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 순례성지 - 김포 옛 석조 성당, 국내 유일의 성체 순례 성지로 지정되다 |
경기도 김포시 북변동 259-1
경기도 김포시 북변로 29-12
김포 성당의 연혁
인천교구 김포 성당은 신앙 선조들의 숨결이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는 곳이다. 1946년 11월 서울대교구 행주 본당(현 의정부교구)에서 분리되어 매괴(로사리오)의 성모를 주보로 설립된 김포 성당은 현 인천교구에서는 답동 주교좌성당과 소사 성당에 이어 세 번째 설립된 성당이다. 김포 지역의 전교는 1900년경 약현 본당(현 중림동 약현성당) 전교회장 유공현(劉公鉉)에 의해 시작되었다. 1910년 김포읍 걸포리 34번지에 행주 본당 걸포리 공소가 설립되었고, 공소의 발전과 신자 수 증가로 1946년 11월 22일 걸포리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병호 베네딕토 신부는 장차 발전이 기대되는 김포읍에 새 성당 부지를 마련하고, 1949년 성당 이름을 김포 성당으로 개칭한 후 1950년 초 사제관을 김포읍으로 이전하면서 본격적인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6.25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1952년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피득 베드로 신부는 현재의 본당이 위치한 북변리에 아담한 목조 성당을 건립하고,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2,700여 평의 대지를 추가 매입한 후 김포읍을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피득 신부는 건강 악화로 인해 1954년 11월 선종하였다.
1955년 5월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한 신인식 루카 신부와 신자들은 힘을 합하여 새롭게 성당 터를 닦기 시작하여 마침내 석조 성당(99평)을 준공하고 1956년 12월 17일 노기남 바오로(1902-1984년) 대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했다. 당시 마송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의 장비 지원을 받기도 했으나 지금처럼 건설 장비가 충분한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대부분의 성당 공사를 직접 손으로 해야 했다.
1961년 6월 6일 인천대목구의 설립으로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이곳의 사목을 담당하게 되어 제4대 주임으로 메리놀 전교회 브랜스필드(Michael Bransfield)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후 메리놀회 신부들은 본당 내에 장애 소녀들을 위한 편물 학원을 개설하여 자립 의지를 심어 주었으며, 활발한 전교로 1965년 8월 5일 통진 본당을 분리하고, 9월 23일에는 김포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였다. 이듬해에는 주보를 발행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을 개설하였다. 이어 1968년 유아 교육을 위해 매괴 유치원을 개원하였고(1985년 폐원), 김포시 풍부동에 4,300평의 교회 묘지를 마련하였으며, 1971년 11월에는 김포 가톨릭 농민회를 조직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본당 공동체의 내실화와 활성화를 위해 1995년 교육관을 건립하고, 활발한 전교 활동으로 신자 수가 증가하자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사업으로 기존의 석조 성당 아래에 붉은 벽돌조로 마감한 웅장한새 성당을 건립을 시작하여 하여 1999년 11월 18일 교구장 나 굴리엘모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성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의 새 성당과 오른쪽 언덕 위의 옛 석조 성당이 함께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새 성당을 지으면서 옛 석조 성당에 있던 종을 그대로 새 성당 종탑에 옮겨와 옛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도 김포 성당만이 지닌 특별한 매력이다. 예수 부활 대축일 전야미사 때와 새로운 한 해를 맞는 12월 31일 자정에는 신자들이 직접 종을 울린다. 새 성당 건립 후 주일학교 교리실 등으로 사용하던 옛 석조 성당은 본당 설립 60주년을 기념해 2005년 10월부터 대수선 공사를 시작해 피정 공간으로 꾸미고, 옛 수녀원 자리에 교육관을 신축하여 이듬해 5월 10일 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집전으로 교육관 및 옛 성당(강당) 축복식을 가졌다. 또한 야외동산에 십자가의 길도 새로 조성하였다.
오늘날 총 1만여 평에 달하는 성당 대지는 넓은 야외 십자가의 길과 야외미사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특히 조경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봄 · 가을이면 도심 속 공원처럼 꽃들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성당으로 탈바꿈,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문화재청은 2013년 4월 18일 옛 석조 성당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42호로 지정하였다. 옛 석조 성당이 김포 · 강화 지역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건축된 석조 성당의 전형적 의장 특징(종탑과 뾰족한 아치 창호)과 화강석을 쌓아 올리는 건축 방식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어, 1950년대 석조 성당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그 건축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결과였다.
