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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준 시인
바람골 버스정류장에서
버스정류장에서 비행기 타는 발칙한 상상
진부한 인생에서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처럼 좋은 일이 있을까? 가고싶었던 여행처럼 어딘가로 훌쩍 가볍게 떠났다 올 수는 없을까? 우리의 고단하고 무료하며 반복되는 생에 대단한 의미와 가치를 더하는 여행을 계속할 수는 없을까?
서정적 자아는 <여기>에서 떠나 다른 환경에 머물고자 버스정류장에서 여행을 기웃거린다. 이곳과 다른 그곳의 풍경과 여유, 맛있는 먹거리로 인함이다. 이곳에서는 부자유와 속박과 억압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곳은 자유와 해방과 열려 있는 세계가 펼쳐져 있는 까닭이다.
인생을 여행처럼 살고 싶은 마음은 인간이라면 꿈꾸어보는 상상이다. 특히 손민준 시인은 어린 시절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듯이 그렇게 훌쩍 가볍고도 간단하게 비행기를 타는 상상을 한다. 버스를 타면 비행기처럼 하늘로 날아 올라 세상을 여행할 수 있는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그만큼 삶이 힘들고 버겁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책임을 저버릴 수 없기에 훌쩍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고 싶은 것이다. 이는 모종의 보이지 않는 힘을 얻고자 함이다.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활력과 살아갈 힘과 용기를 제공받는다. 이에 비행기를 타는 것만으로도 시인은 기분이 좋아지고 그 꿈으로 평생을 버스정류장에서 비행기를 기다린다. 상상만으로도 그것은 행복이며 설렘이기 때문이다. 그 꿈이 오래 이어지며 아름다운 삶의 나래를 펼치게 하고 있으며 힘있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발칙한 상상이 풍부한 시인은 시집의 구성을 5부로 나누어 제각각 상상력을 부여하고 각 부분에 비행기 번호와 국가명을 덧붙인다. 모든 장소가 해외, 특히 유럽으로 멀리 여행을 가는 형태라 하겠다. 유럽은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누구나 여행, 하면 유럽을 떠올릴 만큼 가고 싶은 곳이다. 사람들은 여행지에서 가장 멋진 옷을 차려입고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가장 멋진 곳을 찾아다닌다. 이는 자신의 인생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멋지게 펼쳐지기를 바라는 소망이며, 시인은 이를 시에 담아 여행을 표출하는 현장을 노래한다.
우리의 인생은 진중하고 무겁고 그 의미가 크며, 삶은 고단하고 진부하여, 그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에 누구나 가볍고 즐겁게 다녀오는 여행의 인생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즐거운 사진을 찍고 명승지에 다니고 평소에는 맛볼 수 없는 산해진미를 맛보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싶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일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쏘다니고 싶은 것, ‘지금-여기’의 풍경은 녹녹지 않지만 언젠가 자신의 일상을 채우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다.
KE0905 독일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인 독일에서는 어떤 여행을 담아낼까? 버스정류장에서 비행기를 탔으니 가볍게 오일장도 다녀올 수 있겠다. 시인의 가까이에서 펼쳐지는 오일장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추운 겨울날 오일장에서 노인은 더덕 껍질을 벗기고 있다. 더덕은 춥고 곱은 손을 수백 번 떨어야 진한 향기를 내기 시작한다. 고달픈 노인은 삶의 무게이자 생을 향한 강한 몸부림으로 더덕 껍질을 벗기고 있다.
