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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 '두 절을 비교하다'
조주선사가 한 행자(行者)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북쪽 절(北院)에서 왔습니다."
"그 절은 이절과 비교해서 어떠냐?"
행자가 아무 대답이 없자, 선사는 곁에 서 있는 한 스님에게 대신 대답하게하니
그 스님이 대신 말했다.
"그 절에서 왔습니다."
선사는 웃고 나서 다시 문원(文遠)사미에게 대신 대답하게 하자, 문원이 말했다.
"행자는 도리어 큰스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느 날 한 행자(行者), 불도를 닦는 수행자가 조주를 찾아오니 선사가 어디서 왔는지 묻자, 북원(北院), 북쪽에 있는 어느 절에서 왔다고 했다. 그러자 조주는'그 절과 나 조주가 있는이 절을 비교해서 어떠냐?'고 물었는데 그 행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조주의 질문은 글자대로 보면, 이쪽 절과 저쪽 절, 양쪽의 절을 비교해 보라고 한 것이지만 그 이면의 뜻은 바로 직지인심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본분사(本分事), 즉 마음공부의 측면에서 이쪽 절과 그쪽 절을 비교해 보라 하는 것은, '나 조주에게 그대 자신의 참 모습(本來面目)을 보여 달라. 그대의 성품이 조주의 성품과 다름이 있는가?' 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한 마디라도 허투루 말하지 않는 조주의 성격을 알면 놓쳐 버릴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 절'은 바로 이 행자의 본심을 뜻하는 것이다.
그 행자가 아무 말이 없자, 조주는 옆에 서 있는 한 스님에게 대신 대답해 보라고 했다. 그 스님은 "그 절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행자가 말한 '북쪽 절에서 왔습니다'와 같은 말이지만 그 뜻은 다르다. 조주가 이쪽과 저쪽 절을 비교해 보라고 했는데 이 스님은 선사의 말에 끌려가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냈다고 볼 수 있다. 공부한흔적이 물씬 풍긴다.
그러나 만약 자기 자신을 말하자면, '저는 그 사원, 깨달음의 도량에서 왔으나 와도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른 뜻이다. 그래서 행자의 '북쪽 절'은 현실 속의 이름과 형상인 절이지만 이 스님의 '그 사원'은 절대 정신세계, 즉 우리 마음속의 보리도량을 일컫는 것이다. 보리도량이란 우리 자성(自性)이 원래 스스로 원만하게 갖추고 있는 여래, 부처, 반야 지혜, 깨달음의 땅, 그 자리이다.
조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허허' 웃었다.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은 아니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응답도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면서, 시중을 드는 문원(文遠)에게 다시 다른 말로 대신해 보라고 시켰다."행자는 도리어 큰스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이 말은 또 무슨 뜻인가?
이것도 그렇게 알기 쉬운 말이 아닌데,조주는"그쪽 절과 여기 절을 비교해서 어떠한가?"하고 행자에게 물었는데, 그 행자는 아무 대답 없이 침묵을 지켰고, 문원(文遠)은 그 행자의 침묵을'조주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즉 조주의 말대로 따라가지 않고, 말없음으로써 물리친 것'으로해석한 것이다.
바로 그 행자의 참모습을 침묵으로써 대신 보여줬다는 아주 날카로운 선(禪)적 안목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시자인 문원은 이제 조주선사 밑에서 열심히 배우며 수행한 결실이 서서히 맺혀지는 것 같다. 그러나 그 행자의 경지는 이 짧은 문답만으로 환히 밝혀 알기는 쉽지 않다. 그냥 ‘같고 다름이 있겠습니까?’ 라는 정도로 반문했다면 차나 한잔 마시고 떠났을 것이다.
452. '걸음 걸음마다 도량이다’
조주선사가 한 강사(座主)에게 물었다.
"무슨 공부(業)를 해왔는가?"
"유마경(維摩經)을 강의합니다."
"유마경에서 '걸음걸음마다 도량(道場)이다' 라고 했는데 강사(座主)는 어느 곳에
있는가?"
