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十四 章. 행복의 절정
목염자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친다.
[십여 년 동안 아버님은 나를 데리고 동분서주하시면서 열흘이나 보름을 한 곳에
머무른 적이 없었어요. 누구를 꼭 찾아야만 한다고...., 성이 곽씨인 오빠를
찾아야 한다고....,]
여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떨군다. 구처기가 곽정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음, 네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너를 거두게 되었느냐?]
[저는 임안부 우가촌 태생이에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댁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숙모님께서 저를 몹시 학대했어요. 다섯 살 되던 그 해 숙모님은 저를
때리고 밥조차 주시지 않았어요. 제가 문 앞에서 울고 있을 때 이 아버지께서
지나시다가 저를 불쌍히 보시고 숙부님과 상의하신 후 수양딸로 삼으셨답니다.
뒤에 아버지께서는 제게 무예를 가르쳐 주시고 곽씨라는 오빠를 찾아야 한다고
각지를 돌아다니시다가 마침내 비무초친(比武招親)이란 깃발까지 내걸게 되었던
것입니다.]
[음그랬구나! 그러나 네 아버지의 성은 목씨가 아니라 양씨야. 그러니 너도 양씨로
바꾸렴.]
[아내요. 저는 여전히 목씨예요.]
[왜? 내 말을 믿지 못하겠느냐?]
[아뇨. 하지만 저는 그냥 목씨로 있을래요.]
말소리가 낮아졌다. 구처기는 그가 우기는 것을 보고 소녀가 부끄러워하나 보다
싶어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염자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기는
벌써 완안강에게 마음이 기운지 오랬다. 그녀가 아버지의 친생 골육이라면
양씨임에 틀림없다. 자기가 만약 양씨로 성을 바꾼다면 이 혼사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왕처일은 약을 마신 후 점점 정신이 새로와졌다. 자리에 누운 채 구처기와
주고받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와 완안강이 무예를 겨루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네 무공이 네 아버지보다 훌륭하던데 어떻게 된 일이지?]
[제가 열 세 살 되던 해 이인(異人)을 한 분 만난 일이 있어요. 그분께서 사흘동안
무공을 깨우쳐 주셨는데 원래 둔한 편이라 잘 배우지 못했답니다.]
[아니, 사흘 동안 배웠을 뿐인데 네 아버님보다 낫단 말이냐? 그래 그 이인이
도대체 누구냐?]
[제가 도장을 속일 마음은 추호도 없사오나 그의 존함을 알리지 않기로 맹세를 한
바이오라....]
왕처일은 <음> 하고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왕처일은 마음속으로 목염자와
완안강이 무예를 겨를 때 쓰던 자세와 권법을 다시 한 번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의 무공이 어느 파에 속하는지 전연 짐작이 가지 않는다. 생각할수록
의문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 구처기를 향해 묻는다.
[구사형, 완안강에게 한 팔구 년은 무공을 익혀 주었지?]
[구 년 하고도 육 개월이오. 아, 내 어쩌다 그런 못된 놈에게 그랬는지.]
[그럼 참 이상도 하다.]
[뭐가요?]
그러나 왕처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구도장님, 어떻게 해서 양형의 후예를 만나게 되셨습니까?]
가진악이 구처기에게 물었다.
[말을 하자면 공교롭지요. 제가 여러분과 약속을 한 뒤에 여기저기 헤매며 곽,양
두 집의 뒷소식을 묻고 다니지 않았겠음니까? 몃 년이 지나도 전연 종적을
몰랐지요. 그래서 전 여러분과의 약속은 제가 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렇다고 체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해 다시 임안부 우가촌엘
들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몇 명의 관인들이 양형집 살림살이를 옮기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알아보니 대금국 조왕부의 친병들이었습니다.
가장 집물을 하나도 빼놓으면 안된다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면서 의자며 식탁
철창이며 쟁기까지 전부 가지고 가더군요. 이상하다 생각하며 그들의 뒤를 따라
중도(中都)에까지 왔습니다 그려.]
곽정은 그제야 조왕부 안의 포석약 방에서 본 집기들의 연유를 알게 되었다.
구처기는 말을 계속했다.
[밤에 왕부에 숨어 들어갔웁니다. 조왕이 만 리가 넘는 먼 곳에서 무엇 때문에
그것들을 가지고 왔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을 알아보니 놀랍기도 하고
기가 찼습니다. 원래 양형의 아내 포씨는 벌써 왕비의 귀한 신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죽이려고 했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시골의 농가 같은
집안에서 포씨는 양형의 철창을 어루만지며 밤새도록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남편을 잊지 못해 괴로와 우는 그녀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뒤에 그 왕자가 바로
양형의 골육임을 알았지요. 몇 년이 지나 그가 장성하는 것을 보고 무예를
가르치기 시작했지요.]
[아, 그 녀석은 계속 자기 신분을 몰랐던가요?]
가진악의 질문이다.
[저도 몇 번이나 눈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녀석은 부귀나 탐내고 해시 별로 제
마음에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 곽정과 무예나 겨루게 한 뒤 얘기를 하기로
결심을 내렸습니다. 후일에 사실을 알리고 그들 모자로 하여금 시골에 내려가
조용히 여생을 보내도록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양형도 이 세상에 살아
계셨고 저의 사형 두 사람도 간계에 속아 이 지경이 되고 만것 입니다.]
