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작] 정재희
■대상
경주에서 1년
1.
점심 식사 시간, 햇볕이 좋은 날이면 우리는 드물게 게임을 한다. 의사에게 들은 친절한 언어들의 열전을 벌인다.
내 앞에 앉은 은영이 말하고 있다.
“항암 치료 부작용이 너무 심해서 항암 그만하고 3개월 후에 체크하러 오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의사가 나를 빤히 보면서, 최은영씨! 3개월 후에 나 못 볼 수도 있어요, 이러는 거예요.”
은영은 13개월 전 유방암이 폐로 전이된 상태에서 암 진단을 받았다. 그 뒤 최근까지 항암 치료를 하다가 몇 주 전 그만두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항암 치료로 온몸의 털이 다 빠져버렸고, 다리는 발목을 구부릴 수 없을 정도로 부은데다 철갑을 두른 것처럼 딱딱했다.
최근 부쩍 수척해진 상현이 어이없는 얼굴로 말한다.
“전 아산병원에서 의사가 생각해서 해준다는 말이, 항암 하면 편하게 6개월이고 항암 안 하면 고통스럽게 7개월 살 거니까 항암하는 게 낫지 않겠냐, 이러던데요.”
상현은 3년 전 진단받은 육종암이 재발해 이곳에 다시 들어왔다. 최근 종양이 커지고 전이되면서 거액을 들여 일본으로 수지상세포 치료를 다니고 있다.
귀밑에서 턱까지 이어지는 구레나룻이 러시아정교회 사제를 연상시키는 영준씨가 말한다.
“의사가 나한테는 얘기 안 했는데, 같이 간 여동생을 불러서 뭐라고 얘기한 것 같아. 여동생이 나에게 얘기해주려는 걸 내가 하지 말라 그랬어. 별로 듣고 싶지 않다고. 뻔하지, 뭐. 2~3개월 얘기했겠지.”
영준씨는 직장암이 간과 림프에 전이된 상태로 암 진단을 받았다. 5개월 전까지만 해도 ‘스카이’(SKY) 대학 출신의 전형적인 엘리트로 공기업에서 임원 승진을 바라보던 그였다. 암 진단을 받자 전도양양하던 그 길이 거짓말 같은 비현실이 되어버렸다. 요즘 영준씨는 매일 웃통을 벗은 채 맨발 산행을 하고, 2주마다 항암주사를 맞으러 서울에 다녀온다.
나는 유방암 3기로 진단받은 것이 3년 전, 간과 뼈로 암이 전이됐음이 발견된 것이 지난해 11월30일, 경북 경주의 산골 요양시설로 내려온 지 이제 1년이 되어간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숨을 쉬기 힘들었던 그 순간, 아직도 입 밖에 내기가 쉽지 않다고 느끼지만… 나도 입을 열어본다.
“난 의사가, 이제 완치는 어렵고 다만 시간을 끌어보는 겁니다라는 말을… 어찌나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지….”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듣게 될 것이라 상상도 할 수 없는 말들의 공장을 안다. 수많은 대기환자를 진료실 밖에 두고 시간에 쫓기는 대형 병원의 의사들, 그들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부두교의 죽음의 저주를 닮았다. 부두교 주술사들의 죽음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은 몸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는데도 저주의 자기실현에 대한 두려움에 질식돼 죽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항암 안 하면 3개월, 항암 하면 6개월입니다.”
그들은 3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의학적 시한부 선고를 내린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와 환자의 귀로 들어간 그 친절한 언어들은 예기치 못했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달아나지 않는 자들에게 그 저주의 언어들은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어 필연적이지만은 않은 죽음을 불러들인다. 부두교 주술사가 내뱉은 죽음의 저주가 건강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듯이.
경주의 산속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 요양시설은 자연치유를 택한 암 환자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이다. 이곳의 주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인 ‘숲치유’ 시간.
원색과 꽃무늬를 즐겨 입는 금씨 성을 가진 간호사가 빙 둘러선 우리에게 말한다.
“숲에 들어갈 때는 말이죠. 이렇게 에헴, 에헴 인기척을 내면서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숲이 우리가 들어가는 것을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우리를 해치지 않고 보호해줍니다.”
우리는 금 간호사의 말에 따라 에헴, 에헴, 인기척을 내고 숲에 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순한 양 떼처럼 그녀를 쫓아 치유봉을 오른다. 해발 400고지의 산골에 이 자연치유 시설이 세워진 뒤, 얼마나 많은 암 환우들이 이곳을 오르내리며 삶을 갈구했던 것일까. 신자 1천여 명을 둔 유명 개척교회의 목사, 40여 년간 배를 탔던 선장, 한때는 시인이던 촌부, 아들에게 손 벌려 생계를 잇는 무직자, 명예퇴직한 전직 물리 교사, 서울 강남의 깐깐한 사모님, 자금 부서에서 일하며 임원 승진을 기대하던 은행원, 휴직계를 낸 초등학교 교사, 제약회사에서 재무팀장으로 일한 회사원,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를 둔 전업주부,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시간강사, 바깥에서 우리를 달라 보이게 했던 그 모든 부와 지위와 명예와 지식은 지금 이곳에서 몹시 무력하다. 우리는 그저 헐벗은 자, 암이라는 병의 죽음 겁박 앞에 놀라 옷도 챙겨 입지 못한 채 온 힘을 다해 달아나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같다. 목사도, 선장도, 촌부도, 무직자도, 전·현직 교사도, 은행원도, 회사원도, 전업주부도, 시간강사도 하나같이 온 힘을 다해 달아나고 있다. 그 저주의 언어들로부터 맹렬히 달아나는 중이다. 부두교의 저주와 같은 의학적 선고가 우리 몸속에서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지 않게 하려고 열심히 달아나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저주로 인해 잘리지 않는 삶, 온전한 삶이다. 이를 얻기 위해,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빈틈없는 치병을 한다. 환우들 가운데 이곳에 가장 오래 있은 선장님(그는 부산의 한 고등학교 통신과를 졸업한 뒤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 배를 탔다)은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씻고 6시부터 30분간 족욕을 하며 묵주기도를 올린다. 6시30분이 되어 풍욕 방송이 나오면 풍욕을 하며 틈틈이 발끝 부딪치기를 하고, 풍욕이 끝나면 수정음악 방송을 들으며 명상하고, 수정음악 방송이 끝나는 7시20분부터 30분간 경침 운동과 발목 펌핑 운동을 한다. 아침 식사 시간인 8시부터 밥을 먹고, 식사가 끝나면 여러 가지 약과 보조제를 챙겨 먹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숙소를 청소하고 10시께 산행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선다. 한 두어 시간 걷고 낮 12시 가까이 되어 숙소로 돌아오면 식전에 먹는 약과 보조제를 부지런히 챙겨 먹는다. 점심 식사 시간인 낮 1시부터 점심을 먹고 이어 수정명상실에서 한 시간쯤 명상을 한다. 명상이 끝나면 기 수련이 시작되는 오후 4시 전까지 환부에 쑥찜질을 하다가 오후 4시부터 한 시간가량 진행되는 기 수련에 참석한다.
이후 잠시 쉬며 식전에 먹는 약과 보조제를 챙겨 먹고, 전화 통화나 카톡을 조금 하고 나면 저녁 먹을 시간이 된다. 오후 6시에 저녁을 먹고, 7시부터 족욕을 한 번 더 하며 묵주기도를 올리고, 저녁 8시40분부터 9시30분까지 아침과 동일하게 또 풍욕을 하고, 명상을 하고 경침 운동, 발목 펌핑을 한다. 풍욕을 시작하기 전 수정매트를 켜 온도를 70도에 맞춰놓고 풍욕이 끝나면 바로 수정매트 찜질을 15분 정도 하고 매트의 온도를 낮추어 잠잘 준비를 한다.
환우들 가운데 이곳에서 가장 짧게 있다 나간 임 선생의 일과도 선장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르다면, 선장님이 환우들과 함께 걷는 파라면 임 선생은 홀로 걷는 파여서 오전 내내 홀로 산속을 걸으며 한껏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고, 웃어댄다는 것.
“나도 환우들과 같이 산에 가면 재밌긴 한데, 에… 쉽게 말해서, 암이 우리를 기다려주는 게 아니잖아요. 에… 쉽게 말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을 수 있어요. 에… 쉽게 말해서, 암이 언제까지고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잖아요.”
‘쉽게 말해서’라는 독특한 접속사를 애용하던 임 선생은 <송학사>라는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를 수 있는 매력적인 보이스를 가졌는데, 점심을 먹으러 올 때면 목이 쉬어 있을 경우가 많았다. 홀로 산길을 걸으며 “나는 내가 참 좋다”라고 크게 소리치거나, 노래 가사가 빽빽이 적힌 종이를 들고 네이버에서 내려받은 곡에 맞추어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대고 오기 때문이었다. <송학사>도 그렇게 익힌 노래라고 했다. 임 선생은 저녁에 족욕 대신 절 수련을 하고 풍욕이 시작되기 전까지 매일 누구에겐가 감사 편지를 쓴다고 했다.
강남의 깐깐한 사모님인 명자씨는 안 해본 것도, 안 가본 곳도 별로 없었다.
“그거 알아? 의사 말 듣는 사람은 다 죽었고, 의사 말 안 듣고 제멋대로 한 사람은 살아남았대.”