성체 성지로 거듭 태어나다 (구 석조 성당)
2015년 11월 1일 김포 성당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인천교구는 ‘성체 성지 선포에 즈음하여’라는 교구장 사목 서한을 발표해 옛 석조 성당을 한국교회 최초로 ‘성체 순례성지’로 선포했다.
성체 성지는 지속적인 성체조배를 통해 그리스도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장소로, 교구 성지는 교구장의 권한으로 설정할 수 있다. 성체 신심과 관련해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07년 교황 권고 「사랑의 성사」를 통해 지속적인 성체조배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 바 있다. 이를 장려하기 위해 교황청 성직자성은 같은 해 전 세계 주교들에게 교구 안에 성체 성지를 마련할 수 있고, 담당 사제를 임명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인천교구는 김포 성당 옛 석조 성당을 성체 성지로 선포하고 미사와 교육을 담당할 전담 사제를 발령한 것이다.(굿 뉴스 한국의 성지 참조)
성지에 도착하니 이미 6시가 훨씬 넘었다. 다행히 성당을 잠그지 않아 순례할 수 있었다. 평지에 김포 성당(새 성당)이 있고 언덕 위에는 석조 성당(구 성당)이 있는데 성체 성지는 석조성당이다. 지난 여름 양근 성지에 5시에 도착했으나 사무실에서 성당 문을 잠그고 퇴근하는 바람에 통화만 하고 가서도 순례하지 못하고 돌아온 아쉬운 기억이 있는데 이 성당은 퍽 늦은 시간인데도 교우들을 성당에서 만날 수 있다.
구 석조 성당(성체 성지)
1956년 이 석조 성당을 지을 당시 건축비가 부족한 현실에서 본당 주임 신인식 신부와 신자들은 전폭적으로 노력봉사에 참여하였다. 남성 신자들은 계양산 중턱에 올라 직접 큰 돌을 나르고, 여성 신자들은 곡괭이로 땅을 일구거나 근처 개울가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날랐다.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야 하는 일인 데다 신자 대부분이 농민이어서 농사일을 끝낸 저녁때가 되어야 모두 모여 일을 시작한 탓에 새벽을 넘길 때가 많았다. 신자들은 한창 바쁜 농번기에도 자기 생계보다 성당 짓는 일을 항상 먼저 생각하였다.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만든 뒤 석조로 지었는데 석조 성당의 외형은 종탑과 뾰족한 아치형의 창문 등 전형적인 성당 건축의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정면 중앙 포치(porch, 건물 출입구 위에 설치해 비바람을 막는 곳) 상부에는 종탑이 있으며, 외부에 잘 다듬어진 석조를 축조하였다. 입구부에는 둥근 아치를, 그 위의 벽체 창호에는 뾰족한 첨두 아치를 사용하였다. 좌측과 우측에 각각 부출입구가 있어 전체적인 평면도는 라틴 십자가형(세로의 아랫부분이 긴 십자가)이다. 제대 뒤쪽으로 2곳의 부출입구가 있으며, 지면과 이어지는 외부 화강석 계단은 현대에 들어 설치한 것으로 추정한다.
누가 성당을 설계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시공은 한국인 건축업자가 하였는데 그의 세례명 세례명은 가밀로였다는 것만 전하고 있다. 폭 16 m 길이 31 m로 건축 면적 99평이며 높이는 지붕까지 11 m, 첨탑은 20 m이다.
성당 내부에 들어가니 성전 입구에 성모님상과 2015년 성체 순례성지 선포 교구장 담화문이 게시되어 있다. 담화문 내용은 성체 순례지의 지정 목적을 주로 말한 것이지만 이 중에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성체는 날마다 짓는 죄로부터 우리를 구해주고 죽을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해독제”라는 말이다. 독극물을 먹었을 해독제가 필요하듯이 죄가 일상화 되었을 때 성체를 통해 해독하지 않고는 사망에 이른다. 우리가 가급적 미사 참례를 많이 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부 공간은 평면형의 단일 홀로 구성하였으며 열주가 없는 강당형이다. 2005년 10월 11일에서 2006년 1월 5일 사이에 지붕과 내부를 수리하면서 바닥에 깔린 목재 마루를 철거하고 대신 인조 마루판을 깔았다. 외벽 창문에 있는 알루미늄 샷시 역시 현대에 들어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는 외부와 달리 최근에 보수공사를 마무리해 산뜻한 분위기다. 그런데도 높은 천장으로 인해 엄숙한 분위기가 실내에 감돈다.
