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 帝國時代의 占星術 盛行과 太陽神 崇拜의 風潮
개설
Mesopotamia에서 기원된 이 “점성술”(Astrologie)이 Alexandria를 통해 Hella를 거쳐 스토이고(Stoicism) 철학자들에 의해 Roma에 전수되었는데, 帝政時代였다.
Hella 사람들은 Chaldea 사람들의 점성술에서, 그 점성학적 면(Astrological Science)에 매료되어, 천문적 “법칙”(nomos)에 더 치중했으므로 천문학(Astronomy)을; Egypt 사람들은 Chaldea 사람들의 점성의술(Astrological Medicine)을 더 계발 발전시킨데 반하여 Roma 사람들은 점성농업(Astrological Agriculture)에 관심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Stoa 철학의 숙명론에 강한 영향을 받아서 특별히 숙명점성술(宿命占星術) 즉 “호로스코프”(Horoscope)에 매료되어 심히 열중하게 되었다.
Hella 사람들의 그러한 사고 방식은 결국 의학의 비조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the Great, ca. 460-356 B.C.)에 이어 갈레노스(Galenos, ca. 129-201 A.D.)와 같은 의학의 대가들을 배출했으며, 천문학에 히파르쿠스(Hipparchus, ca. 190-125 B.C.)에 이어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2세기 A.D.)같은 대 수학자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이들의 모두가 점성학을 무시하거나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는 점성술과 천문학은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 같은 계열의 학문이었다. Arab어로 “Almagest”로 더 잘 알려진 8권에 달하는 “천문학 대집대성”(Megale Syntaxis tes Astronomias)의 저자 프톨레오마이오스도 또한 점성학자였다. 그의 점성술에 관한 저술 “테트라비블로스”(Tetrabiblos)도 오랫동안 Roma와 Arab인들 사이에 최대의 경의의 대전으로 받들여졌으며, Copernicus(1473-1543 A.D.) 때까지 Almagest는 천문학의 대전으로 인정되었다.
이에 비해 Roma에서는, 스토이고 철학이 점성술 덕분에 환영받아 뿌리를 내리면서,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 4?-65 A.D.)같은 대가들이 배출하는 틈새에서 점성학자들이 황제들의 비호 아래서 번영을 누렸다.
Roma에서는 통치자들이 이 “호로스코프”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특히 율리우스 카에사르(Julius Caesar, 100? B.C.-44 B.C.)를 위시하여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27-14 A.D.), 그리고 티베리우스(Tiberius, 14 A.D.-37 A.D.) 등은 유난히 그랬다.
그리하여 제정시대의 Roma 사회에서는 귀족 계층 뿐만 아니라 서민층 사이에서도 이 “호로스코프”가 성행하게 되면서, Roma 지식층 일각에서는 반대와 비난의 목소리도 날로 거세어졌으나 이 점성술의 영향으로 Roma 사람들 거의 모두가 태양을 신으로 숭배하였으며, 그 태양 숭배일이었던 “태양의 날” 곧 “일요일”(dies SolisSunday)은 존중하여 신성시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점성술 때문에 동시에 “토성의 날” 곧 “토요일”(dies SaturnSaturday)은 “흉악한 날”(dies nefatus)로 천시되었다. 심지어는 전쟁과 유혈의 신인 “화성의 날” 곧 “화요일”(dies MarsTuesday)보다 더 기피하는 날로 멸시를 당했다. 그리하여 토요일을 “안식일”(Sabbath day)로 성별하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그 날을 예배일로 준수하는 Roma의 그리스도인들까지 멸시와 천대의 눈으로 보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박해까지 하게 되었다.
帝政時代의 Roma 社會에 蔓延된 Astrologie(占星術)
Posidonius와 그의 후예들
포시도니우스(Posidonius, 또는 Poseidonius, c. 135-51 B.C.)는 Syria의 Apamea에서 B.C. 135년 경에 출생하였다.
그는 Hella의 Stoico 철학자 파나에티우스(Panaetius, c. 180-109 B.C.)에게서 배웠다. 그 후 Spain, Africa, Italia, Gaul, Liguria 그리고 Sicily 등지를 여행하면서 많은 견문을 넓혔다. 그리고 그도 지중해의 소 아시아 연안에 위치한 로드(Rhodes) 섬에 정착하여 학원을 개설하고 강의하게 되자, 그의 명강의 소문으로 유능한 생도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Roma 세계에 이 스토아 철학(Stoicism)을 널리 보급시킨 자로 스승 Panaetius를 제외하고는 당연히 제1인자가 되었다.