강사가 아무 대답이 없자 선사는전익(全益)을 시켜 그 대신 말하게 하니 전익이
말했다.
"다만 이 한 물음으로 도량을 알 수 있습니까?"
"그대의 몸은 도량 안에 있는데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 어서 말해 보아라."
"큰스님께서는 저의 마음을 찾으시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럼 이렇게 묻고 대답하는 것은무엇입니까?"
"나는 마음 작용(心所) 안에 있지 않다. 법이란 눈, 귀, 코, 혀, 몸, 뜻을 초월하여
아는 것이다."
"이미 마음 작용(心所)에 있지 않다면 큰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찾으십니까?"
"그대가 말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초월해도 알지 못하는데 제가 무엇을 말해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내 침이나 핥아 먹어라."
이 문답은 조금 기니까 간추려서 강설하겠다. 어느 강사(座主)가 찾아와서 유마경(維摩經)을 강의한다 하니, 조주는 유마경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곳마다 모두 도(道)를 닦는 수행처'라고 했는데, 이때 "좌주(座主)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정신을 잃게 만들고선 '그대의 참 모습(마음)을 내놓아 봐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스님, 차나 한잔 주십시오.'면 족하다.
그 강사는 이 말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묵묵부답이니 조주는 아마도 곁에서 공부하는 전익(全益)이란 스님에게 그 강사를 대신해서 대답해 보라고 한다. 그동안 제자가 마음 수행한 결과를 그 강사 앞에서 판단해 주고 싶은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전익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횡설수설한다.'이 한 물음으로 도량을 알 수 있느냐?', '스님께서 제 마음을 찾는 것이 아니냐?', '마음 작용(心所) 속에 있는게 아니라면 왜 찾느냐'는 둥, 자신의 참 모습만 드러내면 될 것을 전혀 핵심을 벗어난 말만 늘어놓고 있다. 제자의 그런 모습에 실망한 조주의 표정이 여간 씁쓸해 보이지 않는다. 결국엔"내 침이나 핥아 먹어라."라는 말씀으로 전익을 질책하고 끝맺는다. 나머지 대화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다만 여기서 심소(心所)란 용어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드리겠다. 그런데 불교 경전이나 해석한 책들을 보면, 모두 어려운 한자 용어 위주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법을 배우고 깨닫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 같다. 도(道)를 닦고 수행하는 데만 노력을 기울여도 될까 말까 한데, 한문으로 된 경전, 조사어록의 어려운 용어, 문자 해석을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면 본질을 벗어나 손수레 바퀴를 헛돌리는 일이라 하겠다.
요즘에는 경전의 한글화가 많이 진척되었지만 어려운 용어는 한자를 그대로 빌려 쓰고 있는데, 이를 보다 쉽게 배우고 이해할 수 있도록 불교계의 노력이 있어야 생활 불교로서 도(道)가 널리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몸에는 눈, 귀, 코, 혀, 몸, 뜻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6根이라 함)이 있고, 이 6 감각기관이 빛,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생각)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대상(6境이라 함)에 맞닿았을 때 6가지 인식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식(識)이라고 한다. 즉, 눈으로 보는 안식, 귀로 듣는 이식, 코로 냄새를 맡는 비식, 혀로 맛을 감지하는 설식, 몸으로 감촉을 느끼는 신식, 뜻으로 안다는 의식인 6식(識)이 일어난다.
이 6가지 식(識)은 제6식인 의식(意識)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한다고 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이 6식만 있는 것으로 봤는데, 그 후 마음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면서 대승불교 유식론(唯識論)에서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인 7식(識), 말나식(末那識)과 무의식으로 보는 8식(識), 아뢰야식(阿賴耶識)을 합하여 전체 여덟 가지 식(八識)으로 나누었다.
이 8식, 의식적으로는 알 수 없는 아뢰야식을 마음의 주체 혹은 마음의 바탕 성품(體性)이라 하여 마음의 왕(심왕, 心王)이라고 부르는데,우리가 전,현생에 몸과 입과 뜻으로 저지른 모든 행위와 인식, 경험, 학습 등으로 형성된 인상(印象)을 종자로 저장하고 있다고 하여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또한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가지 감각기관(6根)의 지각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심층 의식이라고도 한다. 말이 다 어려운 내용이다.
