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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
시장명 |
날짜 |
소 재 지 |
비 고 |
1 |
좌천(촌)장 |
4, 9 |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좌천리 |
※ 구체적인 내용은 해당구청 지역경제과 문의하시기 바람(199.8 현재) |
2 |
송정동 |
5, 10 |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 |
3 |
하단장 |
2, 7 |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 |
4 |
오시게장 |
2, 7 |
부산시 금정구 노포동 | |
5 |
구포장 |
3, 8 |
부산시 북구 구포동 | |
6 |
성산장 |
1, 6 |
부산시 강서구 녹산동 | |
7 |
사덕장 |
1, 6 |
부산시 강서구 대저1동 | |
8 |
덕두장 |
4, 9 |
부산시 강서구 대저2동 |
18~19世紀 釜山地方의 場市
순서 |
장시명 |
장날 |
1770년 (동국문헌비고) |
1830년 (임원경제지) |
1832년 (경상도읍지) |
1871년 (영남 읍지) |
1872년 (경상도지도) |
1876년 (영지 요건) |
1895년 (영남 읍지) |
1899년 (동래부읍지) |
소재지 |
1 |
邑內場 |
2, 7 |
○ |
○ |
○ |
○ |
○ |
○ |
○ |
○ |
官門外 |
2 |
左水營場 |
5, 10 |
○ |
× |
○(3, 8) |
○(3, 8) |
× |
○ |
○ |
○ |
左水營前 |
3 |
釜山場 |
4, 9 |
○ |
○ |
○ |
○ |
○ |
○ |
○ |
○ |
鎭支城 西門外 |
4 |
禿旨場 |
1, 6 |
○ |
× |
○ |
○ |
× |
○ |
○ |
○ |
沙下面 禿旨里 |
5 |
下端場 |
5, 10 |
× |
○ |
× |
○(3, 8) (구포장) |
○ (평림장) |
× |
× |
× |
沙下面 平林里 |
1910년대 동래시장 모습
釜山地域의 在來市場 現況
1. 국제시장
중구 신창동 4가 83번지 일대에 있는 부산 최대 재래시장의 하나이다. 국제시장이 시장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45년 광복과 함께였다.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이른바 전시통제물자를 한꺼번에 팔아 돈을 챙기기 시작했다. 부평동공설시장 일대에 각종 물자가 쏟아져 나오나, 넓은 빈터가 시장터로서 상설시장이 서게 되었다.
이 국제시장 장터는「돗대기시장」,「도떼기시장」이라 한 것은, 이 뜻은 정확하지 않으나,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데로 싹쓸어 모아 물건을 흥정하는 도거리시장이거나,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돗대기시장」「도떼기시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8년에는 1층 목조건물 12동을 지어「자유시장」으로 개설하였다. 8.15광복 후 자유민주주의의 물결이 범람하는 시대적 풍조속에서 명칭을 자유시장이라 한 것 같다. 1950년 5월「국제시장」으로 개설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군용물자와 함께 온갖 상품들이 부산항을 통해 밀수입되었다. 이들 밀수입 상품들은 도떼기시장을 통해 전국 주요시장으로 공급되었다. 시장의 규모가 크고, 외국 물건 등 없는 물품이 없다고 해서,「도떼기시장」이「국제시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국제시장은 밀수 외국상품은 물론 유엔군 군수물자까지 흔하게 거래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외국 옷감을 비롯한 장신구와 화장품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외국상품의 인기에 편승하여, 가짜 외국 상품들도 많이 거래되었다. 1969년 1월에는「사단법인 국제시장」으로 법인체 등록을 하였다. 현재 건평 3,468.2평, 대지 2,177.2평의 지상 2층의 규모이며, 약 650개 업체에 1,489칸의 점포가 있으며, 종사하는 종업원 수는 1,200~1,300명 정도이다.
1공구는 가방, 문구, 공예품, 2공구는 주방기구, 칠기, 안경점, 3공구는 침구류, 양품점, 4공구는 포목, 주단, 양단, 주방기구, 5․6공구는 가전제품, 기계공구, 포목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방구, 주방기구, 기계공구의 의류, 전기․전자류 등이 주종을 이루는 도소매업 시장이다. 1953년 2차례의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1992년 4월에도 큰 화재가 있었다. 건물이 낡고, 주차시설이 불편한 점 등 대형시장으로서의 문제점을 많이 안고 있다.