Cicero가 B.C. 78-77년에 그에게서 배웠으며, 그 후에는 Strabo와 Seneca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Cumont는 그의 명저에서 증언하기를 Posidonius의 그 많은 저서들이 소실되어 그에 대한 명확한 평가를 내릴 수 없지만
“그의 소문의 메아리는 Roma 통치 영역을 통해서 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이곳에서는 그의 권위가 Epicurus를 능가하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Rhodes에 있는 그의 학원에서 그는 오랫동안 세상의 선생들의 선생(Master of masters of the world)으로 있었던 것이다. Pompey가 그에게서 청강했고, Cicero가 그의 강의에 참석했다. 그래서 그의 영향은 그 후 신학(theology) 발전에 끼친 그 감화는 실로 여러 방면에 엄청나게 컸다. 그의 생도 Cicero는 자주 그의 가르침을 회상하면서 그의 사상(Ideas)을 Latin어로 옮겼다. 유대인 Philo의 상징주의(Symbolism)도 그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수사법에 감명받은 것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그의 사상은 이 스토아 학파(Stoic School)를 관통해서 저멀리 확산되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는데, 한 예를 들면, Seneca의 저술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Roma 제국시대의 점성술사들(astrologers)의 그 여러편의 논문들(treaties)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Posidonius는 특히 윤리학에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Chaldea의 수학자들의 영향으로 물리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지학에 열중하여 지구의 지름의 크기를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연과 인간 상호 관계를 윤리학으로 설명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태양에서 나오는 “생명력”이 온 세상에 침투하며, 인간과 만상을 연결시켜 주는데 이것을 “동정심”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Posidonius는 정의하기를 ‘사람’이란 ‘하늘을 보는 자이며, 또 그것을 해석하는 자’(the beholder and expounder of heaven{Capelle, De Schrift von der Welt, Leipzig, 1895, 6[534], n. 4 ‘ Contemplaterem caeli ’, ‘Οὐ μόνον θεατὴν ἀλλὰ καὶ ἐξηγητήν’})로 규정지었다. ‘자연’(Nature) 그 자체가이 점을 강조함에 있어서는 고대인들은 서로 다투었다.사람으로 하여금 천공(the Sky)을 자세히 보게하고 그것의 영구한 운동(perpetual motions)을 관찰하도록 운명지어졌다는 것이다. 인간 외의 동물들은 땅(the earth)을 향하여 머리가 숙여졌으나, 사람은 당당하게 그의 눈을 별(the stars)을 향하여 든다.이런 사실은 우리가 몇번이고 수없이 반복해서 알게 된 생각(an idea)라는 것이다. 사람의 눈, 이것은 인체의 경이요, 그것으로 광대한 것이 비치는 아주 작은 반사경(mirror)이며, 영원을 향하는 영혼의 열린 문(gateway of the soul open towards the infinit)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Posidonius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적으로 “태양”(the Sun)과 달, 그리고 밤 하늘에 빛나는 별을 유심히 관찰하고 연구하도록 유도했다. 따라서 그는 인간과 천체와의 상호 관계의 숙명을 그의 윤리학의 모토(motto)로 삼았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천체들(the heavenly bodies)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천상의 영혼(ethereal Soul)의 움직이는 신(divine)이며, 사람 자신의 영혼과 동족(akin)이다....”고 생각하는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2?-507?)의 생각과 또 “별”(the star)은 “보이는 신들”(visible gods)이라고 가르친 플라톤(Platon, 428-348/7 B.C.)의 우주론 “티마이오스”(τιμαίοςTimaeus)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 그러한 의미에서 Posidonius는 Pythagoras와 Platon 사상의 계승자이기도 했다.
스토아 사상(Stocism)이 Roma 사회에 확산되면서, Hella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던 Chaldea의 점성의술(Astrological Medicine)이 편승하게 되고, 동시에 이 “티마이오스”를 재해석 또는 주석하는 학자들이 도처에서 발생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학자는 의사 갈레노스(Galenos, c. 130-200 A.D.)였다. 그는 의사이면서 스토아 철학자였다. 그는 스토아 철학자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 A.D.) 황제의 신임이 깊은 궁중 시의로 존대 받았으며, 그의 아들 코모두스 황제(Commodus, 180-192 A.D.) 때까지 활약하였다.
미국의 고고학자 얼브라이트(W. F. Albright, 1891-? A.D.)교수도 증언하기를:
“스토아 철학자들은 점성술을 매우 열광적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학설의 주제를 삼았기 때문에 후기 헬레니즘 시대에는 점성학이 스토아 철학 체계의 없어서는 안될 주요한 부분(an intergral part of the Stoic system)이 되어버렸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Posidonius는 백과사전적인 학식과 Platon적, Aristoteles적인 견해를 스토아 철학과 용이하게 결합해서 매우 교묘히 활용하였으므로 그의 시대에 굉장한 영향을 끼쳤다.
스토아 철학의 신조(The Stoic doctrine)인 “숙명론”(heimarménallotted destiny)과 신의 세계의 기본적 조화론(the essential harmony of the world of nature with the divine)은 바빌로니아 점성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Babylonian astrology)와 너무나 완벽하게 일치(so perfectly congruent)하므로 그들은 실제적으로 융합되었던 것이다.”
Posidonius의 제자로서 한 때 로마의 통령(63B.C.)까지 역임했던 로마 사법계의 제일인자로 정치가, 법률가 그리고 스토아 철학과 문학가로 널리 알려졌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106-43 B.C.)는 그의 논문 “공화제”(De Republica)에서:
“전체가 서로 연결된 아홉개의 궤도(the nine circles)라 할까, 또는 차라리 천구들(spheres)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들 중 하나 곧 제일 바깥의 것이 하늘(heaven)이다. 이 하늘은 그 나머지 모두를 다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최고의 신(the supreme god)이고 그것 자체 속에 모든 다른 천구들을 포용하고 지탱하고 있다. 그 안에 별들이 영구한 운행코스(the eternal revolving courses)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 아래에 하늘에 속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운행하고 있는 일곱 다른 천구들이 있다.
이 일곱 천체들(globes)에서 지구상에 빛을 비추는 천체 하나가 소위 토성의 것(Saturn’s)이다. 그 다음으로 오는 빛은 소위 목성의 것(Jupiter’s)인데, 이 천체는 인류에게 행운과 건강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이 목성 밑의 별은 색이 붉으며 인생살이에 두려움의 존재인데 이 별을 그대는 화성(Mars)에다 지목한다. 이 화성 다음이면서 거리적으로 거의 중앙에 위치한 별이 태양(the Sun)인데 이별은 주(the lord)이시며, 우두머리(chief)이며 그리고 다른 모든 빛들의 통치자(ruller)이신 우주의 마음이요, 지도적 근본원리(the mind and guiding principle of the universe)이시어서 그렇게 위대하시므로 이 태양은 그의 빛으로 만물을 들어보이시고 만물을 충족케 하시는 것이다.
이 태양은 그의 동반자를 수반하는데, 말하자면, 자기들의 궤도상에 위치하고 있는 금성(Venus)과 수성(Mercury)이다. 그리고 최하위의 천구에서 선회하고 있는 것이 달(the Moon)인데 태양 광선(the rays of the Sun)으로 인하여 불타고 있다.... 아홉째인 이 지구는 중심 천구(central sphere)이고 부동이며(immovable) 모든 천구들 중 최하위에 있는 것이다.”