목제 장의 의자 수십 개가 4줄로 배치되어 있다. 제대 뒤편에는 감실을 중심으로 12제자상이 있고 벽면 좌우에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조각상이 높이 달렸고, 중앙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개를 떨구고 계신다. 딱히 조명을 하지 않더라도 좌우 측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이 은은하게 성당 안을 비춘다. 영성심리 강좌 캠페인 현수막이 중앙에 크게 드리워져 있다.
벽면에는 성체 성지의 특성을 보여주는 란치아노 성체 기적도가 6장으로 게시되어 있다. 란치아노는 산 지오반니 로톤도와 로레토 중간에 위치한 이탈리아 아드리아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작은 중세풍의 마을이다. 란치아노에 대한 모든 것은 성체성사의 기적을 암시한다.
란치아노 성체 기적도
란치아노 성체 기적을 조금 세부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8세기 경 어느 날 아침, 이탈리아 성 바실리오 수도회 소속의 한 수사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던 중, '예수가 성찬 전례 중에 실제로 현존하심'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 수사 신부가 막 빵과 포도주의 '실체변화를 위한 축성'을 끝낸 순간, 그는 갑자기 성체로 쓰인 제병이 인간의 살로 변하고, 성혈로 쓰인 포도주는 인간의 피 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너무나 놀란 수사 신부는 이 사실을 숨길 수 없어서 미사에 참례한 이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곧 뛰쳐나가서 이 소식을 란치아노 시 전체와 인근 지방들에 알렸다.
1574년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서 관할 주교들에 의한 인정이 있었으나, 1971년에 해부학 병리 조직학, 화학 및 임상 현미경학 교수이며 아레초(Arezzo) 병원의 수석 의사였던 오도아르도 리놀리(Odoardo Linoli)가 아시시의 프란치소코 성당을 맡고 있던 프란치스코 수사 신부들의 요청에 따라 기적의 성체와 성혈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조사를 시행하였다. 1971년 3월 4일 성체 기적이 일어났던 그 성당에 수많은 학자들이 모였으며, 그곳에서 리놀리 교수는 그의 분석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의 구두 설명과 더불어 수많은 사진들과 문서들이 제시되었다. 그의 발표 내용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1.성체 기적의 피는 참된 피이며 살은 참된 살이다.
2.그 살은 심장 근육이다.
3.그 살과 피는 인간의 살과 피이다.
4.피와 살의 혈액형은 AB형으로 동일하다.
5.피 안에는 정상적인 피에서와 같은 정상적인 비율의 단백질들이 발견되었다.
6.피에서는 또한 염화물, 인,마그네슘, 칼륨 등의 무기물들이 발견되었다.
교수는 다음의 설명을 덧붙였다.
△이 살이 인간의 심장으로부터 해부적으로 잘라 온 것일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 살과 피를 보존하기 위하여 화학적인 방부조처를 취한 흔적은 없다.
△그러므로, 그 살과 피 안의 단백질과 무기물들이 대기와 미생물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부패되지 않고 보존된 것은 절대적으로 예외적인 현상이다.
새 성당 (김포성당)
지하 1층 지상 3층 철근 콘크리트 구조인 새 성당 내부는 완만한 굴곡으로 천장은 세련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준다. 단순한 구조이면서도 형형색색의 색감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당 뒤쪽에 앉아 양쪽 벽 창문으로 내리비치는 햇살 속에 제대 뒷벽에 걸린 십자가와 그 아래 감실을 바라보노라면 양쪽 벽 창문으로 내리비치는 햇살이 마치 하느님의 따스한 손길처럼 와 닿는다.
구 성당 밖 솔숲은 십자가의 길로 이어졌다. 이 길은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뒤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 이르러 죽임당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보여주며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게 한다. 그래서 이 길을 ‘고난의 길’이라 부르기도 한다.
