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중심, 사마르칸트
노선버스로 사마르칸트로 이동했다. 약 300킬로미터의 거리다. 타쉬켄트와 사마르칸트가 큰 도시라서 그런지 다행히 노선버스가 있었다. 노선버스가 없으면 비싼 택시로 이동해야 한다. 택시기사들은 나를 잡으려고 서로 싸움을 하고 난리가 아니다. 나는 입장이 곤란해서 얼른 버스에 올라 타버렸다. 아침 9시(?)쯤 출발하여 오후 2시쯤 도착했다. 차림새로 보아 외국 여행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사마르칸트 외곽에 있는 터미널에서 손님들이 모두 내린다. 나도 따라서 내렸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로운리 플래닛 가이드북에 소개된 호텔로 갔더니 시설이 영 아니었다. 그래서 레기스탄 광장 바로 앞에 있는 호텔 아르크에 짐을 풀었다. 숙박료는 아침 주고 35달러로 비싼 편이다. 방은 깨끗하고 괜찮은 편이었다. 샤워도 잘되고.
드디어 실크로드 무역의 주역 소그드 상인의 고향이자 티무르 제국 때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불렸을 만큼 찬란한 문명을 자랑했던 사마르칸트에 도착한 것이다. 이 길은 7세기에 불법을 배우기 위해 인도를 찾아갔던 현장법사도 이도로 갈 때 지나갔던 곳이기도 하다.
사마르칸트 택시 운전사 열에 아홉은 한국말을 잘한다. 반갑기도 하고 깜짝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들 대부분은 한국에서 몇 년 동안 일을 한 경험이 있었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본국으로 돌아와서 택시를 장만했다고 한다. 올해 쉰다섯인 악크말이라는 택시 기사는 남양주에 있는 스트로플 공장에서 5년 동안 일했다고 한다. 어떤 총각은 재수가 없어서 1년 만에 불법체류자로 붙잡혀 강제 추방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시 한국에 가서 일을 하고 싶다고 나에게 주선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 소그드인들의 후손들이 지금은 장안(시안)이 아니라 한국에까지 와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걸어서 육로를 통해서 이동했다면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통해 이동하는 방법만 달라졌을 뿐이다. 실크로드에 사는 사람들의 교류는 훨씬 광범위해지고 빨라졌을 뿐,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다.
실크로드에서 사마르칸트는 장안과 바그다드와 비잔티움(이스탄불)과 어깨를 겨루는 그런 도시였다. 지리적으로도 동서양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이곳이 실크로드의 무역을 독점했던 소그드 상인들의 고향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여기에 오고 싶었다. 그동안 동서양의 여러 박물관에서 낙타에 물건을 가득 실은 소그드인 조각상을 많이 보았다. 특히 파리에 있는 기메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상은 정말 정교하고 생생해서 정말 소그드 상인이 낙타를 끌고 사막을 걸어가는 듯했다. 또한 실크로드에 관한 책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소그드 상인이 반드시 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 신라의 처용가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경주 괘릉과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원성왕릉 앞을 지키는 서역인 무인상, 그리고 경주 황성동 석실분에서 출토된 호인용(胡人俑)도 소그드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미야자키 마사카츠는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에서 소그드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실크로드는 서쪽으로 열린 중앙아시아의 대교역로였고, 그 중심지가 파미르고원에서 흘러나오는 자라후샨(‘황금을 뿌린다’는 의미)강 유역의 옥토를 중심으로 하는 소그드 지방이었다. 이 지역에 사는 페르시아(이란)계 소고드인은 대부분이 조로아스터 교도들로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상업 활동을 펼쳤다. 그들은 열심히 카라반을 조직해 장안까지 들어왔으며, 대부분이 서시(西市) 주변에 정착하여 보석 융단 향료의 판매나 금융업에 종사했다. 그들의 장사수완은 중국인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구당서(舊唐書)> 등에는 ‘소그드인은 아기가 태어나면 반드시 아기의 입안에 설탕을 머금게 하고 손에는 아교의 재료가 되는 풀을 쥐어 준다. 그것은 아이가 성장했을 때 설탕처럼 좋은 말만 하고 아교가 달라붙듯이 한번 쥔 돈은 절대 놓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에서는 조로아스터교 신도를 단속하는 관청의 장관을 ‘살보(薩寶)’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소그드어로 대상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사르토파우’의 음역이었다. 그 지위는 대부분 소그드인들이 차지했다.