고 하였다.
일찍이 Cicero의 감화를 많이 받았던 로마의 저술가요 박물학자인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the Elder, 23-79A.D.)는 그의 저술 “박물지”(Historia Naturalis)에서 태양의 탁월성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 동일한 이치로, 지구와 하늘 사이의 일정한 공간 일부에 그들 자신의 동작을 따라 운행하고 있는 소위 혹성들이라고 우리들이 호칭하는 일곱 별들이 매달려 있다.... 이 별들 중앙에서 태양(the Sun)이 선회하는데, 이 태양의 위대함과 권능은 심히 지대하다. 그리고 이 태양은 이 지상의 계절(seasons)을 통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별들과 하늘까지 통치하신다. 이같은 태양의 모든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태양이 영혼(soul)이 있다고 반드시 믿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정확히 마음(the mind) 곧 온세상(the whole world) 마음과 최상의 통치원리(the supreme ruling principle)와 만물의 신(divinity of nature)이라고 믿어야 한다. 이 태양은 세상에 빛을 제공하시며 어둠을 제거하신다. 이 태양은 또 나머지 별들을 어둡게 하고 밝게도 하신다. 태양은 자연 현상의 선례를 따라 계절의 변화를 규제하시고 해(the year)를 계속적으로 다시 나게 하시고, 하늘의 어둠을 개이도록 하시고 또 심지어는 사람의 마음의 폭풍운(the storm-clouds)을 잠잠하게도 하신다. 또한 나머지 별들에게도 자기의 빛을 발산하신다. 그래서 태양이야말로 영화로우시고 탁월하시며, 모든 것을 보시고, 심지어는 모든 것을 들으신다....”
그는 또 진술하기를:
“자 이제 지구의 구조(the frame of the world)는 그대로 놔두고, 하늘과 땅(the sky and earth) 사이에 있는 나머지 천체들에 대해서 논해보자. 우선 다음에 열거한 요점들(points)은 확실한 것이다.:
(1) 토성(Saturn’s)이라고 불리우는 이 별은 가장 높다. 따라서 가장 작게 보이며, 가장 큰 궤도(orbit) 상에서 운행하고 있으며, 아주 짧게 잡아도 30년만에야 제 자리에 돌아온다는 것이다.
(2) 모든 혹성들의 동작과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태양과 달은 지구(world)의 것과는 반대의 코스(couse)를 따른다. 즉 다시 말하면, 좌회전인데 반하여 지구는 항상 우회전으로 달린다는 것이다.
‧‧‧‧‧‧
(5) 토성(Saturn)은 추워서 결빙상태(frozen nature)이다. 목성(Jupiter)의 궤도는 토성의 것보다 매우 낮아서 매우 빨리 운행하며 일회전(one rotation)을 매 12년마다 완성한다.
세번째 별은 화성(Mars)이다....
(6) 그 다음으로, 태양의 코스는 360부분(parts)으로 구분되었으나 태양이 투사했던 곳의 자취(shadaw)를 관측하기 위하여 그 출발 지점에 태양이 되돌아 오도록 일년에 5¼일을 가산했다. 따라서 태양의 코스가 우리의 연대(chronology)에 꼭들어 맞도록 하기 위해서 매 4년마다 윤일(intercalay day)이 가산되었다. 이 태양 바로 아래서 운행하는 매우 큰 별의 이름이 금성(Venus)이다.... 이 금성 다음의 별은 수성(Mercury)이다....”
Cicero와 Plinius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된 스페인(Ispania)의 세계적인 백과사전 편집자요, 역사가이며 신학자인 성 이시도루스(Isidorus Mercator, Archbishop of Seville, ca. 560-636. A.D.)는 그의 지식백과서인 “어원”(Etymologiae)에서 태양 숭배에 있어서 긴요한 것은 태양의 날에 있음을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간략하게 개괄했다:
“신들은 요일들(the days of the week)을 정돈하였다. 이 요일 명칭은 로마사람들이 혹성신들에게 봉헌된 날들이다. 첫째 날을 그들은 태양의 날(dies solis)이라고 불렀는데, 그 까닭은 태양이 모든 혹성들의 통치자이기 대문이다.”
황제와 점성학자들
율리우스(Julius Caesar, c. 100-44 B.C.)가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最高司祭長)라는 이교의 최상위의 존칭을 공식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해서 호칭하여 문헌에 남기게 한 것은 정적 폼페이(Pompey, the Great, 106-48 B.C.)를 추격하여 Egypt를 침공한 이후였다. Roma의 공화정이 위태롭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율리우스가 Egypt의 수도 Alexandria를 둘러보고, 그들의 문예, 학술, 종교 등의 문화와 제정정치 형태의 Egypt의 문명에 감탄했다. 그가 비록 무력으로 그들 위에 군림했을지라도, 그 때 그는 이미 그들의 절대 군주의 제정정치 제도와 신비스럽기 한없는 밀의식적 종교 그리고 신기한 점성술과 천문학에 압도당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정적 키케로(Marcus Cicero, the great, c. 106-43 B.C.)로부터 점성술 맹신자로 “허풍쟁이”(charlatanism)라는 비난을 받게 되어버리만큼 점성술에 심취되어 그 신봉자가 되었던 것이다. Odom은:
“로마가 군대를 동원하여, Egypt와 Asia에서 소규모의 전쟁을 치루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도 이전의 일세기(in the first century before Christ)였다. Roma 사람들이 지중해 바다 건너편 사람들과의 관계가 밀접하게 된것은 바로 그때였으며, 그 후부터 더 깊어지게 되었다. 외국의 철학(Foreign philosophy), 마술(magic), 점성술(astrology), 밀의식(mysteries) 그리고 사신숭배(cults)의 조류가 이미 서방을 향하여 Italia와 Europe 연안에 점차적으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Roma의 첫 번째 황제 Augustus와 Nigidius Figulus 그리고 Vitruvius
“‘당신은 帝王이 되는 별 밑에서 태어났다’는 점성학자의 점술을 들으면, 야심가(野心家)들은 누구나 동요하기 마련이다.”
