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태어나서 20번째 되는 생일날을 체크하다보면
우연하게 음력생일과 양력생일이 일치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대부분 이것이 그냥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기에도 주기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력 1986년 3월 17일(음력 2월 8일)에 태어났다면
그로부터 19년을 더하여 2005년 3월 17일 역시 음력도 2월 8일이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2024년 3월 17일 역시 음력 2월 8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원인이 윤달이 19년에 7번씩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추정된다.
음력과 양력의 역사적 고찰
지금부터 100년전 조선의 고종 임금이 서양의 태양력을 쓰되 기존의 시헌력(時憲曆)을 참용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태양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채용한 태양력인 서양력은 본래는 태양력이 아니었고, 반대로 그리스 태음력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지는 로마의 달력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1년이 10 개월이었으며, 총 304일로 이루어져 있었다. 즉 일년중 나머지 61일은 무시되었으며, 한겨울에는 달력의 날짜 자체가 없었다. 현재의 9월, 10월, 11월, 12월이 라틴어로 7,8,9,10을 뜻하는 이유도 처음에는 로마의 달력에 10개월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 로마의 통치자인 누마 폼필리우스가 달력의 첫 달에는 야누아리우스를, 마지막에는 페브루아리우스를 더하여 1년을 12개월로 만들었다. 즉 현재 서양력의 2월을 나타내는 페브루아리우스는 원래 12월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452년 페브루아리우스는 1월을 나타내는 야누아리우스와 3월을 나타내는 마르티우스 사이에 옮겨져 오늘날처럼 2월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로마력은 1년이 열두달, 355일로 이루어져 있는 태음력이었다. 따라서 태양력보다 약 10일이 짧았기 때문에 윤달을 이따금 끼워 넣어 계절과 보조를 맞추었다. 그러나 대신관들이 달력을 고칠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특정 집정관이나 공직자들의 임기를 마음대로 줄이거나 늘리는 등 달력을 제멋대로 고쳐서 달력의 혼란이 대단히 심했다.
마침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원정했을 때 알게 된 그곳의 간편한 역법을 바탕으로 기원전 46년 날짜 체계의 개혁을 단행했다. 이리하여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에 한번씩 윤달을 두는 율리우스력이라는 새로운 달력 체계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개력 과정에서 7월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8월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이 율리우스력은 서양에서 16세기 말까지 쓰였다. 16세기에 이르러 기독교의 명절인 부활절이 실제 성경의 기록과 차이가 나기 시작하는 등, 율리우스력과 실제 태양년 사이의 차이가 누적되어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런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1582년 그동안 사용해 오던 율리우스력을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레고리오력으로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달력의 날짜가 열흘씩 당겨지게 되었는데, 즉 1582년 10월 4일의 다음날은 1582년 10월 15일이 되게 되었다.
그레고리오력은 만들어진 후 이탈리아를 비롯한 가톨릭 국가에서는 바로 채택됐지만 영국 국교회를 따르는 영국을 위시한 그 밖의 나라에서는 수백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점차적으로 수용됐다. 러시아 정교를 믿는 러시아에서는 심지어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율리우스력을 사용했다. 이런 까닭에 그레고리오력에 의하면 1917년 11월에 일어난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이 역사 책에는 10월혁명으로 기록되게 되었던 것이다.
관료제 사회의 전통이 강했던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정부 내에 국립천문대가 설립되어 국가적 사업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했다. 천문현상은 천의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천자의 행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전문 관측 내용은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국가 기밀에 속했다. 중국의 천문학은 역법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발전했다. 또한 중국에서 달력을 선택하는 데에는 정치적인 면이 아주 강하게 작용해서 왕조가 바뀔 때마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개력을 단행했다. 중국 역사상 약 50번 정도 달력을 바꾸었는데, 그중에는 오히려 부정확한 달력으로 바꾼 적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왕조들은 천도에 부합되게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될 수 있으면 정확한 달력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전국시대에 이미 365 1/4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사분력(四分曆)이 있었으나, 중국의 본격적인 역법은 한무제가 공표한 태초력(太初曆)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태양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1 회귀년은 365 1/4일인 데 비해서 달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1 삭망월은 29 1/2일이었기 때문에 이를 조절하기 위해서 19년에 7번의 윤달을 끼워 넣는 태음-태양력 방식이 중국의 역대 역법의 기본을 이루게 되었다. 당나라 때에는 인도의 천문학이 중국에 유입되어 중국의 천문역법은 더욱 발달하게 되는데, 이순풍의 인덕력(麟德曆)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대에는 이슬람 문화와 접촉하면서 이슬람의 천문학도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이에 따라 이슬람 달력인 회회력(回回曆)과 중국 역사상 최고의 천문학자로 평가되는 곽수경의 수시력(授時曆)이 나타나게 된다. 수시력은 곽수경이 제작한 천문관측 기기를 바탕으로 정확한 측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1년을 365.2425일로 정하는 등 중국의 역대 역법 가운데 가장 정확한 달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천문 관측이 행해졌는데, 특히 조선시대에 와서는 천문 역법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1442년 세종 24년에 완성한 <칠정산 七政算>을 들 수 있다. <칠정산>은 내편 3권과 외편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정인지, 정초, 정흠지가 원의 곽수경이 만든 수시력을 완전히 소화해서 만든 것이며, 외편은 이순지, 김담 등이 이슬람의 회회력을 소화해서 만든 것으로 그 우수함에 있어서 세계에도 자랑할 만한 것이다.
중국의 명대에 와서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과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서양의 천문학이 중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때 유입된 서양 천문학은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천문학이 아니라 주로 티코 브라헤의 관측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들 서양 선교사들과 주로 서광계의 노력으로 중국에서는 <숭정역서 崇禎曆書>가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이 역서를 공포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고, 대신 명을 멸망시킨 청조가 이 역법을 <서양신법역서 西洋新法曆書>라는 이름으로 공표했다. 우리나라 조선 효종 때 김육의 건의로 시행한 역법인 시헌력은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달력은 동서양을 통틀어서 가장 국제적인 학문적 교류의 산물이었으며, 달력 그 자체는 각 나라의 정치, 종교, 문화 등 다양한 역사적 조건과 맞물려서 복잡하게 전개되어 왔다. 여기에서 언급된 달력 이외에도 마야, 잉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달력을 비롯한 다양한 달력이 존재했었으며, 달력의 그 자체는 그들의 문명사와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따라서 세계 여러 나라의 달력에 관한 이해는 그 자체가 세계 문화에 관한 이해의 한 초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첫댓글 좋은 정보라서 스크랩을 해왔습니다..^^
난지금넘졸려서 나중에 자세히 봐야긋네요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