소그드인의 출신지는 그 사람의 성을 보면 알 수가 있었다. 사마르칸트 출신은 강(康)을, 부하라 출신은 안(安)을, 키슈 출신은 사(史) 라는 성을 썼다. 안사의 난의 지도자 안록산과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를 살해한 사사명도 소그드인의 피를 이어 받았다. 당대에 호인(胡人)이라고 부를 경우에는 소그드인을 가리킬 때가 많았다.
이들의 조상들은 8세기에 아랍군의 침략을 받고 지금의 펜지켄트(현재 사마르칸트 서쪽에 있는 타지키스탄의 도시)에서 맹렬히 싸웠으나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 머그산 요새로 도망친 소그드인의 후손들 약 3천명이 타지키스탄의 수도인 두샨배 북쪽에 있는 야그노브산 계곡 일대에 야그노브어-소그드어 방언의 일종을 구사하며 아직도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계약서를 작성할 정도로 일상생활에서도 거래를 분명히 했다고 한다. 여기에 그 증거가 하나 있다. 1932년에 제라브샨 산맥 부근에서 한 양치기가 버드나무로 짠 바구니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서는 소그드어로 다음과 같이 적힌 혼인계약서 하나가 나왔다.
신랑 우테진은 신부 최태를 맞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이며, 신부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동의 없이 다른 여자를 취하면 아내에게 30드라크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더 이상 원하지 않으면 아내가 가져온 모든 물건을 돌려주고 이혼해야 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710년 3월 25일 작성 (출처: NHK 실크로드 중에서)
천오백 년 전에 이미 성혼계약서를 작성한 걸 보면 정말 상인정신이 투철했던 민족으로 보인다. 이들은 남자가 성인이 되면 의무적으로 외국에 나가서 장사를 해야 했을 정도로 상거래를 중요시 했다. 아마도 전 세계를 상대로 상거래를 펼쳤던 아라비아 상인들을 제외하고는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상술을 가진 민족이었을 것이다.
일본인 작곡가 키타로가 작곡한 ‘실크로드’ 주제곡을 듣고 있으면 소그드 대상들이 낙타에 물건을 가득 싣고 사막을 횡단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이들의 발길은 서쪽은 로마제국이었던 지중해 연안 도시부터 동쪽으로는 당나라 장안과 더 나아가서 신라의 고도 경주와 일본의 고도 나라까지 닿을 정도로 광범위했다.
발해의 예 성터가 있는 노보고르데예프카(Novogordeyevka)에서 발견된 소그드 은화는 소그드 상인들이 초원 실크로드의 한 갈래였던 ‘초피로(貂皮路-담비가죽의 길)’를 이용한 발해와 중앙아시아의 무역에까지 관여했음을 증언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실크로드의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서쪽 끝인 로마와 동쪽 끝인 극동지방까지 물건을 싣고 오간 것이다.