늘 ‘그거 알아?’라고 운을 떼었던 명자씨는 유명 한의원을 다니다가 그곳에서 소개받은 승려에게 기 치료를 받으러 절에 간 적도 있었고, 이상구 박사의 뉴스타트센터, 서울 논현동의 비알엠연구소, 차가원, 힐리언스 등등 안 가본 데가 없었다. 그녀는 방에 있을 때나 산에 갈 때나 언제나 이상구 박사의 유튜브 강의를 들었고, 뉴스타트식의 치유법대로 물 마시고 기도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대체로 혼자 다녔다. 서울 아파트의 방 하나가 암 진단을 받고 사들인 건강 관련 도구와 기기로 꽉 차 있다는 그녀는 몸에 전기를 발생시킨다는 고가의 장비를 허리와 손목, 발목에 차고, 같은 곳에서 산 쇠숟가락 같은 도구로 얼굴과 머리뼈를 늘 문지르며 다녔다.
지극정성인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환우들이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피부를 자극하는 바람목욕을 하고, 체온을 높이기 위해 뜸과 찜질을 하고, 주열기를 달고 살며, 하루에 만보 이상을 걸으려 애쓰고, 밤 10시에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한다. 웃으면 면역세포가 활성화된다는 말에 매일 근육운동을 하듯이 규칙적으로 오래 소리내 웃고, 발암물질을 피하려 육식을 일절 삼가고, 유기농 채식을 하며 항암 작용을 한다는 다양한 건강식품과 보조제를 달고 산다. 또한 병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마음을 편안히 갖기 위해 절 운동을 하고 명상을 한다.
경주로 내려온 지 9개월째인 나의 일상 또한 다르지 않다. 아침 6시30분에 눈을 떠 밤 10시에 잠자리에 눕기까지, 기도를 하고, 풍욕을 하고, 족욕을 하고, 운동을 하고, 찜질을 하고, 암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 읽으며, 일상을 치병에 바쳐왔다. 그렇게 8개월을 살아왔다. 죽음의 저주를 벗어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지당한 것 같지만, 온 정성을 다해 치병을 하다가도… 환우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문득 고개를 쳐들고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우리 왜 이토록 살고 싶어 하는 걸까.
우리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자신이 있는 걸까.
우리 잘 살아낼 자신이 있는 걸까.
우리에게 암은 무엇일까.
나이 칠십의 목사가 2년을 방랑객으로 산속을 떠돌면서 그토록 붙잡고 싶어 하는 생은 무엇인가. 나이 육십여섯의 여인이 건강 정보를 샅샅이 그러모아 철저히 실천하면서 그토록 살고 싶은 생은 무엇인가. 나이 육십하나의 선장이 12년 전의 담도암, 5년 전의 폐암, 지금의 췌장암을 다 이겨내고 살아보고픈 삶은 과연 어떤 삶인가.
의학적으로 버려진 아이가 된 이들, 곧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적이 있는 이들은 쉽게 ‘산’을 떠나지 못한다. 전국 각지의 요양병원 혹은 요양시설을 떠돌거나, 산속에서 홀로 치병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어느덧 1년이 되고, 3년이 되고, 5년이 되고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암 선고를 받은 우리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한 번 혹은 두 번, 세 번 암을 진단받은 사람들에게 이곳에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블라지미르 메그레가 쓴 책 <아나스타시아>에 따르면, 병은 몸을 통해 신이 건네는 말 혹은 신이 청하는 대화, 신이 보낸 편지이다. 한 번도 글을 배운 적이 없는 문맹자처럼, 아무리 가르쳐도 사물의 이치를 못 깨닫는 맹문이처럼,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신의 편지 앞에 앉아 있다. 9개월째 그렇게 앉아 편지를 바라본다. 때론 자모 하나 읽히지 않는 어둠 속에 그렇게 앉아 있다.
사사나 스님이 내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나는 아직 스님께 내 상황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린 적이 없다. 나를 꿰뚫어볼 것만 같은 날카로운 눈매의 스님이 나는 두렵고 어려웠다. 가까스로 입을 뗀다
“매일 기도를 드립니다. 절실한 마음을 담아 기도를 드립니다. 이런 기도들이 모두 로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면 기도를 드리지 말아야 합니까?”
“음… 무슨 질문이 나올까 궁금했는데 아주 좋은 질문을 해줬네. 내가 진짜 기도,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 알려줄까?”
스님은 잠시 말을 멈추셨다가 이으신다.
“참된 기도는 말여… 인욕을 내려놓는 것이여어. 진짜 기도는… 인욕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것이여. 그게 기도여.”
스님의 전언이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에 담겨 있다.
“내가 예전에 공황장애에 우울증에 식도암까지 걸렸어. 그때 이노무 공황장애가 을매나 징글징글허냐면 누가 내 팔 한쪽을 떼가고 공황장애를 낫게 해준다면 팔 한쪽 떼버리고 말겠다 싶을 정도여. 이노무 병이 을매나 고약허냐면 아무도,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어. 그것처럼 괴로운 건 없어.”
스님은 미얀마에서 출가하셨다. 늦은 나이였다. 지방의 국립대 미대 교수였던 스님은 공황장애에 우울증에 식도암까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모든 것을 버리고 미얀마로 떠나셨다. 언젠가 스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아무려나 데려갈 테면 데려가라, 이까짓 목숨 가져갈 테면 가져가봐라 해버려. 그냥 한번, 될 대로 되라 하고 편안하게 있어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미얀마에 도착한 스님, 아무도 믿지 못하는 공황장애에 아무도 상대하고 싶지 않은 우울한 상태로 낯선 이국에 도착한 스님은 그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셨던가. 모든 것을 놓아버리자 기적처럼 살아나셨던가.
암 환자가 되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 가운데 하나는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암 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건네는 “내려놓으라”는 말과 달리 암 환자에게는 굳이 발화되지 않는, 서늘한 어구가 숨어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 누군가 우리 목에 시퍼렇게 날이 선, 날렵하게 잘 빠진 칼을 들이대고 한없이 부드럽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목에 칼이 들이대지지 않은 것처럼, 자칫하면 죽음이 우리를 덮칠 것을 모르는 것처럼 한눈을 감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2.
우리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 그러나 굳이 입에 올리지 않는 질문이 있다. 어쩌다 드물게 그걸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가 있다.
월남전 얘기가 화제에 오르면 늘 열을 올리는 강 목사가 말한다.
“나는 전립선암인데, 월남전 고엽제가 원인이에요. 이건 다 의학적으로 입증된 얘기야. 그걸로 보상금도 받고 있고.”
그는 지금 나이 칠십에 걸린 당신의 전립선암이 20대에 파견되었던 베트남전쟁의 고엽제 탓이라고 확언하는 중이다. 그의 이야기는 재빨리 미국과 한국의 보상금 액수 차이로 넘어가고 있다. 그는 전립선암이 림프와 뼈로 전이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이곳에 들어왔다. 신자 1천여 명을 둔 서울의 한 개척교회 목사인 그는 목요일까지 이곳에서 지내며 설교문을 쓰고 금요일이면 서울로 올라간다. 주말 내내 밀린 교회 일을 보고, 예배를 보며 설교를 하고 월요일에 다시 내려온다. 원발암이 전립선암인 그는 설교를 하다가 오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신자들에게 기도를 시키고 황급히 화장실에 다녀온 적도 있다고 했다.
맛깔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경순씨가 말한다.
“난 젊었을 때는 시를 잘 쓰는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결혼하고 얼라들 낳고는 시도 몬 쓰고…. 갸들 키울 때는 갸들이 말도 잘 듣고 공부도 곧잘 했는데, 다 커가지고 죄다 내 속을 썩이는 기라. 내 딸 갸가 돈도 잘 벌고 착하고 그러니까 웬 늙다리가 하나 붙어가지고 떨어지질 않는 기라. 지금 내가 이렇게 되니까 결혼을 또 미H는데…. 우리 아들은 통이 을매나 큰지, 돈으로 사고를 많이 쳐서 내가 그것 때문에 좀 힘들었다. 여튼 내 말은 아무도 듣질 않으니까…. 나중엔 우울증도 오고….”
경순씨는 유방암 수술을 하고 3개월이 채 안 돼 다른 쪽 유방에 또 종양이 발견되어 이곳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 종양에 헬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주열을 하며 헬렌을 달랜다. 커지지만 말아달라고, 그저 조금만 줄어들라고 달랜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그녀는 주말에 남편이 찾아오면 함께 인근의 사찰에 가서 불공을 드린다.
강 목사가, 내게 질문을 던진다.
“재희씨는 왜 암에 걸린 것 같아?”
나는 담담하게, 생각해두었던 말을 꺼낸다.
“잘은 모르지만 몇 가지 의심되는 건 있어요. 한 가지는… 전 유방암이잖아요. 유방암이 호르몬 계통의 암이잖아요. 애 가지려고 인공수정이니 시험관아기니 다 했거든요. 그때 호르몬제를 엄청 썼던 것 같아요. 배란을 유도해야 하니까. 그게 한 원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대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다. 그게 맞겠네, 그렇겠네,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하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역겨움인지 모멸감인지 모를 더러운 느낌들에 휩싸인다. 어떤 혐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보았기에. 더욱이, 그것이 시험관아기 핑계를 대며 세상이 우리에게 갖고 있는 혐의로부터 혼자만 빠져나가려는 알량하고 비겁한 모습이었기에.