국제시장 주변에 대형 백화점을 비롯한 광복동 상가타운 등을 끼고 있어, 상권 경쟁에서 많은 애로가 있다. 국제시장도 다른 재래시장과 마찬가지로 점차 노후화되고, 쇠퇴해 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부산의 상권이 서면․동래방면으로 이동함에 따라 상권이 다소 침체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부산 시장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국제시장의 옛 명성을 찾기 위해서는 시설의 근대화를 통한 유통망 구축이 필수적이라 하겠다.
2. 부산진시장
부산진시장은 동구 범일동 290번지에 위치한 부산최대 재래시장의 하나로 이곳에 조선시대 때 부산진(釜山鎭)이 있었다 하여 시장 이름을 부산진시장이라 하였다. 영조 46년(1770년)에 편찬된『동국문헌비고』에 보면, “부산진성 서문밖에 4일, 9일장의 정기시장인 부산장이 있었다”고 했다. 부산장은 읍내장(2, 7일), 좌수영장(5, 10일 또는 3, 8일), 독지장(1, 6일), 하단장(5, 10일)과 함께 부산지역의 5일장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개항기 이후에는 일본인 거류지역과는 달리 초량과 부산진은 한국인들이 다수 거주하였다. 이들은 일본인들과는 달리 전통적인 장시(場市)에 의존하고 있었다.
1914년 9월 부산부가 부산장 서쪽 구 유락관 앞에 40평, 60평 규모의 2동의 함석 점포를 지어, 매일 열리는 상설시장을 개장하였다. 1930년 10월에는 부지 2,000평을 취득하여, 200평 규모의 시장을 건립하고「부산진시장번영회」를 발족하였다. 1958년 2월에 목조 2층의 건물을 건립하여 운영하였다. 1967년 7월 8일 부산시의 부산진시장 민영화 방침에 따라 1968년 7월 22일 동구 초량동 1161번지의 시유지에 약 1,300평 규모의 가건물을 지어 이전하였다. 그후 1969년 3월 29일 현 위치에 시장 건립공사를 착공하여, 1970년 8월 28일 8,000여평 규모의 현대식 콘크리트 지하 2층, 지상 3층의 건물을 완공하여, 10월 8일 준공 입주하였다.
현재 2,000여명의 상인이 종사하고 있다. 주업종은 포목, 피복, 기성복, 양복지, 침구, 신발 등이다. 특히 혼수전문시장으로 명성이 높다. 부산권 뿐만 아니라 경남권의 고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쇼핑버스를 운행하는 등 노력을 하고 있다. 재래식 건물이어서 냉난방 시설이 미비한 점 등 환경문제가 취약하다. 지하철 범일동역을 끼고 있어, 교통시설이 편리하다. 그러나 보다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상가 옥상에 주차시설을 마련하고, 또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부산진시장개발주식회사」를 건립하여 700대 규모의 주차빌딩을 건립하여 운영하는 등 노력을 하고 있다. 최근 주변에 현대백화점과 같은 대형백화점이 들어서서 상권 경쟁이 심각해져, 보다 효과적인 활성화 방안이 시급한 실정이다.
3. 구포시장
구포시장은 구포1동 589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재래시장이다. 1972년 무렵「사단법인 구포시장번영회」를 발족하면서 만들어진 상설시장이다. A․B 2개 공구를 만들어, 생선을 취급하는 선어구와 곡물구로 나누었다. 1층 콘크리트 건물로 되어 있는 시장의 규모는 선어구가 231평, 곡물구가 186평 정도이다. 점포수는 100여 개이나 재래시장의 사양화에 따라 1997년 3월 현재 영업을 하는 가게는 30개 정도이고, 나머지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설시장에 등록된 정회원의 수는 59명이다. 구포시장은 이러한 상설시장보다는 5일장의 명성이 더 높다. 매달 3일과 8일에 열리는 장날이 되면, 노점상이 늘어나면서 시장이 주변 지역으로 확대된다. 5일장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열린다. 상인의 규모는 계절에 따라 꽤 차이가 있으나, 평균 1,500~2,000명 정도 규모이다.
구포시장에는 김해․양산․밀양․창원 등 경상도 상인뿐만 아니라 경북․전남지역 상인 등 전국의 상인이 모인다. 이용 주민의 수는 대략 10,000여명 정도이다. 주거래 품목은 농산물, 수산물, 해산물 등을 비롯하여 공산품, 일용품, 잡화 등이 중심이다. 현존하는 기록 가운데 구포장의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1871년에 간행된『영남읍지』로, 구포장은 3, 8일장으로 읍내장(2, 7일), 좌수영장(5, 10일), 부산장(4, 9일), 독지장(1, 6일)과 함께 5일장 체계를 이루고 있다. 18세기 중반에 저작된 이중환의『택리지』에서는 우리 나라의 유명한 포구로 낙동강 하구에서는 김해의 칠성포를 들고 있다.