목염자는 구처기의 말을 듣고 다시 또 얼굴을 가린 채 흐느낀다. 곽정도 양철심과
만나게 된 경위와 그날 밤 포석약 방에서 일어났딘 일들을 설명했다. 좌중이 모두
포석약의 신세를 한탄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다시 중추절 무예를 겨룰 일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주총이 말을
꺼냈다.
[전진 칠자만 다 모이시기로 한다면 저희야 뭘 걱정하겠습니까?]
[아니오, 그들이 고수를 불러 올 텐네 그렇게 되면 중과부적이오.]
마옥의 말에 구처기도 입을 연다.
[까짓 것 고수들을 불러온다고 해서 뭐 그리 겁낼 것 없지 않습니까?]
[구사제, 모르는 말씀이오. 이 몇 해 동안 구사제의 무공이 크게 진보했다고는
하지만 젊은 호기만을 믿고 소흘히 다룰 문제가 아니오.]
[그러나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기 마련입니다.
하하하....]
마옥도 따라 웃는다.
[누가 아니라오. 방금 만났던 몇 사람의 무공이 결코 우리에게 뒤지는 게
아니었소. 그런데 그들이 엇비슷한 고수들을 불러 오기로 한 연우루(煙雨樓)의
일은 장담 못하오.]
[그렇다고 우리 전진파가 그들에게 지겠습니까?]
[세상일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게 아니오. 방금도 가형이나 구형 등이 도와 주지
않았다면 전진파의 수십 년 멍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 삼형제는 목숨을
유지하지 못했을 거요.]
가진악, 주총 등이 겸양을 한다.
[그들의 흉계 때문에 그렇게 된 일, 저희가 무슨 도움이 되었습니까?]
마옥이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쉰다.
[주사숙(周師叔)께서는 선사(先師)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아 그 무공이 우리의 십
배가 넘는데 심여 년 동안 소식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하오. 어쨋든 조심합시다.]
구처기도 사형의 이 같은 말에 더 우길 수도 없었다. 강남 육괴는 마옥의 이 말을
듣고 궁금했다. 자기들도 모르는 사숙이 계신가 해서다. 그러나 캐묻기도 어색해서
잠자코 있을 뿐이다. 왕처일은 두 사형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한 마디 말도 없이
사색에 잠긴 듯 부처처럼 앉아 있었다. 구처기는 눈길을 돌려 곽정과 목염자를
바라다보고 웃는다.
[가형, 형들이 가르친 제자가 홀륭합니다. 양형도 이런 사위가 있으니 편안히 눈을
감았을 게요.]
목염자는 얼굴을 붉히고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왕처일은 그가 일어나는 것과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고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력으로 그의 어깨를 내리친다. 왕처일의 솜씨가 전광석화와 같이
빠르다. 목염자가 깜짝 놀라 비틀비틀하다가 그대로 앞으로 넘어진다. 왕처일이
다시 왼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추켜 세우니 목염자는 꼼짝없이 끌려 일어나 선다.
놀랍고도 의아한 표정이다. 왕처일이 웃으며 말문을 연다.
[목아가씨는 놀라지 마오. 공력을 시험해 봤을 뿐이오. 아가씨에게 사흘 동안
무공을 익혀 준 그 이인이라는 분, 손가락이 아홉에다 거지차림을 했지?]
[그래오. 도장께서는 어떻게 아시나요?]
[그 구지신개(九指神 ) 홍(洪)선배는 신출 귀몰하오. 아가씨가 그에게 사흘을
배웠다니 그건 천재 일우의 기회였소.]
[애석하게도 사흘밖에 배우지 못했을 뿐입니다.]
[왜? 사흘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나? 그 사흘은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십 년보다
나아요.]
[아! 그랬군요. 그런데 도장께서는 그 홍선배님이 어디 계신지 아시나요?]
[나도 잘 모르지. 이십 년 전 화산(華山)의 정상에서 만났을 뿐, 그 뒤 소식조차
들은 일이 없는걸.]
목염자는 실망이 되는지 그냥 방 밖으로 걸어 나간다. 한소영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왕도장님, 홍선배란 분이 누구예요?]
왕처일이 미소를 머금고 상좌에 가 앉는다. 그러자 구처기가 말문을 연다.
[동사서독(東邪西毒), 남제북개(南帝北 ), 중신통(中神通)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글쎄요, 들어본 것 같기도 하군요. 그런데 들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한소영이 이렇게 대답하자 가진악이 황급하게 묻는다.
[그럼 그 흥선배라는 분이 바로 남제북개 가운데의 북개란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중신통이 바로 우리들의 선사이신 왕진인(王眞人)이구요.]
왕처일의 대답이다. 강남 육괴는 그 홍선배라는 분이 전진 칠자의 사부와
버금간다는 말을 듣고 숙연해졌다. 구처기가 고개를 돌려 곽정을 건너다보며
웃는다.
[장래 부인 될 사람은 명성이 쟁쟁한 구지신개의 제자니 그 누가 제자를
업신여기겠나? 하하하....]
곽정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무어라 변명을 하려다 그만 둔다.
한소영이 다시 묻는다.
[왕도장님, 그의 어깨를 한번 눌러 보시고 어떻게 그가 구지신개에게 무예를
배웠다는 걸 아셨어요?]
구처기가 곽정을 항해 손짓을 한다.
[이리 오려무나.]
곽정이 그 말에 따른다. 구처기가 장심을 그의 어깨에 대고 힘을 주어 누른다.
곽정은 우선 마옥으로부터 현문 정종의 내공을 익혔고 게다가
기사보혈(奇蛇寶血)을 마신 뒤 공력이 크게 발전했다. 구처기가 눌렀지만 눌리지
않는다. 그러자 구처기가 웃는다.