암에 걸린 우리는 모두, 드러나게든 드러나지 않게든 모종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삶과 불화했다는 혐의, 행복하게 살지 못했다는 혐의, 무모했다는 혐의, 아마도 대체로 어리석었다는 혐의. ‘암에 잘 걸리는 성격’이라느니, ‘암에 걸린 사람들에겐 뭔가가 있어요’라는 식의 거친 말들은 노골적으로 혐의를 드러낸다. 대부분은 노골적이기보다는 암묵적으로 암 환자들이 갖는 성격적 특성들을 일반화하는 나름의 이론을 가지고 암 환자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곧잘 예민하고 소심하고 까다롭고 신경질적이고 탐욕스럽고 과도하고 절제를 모르는 존재들로 일반화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양한 혐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사람이 아닌 털털하고 소박하고 관대한 사람으로, 매사에 불평불만을 갖고 화를 폭발시키는 사람이 아닌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용서하는 사람으로, 탐욕스럽고 절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 절제하고 베푸는 사람으로, 침울하고 외롭게 살았던 사람이 아닌 재치와 위트가 있고 명랑하며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애쓴다.
또한 어리석게도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두고 있는 혐의를 다른 암 환우들에게 두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왜 나는, 또 저이는 암에 걸렸을까, 라는 의문의 답을 꾸준히 구한다. 함께 오랜 시간 생활하면서 어쩌다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모습을 발견할 때면, 탐욕스럽고 절제를 모르는 일면을 볼 때면, 어떤 일에 쉬 화를 폭발시키는 모습을 볼 때면, 저이가 저래서 암에 걸렸구나, 갖고 있던 혐의를 기정사실화한다. 우리가 암에 걸리게 된 것은 그저 랜덤이었을 뿐이라는 연구 결과가 리포트되어도 우리에게 씌워진 혐의는 끄떡없다.
우리들 자신조차 자유롭지 못한 혐의들 때문일까, 친구나 친지가 자주 찾아오는 환우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가족만 들락거리고, 가족조차 찾지 않는 환우도 적지 않다.
명자씨 또한 남편과 딸뿐, 그 누구도 명자씨를 찾아오지 않는다.
“난 암 진단받은 거 친구들 아무에게도 말 안 했어. 아무에게도 안 할 거야.”
경순씨가 맞장구를 친다. 경순씨 또한 찾아오는 사람은 남편과 딸뿐이다.
“나도 나도! 쪽팔려서 아뭇테도 말 안 했다. 아뭇테도 말하기 싫더라. 전번엔 미용실에 갔는데 미용실 여자가 그러는 기라, 어디 아프냐고. 그래서 고혈압이 있다니까 자꾸 캐묻는 기라. 이래 살이 빠지니 동네 사람 보기도 남사스러바서….”
상현이 도리질을 치며 말을 보탠다.
“저도 절대 말 안 할 거예요, 절대! 친구들은 제가 공황장애에 걸린 줄 알아요.”
상현은 이곳에 가족도 들이지 않는다. 가끔 가족을 만나고 올 뿐, 가족이 이곳에 내려오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는 매일 누군가들과 긴 통화를 한다. 혼자 걸을 때면 늘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고, 방에 들어가 혼자가 되면 재빨리 음악을 틀어놓는다. 그렇게 불안감을 달랜다.
전이가 되고는 나 역시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암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암 전이와 요양병원은 죽음을 예비하는 단어들과 같다. 나를 보며 내 뒤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려는 호사가들의 수를 늘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드문드문 만나던 지인들, 몇 안 되는 친구들과 아예 연락을 끊은 지도 벌써 8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우리는 마치 어느 순간 말없이 지워진 글자들처럼 세상에서 지워져 있다.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와 매일매일 정처 없이 숲속을 걷고 있다. 곳곳의 크고 작은 산자락에서 치병을 하며 살아가는 암 환자들. 세상은 어느 순간 그들 곁에서 말없이 사라져버린 우리를 기억할까. 숲속에 있는 우리의 존재를 상상이나 할까. 우리는 마치 이 세상 속에 숨겨진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뒤편에 숨어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좋았던 점 가운데 하나를 들라면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 즐거움을 들겠다. 아이와 읽은 그림책들 가운데 가장 좋았던, 이라기보다 가장 가슴에 남는 책으로 <희망의 목장>이라는 책이 있다. 원전 사고가 났던 일본 후쿠시마 시골마을의 한 목장. 방사능을 뒤집어쓴 이 목장의 소들은 이제 먹을 수 없게 되었고, 그러므로 어디에 팔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소들은 버젓이 살아 있다. 관청에서는 소를 살처분하라고 권고한다. 중년의 남자인 소치기는 살아 있는 소들을 살처분할 수도, 굶어 죽게 버려두고 떠날 수도 없어 매일 저녁 생각에 잠긴다. 소치기는 얼근하게 취한 얼굴을 하고 앉아 생각한다.
“팔지도 못할 소를 계속 돌보는 일. 의미 없는 일일까? 어리석은 일일까?”
매일 밤 비좁은 방 안에서 홀로 마신 술로 불콰한 얼굴을 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소치기. 나는 그런 소치기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팔지도 못할 소를 계속 돌보는 소치기처럼 의미 없고 어리석어 보이는 일들,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엔 있다. 어린 시절에 1년 위탁받아 키운 인연을 잊지 않고 늙고 병들어 은퇴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장애인 안내견을 다시 입양한 가족. 몸이 성치 않아 버려진 동물만을 데려다 사랑으로 키우는 사람. 말이 통하지 않는, 경계성 발달장애에 가까웠던 아버지를 평생 극진히 보살폈던 엄마. 아둔하고 미욱한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 똑똑하고 착한 엄마를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팔 수 없는 소들, 교환가치를 잃은 소들이 있다. 가치와 효율로 따지자면 의미가 아닌 무의미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적으로 무능력해진 사람들, 일해 돈을 벌 수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없는 사람들, 나을지 기약조차 없이 자신의 돈과 시간과 기력을, 나아가 다른 이들의 그것까지 빌려 온전히 치병에 들여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으며 이 사랑스러운 그림 앞에서 감탄하고 있을 때, 그때는 전이 진단을 받기 전이었다. 암 진단은 받았지만 표준치료를 끝내고 다 나았다는 착각과 함께 일상으로 돌아가 있을 때였다. 머리털이 다시 조금씩 자라나던 그때는 팔 수 없어진 소들에게서 내 모습과의 유비를 보지 못했다. 그때는 팔 수 없어진 소들을 돌보는 일을 차마 그만두지 못하는 소치기만이 보였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삶이 연속되고 있다.
3.
이곳에서 우리가 즐겨 걷는 산길 가운데 하나는 오형제길이라 이름 붙인 임도이다. 산내면 내일리에서 내남면 박달리로 이어지는 5∼6km의 임도를 40분쯤 걸어 내려가면 임도 오른쪽에 다섯 줄기로 갈라진 수려한 쪽동백나무가 외따로 서 있다. 이 오형제 나무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면 만 보가 된다.
오형제 나무 옆에 서서 들고 간 물을 마시는 짧은 휴식 시간. 오형제 나무를 부둥켜안으며 누군가 말한다.
“난 내가 환잔지 뭔지 모르겠어유. 아무 증상이 없으니까 집에 있으면 내가 정말 암 환자가 맞나 싶고… 암이 도대체 뭔지….”
강 목사가 받아준다.
“나도 그래. 나도 아무런 증상이 없는데, 이노무 병원에만 가면 나보고 말기암이랴, 아주 죽갔어.”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유방암이 간과 뼈로 다발성으로 전이되었고 이제 항암제로 시간을 조금 끌어보고자 할 뿐이라는 의학적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나는 겉으론 환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뿐 아니라 병원과 요양시설에서 만나는 많은 암 환우들은 대체로 겉으론 환자로 보이지 않는다. 자각증상이 심하지 않거나 아예 없는 경우엔 스스로도 자신이 지금 암 환자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병원에 가면 암이 상당히 진행되었다거나 다른 장기들로 전이되었다는 무시무시한 진단을 받는다. 이 점에서 암은 매우 흥미로운 질병이다. 어느 시점까지는 겉으로 아무런 표식 없이 진행되는 내적 죽음이랄까. 그의 또는 그녀의 삶이 겉보기와 달리 어떤 이유에선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을 때 몸속에서 서서히 죽음이 예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상현은 생각만 해도 싫다는 듯이 어깨를 움찔했다가 털어내며 혼잣말처럼 말한다.
“직장생활 14년 동안 늘 불안했던 것 같아. 늘 온몸이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아. 몸은 뭐 그런대로 편했는데 늘 움직이는 땅 위에 있는 기분이었던 것 같아. 나 같은 인간은 직장생활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밥 먹을 때면 늘 성호를 긋는 오랜 가톨릭 신자인 상현은 자신이 왜 암에 걸렸는지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제약회사의 재무팀에서 일하며 재무팀장 자리까지 올랐던 지난 14년간 어쩔 수 없이 늘 숨기고, 감추고, 속이는 일을 해야만 했다. 아침에 어쩌다 택시를 타고 출근할 때면 자신을 내려놓고 유유히 사라지는 택시 기사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고 했다.
영준씨가 말한다.
