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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님을 만나 부활 생명으로 나오자! 2024.3.31
본문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들어가는 말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인데 특별한 외적으로 보이는 기적은 없습니다.
그저 교회 절기상으로 부활절입니다. 무엇인가 기대를 가지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보이는 것은 없지만 사순절 기간동안 말씀을 통해 우리는 거룩함에 나가기 위해 노력했고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기 위한 십자가에 주님을 생각하며 조,석으로 통곡했으며 나의 과거, 육체된 생각, 정욕들 그리고 세상의 유혹에 이기려 애쓰고 힘씀이 이제 부활절을 맞이 하며 결실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더욱 맑아 졌고 우리의 마음은 더욱 거룩해 졌으며 우리의 생각은 계속해서성령의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따라서 십자가는 계속되고 부활도 계속되는 우리의 믿음은 온전함에 이르기까지
정진할 것입니다.
우리는 변했습니다. 생각이! 말이, 행동이 더욱 조심스럽고 부드러우며 정직하고 정결함으로 나가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되어 갑니다.
예수님은
지난 금요일 처참한 십자가의 극형에서 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온몸에는
찢기고 맞은 채찍의 자국뿐입니다.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머리카락은 엉켜 휘날리고 눈에 힘은 없고 콧물은 질질 흘리고 콧 수업은 이리저리 바람에 흩날리고 얼굴은 온통 남의 침 뱉음으로 몰골이 아닙니다. 앙상한 광대뼈가 현실을 말해 줍니다.
팔목엔 쇄 못 자국으로 구멍이 나 있고 피 한 방울 남지 않고 마른 핏자국뿐입니다. 등이며, 허리며, 가슴팍, 배는 병정들의 채찍 맞은 자국으로 빨간 피 투성이로 난자한 모습입니다.
팬티 하나 걸치고 허벅지며 종아리며 모두 핏 자국 투성 이였습니다.
한 낮에 십자가에 고통 속에서 고난 속에서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인류를 대신하여 죄의 값을 치루셨고 거룩한 극형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잊으면 안 됩니다.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주님! 정말 무한 감사, 찬양, 영광을 올립니다.
그 십자가에서 보석 같은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천국은 누구나 소망하며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갈 수 있고 누길 수 있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에 모든 보화와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고전1:24)(골2:2) 또한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만세전에 작정하신 고귀한 생명입니다. (고전2:7)
아! 아! 잊으리까! 어찌 그리 그날을! 미천한 인생을 위한 그 고귀한 희생과 사랑에 감사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유언을 우리가, 내가 받고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내가 이루지 못하면 주님의 십자가는 지금도 그저 2천 년 전의 사건으로 지나갈 뿐입니다.
7가지 유언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지만, 요약하면! 천국은 십자가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요. 인류에 모든 소망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사화복 모든 대사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생명 나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주님이 남기신 십자가의 보물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깨달아서 가지면 됩니다. 누구나! 아무나! 어떤 사람이든지, 오늘 부활절 우리가 날마다 이루어!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길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룹시다.
(따라하기 : 나는 오늘도 부활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2. 본 문
본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의의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다윗을 인도하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목자 되심을 확실히 경험했습니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서만 자신의 목자가 되심을 경험한 것이 아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님의 자신의 목자 되심을 체험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것은 ’재앙을 겁내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죽음을 겁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그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푸른 초장 가운데 인도하시며 쉴만한 물가로도 인도함을 받을 수 있도록 견고하고 탄탄한 결속을 가진 이 사람이
어떻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번영 주의적 신앙이란,
과거 6,70년대에 전개되었던 번영신앙은 먹고 살기 위한 신앙이었다면
근래에 전개되는 번영신앙은 먹고사는 문제를 뛰어넘어 자아실현을 위한 신앙입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해지고 재물이 많이 모이고 명예를 얻으며 성공이 보장된다는
사탕발림 같은 말들이 복음의 탈을 쓰고 교계에서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도저히 주님이 가슴을 치고 피리를 불 때 도저히 춤을 추거나 애곡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없고 오직 육신의 영달을 위한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 남들이 웃고 춤추며 기뻐할 때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조류 앞에서 진정으로 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미친 듯이 달려가지만
우리는 회개하고 거룩하기 위해 미친 듯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목회자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잘 되어야 하고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그럴 수 있느냐’며 항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움은 도저히 참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왜 그렇게 어렵게 하시는지 이유를 묻고 회개하여 주님 뜻을 이루기보다
자신을 믿고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자신을 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데 그게 무슨 신앙입니까?