소나무 숲에 조붓하게 난 오솔길은 구 김포성당과 새 본당을 둘러싸듯 흘러간다.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사람의 기도를 들었을 소나무들이 간절함을 아는 듯 하늘로 향해 쭉쭉 뻗었다. 그 가운데 몇몇은 신자들의 기도 소리를 듣는 듯 가지를 늘어뜨려 하늘의 위로를 전하는 것 같다.
7시가 지난 시간. 인천 시내로 가서 썸모텔이라는 곳에 숙소를 정했다. 어제 유성여더블베드 객실 구조는 비슷했으나 넓어서 화장실 갈 때 문옆에 자는 사람을 깨우지 않아도 된다. 이렇듯 불편을 겪어봐야 안락함을 알 수 있다. 저녁식사는 함경 면옥.오늘 많이 다닌 덕분에 내일 일정은 편할 것이다.
2024. 05. 06(월)
오늘은 월요일이지만 어제 어린이날이 일요일이서 오늘이 대체공휴일이라고 이름하는 임시공휴일이다. 오늘 일정은 인천지역 성지인 이승훈 베드로 묘, 성모 순례지, 답동주교좌 성당, 제물진두 순교성지, 이렇게 4곳이며 오후 KTX 하행 예매 시간이 저녁 6시 53분이므로 전철로 갔다오는 성지 하나를 더 갈 수가 있다. 그래서 양근 성지나 남한산성 성지 중 하나를 골라 가기로 했다.
그래서 6시에 일어나 지하철역으로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 이승훈 묘 가까운 역에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성지 이승훈 베드로 묘로 갔다. 성지 주소는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산 132-1(남동구 정수사업소 뒷산)
이승훈 베드로 묘 - 이 땅에 첫 복음의 씨를 뿌린 선구자, 여기 잠들다 |
이승훈, 그는 누구인가?
이승훈(李承薰)은 1756년 한양의 반석방(盤石坊, 현 중림동 지역)에서 당시 대문장가 이동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창,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天). 12세 때 모친을 여의었지만 학업에 정진하면서 진사시에 합격해 선비의 길을 걷고 있던 중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처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과거의 길을 포기한 그는 1779년 열린 천진암 강학회를 통해서 이벽(세례자 요한)이 ‘천학(天學)’이라고 부르던 천주교의 교리를 접했다. 하지만 아직 교회서적을 많이 접하거나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해서는 아직 깊게 알고 있지는 못했다.
이승훈이 천주교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783년 부친의 수행을 위해 동지사로 파견되면서부터다. 동지사는 청나라 북경에 파견되는 정기 사절단이었다. 이벽은 이승훈을 찾아가 “이번에 북경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회”라면서 “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는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고, 이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교리를 전하고 이 교리를 더 자세히 알아와 주길 부탁했다. 이벽의 말을 들은 이승훈은 중국을 향했다.
중국에 간 이승훈은 이벽이 부탁한 대로 1784년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성물과 교리서를 가지고 귀국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원년이었다.
그는 가지고 온 교리서적, 십자고상, 상본을 이벽에게 전하고 서례자인 자신은 이벽,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 巽庵)·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형제, 권일신(權日身, 1753~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가성직 제도에 따라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崔昌顯, 1759~1801, 요한), 최인길(崔仁吉, 1765~1795, 마티아)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이벽과 동료들은 서울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토마스)의 집에 모여 주일을 지키고 교리를 전했다. 그러나 1785년 3월 이 모임이 관헌에 발각돼 해산되고 말았다. 이것이 을사추조적발 사건이다. 양반이었던 이승훈은 별다른 형벌 없이 귀가했지만, 이로 인해 문중과 유림의 핍박을 받게 됐다. 이승훈의 부친은 문중 대표들과 가족이 보는 앞에서 모든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천주교를 버릴 것을 명했다. 이승훈은 하는 수 없이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일시적으로 교회를 떠났다. 하지만 이듬해인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하며 1년간 신부로 활동하며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 등 성사를 집전했고, 1787년 겨울에는 정약용, 강이원(姜履元) 등과 함께 반촌(泮村, 현재의 혜화동)에서 교리를 연구하였다.