“나는 어려서 안동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잖아. 그러니까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고. 또 맏아들이니까 맏아들 역할을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도 있으니까 늘 몸에 힘이 들어가 있었던 것 같아. 또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압박이 있으니까 늘 몸에 힘을 주고 긴장하며 살았던 것 같아.”
명문 대학을 나와 정년이 보장된 공기업에서 승승장구하며 승마, 골프, 수상스키 등의 레저부터 템플스테이까지 화려하고도 다양한 여가생활을 즐기던 그였다. 남들 눈에 화려해 보였고, 스스로도 그런대로 원만한 삶이라 믿었고 만족하던 삶이었다. 그러나 그 삶을 살면서 그의 몸엔 늘 과도한 힘과 긴장이 들어가 있었다. 나 또한 늘 몸에 힘이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내려다보면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은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저는 제가 별로 스트레스가 없는 줄 알았어요. 뭐,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계속 그 생각에 매달려 있는 성격이 아니어서 다른 일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 좀 놀면 금방 잊히니까. 그래서 별로 스트레스가 없는 줄 알았어요. 눈물은 좀 많았어요. 이상하게 조그만 일에도 눈물은 항상 많았어요. 이렇게 되고 보니 내가 스트레스가 많았나 싶고. 에이…, 잘 모르겠어요.”
말을 잇지 못하는 은영의 눈은 금세 붉게 충혈되었다. 나 역시 내게 큰 스트레스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살아오면서, 특히 최근 10년 동안 큰 스트레스가 되었던 사건·사고가 없었고, 부부 관계는 원만했으며, 뒤늦게 얻은 아이는 순하고 건강했고, 뒤늦게 시작한 일도 크게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어찌어찌 구색이 맞춰지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힐링 코드>의 저자) 알렉산더 로이드는 많은 의대 보고서들을 인용해 검사 전에 스트레스가 없다고 말한 사람의 90% 이상이 실은 심리적 스트레스 상태에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스트레스가 자신의 면역체계 치유 작용을 방해하는지 알고 그것을 해결해야 할 시점에 자신이 스트레스 상태에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들이 가진 스트레스는 거의 찾아내기가 불가능하므로 치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암이 더 이상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전언이라면, 또한 질병이 스트레스의 표현이라면, 우리 삶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나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스트레스일 것이다. 우리 생각대로 스트레스가 없었던 게 아니라면,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의식을 속이는 전문가라는 것이다. 시치미 떼는 일의 전문가로서 우리는 의식을 속일 수는 있었으나 무의식과 그 무의식의 작용을 받는 몸까지는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통합의학의 선구자) 버니 시겔에 따르면, 놀랍게도 환자의 15%에서 20%는 무의식적으로 심지어는 의식적으로 죽음을 소망한다. 죽음이나 중병을 통해 고뇌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으로서 암이나 기타의 중병을 어느 의미에서는 반기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없다고 믿었던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소망하면서 암과 같은 내적인 죽음을 불러들였던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표면적으로는 감지도 의식도 하지 못하지만 프로이드가 말한 바, 우리의 자기보존 본능에 저항하는 ‘어떤 종류의 죽음의 본능’에 의해 여기까지 끌려온 것인가. 명자씨도, 경순씨도, 은영도, 나도 모두 우리 안의 어딘가에 잘 숨겨진 죽음의 욕망에 의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가.
나 자신 열심히 살았다고는 못하겠으니 감히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번아웃’된 것은 아닌가, 생각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기쁨이 없는 전력투구’가 얼마 동안 이어져왔던 것일까. 마른 짚단이 아니라 젖은 짚단을 태우는 듯한 삶의 이미지가 보인 지는 오래되었다. 답답하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느낌이 간간이 찾아들었다. 어떤 이유에선가 나는 생기를 잃고 메말라가고 있었다. 때때로 살아 있는 채 박제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면 내 손을 끝내 놓지 않을 누군가의 손을 꼭 잡고 한 번도 들어가보지 않은 곳으로 미친 듯이 내달리고 싶었다. 돌아오지 않고 싶었다. 나는 어떤 출구를 찾아헤매었던 것일까. 어떤 이유에선가 서서히 번아웃된 껍질뿐인 삶이 스스로를 천천히 살해하는 방식이 곧 암이었을까.
나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들풀이나 들꽃의 생명력이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싶어 가만히 멈추어 서본 적이 없다. 뒤늦게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퍼질러앉아 그 아이다움을 한껏 즐겨보지 못했다. 늘 타인들의 시선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었을 뿐, 나 자신에 대해 늘 냉정하고 무심하며 잔인해서 살아오면서 한순간도 나 자신을 위로해본 적이 없다. 내게 상처 입은 타인들은 나를 원망하거나 비난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이미 나 자신이 스스로를 질리도록 다그치고 괴롭혔을 것이기에. 버니 시겔에 따르면, 대다수의 암 환자들이 당면하는 근본적인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은 일이 없기에 인생에서의 중요한 시기에조차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람들과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명자씨도, 사람을 잘 믿지 못한다던 경순씨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늘 두려웠던 나 역시도 스스로를 비롯해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일까. 이 병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받고 싶은 욕망 뒤에 숨겨진 죽음에의 욕망을 부추겼던 것일까. 스스로를 포함해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기에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아닌 죽음에의 욕망에 더 긴밀해진 것은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미첼 러너가 쓴 <치유에서의 선택들>(Choices in Healing)에 한 노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내를 유독 깊이 사랑했던 노인은 아내의 사후 다른 존재를 사랑하지 못한다. 인간의 기본적 감정인 사랑이 흐르지 않을 때 생의 에너지도 흐르지 않는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던 것일까, 노인의 암은 매우 위중한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나이도 많았고, 다른 여러 질환도 있었던 노인은 의외로 기대와 달리 수년을 더 살았다. 그것은 그 마지막 생애 내내 그의 곁에 있었던 버림받은 고양이들 때문이었다. 그의 사랑이 더 이상 흐를 곳이 없어진 그때 버림받은 고양이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다행히 노인은 젊어서 버림받은 고양이들을 보살핀 적이 있었고 그때 쌓은 좋은 기억이 있었다. 버림받은 고양이들을 돌보면서 폐색되어 있던 노인의 생의 에너지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러너와 그의 동료들은 그 노인의 ‘버림받은 고양이 키우기’를 ‘다시 사랑하는 것에 대한 허락’이라고 정의 내린다. 버림받은 고양이가 노인이 다시 사랑을 쏟아부을 수 있는 허락된 대상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서도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는… 다시 사랑하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을까. 폐색되어 소진되어가던 우리 생의 에너지는… 다시 흐를 수 있을까.
4.
웃음치료 시간. 전에 대장암 환자였다는 웃음치료사가 묻는다.
“새우가 나오는 드라마는 뭘까요? 깊이 생각하지 말고 하나 둘 셋! 대-하-드-라-마!”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거듭되는 농담에 환우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60~70대의 환우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에 비해 우리 40~50대 환우들의 웃음 끝은 짧다.
“나는 아파 죽겠는데 그 새끼가 나가서 바람을 피우고 들어오질 않나, 엉뚱한 데 돈을 써대질 않나, 하는 짓이 이쁜 구석이 하나도 없어! 여기서 그 새끼가 누구여? 그 새끼를 향하여, 자 시원하고 걸죽하게! 이 염병할 놈의 새끼! 나가 뒈져라!”
60~70대 환우들은 웃음치료사가 권하는 대로 손가락으로 허공을 찔러대며 웃느라 정신이 없다. 웃음치료사가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칭하며 우리들의 웃음보를 겨냥할 때, 암 환우를 대상으로 하는 많은 프로그램들이 그러하듯이 그 살가운 호칭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암에 걸린 우리를 살짝 비껴간다. 40~50대인 우리에게 어머니·아버지라는 호칭은 아직 이르기에,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할 말도 못하고 살아왔다고 할 수는 없기에, 웃음치료사의 유머 코드가 딱히 우리의 유머 코드와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기에, 갑자기 <남행열차>류의 노래가 흘러나온다고 절로 흥이 나며 몸이 들썩여지지는 않기에. 웃음치료의 끝에 춤을 추는 환우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정쩡하게 겸연쩍으면서도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비껴서 있다.
암 환자를 위한 프로그램들이 대상으로 삼는 전형은 자기 삶을 희생하며 가족을 위해 헌신해온 60대 이상의 여환우들이 아닐까. 내 삶을 희생하며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고 할 수도 없고, 내게 남편 또는 자식이 용서가 필요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질러본 적이 없으며, 믿었던 그 누군가로부터 크게 배신당한 적도 없는 나는 보통의 오리들과 다르게 생겼음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미운 오리 새끼’처럼 무리 속에 숨어 있다. 이 자리에 없는 남편을 향해 삿대질을 하라고 하면 옆 사람과 같이 삿대질을 하며 웃고, 남편을 용서하라고 하면 “네”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을 억누르며 살다가 암에 걸린, 착하고 참을성 많은 여인처럼 앉아 있다.
도널드 바셀미의 소설 <나와 미스 맨디블>에는 서른다섯 살에 모든 것을 다시 익히기 위해 초등학교 6학년으로 편입한 남자가 나온다. 남자는 초등학교 6학년 교실의 작은 책걸상에 몸을 구겨넣고 얌전히 귀를 기울인다. 살면서, 남자처럼, 모든 것을 다시 익히고 싶다는 느낌이 들 때가 간간이 있었다. 남자처럼 초등학교 교실의 작은 책걸상에 어떻게든 몸을 구겨넣고 다소곳이 앞을 보며 앉아 있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기호와 약호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강의를 들으며 앉아 있다보면 미스 맨디블의 교실에 앉아 있는 남자가 된 느낌이 들곤 한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익히기 위해 초등학교 6학년으로 편입한 남자가 된 것만 같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기호와 약호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것만 같다. 이전에 배우고 익혔던 모든 것은 ‘암’이라는 병으로 인해 효력 정지되었기에.