빛나는 겨울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처럼
진접, 장현 오일장의 뜨거운 입김이 여물어
삶의 무게로 만져진다
수줍은 제비꽃처럼 벗은 완두콩
햇빛에 주홍빛으로 볼이 녹는 홍당무
좌판의 튀김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
튀김 건지는 아줌마
손에 튄 기름 화상은 꽃봉오리
촉감에 민첩하고 육감에 충실한
노파가 바닥에 앉아
더덕의 껍질을 벗긴다
추운 손님들은 휑하니 지나치고
노파의 언 입은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삶은 나이 들었다고 비켜 가지 않고
노파의 손이 수백 번 떨어야
더덕에서 향기가 나는구나
-「오일장 풍경」
갖가지 물건을 파는 여러 사람이 오일장에 모여든다. 오일장의 풍경이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는 시장은, 완두콩, 홍당무, 각종 튀김, 그리고 더덕을 깎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제각각 물건을 판다. 장이 열리면 날씨는 상관없이 물건이 진열된다. 오늘은 장이 서는 날이니 장을 열어야 한다는 당위가 시장을 지배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자의 몫이고 인생이며 해내야 하는 일에 속한다. 잘 먹고 잘사는 일이 아니더라도 고달픈 인생은 그렇게 추운 날에도, 아랑곳없이 뜨겁게 살아내야 하는 모진 것이다.
세상은 냉정하고 차가울 때가 많다. 혹독한 날씨에 언 손을 녹이지도 못하고 물건을 팔려고 나앉은 사람에게 인생은 그야말로 냉골이며 차갑고 미끄러운 얼음판이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걸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손민준 시인은 인생의 진중한 풍경을 발견한다. 시인은 이런 사람들을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그 풍경을 묘사한다. 그 빛나는 겨울의 오후에는 붉은 꽃이 몸부림치고 뜨거운 입김이 삶의 무게로 만져지는 엄중한 삶과 인생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풋풋한 완두콩, 볼이 녹을 만큼 환한 홍당무, 기름이 튀어 화상 입은 손, 잘 깎아낸 더덕이 어울려 시장의 왁자한 모습은 다양하고 진솔한 인생을 연출한다. 이렇듯 열정이 느껴지는 시장에서 삶이 끝없이 펼쳐지고 붉게 피어난다. 이를 ‘삶은 나이들었다고 비켜가지 않는’현상을 꼬집으면서 비켜가지 않고 나이가 들게 하는 세월을 한탄한다. 시인의 따뜻한 눈길이 시장과 풍경 하나하나를 세밀하고 따스하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삶은 가로세로 움직이는 역동성에 기인한다. 시 <가로세로>는 살아가는 풍경이 가로로 혹은 세로로 펼쳐지는 현상을 자신의 개성적인 시각으로 드러내었다. 눈발은 세로로 대지를 덮으며, 꽃은 가로로 퍼진다는 논리는 수직적 사고와 수평적 사고가 만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이를 확장하여 자동차는 가로로 달리고, 담쟁이는 세로로 하늘을 달린다고 표현한다.
세상은 이렇듯 가로와 세로의 교직으로 서로의 욕망을 표출한다고 여기는 시인은 이러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고 일갈하나, 사람들은 오히려 엑셀을 밟으며 자신의 인생을 가로세로를 달리고 있다고 한탄하고 있다.
하나, 둘 흩날리는 눈발
대지를 세로로 덮고
차근차근 피는 꽃들은
가로로 퍼진다
우리가 담을 수 없는 가로세로의 우주 만물
차들은 차선을 가로로 달리고
담쟁이는 하늘을 세로로 달린다
가로세로의 욕망을 버려야 하는데
인내심이 없는 사람들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가로세로를 폭주한다
아래를 보고 세로로 자라며
짧아지는 고드름
참게처럼 가로로 흐르다
윤슬을 잉태시키는 강물
세상을 세로로 달리는 빗방울은
분수를 모르고 가로로 달리는 구름을
불러 세운다
가로에 중심을 두는 가지와
세로의 기둥에 마음을 담는 바람이
균형을 잡는다
-「가로 세로」 전문
한탄과 부정으로 가로세로를 판단하던 화자는 마지막 연에서 이러한 가로와 세로의 종횡무진에 대해 긍정하면서 그것은 균형을 잡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다시 말해 물질로 대표되는 자동차와 담쟁이의 욕망은 부정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가지와 바람의 부동성과 역동성은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가지는 든든하게 무언가를 받치거나 뻗어가는 힘이라 할 수 있으며, 바람의 역동성은 그 가변성에 비추어 긍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인생의 그림은 가로와 세로의 균형있는 교직으로 그려내는 것이 정답이라고 알려주는 화자는 중심과 기둥을 잘 잡고 가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 교직의 면면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말해서 공평한 관찰자의 동감을 얻을 수 있는 범위에 이르기까지 이타적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타적 행위는 정의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아담 스미스는 그의 <도덕적 감정론>에서 동감 능력을 자혜(慈惠)와 정의(正義)로 설명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타적 감정과 정의를 위한 이기적 행위까지 언급하기도 한다.
