에 있었다. 사이이드의 형은 델리에 최초의 출판사를 설립했다. ... /브리태니커
1813 -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Büchner, Georg) 출생
뷔히너 [Büchner, Georg, 1813.10.17~1837.2.19]
독일의 극작가.
헤세다름슈타트 근교 고델라우 출생. 의사의 아들로 유물론자 L.뷔히너의 형이기도 하다. 슈트라스부르크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자유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기센대학에 들어가서부터 정치활동에 참가하였다. 비합법적인 팸플릿 《헤센의 급사(急使) Der Hessische Landbote》를 기초(起草)한 혐의로 당국에 쫓기게 되자, 망명비용의 장만을 위해 희곡 《당통의 죽음 Dantons Tod》을 집필(1835), 청년독일파의 작가 구츠코의 인정을 받았다.
그 후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단편 《렌츠 Lenz》, 희극 《레온체와 레나 Leonce und Lena》(1850, 사후 간행)를 쓰는 한편, 해부학연구를 계속하였으며, 그 업적으로 취리히대학의 강사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희곡은 20세기에 들어서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자연주의자와 표현주의자는 그를 선구자로 보았다.
냉철한 사실주의, 섬뜩한 비전과 리드미컬한 극작법(劇作法), 그로테스크 ·니힐리즘 ·부조리 ·소외 등, 모든 요소들을 내포한 그의 희곡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내려져 있으며, 그는 현대연극의 여러 과제를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먼저 다룬 극작가로 불린다. 패혈증(敗血症)으로 23세에 요절하였으며, 유작으로는 비극 《보이체크 Woyzeck》(1879, 사후 간행) 등이 있다. /네이버
1806 - 아이티의 황제 장 자크 데살린(Dessalines, Jean-Jacques) 사망
데살린 [Dessalines, Jean-Jacques, 1758~1806.10.17]
[역사 속의 인물] 노예출신 황제 데살린
'노예에서 황제가 된 사나이.' 소설 제목이 아니다. 중남미 카리브해 아이티(Haiti)의 장 자크 데살린(1758~1806)은 절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 같은 꿈을 이뤘다.
서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 부모에게서 태어나 30세 때까지 프랑스인 지주가 경영하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그후 해방된 흑인 지주에게 팔려가 3년간 일하면서 주인을 본따 '데살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791년 노예 반란에 참가하면서 그의 운명도 바뀐다. 반란군 지도자 루베르튀르 휘하에서 맹활약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루베르튀르가 프랑스군에게 붙잡히자 지도자가 돼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1804년 1월 1일 독립을 선언, 최초의 노예국가를 세웠다.
그해 10월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자크 1세로 칭했으나 치세는 2년에 불과했다. 자신의 노예 시절을 깡그리 잊은 듯 포악한 통치를 일삼았다. 사탕수수`커피농장을 국유화하고 국민들에게 가혹한 노동을 강요했다. 1806년 오늘, 반란군에게 살해되면서 왕정도 막을 내렸다. 아직도 아이티가 쿠데타,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데살린의 끝없는 권력욕에 기원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병선 논설위원 /매일신문 2009년 10월 1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5300&yy=2009
- Janos Hunyadi1448 - 코소보 전투 발발1448년 10월 17일 세르비아의 코소보에서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 사령관 야노슈 후냐디가 이끄는 헝가리-왈라키아 연합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사흘 간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발칸 반도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해방시키려던 그리스도교 십자군의 노력이 좌절되었다. 1444년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2세는 바르나에서 십자군에게 승리한 후 1446년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공격해 그리스인 통치자들을 굴복시켰다. 이어 알바니아를 공격했는데, 알바니아의 지도자 스칸더르베그는 교황군과 헝가리 왕실군의 도움을 받으며 대항했다. 1448년 헝가리의 후냐디가 스칸더르베그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십자군을 이끌고 도나우 강을 건넜으나 코소보 전투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를 정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도나우 국경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브리태니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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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출처: 꿈꾸는 다락방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모닝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