이곳은 내게 미스 맨디블의 학교와 같다. 이곳에서 나는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 순한 어린 양처럼 얌전히 귀를 기울인다. 왜 우리는 암에 걸렸는가. 우리의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는가. 어떻게 먹고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왜 이토록 살고 싶어 애쓰는가. 살아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암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난 8개월간 나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비록 이곳은 내게 많은 것을 익히게 해준 학교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초대하고 싶지 않은 이상한 학교이다. 이상한 학교의 학생으로 살아온 지 9개월째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있을 때, 상현이 밥을 먹다가 묻는다.
“추석 때 올라가세요?”
“아니, 안 가려고….”
상현이 혼잣말처럼 탄식을 내뱉는다.
“아, 진짜, 추석에도 이렇게 있어야 하나….”
내가 짓궂게 묻는다.
“여기 아니고 밖에 있으면 더 즐거울까?”
상현이 기분 좋아진 얼굴로 받는다.
“아, 이런 질문 좋아. 맞아 맞아! 아닌 것 같아. 좀 전에 밖에 있었으면 지금쯤 뭐하고 있었을까 생각해봤더니,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소고기 사고 있었을 것 같아. 이거저거 사러 왔다갔다 하고 있었겠지.”
우리가 돌아가고픈 세상, 우리에게 정말 부러운 삶은 어떤 삶일까. 2주 전 서울의 집에 다녀오는 길에 기차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창밖을 보고 있을 때였다. 가벼운 평상복 차림으로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여자들, 거리를 걸어다니는 여자들이 보였다. 내가 벗어두고 나온 삶이 거기 있었다. 적어도 암 진단을 받지는 않았을 그들, 암을 계기로 내가 벗어버리게 된 그 삶을 여전히 살고 있는 그들, 그들의 무표정이 나를 스쳐가고 있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돌아가고픈 삶은 적어도 그 삶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징해지는 순간이었다.
간혹 서울에서 일을 보고 내려와 신경주역에 내릴 때면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밤바람과 함께 훅 끼쳐온다. 저 밝고 환하고 활기찬 도시에서 멀어져 이 외딴 산속에 나를 숨길 수 있는 방이 어둠 속에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때가 있다. 그 방을 향해 택시를 타고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올라올 때면 세상으로부터 아스라이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 방은, 베네딕타 워드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 내부의 궁극적 장벽, 곧 우리가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받을 수도 없다는 깊고 차가운 확신’을 녹아내리게 하는 눈물이 필요할 때 내가 온전히 숨을 수 있는 장소가 되어준 곳이다. 언제쯤이면 이곳을 떠날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가끔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본다. 아직도… 눈가에 가시지 않은 두려움이 보인다.
낫게 된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생각해보려 하면 언젠가부터 스르르 떠오르는 여자아이가 하나 있다. 20대 후반 혹은 그보다 좀더 어릴까 말까. 살이 좀 붙은 여자아이는 후줄근한 하늘색 후드티에 빛바랜 청바지를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를 태우고 있다. 서퍼들이 즐겨 찾는 바닷가 마을, 마을 토박이인 듯싶은 여자아이는 때때로 서핑을 하며 파도에 몸을 맡긴다. 때론 자리를 비운 누군가의 담배가게를 봐주며 담배를 팔고 있다. 온몸에 불필요한 힘과 긴장이 들어가지 않은 느슨한 움직임에 차분한 눈길. 이상하게도 웃는 모습은 좀체 떠오르지 않지만, 언제나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있는 모습은 없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할 때도 테이블 밑에서 두 손가락 끝으로 끊임없이 도형을 그려대는 모습은 없다. 다행이다.
정재희
대상 '경주에서 1년' 전재희씨 수상 소감 / 소중한 사람 정국과 아들 도우에게
글을 읽거나 써본 지가 꽤 오래됐다. 크게 아쉬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때때로 알 수 없이 나를 건드리는 순간들, 그 순간들이 사라지는 것, 그 순간들이 일으키는 느낌이 맥없이 잊히는 것은 조금 안타까웠다. 그 안타까움이 굳이 기록할 만큼은 아니었기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내면서… 잊히는 것이 아쉬운 순간, 느낌, 단상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조금 적어보고 싶은 마음이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순간들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쉬웠다. 치병이 더 중요했기에 적는 일에 온전히 몰두하진 못했다. 차마, 스러지게 놓아둘 수만은 없었던 순간, 그 순간들을 더듬어 적어보았다. 거칠게 적힌 그 순간들에서 가치로운 뭔가를 발견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글을 써서, 다른 어떤 상보다 <한겨레21>의 손바닥문학상을 타게 되었다는 것이 정말 기쁘다. 스무 살에 처음 만나, 스물일곱에 함께 살기 시작했고, 오래도록 그와 함께 있고 싶어 이토록 절실해지는, 나의 소중한 사람 정국과 우리의 아들 도우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
■가작
푼타아레나스행 택배 / 김영석
잠에서 깼을 때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놀란 마음으로 주변을 더듬자 솜으로 된 쿠션과 딱딱한 뼈대가 느껴졌고 뼈대를 더듬어갈수록 사각형의 구조가 만져졌다.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발을 뻗었더니 무릎을 살짝 폈을 뿐인데도 끝에 닿았고 얼마 있지 않아 솜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풍겨왔다. 옆으로 누운 성인 남자의 어깨 보다 조금 높은 키, 쭉 뻗은 자세에 못 미치는 길이와 인조 가죽 그리고 쿠션 등을 감안하고 볼 때 내가 소파에 누워있는지 모르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새벽녘 소파에 앉았던 기억이 난다. 밤샘 택배 분류 작업을 마치고 같은 조 선배와 소주를 나눠 마신 다음 돌아오는 길이었다. 단지에 들어서 취기를 낮추려고 담배를 꺼내 물고 분리수거실 주변을 서성였었다. 그때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 작은 방 그러니까 내 방에 있던 소파였다. 어둡긴 했어도 소파의 모습이 낡은 여행용 가방을 닮았기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소파의 등받이 부분은 짙은 밤색으로 평범했지만 깔고 앉는 부분은 2차 대전 때 사용했을 법한 구제 스타일의 트렁크를 닮아 있었다. 약간 밝은 밤색의 사각형 트렁크, 모양 뿐 아니라 실제로 구제 트렁크로 보이도록 그림까지 그려져 있는데다 클립과 단추 같은 인테리어 소품이 달려있어 언뜻 보면 진짜로 가방을 붙여놓은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손잡이 양 옆의 금속 클립을 동시에 누르면 딸깍 소리를 내며 천천히 주둥이가 열리는 그런 트렁크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밖에 나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위에서 자고 나온 터였다. 찜찜한 기분으로 담배 불똥을 손끝으로 툭 털어내고 소파에 앉았었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설마 엄마가 기어코 버리고 만 것일까?
엄마는 좁은 방에 소파까지 들이는 건 무리라고 했다. 접었다 펼 수 있는 간이침대를 놓든가 그것도 아니면 맨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라는 식으로 잔소리를 해대고는 했으니까. 매형한테 눈치가 보여 그랬는지 모른다. 엄마는 대한민국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든 아파트를 손에 넣어야 한다며 있는 대로 대출을 받아 전세까지 낀 다음 아파트를 장만했다. 처음에는 일이천 올라 좋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일단 오르면 좋은 거고 어차피 끼고만 있어도 망할 일이 없다, 라는 생각은 순진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가게를 얻기 위해 제2금융권에 담보로까지 잡힌 아파트에, 턱까지 찬 전세금을 지불하려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엄마는 깡통이 된 아파트를 팔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었는데 그때 누나한테서 연락이 왔다. 언젠가 이 동네가 다시 뜰 거라는 확신을 했는지 살고 있던 소형 아파트를 팔아 전세자금을 마련하겠다고. 그런 다음 가족을 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누나와 매형 조카 세윤이를 데리고서. 집은 매형과 엄마의 공동명의로 바뀌었고 세 달 뒤 나도 들어왔다. 낡은 트렁크 소파와 함께.
트렁크 소파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거미줄 같은 이태원 경리단길 어느 골목의 골목 거기서 또 골목의 끝 츄로스 & 도넛 가게에 자리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사람들의 엉덩이 세례를 받겠노라고 다짐을 하면서.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골목 어딘가에서 거대한 타란툴라가 막고 섰는지 내 가게까지 찾아오는 이는 드물었다. 일단 입소문이 퍼지면 북한산 끝자락이라도 찾아올 거라는 믿음은 병신 같은 희망이었다. 가게는 여섯 달을 버티지 못했고 수천만 원의 시설비만 날린 채 또 다른 희망이에게로 넘겨졌다. 시설을 몽땅 버리다 시피하고 나올 때 챙긴 유이한 물건 중 하나가 소파였다. 가게 테라스에 놓여 있던 안락의자는 매형 어머니가 쓰신다 하여 부천으로 보내드리고 소파는 침대 대용으로 쓰려고 작은 방에 들여놨다. 소파를 구석에 밀어 놓고 엄마에게 약속했다. 원룸 보증금 마련할 세 달 동안만 얹혀살겠다고.
