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로 따로 안내방송은 없었다.
영후는 오도카니 자신의 '외양간'에 준비된 책상과 의자를 뒤적이다 의자에 앉았다.
아무 일도 없이 한참을 멍하게 있노라니 졸음이 몰려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
이렇게까지 긴장을 풀어도 되는건지 내심 걱정이 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게 눈꺼풀임을
영후는 잘 알고 있었다.
팔을 베개삼아 깜박 잠이 들었을 무렵, 촤라락 교실문을 여는 소리에 영후는 상체를 벌떡 일으킨 뒤
입가에 고인 침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송아지, 염소랑 거위가 좀 보재."
문에 기댄 채 서있는 건 암탉이었다.
영후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켠 뒤, 암탉을 따라나섰다.
폐교의 건물 구조는 매우 단순했다.
2층으로 이뤄진 건물의 1층에는 교무실, 양호실, 과학실, 준비실, 교장실로 썼던 장소와
교직원용 화장실로 보이는 남, 녀 화장실 각 1개씩이 비치되어 있었다.
정문 들어오는 길에는 동전교환기같이 생긴 기계가 하나 놓여져 있었고, 교직원용 신발장이 초라하게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2층 맨 끝에는 음악실과 독서실로 보이는 장소가 각각 위치해있었고, 그 외에는 전부 교실로 이뤄져 있었다.
화장실은 좌우 5칸씩 비치된 남녀 화장실이 중간에 있었다.
'외양간'은 독서실과 맞닿아 있는 교실로 학교 밖에서 정면으로 보면 2층 왼쪽 첫번째 교실이었다.
영후가 암탉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자 그 곳엔 흰색 밴에 탔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정문에 있는
교직원용 신발장 앞에 모여있었다.
"여, 어서와."
노란 머리와는 달리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안경을 쓴 거위가 영후와 암탉을 반겼다.
염소는 비니를 조금 더 내려쓴 듯이 보였고, 염소의 맞은 편에서 갓 스무살이나 되었을까한
눈을 가린 검은 뱅머리의 어린 사내가 염소와 같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단 서로 얼굴이나 익힐겸 내려오라고 했어. 괜찮지?"
거위의 말에 영후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염소 맞은 편의 어린 사내가 영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 뻐꾸기예요."
"아...난 송아지."
마주잡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길게 자른 검은 뱅머리 사이로 살짝 드러난 눈이 매우 반짝였다.
꼭 무언가 꿰뚫어 볼 것만 같은 녹록치 않은 눈빛에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이름 붙이자면 브레인 타입이라라까.
"동갑처럼 보이는데, 형이죠?"
"으,응. 그럴 거야 아마도."
뜨듯미지근한 내 대답에도 뻐꾸기의 눈은 미소지었다.
나를 보며 뭔가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왠지 싫은 느낌에 영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떠벌거리기는 해도 뒤끝없고 활기찬 암탉이 나았다.
경험상 이런 사람들은 '음험한' 경우가 많았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상대방의 배를 찌르는 '구밀복검'형이랄까.
"이 형은 종달새예요."
뻐꾸기가 자신의 뒤에 서있는 종달새를 소개했다.
종달새의 인상은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주저앉아서 흐릿했다.
뭔가 미미한 존재감이 강렬한 뻐꾸기의 인상과는 극명하게 대립되었다.
종달새는 특별히 악수를 청하지는 않고 고개만 까닥 움직여 목례로 인사를 마쳤다.
자신감이 결여된 눈빛이 불안과 초조를 불러일으키는 탓에 오래 두고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종달새는 흰색 밴에 탄 사람들 중 가장 작은데도 자신보다는 키가 커 보여서 입맛이 쓴 영후였다.
결국 여기서 가장 키가 작은 사람이 영후로 낙점된 순간이었다.
운동장에서 두 사람의 인영이 뛰어왔다.
두 사람 모두 키가 컸는데 한 사람은 호리호리한 인상이고 전체적으로 마른 느낌인 반면
다른 한 사람은 키도 크고 얼굴도 크고 체구도 전체적으로 큰 느낌이었다.
하지만 염소와는 달리 물렁 물렁해보이는 인상이라 별다른 긴장감을 주지는 못했다.
"이쪽 형님이 고양이예요."
호리호리한 쪽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호호 웃었다.
"누님이라고 부르라니깐."
"아직 성전환수술 전이라면서요."
"여기서 나가면 바로 수술할 거야."
가감없는 뻐꾸기의 말에 부끄러운 것인지 뻐꾸기의 어깨를 세게 치는 고양이의 모습에
영후는 바싹 얼어버렸다.
"어머, 싫다. 동생 표정이 너무 딱딱해."
그러면서 영후에게 다가오는 고양이의 손길에 영후는 잔뜩 겁을 먹었다.
이런 류의 인종은 처음이다보니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눈을 질끈 감자 어느 틈엔가 암탉이 다가와
고양이의 손길을 걷어냈다.
"이쁜 누님, 남의 것에 침바르시는 거 아닙니다."
암탉이 영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능글거리자 고양이도 한발 물러났다.
"임자있는 동생이었나보네. 아쉽다."
정말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고양이를 보자 영후는 다시 한번 그대로 얼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저는 강아집니다."
안경.
여드름.
떡대.
그리고 귀두컷.
이 4가지의 조합으로 완성되는 완벽한 오덕포스.
하지만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숨을 몰아쉬거나, 뭐뭐했냐능...따위의 말투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멀쩡한 말투에 게다가 선한 눈빛에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여기서 그가 나이는 제일 많아 보였다.
"저는 송아지예요."
간단하게 모두 인사를 마치자 과묵한 염소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선 불가침협정을 했으면 좋겠는데."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그의 말에 먼저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은 고양이였다.
"어차피 게임 속에서 벌어질 일들이나 벌칙들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우리끼리 감정적으로
서로를 해치거나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해."
"그리고 하나 더요."
염소가 부가설명을 더하자 뻐꾸기가 말했다.
"혹여나 '주인'이 벌칙을 내렸을 때, 아무런 사적인 감정없이 그냥 따르기로 해요. 그게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일테니까요."
"글쎄...어쩌면 벌칙보다 '도축'이 나은 경우도 있을 수 있잖아."
뻐꾸기의 말에 그닥 밝지 않은 암탉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암탉의 표정은 평소의 활발했던 성격이나 행동 등에 비추어볼 때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진지한 모습을 할 때도 있다니. 정말이지 놀라버렸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일단 살고봐야 하잖아요."
뻐꾸기의 응수에 암탉은 특별히 더 할말이 없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거위가 대신해 답했다.
"그건 그때가서 우선 벌칙내용을 모두에게 공개하고 이후의 판단은 벌칙당첨자 당사자에게
맡기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벌칙공개라니...아무도 몰래 해치워야하는 비밀 벌칙일 수도 있잖아요. 만약 그렇다면 벌칙당첨자가
너무 불리한 것 아닐까요?"
뻐꾸기의 말에 종달새와 고양이가 납득이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까지는 좀 그래. 우리가 서로를 강제할 이유는 없잖아. 그저 일반적인 불가침조약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말을 잇는 암탉의 표정이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의 표정을 보며 순간 안도하게된 영후는 왜 자신이 암탉의 표정에 계속 신경이 쓰이는지 몰라
스스로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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