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도 되겠습니까
한영수
파란시선 0102 ∣ 2022년 8월 1일 발간 ∣ 정가 10,000원 ∣ B6(128×208) ∣ 122쪽
ISBN 979-11-91897-24-1 03810 ∣ 바코드 9791191897241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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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 소개
어지럽고 아름다울 때까지 정오에 닿을 때까지
[피어도 되겠습니까]는 한영수 시인의 네 번째 신작 시집으로, 「피어도 되겠습니까」, 「김밥 할머니」, 「이야기는 계속된다」 등 49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인 「피어도 되겠습니까―동백」에는 불안한 존재가 그 불안을 뚫고 꽃을 피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충만하다. ‘동백’에게 불안은 꽃을 피우기 위해 감당해야 할 무엇으로 작용한다. “순간 쏟아질 한 사발 피”로 상징되는 동백꽃의 외형은 불안이 야기하는 긴장을 시각적으로 그려 낸다. 그것은 “아름다움”으로 붐비는 결정이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더 완고한 빨강에서/베어 문 빛깔”로 승화시키는 능동적 의지의 양태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양태는 시인의 시 쓰기와 결합하여 시인의 존재 증명을 추동해 간다. 다시 말해 ‘동백’으로 상징되는 시인의 발화는 ‘동백’의 양태를 그대로 모사하는 데 있지 않다. 현실의 모사를 넘어 “빨강의 내부를 열고/들어가 더 완고한 빨강”을 마주하는 일, 그로 인해 현실에 “지배받지 않는” 존재로 시인을 자리하도록 이끈다. 그럼으로써 저 선명한 “빨강”은 무엇으로도 “지배받지 않는/단어”가 되고 “겨울로 격리된/심장 한 덩이”는 시인이 쓰는 시에 대한 메타포로 현전케 한다. 그런 점에서 “피어도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물음은 시련을 뚫고 꽃 피우려는 ‘동백’을 전유한 시인의 시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시인의 책무는 안온함으로 은폐된 세계의 균열을 폭로하고 그 위태로움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여 이를 형상화해 고통받는 이들의 곁에 나란히 서는 데 있다. 시인은 시를 통해 현실의 억압이 야기하는 고통을 구현함으로써 나와 네가 결속하여 저항의 거점을 마련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차원으로 우리를 옮겨 놓는다. 이러한 전환의 메커니즘은 시적 주체, 더 나아가 삶의 주체로 하여금 무엇으로도 “지배받지 않는” 강한 생의 의지를 고양시킨다. “변방을 두드려” 대며 “아우성치”는 “눈발이 때를 맞추는” 겨울, 고립되고 고독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신할 “단어”를 발화하며 “넘쳐도 되”는 폭발의 기제를 마련하여 미지의 가능성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무위의 되풀이”. 현재의 고통을 감당하며 “꽃을 가진 겨울”과 “겨울을 가진 꽃”의 이후를 상상하는 일. 한영수 시인이 펼쳐 보이는 시적 감각은 불안한 현재와 그 고통에 침윤하여 이를 바탕으로 “단단한 패배를 키워” 내는 한편 그것을 낙담으로 전락게 하지 않음으로써 “무너지는 힘으로 다시 피”어 오르는 삶을 향해 있다. (이상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이 시집 [피어도 되겠습니까]를 어디서부터 읽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집 제목과 같은 제목의 시를 찾거나 아무 데나 펼쳐랏, 하지 말고 「서과투서」부터 보기 바란다. 거기에는 팔순의 겸재가 보는 담박하고 넉넉한 세계가 있고, 그걸 염화미소 하는 시인이 있고, 무엇보다 쥐와, 겸재와, 시인이 ‘우주의 한쪽을 갉작이는’ 천진한 모습이 시원한 수박의 맛으로 펼쳐진다. 진경이다. 단연코 한영수의 쥐 두 마리가 겸재의 것보다 생생하게 그려져 있을 것이다. 저 ‘갉작임’의 질감 속에 다 들어 있다. 이제 시 읽을 맛이 생겨 입맛을 다시고 있다면 시인이 두 번이나 공을 들여서 완성한 「이름」을 보자. 너른 바다를 향해 흘러갈 때는 몰랐던 강물의 유전이 돌아보면 이리도 굽이굽이 구부러져 있다. 사랑에 이끌리고 인정에 울고 써럭초와 탁주발에 맥을 놓았던 한 사람이, 비스듬한 웃음으로 이름도 없이 생을 건너가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유순이’의 삶으로부터 몇 걸음 더 갈 수 있을 것인가. 사소한 꽃말에도 오래 마음을 주고, 대체로 마음을 주는 일에 소명을 걸고 있는 시인에게 왜냐고 묻지 말자. 산 밑에 사는 아이가 징검다리를 건너야 학교를 가는데, 하늘을 뒤덮는 비구름을 보고 걸음이 바빠지는 것처럼 이 삶은 같은 길도 더 성의껏 건너야 하는 생이 있었던 것이다.