Julius Caesar 시대에, Roma에서는 Marcus Terentius Varro 다음으로 대학자요 저술가로 명성을 떨친 사람은 니기디우스 피굴로스(Publius Nigidius Figulus, c. 98-45 B.C.에 활약)이다. 그는 Cicero의 친구로서, Catilinaria 음모 때에 그를 지지했었고, 한 때(B.C. 58) Roma의 집정관(praetor)으로도 봉직한 바 있었다. 그리고 내전 때에는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106 B.C-48 B.C.)의 편에 가담했다가 추방당해 망명생활을 하다가 B.C. 45년에 외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신에 관하여”(De dis, 19vols.)를 위시하여 여러권의 저술을 펴내기도 했으며, 특별히 점성학에도 조예가 깊어 당대에 이 분야에 널리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장차 “세계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었는데, 예언대로 그가 Roma의 첫번째 황제 Augustus가 되자, 그 예언이 적중했다고 하여 크게 감명을 받은 나머지 자신이 출생했을 때의 별자리였던 “염소궁”을 새긴 주화를 발행했다. 그리고 점성학자들을 초빙하여 극진히 우대하여, 그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다.
그리고 Augustus 황제의 강력한 지지자로서, 모든 난제들을 해결하여 황제의 오른 팔 역을 수행하여 신임이 가장 두텁던 마르쿠스 아그립파(Marcus Vipsanius Agrippa, Augustus' son-in-law, c. 63-12 B.C.)가 “율리아 家門”(the Giulia Julia-Julius Caesar와 Octavianus가 이 가문에 속함)의 守護神이 된 “일곱 혹성신들”(the seven planetary gods)을 숭배하기 위해 B.C. 27-25년에 거대한 원형 판테온(Pantheon)을 건축하였다.
이 신전이 그후 거의 1세기만에(A.D. 80년) 화재로 파손되어서, Hadrianus 황제가 118년에 재건축했을지라도, 그 복원된 신전은 여전히 Marcus Agrippa의 권력과 당시의 Roma의 번영과 영광 그리고 율리아 가문의 점성술에 대한 강한 신앙심을 대변해주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었다.
Augustus 황제가 자신의 사위이며 양자인 마르쿠스 아그립파를 장차 자신의 뒤를 이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었지만 그가 돌연히 B.C. 12년에 죽고 말았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았던 티벨리우스(Tibelius-Augustus 황제의 후처 Livia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가 Augustus를 뒤이어 두 번째 황제가 됨으로써 다니엘서 11장 20-22절의 예언을 성취시켰다.
이 판테온의 기본 형태를 이루고 있는 半球는 宇宙(Cosmos)를 상징하며, 그 거대한 돔(Dome)의 눈 즉 정상에 뚫린 구멍 “오쿨루스”(Oculus)는 惑星들의 中心이 되는 太陽을 상징했다. 이 판테온을 설계하고 그 건축을 감독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Roma 建築家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 ca. 88-26 B.C.)는 Augustus 황제 때 건축가로 뿐만 아니라, 군사기사, 토목기사로 활약하여 Roma의 給水 공사에도 공을 세웠고, 또 저술활동도 하여 10권으로 구성된 “건축에 대하여”(De Architectura)라는 대작을 남겼는데, 이것은 건축에 관한 고전 문헌으로써도 가장 권위있는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황제에게 봉헌했다.
그는 이 저술에서 일반 건축(Architecture in general) 뿐만 아니라 도시계획(city planning), 건축자재, 신전(temple construction), 공공시설인 극장과 목욕탕, 주택, 측량기, 시계, 일부 지역의 역사 ‧‧‧ 등을 논했을 뿐만 아니라 천문학(astronomy)과 군사용 기구 등도 논했다. 그는 점성술에 대하여 논하기를:
“점성술 즉 12궁, 5행성 그리고 태양이나 달이 人生行路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도 칼데아인의 계산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운수를 점친다는 것은 그들의 특기이고, 天文計算에 의하여 과거나 장래를 설명할 수 있다. 칼데아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그들의 세련된 특수 기능이라고 자찬하는 발견을 전하여 주었다. 먼저 코스(Kos)섬의 시민으로 定住한 베로수스도 그곳에서 학교를 시작했다....”
Roma의 두번 째 황제 Tiberius와 Manilius
Cumont는 진술하기를:
“영감적인 문학 작품들 중에서도 현저한 것 한 편이 있다. 그것은 소위 Manilius라 불리우는 천문학자의 것인데 우리가 그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그의 이름조차 생소한 사람으로써 그의 원고를 보면 오록 투성이인데도 그렇게 감명을 받게 되는데 그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한 그야말로 진짜 시적 재능을 가진 영감적인 작품이다. 그의 이 작품은 무미건조한 수학적인 것이지만 야생화처럼 광택이 빛나는 표현이었다.”
대영백과 사전에는:
“마닐리우스(Marcus Manilius, 1세기 초에 활약)는 Roma의 마지막 교훈시 작가로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그는 “아스트로노미카”(Astronomica)의 저자이다. 이 작품은 아마 A.D. 14-27년 사이에 저술된 것이며, 미완성된 것으로써 천문학과 점성술에 관한 시(poem on astronomy and Astrology)이다. 그는 이것을 Tiberius 황제에게 바쳤다.... 그는 자신의 그 놀라운 재능을 몽땅 바쳐 천문적 수치를 시로 묘사하는데 온 정렬을 쏟아 넣었다.
Manilius는 신의 이성과 섭리가 역사하는 세계적인 정부에 대해 강조했다....”
