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패인 축제’와 ‘매끄러운 축제’
김 양 주
<목 차>
Ⅰ. ‘홈 패임’과 ‘매끄러움’
Ⅱ. 몇 가지 모델들
1. 기술 모델
2. 음악 모델
3. 해양 모델
4. 수학 모델
5. 물리 모델
6. 미학 모델
1) 원거리 상과 근거리 상
2) 포괄성과 국지성
3) 구상적 선과 추상적 선
Ⅲ. 홈 패인 축제와 매끄러운 축제
<참고문헌>
<Abstract>
<국문요약>
축제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그 하나는 ‘홈 패인 축제’이고 다른 하나는 ‘매끈한 축제’이다. ‘축제-되기’를 위해 필요한 것은 ‘홈 패임’과 ‘매끈함’에 대한 사유이다. 탈영토를 위해 탈주선이 달려가는 곳은 역시 ‘축제-되기’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여기서는 먼저 몇 가지 모델들에 대해 다룬다. 1) 기술적 모델, 2) 음악적 모델, 3) 해양적 모델, 4) 수학적 모델, 5) 물리적 모델, 6) 미학적 모델이 그것이다. 미학적 모델에서 한발 더 들어가 살펴봐야 할 항 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근거리 상과 촉감적 공간, 2) 포괄성과 국지성, 3) 구상적 선과 추상적 선, 그리하여 우리가 다다르는 길은 ‘홈 패인 축제’와 ‘매끄러운 축제’로 이어진다. 매끄러운 축제의 윤리학, 즉 매끄러운 축제는 어떠해야 하는가? 매끄러운 축제는 접속과 다질성의 축제이며, 다양체이며, 그래서 탈기표화와 탈주체화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축제의 카르토그라피를 그리는 일 그것이 바로 매끄러운 축제에 이르는 길이며 ‘축제-되기’가 가려는 곳이다. 이들은 혁명적이며 전환적 사유들에 의해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주제어>: 홈 패임. 매끄러움, 기술적 모델/음악적 모델/해양적 모델/수학적 모델/물리적 모델/미학적 모델, 홈 패인 축제, 매끄러운 축제, 축제-되기
바로 매끈한 공간에서 투쟁은 변화하고 이동하며,
삶 또한 새로운 도박을 감행하고
새로운 장애물에 직면해서 새로운 거동을 발명하고
적을 변화시킨다.
(『천의 고원』 중에서)
Ⅰ. ‘홈 패임’과 ‘매끄러움’
축제는 이미-언제나 시간의 사유와 함께 출발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공간 또한 사유치 않고는 통과할 수 없다. 이 공간(space)은 다시 그것과 장소(place)에 대한 분별을 재촉한다. 이 두 개념은 어떻게 다른가? 공간과 장소의 사유를 축제와 어떻게 접속시킬 것인가? 우선 간략한 답 하나 먼저 제시해 보자. ‘공간론’은 기하학적/물리학적인 영역에 기인하지만, ‘장소론’은 인문학적인 것에 기인하고 있다고 말이다. 해서 공간을 언급하지만 네가 여기서 주로 보게 될 논의들은 장소에 관한 것들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들뢰즈와 가타리(이하 ‘들가’)의 ‘매끄러운 것(le lisse)’과 ‘홈 패인 것(le strié)’ 개념에서 유래하는 두 공간을 가지고 ‘매끄러운 축제’와 ‘홈 패인 축제’를 사유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이를 좀 더 일반화해서 매끄러운 축제와 홈 패인 축제의 특징과 둘 사이의 관계, 그리고 상호간의 작용과 역할 이행 과정 등을 세밀하게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두 가지 대비되는 공간 모델에 따르는 축제의 경우와 그 모델들도 다양한 영역에서 찾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다루어야 할 개념과 용어들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겠다. 1)기술적 모델, 그 안에는 직물과 펠트 대 뜨개질과 패치워크가 있다. 2)음악적 모델, 그 안에는 모듈과 농현이 배치된다. 3)해양적 모델, 그 안에는 차원적과 방향적, 척도적 외연적과 내포적(내공적) 강도적의 쌍, 시각적 광학적 공간과 촉각적 공간이 있다. 4)수학적 모델, 척도적 다양체와 비척도적 다양체, 외연적 다양체와 질적인 다양체, 중심화된 다양체와 비중심화된 다양체, 수목적인 다양체와 리좀적인 다양체, 수적인 다양체와 평평한 다양체, 차원적인 다양체와 방향적인 다양체, 군중(masse)의 다양체와 무리(meute)의 다양체, 크기의 다양체와 거리의 다양체, 절단의 다양체와 주파수의 다양체, 홈 패인 다양체와 매끄러운 다양체가 들어간다. 5)물리적 모델, 노동과 자유 활동, 물리학적 ‘일’과 사회적 노동, 일에 관한 물리-과학적 모델과 노동에 관한 사회-경제학적 모델 등이 들어간다. 6)미학적 모델, 그 안에 두 가지가 들어가는데 첫째, 근거리 상과 촉감적 공간, 원거리 상과 시각적 공간. 근거리 상의 감응적/ 감정적 이미지 대 원거리 상의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둘째는 포괄성과 국지성이다.
들가는 ‘유목’이란 단순히 이동이라는 성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끄러운 것을 통해 정의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모든 것들에 홈파기 기능을 통해 ‘국가장치’라는 포획장치는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정착과 유목을 구분하고, 국가장치와 전쟁기계를 구별하는 ‘본질적 요소’들은 바로 ‘매끄러움’과 ‘홈 패임’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두 공간 사이에는 혼합과 이행, 반전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유목민과 전쟁기계, 정착민과 국가기구 혹은 국가장치, 매끄러운 공간과 홈 패인 공간, 이 둘 사이는 혼재와 공재, 번역과 횡단, 반전과 회귀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혼합/이행/반전/번역/횡단/회귀/혼재. 이 말과 단어들은 네가 새로 배우고 익혀 두어야 할 것들이다. 개념의 새로운 창조, 또는 그것의 새로운 번역, 그리하여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염원한다면 말이다. 공무원과 예술가의 차이, 정착민의 일상과 유목민의 모험. 홈 패인 공간에의 안주와 매끄러운 공간으로의 감행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축제와 그 공간을 사유함에 있어서도 또한 예외가 아니리라.
따라서 이 두 축제-공간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며, 또한 그 둘 간의 단순하지 않은 상호관계에 대해선 세심한 관찰과 주시와 주목이 필요하다. 두 공간 간의 치열한 대립과 복잡한 차이, 혼합된 것과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의 이행 같은 것을 말이다. 완전히 다른 운동에 따라 때로는 매끄러운 것에서 홈 패인 것으로, 때로는 홈 파임에서 매끄러운 것으로의 이행을 야기하는 완전히 비대칭적인 혼합의 원리를 말이다. 바로 이런 점에 주목해서 보자면 앞서 다룬 논의들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은 고유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두 축제-공간과 결부하여 ‘선’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일 것이다. 추상적 선과 유기적 선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정착 축제와 유목 축제 등과 같은 논의에 새로이 접근할 수 있는 지점이 마련된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그것은 반복하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추상-축제’과 ‘축제-추상기계’를 추후에 논의하고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추상적 축제와 유기적 축제를 사유하고, 그리하여 유목 축제에 접근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해야 하고, 그래서 추상과 추상기계의 이해를 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들가는 점과 대비되는 선의 개념을 미시정치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바 있다. 동시에 점과 선 중 우위를 점하는 것이 어느 쪽인가를 통해서 유목적 공간과 정착적 공간을 특징지은 바 있다. 이에서 더 밀고 나아가면 너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축제는 추상적 선에서 시작한다. 감정이입 충동과 관련된 축제를 ‘유기적 축제’라 부르고, 추상 충동과 관련된 축제를 ‘추상적 축제’라 일단 부르기로 하자. “축제는 추상적 선에서 시작한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추상적 축제는 ‘추상적 선’에서 출발하고 이는 다시 추상 충동에 관련되며 그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상적인 것 그자체로는 이른바 ‘축제 의지’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구상적인 축제, 혹은 모방이나 재현/표상은 축제가 이런 저런 형식을 가질 때, 그 축제들이 갖는 어떤 특징으로부터 생겨난 결과이다. 구상적 축제는 추상적 축제의 일부나 그것의 특수한 경우일 뿐이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추상’ 개념은 공통된 형식을 찾아내서 일반화한 것이다. 즉 한마디로 지난날 네가 사용한 추상 개념은 ‘형식화’ 바로 그것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모든 형식을 제거하는 ‘탈형식화’로서 추상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추상기계’라는 개념이 중요한 것이고, 이는 모든 형식을 탈형식화 하면서 흐름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하는 점이다. 그래서 ‘플랑 드 콩시스탕스’(plan de consistance) 즉 ‘일관성의 구도’ 혹은 ‘혼효면’등으로 번역되어지는 이 용어는 그런 추상기계의 개념을 강조하는 그런 개념용어인 것이다. 축제를 모방이나 재현/표상, 혹은 ‘구상’이 아니라 ‘추상’이라고 본다는 것은 이러한 새로이 제시되는 추상 개념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사실, 예술은 ‘모방’이라고 보는 오래된 전통적 견해 이와 반대로 ‘탈형식화’를 통해 예술을 이해하려는 견해가 있다. 축제 또한 이 점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축제를 재현/표상으로 보는 오래된 전통적/고래적/집단적인 축제 담론과는 달리 탈형식화를 통한 그 어떤 것으로서의 축제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이 온 것이다(김양주,2008 외).