(「조용한 사람」) 거기에 체온보다 높은 공기 속에서 오 층 계단으로 배달품을 올리는 어느 택배회사의 시시포스가(「고독이 온다」), 세상은 잠들었는데 세상을 돌리다가 발전기로 끌려들어 간 김용균이(「비극이 이름을 얻을 때」), 자신은 최소한으로 먹고 자면서 김밥을 팔아 모은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부한 김밥 할머니가(「김밥 할머니」), 그리고 가진 것이 없어서 꿈에 더 많이 개방되었던 신접살림을 산 시인의 한 시절이(「유르트」) 있을 것이다.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느 방향으로 읽어 나가든 거기에는 제 생을 온몸으로 살아 내는 존재들의 소리 없는 울음과 웃음이 있다. 그의 정신이 소월과 닿고 백석과 함께하고, 고흐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이 삶을 완성하는 것은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현승(시인)
•― 시인의 말
백 년보다 긴 밤이 있다
보란니부란니, 눈보라 역으로 가는 밤이 있다
어쩌다 지나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기차를 기다리는 밤이 있다
하염없는 가능과 하염없는 불가능 사이 어디에서
분수처럼 솟구치다 순간 무너지는 밤이 있다
무너지는 힘으로 다시 피는 밤이 있다
무위의 되풀이, 그걸
너를 부르는 높이라고 적는
오늘 밤이 있다
•― 저자 소개
한영수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2010년 [서정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케냐의 장미] [꽃의 좌표] [눈송이에 방을 들였다] [피어도 되겠습니까]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누구나 있어서 누구도 없는
선정릉 – 11
조용한 사람 – 12
외로워지는 사람들 – 14
황금가지 – 16
왼 손바닥엔 앙가라강이 – 18
휘파람 – 20
적과의 동침 – 24
비밀 – 26
식물 살자 – 28
책에게 구걸하다 – 30
좌표 이탈 – 32
제2부 하나 둘 셋을 셌다
옛돌박물관 – 35
피어도 되겠습니까 – 36
유르트 – 38
별이 빛나는 밤 – 40
중심 – 42
행간 – 44
고독이 온다 – 46
스리랑, 카인의 죄 – 48
비극이 이름을 얻을 때 – 50
조나 – 52
겨울 화분 – 54
코로나 시대의 사랑 – 56
제3부 모과꽃 떨어진 물에 발을 씻고
모과꽃 떨어진 물에 발을 씻고 – 61
조금 붉어라 – 62
역병 제국 – 64
육십령 – 66
멸치들의 함성 – 68
호랑거미입니다만 – 70
여기가 로두스다 – 72
호우 – 73
물 축제 – 74
김밥 할머니 – 76
이름 – 78
박막달 씨의 기차 – 80
호수에서 사흘 – 82
제4부 어지럽고 아름다울 때까지
비처럼 음악처럼 – 85
오늘의 커피 – 86
이야기는 계속된다 – 88
산곡리 – 90
서과투서 – 92
땅 세 평 – 94
슬픔도 둥글게 늙어 가는 – 96
별리, 2005 – 98
먼 데 사람 – 100
섬 – 101
나물하다 – 102
가을 우체통 – 103
목격자 – 104
해설 이병국 무너지는 힘으로 다시 피는 삶 – 105
•― 시집 속의 시 세 편
피어도 되겠습니까―동백
충분히 불안합니다
순간 쏟아질 한 사발 피에
아름다움이 붐빕니다
빨강의 내부를 열고
들어가 더 완고한 빨강에서
베어 문 빛깔로
지배받지 않는
단어로
꽃 피어도 되겠습니까
겨울로 격리된
심장 한 덩이
변방을 두드려 댑니다
아우성치며 눈발이 때를 맞추는
이런 밤에
이런 밤에
꽃을 가진 겨울에 대하여
겨울을 가진 꽃에 대하여
한마디 넘쳐도 되겠습니까 ■
김밥 할머니
낙원역 1번 출구에 쪼그려 앉지 마세요
밤을 새워 제방의 구멍을 막은 소년의 팔목 같은
김밥을 말지 마세요 한 줄에 천 원짜리
새벽부터 팔아서 통장에 쌓지 마세요
죽으면서 일억 원 기부하지 마세요
전 재산을 내놓지 마세요
머릿수건 없이는 웃풍을 이기지 못하는
단칸방에 혼자 눕지 마세요
가난의 총탄을 맞았구나,
아프다 아프다,
비명을 지르세요
외롭다, 춥다, 늙은 몸에게
따뜻한 국밥을 먹이세요
팔다 남은 차디찬 김밥
프라이팬에 데워 먹지 마세요
색깔 고운 목도리도 한 장 두르세요
가난이 가난을 구한다네,
낙원을 세우지 마세요
밑가지째 꺾여서도 꽃봉오리 올리는 생강나무처럼
노란 얼굴로 앞장서서 봄을 피우지 마세요
게으름을 피우세요 노인정에서
백 원 내기 화투 놀이도 하세요
부디, 위인이 되지 마세요
손톱만 한 크기로 조간 21면에 박제되지 마세요 ■
이야기는 계속된다
여름이었다 방학이었고 그이는 고향 집 전화번호를 적었다
생각하다 문득 전화를 걸면 “잠깐 기다리슈”, 투박한 목소리가 받았다 그리고 마이크 끓는 소리 “수산떡 네 둘째 아들 아가씨한테서 전화 왔슈―”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간단하지만
나는 모르는 게 많았다
다이얼 전화기가 동네에 한 대 있다는 거
회관을 겸한 순미네 구판장에 놓여 있다는 거
순미 할매가 미원이나 라면을 팔다가 파리채를 쥔 채 전화를 받고 중개한다는 거
서울서 대학 다니는 수산떡 네 둘째가 연애한다네, 온 동네에 스피커가 와글거린다는 거
무엇보다 그이의 집은 구불구불 골목 끝이라는 거
회관까지는 이백 미터가 넘는 거리라는 거
골방에서 책을 읽던 그이가 신발 한 짝 겨우 걸치고 달리기를 한다는 거
어지럽고 아름다울 때까지
단순한 얼굴로 정오에 닿을 때까지
그다음은
몰라서
이야기는 계속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