1790년 음서(蔭敍)로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6월에는 평택현감이 되었다. 때마침 1790년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의 명을 전하자, 보유론적(補儒論的)인 이해에서 출발한 그의 신앙은 유교적 예속과 천주교회법의 상치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어 고민에 빠졌다.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 · 권상연(權尙然)의 폐제분주(廢祭焚主)로 인한 진산사건이 일어나 이벽은 이전에 서양 서적을 구입해 온 사실과 1790년 평택 현감 재직시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 1787년 정약용 등과 반촌에서 서학서를 공부했던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 문제가 되어 권일신(權日身)과 함께 체포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교회를 떠났다.
그 후 다시 교회로 돌아온 그는 성직자 영입 운동을 펼쳐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입국시켰으나, 1795년 이 사실이 발각되어 충청남도 예산으로 유배되었다.
선교사를 입국시킨 기쁨도 잠시 1801년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교회의 지도자였던 이승훈 역시 체포돼 매일 같이 고문을 당했다. 박해자들은 교회지도자 중 배교 선언을 한 이들은 처형하지 않고 귀양을 보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배교의 말을 했다고 허위기록을 한 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즉시 처형했다. 이승훈의 경우도 배교 선언을 했다고 기록돼있지만 처형됐다. 이승훈이 신자들뿐 아니라 선비들 사이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배교 소문이 천주교 세력을 억제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서소문에서 처형을 당하기 전 동생 이치훈은 이승훈에게 “천주학을 하지 않겠다고 한 말씀만 하시면 상감께서 살려주신다니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우선 목숨을 보전하고 봅시다”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그는 아래와 같은 한시 한 구절로 배교와 박해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며 1801년 4월 8일 45세의 나이로 참수 당했다.
‘月落在天 (월락재천)
水上池盡 (수상지진)’
달은 비록 서산에 떨어지더라도 하늘에 남아 있고
못물은 아무리 위로 솟구쳐도 못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어느 야당 총재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의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셋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주 며느리 정씨와 증손자 연구 ‧ 균구는 1871년 인천 제물진두에서 참수당하면서 인천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승훈은 한국교회 초창기 새로운 신앙의 길을 열어가는 데 공헌했으나 그에 맞갖은 평가와 조명을 받지 못했다. 배교문제 때문이었다. 물론 이승훈이 배교를 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실제 이승훈은 신자들뿐 아니라 선비들 사이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이승훈을 배교자로 허위 조작하고 바로 그를 처형했다는 설도 있다.
그라몽이 이승훈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준 것은 베드로처럼 굳건한 조선 교회의 반석이 되어라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듯, 그도 3번이나 배교하였지만 끝내 순교의 영광을 안을 것을 예상했을까? 다행히 현재 그는 이벽, 권철신, 권일신, 김범우, 이존창, 황사영, 홍봉주 등과 함께 133위 하느님의 종에 포함되어 시복 절차 중에 있다. 하루빨리 시복되기를 기다린다.
버스에 내려 인천 남동구 정수사업소 철망담을 끼고 10여분을 오르막길을 걸었다. 아카시아 꽃이 한창 피어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런데 얼마를 오르니 지난밤의 비바람에 마치 태풍을 맞은 듯 아카시아 나무 가지가 꺾여지고 꽃가지가 떨어져 있다. 평화로운 숲속에 느닷없는 비바람이 몰아쳐 오월의 축제를 즐기던 꽃들이 목이 떨어져 바닥을 채웠다. 박해시 순교의 광풍이 이와 달랐을까?
문득 양희은의 노래 한 소절이 떠오른다. 도대체 순교의 가해자들은 이 "아름다운 것들"을 어디로 데려갈려고 그리 어지러운 칼춤을 추었나?
꽃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방울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어디로 데려갈까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이들을 데려갈까
문득 안내 표지판이 나타나고 마지막 데크 다리를 건너니 묘역이 나타난다.
이승훈 베드로 묘는 산 중턱에 외따로 있었다. 그래도 위로라면 두 아들의 묘와 함께 있으니 조금은 위로가 된다. 묘비에는 韓國天主敎 先覺者 平昌李公 베드로 承薰之墓라고 전통비문식으로 새겨져 있다.
