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 요한계시록 강해(96) - 새 하늘과 새 땅
본 문 : 계21 : 1 ~ 8
계21:1~8절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생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두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오늘은 지난 회와 똑같은 본문의 말씀이지만, 주제는 지난 회와는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곧 사망도 슬픔도 눈물도 아픔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절의 말씀만 헬라어 원문대로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계21:1, “καὶ εἰδον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ην καινήν
and I saw heaven a new and earth a new
그리고 나는 보았다. 새 하늘과 새 땅을
ὁ γὰρ πρϖτος οὐρανὸς κὰὶ ἡ πρώτη γη ἀπηλθαν
for the first heaven and the first earth passed away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절의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과 느낌이 드십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는 이야기에 대해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고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여전히 이 땅과 하늘에 대한 미련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고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기독교가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가장 많이 애용되었던 표어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이여 일어나 빛과 소금의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자’가 아닐까 싶네요.
2,000년 역사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영향을 받아 정말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화된 때가 있었나요?”
우리 성도들이 빛과 소금으로 잘 살아내면 정말 세상은 감동받고 변화가 될까요? 정말 의인들의 삶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의인이었던 ‘노아’가 살던 시대에 세상 전체를 물로 심판하신 것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니었을까요?
의인인 ‘노아’를 오래오래 살게 하셔서 (당시는 수명이 수백년이상 살았을 때였다) 그의 빛과 소금의 삶을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기회를 좀 더 주시지 않고 노아의 여덟 식구만을 택하시고 나머지를 전부 몰살시키셨을까요?
지금의 이 세상은 사탄의 권세 아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한 덩어리의 악의 유기체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악의 세상을 우리 성도들의 삶을 통해 변화시키기 위해 빛과 소금의 삶을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성도들의 빛과 소금의 삶을 통해 그 사탄의 권세 아래 놓여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더럽고 불가능한 세상인지를 폭로시켜서 그 사탄과 그의 권세 아래 있는 이 세상을 향한 심판받을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옛것들은 모두 사라질 한시적인 것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이 붙들고 있는 모든 것은 옛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통해 그 옛것들을 놓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해 아래 새것이 없다”(전1: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은 끝날 것이고 반드시 새로운 세상은 올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 땅의 것들에서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떤 한 무리를 허락하십니다.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은 다 내게로 올 것이라 하셨고, 자기에게로 온 자들을 결단코 내쫓지 아니하시고 품에 안을 것이라 하십니다.
요6:37절을 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단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죄를 다 안으시고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죄값을 치르십니다. 그리고는 ‘너희는 자유다’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들이 바로 성도인 교회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 속에 죄의 오염과 부패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옛것에 속한 오염과 부패성을 지속적으로 제거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그 오염과 부패성을 소유한 채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그들의 삶 속에 고난과 시험이 닥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벧전4:12-13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이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시험과 고난은 우리가 죄를 그치게 하는 방법이요,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처럼 옛것을 다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은 옛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맞게 될 것을 성경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65:17-18절을 찾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
그러면 과연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식으로 오게 될 것인가? 여기에 대해 현대 신학은 ‘재 창조설(=완전 소멸설)’과 ‘갱신설’, 이 두 가지 이론을 내놓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즉 ‘재 창조설’과 ‘갱신설’, 두 견해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 창조설’은 지금의 이 땅과 하늘은 모두 다 소멸될 것이며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창조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반면 ‘갱신설’은 지금의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세상이 오지만 그 새로운 세상은 지금의 세상과의 어떤 연속성을 공유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루터교 신학자들은 벧후3:10~13절에 의거하여 ‘재 창조설’을 주장하고 있고, ‘루이스 벌콥’, ‘안토니 후크마’, ‘필립 휴즈’ 같은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갱신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벧후3:13의 “우리는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의 ‘새’것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카이노스’(καινός)입니다.
물론 헬라어에서 ‘새로운’이라는 뜻을 가진 또 다른 ‘네오스’(νέος)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여기의 ‘네오스’(νέος)라는 단어는 시간과 기원에 있어서 전혀 새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카이오스’(καινός)는 본성이나 질에 있어서 새롭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벧후3:13절 나타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카이누스 데 우라누스 카이 겐 카이넨’καινοὺς δὲ οὐρανοὺς καὶ γην καινὴν)은 현재의 하늘, 땅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우주의 출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주와 동질이되 영화롭게 갱신된 우주의 창조를 말하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롬8장에 나타난 바울의 주장에 근거합니다.