[넌 착한 놈이야!]
누르고 있던 장심의 기운을 갑자기 푼다. 곽정은 원래 기운을 모아 그의 장력에
버티고 있었다. 구처기의 외력(外力)이 풀리자 곽정의 내력(內力)도 풀어졌다. 이
순간 구처기는 전광석화처럼 허를 찌른 것이다. 구처기가 가볍게 눌렀는데도 뒤로
벌렁 나가 떨어졌다. 곽정은 손을 땅에 찍으며 벌떡 일어나 섰다.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곽정아, 구도장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주총의 말에 곽정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그러자 구처기가 다시 말문을
잇는다.
[천하의 무학을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은 힘을 받고 지탱하지 못하면
반드시 뒤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구지신개의 독특한 무공은 반대로
앞으로 넘어집니다. 이게 바로 허다한 정종 무학과 다른 점이지요.]
육괴가 듣고는 일리 있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진파의 견문이 넓은 것에
감탄했다.
[그럼 왕도장께선 구지신개의 무공을 보신 적이 있겠군요?]
주총의 묻는 말에 왕처일이 대답을 한다.
[이십여 년 전 저의 선사와 구지신개, 황약사 등 다섯 사람이 화산의 절정에 모여
무예를 논할 때 제가 옆에서 모시고 있다가 홍선배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좀 알지요.]
[아, 그럼 그 황약사라는 분은 동사서독(東邪西毒) 가운데의 동사입니까?]
가진악의 질문에 구처기가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또 곽정을 바라다보며 웃는다.
[마사형께서 네게 내공을 전수해 주셨으면서도 사제지간이라 칭하지 않으셨기에
망정이지 부인 될 사람보다 후배가 될 뻔했구나. 허허허.]
[저는 그 여자에게 장가가지 않을 거예요.]
곽정이 얼굴을 붉히고 하는 말에 구처기가 깜짝 놀란다.
[뭐라구!]
곽정이 다시 한 번 그 말을 되풀이한다. 구처기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엇 때문이냐?]
난처해진 곽정의 입장을 보고 한소영이 말을 꺼낸다.
[우리는 양철심 선생의 후예가 남자인 줄 알고 몽고에 있을 때 이미 곽정의 혼사를
결정했습니다. 몽고의 대한 징기스칸이 곽정을 금도부마로 봉했답니다.]
구처기는 이 밀을 듣고 냉소를 터뜨린다.
[그렇겠지. 한 쪽은 공주의 신분이니까. 그러나 네 선친의 유언은 어쩔 테냐?]
곽정은 당황한 나머지 몸둘 바를 몰라 쩔쩔매다가 땅에 꿇어 엎드려 절을 한다.
[제자는 선친을 뵈온 적이 없습니다. 어떤 유언이 계셨는지 듣지 못했사오니
도창께서 밝히 깨우쳐 주소서.]
구처기도 망연히 실소를 한다.
[과연 너만 나무랄 처지가 아니로구나.]
그래서 18년 전 어떻게 우가촌의 곽,양 두 사람과 알게 된 일이며, 관병과의
싸움이 벌어졌던 일, 곽,양 두 사람을 찾아헤매던 일, 강남 칠괴와 싸우게 된 동기
및 장래 두 사람의 무예를 겨루어 승부릍 가리자고 약속한 일 등을 하나도 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들려주었다.
곽정은 오늘에야 비로소 자기 신세를 알게 된 것이다. 땅에 엎드린 채 흐느껴 울며
선친의 비참한 최후를 생각해 본다. 아직도 원수를 갚지 못했으니 언젠가는 갚아야
하는 것이다. 사부님의 은혜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어 분골 쇄신한다 하더라도
보답할 길이 막막했다.
[남자가 부인이 셋이건 첩이 넷이건 무슨 상관 있겠니? 장래 이러한 사연을 대한께
알리고 둘 다 아내로 맞으면 될 게 아니냐?]
한소영의 부드러운 말에 갈피를 못 잡던 곽정은 눈물을 닦는다.
[화쟁 공주를 아내로 맞지 않겠어요.]
[그건 또 왜?]
[그녀를 아내로 맞고 싶지 않군요.]
[넌 늘 그애와 다정하게 지내지 않았느냐?]
[네, 저는 그냥 오누이처럼 친구처럼 대해 왔을 뿐인걸요. 아내로 맞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구처기는 곽정이 여간 대견스럽지 않았다.
[착하구나. 지기가 있이. 대한이 무슨 상관이며 공주면 뭘 하느냐? 넌 네 선친과
양선배의 뜻에 좇아 저 아가씨와 결혼을 해야 한다.]
곽정의 말을 들은 뭇 사람들은 의아한 생각을 했을 뿐이요, 한소영은 여자라
그래도 눈치가 빠른 편이다.
[네 마음에 드는 다른 사람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렇지?]
곽정은 얼굴을 붉히고 잠시 뒤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누구냐?]
한소영과 구처기가 동시에 물었지만 곽정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한소영은
어젯밤 왕부에서 매초풍, 구양공자 등과 싸울 때도 황용을 유심히 보았다. 눈처럼
흰옷의 아리따운 모습, 즉시 어제의 황용이 생각났다.
[어젯밤 흰옷을 입고 있던 그 아가씨냐?]
곽정이 얼굴을 더욱 붉히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처기가 답답한지 한소영을
보고 묻는다.
[그게 누구요?]