약속한 기일이 지났기 때문에 소파를 버린 걸까? 매형 눈치가 보여 그러는지 엄마는 최근 들어 부쩍 잔소리가 늘었다. 서른도 훌쩍 넘었는데 앞으로 뭐가 될 거냐고 뭐가 될 생각이 있기는 있느냐고 공연히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왜 달동네 하꼬방 같은 데서 과자나 굽는 일을 시작했느냐고. 거지같은 소파 하나 남기자고 돈 칠 천 털어먹었냐면서 말이다. 황홀한 갭투자의 성공은 물 건너 간데다 명의마저 넘어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탓인지 엄마의 말끝은 거칠고 바짝 말라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처음에는 소파를 좋아했었으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혼란스러우면서도 눈꺼풀은 무거웠다. 열두 시간 동안 택배분류를 하고 나면 누구나 그렇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의 기준이 잠과 식욕에 맞춰지게 된다. 뜨거운 사발면도 1분 안에 먹을 수 있게 되고 사람들이 오줌 묻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작업장 한편의 종이 박스 위에서도 꿀잠을 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5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먼지바람에 목구멍이 간질거려도 부운 눈꺼풀은 돼지본드로 붙여 놓은 듯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더불어 적당한 어둠과 좁은 공간이 주는 푸근함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처음과 달리 소파 안이 편안해졌고 비좁은 소파 안은 소파 바깥일들이 들어올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른 편으로 돌아누우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 안이 훨씬 더 안전한 곳인지도 모르겠다고.
소파 밖에는 사람들과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근 시간과 대출 상환일 같은. 반면 소파 안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수염고래의 종류라든지 인천공항 리무진 버스의 운행시간 그리고 유투브에서 본 다큐멘터리의 시답잖은 장면 같은 것들로 말이다. 대출금을 깎아주거나 할부금을 유예 시켜주지도 않는 것들인데 저마다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어째서 소파 안이 이 따위 것들로 채워져 있을 뿐인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 마음이 편안했다. 어쩌면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상상하느라 현실을 잊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멍청한 상상을 수정구슬처럼 끌어안고 잠이 올 때까지 문질러대고는 했었다.
실제로 소파에도 반질반질 윤이 나는 곳이 있는데 왼쪽 팔걸이 부분이다. 소파에 누우면 발가락이 팔걸이에 닿았는데 잠들기 전까지 발목을 까딱거리며 그 부위를 쓰다듬고는 했다. 그래서 왼쪽 팔걸이 부위만 매끄럽게 윤이 났고 조카 세윤이가 그쪽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엄마는 세윤이를 들어 반대편 쪽에 내려놓고는 했다. 그러고는 이놈에 소파 좀 버리든가 하지, 라는 말을 지나가는 듯 흘렸다.
엄마의 잔소리가 심해질 것 같으면 밖으로 나와 단지 안을 서성였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얼마 안 있어 거실 불이 꺼졌고 안방에 있는 등에 불이 들어왔다. 그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가 다시 소파 위에 조용히 누웠다. 안방에서 새어나오는 텔레비전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소파 위에서 자는 건 생각 보다는 편안하다고. 진짜 트렁크 가방처럼 뚜껑이 열리게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소파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는지 소파가 느끼는 감각을 조금씩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우선 소파에 전해지는 온도를 순차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싸구려 가죽을 데우고도 남아 이렇게 등에까지 전해진 걸 보면 시간은 오후 한 시에서 두시 사이인 듯 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각도를 가늠해 봐서도 그랬다. 어쩌면 오후 네 시를 훌쩍 넘긴 때라 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점심때는 지난 것이고 먹는 것보다는 잠이 더 궁했으니까. 한 시간만 더 자게 해준다면 1리터의 피와 바꾸자 해도 그럴 수 있을 만큼 여전히 눈이 뻑뻑하고 무거웠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수천 번도 오고간 어깨도 콕콕 쑤셔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엊저녁의 잔업은 정말 너무했다. 알바들이 담당하는 시간대에는 유독 물량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어제는 그에 더해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마저 빨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다음 조와 교대할 때 보니 우리가 분류한 택배가 3천 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너무 피곤할 때 나오는 반응은 둘 중에 하나다. 기절하듯 쓰러지든지 오히려 잠에 들지 못하고 희부연한 허공을 매가리 없이 떠돌던지. 새벽에 업무를 마치고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도 그랬다. 눈앞의 사물이 흐릿하게 번지는 가운데 입에서는 단내가 났고 마음은 정처 없이 어딘가를 헤맸다. 그럴 때면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리모컨을 미친 듯이 찾게 된다. 어떤 순간이든 일시정지 시킬 수 있는 마술 같은 리모컨을. 눈앞의 택배상자를 없앨 수는 없더라도 잠깐만이라도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정말로 그런 리모컨이 있다면 고래 뱃속에라도 찾으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방광이 터질 때까지 소변을 참다 오줌을 누면 노란 줄기 끝에 피가 섞여 나왔는데 그럴 때면 세정 버튼을 세 번 네 번 연속으로 누르며 얼른 흘려보내곤 했다. 그런 다음 목구멍을 따끔따끔하게 만드는 가래를 그러모아 뱉고 생각했었다. 초당 14센티미터씩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가 멈춘다면 정말로 세상도 멈춰지는 것일까, 하고.
실제로 딱 한 번 멈췄던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던지지 말 것 고가의 스탠드가 들어 있습니다, 라고 쓰여 있는 상자를 옮기는 중이었고 선배는 이어폰을 낀 채 작은 상자를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선배의 셔츠 주머니에 들어 있던 라이터는 금방이라도 슉 빠질 만큼 주머니 안을 들락거리고 있었는데 그러다 선배가 커다란 상자를 앞에 두고 상체를 숙였을 때 컨베이어 벨트 아래로 라이터가 떨어졌다. 플라스틱 조각이 거대한 압력에 눌려 바스러지는 소리, 베어링 어느 부분이 뻑뻑하게 끌리는 소리가 들렸고 컨베이어 벨트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다 곧 멈춰 섰다. 당황한 선배는 이어폰을 집어 던지고는 어떻게, 어떻게 소리만 반복했다. 나는 놀라고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실은 라이터가 떨어질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이 씨, 이거 어뜩하냐.
작업반장이 달려오는 사이 사람들은 일단 스위치부터 끄라고 운전 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난 당황하는 척 선배를 바라보다 벽 쪽으로 걸어가 멈춘 세상을 조용히 바라봤다.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진 박스들 그리고 소리를 지르는 반장의 일그러진 얼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어지러워 커다란 창이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이미 캄캄한 어둠으로 넘어가는 중이었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궁금했지만 두꺼운 유리로 막힌 탓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불고 있는지 사선으로 내리치는 빗물이 긴 꼬리를 물며 유리를 타고 흐를 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쌓여왔을 먼지도 함께 씻겨 나갔고 밤은 점점 더 선명해져졌다.
재가동 되려면 30분 이상은 걸리겠다는 운전 팀 사람들의 얘기가 들렸다. 쌍욕을 듣고 있는 선배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뒷주머니에 넣어둔 에너지 바를 꺼내 조용히 비닐포장을 뜯었다. 포장지를 구겨 넣은 다음 사람들이 정신없어 하는 사이 한 입 물었다. 다섯 가지 곡물을 초콜릿으로 감싼 과자는 달콤했다. 불룩해진 뺨을 손으로 밀어 넣으며 침과 범벅이 된 내용물을 목구멍 깊숙이 넘겼다. 에너지 바를 씹는 동안 컨베이어 벨트는 멈춰 있었고 창을 때리는 빗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렇게 세상은 잠시 멈춰있었다.
집에 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가운데 소파에 누워 잠을 기다리고 있으면 한없는 고요함이 비틀어진 척추 위에 내려앉았다. 그럴 때는 시간이 멈춘 기분이 들었다. 잠에서 깨고 보면 시간은 여지없이 흘러 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멈춰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 토요일 특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다른 가족들은 새로 오픈한 고기 뷔페에 가고 없었다. 사거리 어디로 나오라는 문자를 무시하고는 바나나를 입에 물고 츄로스 가게에서 자주 들었던 보사노바를 플레이시켰다. 2시간이 넘는 동안 해의 기울기는 변해갔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일시 정지된 상태였다. 다만 언제나처럼 잠의 끝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내 어깨를 짚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는지 엄마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얘, 저녁 먹어. 세수도 하고. 얼른
푹! 묵직하게 소파가 눌리면서 덩달아 내 허리에도 불편함이 전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파가 받는 느낌이 조금씩 더 선명히 전달됐고 살짝 찢어진 소파의 틈새를 통해 약간의 시야도 확보할 수 있었다. 누가 앉은 걸까? 눌린 무게로 보아 엄마나 누나는 아닌 것 같았다. 경비아저씨 일까? 분리 배출을 나온 사람일지도 몰랐다. 틈새가 넓지는 않아 우선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얼마간 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응, 아니. 아직 안 버렸는데. 왜? 도로 가져가?
