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에게 호감이 많이 갔던 큰 이유는 우리집의 가족 수자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아버지의 형제 자매 역시 7남매였는데 그 중 작은 고모가 경남에서 충북으로
시집 오는 바람에 아버지 형제들의 누나인 고모를 따라 아래 동생들 형제 모두가 어린시절 번갈아 고모의 시댁으로 거쳐가게 되었고 다들 고모의 덕을 두루
보았다. 나는 태어나는 날 부터 죽을 고비에 직면 했었는데 고모는 그런 나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임에도 불구하고 도박에 빠져 헤메는 바람에 고모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 보지도 못하고 고모는 나이가 들어 하늘로 갔다. 내가 이렇게 기억하는 것들을 글로 쓸수 있는것은 명절때 마다 몇 시간씩 고모가 들려주던 회고들을
경청하는 것에서 비롯 되었다. 지나 보니 특이 하게도 고모와 같은 위치에 리카가 있었고 전혀 다른 나라에서 처절한 가정환경을 등에지고 살아 온것에
놀라웠다. 비록 리카는 나보다 열아홉살이나 어렸지만 동생들을 생각하는 그 강인함과 의연함이 그 나이 이상이었다. 보편적인 이나라 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그에 비해 남동생들은 자기 앞가림도 잘 못하며 생각이 없다. 많은 한국인들이 필리핀 여자와 살면 그 동생들에게 화도 내고 훈계로 다그치기도 하지만 다
쓸데가 부족한 짓이다. 필리핀은 한국처럼 가족간의 위계질서 이런 의식이 부족하다. 그저 싫은 소리 자주 해봐야 미움만 살 뿐이다. '제까짓게 뭔데 내 인생에
이래라 저래라 화를 내.?' 이런 표정이다. 다만 리카 동생처럼 크게 신세진것이 있다면 화가 나도 참는 구실이 존재할 뿐이다. 리카는 남동생 아기 입원 문제로
내게 미안해 하는것도 같았지만 성격 자체가 그런것을 겉으로 표현하는 스타일이 못 되었다. 이면에서 그녀가 나에게 바라는것도 없었고 내가 그녀에게
바라는것도 없었다. 보통 필리핀 여자들이 가지는 질투심 같은것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편의점에 같이 갈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외모가 특이한 어떤 여자가 있어 호기심에 몇번 쳐다 보았는데 리카의 눈에 그일이 후벼 걸려서 도끼눈을 떠 보이며 헤어지자 말하고 집으로 가버렸다. 다시
시간을 좀 보낸 후 정말 맛잇는것을 준비 했다고 꼬셨더니 못이기는 척 다시 왔다. 리카가 얼만큼 나를 좋아 하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여자를 쳐다보는것에
대해 화내는 만큼 나에 대한 관심과 관리가 있었다는것이 눈에 보였다. 더불어 그녀가 일 할적 손님중에는 돈도 무척 많고 부유한 조건의 구애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유부남 이었고 리카에게는 잘되 보아야 속칭 쎄컨드 자리였다. 비록 그녀가 업소에 여자였지만 솔로인 사람을 만나길 바랬고 그로 인해 계속 혼자였던
것 같다. 몇달이 더 지났을때 포커치러 다니느라 집을 많이 비웠던 내게 단속이 들어왔다. 카톡이나 메신져에 얼굴 반반한 프로필들에 대하여 누구냐
추궁했고 하나하나 정리 작업이 들어왔다. 나와 만나는 동안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은 반대로 나에게도 적용 되었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도
내게 다가왔던 여자들은 수도 없었다. 시골에 땅이 많은 대지주의 큰딸, 아버지가 경찰서장인 관료주의 집안의 여자, 건설회사 사장인 강원도 여자 등등 인연이
될법했던 여자들에게 별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았었는데 리카에게 왠지 알수 없는 가족 같은 본능이 발동했다. 그것은 아마도 여러 측면에서 내 포괄적인
성격과 특이한 인생 과정의 단편적 측면이라 생각된다. 나는 어떤 여자가 가까히 다가 오면 달아나는 성격이었다. 평범한 여자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병 그 병이 내게 깊숙히 자리 잡고 있었던 듯하다. 코로나 사태와 함께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그로 인하여 내 인생이 남들과 다르게 흘러간것을
내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내 출생과 집안 환경에 분명히 관련이 있었다. 삶은 그냥 우연히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것이 아니다. 옛날로 부터 따져 보면
내게는 매우 부유했던 유전자가 이미 존재했고 그 유전자의 도전적 성향은 가난에 멈추면 생각하는 일 모두가 욕망 덩어리다. 평범한것에 절대로 만족 할 수 없는
무한 욕심의 유전자 그로 인해 나는 도박에 빠져 들었을 것이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조선말의 우리 집안은 매우 부유했다. 나의 본가는 경남 사천에
있었고 크기를 가늠 할수 없는 커다란 대종중 산과 소종중 산이 있는데 대종중은 조선 중기 통정대부 사복시정을 지낸 입향조의 유산이었고 소종중은 조선말의
조부 내리 삼대가 사헌부 감찰 벼슬을 지내면서 하사 받은 토지들이었다. 일제시대에 들어서면서 친일하지 않았는지 집안의 많은 토지는 국가로 귀속되었고
몰락했다. 고조부 때까지는 수많은 토지를 소유한 갑부였는데 증조부 5형제 중에 첫째 종증조부는 소종중 재산을 이어 받았고 아래로 4형제는 그러지 못했는지
다들 재산이 없었다. 그 중 우리집은 증조부가 막내였으므로 제일 힘이 없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큰집이 거대 지주인 반면에 증조부는 움막 비슷한 집에
소금장수를 하며 살만큼 가난했다. 옛날에는 장자가 아니면 재산 분배를 받지 못한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더하여 일제시대가 된것이 관련 있을것이다.