Manilius는 Posidonius의 감화로 스토아 학파의 숙명론적 점성의술을 개발한 점성학자였다. 그의 작품은 또한 Pythagoras의 數의 개념과 人間과 宇宙와의 관계를; 그리고 Platon의 Timaeus에 나타난 宇宙論을 점성의술에 응용, 이를 시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천공을 대우주로, 인간을 소우주로 전제하여 소우주인 인간은 대우주의 별 세계와 서로 대응한다고 믿었다. 나까야마 시게루는 그의 논문에서:
“점성의학의 원리에 大宇宙-小宇宙 대응이라는 說이 있다. 하늘은 대우주이고 인간은 소우주로서 대우주의 諸相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하늘을 사람에 대응시킨다는 생각의 기원도 汎바빌로니아 主義流로 말하면 古代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된다....
플라톤은 소우주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티마이오스에 나온 우주 관계로 이러한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의 이 생각을 이어받은 것은 스토아 學派(stoics)의 哲學者들인데, 그들의 의견은 세계가 생명과 理性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도 거의 일치한다. 마닐리우스도 身體의 각부분을 12宮으로 배당하였다. 그리고 다시 인체 내부의 器官과 특정한 행성이나 별자리의 관계를 상세히 발전시켜 갔다. 사람과 流派에 따라 대응하는 부분이 각각 다르지만 예를 들어 목성을 腦髓, 수성을 腎臟에 배당하고 또 12宮도 白羊宮이 머리, 天秤宮이 볼기라고 하는 것과 같이, 12宮의 각각에 신체의 부분이나 臟器가 할당된다.
플라톤, 스토아 학파, 마닐리우스의 線은 동시에 점성술의 선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大宇宙-小宇宙 대응이 점성술과 결부되어 占星醫術의 根本原理로 되었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일단 하늘과 사람과의 대응이 확정되고 原理化하자 천체의 論斷만으로 병을 논하여 의학은 점점 경험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점성의학은 환자의 베드를 떠나서 천체의 운행을 책상 위에서 계산하기만 하면 되므로 일종의 數學 즉 醫數學(Astromathematics)이 된다.”
Vettius Valens
한 “종교 백과사전”에는 점성술이 발달하게 된 요인을 설명하면서 대체로 다음 세 학자들의 기여한 공이 컸다고 기술되었다.:
“그 첫 번째 분은 점성술의 대작 ‘아포텔레스마티가’(the Apotelesmatika일명 Tetrabiblos 또는 Quadripartitum으로 더 잘 알려졌음)를 저술한 Alexandria의 대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lemaeus, c. 100-178 A.D.)로 그의 영향이 결정적으로 컸다. 그는 위서 ‘카르포스’(the pseudepigraphon Karpos 또는 Centiloquium)를 대중에 널리 보급시켰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 인물로서 후기 고대의 대점성학자는 ‘안토로케우온 비블리아’(the Anthologeuon Biblia, c. 152-188 A.D. 사이에 기록되었음)를 저술한 점성술의 대가 베티우스 발렌스(Vettius Valens)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이전인 335년경에 저술한 ‘마테세오’(the Matheseo, libri, Ⅷ)의 저자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Firmicus Maternus)였다.”
Vettius Valens의 생애에 대해서 잘 알려진 것은 없으나, 그가 Roma 황제 Antoninus Pius(재위 138-161 A.D.) 시대에 스토이고 철학자로서 활약한 대점성술사로 명성을 떨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Vettius Valens는 철저한 숙명론자였다.
“애당초부터 정해져있던 것은 어떠한 희생제물로도 무효화할 수 없다”(It is impossible to defeat by sacrifice that which has been established from the beginning of time).
는 것이 그의 지론이였다.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어느 누구의 생년월일이 주어질지라도 그 생신일의 요일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설명하면서 그 중 “태양의 날”(the Sunday)이 그 어느 요일 보다 탁월한 날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점성술의 기본이 일곱 요일에 있음을 설명하면서:
“‧‧‧ 이것의 요일(the day of the week)에 연관된 혹성 별들(the planetary stars)의 일련의 순렬은: 태양(Sun), 달(Moon), 화성(Mars), 수성(Mercury), 목성(Jupiter), 금성(Venus) 그리고 토성(Saturn)이다.”
황제 Constantinus와 Firmicus Maternus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Julius Firmicus Maternus, fl. 4th Cen. A.D.)의 생몰(生沒)과 그의 생애에 대해서 잘 알려진 것은 없으나, 그가 로마의 원로원 의원(Senator of Rome)의 귀족 출신으로서, 고명한 점성학자로 Roma 정계와 사회에서 존대받았을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Ⅰ, 306-337 A.D.)의 선황 콘스탄티우스 클러루스 황제(Constantinus Chlorus, 305-306 A.D.) 때부터 콘스탄스 황제(Constans, 337-350 A.D.) 시대까지 3대에 걸쳐 황실 占星宮으로 활약한 비범한 정치가였다.