즉, 사회는 구성원 간에 상호 애정이 없어도 존립할 수 있으나 정의가 침범당하면 혼란이 극에 달하여 사회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결국, 정의는 사회 존립의 기초가 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삶에서 가로, 세로의 균형을 잡고 가는 일은 중요한 정의에 해당한다.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지만, 이 또한 지극히 정의의 차원에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직도 독일에 머물고 있는 화자는 <나이 몸살>에서는 이제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자각을 하기에 이른다. 나이로 인한 스트레스에 삶이 칠흑처럼 어둡고 서럽게 느껴진다. 그가 원통하고 슬픈 것은 밤새워 울어야 할 만큼 의미가 더해진다. 즉 청춘이 지나고 기력은 쇠진하며, 마음은 외롭고 쓸쓸하여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화자는 몸살에 들린 듯 세월이 지나가는 현실에 서글퍼 하고 있다.
MH0067 이탈리아
이탈리아에서는 사소한 연애 이야기를 펼치며 세상을 받쳐줄 시를 쓰게 된 사연을 알려준다. 시를 쓴다는 것은 공허한 인생에 의미를 더하여 준다는 것이며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형태가 되어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흔히 사람들은 앞만보며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전진하는 경우가 많다.
손민준 시인은 청춘 시절의 연애에, 무엇보다 깊은 애착을 보인다. 그것은 젊음의 시간이며 열정의 시간이며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사소하다 하나 사소하지 않은, 긴 인생에서 살펴볼 때 가장 중차대한 만남을 의미한다. 32년이나 된 먼 시간의 그 사람, 만남, 데이트, 시처럼 다가온 그는 아내가 되어 손민준 시인의 눈썹 끝에 별이 되어 내려왔다고 수줍게 고백한다.
문이 열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중략-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자존심 싸움을 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지만, 오늘이 지나면 그녀는 영영 내게 오지 않는다.
누군가 예쁜 문을 밀고 두리번 두리번거렸을 때
직감적으로 그녀가 왔음을 알아챘다
내 눈은 방금 첫 꽃송이를 터트린 것 같았고
아무리 험한 세상 거센 비바람이 불어도
그녀와 함께라면 역경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는 우리
노래하며 다정히 손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스물한 살의 처녀가 시처럼 내게 왔다
그날 밤
처음 세상에 온 별 하나가 내 눈썹 끝에
아내를 데려다주었다.
-「사소한 연애 이야기」 부분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더욱이 아내로 맞고 싶은 사람은 더욱 힘들다. 바로 그 사람을 만난 화자는 뛸 듯이 기쁘고 행복한 마음을 극진한 어조로 표현한다. 그 사람을 기다리면서 문이 열리는 풍경이 세상이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로 변하고,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과 자존심 싸움을 한다. 기다린다는 것의 의미를 넘어 상황을 확대하고 인생을 비견하며 기다린다.