이처럼 우리가 마음이라 부르는 식(識)에는 마음의 주체가 되는 심왕(心王)과 이것에 종속되는 마음의 작용인 심소(心所)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마치 왕에게 신하들이 복종해서 함께 따라다니는 것처럼, 마음의 주체인 8식(識)의 명령에 의해 신하격인 심소(心所)가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심소는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심왕이 하라는 대로 심부름만 다하는 작용이라, 심왕이 소유한다는 뜻에서 심소유법(心所有法)의 줄인 이름이라 한다.
흔히 비유하기를, 우리가 TV광고를 보다가 새로 나온 좋은 자가용차를 보면, '저 차가 O O 차로구나' 하는 안식(眼識)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근원이 심왕(心王)이고, 동시에 '그것 좋다. 가지고 싶다'는 생각, 감정이 일어나면 이것이 심소(心所)이다. 이때 눈은 보는 감각기관이고, 차는 감각대상이다. 이와 같이 8식(識)의 심왕은 혼자 움직이지 않고, 신하를 대동하듯이 늘 심소와 함께 움직이는데, 그 심소엔 51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 세부적인 것은 여기서는 생략하지만 한 번쯤 참고로 공부해 두는 게 좋겠다. 탐욕, 화냄, 어리석음, 교만함, 의심, 못된 견해 등의 근본적인 번뇌 외에 분노, 한탄, 불신, 산란함, 집착, 반성 등의 온갖 마음 작용이 다 포함된다.그러나 번뇌가 바로 깨달음임을 깨치면 이 모든 것들이 한갖 물거품이 된다. 이런 알음알이를 살림살이로 키우는 도인은 거의 없다.
453. '납의를 입었느냐?‘
조주선사가 한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법화경(法華經)을 본 적이 있느냐?"
"보았습니다."
"경에서 말하기를, 누더기를 입고 한적한 곳에 있으면서 아란야(阿練若)라는 이름을 빌려 세상 사람들을 속인다고 했는데 그대는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 스님이 절을 하려는데 조주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납의(納衣)를 입고 왔느냐?"
"입고 왔습니다."
"나를 속이지 말라."
"어떻게 해야 속이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살 궁리를 해야지,내 말을 따르지 말라."
이번에는 조주가 한 스님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읽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첫 물음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법화경을 보았느냐'는 말의 속뜻은 불경전인 법화경을 읽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게 아니다. 바로 직지인심이다. 그대 자성(自性) 안의 경전을 봤느냐고 묻는 뜻이다.자성 속에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다. 조주는 항상 자신의 근원(마음)을 떠나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 근원에서 비추는 대로 나올 뿐이다.
그 스님이 읽은 적이 있다고 하니까, 조주는 비유로써,"법화경에 누더기 입고 한적한 곳에 있으면서 아란야(阿練若)란 이름을 빌려세상 사람들을 속인다고 했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묻는 것인가. 아란야(阿練若)는 범어로 한적한 곳,마을에서 떨어져 수행자들이 머물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하니 절을 말하는 것이다.
법화경 권지(勸持)품에 보면 보살들이 석가에게 게송으로 읊기를, '고요한 데 있으면서 누더기 옷 걸쳐 입고, 참된 도를 행한다며 다른 인간 경멸하고,이익만을 탐착하며 속인을 위해 설법하고,세상에서 받는 공경 6신통의 나한(羅漢)과 같아,이런 사람 악심 품어 세속 일만 생각하고 아란야(阿練若)라 이름하여 남의 허물 끌어내되,이런 말을 하느니라.저 모든 비구들은 이익만을 탐착하여 외도를 논설하며...'