본격적 논의를 위해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대비하는 6가지 상이한 모델에서 유래한 것들을 축제에 대응해 볼 것이다. 여기서 ‘모델’은 구조나 규범, 공통성이나 동형성 그 어떤 것들도 아니다. 즉 ‘모델’이란 말은 통념상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구체화되어야 할 어떤 구조도 아니고 본떠서 따라야 할 규범도 아니다. 또한 존재하는 것들 속에서 발견되는 어떤 공통성이나 동형성도 아니라는 점을 미리 강조해 둔다. 다만 그것은 매끄러운 축제와 홈 패인 축제를 구별하여 두드러지게 보여주기 위한 예들일 뿐이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뒤섞이고 서로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지, 어떻게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이용하는지 등을 보여주기 위한 개념적 사례들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Ⅱ. 몇 가지 모델들
1. 기술 모델
직물(tissu)과 펠트(feutre), 뜨개질과 패치워크(patchwork)라는 대립 항은 공간에 대한 기술적 모델을 사유하는 좋은 예로 제시된다. 직물이 홈 패인 공간을 이룬다면, 펠트는 매끄러운 공간을 이룬다. 홈 패인 공간의 몇 가지 특징을 직물을 통해 말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두 종류의 평행적 요소에 의해 구성된다. 가장 단순한 경우에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요소가 있다. 그리고 둘은 꼬여서 수직으로 교차한다. 둘째, 이 두 종류의 요소는 다른 기능을 갖고 있다. 하나는 고정되고, 다른 하나는 고정된 것의 위아래를 가로지르면서 이동한다. 막대와 실, 날줄과 씨줄. 셋째, 이 종류의 홈 패인 공간에서는 반드시 적어도 한 면이 한계지어지면서 닫혀 있다. 직물에서 길이는 무한할 수 있지만, 날줄의 틀에 의해 결정된 폭은 무한할 수 없다. 왕복운동의 필연성은 닫힌 공간을 함축하고 있다. 원형 혹은 원통형의 형상은 그 자체가 막혀있다. 마지막으로 이 종류의 공간은 반드시 앞면과 뒷면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날실과 씨실이 성질, 수, 밀도에서 엄밀히 같을 때조차도, 직조법은 한 면을 매듭지음으로써 뒷면을 구성한다.”(MP,594)
하지만 압축에 의해 만들어지는 엉킨 섬유, 유목민의 발명품인 펠트는 직물공간과는 다르게 매끄러운 공간을 형성한다. “펠트는 대체로 무한하고 열려 있으며, 모든 방향으로 무제한적이다. 그것은 앞면도, 뒷면도, 중심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고정되고 움직이는 요소들을 지정하지 않고, 배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연속적 변이를 분포시킨다.” 물론 이렇게 이 두 개의 명확한 대비선이 항상 유지되어 홈 패인 것은 언제까지나 홈 패여 있고, 매끄러운 것은 매끄럽게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항상 엉킴과 섞임이 있고, 그 때문에 중간에 있는 다른 모델들을 끌고 들어가기도 한다.
또 자수나 패치워크도 서도 다른 것으로 구별된다. 패치워크는 퀼트(quilt)와 비슷한 것 같은데, 퀼트는 헝겊 조각들을 서로 이어 붙여서 천이나 옷 등을 만드는 것이다. 자수가 중심 주제나 모티프를 갖고 있다면, 퀼트나 패치워크는 조각조각을 이어서 만들기 때문에, 무한하고 연속적인 직물이 한없이 추가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끄러운 공간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퀼트나 패치워크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천 조각들이 연결되고 결합되는 것이란 점에서, 매끄러운 공간이라고 말할 때의 ‘매끄러움’이 고르게 짜인 동질성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울퉁불퉁한 채 공존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특징들을 우리는 축제공간으로 가져올 수 있다. 축제공간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천 조각들이 연결되고 결합된 퀼트나 패치워크란 점에서 매끄러운 공간이다. 이 매끄러운 공간이라고 말할 때의 ‘매끄러움’이란 고르게 짜인 동질성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울퉁불퉁한 채 공존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축제의 제1담론으로 거론되어 온 ‘구성원이나 사회 구성원들의 동일성/동질성/정체성 확인’이란 명제를 전복시킨다. 동질적인 것들로 짜인 공간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접속되어 울퉁불퉁한 채 공존하는 공간인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2. 음악 모델
음향적 배치로서 리토르넬로. 먼저 음악에서 홈 패인 공간은 절단된 소리들의 분포를 말하는데, 그것들이 일정한 간격을 가질 경우이다. ‘음악적 소리’와, 종종 ‘소음’이라고 불리는 비음악적 소리의 이항적 분할이 그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그 대표적인 것이 평균율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음들이 고전적인 의미에서 음들이 사용을 규제하는 ‘척도’가 된다. 이와 같이 절단과 간격들이 일정 단위로 분할되고 표준화 방식으로 배열될 때, 그 배열과 분포의 원리는 ‘모듈’이라는 용어로 명명된다. 이는 평균율이나 서양의 음계가 아니어도 음계가 일정한 간격으로 정의되는 곳은 어디나 홈 패인 공간이다.
반면 어떤 일정한 간격 없이 소리들이 집합하고 산란하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음악에서의 매끄러운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두 음 사이의 모든 음역의 주파수를 통과하며 오르거나 내려가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이런 소리는 바이올린의 ‘글리산도’나 혹은 가야금으로 ‘농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만들어진다. 여기서는 모든 주파수의 소리가 다 음악적 소리로 사용될 수 있다. 이는 서양 현대음악에서는 신서사이저의 발전을 통해서 더욱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공간은 많은 경우 섞인다.
그렇다. 언제나 누수는 있다. 그렇듯이, 두 가지 상이한 것은 항상 섞이고 교차한다. 두 상이한 매끄러운 공간과 홈 패인 공간도 언제나 섞이고 교차한다. 순수하게 하나로만 이루어진 공간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매끄러운 공간 그 자체도 이데아 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순수성, 단일성, 결벽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
3. 해양 모델
홈 패인 공간에서 선이나 궤적(軌跡, trajet)은 점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서울이란 출발‘점’과 부산이란 도착‘점’에 경부‘선’은 종속되는 식으로 말이다. 이 경우,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여행하는 경로는 단축되면 단축될수록 양호한 것이 된다. 철도도, 도로도, 우리의 일상적인 동선도 그렇다. 두 점 사이에 풀밭이나 잔디가 있다면 그걸 가로질러 직선으로 가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히 새 길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목격한다. 반면 매끄러운 공간에서 점은 선의 일부고, 선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 통과점일 뿐이다. 여기서는 시작점과 끝점이 아니라, 가는 경로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다.
나조차 점과 점을 최단으로 잇는 선을 선택하고 있지 않은가! 무어 그리 바쁘다고 말이다. 그러나 효율성과 신속성이 우선이고 찬양되는 환경 속에서 자연적으로 몸에 배어버린 건 아닌지. 지나가는 경로 자체를 우선하라! 그 길이 꾸불꾸불하거든 그걸 즐겨라! 고속도보다 국도를 즐겨라. 국도보다는 신작로를 즐겨라. 신작로보다는 작은 산길을 즐겨라. 숲 속에 난 오솔길들. 끝없이 꾸불거리는 길을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고 만끽하라! 그래서, 축제의 시공간에서 두 개의 점 사이에 최단 거리를 설정하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고자 하는 생각을 버려라! 축제의 시공간에서 혹이라도 최단거리를 달리고자 하는 관습이 행동이 몸에 밴 자신을 발견한다면 이 또한 축제가 주는 선물임을.
따라서 “매끄러운 공간에서 선은 벡터, 방향이지, 차원 혹은 척도적 규정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MP,597). 매끄러운 공간은 차원적 혹은 척도적이라기 보다는 방향적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래서 매끄러운 공간은 형태화되고 가시적인 사물들 보다는, 사건이나 특개성의 원리로 채워지는 공간인 것이다. 사막에서 모래언덕이 만들어내는 모양의 변화나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길을 찾아가는 대상들, 극지에서 얼음의 모습이나 두께 눈보라치는 방향 등을 참조하면서 길을 찾는 이누이트들, 혹은 표지판도 없는 망망대해 위에서 물결과 바다 내음과 습도 등으로 길을 찾는 항해자들, 이들은 모두 ‘이곳’이 어디인가를 말해주는 특개성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끄러운 축제에서의 선은 벡터이며 방향이라 말할 수 있다. 차원 혹은 척도적 규정이 아니다. 매끄러운 공간이 그러하듯 매끄러운 축제 역시 방향적이다. 매끄러운 축제는 형태화되고 지각된 사물에 의해 채워진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사건이나 특개성의 원리로 채워질 것이다. 바람, 냄새, 느낌 등 이 축제가 나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가, 나아가서는 그것조차도 지각불가능하게 하는 특개성만 존재할 뿐이다. 또한 매끄러운 축제 공간은 여기는 누구의 것이라고 표시함으로써 소유하고 점유하는 그런 공간이 아니다. 소유와 점유를 위해선 구분선을 정확하게 그어야 하는데, 이는 점들에 종속된 선들이며 척도로 기능하는 선들이다. 그래서 매끄러운 축제공간은 소유와 점유의 공간이 아니라, 고유한 ’이곳‘이 주는 고유한 느낌의 ’감응(affect)’의 공간이다. 눈에 의존하고 파악하는 시각적/광학적 공간이 아니라, 직관과 느낌을 통해 감각하게 되는 촉각적 공간인 것이다. 홈 패인 축제는 형식이 질료를 조직한다. 반면에 매끄러운 축제는 소재가 힘을 표현한다. 또는 힘의 징후로 복무한다. 거기서는 거리? 조차도 척도적이거나 외연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내포적 혹은 내공 적이고 강도적이다. 그러한 축제공간이다. 어떤 형식에도 갇히지 않는다. 아니 더 나아가 정형화된 형식을 깨는 강밀한 힘을 표현하는 축제 그리고 그러한 축제공간이다.
전형적인 매끄러운 공간이었던 바다가 어떻게 홈 패이게 되는가는 축제를 사유하는데 시사점을 준다. 바다는 번지수 매김도 거부하였고, 점으로 표시되는 것도 부정하였으며, 특정의 소유가 되는 것은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오직 방향을 알려주는 별자리만으로 찾아가며, 바람의 냄새와 파도의 물결, 비상하는 새들의 종류와 숫자, 태양의 강도와 구름의 정도 등만이 ‘이곳’임을 판단하고 항해를 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다는 가장 먼저 엄밀한 홈 패임의 요구에 직면했다. 위도와 경도로 표시되는 데카르트적인 좌표가 바다에 덮어 씌어지고, 그 좌표를 통해 ‘우리 바다’와 ‘남의 바다’, ‘공동해역’ 같은 것이 정해진다.
그런데 바다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홈 패임은 육지의 기능과는 별 상관이 없이 만들어졌다. 경로를 벗어날 위험이 적고, 벗어나도 크게 위험하지 않은 연안 항해와 달리, 원양항해는 일단 길 찾기도 어렵거니와, 자칫 길을 잃으면 생사를 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원양항해를 하기 위해선 정확한 해도(海圖)가 필요했다. 사실 14~15세기의 대부분의 해도는 해안선을 따라 만들어졌다. 그려져 있는 해도들을 보면 위치나 모양 등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다만 방향이나 지표들, 혹은 항해의 궤적들을 대강 알 수 있게 되어 있을 뿐이다. 더불어 연안의 근해는 자주 익숙하게 드나들던 곳이었던 만큼, 항해의 경험이나 몇 가지 감응만으로 ‘이곳’이 어디인지 하는 특개성을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상업적인 이유에 의해, 혹은 아직 가보지 못한 ‘황금의 땅’을 찾아가려는 욕망들이 강하게 부상하면서 원양항해의 필요성이 커졌을 것이다.