어쩌면 그 기다림의 시간은 인생의 시간에 비추어 볼 때 아주 짧은 시간에 해당한다. 그러나 기다림에 조바심이 든 화자는 자존심의 이빨을 드러내며 내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 내적 갈등을 이겨내고 기다린 끝에 나타난 그 사람은 ‘꽃송이를 터트린’ 것 같고 어떤 역경도 이겨 낼 것 같은 신비한 힘을 화자에게 전해준다. 이에 손민준 시인은 시처럼 다가온 그와 벌써 손잡고 즐겁고 행복한 데이트를 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그러한 사람을 만났으니 ‘처음 세상에 온 별 하나가 내 눈썹 끝에’ 온 것이라는 극진한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네가 ‘사랑’이라는 시를 지은 게 맞니?”라고 하셨다 학생은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조례 전에 시를 지었다고 했다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학생을 한참 바라보시던 선생님께서는 “너 반에서 몇 등 하니?”라고 재차 물으셨다 학생은 영문을 몰라 그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학생을 쳐다보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시던 선생님께서는 ‘사랑’의 시 낭송을 하셨다 학생은 뜬금없는 상황에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시 낭송을 마치신 이복자 선생님께서는 2학년 중에서 제일 잘 지은 시라고 칭찬하셨다 학생은 아주 오래전 일이라 ‘사랑’의 시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훗날 학생은 잊고 있던 선생님의 칭찬을 떠올려 사십삼 년 만에 시인이 되었다
-「이복자」 부분
이 시는 수필적 형식을 빌려서 쓰는 산문에 해당한다. 사실의 나열이기 때문이다. 이복자는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다. 그에게 제출한 숙제였던 시 한 편은 선생님을 놀라게 할 만큼 잘 쓴 작품이었고 그는 그 칭찬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드디어 시인이 되었다는 한편의 일화가 등장한다. 이에 시인이 될 수 있도록 칭찬을 아낌없이 해준 선생님을 기억하고 자신의 마음 한 켠에 시심을 키운다. 그리고 종국에는 시인의 길을 가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시인이 되어 회상해 보니 그때 못 믿을 표정으로 시를 낭송하시던 선생님이 생생하게 다시 현재화되는 것이다.
<그리움 백 개 눈물 한 방울>이란 시에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그의 부재로 인한 고뇌를 키우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움이 백개인데 눈물은 한방울인 급기야 헤어지고야 만 절실한 사랑에 화자가 흘리는 천지를 적시는 눈물이다. 그는 볼수 없지만 지워지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의 사람이다.
MH1276 스위스
이제 시인은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넘어온다. 스위스는 풍광이 아름답다. 특히 알프스 산을 중심으로 많은 문학작품이 탄생하고 영웅과 장군의 일화가 등장한다. 그곳에서 화자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배우며 삶의 진실을 만난다.
제주의 사려니 숲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유명하다. 사려니 숲에서 만나는 숲과 나무의 형상을 시로 표현하였다. 숲에서는 여백 사이로 바람이 소리를 만들고 향기를 만들어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 풍광 아래에 은은하고 가득한 향기와 허공은 시인의 시심을 자극한다. 세미한 빛과 나무 껍질의 노래, 피어 있는 꽃을 보면서 사려니 숲이 도(道)를 추구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무의 간격은
형식이 아니라 사랑이다
숲을 채운 여백 사이로
바람은 소리를 만들고
향기를 만든다
향기는 나무의 사촌 같은 것
허공은 바람의 팔촌 같은 것
껍질 터진 사려니에
빗살 무늬 햇살의 노래와
열꽃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겨우내 꿈꾸던 제주 사려니 숲은
서로 부둥켜안고
초록의 도道를 꿈꾼다
숲은 사람들의 온기로
강건하게 더욱더 성숙해지고
숲에 머물다 간 휘파람새 소리가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 땀처럼
사려니 껍질 상처를 꿰맨다
-「사려니 숲」
사려니 숲이 추구하는 도는 초록빛깔의 도다. 초록이 의미하는 것은 푸르름이며 생명력이며, 산소이며 세상을 살리는 빛이며 강건하게 하는 무엇들이다. 따라서 초록의 도가 일구어가는 세계는 온 숲과 섬과 나라가 초록의 생명력으로 가득히 덮이는 세상일 것이다. 그것은 희망이며 빛이며 내일이며 미래다. 휘파람새가 창공으로 높이 날아오르는 세상이다.