그 이유중에 들은 이야기로 중간 세명의 종증조부는 젊어어 독립운동 하러 간도로 가기도 했고 또 한분은 일본군에 강제징용 되어 끌려 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소식도 대도 끊겼지만 나의 조부가 그들에게 양자를 가면서 내가 국민학생일 때까지 제사를 지냈고 충청도로 오게된 고모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틈에
그 내막을 일부 기억한다. 독특한것은 여러명의 사촌들과 나를 통틀어 그 이야기를 듣고 기억한 사람은 내가 장남이라서 그랬던지 나 뿐이다. 더 앞서서
고조부 두 형재 중 첫째는 대종중산을 소유 하였고 둘째인 우리 집안의 고조부도 적지 않은 토지를 물려 받았다. 그 아래로 5형제 증조부 때에 장남은
큰집이라 그러했는지 꽤많은 토지를 상속 받았고 부유했지만 딸만 여덟명이라 대가 끊길 상황이 되어 막내인 증조부는 나의 조부인 외아들을 낳았는데 조부는
일찍이 아들이 없는 증종조부 세군데에 양자를 갔으므로 나의 부친이 어릴적 부터 딸이 여덟명인 큰 종조부 댁에 양자를 갔다. 대략 친가쪽의 퍼즐은 그러했고
내 외가쪽 또한 특이하게도 형제자매가 7남매 였는데 역시나 이모와 어머니 여자 형제 두명과 외삼촌이 다섯명인것에 친가와 사람수가 같았다. 어머니쪽에
첫째인 큰외삼촌은 특별한 직업이 없었고 외숙모가 서울에서 유명한 무당이었으며 돈을 긁어 모았다고 했다. 둘째 외삼촌은 서울에서 알루미늄 샷시 공업사를
하여 잘 살았고 한중 수교 이후로는 중국을 드나들며 소규모 무역업을 하였고 그 밑으로 어머니의 손위 이모는 전북 부안에서 평범한 아낙으로 살았으며
셋째 외삼촌은 5. 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 하였다가 희생되어 유해도 찾지 못하는 비극을 낳았으며 그 아래로 나의 어머니는 본의 아니게 내게
부동산 개발과 매입등을 내게 조기 교육했다. 아래로 넷째 외삼촌은 베트남 참전 용사이며 다섯째는 일대기를 잘 모르겠다. 다시 정리하여 쓰자면
아버지 형제자매와 어머니 형제자매가 각각 여자 둘과 남자 다섯명씩 7남매였고 아버지 형재 중 집안의 중심은 둘째 고모, 어머니 형제중 중심이라 할수는
없으나 모두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고 현재 어머니만 살아 있으니 또한 중심이라고 해야겠다. 도박쟁이 하자 덩어리인 내가 굳이 가족사를 들추어
연관짓는 것은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도전적이었던 반면에 나는 잘못된 변형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상식적으로 비교 할때 내 삶의 방향은 나빴다.
묻혀질 이야기들 이지만 오래전 부터 기억하고 적어 두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이 이야기 또한 내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스러져 없어질 일이고 아무도
기억 해주지 못할 이야기들이다. 나 한사람이 세상에 생겨나기 까지 얼마나 많은 실타래와 그 매듭 사이의 우연과 필연이 얽히고 매듭져저 있는지 천천히 살펴 보아야겠다.
첫댓글 실타레 연결 ~
살아오면서 나는 어마나 얽히고 설켰는지 ~
천천히 생각좀 해봐야 겠습니다 ~ㅋ
특히나 카지노 까지 오게된 사람들은 사연이 많이 엉켜 있습니다.
언젠가 개박님 만나면 실제로 듣고싶은 이야깁니다 ^^
언제가 될지 잘 모르지만 꼭 초대 하겠습니다. "술한잔 즐거울때 옛이야기 즐거우리...."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주 시작되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