이로써 바다는 정확하게 홈 패인 공간이 된 것이다. 나아가 매끄러운 공간의 전형인 바다는, 이런 홈파는 방법을 통해서 다른 모든 매끄러운 공간에 홈을 파는 방식의 전형을 제공하게 된다. 이젠 사막도, 하늘도, 성층권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홈 패인 공간이 된다. 지구의 둘레를 도는 인공위성이 좌표화된 하늘에서, 좌표화된 지표면의 어떤 곳도 정확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실이다. 홈 패임이 끝난 후 바다는 우선 ‘현존함대’에 의해서, 그 다음으로는 전략잠수함의 끊임없는 운동에 의해 점유된 일종의 매끄러운 공간을 다시 제공한다. 그리고 모든 눈금을 둘러싸고 국가보다 더 불안정한 전쟁기계를 위해 봉사하는 새로운 유목주의를 발명하고 그 홈 패임의 극한에서 바다를 재구성한다. 그래서 바다, 그리고 대기, 성층권은 다시 매끄러운 공간이 되지만, 그것은 가장 기묘한 전환에 의해 홈 패인 공간을 좀 더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매끄러운 공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한 점 한 점 위치를 점하고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공간 전체를 점유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바람처럼 날랜 기마병 몇 명만으로 적들이 있는 공간 전체를 장악하여 적을 박살내는 몽골인 들의 전술을 보라. 그와 같이, 이제는 홈 패인 이후 전략잠수함이나 항공모함, 혹은 미사일이나 인공위성 등에 의해 어느 위치든 미사일을 쏘아 보낼 수 있게 된 바다나 성층권 또한 ‘동시에 공간 전체를 점유한다’는 의미에서 매끄러운 공간이 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홈 패임의 극한에서 매끄러운 공간으로 재구성된 바다와 성층권이다. 그렇다면 이제 매끄러운 공간이 곧바로 ‘좋은 공간’을 뜻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바다를 통해 매끄러운 공간이 홈 패인 공간으로 이행하고, 또 역으로 새로운 양상이지만 매끄러운 공간으로 다시 이행하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두 가지 공간은 섞이고 이행하며 포섭하고 장악한다. 하지만 섞인다고 해서, 혹은 홈 패임의 극한에서 재구성된 바다처럼 매끄러운 축제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고 해서, 두 가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 두 축제는 개념적으로 구별해야할 뿐만 아니라 그 둘의 섞임의 양상에 대해서도 잘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심지어 가장 홈 패인 축제조차 매끄러운 축제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매끄러운 공간인 사막 바다 초원에서 홈 패인 채 거주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매끄러운 축제이지만 실제로는 눈치조차 채지 못한 채 홈 패인 축제를 거듭하는 어리석은 인간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일상과 비일상이란 두 가지 공간은 섞이고 이행하며 포섭하고 장악한다. 또한 우리는 홈 패인 축제의 극한에서 재구성된 매끄러운 축제의 출현도 볼 수 있다. 전략잠수함에 의해 재구성된 바다나 탄도미사일에 의해 재구성된 하늘=성층권 같이 말이다. 일상의 홈 패임 축제에서 매끈한 축제를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삶이란 일상과 비일상이 섞이고 이행하며 포섭하고 장악을 서로 하기 때문이다. 삶이 축제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일상의 홈 패임을 매끄럽게, 매끄러움에 안주한 채 홈팜을 하는 것이 아닌, 그런 것들 아닐까?
유목의 공간 안에서 정착민으로 살아가고 있듯이, 우리는 축제의 공간 안에서마저 일상의 홈 패인 심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거꾸로, 가장 홈 패인 공간인 도시에서조차 매끄러운 방식으로 거주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전형적인 홈 패인 공간 안에서, 어느 방향으로든 향할 수 있는 선을 그리는 거. 하지만 탈주자는 도망자나 도주자가 아니며, 유목민은 떠돌이가 아닌. 탈주선을 그릴 뿐만 아니라, 도시의 패인 홈을 흘러넘치는 다른 흐름을 흐르게 하고, 홈통과도 같은 파이프에 구멍을 뚫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탈주케 하는 것. 굳이 농촌으로 굳이 축제공간으로 가지 않더라도 가장 홈 패인 공간인 일상과 도시라는 공간에서조차 매끄러운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중요한 것은 축제 그것이 매끄러운 축제인가, 홈 패인 축제인가가 아니다. 매끄러운 축제는 홈이 패게 마련이고, 반대로 홈 패인 축제 또한 매끄러운 축제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매끄러운 축제에선 매끄러운 축제에 부응하는 생활과 실천을 만들어 내야하며, 홈 패인 축제에선 다시 매끄러운 축제를 부단히 생성시켜 영위하는 삶과 그 실천을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일한 축제를 흘러가는 상이한 두 가지 시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종류의 시간을 구별해주는 것은 “측정 가능한 혹은 척도적인 운동량이나, 단지 마음속에 있을 법한 어떤 것이 아니라 공간화의 양식, 공간에서의, 공간에 대한 존재방식”인 것이다.
유목민은 움직임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유목민은 이주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움직인다고 다 유목민이 아니듯이,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황량해진 공간을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정착민들은 자신이 사는 곳이 불편해지면 다른 곳으로 떠난다. 이주민 역시 자신이 이용하던 공간이 황량해지면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러나 유목민은 그 황량한 공간에 달라붙어 그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창안한다. 즉 그들은 도망가지 않는다. “제자리에서 유목하기”, 앉은 채 하는 여행, 차라리 이것이 유목민의 역설적 정의에 더 부합한다는 것은 이런 뜻에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목민의 유목 축제, 그 매끄러운 축제는 홈 패인 그 황량한 헐벗은 축제를 박차고 떠나는 것이며 그 때 비로소 시작이고 가능한 축제인 것이다.
4. 수학 모델
두 가지 축제의 수학적 모델은 두 가지 다양체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대비되는 다양체의 짝들. 척도적 다양체—비척도적 다양체. 외연적 다양체(양적/수적 다양체)—질적 다양체. 중심화된 다양체—비중심화된 다양체. 수목적 다양체—리좀적 다양체. 수적인 다양체—평평한 다양체. 차원적인 다양체—방향적인 다양체. 군중의 다양체—무리의 다양체. 크기의 다양체—거리의 다양체. 절단의 다양체—주파수의 다양체. 그리하여, 홈 패인 다양체—매끄러운 다양체. 이것이 모두 대비되는 다양체의 짝들이다. 홈 패인 다양체로서의 축제와 매끄러운 다양체로서의 축제, 바로 그것이 이 다양한 다양체의 짝들에 대응하는 축제의 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좀 더 근본적으로 보자면, 사실 온도계는 숫자 간에 등 간격을 가정하고 있는 정수로 표시되어 있지만, 가령 0도C에서 1도씨로 올라갈 때와, 1도씨에서 2도씨로 올라갈 때, 정말 온도(따뜻한 정도)가 똑같이 올라간다고 할 순 없다. 환자의 체온이 38도c에서 1도 올라가는 것과, 39도에서 1도 올라가는 것은 결코 동일한 변화가 아니다. 그건 다만 온도에 따른 수은주의 길이나 크기의 변화가 동일함을 뜻할 뿐이다. 이처럼 등 간격으로 분할되어 있어도, 실제로는 각각의 간격이 결코 동질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매끄러운 공간에서는 그 본성이 분할될 때마다 달라지는 다양체라는 의미에서 ‘매끄러운 다양체’라고 한다.
좀 더 현실적인 예를 들어 보자. 연병장을 100미터 행진하는 것과, 도로 100미터를 춤추며 걷는 경우를 비교해 보자. 연병장은 각각의 부분을 최대한 동질화하려고 한다. 땅을 고르고, 표면도 최대한 다지고 해서 말이다. 그러나 관객들의 시선을 옆으로 차도를 걷는 100미터는 각각의 걸음마다 다른 길일 것이다. 평소에는 걸을 수 없었던 차도, 양 사이드에서 보내는 관객들의 시선과 열기, 바뀌는 거리의 풍경과 바람 등등 모든 부분이 상이한 발걸음을 요구한다. 그래서 연병장을 하루 종일 쳇바퀴 도는 것과, 차도를 하루 퍼레이드 하는 것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같은 거리를 제식훈련으로 걷는 것과 음주가무하며 걷는 것은 양적인 거리는 같을지언정, 질적으론 다르다.
그런데 달리는 사람 입장에선, 심지어 앞과 뒤만 달라져도 달리는 걸음마다 다르다. 상페르민 축제에서 질주하는 황소 뿔 앞을 10미터 달리는 것과, 그 뒤를 10미터 달리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첫 5미터와 황소 뿔이 바로 엉덩이에 닿을 듯 말 듯 한 후반 5미터 또한 다르다. 또 첫 번째 20미터야 누구나 가뿐하게 달리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달리는 20미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떼어놓을지도 모른다. 유 경험 선수와 첫 경험 선수가 달린다면, 첫 번째 달리기에서 무사하다고 해서, 두 번째 세 번째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또 10년째 달렸으니 이번 달리기에서도 자신이 성공할 게 분명하니 뛰어볼 필요도 없다고 한다면 첫 경험자에는 유경험자에게 속는 것이다. 또 10미터를 성공했으니 100미터도 같은 속도로 뛸 거라는 말을 믿는다면, 이 역시 속는 것이다. 황소 대여섯 마리가 쫒아오는 것을 100미터 달리는 것과 그냥 100미터를 달리는 것. 그 달리기는 횟수마다 걸음마다 다른 ‘거리’를 달리는 것이고, 질적인 다양체 내지 매끄러운 공간과 결부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농수산물 시장의 트럭 뒤에 실린 토마토와 뷔뇰의 토마토축제에서 트럭에 실린 토마토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때의 토마토는 질적 다양체인 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이라고 했던 사막/스텝/바다 혹은 얼음사막은 비록 수적인 계산이 가능하다 해도, 이런 유형의 다양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것은 비척도적이고 비중심화되고 방향적인 공간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양상을 보아야한다 그것은 “두 가지 결정인이 취하는 동일한 상황이 그것들 간의 비교를 배제하는 경우”와 결부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온도와 압력이 함께 관여하여 만들어진 두 개의 상태나 상황을 비교하는 것이다. 티베트나 안데스 같은 고산지대를 오를 때, 가령 고도와 경사도가 오르는 데 드는 에너지를 결정한다고 하자. 고도가 낮은 곳보다는 높은 곳이 더 힘들 것이고, 경사도도 마찬가지로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고도는 낮은 지대지만 경사도가 크고 험한 경우와, 고도는 높지만 거의 평지와 같은 경우라면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그렇다. 결코 쉽지 않다. 온도와 압력을 비교할 순 없는 일이고, 고도와 경사도를 비교할 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끄러운 공간에서는 아무것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일까? 어떤 비교 가능성이나 측정 가능성도 없는 것일까? 들가는 “있다‘고 대답한다. 리만 공간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고 한다. 유클리드 공간이 아니라, 리만 공간에서는 각각의 부분들이 이질적이다.
