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오늘의 가사문학> 겨울호에 실린 글
광산초등학교 김병식(金竝埴) 교장 선생님 송별사
양진해(楊鎭海)1906~1969)
모이고 흩어짐이 정한 태도 없는 것은 구름의 종적이요 기쁘고 슬픈 것이 조석으로 다른것은 인간의 봉별이다.
구름변태 무상함을 조금도 웃지말게 인사변천 무상함도 구름과 일반이다.
창해일속(滄海一粟) 우리 인생 미만백년 일생이라
별리변천 없더라도 초로인생(草露人生) 못면하고 부유인세(浮遊人世) 그 아닌가.
역로상(驛路上) 연로정(燕勞亭)이 이 집이 아니어늘 양관일곡(陽關一曲) 별리한(別離恨)이 오늘날이 웬일인고.
아아! 참 섭섭고도 가엾어라. 떠나는 군이여! 군이여! 과거를 추억하니 꿈 아닌 꿈이로다.
복잡다단 경력사를 대강 기록 하여보자.
해방된 월명년(越明年)에 본교로 전임되니 퇴창파벽(頹窓破壁) 문자대로 이름만 학교로다
사회정세 살펴보니 무주강산 가련일세.
경향을 막론하고 층생첩출(層生疊出) 하는 정당 구왈여성(具曰予聖) 투쟁이라.
방방곡곡 외친소리 좌익이니 우익이니 삼천만을 망라하니
사회는 혼돈이요 인심은 번복이되 초연특립(超然特立) 군의 의지 추호도 변함없이 일념 교육 뿐이로다.
아동을 모집하고 부형을 회합하여 교풍을 고취하고 학열을 격동하여 교육이 여전하니 그 아니 거룩한가.
교사 증축 발론하여 기성회 조직하고 당국에 연락하여 인가보조 받아내어
경지영지(經之營之) 하올 적에 그 노고 그 심려를 어찌다 형언하리.
불일성지(不日成之) 준공하니 찬란한 새교실은 지방의 화채(華彩)로다.
낙성식 거행일에 원근으로 모인 손님 대공사 대사업을 뉘 아니 찬양하리.
농산어촌 우리 지방 생활도 빈약할 뿐 교통조차 불편하여 수많은 졸업생이 진학할 길 바이없어
교육의 기갈상(飢渴狀)을 절실히 통감하여 공민중학 필요성을 지방에 선전하고 당국에 교섭하여
불면불휴 주선으로 본교에 부설하니 빈곤한 졸업생들 열광적 책을 끼고 구름같이 모여드네.
신성한 그 교편을 두 손에 갈라쥐고 초 중학을 겸교(兼敎)하니 진실한 교육자요 위대한 사업가라.
혼구(昏衢)에 촛불이요 미진(迷津)의 뗏목이다 뒤 떨어진 우리 학구 얼마나 약진인가.
호사(好事)는 다마(多魔)인지 육이오 대동란은 동족상잔(同族相殘) 웬일인가?
남부여대(南負女戴) 피란갈 제 찬산도곡(竄山逃谷) 망명(亡命)하고
초행노숙(草行露宿) 수개월에 복귀령(復歸令)을 반겨 듣고
고장을 찾아와서 본교를 살펴보니 조석 출입 하던 교실 황량한 재 뿐이라.
울어볼까 웃어볼까 긴 한숨 뿐이로다. 막비천운(莫非天運) 소위오니 수원수구(誰怨誰咎)한탄하리.
백절불굴(百折不屈) 굳은 심지(心志) 또 다시 시련인가.
흉중(胸中)에 가진 포부 발양(發揚)할 시기로다. 두팔을 힘껏 뽑아 용감히 출각(出脚)하여 지방을 일주하니
가련한 전화여생(戰禍餘生) 수화도탄(水火塗炭) 허덕이니 운외청산(雲外靑山) 교육이라.
돌변한 이 인심을 가유호세(家遊戶說) 곡진(曲盡)하여 교육성 향학열을 필사적 환기하니
우매(愚昧)한 우리들도 목석이 아닌 이상 뉘 아니 감화하리.
일제 아동 취학하나 노천 교수 난감이네. 뒷동산 잔디밭과 앞들판 백사장은 원시적 교실인가.
막천석지 넓고 넓어 공기야 좋다마는 궂은 비 찬 바람에 그 난관 그 고통을 어찌 다 말하리오.
교사 건축 시급하나 자금이 문제로다 빈약한 우리 학구 낙동강 전선지라.
전적전재(戰跡戰災) 참혹함은 남한에서 제일인데
설상에 가상으로 대흉년 대 殺年이 연거퍼 위협하니 공사간(公私間) 모든 공사 일체 중지 하였으니
하물며 우리학구 감불생심 이 시기에 나폴레옹 역량으로 불능(不能) 이자(二字)삭제하고
회의를 개최하여 재건공사 결론하고 당국에 호소하여 외자재 보조로서
건벽돌 개량식을 풍구전치(風驅電馳)추진할 제 금전수납 출장이며 인부출역 독려차로 불분주야 그 아닌가?