이승훈 베드로의 묘 바로 밑에는 왼쪽에 장남 택규(宅逵)의 묘가 있고, 오른쪽에는 순교자 삼남 신규(身逵, 마티아)의 묘가 있은데 각각 작은 묘비가 세워져 있다. 삼남 신규의 묘에는 오른쪽 묘비와 함께 왼쪽에 눕혀놓은 또 하나의 묘비가 있어 그의 행적을 알 수가 있다.
이에 의하면 그는 1793년 서울 반석방(지금의 중림동)에 태어나 1816년 외사촌 정하상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1939년 기해박해와 1946년 병오박해 때 체포당했으나 석방되어 제물포에 약국을 운영을 하던 중 1856년 대왕대비 김씨(순조비 순원왕후)의 중병을 치료한 공으로 참봉을 제수 받았다. 그는 부친의 죄명을 씻어달라는 청원을 올려 허락을 받았으나 대왕대비가 죽은 후 1866년 병인박해시 다시 체포되어 그해 윤4월 7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순교했다.
두 아들의 묘를 보면 장남은 세례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신앙을 가지지 않은 듯 보이며 삼남은 천주교를 믿어 배교와 신앙 사이를 오르내린 것 같으나 아버지 이승훈처럼 끝내 신앙인으로 돌아와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마치 달이 서산에 떨어져도 하늘 안에 있듯이....
반주골의 이승훈 베드로 묘는 2011년 12월 인천시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인천교구는 2014년 1월 이후 인천시와 협력하여 묘역 일대를 역사문화기념관과 순례길 등을 갖춘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 중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공사 현장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하루 빨리 역사문화공원과 시복이 마무리될 날을 기대하며 오늘의 첫 순례를 끝내고 버스를 타고 성모순례지로 향했다.
성모 순례지(성모당) - 파티마 성모님을 모시고 기도하는 순례지 |
인천시 동구 박문로 1 인천교구청 안에 있는 성모 순례지(성모당)는 성모님께 전구(轉求)를 청할 수 있는 공간을 원하는 교구민들의 간절한 소망에 응답하여 제2대 교구장이신 고(故)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에 의해 마련되었다.
현 교구장인 정신철 요한세례자 주교는 2017년 10월 13일 성모당 봉헌식 미사에서 “故 최기산 주교님이 2015년 12월 13일 성모당 조성에 대한 사목서한을 발표하고 2016년 5월 30일 갑자기 선종하시기 전까지 성모당 부지 선정과 설계 디자인 승인, 건축위원장 임명 등 성모당 조성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준비해 두셨기에 이렇게 파티마 성모님 발현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봉헌을 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인천교구는 성모당 봉헌식 이전 교구민들의 영적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 파티마 성모님의 첫 발현일인 5월 13일, 교구장 정신철 세례자 요한 주교의 주례로 답동 주교좌 성모당에 모셔질 파티마 성모상을 모시고 교구내 순회 미사를 시작하여 교구 신학교와 126개의 모든 본당을 순회했다.
교구청 내 시각적으로 가장 집중감 있는 곳에 위치한 성모당은 자연과 우주를 상징하는 돔(DOME)의 형태로 중앙의 최대 높이가 11.5m에 이르는 장중한 공간에 파티마 성지에서 제작된 높이 2.3m의 파티마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성모당은 지선형(支線形)으로 전면 돔이 평면하부와 만나는 부분은 비잔틴 양식을 따랐으며 성모당 후면은 원통형으로 마감하여 돔의 현상을 외부에서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하였다.
성모당 좌우 내부에는 신자석과 제의실, 상설 고해소 등을 마련하였으며, 성모당 외부 앞쪽은 잔디위에 석재 의자를 배치하여 야외 미사나 기도 시 착석할 수 있는 자리를 조성하였다. 성모당 주변으로 로사리오에서 이름을 딴 로사마당을 꾸며 개인 묵상 및 산책이 가능하도록 하여 신앙의 안식처로 위로와 평화를 전해주는 장소가 되도록 하였다.
특히 북녘과 맞닿은 인천 교구에 파티마 성모님을 모심으로써 성모님의 메시지처럼 세계 평화와 가정 성화, 또한 젊은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장소가 되며 소중한 신앙의 유산이 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 아침식사도 걸러 가며 일찍 일정을 시작했기에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이승훈 베드로 묘를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다녀와서 성모당에 도착하니 시간은 9시가 조금 지났다.