이들은 장사 뿐 아니라 정치에도 참여했다. 안록산 같은 사람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총애를 받아 절도사까지 올라가 마침내 당나라를 급격히 쇠약하게 만든 난까지 일으켰다. 그의 아버지는 소그드인이었고, 어머니는 돌궐족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에서도 소그드인들은 이색적인 용모와 타고난 사교술로 권력자들의 환심을 산 것으로 보인다. 권력자들은 외래인의 이색적인 위용을 빌려 이들을 정치 자문역이나 무인으로 고용하여 권력을 수호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그들이 취급하는 국제 무역품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동하면서 얻은 외국에 대한 정치, 군사, 종교, 문화, 예술 등에 관한 정보는 유력자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나라시대에 중국 양주에서 감진대사(鑑眞大師)와 함께 건너온 안여보(安如寶)가 소그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나중에 당초제사의 제2대 주지가 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329년에 이 도시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 재위 기간 336-323)도 “사마르칸드(당시 마케도니아인들은 마라칸다라 불렀다)에 대해 내가 들은 모든 소문은 사실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제외하고는.” 이라고 격찬하면서 이 도시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혜초(서기 704?-780)는 <왕오천축국전>에서 호국(胡國)의 하나로 강국(康國 사마르칸트)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유독 강국에만 절이 하나 있고 승려가 한 명 있기는 하나, 그 또한 (불법을) 해득하여 경신하려고 하지 않는다. ----.” 당시에 이 지역에서 불교는 이미 쇠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현장법사는 <대당서역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마르칸트국은 주위가 1,600~1,700리이고,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고,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리에 달하는데, 매우 험하고 견고하며,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열 나라에서 나는 보배와 화폐들이 이 나라에 많이 모인다. 토지는 비옥하고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숲은 울창하고 꽃과 열매가 무성하며 뛰어난 명마를 많이 배출하고 있다. 그리고 옷감 짜는 기술이 다른 나라들보다 특히 뛰어나다. 기후는 화창하며 풍속은 사납다. 여러 호국(胡國)들은 이 나라를 중심으로 인근의 이웃나라들이 모두 이 나라의 의례 등을 본보기로 삼는다. 왕은 호기롭고 용감하여 인근 국가들은 그의 명령에 따른다. 병사와 발이 강성하다. 용감한 자갈이란 전사는 성품이 용맹하여 죽음을 마치 귀향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므로 싸움에 임해서는 그들을 당할 자가 없을 정도이다. 동남쪽으로 가면 미말하국에 도착한다. (출처: 김규현 역 대당서역기)
기원전 5세기경에 터를 잡은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더가 정복했을 당시에도 이미 실크로드의 핵심 도시로서 중국과 인도, 그리고 페르시아를 연결하는 국제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1220년에 징기스칸에 의해 초토화되기 전까지 서기 6세기부터 13세기까지는 여러 왕조의 수도로서 지금보다 더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니까 현장이 방문할 당시에는 한창 번영하고 있던 때였다.
구 사마르칸트는 아프라시압이라고 불리며 현재의 도시 중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3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그러다가 티무르 왕(1336-1405)이 1370년에 이 도시를 티무르 제국(1369-1508)의 수도로 삼고 재건에 나섰다. 티무르는 정치상의 중심지 뿐 아니라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이 도시를 성장시켰다. 1449년까지 통치했던 그의 손자 울르그백은 이곳을 지식과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키워 명실상부하게 ‘세계의 수도’로 만들어 당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보고 싶어했던 도시로 가꾸었다.
16세기에는 우즈백의 샤바니드 왕조에게 멸망하여 수도가 부하라로 옮겨가면서 이 도시는 쇠망하게 된다. 그 후 수차례 크고 작은 지진에 시달리다가 1868년에 러시아에 복속되었다. 1924년에는 구소련 우즈백공화국의 수도로 지정되었다가, 6년 후에는 수도를 타쉬켄트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도시 규모는 타쉬켄트가 훨씬 더 크다.
나는 호텔 바로 앞에 있는 레기스탄으로 달려갔다. 그만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레기스탄은 정말 소문대로 장엄했다. 정면에 있는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면 왼쪽으로 울르그백 메드레세(학교), 오른쪽으로 시르 도르 메드레세, 그리고 정면에 틸랴 카리 메드레세가 내려다 보인다. 이 세 메드레세 사이에는 광장이 있고, 거기에는 관람자들이 앉아서 전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벤치가 놓여 있다.
푸른색 타일을 주로 사용하여 지붕 돔을 장식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푸른색의 신비로움이 깃들어 있다. 푸른색을 하늘이라고 믿었던 이슬람 교도들은 그런 믿음을 종교생활에도 적용한 것이다. 그리스 산토리니에서 보았던 푸른색이 진한 감청색이라면, 레기스턴의 푸른색은 은은한 하늘색이다. 징기스칸이 정벌하러 왔던 곳, 티무르가 건설한 건물들. 그런 역사의 흔적을 회고하니 감회가 깊었다.
여기 광장에서 작전 지시를 하는 징기스칸과 그 200년 후에 건축 감독을 하는 티무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해질 때까지 광장에 있는 벤치에 앉아 석양에 물든 메드레사와 미나레트들을 바라보았다.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궁에 가서 옛날 건물들을 둘러보는 그런 느낌이랄까?
