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목적이어야지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어느 고등학교 윤리 교사가 칸트의 이 명언에서 ‘목적’과 ‘수단’에 가로를 시험문제를 냈다. 답안지에는 이런 답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어야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해가 안 되면 외우라라는 경구가 지배하는 한국 교실이 낳은 쓸쓸한 풍경화의 하나다.
<프랑스 고교철학>(정보여행)은 프랑스의 고교 철학의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다. 프랑스 고등학교 철학 교육의 수준은 국내에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그 교과서의 전문이 한국에 처음으로 번역돼 나온 것은 1996년 7월이었다. 프랑스에는 국가 검정 교과서가 없다. 철학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 대비하기 위한 교과서가 10여 가지 있는데, 당시 번역돼 나온 앙드레 베르제와 드니 위스망이 함께 지은 <프랑스 고교 철학>은 비교적 균형잡힌 시각에서 철학 전반의 문제를 짚고 있는 대표적인 교과서 가운데 하나다.
바칼로레아에서 철학은 불어나 프랑스 역사보다도 비중이 높고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 문제로도 유명하다. “명백한 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알기 위해, 상상은 어느 정도까지 필요한가?” “행복은 모든 행동의 목적인가?” “이성은 미개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경계선을 규정할 수 있을까?” “정신적인 무의식은 자유와 공존할 수 없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정답은 없다. 프랑스에서 정답을 요구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다만 문제에 대해 정합적이고 논리적인 일관성을 가진 설명을 하거나, 문제에서 제시한 철학자들의 진술을 이해할 수 있는 사고력을 갖췄는지를 평가할 뿐이다.
<프랑스 고교 철학>은 한국의 고등학생뿐 아니라 일반인이 읽더라도 인간·세계·문화·종교·가치·시간·공간·실존·죽음·지능·착각·감정·흥분 등 폭넓고 다양한 철학적 주제에 대해 반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재료를 풍부하게 제공한다. 2권부터는 각 장의 끝에 바칼로레아에 출제됐던 문제와 연습문제를 덧붙였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구조>,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 마거릿 미드의 <오세아니아의 풍속과 성>,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이미지와 상징>,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입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 등 참고도서 목록에 있는 고전도 프랑스 고교 철학의 수준을 가늠하게 해준다. 벨기에 루빙대학교에서 형이상학을 전공한 당시 경희대 남기영 교수(철학)가 원본의 체제까지 존중하며 섬세하게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