한소영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전 매초풍이 그녀를 사매(師妹)라고 부르는 걸 들었고 또 그녀의 아버지를
사부라고 하는 것 같던데....]
구처기와 가진악이 동시에 벌떡 일어나 서며 외쳤다.
[그럼 황약사의 딸이란 말이냐?]
한소영이 곽정의 손을 잡고 다시 묻는다.
[곽정아, 그 아가씨 성이 황씨냐?]
곽정이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고 대답한다. 한소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번엔 주총이 입을 연다.
[그래 그 여자의 아버지가 허락했느냐?]
[전 그분을 만나본 일도 없고 또 누군지 알지도 못해요.]
[그럼, 너희들 맘대로 결정했단 말이냐?]
[뭐 서로 그런 말한 적도 없어요. 또 말할 필요도 없구요. 저도 그애 없으면 안
되고 황용도 제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서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한보구는 일평생 애정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지내 온 사람이라 지금 곽정의
하는 말을 듣고 나니 못마땅했다.
[그게 무슨 돼먹지 않은 말이냐?]
주총이 다시 부드럽게 타이른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살인을 하고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마귀의 두목이야,
알겠니? 그가 만약 네가 황용을 꾀인 줄 아는 날에는 넌 죽어. 매초풍이 그의
재주를 십분지 일도 배우지 못했는데 그래도 무섭지 않으냐? 그 도화도주가 너를
죽이려 든다면 그 누가 너를 구해 줄 수 있단 말이냐?]
[황용이 그토록 착한 걸 보면...., 그 아버지도 악인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놈아!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지껄이느냐? 여기서 맹세를 해라. 다시는 그
요괴 같은 계집과 만나지 않겠다구.]
한보구가 듣고 있다가 벌컥 화를 냈다. 강남육괴는 흑풍쌍쇄가 소미타 장아생을
살해했기 때문에 쌍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부인 황약사에 대한 원한도
골수에 사무쳐 있었다. 곽정은 난처했다. 사부들의 은혜도 막중하지만 어떻게
황용을 만나지 않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천성이 어질기 때문에 감정이 풍부하고
인정에 끌리는 곽정이다. 무섭게 노려보는 사부들의 시선 앞에 마음이 괴로와 두
무릎을 꿇은 채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을 뿐이다.
한보구가 한 발짝 다가서며 몰아 세운다.
[빨리 말을 해라.]
이때 갑자기 창 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아니 무엇 때문에 그를 괴롭히는 거예요?]
뭇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곽정 오빠, 빨리 나와요.]
다른 사람 아닌 황용이었다. 반갑고도 놀라와 그대로 달려 나간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밝은 표정 그대로 마당에 서 있는데 한손엔 곽정의 보마를 잡고
있었다. 말은 곽정을 보고 반가와 달려든다. 한보구,전금발,주총,구처기 네 사람이
창 밖으로 나왔다.
[삼사부(三師父), 바로 이 여자예요. 요괴가 아닙니다.]
곽정이 한보구를 향해 외친다. 이를 본 황용이 욕지거리를 퍼붓는다.
[꼴 같지 않은 땅딸보가 그래 날 보구 요괴라구?]
다시 주총에게 삿대질을 한다.
[아니, 더럽게 생겨먹은 작자가 감히 우리 아버지를 욕해요? 뭐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마귀 두목이라구요?]
주총은 평생 이런 소녀와 상대를 해 본 경험이 없는 위인이다. 과연 미인이로구나.
곽정이 반할 만도 하다고 여겨 빙그레 웃고만 있는데 한보구는 화가 치밀어 입가의
수염까지 곤두세우고 야단이다.
[빨리 꺼지지 못해!]
그런데 황용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손뼉을 치며 놀려 댄다.
[호박처럼 생겨 둥글둥글하군요. 발길로 차면 데굴데굴 잘도 굴러가게 생겼네.]
그러자 곽정이 말린다.
[황용아, 까불면 못 써. 이분은 내 사부님이야.]
한보구가 앞으로 다가서며 황용을 민다.
[호박처럼 데굴데굴....]
갑자기 손을 뻗어 곽정의 허리를 받치고 잡아당겨 두사람이 동시에 홍마 등에
올라탄다. 고삐를 나꿔채자 말은 쏜살처럼 달린다. 한보구가 제아무리 빠르다 해도
이 쏜살같이 달리는 홍마의 뒤는 도저히 따를 수 없다. 곽정이 정신을 가다듬고
뒤를 바라다보았을 때 한보구 등은 까맣게 멀리 보일 뿐이다. 순식간에 달려온
거리가 꽤나 멀다. 귓가에 바람 소리만 윙윙 울리고 있었다.
황용은 오른손으로 고삐를 어루만지며 왼손으로 곽정의 손을 끌어 잡았다. 반나절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오렛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 같다. 곽정은 생각했다.
사부들의 곁을 이렇게 훌쩍 떠난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황용을 버리고 일생 동안 만나지 못한다면 그건 차라리 자기의
목숨을 뺏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홍마가 한시간은 달렸을까? 벌써 중도(中都) 연경(燕京)에서 근 100여 리나 떨어진
지점에 와 있었다. 황용은 이때야 비로소 고삐를 늦춰 말을 멈추게 하고 땅에
뛰어내렸다. 곽정도 그를 따라 말에서 내렸다. 홍마는 목덜미를 곽정의 허리에
비비며 반가와 했다. 둘은 손에 손을 잡고 마구 바라다보고 있었다. 마음과
마음으로 오가는 정에 말이 필요없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이렇게 서로 바라다보다가 황용이 슬그머니 곽정의 손을 놓고 말안장에
매달린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시냇물에 적셔 곽정에게 주며 얼굴을 씻으라고
했다. 곽정은 멍하니 황용을 바라다볼 뿐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황용, 우리 이러면 안 돼!]