사마르칸트를 여행하면서 이 도시를 건설한 티무르 왕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336년 우즈백 남부 샤흐리샤브즈(당시는 캐쉬) 근처 호자 일가르 마을에서 태어났다. 25세가 되었을 때는 지방 영주들의 지원을 받아 바를라스 부족을 통합하여 캐쉬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티무르는 정복 전쟁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서쪽으로는 터키 동쪽까지, 동쪽으로는 중국과 인도 접경까지, 남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까지, 북으로는 남부 러시아까지 진출했다. 그는 전쟁을 통해 세계의 석학들과 예술가, 기술자와 과학자들을 사마르칸트로 불러들였고, 무역과 상거래를 장려하여 실크로드를 번영하게 만들었다.
티무르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중국인 왕비 비비하눔을 위해 모스크를 짓기도 했다. 그는 1405년 1월 명나라를 치기 위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가 감기에 걸려 지금의 카자흐스탄 오트라르에서 69세로 사망했다. 오트라르는 징기스칸이 처음으로 서방 원정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한 역사서에는 티무르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티무르 왕은 밤마다 수백 명의 신하를 불러 모아 동이 틀 때까지 연회를 배푼다.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술을 마시며, 양고기와 말고기를 푸짐하게 먹는다. 비록 그는 궁전을 지었지만 정작 자신은 대형 천막에서 생활했다. 그 주변에는 수천 개의 천막이 있으며, 원정 명령이 떨어지면 도시 전체는 순식간에 이동하기 시작한다.
엘뤼아르 아버지와 통화를 했을 때 엘뤼아르 여동생이 호텔로 나를 데리러 온다고 했으나 그녀는 오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가 영어가 잘 안되어서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너무 배가 고파서 기다리지 않고 한국식당에 가서 된장찌개를 먹었다. 음식 값은 타쉬켄트보다 더 비싸고 질은 더 낮다. 한국식당에서 현지 종업원들이 강남스타일을 아느냐고 물어온다. 하여간 유럽이나 중앙아시아나 강남스타일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사진 025 (1019-20) 울르그백 메드레사(측면)
사진 059 (1019-20) 울르그백 메드레사(정면)
사진 063 (1019-20) 울르그백 메드레사(안쪽)
사진 034 (1019-20) 틸랴 카리 메드레사
사진 048 (1019-20) 틸랴 카리 메드레사(안쪽)
사진 032 (1019-20) 시르 도르 메드레사 (측면)
사진 033 (1019-20) 시르 도르 메드레사 (정면)
사진 037 (1019-20) 시르 도르 메드레사 (안쪽)
사진 051 (1019-20) 시르 도르 메드레사의 코발트 블루 돔
사진 031 (1019-20) 레기스탄 전경
사진 547 (1019-25 핸폰) 레기스탄 앞에서 현지인의 옷을 입고 포즈
사진 045 (1019-20) 울르그백 메드레사의 자연 채광 창문
사진 050 (1019-20) 학문을 논하는 울르그백과 과학자들(울르그백 메드레사)
사진 028 (1019-20) 레기스탄에 놀러온 건장한 키르기스 할머니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레기스탄을 거쳐 비비하님, 하즈라 히즈르 모스크, 아프로시압 박물관, 샤흐진다, 구르 에 아미르 모술렘, 악 사례가 모술렘 둘러 보았다. 사마르칸트를 빛내는 보석 같은 유적들이다.
레기스탄은 중아에 광장을 사이에 두고 세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좌측에 울르그백(Ulugbek) 메드레세, 우측에 시르 도르(Sher Dor) 메드레세, 정면에 틸랴 카리(Tilla-Kari) 메드레세가 있다. 티무르의 손자로 1409년부터 1449년까지 사마르칸트를 통치했던 학자 군주 울루그백은 이 도시를 문예부흥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420년에는 레기스탄(Registan ‘레기’는 타지크어로 모래라는 뜻이고, ‘스탄’은 땅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레기스탄은 모래 땅이다) 광장에 울르그백(Ulugbek) 메드레세를 세워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학생들을 모아 이슬람 신학과 세속 학문을 가르쳤다. 자신이 직접 신학과 천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메드레세에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문장을 새기기도 했다. ‘학문을 연마하는 것은 무슬림의 의무다.’ ‘이 장려한 외관은 하늘 높이와 무게의 두 배로 지구의 중심축을 흔들 것이다.’라는 문구가 그것이다. 정말이지 이 메드레세 전면에 세워진 35미터 높이의 두 개의 미나레트(원형 탑)는 하늘에 닿을 만큼 장엄하다. 경외한 신에게 얼마나 다가가고 싶었으면 저렇게 높이 탑을 지었을까----.