세월에 묻힌 그의 이름
세월의 강을 지나서 가슴 앓을 때
서서히 그 이름이 차오른다
장밋빛 계절에
나의 영혼을 마비시켰던
그 하얀 미소가 내 눈을 찌르고
그 스물일곱이
쉰이 지나 예순이 되었을 때
세월에 갇힌 그의 허상에
공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왠지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을 할 시간임에도 실실
그것이 답답해서 또 실실
그의 미소가 예나 지금이나
맑은 새소리처럼 빛이나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입술이 먼저 떨며 울었다
지나가 버린 세월은 아직도
우리에게 희뿌연 안개
언젠가 안개가 걷히고
묻혀 버린 추억이 흘러도
똑같은 가슴으로 그립다
-「장밋빛 계절」
시인은 장밋빛 계절을 이십대로 규정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지나간 세월인 그 시간은 아직도 안개에 싸여 있고 그리움으로 차 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웃음이 나오고 아름다운 상상이 펼쳐진다. 알프스의 풍경처럼 환하고 맑고 하얀빛이 시인의 시간을 감싼다.
청춘의 시절에는 어떤 것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금방 지나가버리는 시간은 귀한 계절이었으며 행복한 투정과 슬픔이 되기 때문이다.
MH1281 프랑스
이제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거리가 있는 프랑스로 넘어간다. 프랑스에는 세느강이 흐르고 파리에는 에펠탑이 있다. 이렇게 여러 나라를 거쳐오는 동안 시인은 세월이 지나 갱년기를 맞는다. 갱년기라는 시기에 사람들은 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몸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삶의 지형도 바뀌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질풍노도의 시기가 온 것처럼 불만과 조급함이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요즘의 인생 지형은 노년의 긴 삶이 펼쳐지기에 너무 인식할 필요는 없다. 화자는 자신의 몸이 변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오늘도 행복을 생각하기보다
불행을 먼저 생각할까 봐 두렵다
컴퓨터는 언제나
나의 투정과 불만을 조용히 받아준다
매끄러운 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일상을 끄적이는데도
빈칸을 채우며 받아 적는다
글 쓰는 것도 싫으면
집 안팎을 왔다 갔다 하며
봄에는 전지를
가을에는 낙엽 청소를 한다
갱년기를 이길 방법이 없고
특별한 취미 없이 이러고 산다
이제는 비가와도
마음이 젖지 않고
인생이 깊어지면
순간순간 머물 곳을 찾는다
세상이 나를 내 칠 때마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 살다 보면
이 아픔의 언저리에
아무도 모르게 번져 오는 눈물이 있다
-「갱년기」 전문
손민준 시인의 감성은 아직도 여리고 열정적인 데가 있다. 때로 눈물을 훔치며 서글퍼 하는 장면을 만나기도 한다. 갱년기의 우울을 견딜 수 없어 컴퓨터 앞에 앉아 문장을 입력하고 시를 쓰고 내면의 아픔을 쏟아 놓는다. 글로 자신의 속내를 쏟아 놓는 것은 자신을 위로하는 행동이다. 글에 나타난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성찰을 할 수 있고 좋은 기억으로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는 의미를 함축하여 놓은 까닭에 고품격의 정신을 대하게 된다. 이에 서정적 자아는 안심이 되어 위로를 얻는다. 또한 위안을 얻었으니 더불어 또 글이나 시를 쓰게 될 것이다. 부정적인 자신을 내려놓고 긍정으로 살려고 애쓰는 화자는 끝내 자신을 버리지 않으며 다독거리며 인생을 가치 있게 살고자 한다. 이에 아픔도 있어 아무도 모르게 눈물이 번지는 것이다.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은 극복의 한 형태다. 인생에서 만나는 난관을 극복하고 승화시켜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정신작용이라 하겠다. 보통의 사람들은 극복의 과정까지 와서 거기에 정착하나 시를 쓴다는 것은 한차원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깨달음과 성찰의 과정까지 가게 된다.