쉰이 넘어 보이는 탁한 목소리의 남자는 평소에 담배를 많이 피우는지 목소리 끝에 가래가 끓었다. 아내와 통화하는 모양이었다. 뭔가를 도로 갖고 오라는 소리로 들렸다. 남자는 스탠드만 도로 가져가겠노라고 대답을 한 뒤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럭저럭 괜찮게 보였는지 쿠션 상태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날 깔고 뭉개고 있는 그에게 점잖게 말하고 싶었다. 여보세요, 이 소파에는 사람이 들어 있습니다. 이래 보여도 여기에 많은 잡동사니가 들어있어요. 보통 소파가 아니라고요, 라고. 하지만 마음의 소리는 전달되지 않고 쿠션의 바람 빠진 소음만이 찢어진 가죽 틈으로 새어나갔다. 남자는 기대했던 것보다 별로라고 생각했는지 허리를 소파 등받이에 세게 밀면서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슬리퍼를 신은 발로 소파 밑동을 걷어찼다.
거죽만 그렇지 완전 쓰레기네.
찢어진 틈새로 남자를 올려보자 눈이 부셨다. 옅은 먹구름이 낀 사이로 늦여름의 해가 이글거렸다. 남자는 내 찡그린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지 가져 온 종이박스를 평평하게 펴기 위해 손톱으로 테이프를 뜯었다. 그러나 퉁퉁한 남자의 손은 서툴렀다. 한 번에 뜯질 못하고 쓸데없이 동작만 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알바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이 생각났다. 일 시작하고 맞이한 첫 주말 천육백 개의 택배를 정신없이 분류하고 나자 돈이고 뭐고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었다. 그때 내 마음은 태평양의 드넓은 바다 위를 달려 칠레의 땅 끝 마을로 도망치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하고 많은 나라 중에 칠레를 떠올렸을까?
언젠가 푼타아레나스 행 해외 택배가 국내 배송 팀으로 잘못 온 적이 있었다. 영문으로 갈겨 쓴 주소도 낯설었고 무엇보다 긴 이름의 도시를 읽어내기 어려워 난감해하고 있는데 반장이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또 오류 났네. 아니 이거 바코드 리더기에 문제 있나, 그러나 저러나 자네 이거 못 읽어? 여기 푼타아레나스라고 쓰여 있잖아. 몰라? 칠레 항구도시 푼타아레나스. 아 대학원까지 나온 사람이 그것도 몰라?
그래요? 저는 처음 들어봐서.
그려? 나처럼 삼십년 넘게 우편 택배 탁송 이런 업계에만 있어봐. 상투메 프린시페 기니비사우 거 뭐냐 산토도밍고. 세상천지 모르는 데가 없어.
왠지 창피하기도 하고 발음에서 느껴지는 신비한 운율 그리고 이런 곳에도 택배가 가는구나, 싶은 마음에 푼타아레나스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다. 인터넷에 올라온 정보는 별다를 게 없었다. 도시의 인구와 규모 그리고 기후 정도, 그저 그런 도시란 생각을 하던 중에 ‘푼타아레나스의 사람들’ 이란 오래 된 다큐멘터리가 눈에 띄었다. 뭔가 특별한 게 있나 싶어 플레이를 시키자 한 남자가 나왔다. 남자는 허름한 목조 주택 거실에 놓인 낡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커피 잔을 들고 있었는데 김이 올라오는 동안 고개를 기울여 더운 기운이 뺨에 닿게 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뺨에 있는 흉터에 촉촉이 물기가 맺혔고 남자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나서 한 모금 마셨다. 커피를 마신 다음에는 자신을 뱃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러고는 자기가 있는 이곳은 태평양과 대서양 남극해가 만나는 원양어업 기지의 최전선 푼타아레나스라고 말했다. 남자의 굵은 목주름과 뺨의 흉터가 클로즈업되는 동안 성우가 말을 이었다. 푼타아레나스는 칠레 남단 마젤란 해협에 접해 있는 도시로 푸에고 섬의 우수아이아를 제외하면 세계 최남단의 도시로써 지명은 '모래밭의 곶'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파나마 운하가 개통하기 전까지는 태평양과 대서양 남극해 간의 연락 항으로 큰 역할을 했는데 90년대 이후로는 쇠락하고 있다고. 그때 난 남자가 앉아 있는 낡은 소파를 보며 성우의 말을 잊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되뇄다. 왠지 그곳이 어디인지 꼭 기억해야 할 것만 같았다.
소파에 편히 기댄 남자의 표정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눈은 파도처럼 출렁이는 듯 보이면서도 깊은 곳에 닻을 내린 느낌을 주었다. 자외선을 많이 받은 탓인지 탁해 보이는 눈동자는 오랫동안 창밖을 응시했고 조금 있자 주방에 있던 래브라도 한 마리가 곁으로 다가 와 바닥에 앉았다. 개는 킁킁 대며 고개를 휘저었고 남자가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자 말갛고 빨간 혓바닥을 내밀고 침을 흘렸다. 한참을 침묵하던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 남기로 결심을 했죠.
대다수 선원들은 칠레여자와 짧은 연애를 한 후에 몇 푼 쥐어주고 떠나는 게 다반사였지만 자신은 남기로 했다고. 더러 임신한 여자 까지 버리는 경우가 있을 만큼 선원들은 이곳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노라고 말했다. 그와 달리 자신은 푼타아레나스에 머물 결심을 했을 뿐이라고. PD가 왜냐고 묻자 담배를 꺼내 든 남자가 불을 붙이며 대답 했다. 거실에 앉아 창밖을 보면 남태평양과 대서양 그리고 남극해의 물결이 한 데 모여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바다는 날마다 새롭고 여기에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노라고 말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되고 싶지도 될 필요도 없다고 말하며 순한 미소를 지었다. 화면은 남자의 얼굴을 비추다 이내 창밖 풍경을 보여줬는데 항구가 멀지 않은지 여기저기에 어선이 정박해 있는 풍경과 하역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곁불을 쬐고 있는 모습을 담아냈다. 그렇게 앵글은 쇠락한 항구의 구석구석을 훑다 거대한 크레인 위로 초점을 옮겼는데 그곳에 재갈매기가 앉아 있었다. 가만히 있던 갈매기는 갑자기 몇 걸음 나오더니 머리를 까닥거리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틀림없이 따로 찍은 뒤 편집한 것이었을 테지만 마치 네가 앉은 그 낡은 소파는 아주 먼 바다를 건너왔구나, 라고 말을 하는 듯했다.
남자는 푹신한 소파에 등을 파묻고 편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 뒤로도 거실을 거닐며 이런 저런 얘길 덧붙였다. 푼타아레나스에 닿기 전에 수마트라의 어느 항구에 오랫동안 머문 적도 있었고 베링 해의 거친 파도를 건너본 적도 있다는 얘기들. 남극해 주변을 항해할 때엔 흰수염고래를 만난 적도 있다는 그런 따위의 얘기들 말이다. 허풍 섞인 얘기와 그의 꼬부라진 콧수염이 재밌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가 앉은 소파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 다음 내용은 기억이 흐릿하다. 무책임한 선원들을 나무라는 말도 있었던 것 같고 산업의 최전선 기지에서 고생하는 역군들을 응원하는 내용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남자의 눈빛과 소파가 기억에 남을 뿐이었다. 남자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다 살짝 웃고는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그의 옆모습이 엔딩장면으로 잡혔다. 꽤 아팠을 법한 상처는, 시간이 멈춘 소파 위에 누울 수 있다면 그런 것쯤은 괜찮다는 듯 옆모습에 드러난 바늘 자국은, 흉측했을 처음과는 달리 제법 아물어 있었다.
종이박스를 정리하고 분리수거를 모두 마친 남자는 뭔가 아쉬웠는지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털썩 앉았다 일어섰다. 그 바람에 소파가 출렁였고 그 출렁임은 파도를 닮아 있었다. 이대로 대양의 끝 푼타아레나스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낡은 소파에 앉아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이 끝도 없이 부풀어 올랐다.
제법 오래 갇혀 있었던 탓에 허리가 결렸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새벽 1시 특근 교대 전까지는 쉬고 싶었다. 다시 잠들기 위해 송충이처럼 몸을 말고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선잠이 들었을 때 작고 여린 손길이 느껴졌다. 간지럽고 그러면서도 자극적인 뭔가가 종아리 부근에 들러붙는 것 같았다. 이번엔 또 뭘까.
지은아 이거 봐, 잘 됐지?
응, 완전 똑같은데.
초등학교 1학년 쯤 됐을까 싶은 여자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찢긴 틈으로 하얀색 타이즈에 분홍 원피스를 입은 아이와 태권도 도복을 입은 여자애가 서 있는 게 비스듬히 보였다. 그 중 분홍 원피스를 입은 여자 애가 소파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엿듣고 있자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여자애 중 한 명이 캐릭터 스티커를 소파 한 쪽에 대고 손톱으로 문질렀던 모양이다. 분홍 원피스의 여자애가 더 자세히 보려고 상체를 수그리자 아이의 목에 걸려있는 펜던트가 소파에 닿았다. 난 아이들의 장난을 지켜보며 세윤이를 떠올렸다.