그런데 내 생각이 옳고 하나님은 자신의 성공과 보장을 위해 마음을 바꾸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회개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위주의 번영 주의적 신앙이 지금 판을 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 인격적인 승복을 하고 영혼의 소생을 얻고 쉴만한 물가와 초장 가운데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목자 되시는 그 주님이
번영 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비참하게 피를 뿌리며 죽어간
수 많은 선지자들과 경건한 성도들은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저주받은 것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다가
한 편의 설교를 피 같이 토해내고 죽어간 순교자들은 또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결론은
신앙의 진정한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그곳에 들어간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있든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든지,
언제나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새408)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좋을 때는 좋아하다가 나쁠 때는 그 삐뚤어진 관계를 회복하지도 못한 채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만 고집하는 그런 성도들과의 관계가 진정으로 목자와 양의 관계인지 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목자와 양 서로가 그리스도 앞에 서서 사랑하지 않으면 어긋난 것입니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서보다 오히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신앙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 되심을 진실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다윗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징계로서 영혼이 어두운 골짜기에 들어갔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커다란 시련과 어둠의 계곡에는 도처에 죽음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으며 자신의 영혼을 짓누를 때 죽을 것 같은 상황 속에 있을 수밖에 없을 때, 그 때 하나님을 의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그렇게 되었을 때에는 징계를 받는다고 생각 했지만 이유도 없는 환난과 시련을 받을 때, 단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것 때문에 사울에게 집요한 살인의 추격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의심이 왜 일어나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아내에게는 조롱과 비웃음을 받았으며
장인인 사울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싶었지만 자기를 죽이려고 집요하게 추적하는데
어떻게 주님이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진실로 구김이 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단지 그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사울 때문에 사망의 골짜기로 들어간 적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만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처럼 목숨 걸고 사랑하여 나라를 함께 세운 장군들과 많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은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섰을 때에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자기를 존경하던 백성들과 심지어 아내조차도 다윗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습니다. 정말 친구 하나 없이 홀로 광야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죽음의 계곡에 앉아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구해달라고 탄원도 했을 것이며 자기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눈물로 호소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는데
복음적 사실로써.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깨달음입니다.
여러분에게 조금만 잘못 대우하거나 어긋나면 금세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그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라고 여러분의 영혼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도 잘 아시겠지만 여러분이 생각하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맞고 하나님은 틀리다는 생각을 빨리 버려야 합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사단의 꾀에 빠져서 신앙생활과 인생을 허탄하게 보내지 마세요.
여러분은 틀리고 하나님은 맞습니다. ( 언제나 하나님만 옳고 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여러분보다 더 잘 아십니다.
저는 여러분의 이름 하나하나 부르면서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해 달라고!
저와 여러분이 종종 죄 때문에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섭리에 따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마저 모두 떠나고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좌절과 실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얼마나 비참하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무기력한 존재인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비참한 존재인데 평소에 교만과 이기심과 자기생각으로 그것을 보지 못하다가 하나님이 음침한 골짜기에 그를 던져버리시어
그 육신과 마음과 영혼을 함께 쳐서 보지 못하던 진실을 보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인생은 본래 비참하고 무기력한데 그 무기력과 비참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홀로 씩씩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 없이도 홀로 씩씩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는데 나를 이렇게 대우하시나,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 없지 하면서 고집을 피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연약한 인간으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래 양은 강력한 이빨이 있는 동물로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날카로운 발톱이 있는 것도, 뾰족한 뿔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잘 볼 수 있는 표범 같은 눈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양을 창조하실 때 아무 것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양은 목자 가까이에서 절대 돌봄을 받으며
그 목자를 절대 신뢰해야 하는 의존적인 동물로 지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능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자신이 너무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능력을 주지 않으시면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을 주시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다른 이보다 더 자상한 배려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의 자랑인 것처럼 내세우며 하나님께 대적합니다.
존 오웬 목사는
성도가 이 세상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삶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향한 갈망입니다. ( 십자가 위에서 목마름입니다.)