이 내용은 미래에 삿된 무리들이 아란야에 머물면서 법화경을 비방하고, 세상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것을 강력히 막겠다고 붓다 앞에서 맹세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주의 위 말씀은 '한적한 곳에서 도를 닦는다는 스님들 중에서도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세속적인 이익만을 취하면서 불법을 끊어버리는 자들이 있으니 넌지시 그대도 그런 무리 중의한 명이 아닌가?' 하고 찔러 본 것이다.그러자 그 스님은 말귀를 좀 알아들었는지, 저는 그런 자가 아닙니다 하고 말하는 듯이 조주에게 말없이 절을 하려고 하는데 다시 선사가 묻는다.
"그대는 납의를 입고 왔느냐?"
납의(衲衣)란 스님들이 입는 옷인 가사(袈裟)이니 옷을 입지 않고 바깥에 다닐 리가 없는데 옷을 입고 왔느냐 라니 그 어떤 뜻인가.그런데 조주의 납의는 그 납의가 아니다. 바로 깨달음의 옷을 입었느냐는 그런 의미이다.너무 깊게 알려주는지 모르겠다. 그 스님이 입고 왔다고 하니까 조주는"나를 속이지 말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눈치라도 채야 할 텐데 아직 이 스님은 감감무소식이다.
이런 데서는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니다."어떻게 해야 속이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하니,"그대 스스로 살 궁리를 해야 한다.내 말에 따라 다니지 말라."더 이상 해설할 것이 없다. '스님은 제 고향 사람입니다.'
454. '유마힐의 할아버지'
조주선사가 한 강사(座主)에게 물었다.
"익힌 공부(業)가 무엇인가?"
"유마경(維摩經)을 강의합니다."
"누가 유마힐의 할아버지냐?"
"저입니다."
"무엇 때문에 도리어 자손을 위하여 말을 전하는가?"
강사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이번에도 유마경을 강의하는 강사와의 문답이다. 저 위의 강사와 같은 인물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한 강사가 유마경을 강의한다고 하니 조주가 묻는다."유마힐의 할아버지는 누구냐?"유마힐은 유마경의 주인공으로서 과거 세상(過去世)의 부처, 곧 금속여래(金粟如來)라고도 하고, 허구의 인물이라고도 하는데 비야리성(毗耶離城)에서 늘 병(病)을 핑계되고 누워서 문병 오는 불제자들과 보살들에게 설법했던 재가신도의 표상이라고 한다. 정명(淨名)거사라고도 부른다.
유마거사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으니 그 스님은 바로 자신이라고 한다. 아주 세게 나오고 있다. 유마경을 강의하는 자신이 유마거사의 할아버지라니, 정말 그런가. 조주가"(그럼 그대가 유마의 할아버지라면) 무엇 때문에 자손을 위하여 말을 전하는가?"라고 물으니 금세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유마의 할아버지라고 말할 정도이면 '유마를 대신하여 내 후손을 위해 좀 더 보태주려고 설한다' 라는 정도로 호기롭게 말할 법도 한데 왜 이렇게 바로 꽁지를 내려버리는가. 조주의 날선 추궁에 깨닫지 못한 자로선 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사실 그 좌주나 유마의 할아버지나 유마나 조주나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본질적으로는 마음 하나로 한 몸이다. 이것을 법신이 온 우주에 두루하다고 하는데, 그 경지를 체득할 때까지 끝까지 함께 수행해 보도록 합시다.
455. '오늘은 날이 흐리다'
師 一日上堂 僧纔出禮拜 師乃合掌 珍重
조주선사가 하루는 상당(上堂)하니 한 스님이 나오자마자 절을 했다.
그러자 선사는 합장(合掌)하며 "몸조심해라!"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又一日 僧禮拜 師云 好好問 云 如何是禪 師云 今日天陰不答話
또 하루는 한 스님이 절하자 선사가 말했다.
"좋은 질문 하나 해봐라."
"무엇이 선(禪)입니까?"
"오늘은 날이 흐리니 대답하지 않겠다."
여기 참 간단하지만 재미있는 선문답이 나온다.