황용이 깜짝 놀랐다.
[왜 그래요?]
[우리 돌아가자구. 가서 사부님들을 만나요.]
[뭐라구요? 함께 돌아가자구요?]
[응, 우리 손을 잡고 함께 돌아가 여섯 분 사부님과 마도장 그분들께 확실히
말씀드려오. 이 사람이 바로 황용이라구. 요괴가 아니라구....]
부드럽고 가냘픈 황용의 손을 잡고 힘을 준다. 가진악 사부나 마옥 도장 앞에서
얘기를 해야지.
[사부님, 사부님들의 은혜는 태산보다 높아 이 제자가 분골쇄신한다 하더라도 갚을
길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그러나 황용은...., 요괴가 아니에요. 아주
착하디 착한 아가씨랍니다....]
단호하게 말씀드려야지. 그러나 착하디 착한 아가씨...., 밖에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황용은 처음 우습게 듣고 있다가 뒤에는 감동이 되었다.
[곽정 오빠, 사부님들이 날 그렇게 미워하는데 말해 봐야 소용없어요. 돌아가지
말아요. 심산 유곡이든지 아니면 외딴 섬에라도 가서 한평생 살도록 해요. 그럼
그들도 못 찾겠지요?]
곽정의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정색을 하고 말한다.
[안 돼! 우린 돌아가야 해.]
[그들은 틀럼없이 우리를 떼어 놓을 거예요. 그럼 우린 다시는 만나지 못해요.]
[우린 죽어도 떨어질 수 없어.]
황용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쓸쓸했었다. 그러나 이제 곽정의 말을 듣고 보니
천언 만어의 맹세보다 더 힘이 있었다. 천하의 어떤 힘이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있단 말이냐? 곽정이 더 할 나위 없이 믿음직해 보였다.
(최악의 경우라야 죽음밖에 더 있으랴? 죽음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겠지.)
[곽정 오빠. 영원히 오빠의 말에 따를께요. 죽어도 우린 헤어지지 않는 거예요.]
곽정은 기뻤다.
[그래서 내 원래부터 착한 아가씨라고 그러지 않았나?]
황용은 밝게 웃었다. 가죽 주머니에서 쇠고기를 꺼내 물에 씻고 나뭇가지를 주워다
불을 피운다.
[홍마를 좀 쉬게 한 뒤 돌아가도록 해요. 네?]
둘은 맛있게 쇠고기를 구워 먹고 홍마는 배불리 풀을 뜯었다. 말머리를 돌려
객점으로 돌아왔을 때는 신시(申時)가 넘어 있었다. 곽정이 황용의 손을 잡고
객점에 들어서니 점원이 반긴다.
[이제 돌아오시는군요. 그분들은 다 떠나셨어요. 뭐 잡수실 것을 준비해 올까요?
분부만 하세요.]
곽정이 놀란다.
[뭐라구? 다들 떠났다구? 하시는 말씀이 없더냐?]
[없었어요. 그분들은 남쪽으로 떠나셨어요. 아직 두 시간도 채 못 되는걸요.]
[자, 우리 쫓아가지]
곽정이 황용을 보고 재촉하는 말이다. 둘은 객점을 벗어나 말등에 탄채 일로
남쪽을 향해 달렸다. 저녘때가 다 되었는데도 육괴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사부님들이 다른 길로 가시지 않았을까?]
그래서 말머리를 되돌렸다. 과언 홍마는 보통 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탔는데도
여전히 하루 1천 리는 달린다.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길에서 계속 물어
봤지만 강남 육괴나 전진 삼자 비슷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는 대답만 들었다.
실망한 곽정을 보고 황용이 위로한다.
[팔월 중추절에는 가흥의 연우루에서 뵈올 수 있을 텐데 뭘 그래요. 그때
사부님들도 꼭 오실 텐데요.]
[중추절이면 아직도 반 년이나 남았는걸.]
[반 년 동안 우리, 천하의 명승이나 두루 구경하면 좋지 않아요?]
곽정도 구경이라면 사양하고 싶지 않았다. 또 마음에 드는 황용까지 곁에 있지
않은가! 만족스런 기분으로 좋다는 대답을 한다.
둘은 조그만 마완의 객점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백마 한 필을 더 샀다.
곽정은 백마를 타겠다고 우긴다. 어쩔 수 없이 황용은 홍마를 타고 말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구경을 다닌다. 어떤 때는 황야에서 어깨를 맞대고 자기도 하고
객점의 한 방에서 묵기도 했다. 황용도 어색하게 여기지 않았고 곽정 또한
그러려니 했다.
하루는 그들이 경동서로(京東西路) 습경부(襲慶府) 태령군(泰寧軍) 지계(지금의
산동성)에 당도했다. 때는 바야흐로 단오절이라 햇볕이 따가왔다. 황용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보인다. 서늘한 곳을 찾아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어디서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황용이 말에서 내려 달려가 보더니 환호성을
지른다. 곽정이 쫓아가 보니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 시냇물 양쪽의 수양버들
가지가 맑은 물에 씻긴다. 떠노는 고기들이 시원해 보인다.
황용이 겉옷을 벗고 물 속에 텀벙 뛰어든다. 곽정이 깜짝 놀라 달려가니 황용이
번쩍 두 손을 치켜 들었다. 양 손에 자치가 넘는 청어(靑魚)를 두 마리나 들고
있다. 꼬리를 흔들며 빠져나가려 야단이다. 황용이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지른다.