내가 마늘을 먹으면 마늘 냄새가 나고 술을 마시면 술 냄새가 나듯이,
내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 하나님 냄새가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무가 불에 타버렸는데, 인간이 성령의 불에 타버렸는데 어떻게 탄 냄새가 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나라와 영광에 대한 뜨거운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며 그런 사람들의 삶은 반드시 그 가치관에 의해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형편을 보고 너무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자기 욕심에 붙잡혀서 자기 뜻대로 안 되면 교회도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의 역사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장난이 아닙니다. 실상입니다.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어 버리시면 우리의 영혼에는 즉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홀로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절망 가운데 버려지게 됩니다.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오는 방법
첫째, 내가 무엇을 하든 나는 악하고 하나님은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눅18:19)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여러분이 만일 그런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에 들어갔을 때
아무리 두 손을 허공에 내저어도 무엇 하나 잡을 수 없이 깊은 나락으로 빠져 들어 갈 때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나는 악하고 하나님은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
여러분이 그 속에 들어가서까지 하나님께 항거해도 그 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손을 아무리 허공에 내저어보아도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잡더라도 허탄한 것들뿐입니다. 오히려 몸부림칠수록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처럼 점점 더 깊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나는 틀렸고 하나님은 옳으십니다’ “주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의 고백으로 사랑하며 용서하며 겸손해야 하는 의식이 없이는 그 골짜기에서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오히려 깊은 나락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빨려들게 되어 결국 침수하여 매몰되고 맙니다.
나의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실수나 어떠한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대적입니다.
고난을 당하든지, 영혼이 어둠에 빠졌든지, 절대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원망과 불평만 한다면, 또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여긴다면 절대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왔는데 왜 그게 싫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 찬양, 말씀 예배)
병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영혼이 망가져서 그런 것입니다.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하는데 왜 그것이 지겹고 권태가 느껴지고 지독하게 고단하고 원망과 불평을 느낍니까?
하나님이 나빠서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병에 걸려 입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햇빛이 나쁜 것이 아닌데도 안질에 걸린 사람은 강렬한 빛이 싫어서 결국 실명하고 맙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강력한 생명의 빛을 뿌려주실 때 그것이 싫은 것은, 그것이 지겨운 이유는 여러분의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건강한데 하나님이 병들었다고, 나는 옳은데 하나님이 틀리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해서는 사망의 소용돌이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는 자신의 정신과 영혼까지 짓이겨졌음을 깨닫고
자신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지실 때 말씀으로 건지십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소용돌이 속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영혼이 병에 걸려서 혼자 은둔하고 있는데 그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정상적으로 들릴 리가 없습니다.
진창에 빠진 것 같은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삶의 기반을 하나님 말씀에 중심을 두고
그 말씀에 이끌려서 한 걸음 한 걸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과 신앙생활을 대신 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교훈을 받을 수 있지만 가는 것은 홀로 가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감동을받고 그 속에서 말씀의 뜻을 감찰하고 그 뜻을 붙잡고 빙벽을 올라가는 등산가처럼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만들어 놓은 팩을 박아 집고 올라가야 합니다.
그 팩은(성경의 말씀) 생명과 직결됩니다.
그런데 말씀의 감화도 없고 붙드는 삶도 없으며
오히려 원망과 불평만 하니까 매일 빙벽에서 미끄러져서 끝이 없는 불행으로 가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암벽이나 빙벽에 팩을 박으면서 자신의 생명줄을 걸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처음에 올라가다가 떨어지면 죽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올라갔다면,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그 높이에서 떨어지면 죽습니다.
암벽을 타면서 팩 하나하나에 줄을 걸어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명줄과 같습니다.
거기서 그것을 붙들 말씀이 없습니다. 교만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놓아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말씀을 붙들지 않는
한 거기서는 한 걸음도 올라갈 수 없어서 그 자리에서 얼어붙게 됩니다.
올라가야 합니다. 어찌하든지 한 발 한 발 말씀을 붙잡고 그 속에서 감동을 받아
삶의 중심에 적용하며 한 걸음씩 올라가지 않으면 거기서 얼어붙어 버립니다.
신앙의 휴식은 없습니다. 날마다 거룩함에 이르러 기쁨과 감사만이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교만함과 원망 때문에 그 팩의 줄을 놓아버리면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에게 생명은 없습니다. 말씀의 감화를 안 받겠다고 하면 건질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과 등반이 가진 동일한 의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3.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징계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 것이 아니고
징계 속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을 치유하고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의 죽음 나의 죽음, 예수님의 부활 나의 부활신앙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숭고한 유언을 이루는 복된자 그리스도의 지체가 꼭!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부활은 지금도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갑시다.
그러므로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어느 장소에 있든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그 인도함을 받아 주님이 함께하시며, 부활을 날마다 이룸으로 기쁨과 감사가 날마다 이루어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천국에 입성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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