조주가 설법을 하러 법상에 올라가니 한 스님이 나오자마자 절을 했다. 그러자 조주도 합장으로 예를 표하고는"몸조심해라(珍重)"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아니, 만나자마자 말 한마디 못하고 이별인가? 그 스님의 표정은 얼이 빠진 듯했을 것이다. 이럴 경우 그 스님도 '큰스님 항상 건강하십시오' 하고 제 마음을 자유자재하게 드러내었으면 하늘은 푸르고, 땅에는 오곡백화가 만발했을 것이다.
다음에 어느 날 다른 한 스님이 절을 올리자, 조주가 말하길,"좋은 질문 하나 해보라."고 하니 그 스님이 곧바로"무엇이 선(禪)입니까?"하고 물었는데 조주는 "오늘은 날씨가 흐리니 대답하지 않겠다."라고 한다. 여러분, 이것은 조주가 그 스님의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인가, 하지 않은 것인가? 날이 흐리니 다음날 오면 대답해 주겠다는 소리일까? 이것은 '차나 마셔라',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말 한 마디와 동격의 말씀이다. 깊이깊이 의심해 봐야 한다. 이런 곳에서 곧바로 깨칠 수가 있다.
예전에 우리나라 어느 스님이 성철선사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스님이 어느 날 큰스님에게서 꼭 한 말씀 들어야겠다고 작정하고 방장실로 찾아가서 물었다."큰스님,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한 말씀 해주십시오."그러니까 성철은 귀찮다는 듯이"몰라, 몰라!"하고 대답했다 한다. 그 스님이 다시 제발 좀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는데도 계속 매몰차게 "몰라, 몰라!" 라고만 외쳐서 "에이 정나미 떨어지는 늙은이!" 하고 속으로 욕하면서 방장실을 나왔다고 한다.
그 스님은 나중에 깨달은 후에 성철선사의 그 가르침을 매우 그리워했다고 하는데,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스토리인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조주선사의 위 말과 피장파장이다. ‘저 나무는 이렇게 키가 크고, 이 꽃은 저렇게 작구나’ 헐!@
456. '온 방향이 없다'
問新 到從何方來 云 無方面來 師乃轉背 僧將佐具墮師轉 師云 大好無方面
새로 온 스님에게 물었다.
"어느 방면에서 왔느냐?"
"온 방면이 없습니다(無方面來)."
그러자 조주선사가 등을 돌리니 그 스님이 좌구(坐具)를 가지고 따라 돌자 조주선사가 말했다.
"매우 좋구나,방면이 없음이여!"
한 수행자에게"어느 방면에서 왔느냐?"고 물으니, 무방면(無方面)에서 왔다고 대답한다. 그 스님은 비롯하여 온 방향, 장소가 없다는 말이니 허공 속에서 생겨났다는 말씀인가? 이 말을 듣고 조주는 그 스님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자 그 수행자는 좌구(坐具), 곧 앉을 때 바닥에 까는 돗자리 같은 것을 가지고 조주를 따라 돌았다.
그러자 조주가 말하길,"매우 좋구나, 방면(方面)이 없음이여!"라고 했다.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설해야 하는가. 처음으로 돌아가서, 조주의"어느 방면에서 왔느냐?"는 질문은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이냐'고 물은 것이다. 그러자 '저는 온 곳이 없습니다. 제 마음은 본래 온 적도 간 적도 없고, 태어난 적도 없습니다' 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 대답만을 보면 선(禪)의 경지에 어느 정도 접어들었다.
조주가 일부러 등을 돌렸음에도 그 스님이 좌구를 가지고 따라 돈 것은 눈에는 눈, 혀에는 혀 식으로, 눈앞의 참 모습에 그대로 대응한 것이다. 도(道)의 기본에 부합되는 행동이다. 그래서 조주의"참 좋은 무방면(無方面)이구나."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는데, 글쎄, 나처럼 이제 갓 눈을 뜨고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아닌가 싶다.
457. '버들 꽃을 따라'
問新到從什麽處來 云 南方來 師云 三千里外 莫戲 云 不曾 師云 摘楊花摘楊花
새로 온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남방(南方)에서 왔습니다."