성주산 눈바람에 손발 얼어 벌어지고, 음달산 저문 비에 의복 몰첨(沒沾) 예사로다.
낮이면 교편생활 밤이면 공사장부 천신만고 극복으로 오늘날 이 교실이 옛 터에 다시서서
우리들의 자녀들이 노천교수 풍설고(風雪苦)를 영영히 면케되니 이 모두 뉘 덕이냐.
오직 군의 피땀 흘린 결정이요.성열모은 금탑일세.
혁혁한 그 공적과 위대한 그 사업을 무엇으로 보답하며 코흘리던 우리 자녀 애지중지 양육하여
어로(魚魯)를 분별하고 동서남북 알게되어 앞길을 열어주니여천여해(如天如海) 그 은덕은 차생(次生)에 난망이라.
아! 떠나는 군이여! 군이여! 과연 광산학교를 뒤에 두고 떠나고 말 것인가?
뒤를 매어 못 간다면 쇠사슬도 구할테요 앞을 막아 못간다면 만리성도 쌓으련만 세막내하(勢莫奈何) 어이하리.
학교야 물어보자. 운동장의 포풀라며 정원의 각종 화초 일초일목 빠짐없이 뉘 손으로 심었으며 뉘 손으로 자랐느냐?
주인공 김교장은 오늘로 떠나신다. 지능감각(知能感覺) 없는 목석 말없이 묵묵하나 슬픈 태도 완연하다.
옛글에 하였으되 장부가 비무루(非無淚)나 불쇄이별(不灑離別) 일렀으니 별리한(別離恨)이 너무 길면 가는 심회 불평이네.
다시 한 말 부탁함은 이제부터 나아가면 양양전도(洋洋前途) 활무대(活舞臺)라.
뛰어난 고재박식(高才博識) 사회에 발휘하고 무쌍한 염결청백(廉潔淸白) 관계(官界)에 수범(垂範)하고
학불염 교불권(學不厭 敎不捲)은 교육계를 지도하여 이 국가 이 사회를 널리 교화하시면
동량주석(棟樑柱石) 그 아니며 위인달사(偉人達士) 그 아닌가?
금의환고(錦衣還古) 하는 날에 다시 단락(團란)하여 보세.
별리한(別離恨)을 다 하려면 만권지부족(萬券紙不足)이나 되지 못한 두어 말로 석별정(惜別情)만 표시하네.
단기 4287년(1954년) 3월 17일
광산학교 학부형 일동 근정
양진해 선생 약력
양진해楊鎭海(1906~1969)는 청주양씨淸州楊氏집성촌인 경남 창녕군 유어면 광산리에서 부친 양서주楊緖周와 모친 배효덕裵孝德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조부 양종욱楊鐘郁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천성이 영민하여 젊은 시절부터 향리에서 명망이 높았고 고매한 인품과 학문으로 창녕향교의 전교로 추대된 바 있으며 1955년 이후 대구에 거주하면서 한의원을 경영하였다.
처가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백산 안희제安熙濟의 생가 마을인 경님 의령군 설뫼이며 부인 안경한安慶漢도 어릴 때 규방가사를 읽으며 자랐기에 딸에게 꼭 붓글씨 편지를 써 보냈는데 딸인 양계향楊桂香은 「어머니의 궁서편지」란 시조를 써서 제24회 ‘현대시조문학상“을 받은 시조시인이다.
양진해의 여러 글은 6.25 전쟁으로 집이 불에 타버려 없어졌고 그의 붓글씨는 고향에 선대의 묘비 비문으로 몇 점 남아있다. 이 송별사는 글의 주인공 김병식金竝埴교장이 광산학교에서 교장 초임으로 7년을 근무하고 1954년 창녕군 교육청 장학사로 전보되었을 때 사친회장이던 필자가 쓴 것으로 길이 1m가 넘는 붓글씨 두루마리인데 그의 딸 양계향이 수소문하여 김교장의 후손과 연락이 되어 글을 쓴지 66년 만인 2020년이 친필 원본을 찾게 되었다.