Firmicus Maternus와 교회사가 Eusebius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 내의 두 종파태양신교와 그리스도교의 통일을 통해 정치적 통일을 기하려할 때 황실 점성관 마테르누스는 황제의 야심을 파악한 나머지 그의 종교 정책을 입안하는데 수훈을 세웠다. 태양신 숭배일인 일요일을 법제화시켜 “일요일 휴업령”(the Sunday-Law, 321 A.D.)을 공포케하고 이를 토대로 해서 두 큰 종파인 “태양신교”와 “그리스도교”를 통합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런데 이 “일요일 휴업령”이 제정되기까지 막후에서 활약한 숨은 공로자가 또 한 사람 있었다. 황실 점성관(皇室 占星官) 마테르누스(Julius Firmicus Maternus, fl. 4th Cen. A.D.)외에 다른 사람은 “교회사의 비조”라고 불리우는 가에사레아 교회 감독 유세비우스(Eusebius, Bishop of Caesarea, ca. 260-340 A.D.)였다. 이 두 사람은 황제의 요청에 의해, 제국내의 二大 종파-太陽神敎와 基督敎-를 단일 종교로 통합 또는 통일을 위해서 어전에서 협상하게 된 주역들이었다. 종교적 통일을 통해서, 동서 로마제국을 자신의 통치하에서 통일하려는 황제의 야심에서 발상된 것이다. 즉 정적 리키니우스(Licinius, 308-324 A.D.) 산하의 그리스도인들의 협력을 힘입으려고 했던 것이다. 황제는 기독교가 제국 내에서 그 세력을 상당히 확산하여 더 이상 무력으로 막을 수 없음을 인식했다. 두 주역들은 어느 한 종파가 다른 종파에 흡수 통일 되는 것이 성사될 수 없음을 서로 인지했다. 그래서 제3의 “새 종교”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종교는 기본 요소들이 몇가지 있다. 그 요소들 중에서도 핵심 요소는 경배받는 主神과 그 주신을 숭배하는 주기적 예배일이다. 그 당시 이교의 주신 “아폴로”(Apollo)는 “不敗의 太陽”(Sol Invictus)神인데 비해 기독교의 주신 “그리스도”(Kristos)는 “義의 太陽”(Sol Iustificus)神이라는 사실이 이미 클레멘스(Clemens, Bishop of Alexandria, ca. 153-216 A.D.)의 저서(Stromata, bk. 7, chap. 7)에나, 오리게네스(Origenes, Bishop of Alexandria, ca. 185-254 A.D.)의 저술(In Numeros Homilia, chap. 24 para. 5 “‧‧‧ 그리스도는 의의 태양이시다. 만일 달이 그와 연합한다면, 달은 곧 교회인데, 그리스도의 빛으로 말미암아 더욱 충만해질 것이다....”)을 통해서 정계와 학계에 널리 알려진 터였다. 그래서 이들 두 협상 주역들은 우선 두 종파의 주신들이 “태양신”이라는 공통점을 난제 해결하는 실마리로 삼았다.
그런데, 둘째 요소인 예배일에 있어서 기독교는 “제칠일 안식일”이 주 예배일인데, 이 날은 “토성신의 날”(Dies Saturnalis) 곧 “토요일”로서, 점성학자 마테르누스의 입장에서는 그 날을 제3의 새 종교 예배일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날이었다. 그 사유인즉 그 “토요일”(Satur-day)은 점성술(Astrology)에서는 7일 중 가장 “불길한 날”(dies nefastus-an unlucky day)이기 때문이었다.
협상이란 서로 “주고 받는”(give and take) 과정에서 성사되는 것이 관례다. 마테르누스는 로마 원로원 의원(Senator of Rome)의 귀족 출신으로써 고명한 점성학자로 로마 정계와 학계 그리고 일반 사회에서 존대받았을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Ⅰ, 306-337 A.D.) 황제의 선황(Constantius, 305-306 A.D.) 때부터 아들 콘스탄스(Constans, 337-350 A.D.) 황제 때까지 삼대에 걸쳐 신임받는 황실 점성관으로 활약한 비범한 정치가였다.
그가 A.D. 336년 전후에 저술한 “마테세오스 리브리”(Matheseos libri, Ⅷ)는 오늘날까지 점성학계에서는 고전으로서 대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ios)의 점성술 문헌 “아포텔레스마티카”(Apotelesmatica-일명 Tetrabiblos라고도 함)에 버금가는 저서로 존대받고 있다. 노련한 정치가 마테르누스는 협상에 있어서도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보다 한 술 위인 것 같다.
유세비우스는 기독교의 기본 예배일인 “안식일”(the Sabbath)을 양보할 수 있을지라도 예배의 대상은 “그리스도”(Kristos)로 할 것을 요구했다. 마테르누스는 예배 대상의 명칭이야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것이 “태양신”(the Sun-god)이면 족했으므로 그 “태양신의 날”(Dies Solis-the Sun-day)이 예배일로 규정되기를 내심 바랐기 때문에 “아폴로”(Apollo) 대신에 “의의 태양신”이신 그리스도를 제3의 새 종교의 예배 대상의 명칭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태양의 날” 곧 “일요일”을 매체로 해서 두 종파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는 초석을 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유세비우스의 속셈은 이 “일요일 휴업령”을 힘입어 “부활절-일요일 논쟁”(Easter-Sunday Controversy-윤대화, 주일 논쟁사, 중, 129-201 참조)에서 동방교회의 안식일 존중론자들을 국법으로 제압하고 여세를 몰아 기독교의 세력을 이교의 세계에 침투하여 궁극적으로 제국을 기독교화(Christianization) 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마테르누스는 이교의 다양한 잡신교를 태양신교로 통일하고 궁극적으로 기독교를 점성술을 기반으로 하는 태양신교화(Solarization)가 그의 목표였다.
황궁에서 돌아온 유세비우스는 그후 그의 저술에서 아폴로 태양신교와 맺은 이 “새로운 연합”(또는 동맹-the New Alliance) 때문에 예배일을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변경하게 되었다고 아래와 같이 논증했다.
“로고스(λογος)는 안식일 축제를 새로운 연합으로 인하여(by the New Alliance), 빛의 부활일에로 변경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그 빛의 첫날을 주님의 구원의 날에 있을 참 쉼의 모형으로 주셨다.... 이 빛의 날, 곧 첫째 날이요, ‘참 태양의 날’에 우리가 6일을 지낸 후 모이는데, 이 날을 우리가 성스럽고 영적인 안식일로 축제하는 바다....
우리는 안식일에 준행해야 했던 모든 의무를 다 주의 날로 옮겼는데, 이는 이같이 하는 것이 보다 더욱 타당하며, 또 이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보다 뛰어나고, 높은 위치에 있고, 더욱 영광스러운 날이기 때문이다. 사실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시던 세상을 창조하셨던 날이 바로 이 날이다. 또 우리 영혼을 위하여 義의 太陽이 떠오르던 날도 역시 바로 이 날이다....”
“구주의 날 ‧‧‧ 이 명칭은 빛에서부터 파생된 것이며, 또한 그 태양에서부터 파생된 것이다....”