여섯 살 세윤이도 한 때는 자주 그랬다. 특히 사람 몸에 대고 스티커 붙이기를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한 건 삼촌의 몸이었다. 알이 통통하게 오른 종아리에 대고 그러길 좋아해서 자고 일어나면 도라에몽에 나오는 도라미나 타요에 나오는 캐릭터가 내 몸에 새겨져 있었다. 잠에서 깬 내가 스티커를 지우려고 들면 세윤이는 지우지 말라며 목에 매달리고는 했다. 그러면 스티커를 지우지도 못하고 출근을 했는데 다음 날 퇴근을 하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스티커를 확인했고 많이 지워져 있으면 내가 소파에 누워 있는 틈에 또 다른 스티커를 새겨 놓고는 했다. 난 평소 놀아주지 못해 미안했던 탓에 꼼짝 않고 세윤이를 기다려 주었다. 캐릭터가 부서지지 않고 온전히 새겨질 때까지 말이다. 그러면 세윤이는 감은 내 눈에 자기 손을 흔들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세윤이가 붙여 준 스티커 중에 가장 마음에 든 건 고래 캐릭터였다. 인어공주에서 나왔는지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건지는 몰라도 커다란 고래가 수면 위로 반쯤 몸을 드러내고 물을 뿜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일을 하다 보면 스티커의 고래와 눈이 마주쳤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흰수염고래가 생각났고 흰수염고래를 떠올리면 푼타아레나스가 궁금해졌다. 낡은 소파가 있는, 시간이 멈춰 있는 그곳이.
은지야 근데 여기다 붙여도 돼?
될 걸? 이거 버린 거잖아.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는 하나 더 붙이겠다며 가방에 손을 넣고 뒤적거렸다. 성가셨지만 세윤이를 생각해 조금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한동안 꽤 즐겼던 세윤이는 얼마 전부터 싫증이 났는지 스티커 놀이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어쩌다 붙이더라도 냉장고에 한두 개 붙이는 정도였다. 일부러 자는 척을 해도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고 가끔 곁에 오더라도 스티커를 꺼내는 대신 삼촌은 집이 어디야? 라고 물으며 발그레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삼촌 나가면 세윤이 방으로 꾸며주겠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야, 어떡해. 비 온다.
도복을 입은 여자애가 가방을 집어 들고 놀이터 쪽으로 뛰어가며 말했다. 그러자 스티커를 반밖에 붙이지 못한 여자 애가 허둥대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들이 뛰어가는 사이 빗방울이 낡은 소파 위로 떨어졌다. 둔탁하게 떨어지는 빗방울은 뿌옇게 앉은 먼지를 털어내며 제법 리듬이 느껴지는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노를 젓는 어부가 앞발을 까딱이는 것처럼 정겨웠다.
툭, 투투둑, 툭 툭.
비는 늦여름의 소나기답지 않게 그칠 듯 하면서도 한동안 더 내렸는데 찢어진 틈새를 타고 소파 안으로도 흘렀다. 약간의 오한이 느껴져 축축이 젖은 몸을 부둥켜안았다. 비가 반갑지 않은 건 고양이도 마찬가지인지 소파 팔걸이 밑에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웅크리고 앉았다. 녀석은 물이 튀긴 수염을 발바닥으로 몇 번 털어내다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렸다. 고양이가 돌아 본 쪽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찢긴 틈 사이로 싸구려 천으로 만든 바지와 낡은 운동화가 보이는 걸로 봐서 경비 아저씨인 듯 했다. 그는 종이 박스가 담긴 커다란 마대자루를 얼른 처마가 있는 곳으로 끌었다. 그러고는 어지럽게 널린 유모차와 장난감 트럭을 한 데 모으고 내 앞으로 왔다. 빗방울이 모자를 타고 내려 그의 얼굴을 적셨다. 피곤한 듯 보였다. 새벽에도 본 것 같은데 그 역시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 씨, 누구야. 어떤 인간이 또 딱지도 안 붙이고 이렇게 놨어. 잡히기만 해봐라 그냥. CCTV 확인해야겠구만.
그때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소파가 버려진 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경비 아저씨는 씩씩거리며 관리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엄마가 버린 걸까? 언젠가 엄마도 소파가 예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가게를 오픈 하던 날 내가 만들어준 츄로스를 들고 그 위에 앉아 차를 마셨다. 위가 좋지 못한 엄마는 커피 대신 마테차를 끓여 달라 했고 내가 끓여준 차를 받아들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물었다.
참 푹신하고 좋다. 어디서 샀어?
이태원 앤티크 거리서 여섯 시간 발품 팔아서 구했지. 그 주인이 그러는데 3년 동안 안 팔리던 걸 내가 산거래 하하하.
아유, 뭘 그런 얘기를 한 대. 재수 없게. 어쨌든 진짜 특이하다. 이 소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곰곰이 어제 일을 떠올렸다. 어제 오후 출근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파는 원래 있던 자리에 있었다. 매형은 퇴근이 전이었고 엄마와 누나는 세윤이 때문에 피자를 시켜먹고 있었다. 한 조각 먹어보라는 누나에게 조금만 더 자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뒤에 누나가 식탁 어쩌고 하는 말을 잠결에 들었던 것도 같은데 별일 아닌 것 같아 흘려들었다. 어쩌면 소파를 버려도 괜찮냐고 물었던 것일까?
비가 그치고 얼마 후면 해가 질 것이고 다시 출근을 해야 할 것이다.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얼른 소파에서 나가 출근 준비를 해야 할까 아니면 조금 더 잠을 자야할까? 오한에 머리까지 지끈거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리모컨의 존재가 미칠 듯이 간절해졌다. 내가 만일 신이라면 그런 리모컨을 어디에 숨겨놓을까?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세 개의 대양이 맞물려 흐르는 곳, 아무것도 아닌 남자가 살고 있는 푼타아레나스밖에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다는 잔잔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남자가 푹신하게 허리를 묻을 수 있는 소파 그 안에 말이다.
가로등이 켜지고 뜸했던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 중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엄마와 누나일까? 세윤이가 삼촌 소파 버리지 말라고 성화를 부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빨래를 널기에 낡은 소파보다 더 좋은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일지도.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야, 이거 횡재했네.
아주 좋아 죽네. 좋아 죽어. 그렇게 좋아?
아 좋지 그럼.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일해 먹지.
한 사람은 조금 전에 다녀간 경비 아저씨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맡은 편 3개 동을 담당하고 있는 경비아저씨였다. 두 사람은 다행히 관리소 구조조정의 여파에서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아 이럴 줄 알고 폐기물 스티커 하나 구해 놨지 이 사람아. 수소문해서 인터폰으로 연락하니까 그 여자가 그러더라고 자기가 깜빡했다고. 식탁 배달해준 사람들이 낡은 소파를 대신 버려 주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말만 하고는 깜빡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자기가 돈 갖다 줄 테니까 우선 나보고 붙여주면 안 되냐고 하잖아. 요놈은 지난 주 목요일에 누가 붙여 놓은 거 내가 살짝 뜯어 놓은 거고.
아저씨 말에 따르면 그랬다. 어떤 멍청한 사람이 재활용 되는 줄도 모르고 엄한 물건에 폐기물 딱지를 사서 붙여놨더라고. 그래서 자기가 살살 떼어 보관하는 중이었다고.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서 자신의 행동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공으로 생긴 4천 원이 어지간히 좋았는지 소파 등받이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빗물에 젖은 부분을 손바닥으로 털어낸 다음 마른 수건으로 한 번 더 닦았다.
가만 있자, 요놈을 어디에다 붙이냐.
그는 이리저리 재다 좀 전의 여자애가 붙이다 만 자리 미완성으로 남은 스티커 자국 위에 폐기물 딱지를 붙였다. 얼마나 꼼꼼히 붙이는지 동그란 딱지 군데군데를 손톱으로 문질러가며 습기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런 다음에도 수건으로 한 번 더 눌러 마무리를 했다.
경비 아저씨가 떠나고 초저녁 땅거미가 소파를 덮어들었다.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몸을 웅크리는 사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윤이였다. 목소리가 밝은 걸 보니 누나와 간단한 장을 보고 간식도 사먹을 모양인 것 같았다. 나올 때 재활용 상자에 가득 찬 맥주 캔을 들고 나왔다면 근처를 지나칠 테고 어쩌면 소파를 발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날 알아볼 수 있을까? 귀찮아 곧장 아파트 입구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얼굴을 내밀고 이 소파 정말 버린 거야? 라고 물어야 하겠지만 그저 엉뚱한 상상만 들 뿐이었다. 어쩌면 경비아저씨가 붙여 준 스티커는 폐기물용이 아니라 해외 배송을 뜻하는 특별 우표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해외 배송 택배가 우리 쪽으로 넘어올 때면 택배 상자를 유심히 보고는 했는데 언제나 동그란 모양의 도장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다. 물결 모양의 도장이 새겨진 택배를 보면서 생각보다 많은 물건이 바다를 건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했다.
난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푼타아레나스로 향하는 바다 위의 소파를 떠올렸다. 소파는 한참을 떠돌다 태풍을 만날지도 모를 것이다.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 남반구의 끝에 닿자면 말이다. 하지만 조금 고돼도 상관없을지 모르겠다. 피곤한 몸을 소파 안쪽에 바싹 붙이며 잠꼬대처럼 말했다.
이 소파는 푼타아레나스행 택배로 분류되었습니다.
(원고지200*74)
첫댓글 두 작품 다 훌륭합니다. 암을 중심으로 구도적 경지까지 넘나드는가 하면, 한 때는 태평양 대서양 남극의 해류가 만나는 바다가 멀리 보이는 곳에 멋지게 존재했던 쇼파가 되어 읊조리는 언어들이 경이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