그러나 매끄러운 공간 자체가 가지는 이러한 특징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 이 두 공간의 상호이행은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매끄러운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기하학이나 유목적인 수는 왕립과학에게 새로운 기하학과 대수학을 위한 영감을 제공할 것이다. 반면 홈 패인 공간에서 작동하는 척도는 좋든 싫든 매끄러운 다양체가 제공하는 낯선 자료를 자신의 척도적 형식으로 번역하고 변환해야 한다. 가령 리만 계량은 이질적인 것들이 겹침을 통해 만들어지는 다양체가 제공하는 자료들을 계산 가능하게 해주는 척도적 형식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쌍방 간의 상호간의 이행은 사실 비대칭적이다. 매끄러운 공간을 통과한 창조적 발상이 ‘과학’이 되기 위해선 홈 패인 공간을 통과해야 하고, 그 공간의 척도적 형식과 공리적 요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수적 과학은 다수적 과학, 왕립과학에게 영감을 제공하지만. 다수적 과학은 소수적 과학에 과학화하고 척도화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매끄러운 다양체를 홈 패인 다양체로 번역하는 두 가지 방법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는 강밀도를 외연적인 양으로, 더 일반적으로는 ‘거리의 다양체’를 계량하고 홈을 파는 ‘크기의 체계’로 번역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매끄러운 공간의 리만적 단편을 유클리드적 체계로 통합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평행하지 않은 선을 평행선으로 다루기 위해서 무한소적 거리로 홈을 파는 방법이다. 리만 계량이라고 불리는 저 거리 제곱의 공식은 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겠다. 또, 프랙탈한 기하학을 통해서 매끄러운 공간의 일반적인 결정요인을 몇 가지 찾아낼 수 있다. 프랙탈 기하학에서 말하는 한없이 구부러지는 선, 직선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는 그런 선이야말로 유클리드 기하학의 직선이나 척도가 통하지 않는 기하학을 구성한다고 말이다.
5. 물리 모델
물리적 모델에서 들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노동의 모델과 국가장치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뭐했냐?”라는 질문에 “놀았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이는 ‘놀았다’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상투적이며 관습적으로 생각해서 대답하고 있고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러나 ‘놀았다’는 ‘일을 하지 않았다’ 즉 ‘노동하지 않았다’가 아니다. 논 것은 일하는 것 대신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놀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노동하지 않으면 놀았다라고 관습적으로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노동을 거부했던 것은 게을러서도 아니고, 일해서 먹고 산다는 생각이 없어서도 아니다. 반대로 심오한 ‘철학적인’ 이유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인디언을 ‘토벌’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았지만 그들을 노동자로 사용할 수 없었던 미국인들은 결국 다른 노동자를 구해야 했는데, 흑인이 그들이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과 시간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은 “시간은 금이다”라는 문장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자본가가 돈을 주고 노동시간을 사는 형식으로 임금계약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아메리카’의 새 주인들께서 그렇게 애를 써서 가르쳐도 ‘시간’의 소중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이누이트족의 언어에는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으며, 적어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추상화되고 조직화된 의미의 ‘시간의 소중함’을 가르칠 언어적 수단이 없었던 셈이다. 아니 그보다, 시간의 소중함에 대해 따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그들의 언어 자체가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시간에 쫓기며 노동하거나 노동하게 하는 그런 삶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는 좀 더 엄격하게 따져본다면, 노동이란 개념의 정의 자체와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집에서 음악을 듣고 녹음을 하거나 그것을 편집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다. 하지만, 월급을 받으며 스튜디오에서 노래를 듣고 선곡하거나 편집하는 것 등은 분명 노동이다. 집에서 아이를 위해 자전거를 고쳐 주는 것은 노동이 아니지만, 월급을 받고 남의 자전거를 고쳐주는 것은 노동이다. 마찬가지로, 놀이와 노동의 차이도 그렇다. 축제의 시공간에 들어가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그 자체를 만들거나 기획하는 것은 축제=놀이 이다. 하지만. 돈을 받으며 축제장에서 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하고 정리하는 것은 노동이다. 축제의 시공간에 있다고 해서 다 축제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여행을 하는 것—즐기는 것―은 노동이 아니지만, 돈을 받고 남의 여행을 위하여 여행—기획 진행 가이드—하는 것은 노동이다. 나는 노동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노동을 하려는 것일까? 나이를 먹어 할 일이 그것 말고는 없다고? 은퇴 후 할 일을 찾아서? 관성일까? 그동안 일 해오던 관성인가, 돈인가? 경제적 문제인가 시간의 문제인가? 돈이 있음에도 일을 하려고 할까? 부자들이 과연 제2의 직업으로 노동을 찾아 헤맬까? 단지 일을 하는 보람을 확보하고 싶어서? 노동의 신성화 계략일까?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사람을 일을 해야 한다는, 일하지 않으면 게을러진다는, 노동의 신화?
자본주의에서 노동이란 이처럼 ‘자본’이라고 불리는 스톡을 통해서, 그것의 일부를 대가로 받고 수행하는 활동을 지칭한다. 노동은 돈을 받고 그 대가로 수행하는 활동이다. 자본이 개입 되냐 안 되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같은 활동을 하여도. 내가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는 순간, 나의 행동 활동은 노동이 된다. 내가 지원금이란 돈을 받고 저서 출간 작업을 하니까, 그건 노동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하기가 싫어지는 것이다. 내가 그동안 해왔던 프로젝트들은 돈을 받는 것이었고 그 순간 하기가 싫어지는 것이었다. 지금의 등대 프로젝트도 돈을 받기 때문에 급 하기 싫어지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어떻게 노동을 노동 아니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제든지 돈을 거부 반납할 수도 있다는 마인드로. 글쓰기. 소설 작업이 노동이 아니게. 나의 축제로. 나의 삶의 축제로. 즐길 것. 일상이 바로 축제이듯이. 숙제나 과제가 아니라. 매일을 즐기자. 놀자. 이 작업을 축제로. 나의 삶의 명제는 바로 “삶이 축제이듯이‘ 삶이 곧 축제. 일상이 곧 축제.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축제의 일상. 노동의 일상이 아니라. 노동이 일상이고 가끔 비일상으로 축제가 찾아오듯이, 가 아니라.
그렇다면 자본주의 이전의 노동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노동이란 다양한 형태의 스톡을 대가로 받고 수행하는 활동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노동의 물리—사회적 모델은 반드시 스톡의 비축과 포획장치를 전제하며, 그것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돈이란 스톡‘을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스톡’을 대가로 받고 수행하면 그 활동은 노동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그 다양한 형태의 스톡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명예, 보람, 인생의 맛, 멋, 사랑, 눈길, 마음, 애정, 정,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모든 것들. 도움, 존경, 뿌듯함. 따뜻함, 등등. 포틀래치는 바로 화폐가 아닌 바로 다양한 형태의 스톡을 대가로 받는 시스템.
노동은 시공간을 홈 패이게 한다. 홈 패인 공간으로 만든다. 노동은 인간의 자유 활동을 자본에 종속시킨다. 그 모든 행동을 자본제공자=자본가에게 종속시키게 됨은 물론 그 결과일 것이고 말이다. 노동은 매끄러운 공간의 파기를 수행한다. 노동은 국가의 본질적인 사업이다. 노동을 통해 국가는 전쟁기계를 정복한다. 국가의 기원과 수단은 노동이란 사업과 전쟁기계의 정복을 통해 만들어진다. =노동과 전쟁기계의 정복이 국가의 기원이며 수단이다.
가령 원시부족들이나 인디언들에게 시간이란,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낄 수도 없고, 아껴 쓴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은 말 그대로 자연과 동일한 리듬을 따라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더구나 정해진 시간 동안에 어떤 행동을 동일하게 반복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작업의 흐름이 흐르는 홈이 되어버린 공장의 공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축제의 시간 또한 온전히 그 공간 안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축제의 시간이 즐겁다 해서 아낄 수 없으며, 아껴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축제의 시간은 그 나름으로 흘러갈 뿐이다. 정해진 시간에 동일한 행동의 반복을 하는 축제. 노동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에 홈을 파는 작업과 다를 바 없는 축제의 시간들. 이것들은 비록 축제란 명칭이 붙고 지칭될 뿐 그 시간이란 노동과 마찬가지로 시공간에 홈을 파는 작업과 행동일 뿐인 것이다.
여기서 시계가 수행한 역할은 지대하다. 이는 공간화된 시간으로 시간을 등질화하고 양화하는데, 이것이 근대 물리학과 과학의 발전에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젠 집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과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자유로운 활동조차, 그에 할당된 특정한 공간에서 주어진 시간에 맞추어 시작하고 끝내야 한다. 그것은 삶의 방식의 지반 자체를 홈 패인 공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셈이다. 시간만 돈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시간으로, 따라서 돈으로 환원되고(‘가치척도의 기능’으로서 화폐!), 역으로 돈이 되는 한에서만 어떤 것도 가치를 가질 수 있으며, 돈이 된다면 어떤 것도 가치를 갖는 극단적인 홈 패인 공간이 만들어진다.
공간화된 시간. 시계. 시간의 등질화. 시간의 양화.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행위=축제는, 특정한 공간에서 주어진 시간에 맞추어 시작하고 종료해야 한다. 축제 방식의 지반 자체를 홈 패인 공간으로 변환. 환원. 축제의 시간은 돈이며, 돈으로 환원되고, 역으로 돈이 되는 한에서 축제도 가치를 가질 수 있으며, 돈이 된다면 어떤 축제도 가치를 갖게 된다. 축제의 극단적인 홈 패인 공간화.