“우리 신약의 사람들은 이제 매 일요일을 우리들의 유월절로 성축한다....”
그 후 유세비우스는 그의 저술(Vita Constantini, bk. ⅲ, chap. 23 & c. in NPNF. vol. Ⅰ, 519-545 & c.)에서 황제 콘스탄티누스로 하여금 새로 마련한 제3의 새종교를 이교도들에게 추천하기 위하여 고대로부터 이교(paganism)가 사용해 왔던 온갖 것들을 채용해서 이를 기독교화(Christianization) 한 것에 대하여 장황하게 나열했다. 이에 대하여 영국교회(Englican Church)의 중요 지도자로 한 때 옥스퍼드 혁신 운동가로 활약하다가 1845년에 카톨릭교로 개종하여 후에 추기경이 된 뉴만(John Henry Newman, 1801-1890 A.D.)는 그의 저술[An Essay on the Development of Christian Doctrine(London: Longmans, Green, and Co., 1906), 373]에서 이를 간추려 설명하면서 그는 유세비우스와 마테르누스가 협상을 통해 마련한 그 교회를 “새 종교”(the New Religion)라는 표현으로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
“‧‧‧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새 종교를 이방인들에게 추천하기 위하여 그들과 친숙한 예배용 장식들을 교회 내에 이끌어 들인 사실을 여러 가지로 말해 준다.... 특정한 성자에게 바친 신전들(temples)을 사용할 것, 때때로 나뭇가지로 장식하는 것, 향, 등잔, 촛대, 병치료를 위한 봉헌하는 예물, 거룩한 물, 보호소, 성일들과 절기들, 역법의 사용, 행렬기도, ‧‧‧, 동방 경배, 후일에 우상숭배, 그리고 교회의 송가들은 다 이교적 기원을 가진 것으로서 교회가 이를 채용하므로 성별되었다....”
그 사건 후 여러 세기가 지나갔다. 황실 점성관 마테르누스의 계략과 교회사의 비조 유세비우스의 야심, 이 둘 중에 누가 승리를 거두었는가? 옥스포드 대학교 교회사 교수 스탠리(A. P. Stanley, 1815-1881 A.D.)는 그의 저서에서:
“고대 태양신에게 부단한 충성심을 바친 자들이 그들의 종교 의식 자취를 [오늘 날까지] 남겨 놓았다.... 지극히 거룩하며, 우주적인 이 그리스도교단에까지 그 흔적을 남겼다. 이 고대 우상숭배자들이 명명한 ‘태양의 날’(dies solis)이라는 칭호의 존속은 대개 우상숭배교와 그리스도교의 그 정조가 서로 결합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이 법령은 제국내의 불일치한 종교들을 공통의 제도 아래서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 보려는 의도였다.”
이집트학 학자 웨이걸(A. E. Weigall, 1880-1934 A.D.)은 그의 저술에서:
“교회는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성별했다.... 전승에 따라 대중들로부터 추앙받던 우상숭배자들의 축제일들을 그리스도교가 물려받고, 그 우상숭배자들에게 ‘그리스도인’(the Christian)이라는 칭호를 준 것은 명백히 교회의 모략이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임종이 임박하자, 세례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하자, 뒤이어 마테르누스도 그렇게 했다. 그것은 나름대로 또다른 숨은 계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Roma 제국이 그리스도교국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점성술의 기본인 日, 月, 火, 水, 木, 金과 “土星의 날”을 Calendar에 삽입토록 하는 새 달력을 고안해 냈다.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의 말기와 그의 호교적 활약
그의 아들 콘스탄스(Constans) 황제의 비호 아래서, 고대의 Roma 다신교를 탄압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343-350 A.D.에 이교를 논박하는 저술(De errore profanarum religionum 불경스러운 사교적 종교의 오류에 대하여) 활동도 하여 호교론자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 Constantinus가 그랬던 것처럼 황실 점성관 Maternus의 개종도 그랬다. 한때 유대의 산헤드린(Sanhedrin)회 의원으로서, 초창기 그리스도교를 맹렬히 박해했던 바리새(Pharisees)파의 유력한 핵심 당원이었던 사울(Saul)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개인적으로 뵙고 개종하여 사도 바울(the Apostle Paul)로 변신될 때 체험한 그런 회심을 통해 회개한 경험이 Maternus에게는 전혀 없었다.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아 회심한 에베소의 그 여러 마술사들이 자신들이 사용했던 “그 책을 모아 ‧‧‧ 사람들 앞에서 불사른”(행19:19) 것 같이 점성학자 Maternus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전에 자신이 저술하여 남긴 점성술의 대작(Matheseas libri, Ⅷ)을 불사르지 않았다.
황제 Constantinus가 생각했던 것과 같이 점성관 Maternus도 자신이 섬겼던 “불패의 태양”(Sol Invictus)神 Apollo가 다만 “義의 太陽”(Sol Iustificus)神 Kristos로 이름만이 바뀐 것 뿐이었다.
그것은 時代에 따라서 변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 A.D.) 시대에 Jupiter가 太陽神으로 각광받아왔던 것이 황제 아우렐리우스(Aurelianus, 270-275 A.D.) 때부터 Persia의 太陽神 Mithra가 Roma의 太陽神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 305-306 A.D.) 家門의 守護神 Apollo가 그의 등극과 함께 Roma 제국의 太陽神이 되었다. 그래서 쿠먼트(F. V. Marie Cumont, 1868-1947 A.D.)의 말과 같이 이제 이 Apollo를 불패의 태양으로 숭상하는 “태양조”(Solar Dynasty)가 개조되었다.
따라서 Maternus의 기독교 개종은 어디까지나 아폴로가 그리스도로 명칭만 바뀐 “제3의 새종교)의 기독교로 개종한 것 뿐이다.