인천 교구청 건물이 주변을 압도할 듯이 다가온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성모당은 가운데 본전인 중앙홀이 높고 좌우로 상당한 길이를 확보하며 비스듬히 낮아져 지상에 이르는 지선형(支線形) 형태이다.
중앙홀의 천장에는 채광창이 있어 홀을 밝히며 홀의 중앙에는 큼직한 제대가 있다. 그리고 증앙홀 좌우에는 회랑이 있어 벽면 감실에 십자가와 성모상을 그림으로 모시고 묵상을 할 수 있는 교우석도 있다. 성모당 앞으로 확 터진 공간에는 석제 의자와 간이 의자를 배치하고 미사를 드릴 수 있다.
성모당 내부에는 성모순례지 전시실이 있어 세계의 온갖 성모님을 다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전시실 바깥 벽면에는 성모당 건립에 기여한 봉헌자 명단도 있다.
▲파티마 성모상
포르투갈의 산타렝 현 빌라노바데오렘에 있는 마을 파티마에서 세 명의 어린 목동에게 나타났다는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칭호이다. 파티마의 성모는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월 13일 여섯 번 나타났으며, 그녀가 처음 나타난 5월 13일은 파티마의 성모 발현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성모 마리아를 목격한 세 명의 아이는 루치아 도스 산토스와 그녀의 사촌 프란치스코 마르토, 히야친타 마르토이다.
▲알트외팅 성모상
독일 뮌헨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떨어진 고대 바이에른 영주의 고향이자 가톨릭 신앙의 중심지로 700년경 세워진 성당 "은총의 경당"에 모셔진 성모상으로 1489년 가을 물에 빠져 익사한 "한스"라는 세살 어린이를 안고 온 부모가 이 검은 옷의 성모상 앞에서 슬퍼하며 애원하자 되 살아난 기적이 일어난 성지라고한다
▲아래이 그샷 성모상
1975년 4월 17일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크메르 루주군이 점령하면서 인종 살육의 킬링필드가 시작된다. 캄보디아 신자들은 성모상을 보호하기 위해 메콩강 물속에 숨긴다. 그후 2008년 4월 16일 프랑스 루르드에서 성모 발현을 목격했던 성녀 벨라뎃다 축일에신자 팡판후에게 아기예수가 현시하여 차거운 믈속으로부터 어머니를 꺼내달라고 하여, 일러준 장소에 가서 강물 속에 아기예수를 보듬고 있는 성모상을 인양했다. 그후 판탄후를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때가 2012년이다 현재 이 성모상은 아래이 크샷의 성당에 모셔져있다
▲과달루페 성모상
멕시코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57세의 원주민인 "성 후안 디에고 쿠아우틀라토아친"은 1531년 12월 9일 미사에 참례하기 위하여 테페야크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때 그의 앞에 빛나는 구름속에서 파란색 망토를 입은 갈색 피부의 원주민 여인이 나타나 자신이 성모 마리아임을 밝히며 이곳에 성당을 세울 것을 부탁한다 이 소식을 스페인 출신의 "후안 데 수마락" 주교에게 전해지고 이를 믿지 못하는 주교 앞에서 수많은 장미꽃이 성모 형상으로 변하는 기적을 목격하시고 이곳에 성당을 건립하였다.