[자,받아요.]
언덕 위에 던지는 고기를 금나법(擒拿法)으로 받는다. 어찌나 미끄러운지 손에서
빠져나가 땅바닥 위를 펄떡펄떡 뛰어오른다. 황용이 꽂가지 같은 허리를 흔들며
웃는다.
[내려와오. 아주 시원한데 헤엄을 쳐요.]
곽정은 사막에서 자랐기 때문에 헤엄을 칠 줄 몰라 고개를 흔든다. 황용은 두 손을
벌리며 즐거운 듯이 소리쳤다.
[내 가르쳐 줄께요. 어서 내려와요.]
곽정은 그가 물 속에서 흥겹게 노니는 것을 보고 겉옷을 벗고 한 발 한 발 물
속으로 들어갔다. 황용이 그의 다리를 잡아당기니 벌렁 물 속에 넘어져
허우적거리며 물을 킨다. 황용이 웃으며 잡아 일으켜 세우고 헤엄치는 법을 알려
준다. 두 시간도 못 돼 자유 자재로 떴다 가라앉았다 오르락 내리락 제
마음대로다.
둘은 흥겨운 나머지 상류로 상류로 헤엄쳐 올라갔다. 그런데 물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울린다. 산 모퉁이를 돌아서니 10여 장 높이의 폭포가 장관이다. 주렴을
드리운 듯 높은 꼭대기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물이 시원하다.
[곽정 오빠, 우리 폭포를 타고 저 위로 올라가요.]
[좋지. 어디 한번 해볼까. 그런대 그 방신(防身) 연갑(軟甲)을 입지 그래.]
[필요 없어요.]
둘은 폭포 속을 뚫고 들어갔다. 어찌나 물이 급하고 센지 올라가기는커넝 서 있을
수도 없다. 몇 차례 역류를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다. 곽정은 이런 때
물러서지 않는 고집이 있다.
[황용, 우리 오늘밤 푹 쉬고 내일 다시 와서 해 보자구.]
[그래요.]
다음날 그들은 또 왔다. 그런대로 1여 장이나 뚫고 올라갈 수 있었다. 둘다 경신의
무공이 뛰어났기에 미끄러져 내려와도 다치지는 않았다. 둘이 서로 물의 성질에
대해 의논하며 날마다 폭포에 와서 놀았다. 8일째 되던 날, 곽정은 마침내 그
꼭대기에 기어오를 수 있었다. 손을 뻗어 황용도 끌어 올렸다. 둘은 기뻐 미칠 것
같았다. 손에 손을 마구 잡고 폭포를 타고 앉아 미끄럼질로 내려왔다.
이렇게 10여 일이 흘렀다. 곽정은 이제 수성(水性)에도 정통하게 된 것이다. 비록
황용처럼 재치 있게 맨손으로 고기를 잡지는 못했지만 물에서의 재주가 빠지는
편은 아니었다. 둘은 흥이 사라질 때까지 즐기다가 11일째 되던 날 비로소 다시
말에 올라 남행(南行)을 했다.
이날 양자강가에 당도했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보니 호연지기가 구름처럼
일어나는 것 같다. 멀리 흘러가는 깅물 따라 시선도 흘려 보넨다.
[건너면 건너는 거예요.]
[물론이지!]
둘은 서로 이렇게 몇 달을 함께 보냈다. 말은 없어도 피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친해진 것이다. 황용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다보고 그의 마음을 알았다.
곽정은 백마의 고삐를 풀어 준다.
[넌 필요 없어. 너 갈 대로 가거라]
다시 홍마의 엉덩이를 철썩 때려 물속으로 밀어넣고, 자기들도 강심을 향해 헤엄을
쳤다. 홍마가 앞장서 나가고 곽정과 황용도 가지런히 그뒤를 헤쳐나간다. 강심에
이르니 홍마는 벌써 저만큼 멀어지고 하늘의 뭇 별만이 반짝이며, 출렁이는 물결만
보일 뿐 고요한 정적 속에 오직 그들 둘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다시 또 한참을 헤쳐 나가다 보니 갑자기 검은 구름이 낮게 깔리고 번갯불이
번쩍이더니 소나기가 쏟아지며 우뢰소리가 우르르 머리 위를 때린다.
[황용! 무섭지.]
[아뇨. 함께 있어서 그런지 무섭지 않아요.]
여름날의 폭우는 변덕이 심하다. 둘이 언덕에 닿았을 때는 비온 뒤의 쾌청이다.
밝은 달만이 반공에 뜬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곽정은 마른 나믓가지를
주워다 불을 피우고 젖은 옷을 말렸다.
어느 새 잠이 들었는지 강가의 초가집 수탉 울음 소리에 눈을 떴다. 동녘 하늘이
부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황용이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켠다.
[배가 고파요.]
말을 마치고 초가집 쪽으로 딛려가 수탉 한 마리를 안고 나왔다.
[우리 멀찌기 가서 잡아먹어요. 주인에게 들기면 근일이에요.]
황용은 수탉을 죽이고 진흙을 구해 반죽을 한 뒤 닭몸뚱이에 바른 후 흙과 함께
불에 구웠다. 진흙이 말라 가며 고기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흙이 다 마르니 이제
흙을 떼내기 시작한다. 닭털이 흙과 함께 떨어져 나가고 하얀 닭고기가 드러났다.