"3천리 밖에서 만나거든 농담하지 말라."
"그런 적이 없습니다."
"버들개지를 따라, 버들개지를 따(摘楊花 摘楊花)!"
이 문답도 공안(화두)으로 많이 활용되는 사례에 들어 있다. 바로 위 문답과 똑같이"어디서 왔느냐?"하고 한 수행자의 본래면목을 물으니 남쪽(南方)에서 왔다고 대답한다. 남쪽이 전부 네 집이냐? 하고 조주는 짐짓 정색을 하며,"3천리 밖에서 만나거든농담하지 말라"고 그 스님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한다. 일부러 마음에 강하게 충격을 안기는 것인 줄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그러자 그 스님은'(아니남쪽에서 왔다고 했을 뿐인데 큰스님에게 농담을 하다니요?)그런 적 전혀 없습니다‘하고 괜히 잘못도 없이 발뺌을 한다. 하하! 충격을 줘도 알아듣지 못하니, 조주는 "적양화 적양화(摘楊花 摘楊花)!"하고 외친다. 딸 적(摘), 버들 양(楊), 꽃 화(花), 곧 '버들꽃(버들개지, 버들강아지라고도 함)을 따라'는 뜻이다. '조주는 왜 버들강아지 꽃을 따라고 했는가?''버들개지 꽃을 따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오직 마음으로 크게 의심해 보기 바란다.
458. '풍간의 외짝 눈’
豐干到五臺山下見一老人 干云 莫是文殊也無 老人 云 不可有二文殊也 干便禮拜 老人不見 有僧擧似師 師云 豐干只具一隻眼 師乃令文遠作老人 我作豐干 師云 莫是文殊也 文遠云 豈有二文殊也 師云 文殊文殊
풍간(豐干)스님이 오대산(五臺山) 아래에 이르러 한 노인을 보고말했다.
"문수(文殊)보살이 아니십니까?"
"두 문수가 있을 수 없지."
풍간이 절을 했는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한 스님이 이 이야기를 하자 조주선사가 말했다.
"풍간이 외짝 눈(一隻眼)은 갖추었다."
그리고서 조주선사는 문원(文遠)으로 하여금 노인이 되고,자신은 풍간이 되어서
말했다.
"문수보살이 아니십니까?"
문원이 말하길, "어찌 두 문수가 있겠나?"
선사가 말했다. "문수보살님, 문수보살님!"
풍간(豐干)스님은 중국 당나라 때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주석한, 기행을 일삼은 스님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제자인 한산, 습득과 함께 자유분방하고 조금은 광적인 도인(道人)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세 사람을 삼은사(三隱士), 세 사람의 시를 삼은시(三隱詩)라 일컫고, 셋을 함께 등장시킨 그림도 있다고 한다.한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변신으로, 습득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화신(化身)으로 거론되기도 하는 흥미로운 인물들이다.
중국의 오대산(五臺山)은 우리나라 동해안의 오대산과 마찬가지로 문수보살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풍간이 이 오대산을 찾아가니 한 노인이 나타나서 풍간이 문수보살이 아니냐고 물으니, 그 노인은"두 문수가 있을 수 없지."하고 말했는데, 풍간이 예배하니 노인이 곧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두 문수가 있을 수 없다'는 말도 그 뜻을 잘 살펴봐야 한다. 사실은 깨달은 문수는 이 우주와 한 몸이므로 그 노인이 문수이든 아니든 간에 문수와 한 몸이란 의미이다. 풍간은 그 뜻을 알았던 것이다.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까,"풍간이 외짝 눈(一隻眼)은 갖추었구나."라고 말했다. 한자 척(隻)은 외짝, 하나란뜻의 척인데, 일척안(一隻眼)을 갖추었다란 말은 우리 얼굴의 두 눈(眼)을 말하는 게 아니라,마음속을 비추어 보는 한쪽 눈(眼)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모든 깨달은 사람은 육체적인 두 눈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 관찰하는 하나의 눈을 갖춘다는 것이다.