롬8:19~23절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여기 보시면 피조물이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23절의 ‘기다리다’(‘아페크데코마이’ἀπεκδέχομαι=to wait eagerly) 는 마치 발꿈치를 들고 기다리는 듯 간절하게 학수고대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처럼 피조물들이 하나님 백성들의 구속을 너무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면, 피조물들이 모두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이 모두 부패에서 자유하게 되어서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완전히 소멸되어 재 창조 될 것이라면, 왜 피조물들이 발꿈치를 들고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될 날을 기다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은 피조물이 다 소멸되고 재창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갱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지금의 우주와 전혀 상관없는 새롭게 재창조된 곳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신자들의 부활한 육체를 생각해 보면 분명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의 우주와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육체를 입고 부활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부활의 몸은 지금의 몸과는 다르겠지만, 지금 이땅을 살고 있는 ‘나’가 부활하는 것이지 전혀 무관한 다른 존재가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활의 몸은 지금의 ‘나’와 연속성이 있는 육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인종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로운 육체적 생명을 입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추적 방법을 통해 볼 때 새 하늘과 새 땅도 이 우주와 전혀 다른 종류가 아니라 연속 선상에서 새롭게 변한 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의 이 땅과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가진 땅이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이유는, 갱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재 창조설’을 거부하는 이유는,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이 땅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흡족해하셨던 이 땅이 사탄의 방해로 완전하게 소멸시켜버릴 수밖에 없는 땅이 된다면, 이는 어떤 부분에서는 사탄이 하나님께 승리를 거두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재 창조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다시 설명을 하자면, 사탄이 현재의 우주와 창조질서를 치명적으로 부패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의 창조세계는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으며, 하나님도 병든 우주를 어떻게 다루실 수 없어서 결국 완전 소멸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결국 사탄이 하나님의 일을 완벽하게 방해한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갱신설을 주장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사탄이 그토록 부패시키려고 힘섰던 바로 이 땅을 새롭게 회복시키고 사탄의 악한 음모의 결과들을 이 땅에서부터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저 역시도 갱신설을 지지합니다.
이제 지금부터는 제 나름대로 오늘의 본문인 계21:1~8절의 헬라어 원문을 분석하여 갱신설을 지지하는 이유를 추가해서 설명을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이 환상 중에 본 “새 하늘과 새 땅”을 줄여서 “새 창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쟁점은 이미 설명드린 바 재창조를 통해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갱신을 통해 이루어지는가입니다. 곧 이미 존재하는 피조물을 없애고 새로운 만물을 만드느냐(재창조) 아니면 존재하는 것을 없애지 않고 새롭게 하는 방식으로 ‘새 창조“를 이루느냐(갱신)인 것입니다.
먼저 1절의 요한이 본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본문과 평행 되는 5절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말씀에 의해 재해석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말씀에 의해 요한이 본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창조‘가 어떤 양상으로 존재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5절의 “보라 내가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한다”, 이 문장에서 ’모든 것들‘(’판타‘,πάντα)는 명사화 된 형용사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본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동사인 “만들다”(‘포이오’,ποιϖ)의 목적어입니다. 〔‘만들다’는 우리 개정개역성경은 새롭게 ‘한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새롭게”(‘카이나’,καινά)는 그 목적 보어로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장의 구조는 모든 영어 번역본(NKJV, NRSV, NIV, NJB)과 한글 번역본(개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공동번역) 등이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의 의미는 새로운 만물을 만드는 재창조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만물을 새롭게 하는 갱신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창조가 아니라 갱신의 의미를 담고 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갱신 사상은 요한계시록에 갑자기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니라 구약과 유대문헌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사야43:19절의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라는 히브리어 성경의 최초의 헬라어 번역본 70인 역에서 “ἰδοὺ ποιϖ καινὰ”(이두 포이오 카이나)라는 문구는 요한계시록 본문과 평행관계입니다.