성찰은 자신의 태도에 대한 반성과 승화의 과정이라 할 것이다. 애벌레가 자신을 혹독한 계절에 고치로 매달 듯이, 그리하여 엄동설한의 계절을 인고의 시간으로 이겨내는 것이며 이를 견디어 내야, 비로소 봄날에 나비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승화의 과정이 갱년기에 일어나야 하며 작가의 작품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현상이라 하겠다. 손민준 시인도 이를 향해 투정과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조급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면의 갈등을 승화시켜 정진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연꽃이 피면
두루미가 연잎을 쓰고
햇볕을 피한다
사람은 연꽃 구경 왔다가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난다
연꽃도 사람을 보고
사람처럼 활짝 피어난다
연꽃을 스치는 바람은
탐욕의 바람이 아니다
연꽃에 머물다 가는
바람은 참회의 바람
연꽃 위에 머문 저 구름은
연꽃 아래 저 진흙탕은
앞을 못 보고 듣지 못해도
연꽃으로 피어난다.
-「봉선사의 여름」
여름이면 피는 연꽃을 주관적인 심상으로 노래하였다. 너무 강한 햇빛을 피하기 위해 연잎을 뒤집어쓰는 두루미가 인상적이다. 두루미를 의인화하면서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있다. ‘연꽃도 사람을 보고’ 피어난다는 것은 좋은 사람이 오면 꽃도 활짝 피어난다는 것으로 연꽃이 주체가 되어 사람을 알아보는 영물로 그리고 있다. 또한 스치는 바람은 참회의 바람이라고 명명한다. 탐욕으로 일그러진 것이 아니라 참회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바람인 것이다. 이는 화자 자신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며 스스로 참회와 성찰을 하여 깊어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5. KE0908 영국
이제 유럽의 서쪽 영국에 도달한 화자는 바람이 부는 골짜기에서 자신의 지친 정신과 몸에 휴식을 주고자 한다. 위도상으로는 높은 위치에 있어 매우 추울 것이 예상되지만, 그곳에는 따뜻한 해류가 흐르고 있어 기후가 온화하다. 즉 바람골의 봄밤도 춥지 않은 행복한 시간에 들고 있다. 어둠이 멈추고 행복했던 시간만이 흘러간다.
어둠이 멈춘 시간 속에서
행복했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달빛에 뻐꾹새 지절대는 소리가
졸고 있는 가로등을 깨우고
꽃비가 찰랑거리며
어둠을 적신다
오늘 밤, 삶의 희로애락을 잊는 것도
비움의 한 수가 아닐까!
봄밤은 빗방울 떨어져 꽃피고
흥건히 젖은 그리움이 꽃 피는 것
울어야만 피는 꽃도 아니면서
밤새워 퍼지는 봄
바람골 꽃피는 소리가
오래 바스락거리며
봄밤이 꽃으로 젖는다
-「바람골 봄밤」 전문
이름이 바람골이라고 할 만큼 바람이 많이 부는 봄밤의 공간에서 뻐꾹새가 지절대는 넌센스를 만난다. 그만큼 봄밤의 서정이 풍성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뻐꾹새는 지절댄다기보다는 하나하나의 울음소리를 또렷하게 내는 새라 하겠다. 울음과 울음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새들에 비해 비교적 또렷한 소리를 내는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뻐꾹새가 지절댄다는 것은 넌센스인 것이다. 아무튼 새는 봄밤의 서정을 노래하고, 어둠이 멈춘 가운데 행복했던 과거의 시간이 흐른다. 봄의 애상이 드러나 서정적 자아를 행복하는 시간만이 흐른다. 다른 시간은 멈추어 있다. 새소리가 가로등을 깨우고 어둠을 적시고 희로애락까지 잊으며 마음을 비운다. 거기에 비까지 내려서 한층 애상적인 밤이 되는데 서정적 자아는 그리움의 꽃을 활짝 피운다, 그렇게 깊은 밤에 꽃피는 소리가 가득한 바람골의 봄풍경이 펼쳐진다.