조주는 자신을 시봉하는 문원(文遠)과 함께 풍간이 노인과 만났던 장면을 재연한다. 조주 자신은 풍간이 되고, 문원은 노인의 역할을 맡게 하여,"문수보살이 아니십니까?"하니, 문원은 그 노인이 말했던 것처럼"어찌 두 문수가 있겠나?"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조주는 "문수보살님, 문수보살님"하고 외친다. 풍간은 그 노인에게 절을 했는데 말이다. 그러면 풍간이 노인에게 예배를 한 것과 조주가 '문수보살님' 하고 부른 것은 뜻이 서로 같은가, 다를까?
문수와 이 우주, 그 노인은 한 몸이라 그랬다. 그러면 이치적으로 당연히 문수와 문원, 조주, 그 노인, 저와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이다. 그래서 조주는 문원에게 문수보살님하고 부른 것이다. 이 선(禪)도 알고 보면 정말로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딱딱 맞아 떨어진다. 물론 이 우주와 한 몸이 되었을 경우에 확실히 체험할 수 있을 테지만...
459. '차 한잔 마셔라'
師問 二新到上座 曾到此間否 云 不曾到 師云 喫茶去 又問 那一人曾到此問否 云 不曾到 師云 喫茶去 院主問 和尙不會到敎伊喫茶去 卽且置曾道爲什麽敎伊喫茶去 師云 院主 院主 應諾 師云 喫茶去
조주선사가 새로 온 두 신참 스님에게 물었다.
"상좌(上座曾)들은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는가?"
한 스님이 대답했다.
"와본 적이 없습니다."
"차 한잔 마시게(喫茶去)."
또 한 사람에게 선사가 물었다.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는가?"
"왔었습니다."
"차 한잔 마시게(喫茶去)."
원주(院主)가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와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차를 마시라고 하신 것은 그렇더라도 무엇 때문에 왔던 사람도 차를 마시라고 하십니까?"
선사가 "원주야(院主)!" 하고 부르니 원주가 "예" 하고 대답하자,
"차 한잔 마셔라(喫茶去)."
유명한 '끽다거(喫茶去)', '차 한잔 마시고 가라'는 공안이다. 결론적으로 말하고 시작하자면 이 '차나 한잔 마셔라'는 한 마디는 곧바로 마음을 가리켜 주는 것, 즉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왜 그럴까? 차근히 풀어보자.
신참 스님 두 사람이 관음원에 왔다. 한 스님은 관음원에 처음 왔고, 또 한 스님은 이전에 여기에 와본 적이 있었다. 조주는 먼저 처음 온 스님에게 예전에 관음원에 온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 스님은 당연히 처음이니까,"와 본 적이 없습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조주는 '끽다거(喫茶去)!', 차나 한잔하고 쉬다 가라고 말한다.
두 번째로 관음원에 와본 적이 있는 스님에게 온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 스님은 전에 와본 적이 있으니까 당연히"왔었습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조주는 이 스님에게도 '끽다거(喫茶去)!', 전에 여기 와서 한잔 마셨듯이 차나 들고 가게나! 라고 말한다.
그러자 관음원에서 총무 역할을 맡고 있는 원주(院主)스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조주에게 묻는다.'아니, 이전에 관음원에 와본 적이 없는 스님에게 '차 한잔해라'는 말은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만, 이미 여기에 왔었던 스님에게도 '차 한잔해라'고 말씀하시니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저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도 조주는 능청스럽게 원주를 부른다."원주야!" 큰스님이 부르니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예!"하고 응답하니,'(너도) 차나 한잔 마셔라!'라고 말했다. 참 재미있지 않은가. 조주에 온 적이 없는 한 스님, 이전에 왔었던 한 스님, 그리고 조주 밑에서 일을 보는 원주스님, 이 세 사람에게 모두 똑같이 '끽다거(喫茶去), 차 한잔 마시게!' 라고 했으니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내가 서두에 바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는데 혹시 느낌이 오지 않는가? 바로 알아차리면 참 좋을 텐데..