그런데 마치 바다의 홈 패임의 극단에서 ‘현존함대’나 전략잠수함 등이 다시 매끄러운 공간을 구성했듯이, 자본은 이런 홈 패임의 극단에서 다시 매끄러운 공간을 구성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보여주었듯이, 자본주의에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이 시간적 내지 공간적으로 분리되기를 그친다. 이 경우 잉여노동은 필요노동과 구별되어 어떤 가시적인 형태로 국지화될 수 없게 된다. 사실 마르크스에 대비하여 보여준 것처럼, 노예제 사회에서는 필요노동조차 잉여노동으로 나타난다. 봉건제의 경우에는 자기를 위해 생산하는 것과 타인을 위해 생산하는 것이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명료하게 분리되어 있다. 반면 자본주의에서는 자신이 ‘노동의 대가’를 받고 노동하는 것으로 진행되기에 잉여노동조차 필요노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지적 소유권이니 특허권이니 하는, 소프트웨어나 콘텐츠웨어에 대한 권리에 자본이 유례없이 강한 ‘관심’과 집요한 추적을 아끼지 않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소프트웨어나 콘텐츠웨어, 지적 소유권 등에 대한 자본의 집요한 공세는 가변자본조차 불변자본의 일부로 흡수하고 통합하려는 자본의 집요한 노력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축제의 경우는 어떤 것이 있을까? 축제를 하는 사람=축제기계 그 자체가 축제의 자본주의화에 복종, 복무. 자기도 모르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축제기계가 축제-기계의 소비자가 되어버리는.
이제는 노동시간과 쉬는 시간, 레저 시간 같은 것들의 구별도 없어지면서 모두가 잉여가치 생산의 장이 된다는 점에서 ‘매끄러운 공간’이 된다. 축제 시간과 일상의 삶의 시간, 노동시간과 레저시간, 이들 간의 구별이 없어지면서 모두가 잉여가치 생산이 된다는 점에서 ‘매끄러운 공간’이 탄생된다. 예전에는 공장이라는 홈 패인 공간을 구성하는데 전력했다면, 이제는 공장의 안과 밖이 모두 착취의 공간이 된다는 점에서 공장의 홈 패임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장을 짓지 않고도, 혹은 특정한 공간에 착취하러 가지 않고도 실제 착취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이 되어버렸다. 물론 홈 패임은 여전히 존속한다. 예전에는 ‘축제장’이라는 홈 패인 공간을 구성하는데 전력했다면, 이제는 축제장 안과 밖이 모두 착취의 공간이 된다. 이런 점에서 축제장의 홈 패임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축제장을 만들지 않고도, 또는 특정한 공간에 축제를 착취하러 가지 않고도 실제 착취가 일어나게 된다.
반면 새로이 ‘매끄러운 자본’이 그와 나란히, 혹은 그것을 비끼듯이 겹치면서 자신의 새로운 장을 차지한다. 다국적 축제는 일종의 탈영토화된 매끄러운 공간을 만든다. 고전적인 경로로부터 아주 독립적인 것이 된다. 현대 축제산업의 분석과 그것에 대처하는 전략의 창안에서. 본질적인 것은 홈 패인 축제와 매끄러운 축제의 구별이다. 이는 홈 패인 축제가 영토와 국가, 다른 유형의 국가조차 넘나드는 복합체를 통해 매끄러운 축제를 낳는 방식을 밝히는 일이다. 홈 패인 축제와 매끄러운 축제의 구별이 힘들어진 현대적 상황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자본주의의 새로운 면모에 대한 매우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사유의 지점들을 제공한다. 이는 ‘현대축제’ 혹은 ‘현대적 축제’의 새로운 면모. 이에 대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사유의 지점들을 제공한다. 현대축제와 현대적 축제. 내가 기존에 언급했던 전통적 축제와 현대적 축제와는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전통적 축제는 홈 패인 공간을 만들어 내 버렸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현대적 축제. 이는 전통적 축제의 홈 패임을 다시 매끄러운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는 바로 현대자본주의의 극점에서 출현한 축제이다. 현존함대나 전략잠수함과 같이. 매끄러운 공간으로서의 현대적 축제. 어떤 특성을 가질까? 매끄러운 공간이 가진 특성들을 현대적 축제들은 가질까? 전통축제는 홈 패인 공간적 특성을 가질까? 다시 한 번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의 특성을 확인하고 상기할 것.
6. 미학 모델
매끄러운 공간의 미학적 모델은 그 특징을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원거리 상과 대비되는 근거리 상, 두 번째는 광학적 공간과 대비되는 촉감적 공간, 세 번째는 구체적 선 내지는 구상적(具象的)과 대비되는 추상적 선이다. 원거리 상과 근거리 상. 광학적 공간과 촉감적 공간. 구체적/구상적 선과 추상적 선. 매끄러운 축제는 미학적 모델의 세 가지 특징과 물론 괘를 같이 한다. 정리하자면, 축제는 근거리 상이어야 하고, 촉감적 공간이어야 하고, 추상적 선이어야 한다. 축제는 원거리 상에서 멀어야 하며, 광학적 공간에서 벗어나야 되고, 구체적=구상적 선에서 탈해야 한다.
1) 원거리 상과 근거리 상
첫 번째의 근거리 상과 두 번째의 촉감적 공간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근거리 상이란 문자 그대로 ‘가까이서 보인 상’이다. 반대는 물론 원거리 상이다. 축제의 경우, 그 원거리 상은 축제 자체를 풍경화 한다. 매끄러운 축제는 보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만져야 한다’. 축제-추상기계는 시각적 형태가 없다. 알아볼 수 없기에, 이미지는 촉감적이고 질감적인 것이 된다. 형태나 윤곽선이 있다면, 그것에 사로잡힌 우리의 시선은 그것이 소유한 질감적 상을 금세 놓쳐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클로즈업된 시선이 멀어지면 우리의 시선은 다시 축제 주위의 배경과 풍경으로 돌아가듯이 말이다. 축제에 한없이 접근하면 아스팔트 도로는 유화 그림과 같은 질감적인 표면으로 눈앞에 다가올 수도 있다. 그 표면에서는 시선이 형태를 그리는 선이나 윤곽선을 따라 가지 않는다. 그 대신에 표면이 제공하는 질감만을 느낄 뿐이다. 이를 ‘눈으로 만진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 표면에서 시선은 어디에서든 어느 방향으로도 향할 수 있다. 윤곽선이나 형태선이 만들어 내는 홈들이 소멸되면서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향하는 그런 표면이나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절대적 국지’이며, ‘상대적 포괄’에 대비되는 것이다. 축제는 ‘상대적 포괄’이 아니라. 바로 이 ‘절대적 국지’이어야 한다. 축제에서 촉감적 상을 만드는 것이 반드시 근거리화 하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과잉원사 또한 형태를 무화시키면서 일종의 촉감적이고 질감적인 상을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이때의 과잉은 인물이나 사물의 형태가 하나의 점이 될 정도로 ‘멀리 가는’ 것이란 점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림이나 영화에서 잘 보이는 접사와 원사의 예는 근거리 공간과 촉감적 공간을 매끄러운 공간의 특징으로 부각시키는 이유를 대략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축제는 떨어져야 보이지만, 가까이서 만들어진다. 축제기계는 멀리서 듣지 않는다. 축제 소비자=참가자=관객은 떨어져서 듣는 반면, 축제기계는 가까이서 듣는다. 축제기계는 보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떨어져서 보는 반면 축제기계는 가까이서 본다. 보는 자는 긴 기억을 갖지만, 하는 자는 짧은 기억으로 만든다. 축제기계 자신의 방향, 자신의 표시, 자신의 상호결합이 연속적으로 변이한다. 그것은 가까이에서 더 가까이로 움직인다.
이러한 근거리 상과 촉감적 공간이라는 매끈한 축제 즉 축제-기계의 특징은 사막이나 바다, 초원 같은 매끄러운 공간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풍경을 보는 원거리 상은 허연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근거리 상은 차라리 각각의 ‘이곳’마다 갖고 있는 질감이나 촉감 같은 감응을 통해 포착해야 한다. 순수한 접속의 공간으로서의 사막이나 스텝이나 빙원이나 바다와 같은 국지적 공간이 그러하다. 축제 또한 그러해서 우리들이 짐작하거나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런 축제 공간에서 사람들은 멀리서 보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공간의 ‘정면에’ 있지도 않으며, 그 ‘안에’ 있지도 않다. 차라리 그 ‘위에’ 있다. 방향 또한 일정하지 않으며 일시적인 휴지나 점유나 완급에 따라 변할 뿐이다.
반면 홈 패인 축제에 대해서는 들가를 빌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홈 패인 축제는 원거리 상의 요구에 의하여 정의된다. 일정한 방향성, 관성적인 좌표와 그 교환에 따른 거리의 불변성, 주위환경의 흡수성에 의한 상호결합, 중심화된 투시법의 구성을 이룬다(MP,616). 클로즈업에서 원거리 상으로 멀어지면서 풍경이 만들어지면 이제 축제는 주위환경으로 흡수되면서 풍경의 일부로 화해 버린다. 축제의 시선은 마치도 중력이나 관성이 작용하는 듯, 대상들을 잇는 비가시적인 선들을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며 결국은 소실점으로 모아져 사라지게 된다. 늘어선 대상들은 소실점과 각 점들을 연결하는 선과의 비례관계에 의해 규정된 거리를 확보하게 된다.
축제에 있어 근거리 상이란 결국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형태를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표면의 질감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또 투시법의 ‘보조선’들을 따라 시선을 하나의 중심으로 모으는 방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모든 방향으로 흘러넘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축제는 이제 광학적이라기보다는 촉감적인 기능을 부여받게 된다. “이것은 마음으로 만지지 않고는 볼 수 없으며, 눈으로 보아도 마음이 손가락이 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동물성”이다(MP,616). 유목민의 예술이 그렇듯이, 유목축제가 그렇다.
2) 포괄성과 국지성
포괄성은 자기 내부에 다수의 부분들을 담는 것이고, 국지성은 제한된 부분에 머물러 있는 어떤 것을 뜻한다. 포괄성을 가진 축제 즉 포괄적 축제는 부분들을 자기 안에 포함하는 만큼 전반적이고 전체적이며, 이런 의미에서 국지적인 어떤 것들, 국지적 축제와 대립된다. 가령 자본에 의한 축제의 ‘지구촌화’는 특정한 지역적 제한을 수립하는 축제의 ‘지방화’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된다.