또한 이사야65:16~25에 보면, 16~18절은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에 대한 내용이고 19~26절은 새 예루살렘에서 회복된 삶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은 서로 유기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사야 11:6~9절을 비롯하여 에스겔 28:25~26절과 34:25~30절 그리고 스가랴1:17, 8:11~12절 등에도 동일하게 회복에 대한 종말적 축복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 본문들의 공통된 특징은 이스라엘의 종말적 회복을 위한 말씀으로서 철저하게 “땅에서” 그들의 일상적 삶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창세기1:1절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을 보면, 우리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천지’ 즉 하늘과 땅 앞에 지시대명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곧 ‘그 하늘, 그 땅’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지시대명사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에트’(‘את‘)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헬라어로 표현하면 ‘ΑΩ’입니다. 곧 처음과 마지막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알파요 오메가 곧 처음이자 마지막’(계1:8)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1:16절에서 “...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창1:1절의 천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하늘과 땅임을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28:18)고 이야기 하고 있고,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인 계시를 전하면서 “땅은 헛되이 창조되지 않았다”(사45:18)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하늘의 권세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땅의 권세를 온전히 드러낼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천지가 예수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해 창조되었는데, 그분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졌는데, 하늘만 회복하시고 땅을 완전히 소멸하고 재창조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행3:20~21절에서는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은 만유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엡1:9~10절을 보면,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시면,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것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아나켑할라이오오’,ἀνακεϕαλαιόω)고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훼손되고 어그러지고 왜곡된 것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 그것을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의 우주와 전혀 다른 우주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우주가 영화롭고 새롭게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갱신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베드로후서(3:10-11)나 계시록(21:1)에서 옛 하늘과 옛 땅이 없어진다는 구절들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이 죄악과 어두움을 상징하는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의 상태가 되듯이,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훼손되고 어그러진 옛 땅의 삶의 원리와 그 원리가 토해낸 역사가 완전히 물러간다는 의미에서 ‘옛 하늘과 옛 땅이 사라진다’ 싱징적 의미를 담아 ‘불에 탄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하나님의 질서와 평화를 깨뜨릴 어떤 요소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그곳은 지금처럼 자연계가 있고 문화가 있으며 육체를 지닌 자들이 누릴만한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화란의 조직신학자인 ‘루이스 벌콥’은 “현재의 생활 중에서 인간 존재를 자유케 하는데 공헌한 것들은 무엇이든지 새 땅에 그대로 유지 보존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천국은 결코 신선처럼 구름 타고 날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계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사실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면보다는 구원받은 성도의 상태에 더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새 하늘과 새 땅’은 미래의 어느 날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질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곳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밝혀 두는 것은 ‘지금 이 가시적인 역사와 이 처음 땅 처음 하늘 아래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미 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후5: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의 상태에서 ‘there is something new under the sun’의 상황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영적으로 우리 가운데 와 있으며 우리 새사람들은 그 하나님 나라를 ‘엣 하늘 옛 땅’(계21:1의 표현대로 하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이미 새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고, 그것은 사망도 없고 애통함도 없고 곡하는 것도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 성도들이 구원받는 순간 이미 하늘나라에 앉아 있다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2:5~6절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렇게 성도들은 이미 영적으로 하늘에 앉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사야65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야기도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세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65:17~18절을 보면,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여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도 오실 메시야를 소망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시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임할 것이라는 것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의 예언은 장차 올,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메시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 속에 구현되게 될 이 땅에서의 삶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적으로 이 옛 하늘과 옛 땅 안에서 이미 시작이 된 것입니다.
골:13~14절을 보지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여기에도 보면,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 나라에 속해 있을 때에는 세상 법과 질서인 ‘나의 이익과 힘의 원리’로 사셨지만, 이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다음에는 그 아들의 나라의 법과 질서인 ‘나의 희생과 내 이웃의 유익,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새로운 법과 질서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 삶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 나라의 삶인 것입니다. 이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은 ‘언젠가 오게 될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좋은 나라’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새 나라의 원리와 질서로 살고 있는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 이미 시작된 나라임을 동시에 상징하는 것입니다.
제가 재차 강조하고 있지만, 천국을 공간적 ` 물질적 개념의 그림만을 그리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주의의 공간적 이원론이며 기독교의 이단 무리 ‘영지주의자’들의 천국관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시간적 이원론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제가 오늘 이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영적으로 임했다는 것을 강조하여 설명을 했는가 하면 오늘 본문 계시록21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것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21:2절을 한 번 더 읽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여기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합니다.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여러 강해를 통해 설명드린 것처럼 교회공동체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교회공동체는 여러 가지 다양한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하늘에서는 승리한 교회공동체로 그리고 지상에서는 전투하는 교회공동체로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 교회공동체가 하늘과 땅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적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중적 성격을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에덴(창조)의 회복을 진행해 가는 구속의 역사 과정에서 잃어버리기 전 에덴처럼 하늘과 땅이 상통하는 환경을 구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를 감행하셨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성전입니다.
성전의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그 언약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있는 성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지상에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성전은 하늘과 땅이 접촉하는 유일한 공간이고 에덴이 회복되는 영역이며 표징인 것입니다. 이제 성전의 성취로서 예수님이 오셔서 지상에 진정한 성전을 세워주셨고 창조의 회복 곧 새 창조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새 창조를 이루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고후5:17)입니다. 이 새 창조는 이 세상에 하늘의 환경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새 창조는 완전히 완성되지 않았고, 이 세상에 잔존하는 악의 세력은 여전히 그 영향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도인 우리들도 여전히 그 영향력의 환경 속에 발을 딛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공동체가 이중적 특성을 갖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중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교회공동체는 승리한 하늘의 모습뿐 아니라 고난을 당하며 악의 세력과 싸워야 하는 전투하는 교회로서 사명을 잘 깨닫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전투하는 교회로서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타락한 옛 하늘과 옛 땅의 질서와 원리에서 벗어나 자신이 낮아지고 비워지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원리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에덴의 완성의 순간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으로 이 땅의 모든 악의 세력들은 사라지고 하늘과 땅은 새롭게 되므로 새 창조가 도래하여 이 땅과 하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고 에덴의 온전한 상태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의 소망의 진정한 축복을 다 받아 누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첫댓글 새하늘과 새땅' 말씀감사~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 부터 내려옴'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