시르 도르(Sher Dor 시르 도르는 ‘용맹한 사자’라는 뜻이다) 메드레세는 이 지방을 통치했던 얄라투쉬 바하지르가 1636년에 지었다. 이 메드레세는 이슬람 건축에서 금기시하는 사람과 동물을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정면 아취 위에는 사슴을 쫒는 사자(호피 무늬 때문에 사자가 아니라 호랑이처럼 보이기도 한다)가 양쪽에 그려져 있고, 사자 등에는 태양처럼 빛나는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의 이단성 때문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자 자신의 그림에 대해 책임을 지고 건축가는 자살했다고 한다.
틸랴 카리(Tilla-Kari 틸랴 카리는 ‘황금을 입힌’이라는 뜻이다) 메드레세는 이 지방을 통치했던 얄라투쉬 바하지르가 1636년에 지었다. 이 건물은 광장 정면을 보고 있으며 울루백과 시르 도르 메르레사 사이에 공간적인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 지금은 많은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비비하님 모술렘 앞 계단에 앉아서 비비하님 모스크 그림을 그리고 있는 영국인 노부부를 만났다. 이름을 물었더니 파멜라와 마이클이란다. 언뜻 보기에도 일흔은 넘어 보인다. 내가 노후에 아내와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저런 모습이다. 실크로드를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일. 참 보기에 좋았다.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몇 컷 찍었다. 정말 멋있다고 몇 번이나 칭찬해 주었더니 고맙다고 한다.
사마르칸트의 옛 모습을 보고 싶어 아프라시압 언덕에 올라갔으나 옛 영화는 간 데 없고 황량한 구릉과 벌판만 펼쳐져 있다.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전시된 벽화와 유물을 통해 당시의 영화를 되새길 뿐이다. 벽화는 신장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의 석굴에서 볼 수 있는 벽화보다 더 퇴락해서 그림은 잘 보이지 않았다. 박물관 직원 중 한 명도 한국말을 잘한다. 한국 남양주 가구단지에서 3년간 일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택시로 내 가이드 역할을 해주었다.
샤흐진다(SAAH-I-ZINDA) 모술렘은 ‘살아있는 왕의 무덤’이란 뜻이다. 왕과 왕의 가족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비록 2005년에 리모델링한 것이긴 하지만, 이슬람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에 속한다. 물론 오리지널은 아니지만 여기에 가면 청색 타일이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 알 수 있다. 특히 여성들을 위한 사원은 규모는 작지만 정말 섬세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사진 033 (1021) 비바하눔 모스크의 코발트 블루 돔
사진 025 (1021) 비바하눔 모술렘. 앞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이 영국인 부부다.
사진 041 (1021) 비바하눔 모스크 안에 있는 거대한 코란 받침대. 원래 여기에 놓여 있었던 코란은 현재 타쉬켄트 무바레크 라이브러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 046 (1021) 복구되기 전의 비비하눔 모스크의 1900년대 초의 모습(자료 사진)
사진 058 (1021) 비비하눔 모스크 전경
사진 222 (1019-25 핸폰) 규모는 작지만 정말 아름다운 샤흐진다 모술렘
사진 224 (1019-25 핸폰) 샤흐진다 모술렘 내부
사진 239/241 (1019-25 핸폰) 모스크 내부의 아름다운 이슬람 문양(샤흐진다 모술렘)
사진 285 (1019-25 핸폰) 블루 코발트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슬람 문양(샤흐진다 모술렘)
사진 302 (1019-25 핸폰) 문 안으로 살짝 보이는 하얀색 무덤(샤흐진다 모술렘)
사진 085 (1021) 샤흐진다 모술렘의 코발트 블루 돔
사진 099 (1021) 구르 에미르 맞은편에 있는 루하바드 모술렘
사진 101 (1021) 아프라시압호텔의 세련된 모습(구르 에미르 부근)
사진 151 (1019-25 핸폰) 모스크 내부의 아름다운 모습(하즈라트 히즈르 모스크)
사진 154 (1019-25 핸폰) 모스크 안에서 기도를 드리는 모녀(하즈라트 히즈르 모스크)
사진 161 (1019-25 핸폰) 정감이 넘치는 이슬람식 공동묘지(사마르칸트)
사진 168 (1019-25 핸폰) 아프라시압박물관 안에는 실크로드 우호협력 기념비가 서있다.