매끄러운 축제는 근거리적이고 촉감적이다. 따라서 이는 많은 것을 쓸어 담는 포괄성을 갖지 않는다. 반대로 각각의 부분들이 갖는 특개성에 주목하는 만큼 ‘국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홈 패인 축제는 원거리 상이고 풍경의 일부분으로 다양한 것들을 포함하며, 윤곽선이나 수평선 내부에 담는다는 점에서 보면 ‘포괄성’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매끄러운 축제가 국지적인 것이고, 홈 패인 축제가 포괄적인 것이라는 통상적 대립도식을 그대도 반복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매끄러운 축제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어떤 국지적 부분에 집착한다는 것이 아니라, 형태나 윤곽선의 홈을 넘어 가면서 동시적이며 다방향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해 두어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 구도가 단순 대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축제의 홈 패임과 매끈함은 포괄적인 것과 국지적인 것처럼 단순하게 대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포괄적인 것이 아직도 상대적이다. 반면에, 다른 경우에는 국지적인 것이 이미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시선이 근접한 경우, 공간은 시각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눈 자체가 촉감적이고 비광학적 기능을 갖는다. 어떠한 선도 하늘과 땅을 분리시키지 않으며, 동일한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수평선도, 배경도, 투시법도, 극한도, 윤곽선이나 형식도, 중심도 없다.
어떤 부분을 점하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다. 실은 이미 모든 방향을 동시에 점하고 있는 것이란 점에서, 이러한 국지성은 국지성과 통상 짝지어지는 상대성 즉 어느 한 방향이라는, 상대적인 부분이란 의미에서 벗어나 절대성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미 그 자체로 ‘전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들가의 표현을 전용하자면, 이러한 국지성을 ‘절대적 국지성’이라 부르며, 매끄러운 공간에 달라붙어 그 전체를 점유하며 나아가는 유목축제를 ‘절대적 유목축제’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절대적인 유목축제는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동하는 국지적 통합으로 존재한다. 동시에, 방향의 결합 및 방향 변화의 무한한 계속을 통해 매끄러운 공간의 축제를 구성할 것이다. 이는 생성 그 자체, 진행 과정과 일체가 된 하나의 절대적 성격의 축제이다. 그것은 이행의 절대자이며, 유목적 축제에서는 주체가 그대로 보이며 나타난다는 점에서 자신의 시현(示顯)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절대자는 국지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어디에서도 가능하다는 점 즉 장소가 한계를 갖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렇다.
반면 홈 패인 축제의 포괄성은 이미 대비되는 ‘상대적 포괄성’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을 담긴 하지만, 특정한 것만을 특정한 방식으로 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형태만으로, 소실점을 향해 모이는 보조선 안에 담는다는 점에서 상대적이다. 시선은 소실점을 제외한다면 제한된 것, 제한된 형태만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이다. 물론 이런 상대적 포괄성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절대적인 것을 요구한다. 포괄되는 것을 배열하기 위해서 절대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수평선이나 그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소실점, 혹은 그것을 통해 풍경 전체를 감싸는 ‘배경’이 그것이다. 이는 ‘포괄하는 것’ 이라고 부르고, 이것에 의해 둘러싸이고 담기는 것은 ‘포괄되는 것’이다. 여기서 절대적인 것은 수평선이나 배경, 다시 말해 ‘포괄하는 것’으로서, 이것 없이는 어떤 포괄적인 것 내지 포괄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인 윤곽 내지 형식이 등장하는 것은 이 배경 위에서다.
따라서 여기에서 절대적인 것은 포괄되는 어떠한 부분도 아니며, 따라서 어떤 국지성도 갖지 않는다. 물론 포괄된 것 속에도 절대적인 것이 나타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중심이나 소실점처럼 명확하게 설정된 특권적인 장소에서만 나타난다. 사실 투시적인 풍경에서 시선이 모든 곳으로 동시에 향할 수 있는 유일한 점은 소실점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이 점은 ‘국지적인 절대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는 국지적인 부분들이 절대성을 갖는 것 즉 절대적 국지성과는 반대로, 오직 예외적이고 특권적인 중심에게만 그 절대성이 국지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국지적 절대성을 가질 뿐이다. 바로 이 포괄하는 것으로서 수평선이나 국지적 절대자로서 소실점은 형태의 배열이나 시선의 흐름을 통합한다. 각각을 하나의 유기적 풍경의 일부가 되게 만드는 홈으로 기능하며, 화면 안에 홈을 파는 중심이다. 풍경화를 그릴 때 투시법에 익숙한 사람들은 일단 수평선을 그리고 소실점을 정한 뒤에 소실점으로 모이는 보조선들을 긋고 시작하듯이, 홈 패인 축제는 그렇게 시작하다. 그리고 그 선 안에다가 나무, 건물, 사람 등을 그려 넣는다. 때로는 삐딱하게 놓여서 그런 배열의 ‘조화’와 ‘통일성’을 위협하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그 선 안에다 맞추어 넣거나 아니면 아예 빼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축제에 홈을 패이게 하는 방식은 늘 그렇다.
매끄러운 공간을 이루는 사막이나 하늘, 바다 등이 이러한 풍경에서 바로 ‘포괄하는 것’의 역할을 하듯이, 축제 또한 상대적 포괄성 안에서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즉 그것은 사막이나 하늘, 바다가 지평선 내지 수평성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포괄되는 것들 혹은 포괄시키는 것들을 둘러싸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사막, 하늘 또는 바다, 대양, 무한한 것은 우선 포괄하는 것의 역할을 하고 수평선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대지는 이렇게 둘러싸이고 포괄되며, 부동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형식을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요소에 의해 기초 지어진다”
이런 식으로 수평선이 되고 중심이 된 ‘포괄하는 것’은 이제 매끄러운 공간에 홈을 파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역할은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는] 매끄러운 것으로 존속하는 것이나 척도화되지 않은 것을 이번에는 혐오스러운 가장 깊숙한 곳 속에, 시체의 안치소 안에 처박아 넣는 것이다.”(MP,617) 이런 점에서 우리는 상대적 포괄자 안에 포섭되는 매끄러운 공간 그 자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덧붙이자면, 이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거대한 종교 또한 사막과 같은 매끄러운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는 모든 것을 노모스에 대립되는 절대화된 법에 귀속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경우 사막 내지 ‘절대’는, 사실은 매끄러운 공간이 아니라 홈 패인 공간 안에서 포괄자로 기능하는 절대가 될 뿐이다. 법과 신이라는 상대적 포괄자 안에 모든 것을 가두기 위한 ‘국지적 절대’로 기능할 뿐이란 점에서, 지평선이나 수평선과 비슷한 위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3) 구상적 선과 추상적 선
이제 선의 문제를 다룰 차례다. 구상적 선과 추상적 선의 대립이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 사이에 있다. 우선 가까운 예로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보자. 친일 혹은 친일적 행동을 하는 이른바 친일파의 문제. 모든 ‘친일’ 문제는 결국 일본이라는 대상에 대한 동일화, 즉 동일성의 사유가 잉태한 산물이지 않을까? 자신과 대상의 차이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이러한 사유에 포획되는 것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또는 시간의 문제 아닐까? 친일의 문제를 생각할 때, 동일성의 사유에서 차이로의 사유로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이다. 모방충동은 자신과 대상을 동일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일종의 ‘쾌감’과 같은 것을 지향하는지도 모르겠다. 한일간에 이른바 ‘현안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표출되는 이 언표는 어쩌면 가장 적절하며 절묘한 묘사이고 표현일지 모르겠다. 일본이나 미국에 대한 모방충동은 결국 대상과 자신을 혼연일체화 함으로써 발생하는 바로 그 ‘쾌감’에 그 기원을 두며 궁극적으로 그곳을 지향한다.
들가는 예술이란 일차적으로 모방이 아니라 추상이라고 말한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축제 또한 구상적 선이 아니라, 추상적 선에서 출발한다는 명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구상적인 것 내지 구체적인 선은 형태를 그린다. 구상적이며 구체적인 축제는 형태를 그릴 뿐이다. 그러나 이에 대비해 추상적 선의 중요성이 강조된다면, 이 역시 추상적 축제가 강조되어야 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리고 그것이 유기적인 선과 대립된다는 논지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공감한다면 축제 또한 유기적 축제와 대립된다는 주장에 동의할 필요가 있다.
축제의 추상화와 ‘추상 축제’. 구상축제에서 추상축제로. 우리는 추상을 변형이요 탈형식화라고 이해해야 한다. 축제는 구상에서 추상으로 향해야 한다. 따라서 추상적 축제란 기하학적 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구상적이며 자연적인 형태를 벗어나는 축제이며, 재현적인 선을 그대로가 아니라 변형시키는 그런 축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추상적 축제는 직선이나 기하학적 축제가 아니라, 오히려 곡선이고 비기하학적 축제이다. “선사예술이 완전한 예술이라면, 그것은 바로 비직선적이지만 추상적인 선을 솜씨 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MP,620) 추상 축제는 공간 공포나 불안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어디서나 일차적으로 존재하는 탈주선이고 ‘클리나멘’, 즉 말 그대로 ‘벗어나는 선’이며, 의식적인 변형인 경우에조차 니체적인 의미에서 그 자체로 즐거운 ‘놀이’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추상적인 축제는 유기적인 선이나 기하학적인 선에 의해, 구상적인 선에 의해 사로잡히지 않았던 원시인이나 선사시대의 축제에서, 혹은 유목민의 축제에서 잘 나타난다.
추상적인 것을 기하학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추상적인 것과 기하학적인 것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추상적인 선을 직선적인 것이나 기하학적 선으로 환원하는 것 자체가 서구적 편견이다. 그리고 구상적이지 않은 선은 전부 일종의 기하학적으로 양식화된 선이라고 보는 것 자체 역시 서구적 편견이다. 자신들의 예술과 수학의 기원이 이집트임을 믿고 있으며, 미조차도 ‘비례’에 의해 정의할 정도로 기하학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서구적인 편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가는 추상적인 것은 기하학적인 것이 아니라 유목적인 것이라 정의한다. 그러한 유목민의 추상적 선이 바로 매끄러운 공간을 정의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함으로써 이러한 서구적 편견과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축제에 있어서 우리가 상대화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리라. 축제의 유기적 통일성, 모방과 감정이입, 구상과 재현적 형식 혹은 기하학적 형식, 대칭성 등. 이들을 절대화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상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유목민 축제/유목축제는 그 자체로 기하학적이지 않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에서 추상적이다. 유목축제는 복수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점과 윤곽과 형상 사이를 자유자재로 통과한다. 유목축제는 형상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변형시킨다. 그것은 사실적인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유목축제의 선은 점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유목축제의 선은 사이를 통과하는 선이다.