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
삶이 힘들어 세상을 버리고 싶은 시간에
우리는 뜨거웠지
우리 사는 동안
사랑의 햇빛에 싸여서
한층 더 성숙해지고
한층 더 아름다워지는
그런 모습으로 남았다
세상이 거꾸로 가더라도
변치 않는 마음 당신을 향한 가슴
그것이 나의 전부라네
서로 다른 몸으로 늘 하나인 삶
수만 갈래 지류로 갈라져 뒤척이는
참을 수 없는 아픈 시간을 품고
그래도 살아야 하고
하루가 하루를 거두어도
가는 길에 쳐다볼 별이 있으니
꼼지락꼼지락 속세를 떠나는 바람 따라
우리는 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다
-「눈물의 서식지」
위의 시는 눈물이 사는 곳을 표현하고 있다. 서식지는 생물이 살아가는 장소라 할 때 눈물의 서식지는 어디일까 궁금해진다. 손민준 시인은 ‘너’라는 대상을 눈물의 서식지로 명명하고 있다. 너는 화자에게 가장 간절한 그리움의 대상이자 절대자와 같은 존재다. 그로 인하여 세상은 아름답고 성숙하다. 그가 있어 세상이 거꾸로 가더라도 변치 않은 자신의 전부인 마음을 전해줄 수 있다. 또한 그는 자신과 하나인 일심동체의 삶을 살며 그와 함께 사는 시간에 행복해한다. 함께 하는 대상에게 보내는 지극한 구애의 편지같은 이 시는 대상을 향한 최대의 찬사를 보내면서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것이 그 사람임을 깨우친다. 힘들고 어려울때도 함께 한 그 사람이 곁에 있어 서정적 자아는 인생을 꽃처럼 지는 것이 아니라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바람을 따라가는 것이며 그 사람과 함께 삶을 행복하게 지속하는 것이다.
이상 손민준 시인의 시를 거칠게 섭렵하여 보았다. 손민준 시인은 따뜻하고 소박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을 인품을 가졌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에서 비행기를 타는 발칙한 상상을 하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고 있다. 손민준 시인이 가진 넉넉한 품성은 시를 통해 전편에 드러나며 세상을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극복하고 승화시키고 있음을 발견한다. 삶이란 이처럼 견디어 내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개인적인 차원의 감성을 객관적인 차원으로 끌어 당겨서 다른 사람의 경험과도 공유할 수 있는 시를 쓰기를 권한다. 앞으로도 즐겁고 행복하게 비행기를 타는 상상을 하면서 시와 더불어 인생을 즐기기를 기대한다.
손민준 시집 4
진부한 인생에서 발칙하고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처럼 좋은 일이 있을까? 가고 싶은 여행처럼 어딘가로 훌쩍 가볍게 떠났다 올 수는 없을까? 고단하고 무료하며 반복되는 생에 의미와 가치를 더하는 여행을 계속할 수는 없을까? 이에 손민준 시인은 버스정류장에서 이곳과 다른 유럽의 풍경과 여유를 즐기려고 한다. 이곳에서는 부자유와 속박과 억압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곳은 자유와 해방과 열려 있는 세계가 펼쳐진다.
이처럼 인생을 여행으로 상상하는 손민준 시인은 어린 시절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듯이 그렇게 훌쩍 가볍고도 간단하게 비행기를 타는 상상을 하면서 인생을 즐기고자 한다.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활력과 살아갈 힘과 용기를 제공받는다. 이에 버스정류장에서 비행기를 타는 발칙한 상상력으로 유럽을 여행하는데 실상은 주변풍경을 담고 있다. 그만큼 일상에서도 유럽을 여행하듯이 즐겁게 살고자 하는 까닭일 것이다. ‘지금-여기’의 풍경은 녹녹지 않지만 언젠가 자신의 일상을 채우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즐거운 상상력으로 펼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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