사진 171 (1019-25 핸폰) 사신행렬도 부분(아프라시압박물관)
사진 199 (1019-25 핸폰) 실크로드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유리 제품(아프라시압박물관)
사진 219 (1019-25 핸폰) 울르그백천문대 부근에서 결혼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신혼부부
사진 220 (1019-25 핸폰) 울르그백천문대
구르 에 아미르(GUR-E-AMIR, 지배자의 무덤이라는 뜻) 모술렘은 티무르와 아들 그리고 스승의 묘가 모여 있는 곳이다. 천장과 벽의 황금 문양들이 정말 환상적이었다. 유럽의 교회나 불교 석굴들의 벽화나 천장화도 전성기에는 저렇게 화려하고 찬란하지 않았을까? 티무르의 묘는 가묘와 진묘가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관광객들이 보는 까만 대리석 묘는 가짜 묘이고, 진짜 묘는 바로 아래 지하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구 소련의 사회과학원 인류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가 1941년 6월 21일에 그 관을 열어보았다. 티무르는 170센티 정도의 키에 절름발이였고, 오른팔에도 부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손자 울르그백은 목이 잘린 채 묻혀 있었다. 전투 중 부상으로 오른 발을 절었다는 소문이 사실로 밣혀진 것이다.
사진 315 (1019-25 핸폰)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창도 있다(구르 에 아미르 모술렘)
사진 319 (1019-25 핸폰)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이슬람 문양(구르 에 아미르 모술렘)
사진 322 (1019-25 핸폰) 티무르 가족묘(검은색이 티무르). 진짜는 바로 아래 지하층에 있다. (구르 에 아미르 모술렘)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또 일어났다. 구르 에 아미르에는 오래 전부터 ‘이 묘를 발굴하는 자는 나보다 더 험악한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이다’라는 소문이 전설처럼 내려왔다고 한다. 그런데 1941년 6월 22일에 구 소련은 독일로부터 침공을 당했다. 묘지의 문을 열면 화살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진시왕의 묘처럼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만 알 뿐이다.
저녁에는 우리 학교에 유학 온 학생인 엘뤼아르 부모님으로부터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예쁜 대학생 동생이 호텔로 나를 데리러 왔다. 레기스탄 바로 앞에 있는 호텔에서 거의 30분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갔다. 영문학을 전공하는 여동생은 영어를 잘했다. 나중에 아버지처럼 대학 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가 국립병원 간호사이고, 아버지가 대학 교수인데도 집은 허름했다. 마침 아버지가 러시아제 차를 새로 샀다면서 마당에 세워두고 흐뭇한 표정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사진 358 (1019-25 핸폰) 한림대 유학생 엘뤼아르 가족
집에는 아흔이 넘은 할머니를 비롯해서 여러 친척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상이 차려져 있는데, 북한식과 비슷했다. 구소련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은 잔치상 차림새가 서로 닮아 있다. 술, 음료수, 차, 사탕, 과자, 빵, 버터, 치즈 등이 나왔다. 어머니가 우리 한국 여인의 얼굴을 많이 닮아서 “한국 어머니 같다”고 하자 활짝 웃었다. 메르질롱에서 사온 비단 스카프를 드렸더니 목에 둘러보고는 정말 좋아하신다. 내게는 당신이 손수 만들었다는 우즈백 전통 남자 저고리를 주셨다.
자고 가라는 걸 내일 새벽에 테르메즈로 가야 한다며 사양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길 까지 따라 나와서 택시비까지 쥐어 주신다. 영락없이 자애로운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지금도 실크로드는 이렇게 살아서 한국 사람이 소그드인의 후손들을 만나고 있다. (10월 20-21일 일-월요일. 맑음)
<출처: 실크로드 문명기행2, 고태규, 2015, 한림대학교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