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원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이영성
나의 모교인 장호원초등학교가 올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내가 51회 졸업생이니 길고 긴 역사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셈이다. 터를 잡고 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이라는 큰 뜻을 기려온 지 어언 100년! 모교의 지난 발자취를 더듬어보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장하고 훌륭하다.
장호원초등학교는 우리나라에 근대화의 물결이 도도하게 밀려올 때인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신교육제도가 도입되던 시기인 1911년 9월 1일에 ‘공립음죽보통학교’의 이름을 걸고 처음 문을 열었다. 장호원이 본래 음죽현이라는 고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사회의 변화와 학제의 개편에 따라 보통학교에서 소학교로, 다시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돌이켜 보건데 장호원초등학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전쟁 등 수많은 역사의 질곡을 겪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했다. 그동안 학교 건물은 많이 변했으나 운동장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이 없다. 태평양전쟁 때는 이곳에서 징용자를 소집하기도 했고, 6.25전쟁 때는 UN군이 이곳에 주둔하기도 했으며, 또한 전쟁이 한창일 때는 민병대가 이곳에서 결성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인민군에 협조했던 사람들을 취조했던 곳도 이곳이었으니 순탄치 않았던 역사의 격랑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으며 헤쳐 나온 셈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있는데 하물며 100년이란 얼마나 긴 세월인가.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한 세기가 지나면 역사가 된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근대사와 호흡을 함께 해온 장호원초등학교는 이미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장호원초등학교의 지난 100년은 나라를 위한 인재를 기르고 장호원 지역사회에 꿈을 심는 밑거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숱한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지역사회의 발전과 지역문화의 창달이라는 본연의 소임을 다해왔다.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있고, 100년의 계획은 교육에 있다’는 말이 있다. 비록 100년 전에 첫걸음을 떼었을 때는 조그만 물꼬를 튼데 불과했지만 이제는 지역사회와 나라가 필요로 하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커다란 물길로 바뀌었다. 요즘 우리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문들을 볼 때마다 실로 가슴이 뿌듯해진다.
지난 역사를 뒤돌아보는 것은 미래를 위해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 동문들에게 있어 개교 100주년은 역사의 마무리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야 하는 또 다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우리의 후배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끊임없는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보다 더 굵직한 전통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그래서 100년의 의미를 되새겨 천년을 넘어서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옛날 한 선각자가 있어
이곳에 터를 잡고 학교를 세웠으니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라던 그 뜻이 거룩하다.
그 큰 뜻을 기려온지 어언 100년.
지난 발자취를 더듬어보니
참으로 장하고 훌륭하다.
장호원초등학교여!
아버지의 아버지가 품었던 위대한 꿈이
아들의 아들에게 길이 이어지도록
청미천, 백족산과 더불어
천년만년 장호원을 빛내며
영원무궁하라!
첫댓글 100년 축하합니다 100년전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년후 지금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버스 터미날도 없는 부끄러운 장호원입니다
고향을 찾는 많은 귀성객이 화장실 하나없는 내고잔 터미날을 어떻게 설명할지?
아차 내가 지금 뭔소리를 하는건지 미안 미안입니다.
ㅎㅎ~ 해수 친구가 올린 댓글에 웃음이...맞아요~! 버스터미널 하나도 제대로 못 갖춘채 여지껏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로군요... 그런데 제 개인 생각으로는 으리으리하게 발전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생소한 곳으로 변해 있는 것보다 좀 촌스럽고 불편한채로 있는 고향이 더 정겹고 좋은데요~? ㅎ~
매우 귀한 자료를 잘 보관했다가 올려준 친구에게 땡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