한편 김병식(1016~1984) 교장은 광산光山초등학교 학구내인 창녕군 유어면 풍조리 출신으로 진주사범학교 심상과를 졸업하였고 교장 초임인 광산초등을 시작으로 창녕군내의 여러 초등학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제1회 경남교육대상을 수상하는 등 초등교육에 진정으로 열과 성을 다한 훌륭한 교육자였다,
66년 만에 찾은 아버지의 친필 송별사 楊桂香 아버지께서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사친회장을 하셨는데 우리집은 내가 중학교 입학하던 해 대구로 이사를 갔다. 내 나이 40 무렵에 시골 고향에 갔다가 교육청 학무과장님으로 계시던 교장선생님을 찾아 뵈었는데 이야기 도중에 그 송별사에 대하여 여쭈어 보았더니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계신다면서 빌려 주셔서 복사하고 원본은 돌려 드렸다 교장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 글은 광산학교 재직 10여년의 산 역사이므로 소중히 간직 하였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관 속에 넣어 가지고 가겠다' 고 하시면서 나에게는 '여성 페스탈로지가 되고 오늘의 신사임당이 되라' 고 편지에 쓰셔서 항상 그 말을 잊지않고 있다. 나는 초등학교 때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이나 명심보감 등을 배워서 한자를 조금 읽을 줄은 알지만 송별사에는 어려운 한문 문구가 많아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한자를 잘 아시는 분들에게 여쭈어도 잘 모른다고 하여서 내가 이 글을 되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컴퓨터로 치면서 한자는 괄호 속에 넣고 한글 옛날 철자법이 틀린 것은 바르게 고쳤다. 해석은 힘들었지만 이 글을 붓으로 쓰실 때 옆에서 구경하는 어린 나에게 설명을 해 주셨던 기억을 되살리고 컴퓨터로 검색하여 부족하나마 해석을 하였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그 시절 진주사범학교 심상과를 졸업하셨는데 머리가 비상하고 오로지 학교만 생각하셨던 '창녕의 페스탈로지'라 불렸던 분이셨다. 70년대 말 교장선생님께서 <제1회 경남교육대상>을 받으셨는데 나는 그때 마산에서 근무 할 때라 신문을 보고 알게되어 시상식장에 가니 가족들에게도 상 받으신다는 것을 알리지 않아 가족석이 비어 있어서 놀랐지만 원래 교장선생님은 자기의 좋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잘 알리시지 않는 분이셨다 교장선생님 세상 떠나신 후 그 글이 어떻게 되었나 궁금하였는데 얼마 전 우연히 그 가족되시는 분과 연결이 되어서 전화로 물어보니 보관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에게는 아버지의 친필이 한 장도 없는데 그 댁에 그 글이 있는 것 보다는 내가 보관하는게 더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면서 나에게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보내주어서 너무나 고마워 정성을 담아 사례를 하였다. 나는 읍에서 20리나 떨어진 창녕의 楊가 집성촌에서 자랐고 우리집이 종가집이라 고조할아버지께서 통정대부 벼슬을 하셨기에 4대까지 제사를 모시던 시절이라 고조할아버지 제사날 임금님께서 내리신 교지와 갓끈과 도포끈 등을 어린 나에게 보여주셨고 이항녕 전 홍대 총장님께서 해방 전 창녕 군수를 하실 적에 같이 시를 논하시기도 하셨다고 하셔서 이총장님의 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후 6.25 전쟁 때 우리집이 전소하여 선조의 유품들을 비롯하여 아버지의 시문 등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는데 이 글 한 편을 찾게되니 처음으로 딸 노릇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의 글씨 한 편이 나의 최고의 보물이라 생각이 된다. 내 카페에 실어둔 이 글을 가사문학에 관심있는 교수님께서 보시고 담양에 있는 한국가사문학관에 보내기를 바라기에 표구하여 보내드렸는데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본산인 그곳에 아버지의 글이 게시된다는 것은 나에겐 큰 자랑이다 송별사 붓글씨 두루마리는 아주 길기도 하고 오래되어 구겨지고 누렇게 면색되어서 잘 꾸며 내 방에 걸어 두었고 어머니께서 아주 오래전 보내주신 궁서편지를 의 붓글씨 편지는 오래 전부터 표구해서 걸어 두었기에 내 서재의 한쪽에는 어머니의 편지글이 그 옆에는 아버지의 '교장 선생님 송별사'의 친필 글씨가 걸려있다. 또 거실에는 전 부터 걸어 두었던 서예가인 언니의 매화 그림이 걸려있으니 모두 이 세상을 떠난 분이지만 가족들을 매일 가족회의를 하는 기분이라서 행복에 젖어있다. |
첫댓글 김병식 교장 선생님은 창녕군지편찬위원으로 활동하셔서 창녕군 향토사 정리에 심혈을 기우리신 분입니다..
창녕교육청 학무과장을 비롯해 창녕교육에 큰 족적을 남기기도 하셨습니다.
창녕군지(1984년 간) 편찬 때 많은 자료를 제공하시고 원고 교정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셨지요.
책이 출간되기 직전 돌아가셔서 출간된 창녕군지를 들고 편찬위원 여려분이 묘소에 책을 올리고 성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니 고인의 생각과 그리움이 절로 납니다.(김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