입안에 침이 괴기 시작한다. 닭다리를 뜯으려고 하는데 사람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 몫으로 나눠요. 닭 엉덩이는 내게 주고.]
둘은 깜짝 늘랐다. 둘 다 청각이 예민한데 어째서 등뒤에 다가서는 인기척도 못
들었을까? 급히 고개를 돌리니 중년의 거지 하나가 거기에 서 있었다. 거지가 입고
있는 옷은 여기 한쪽 저기 한쪽 각기 다른 천으로 꿰맨 것이지만 헌 누더기가
아니다. 천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새것이라 마치 희극에 나오는 거지차림 그대로다.
손에는 죽장을 짚고 등뒤에는 주홍빛의 호로병을 차고 있는데 표정은 태연
자약하며 천연덕스러웠다.
곽,황 두 사람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그들의 맞은편에 와 앉으며 등에 멘
호로병을 꺼내 마개를 연다. 물씬 술 냄새가 향기롭게 풍졌다. 꿀꺽꿀꺽 몇 모금
마신 뒤에 곽정에게 건넨다.
[너도 좀 마시렴.]
곽정은 무례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행동이 기괴하고 이상해 공손하게 대했다.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노인장이나 더 드세요.]
거지는 다시 황용을 바라다본다.
[좀 마시겠나?]
황용이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며 보니 호로병을 든 오른손 손가락이 넷밖에 없다.
객점의 창 밖에 서서 왕처일과 구처기가 주고받은 말을 들은 생각이 났다. 혹시 그
구지신개가 아닐까? 어디 한번 떠 보자. 이렇게 생각한 황용이 침을 삼키고 있는
그에게 닭을 반 이상 찢어 주었다. 거지는 반가운 듯 닭고기를 채뜨려 입안에
쑤셔넣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닭뼈까지 삼켜 버렸다.
[아, 참 맛좋다. 이렇게 맛있는 닭고기는 생전에 처음 먹어 보는 걸.]
황용이 미소를 머금고 남은 닭 반 마리를 또 그에게 주었다.
[원 그럴 수야 있나? 둘은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말로는 사양을 하면서도 벌써 손을 뻗어 받아서 입 안에 쑤셔넣고 우물우물 삼켜
버리고 있었다. 거지는 자기 뱃가죽을 두어 번 두드려 본다.
[뱃가즉아 뱃가죽아! 이렇게 맛있는 닭고기는 처음이렷다.]
황용이 킥킥 웃음을 참는다. 거지는 품속에서 은전(銀錢)을 꺼내 곽정에게 준다.
[돈은 필요 없어요.]
거지는 난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원 그럴 수가. 내가 거지질은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 본 일은 없는걸.]
[닭 한 마리가 무슨 폐랄 게 있겠음니까? 게다가 이 닭은 우리도 훔쳐온 건데요.]
[아주 재미있구나. 내 맘에 든다. 무슨 소원이 있거든 내 들어줄테니 말해 봐라.]
거지는 기쁜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곽정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황용이 먼저
입을 연다.
[제가 음식을 좀 만들 줄 아니 잡숴 보시겠어요? 그럼 우리와 함께 앞에 있는
장터로 가 보시지요.]
[그것 좋지!]
[그런데 영감님의 존함은?]
곽정이 묻자 그 거지가 대답한다.
[내 성은 홍(洪)이요, 일곱째니까 나를 홍칠공(洪七公)이라 부르면 돼.]
황용은 그의 성이 홍가라는 말을 듣고 생각했다.
(과연 그 사람이구나. 그런데 아주 젊은데 어떻게 해서 전진 칠자의 사부와 친구가
될까?)
세 사람은 남쪽을 향해 내려오다가 강묘진(姜廟鎭)이라고 하는 시골 장터에 이르러
객점에 들었다.
[제가 나가서 장을 보아 올 테니 두 분은 좀 쉬세요.]
황용이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자 홍칠공은 그의 둥뒤를 바라다보다가 곽정을
보고 웃는다.
[색신가?]
곽정은 얼굴만 붉히고 어물어물 대답을 못한다. 홍칠공은 너털웃음을 더뜨리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시간이 좀 지나자 황용이 장을 보아
왔다. 부엌으로 들어간 그녀를 따라 곽정이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웃고 사양하는
바람에 그냥 물러 나온다. 또한 반 시간쯤 지났을까? 홍칠공이 기지개를 켜면서
잠에서 깨어나 코를 벌름거린다.
[냄새 좋다. 지금 무슨 요리를 만드는 거지?]
고개를 길게 내밀어 주방 쪽을 본다. 침을 삼키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양을 보고
곽정은 빙그레 웃었다. 주방에선 냄새만 풍길 뿐 황용은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난 음식을 탐내는 버릇이 있어. 냄새를 말으면 오금을 못 쓴단 말야.]
그는 오른손을 곽정에게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고인의 말에, 식지대동(食指大動)이라더니 틀림없어. 다른 사람이 산해 진미를
먹는걸 보면 이놈의 식지가 펄떡펄떡 뛴단 말야. 내 화가 치밀어 칼로 잘라
버렸다네...., 그런대도 음식을 탐하는 버릇만은 종내 고치지 못하겠으니....]
막 여기까지 말을 하는데 황용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왔다. 쟁반 위에는 두
그릇의 쌀밥과 술잔, 그 밖에 두어 접시의 반찬이 놓여 있었다. 그가 접시를
식탁에 챙겨 놓는데 향기가 그럴듯했다. 한 접시에는 구운 고기, 다른 한 접시엔
파란 청탕(淸湯)에 빨간 앵두를 띄운 국이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황용이 잔에 술을 따라 홍칠공 면전에 놓으며 웃는다.