그러나 그 후 낙동강 하류의 수로의 변화에 따라 구포-사상-하단을 연결하는 흐름이 낙동강의 본류를 이룸에 따라, 해상운수상 유리한 위치에 있던 구포가 점점 포구로서 발달하였다. 구포의 포구상업이 발달하게 된 것은 주변에 삼량창․감동창 등 조창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운선(漕運船)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숙박업이나 상업이 발달하였다. 구포는 낙동강 입구의 요지, 경부선 개통 전까지는 하단포와 함께 부산으로 수송되는 물산의 집산지였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하단포는 해류의 변화가 심하여 물산 집산지로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구포가 보다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부산에서 내륙으로 수송할 화물은 먼저 육로로 구포에 이르고, 여기서 선편으로 삼량진․수산진․사문진․왜관 등으로 보내지는 것이 보통이다. 구포에서 안동까지의 수로는 700리나 된다. 내려오는 선편에는 낙동강 유역의 여러 곳의 나락을 모아 싣고 구포까지 오면 나락(벼)은 정미소로 넘겨졌다. 구포는 미곡의 생산지는 아니지만, 곡물의 집산지로서 정미소가 많이 생기고 정미업이 번창하였다.
구포는 포구상업의 발달로 인해 한말에는 많은 객주들이 모여들어 구포는 상당히 번창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구포에서 민족계 지방은행인 구포은행이 1912년 6월 설립되었다. 구포은행이 설립되기 전에 구포저축주식회사라는 금융기관이 있었다. 이 회사는 예금 및 대금업, 어음할인업 등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장우석․윤상은․전석준 등 구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물산객주나 지주 등 70여명이 자본금 25,000원으로 1908년에 설립하였다. 우리나라 지방 금융기관의 선구이며, 구포은행의 전신이다.
4. 동래시장
동래구 복천동 229번지 일대에 걸쳐 위치하고 있는 부산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의 하나로 조선시대 읍내장(2, 7일)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동래지역의 장시(場市)에 대한 기록은 영조 46년(1770년) 편찬된『동국문헌비고』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시장이 형성된 것은 그 이전부터라고 생각되며, 동래부 읍내장은 동래 관아의 관문밖에 있었다 한다. 구포장(3, 8일), 좌수영장(5, 10일), 부산장(4, 9일), 독지장(1, 6일)과 함께 5일장 체계를 이루었다.『임원경제지』를 통해서 당시 거래되었던 물품을 보면 쌀, 콩, 면포, 마포, 비단, 청어, 북어, 대구, 해삼, 식기, 종이 등 많은 물품이 거래되었다 한다.
읍내장은 조선 초기에는 해삼물이 중심이었으나, 1901년에는 중국의 목면, 모시, 쌀, 콩 등 농산물 중심으로 그 기능을 바뀌어 갔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 1호 공설시장으로 지정 받아 수안동․복천동․명륜동의 3개동에 걸쳐 매월 2, 6일에 개시되었으며, 곡류, 어류, 채소, 땔감 등을 취급하여 하루 거래량이 약 4,000원, 출시 상인은 1,000여명이고, 구매자수는 4,000여명으로 이 일대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930년에는 동래교보의 공터에 노점형태로 있다가 1937년 총 부지면적 2,434평의 동래공설시장으로 승격되면서 향토적 색채를 담은 시장은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1955년에는 부산공설시장으로 승격되었다가 1966년12월 22일 대화재로 시장이 전소되었고, 1969년 사단법인「동래시장상인조합」으로 허가를 받은 후 소실된 건물을 복구하여 1970년 8월 6일 현재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 준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지 1,000평에 건평 2,000평 규모의 2층 건물로 되어 있다. 1996년 현재는 사단법인「동래시장번영회」로 등록되어 있다. 지금은 시장 주위에 문화재가 산재하여 있어 노후화 된 건물을 재건축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시정이다. 주변에는 백화점과 메가마트 등 대형 쇼핑센타 신설로 상권경쟁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5. 부전시장
부산진구 부전동 573번지에 있는 부전시장은 재래시장의 하나이다. 본래 이곳은 8.15 광복과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의 가건물이 들어서 있었던 생활의 터전이었던 곳으로 좌판이 형성되어 있었던 곳이다. 1971년 10월 1일 건설부의 용도지구 변경사업인가를 받아, 1973년 3월 착공하여 1974년 9월 28일 준공하여 동년 12월 21일 공식적으로 개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전시장은 채소를 비롯하여 생선, 건어물, 가공식품 등 취급품목이 다양하다. 총 점포수 344개로 농산물과 건어물 도․소매점이 각각 85곳과 24곳으로 가장 많다. 건물 2층에는 부산․경남 최대 규모의 인삼 전문상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옛 병무청 부지 뒤쪽에는 부산전자종합시장이 들어서 있다.