사이를 통과하는 선. 축제에서 기하학적 선과 추상적 선의 무조건적 동일시가 있다. 이는 조심해야 한다. 이는 여러 예를 통해서도 부절적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추상적 축제와 구상적 축제가 섞이고 겹쳐지거나 하는 관계에 대해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추상적 축제가 추상화의 역할을 대신하는 글의 출현과 더불어 구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리고 그러한 글을 만들고 관리하는 제국적 국가장치의 출현과 더불어 구상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역으로 몽골인이 문자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문자를 만드는 데도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이와 연관해서 보면 매우 좋은 예이다. 몽골 제국이라는 역설적인 ‘제국’이 만들어지고 다른 국가들에 대한 통치가 중요한 문제가 되면서 문자를 다루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관리로 활동하게 했다는 것도 그렇다.
글과 그림, 추상적 선과 구상적 선의 이러한 관계와 축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글씨를 배우면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다는 말. ‘글’로써 축제를 생각하는 순간, 축제의 ‘그림’을 잃게 된다. 구상적 축제가 만들어지는 순간. 추상적 축제는 사라진다. 구상화되고 문자화된 각종 축제들의 등장과 더불어, 추상화된 그림으로서의 모든 축제들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자본을 그 밑에 깔고 그 위에 쓰인 문자들로 구상화된 축제들. 그림을 추상하여 글자가 된다는 사고는, 그림과 글자의 이원적인 경계선을 불변의 것으로 고정하는 것이다. 추상이란 개념 역시 형상의 ‘제거’라는 의미로 고정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를 추상하여 그림으로 되돌릴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림/글자의 구상/추상의 대응관계 그리고 그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자에서 그림으로 가는 추상을 통해 추상이 단순히 형상의 제거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해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문자를 추상하는 것이 문자를 원래의 그림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추상적 선을 그리는 것이란 점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추상을 글자와 그림의 이원성에서 벗어난 변형의 과정으로 재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축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야할 것은 구상적 축제와 추상적 축제의 이분법 대응관계 혹은 그 대립이 아니다. 구상적 축제가 가진 어떤 형상, 즉 형식, 목표점, 추구, 지향점 등등의 제거만이 그 가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구상적 축제를 추상하는 것이 추상적 축제가 되는 길 또한 아니다. 갈 길은 다른 종류의 추상적 축제를 그리는 것이란 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추상적 축제와 구상적 축제의 이원성에서 벗어난 변형의 과정으로 재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축제가 과연 구상적이어야 할까? 축제 자체가 어떤 모습 형태 등등을 띄는 구체적인 그 어떤 것이어야 할까? 축제의 시공간을 흔히들 그리고 오랫동안 두 국면으로 크게 나누어 왔다. 의례(儀禮)와 난장(亂場). 이 말은 그 속에는 이미 구상성과 추상성이 함께 들어가 있다는 뜻이 된다. 의례의 구상성과 난장의 추상성. 난장에는 그 어떤 형식과 표현이 들어가 있지 않다. 제신과 인간의 구별 없이, 들어갔다 나왔다, 그냥 같이 노는 것이다. 신이 인간으로 인간이 신으로 탈바꿈하면서 말이다. 그에 반해 의례는 대단히 구상적이다. 현대적 축제의 경우는 어떤가? 형식적 구상적인 것이 너무도 많다. 형상적인 것도 물론 대부분이다. 질료적인 것들에서 모든 형상으로 나아가 버렸다. 목적성과 지향성을 가지고 자본성을 근본에 깔고 목적성과 지향성을 중심에 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추상 축제의 경우는 반대로 목적성이 잘 안 보인다, 희미하다,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난잡하다, 질서가 없다, 미풍양속을 해친다, 등등으로 힐난하고 비난받는다. 너무 구상적이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축제 자체가 가지는 구상과 추상의 두 측면이 서로 통용되는 점을 넘어. 작금은 구상성이 너무 많은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잃어버린 추상성의 회복이 어쩌면 현대 축제에서 보이는 인기와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요사코이의 경우, 참가자의 형식성 즉 구상성 안에서 개인은 거의 완벽한 추상성을 회복할 때, 아니면 그걸 경험했을 때, 또는 그랬기 때문에 엑스터시를 느끼는 거 아니겠는가? 거꾸로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우리가 축제에서는 느끼는 절정감은 어느 때 어느 순간에 오는가? 바로 추상성이 극대화되었을 때 아닌가? 그래서 축제의 추상성과 구상성의 문제는 핵심적이다. 이 추상성의 주제는 그동안 현대 축제가 눈치 채지 못했던 것들에 또 다른 시사점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서 이 구상과 추상의 문제는. 의례와 난장의 복합적 구조를 다시 논의하고 재구축하는데 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 포괄하는 축제, 둘러싸는 축제, 윤곽선, 혹은 배경을 이루는 수평선과 지평선 등과 같은 성격의 축제들은 제국적 선과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추상적 축제는 정착민 축제가 그리는 제국적인 선들과 상호작용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것은 서로 대립할 때조차 유목민 축제의 독창성과 환원 불가능성을 포함하여 나타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추상적 축제는 구상적/구체적 축제와 대립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기하학적 선이 지극히 묘사적인 구상적 선이 되었던 것처럼, 혹은 제국적 선에서 추상적 선이 배경을 형성하는 수평선이나 에워싸는 선이 되었던 것처럼, 추상적 축제가 특정한 양상으로 사용되는 경우 구상적인 축제가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구상적인 것 혹은 모방이나 표상은 선이 이런저런 형식을 가질 때, 그 선들이 갖는 어떤 특징으로부터 생겨난 결과다” 즉 구상적 축제는 추상적 축제가 어떤 조건하에서 구상적인 기능을 수행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구상적 축제는 이미 어떤 형태와 형상을 그리는 한에서만 구상적이기 때문에, 구상적인 축제가 특정한 조건에 따라 추상적인 축제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비대칭성이 두 축제 사이에 있다는 거다. 이는 추상적 축제의 일차성과 ‘일반성’을 함축하고 있는 말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구상은 추상과 대립되지만 추상은 구상과 대립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추상적 축제는 구상적 축제라는 ‘대립물’이 출현하기 이전에, 대립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한마디로, 구상적 축제는 추상적 축제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즉 구상적 축제가 추상적 축제로 변이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 모든 축제는 추상적이었다. 구상적 축제는 그 이후에 나타난 것들이다. 모든 추상적 축제는 구상적 축제의 앞에 있다. 구상적 축제는 추상적 축제 이후다.
모방을 하는 경우에도 오히려 추상적 축제의 어휘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하기 위해 차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원형 그 자체를 정확히 재현하고자하는 것이 아닌 한 말이다. 예를 들어, 여러 가지 다른 동물에서 차용한 모티프들의 혼합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런 혼합의 결과 만들어진 수많은 실재로는 존재치 않는 동물 형상들이 있다. 이들 ‘상상의 동물’ 내지 ‘전설적 동물’이 된 것조차 추상적 선을 구상적 형상으로 포착하려는 ‘자연주의화’가 발생한 뒤의 일이다. 즉 그 이후에 자연적 형상을 변형하고 추상하려는 ‘욕망’이 상상의 동물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방이나 구상적 축제는 결코 추상적 축제를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추상적 축제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추상적 축제의 특수한 형상으로서 구상적 축제를 설명할 수는 있다. 이러한 비대칭성을 통해 추상적 축제의 일차성은 쉽게 증명된다.
만약, 추상과 모방이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근대 축제에서 나타나는 정확히 재현적인 상, 정반대로 재현적 성분을 찾을 수 없는 20세기 축제의 순수한 추상적 축제들은 각각의 축제들의 고유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가정하여 제쳐두자. 문제는 형태를 변형시키는 축제, 혹은 이런저런 형상이 뒤섞여 만든 혼합적인 형상의 축제일 것이다. 가령 어떤 축제를 보고, 추상의 일차성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저게 어디 사건 그 자체냐”, “대체 저런 사건의 재현으로서의 축제를 본 적이 있느냐”고 말할 겁니다. 반면 모든 축제에서 모방과 재현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대로 말할 것이다. “아무리 변형시켰지만 저것 역시 사건을 모방/재현한 것이 분명하지 않냐”하고 말이다. 실제로 소비에트 미학의 영향 아래 있었던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에서라면, 그 추상적 축제에서도 ‘위대한 리얼리즘 정신의 승리’라는 놀라운 발견을 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가령 화성인의 축제를 보고서도 똑같이 말할 겁니다. “저게 지구인들의 축제를 모방한 건 아니지만, 지구인 축제에서 보이는 개별 요소들을 모방한 것이고 재현한 것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위대한 리얼리즘 정신, 위대한 미메시스 충동의 승리”라고 말이다. ‘모방’과 미메시스로 예술이나 ‘진리’를 이해하는 지구인들의 예술이나 학문의 전통이 이러한 관념과 근본적으로 같은 선 위에 있다고 한다면 말이다.
사실 이렇게 보기 시작한다면 세상에 모방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리얼리즘은, 아니 서구 예술이론은 미메시스와 모방을 ‘증명’해온 것이지. 아마도 그들은 UFO를 가지고 노는 축제에서도 지구의 접시를 모방한 흔적과 자취를 발견할지 모를 일이다. 언젠가 안드로메다 성운의 어떤 별에서 문명의 자취를 발견하는 날, 그 어딘가에 남겨진 축제에서도 뱀이나 바퀴벌레 등과 같은 지구 동물의 모습을 볼 것이다. 그 영원한 미메시스의 흔적을 찾아낼 것이다. 인류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를 관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어떤 사건에서 촉발된 축제가 과연 모방으로 가득한 것일까? 차라리 그 반대는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이 그때 그 사건인지 아닌지 모르게 만들고, 그 사건 같지만 그것 아닌 것으로 만드는 방법. 그런 식의 조합은 사건을 변형시키는 방법이고 축제를 변형시키는 방법일 수도 있지 않을까? 수많은 축제들은 대체 무엇을 모방한 것이란 말인가?