[칠공, 어디 제 솜씨가 어떤지 맛 좀 보세요.]
황용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홍칠공은 벌써 잔을 비우고 두어 점 고기를 집어다
입에 넣고 씹는다. 어찌나 맛이 고소한지 평소 먹어 보지 못했던 진미다. 고기는
네 조각을 붙여 산적을 만든 것이다. 두 눈을 살며시 감고 맛을 음미한다.
[음, 하나는 새끼 양의 볼기 살이고, 또 하나는 돼지 새끼 갈비고, 하나는 송아지
다리 고기고, 나머지 하나는...., 잘 모르겠구나.]
[알아맞히시면 굉장한 미식가라고 할께요.]
황용이 입술을 닦으며 웃었다.
[그래 그래, 노루 다리 고기에 토끼 고기를 섞었군 그래?]
[그래요! 아주 굉장하시네요.]
홍칠공은 기쁜지 숟가락을 들어 국을 떠 먹는다.
[이 국은 연잎에 죽순을 넣고 끓였구나.]
홍칠공은 입맛을 쩍쩍 다시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놀랐다. 정말 놀랄 만한 솜씨다. 십여 년 전 황제의 대내어주(大內御廚)에서도
앵두국을 먹어 봤는데 맛이 이만 못했다.]
[그래, 황제의 어주에는 또 어떤 음식들이 있었어요? 제게 말씀해 주시면 어디
한번 만들어 볼 테니 잡숴 보시겠습니까?]
홍칠공은 먹기에 바빠 대답할 겨를이 없다. 거의 바닥이 드러나자 서서히 말문을
연다.
[그야 물론 많지. 그러나 지금 여기서 먹는 음식들만은 못해.]
[칠공, 그래 황제가 청해서 대접을 받았나요?]
곽정이 묻자 홍칠공이 껄껄 웃어 댄다.
[그렇지, 황제가 청해다 대접했지. 그러나 황제는 몰랐단 말일세. 허허허. 어주의
대들보에 숨어 석 달을 훔쳐먹었으니 황제가 먹는 음식 내가 다 먼저 먹어 본
게야. 맛있으면 접시째 갖다 먹었으니까. 어주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귀신이 먹은
줄 알았으니까 말일세. 하하하. 그러나 저러나 자네는 장가 한번 잘 갔네, 복이
많은걸. 음식 솜씨가 천하 제일이야. 젠장, 내가 젊었을 땐 왜 이런 색시 하나
없었는지, 억울하구나.]
황용은 웃으며 곽정과 함께 밥을 먹있다. 황용은 식사 양이 적어 한 공기면
충분하지만 곽정은 네 공기나 먹는다. 반찬이 맛이 있건 없전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그였다. 홍칠공은 국을 한 그릇 다 비우고 배를 문지른다.
[너희 둘이 무예를 하는 줄 내가 벌써 알았다. 제가 얻어먹었으니 답례로 몇 가지
재주나 일러 주마, 나를 따라오려무나.]
호로병을 짊어지고 죽장을 겊은채 앞서 나간다. 곽정과 황용이 그의 뒤를 따라 들
밖의 송림 가운데로 들어섰다. 홍칠공이 곽정을 향해 묻는다.
[그래, 뭘 배우고 싶으냐?]
곽정이 머뭇거리자 황용이 먼저 나선다.
[칠공! 저 사람의 무공이 제게 미치지 못해 늘 화를 내요. 꼭 저를 이기고 싶은
거예요.]
[아니? 내가 언제 화를 내....]
황용이 눈치를 보내자 곽정이 입을 다문다.
[내가 보기에는 내공이 기십 년은 됐는데 너만 못하다니? 어디 한번 둘이 서로
겨뤄 보렴.]
황용이 소리를 지르며 비스듬히 장풍을 날린다.
[이 후배의 재주 미거하오니 잘 좀 지도해 주세요.]
[몇 가지야 못 가르칠 리 있겠느냐? 다 알려 주면 큰일나라구.]
[자!]
곽정이 손을 들어 막는데 황용은 벌써 장풍을 거두고 발을 날려 하체를 공격한다.
[과연 훌륭하구나!]
홍칠공의 감탄이다.
[조심해요. 정말 때리는 거예요.]
황용이 소곤거리자 곽정은 정신을 가다듬고 남희인에게 배운 남산강법(南山掌法)을
쓰기 시작했다. 쌍장이 쉭쉭 바람을 일으킨다. 이 장법은 원래가 오묘하다. 게다가
곽정이 사혈(蛇血)을 마신 뒤 공력이 크게 진보하고 위력이 몇 배나 더 증가했다.
황용은 상하 좌우로 치밀한 방어에 열중이다.
한참 싸우다 황용이 권법(拳法)을 바꾸어 황약사의 독창인 낙영장(落英掌)으로
맞섰다. 어깨가 바람을 타고 춤을 추듯 사면 팔방이 장영(掌影)이요,
오허일실(五虛一實) 혹은 팔허일실(八虛一實), 도원에 광풍이 일어 만화(萬花)가
일제히 쏟아지는 듯했다.
곽정의 눈앞이 어질어질 더 견디지 못하고 퍽퍽퍽 양쪽 어깨, 가슴과 등을
계속해서 얻어맞고 말았다. 황용이 웃으며 물러나고 곽정은 탄복을 했다.
[용이, 정말 훌륭해!]
첫댓글 즐감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