인삼도매상가는 본건물 2층에 위치하고 있는 부전인삼도매센터와 20여개 점포로 구성되어 있는 고려인삼센터로 나누어져 있으며, 부산과 경남일원 최대규모의 인삼시장으로 이름난 곳으로 수삼, 건삼, 홍삼, 인삼 엑기스 등 인삼제품 뿐만 아니라, 전통차, 스쿠알렌, 영지버섯, 벌꿀 등 각종 건강식품이 판매되고 있다.
구입하는 품목에 따라 다르지만 시중보다 적게는 10%, 많게는 50%까지 싸게 구입할 수 있으며, 4~5년된 수삼 1근에 1~2만원선, 홍삼은 시중가격의 10%정도가 할인된다. 감잎차(90포)의 경우 3천원 정도, 스쿠알렌은 6만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고, 상가주변에 밀집된 한약재가게까지 들러보면 건강과 관련된 대부분의 품목을 쇼핑할 수 있다.
우리의 인삼은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건강식품으로, 최근에는 항암효과가 뛰어나다는 것이 세계 유수의 연구소 임상실험에서도 밝혀졌다. 외국의 관광객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돌아갈 때에는 꼭 구입하는 상품의 으뜸이 인삼이라는 사실이다.
6. 기장장, 좌촌(천)장
기장시장은 기장읍 대라리 65번지에 현대식 건물로 공설시장으로 현대화 되어있다.『경상도읍지(1831)』에 보면, “읍내장은 성문 안에 있으며, 5일, 10일이 장날이고, 좌촌(천)장은 북쪽 20리에 있으며 4일, 9일이 장날”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지금으로부터 150여년 전부터 있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다. 원시시대에는 물물교환을 하려면 산신이나 용신 앞에 그 물건을 모아 놓고 고사를 지낸 다음에 팔고 사고 할 수 있었고, 고사를 올리지 않은 물건은 절대로 매매를 금지하였다. 그래서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날에 제사를 올리게 되어 장날이 생겼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시골장을 장시(場市) 장문, 향시라고 하여 제각기 특색이 있었고 큰장에는 우(牛)시장도 함께 있었다.
이러한 장날에는 새옷을 갈아입고 나들이하는 즐거운 날이 되고, 생산품을 팔아서 필수품을 구입하게 되고, 장날을 정하여 인근끼리 만나기도 하고, 삼지돈, 줌지돈을 만져가며 사돈을 만나고, 아는 사람을 만나서 안부를 묻고 안부를 전하기도 하였으며, 나무짐을 팔아서 장모에게 선지국을 대접하기도 하였다. 기장 장날과 자천 장날은 그 유명한 기미년 3.1독립만세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던 곳이다. 기장시장은 1905년경에 동부리에 있는 기장초등학교 정문앞에 약 500평 정도의 공터와 서부리의 수각다리까지의 골목이 장터가 되었고, 그후 51년 뒤에 서부리 정미소터에 가축시장이 개설되었다.
1960년경 대라리로 옮겨오면서 가축시장은 없어졌다. 이곳도 협소하여 1964년 대라리 65번지 일대 1,206평에 이전하여 전포를 설치하여 상설시장이 되었다. 이 상설시장은 난잡하게 가설된 시장으로 1985년 현대식으로 건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장의 건축과정에서 많은 상인들은 그 위치와 규모, 경비문제로 분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청강리 청강가에 상가 시장을 건립하여 기장시장은 양분되었다
좌천시장은 한때는 울산․언양․동래시장과 맞먹었을 정도로 성시(盛市)를 이루었다. 주변의 생선과 해산물, 정관․장안 등지의 농산물의 집산지였다. 우시장으로서는 전국에서 이름을 떨쳤다. 광복을 전후로 각 지역에서 모여들어 장날(4일, 9일)이면 약 2,000명의 인파가 붐비었다. 그런데 최근에 상설시장이 생기고 상가가 줄지어 늘어나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기장시장은 예로부터 “와닥딱딱 기장장, 망건 쓰자 파장장”이라 하여 새벽장이다. 기장갈치 기장미역은 모두가 이 기장시장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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