우리는 이미 알게 되었다. 어떤 것이 그것과 연결되는 다른 것과의 관계가 달라지면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말이다. 접속과 계열화 개념 덕분에, 어떤 것과 접속되고 그래서 어떻게 계열화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예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물쇠는 그 연결되는 방향이 달라지면 침실에서 감옥으로 바뀐다. 그런데 가령 요사코이처럼 저렇게 상이한 노래와 춤과 의상 등과 같이 각 항이나 부분들이 엉뚱하게 연결된다면, 그게 처음 시작했을 때의 요사코이인가? 만약 가락은 요사코이 같은데, 음악 요사코이부시는 삼바리듬으로 흐물거리고, 대형은 군대행렬처럼 빈틈이 없이 뻣뻣하게 움직이고, 의상은 유카타 한 장같이 편한 것이라면, 그리고 손에는 농기구였던 나루코가 들려있다면, 그 각각의 것들은 ‘모방’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것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매 해의 요사코이는 대체 무슨 축제일까? 이것도 모방일까? 각 부분들은 모방이고, 전체 움직임은 모방이 아니라면, 각 항들은 ‘미메시스’에 속하지만 오도리코타이는 그렇지 않단 말일까?
한국말 속에 들어와 있는 일본어나 외래어들 속에서 끊임없이, 혹은 마지막까지 그 일본적 요소, 외래적 요소를 찾으려고 하는 눈물겨운 노력들. 한글전용주의자들의 끈질긴 노력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이는 즉 아무리 다른 형상에서도 동일한 것을 발견하려는 의지는 혹시 아닐까? 비슷한 것 속에서도 차이를 보고, 차이를 찾아내려는 의지. 일본적인 것에서 끊임없이 한국적인 것과의 동일성을 발견해보려고 하는 의지. 일본 것은 한국 것의 모방 혹은 미메시스라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의지. 누구는 저걸 보면서 원조 요사코이도 아니고, 변형 요사코이도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고 보는데, 왜일까? 누구는 이건 원조 요사코이의 가락의 모방이고, 저건 나루코오도리의 모방이라며 모방된 부분만을 보는데 왜일까? 누구는 전체를 봐서 그렇고, 누구는 부분을 봐서 그런 걸까? 삼바 가락에다 민요의 가사를 붙이면 그게 민요일까? 동물들로부터 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쓰던 나루코는 오도리코타이의 손에 들린 ‘저것’은 아직도 농기구일까? 그건 차라리 악기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이처럼 상이한 부분들로 저렇게 뜯어 맞춘 형상에서 오직 동일한 부분형태의 모방과 재현을 보게 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무리 다른 형상에서도 동일한 것을 발견하려는 의지 아닐까? 그래서 전체가 안 되면 손과 발로 쪼개서 동일한 것 즉 모방을 찾아내기. 손으로도 안 되면 손가락으로 쪼개서 다시 동일한 것을 찾기. 결국은 동일한 것, 모방된 최소 형상이 나타날 때까지 쪼개고 잘라서라도 동일한 것, 모방된 최소 형상이 나타날 때까지 쪼개고 잘라서라도 동일한 것. 그 동일성을 찾아내려는 의지 아닐까? 그렇다면 축제를 모방이나 미메시스라고 보는 입장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동일성을 찾아내고 확인하려는 그런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민요의 가사와 삼바의 리듬이 섞인 오도리코타이에서 민요도 아니고 삼바도 아닌 것을 보는 것. 다시 말해 민요와도 다르고 삼바와도 다른 것을 보기. 그것은 비슷한 것 속에서도 차이를 보고, 차이를 찾아내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모방이라는 개념과 추상 내지 변형이라는 개념 중 어느 하나를 편들지 않고 그저 평평하게 내버려둔 상태에서조차, 우리는 거꾸로 모방과 미메시스 관념에서 동일성의 의지를 동일화하려는 의지를 보는 것은 아닐까? 반면, 추상과 변형의 관념에서는 차이화 하려는 의지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Ⅲ. 홈 패인 축제와 매끄러운 축제
너는 홈 패임과 매끄러움에서 출발하여, 추상적 축제와 구상적 축제에 이르렀다. 이들에 대해 말하면서 전자가 매끄러운 공간의 특징이라는 것이고, 후자는 반대로 홈 패인 공간에 속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만약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다면 이젠 어떤 축제 하나에 단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던, 수많은 축제들에 사용되건,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의해 매끄러운 것과 홈 패인 것을 또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축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축제를 흐르는 여러 선들, 그 선들 중 횡단선이 대각선에 종속되고, 대각선이 수평선과 수직선에 종속되고, 그리고 수평선과 수직선이 결국에는 점에 종속되는 체계를 가정하여 보자. 수직선이 심지어는 잠재적인 점의 경우에도 말이다. 선의 수가 얼마가 되던 상관없다. 직선적이며 단선적인 이런 종류의 체계는 공간에 홈이 패이고, 선이 윤곽을 그리게 되는 형식적인 조건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축제는, 비록 그것이 특정한 사물을 재현/표상하고 있지 않은 듯이 보이더라도, 그 자체로 이미 언제나 재현/표상적이며 형식적인 축제일뿐이다.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짜인 격자와 같은 축제. 윤곽선으로 구획되어져 그 밖과는 구별 지어진 축제 . 세상을 보는 창인 격자틀과 같은 모습을 한 축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투시법적 축제 공간은 사방팔방이 격자로 가득 찬 홈 패인 공간의 축제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일지 모른다. 투시법적인 선들로 가득 찬 축제와 그 축제를 가득 채우고 있는 투시법적 선들, 그리고 그 선들 사이에 갇혀 있고 끼여 있는 사람이나 형상들은 이들 축제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풍경일 것이다. 그 선들이 더 이상 꼼짝할 수 없는 홈 패인 축제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반대로 매끄러운 선을 가진 축제의 경우에는 이렇다. 거기서는 선들이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으며 어떤 윤곽도 그리지 않는다. 이것은 더 이상 점에서 점으로도 이행하지 않는다. 단지 점 사이를 통과하며, 수평선과 수직선에 대해서 끊임없이 기울여지며, 형상적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대각선에서 벗어난다. 이러한 선은 외부도 없고, 형태도 배경도 없다. 시작도 끝도 없이 변화하며, 연속적인 변이체를 생성해 내는 생생한 선이다. 이러한 선을 그리는 흐름을 만드는 축제야말로 진정 추상적인 축제이며 매끄러운 축제인 것이다.
또 하나 홈 패인 축제 체계를 형성하는 요소로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대칭성이다. 대칭성은 선의 자유로운 사용을 불가능하게 한다. 어떤 선도 대칭적인 짝을 동반해야만 하고, 선의 위치나 움직임 또한 하나를 그으려는 순간 이미 대응되는 선의 위치나 움직임을 고정한다.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는 모든 선을 불합리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칭적 축제는 그 직선적인 체계가 반복을 제한하고, 축제가 가진 무한한 진전성을 가로막는다. 동시에 방사상 내지 별모양으로 중심점과 방사선 선들의 유기적 지배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대칭적 축제이다. 반면 대칭이 아니라 반복, 그것도 차이나는 반복으로 대비시키는 비대칭적 축제. 들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형식이 아닌 표현능력을, 형식으로서의 대칭성이 아니라 능력으로서의 반복성을 지닌, 그런 축제가 비대칭적 축제라 말할 수 있겠다. 축제와 축제 사이의 대칭은 이미 충분히 언급했듯이 우리 주위를 지치지고 않고 떠도는 수많은 축제들, 고추축제에 대한 딸기축제, 수박축제에 대한 사과축제 등을 연상시킬 것이다. 대칭을 만들어내는 그 어떤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추상적 선 개념들에서 출발한 사유를 추상을 특징으로 하는 추상적 축제로 나아가게 하는 길에는 어떤 사유와 실천이 필요한 것일까? 좀 더 일반적인 양상으로 개념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축제에서 그리는 추상적인 선이란 대체 무엇일까? 다방형적일 것, 안과 밖을 가지지 않을 것, 형식과 배경도 갖지 않을 것, 아무 것도 한정하지도 말 것, 윤곽을 그리지 않아야 할 것, 얼룩이나 점들 사이를 지나는 선일 것, 매끄러운 공간을 채우는 선일 것, 근접한 촉감적이고 시각적인 질료를 뒤섞는 선일 것. 이들 표현을 다시 빌려 축제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우리들 몸을 끌어당기기는 하나 몸에 계속적으로 머물 어떤 장소도 제공하지 않는 그런 축제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좀 더 간결하게 추상적 축제는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고 어떠한 형식을 제한하지도 않는, 가변적인 방향의 축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추상적 선을 그리는 추상적 축제. 축제가 가야할 길, 축제-되기의 길은 바로 이런 것들 아니겠는가.
‘촉발’. 지적 호기심에서 촉발된 지적 놀이. 촉발은 서로 간의 질적 변화를 야기한다. 촉발은 상호 간의 양태적 변용을 야기한다. 촉발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간의 차이나는 변화를 불러일으키며, 그것이 작동함을 알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그에 따른 '감응'이 있기 때문이다. 홈 패임과 매끈함의 작용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행 내지 조합이다. 물론 매끄러운 공간과 축제 자체가 해방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투쟁이 변화하고 치환되는 것은 바로 거기에서부터이다. 또한 우리의 삶이 자신이 넘어가야할 쟁점들을 어떻게 재구성하며, 새로이 등장하는 벽들을 대면하고 월경하며, 이전에는 없는 차이의 스타일 창안해 내고, 상대방조차 그 모습마저도 변용시키는 것도 바로 거기서 부터이다. 물론 매끄러운 공간과 축제가 우리를 구하는 데 충분하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
로컬과 인터내셔널이 만나, 작은 것과 큰 것이 만나,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 서로 간의 변화를 야기하는 촉발과 변용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감응이 있었다. 만남을 통해 서로가 변한 것이다. 조우. 랑콩트르. 촉발과 변용. 거기서 만들어지는 감응. 아니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만남과 조우에서 촉발된 감응은 우리 서로에게 변용을 일으킨다. 스피노자의 용어로 하자면, 서로가 다른 양태가 된 것이다. 다른 양태가 된 서로는 만나는 모든 것들에 또 다른 변용의 촉발을 일으키게 되고, 그것들은 변용의 촉발을 다시 받게 될 것이다. 한번 촉발된 이 연쇄는 인식하던지 또한 인식조차 못하는 사이에 우리 자신의 감각과 느낌, 그리고 사유방식과 관념들에 어느새 스며들어 또 다른 촉발을 야기 시킬 것이다. 촉발의 연쇄, 그것이 바로 축제이고, 마지막엔 삶이 축제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게 되겠는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의 매끈한 공간만으로도
충분하다고는
절대로 믿지 말아라.
(『천의 고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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