이전에 성철선사는 수행자들이 함께 모여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방으로 들어오면서 "무엇 하는가?" 하고 묻곤 했다. 그런데 대답하는 스님이 마음의 근원에서 나오는 한 마디를 하지 못하고, "차 마시고 있습니다."고 했다가는 바로 들고 있던 주장자로 머리통을 내리쳤다고 한다. 조주의 '차 한잔 마셔라'는 말은 실제로 차를 마시라는 뜻이 아니다.
너무나 평범한 말인데 뜻이 전혀 달라 이 우주 전체를 짊어지고 있는 말이다. 그래서 일상생활 속의 마음이 도(道)이고, 또한 직지인심이라 했으니 그 뜻을 골똘히 밝혀 보기 바란다. 모르겠으면 계속 마음만으로 의심해야 한다. 의심하다 보면 결국은 그 뜻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460. '앞쪽의 옛 절터'
師到雲居 雲居 云 老老大大何不覓箇住處 師云 什麽處住得 雲居 云 前面有古寺基 師云 與麽卽和尙自在取
조주선사가 운거(雲居)에 이르자 운거선사가 말했다.
"큰 스님께서 어찌 머물 곳도 찾지 못하십니까?"
"어느 곳에 머물면 되겠소?"
"앞쪽에 옛 절터가 있습니다."
"그럼 스님이나 머물도록 하시오."
조주가 과거 천하를 돌아다닐 때, 하루는 운거선사란 분이 있는 절로 찾아갔다. 운거는 조주를 보자마자 늙은 몸으로 생고생을 하며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큰 스님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큰 스님께서 어찌 머물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조금 안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조주의 경지를 시험해 보는 측면도 있는 질문이다.
조주는"내가 어느 곳에 머물면 되겠소?"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자기 안목이나 더욱 크게 넓히지는 않고,괜히 남의 걱정이나 하고 있구나 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물씬 든다. 운거는 "앞쪽에 옛 절터가 있습니다."라며 그 절을 고치고 보수하여 머물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투로 대답을 하고 있다.
그러자 조주는 "그럼 스님이나 머물도록 하시오."라며 운거를 구박하듯이 끝을 맺는다. 운거는 조주선사를 걱정하여 머물 곳을 주선하고 있는데, 조주는 왜 그대 걱정이나 해라는 식으로 말을 했을까?
이 이야기는 운거선사가 아직 도(道)에 눈을 뜨지 못한 시기에 있었던 일인지, 깨달은 후에 일어난 일인지 그 당시 주변 정황을 자세히 알지 못한 채 두 분 만의 대화만 가지고 해설하기에는 자못 무리가 따른다.
한 예를 들어, 운거가 말한'앞쪽에 있는 옛 절터'는 실제로 있었던 절터인지, 아닌지에 따라 해석이 180도로 달라진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절터가 정말로 있었다면 실제 그 절터가 되겠지만 없었다고 한다면 선(禪)세계 속의 절터는 우리의 마음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잘 이해될지 모르겠는데 선적으로 보면 옛 절터는 옛 절터가 아니고 이름이 옛 절터일 뿐이다.
만약에 실제로 그 절터가 있었다면 운거스님의 말씀에 대한 조주의"스님이나 머물도록 하시오."란 말은 아직 깨닫지 못한 운거에 대한 질책성의 말이 될 테지만, 그게 아니라 운거가 우리 마음속의 절터, 깨달음의 땅 그 자리를 말했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반대가 되어 처음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조주가 일부러 찾아갔을 정도라면 운거도 이미 외짝 눈을 갖췄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러면 조주의 말은 '그대도 거기 머물고 나 또한 그 곳에서 산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에는 사실상 가고 머무는 것이 없다. 조주는 중국 천하 어디를 가든 항상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한 머물러 있지도 않다. 그 자리가 본래 근원의 자리이다. 그래서 조주는 그 옛 절터에 살기도 하고 살지 않기도 하다. 이것이 도(道)를 향한 가까우면서도 머나먼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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