▲루한 성모상
루한 성모상은 1630년 신비로운 방법으로 부에노아이레스 교회인 루한 대성당에 모셔진 22인치 토기의 성모상으로 17세기 포르투칼 정착민들이 신앙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아르헨티나에 들여오기 시작하였는데 이 성화를 마차를 이용하여 코르도바로 운반하던 중 부에노아이레스 인근의 이곳 루한에 도착하자 말이 움직이지 못하고 멈추어 섰다 하는 수없이 성화를 내려놓자 말이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그 자리에 성전을 짖고 루한 성모상을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짜끼우 성모상
1885년 9월 베트남 항구도시 다낭에서 서남쪽 약 40km 떨어진 짜끼우 성당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셨다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하던 함리왕은 신자들을 체포하고자 군사들을 보내자 성당에 모여있던 신자들을 보호하고자 하얀 옷의 성모 마리아가 9월 9일부터 사흘간 성당 지붕에 발현하시어 군사들의 창과 화살을 막아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군사들을 물리치셨다 그러나 성당안의 신자들은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를 보지를 못했고 이를 지켜본 주민들이 나중에 신자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적은 프랑스 출신의 브뤼에 주임 신부가 프랑스 교회에 보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아빠레시다의 성모상
"아빠레시다"는 "나타나심"이란 뜻으로 강에서 건져올린 검은 성모상으로 1717년경 브라질 상파울로의 괴라찐게따라는 마을의 어부인 "도밍고스 가르시아"와 "필리페 뻬드로스"와 "조앙 알베스" 이 세 사람이 물고기를 잡기 위하여 빠라이바 강에서 그물에 머리가 없는 여인 조각상이 올라왔고 그후 다른 그물에 머리 조각상이 걸려 올라왔으며 이 둘을 맞추어 보니 놀랍게도 검은 피부의 성모상이였다 이후 필리페 뻬드로스는 자신의 집에 모셔놓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로는 물고기도 많이 잡히게 되는 등 크고 작은 기적들이 되풀이되자 개인의 성모상이 아니라 공동체의 성모상으로 "아빠레시다"의 성모상으로 모셔젔다고한다
▲루르드 성모상
1858년 2월 11일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당시 14세의 소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와 동생과 친구가 함께 땔 나무를 구하던 중 마사비엘 동굴까지 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하게 된다 1879년 4월 16일까지 모두 18번 발현하셨는데 힌옷에 파란색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베일로 머리를 두르고 팔에는 묵주를 발 아래는 노란 장미가 있는 모습으로 "나는 원죄없이 잉태된 자"라고 밝히고 "회개하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 또 발현한 장소에 성전을 지을 것과 루르드 샘물을 가리키며 "그 물을 마시며 그 물로 씻도록 하라"고 전하셨다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사후 1933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한국 가톨릭에서는 "벨라뎃다(베르나데트)"로 세례명을 사용하고있다
▲라방 성모상
베트남의 칸틴 황제는 1798년에서 1886년까지 88년간 베트남 전역에서 가톨릭 박해를 시작하였고 그 가혹한 박해를 피하여 숨어 지내던 신자들에게 1798년 긴 망태를 두르고 아기를 안은 여인이 발현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소개하며 잘 이겨내라고 격려하고 "이곳에 기도하러 오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가 받아들여 질 것이다"라고 선포하신다 이 발현 사건이후 1820년 경당을 세웠으나 파괴되었고 1901년 가스파르 주교에 의하여 더 큰 규모로 재건하여 이때부터 "라방 성모"는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의 수호자로 선포되었다
▲한국의 성모상
우리나라 전통 한복이 잘 어울리는 한국의 성모상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성모신심은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확산되었으며 당시 프랑스에서 확산된 성모신심 성모 공경 전통을 한국 교회에 옮겨놓았다 제2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한국 신자들의 성모신심을 칭송하여 1838년 교황청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한국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청하였고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41년 8월 22일 이를 허락하였다
▲바뇌 성모상
벨기에의 리에주교구의 관할인 루베네의 작은 마을로 이 마을에 12세 소녀인 "마리에트 베코"에게 1933년 1월 15일부터 3월 2일까지 하얀옷에 파란색의 허리띠를 매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인채 소녀의 집 전나무 위로 매번 저녁 7시 무렵 발현하시어 마리에트를 샘터로 인도하시어 "나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라고 말씀하시며 "모든 민족들을 위해" "병든 이들의 고통을 들어주려고 이 샘을 마련했다"고 이르신후 "작은 경당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셨다
십자가의 길
한쪽에 나무가 많은 숲속 쉼터가 있다. 이곳 쉼터는 성모순례지 쉼터이자 학교시민공원이다. 학교시민공원은 인천광역시 동구청이 300만 그루 나무심기의 일환으로 실시된 사업으로 지역사회와 시민, 그리고 관공서가 일체가 되는 좋은 사업이다.
감곡 매괘성지, 수리치 성모성지 등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하는 성지나 순례지의 성당은 전국적으로 30야곳이나 된다. 이곳 인천 성모순례지도 그들에 빠지지 않는다. 성모순례지(성모당) 순례는 여기까지이다. 9시 40분. 이제 제물진두 순교성지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