이집트 중왕국 제18왕조의 제6대 바로(파라오)인 아케나톤이 “아문-레”(Amun-Re) 태양을 主神으로 한 多神敎를 철폐하고 “아텐”(Aten 또는 Aton) 태양을 唯一神으로 한 一神敎 설립을 위해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과 거기에 안치해 두었던 모든 잡신상들을 모조리 파괴했던 것처럼 황실 점성관 마테르누스는 황제 콘스탄스의 명을 받들어 제국내의 각종 신전들과 잡신 상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 때 그 많은 판테온들(Pantheon 여러 신들을 한 자리에 모시는 신전)과 사당들(Shrines) 그리고 그 많은 男女神像들이 파괴되었다. 머리통(두상)이 없어진 신상들, 반대로 몸통이 없어지고 두상들만 남은 것들이 신전들(Temples) 주변에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는데 예술품 애호 수집가들에 의해 수거되어, 오늘날 우리가 Roma의 Vatican 박물관이나, Paris의 Louvre 박물관 등등 그 당시 Roma제국 통치권 지역 내에 속했던 그 많은 나라 박물관 진열대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황실 점성관 Maternus의 지휘하에서 주도면밀하게 이교도들의 각종 신전들(Temples, Shrines and Pantheons)이 철저히 파괴되었지만, 예외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Roma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 son-in-law of Augustus)에 의해 B.C. 27-25년에 건축되어 율리아 家門(Giulia Julia Julius Caesar가 바로 이 가문 출신임)의 守護神으로 받들여져 온 “일곱 惑星神들”(the seven planetary gods)을 숭배하기 위해 봉헌한 “판테온”(Pantheon)이다.
이 판테온에 안치된 “일곱 惑星神들”이란 太陽과 달(Sol et Luna) 그리고 火星(Mars), 水星(Mercurius), 木星(Jupiter), 金星(Venus) 및 土星(Saturnus)이다. 이 무렵에 Roma에서는 일찍부터 사용해왔던 8일 주기제도 “눈디눔”(Nundinumthe market-time)에다가 Babylonia의 7일 주기 제도 주일(Week)을 Egypt에서 도입하여 혼용하다가 후에 대체하였다.
이 판테온이 A.D. 80년에 대화재로 다소 파손되었으나 그 후에 Hadrianus 황제에 의해서 재건되었고, 셉티무스 세베리우스(Septimus Severius, 193-211 A.D.) 황제 때와 카라칼라(Caracalla, 211-217 A.D.) 황제 때 완전히 복원되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판테온이 교회당으로 헌당되었기 때문에 분노한 그리스도교인들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 보전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판테온”이 Roma Catholic 성당으로 바뀌고, “순교자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Santa Maria Dei Martiri)이라고 개명된 것은 A.D. 609년 3월 16일 포카스(Phokas, 602-610 A.D.) 황제의 승인하에서 교황 보니파티우스 4세(Bonifatius Ⅳ, 608-615 A.D.) 때였다. 이렇게 되기 약 210여년 전인 A.D. 392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Ⅰ, 379-395 A.D.)는 이 새 기독교적인 종교를 Roma 帝國의 國敎(State Religion)로 제정하고 동시에 이교를 철폐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이 칙령으로 또 다시 나머지 신전들과 우상들이 파괴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 판테온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그 원형대로 보전되어서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황실 점성관 Maternus의 아주 치밀한 정치적 종교적 정책 때문이었다. Maternus는 그리스도인으로 위장한 점성학자인 동시에 매우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의 정치적 종교적 수완으로 A.D. 321년 3월 7일 Constantinus 황제에 의해 공포된 칙령 “일요일 휴업령”(Sunday Rest Law)이 이 지상에 존속하는 한 점성술의 기본인 日, 月, 火, 水, 木, 金 그리고 土曜日로 명기된 Calendar와 함께 이 “일곱 혹성신들”에게 봉헌되었던 그 판테온도 역시 계속 존속할 것이다. 이 “태양의 날”(Dies Solis) 곧 日曜日(Sunday)이 그리스도敎 內에 깊숙히 뿌리내려 있는 한, 그리고 이 판테온이 Roma Catholic敎의 聖堂으로 남아있는 한 이 둘은 모두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가 古代 太陽神 崇拜의 遺物 中 “보이지 않는 기념비(記念碑)”(Un-visual Monument)라면, 다른 것은 “보이는 기념비”(Visual Monument)이다.
현대의 일요일 신성론 신학자들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이 占星學者 Maternus의 비상한 역량으로 이룩한 이 공적에 대해서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古代 Roma 帝國時代의 三大 占星學者인 Ptolemaios와 Vetius Valens 그리고 J. Firmicus Maternus 이 세 사람들 中에서 太陽의 날일요일을 그리스도교에 접목시켜서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계18:3)도록 한 자로서도 당연히 제 일인자였기 때문이다.
마테르누스는 오늘날에 와서도 현대 점성술사들에게 점성학의 고전으로 높이 평가를 받고있는 “마테세오스 리브리”(Matheseos libri, Ⅷ)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모두 8권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점성학 저술 “아포텔레스 마티카”(Apotelesmatica)가 “4권의 책”이라는 뜻으로 “테트라비블로스”(Tetrabiblos)라고 불리우는데 반하여 마테르누스의 저술은 “8권의 책”이라는 뜻으로 “옥토비블로스”(Octobiblos)라고 호칭되기도 한다. 그는 이 책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당신이 누구이든간에, 지금 이 책을 읽으려고하는 당신은 이미 신성한 지식을 입수하여 별들의 비밀을 부여받았으며 그 기술의 첫 번째 원리를 읽혔다....
그대의 훈련과 규범이 유덕한 사제의 그것을 능가하도록 노력하라. 신성한 그릇으로서의 당신의 가치가 모든 사람에게 인증된 후에도, 해와 달, 떠돌이 별들이 당신을 통하여 지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大天文學者 프톨레마이오스와 “테트라 비블로스”
Greece인들이 자랑하는 Alexandria의 天文學者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ios; Latin: Claudius Ptolemaeus)의 생물과 생애에 대해서 별로 알려진 것은 없으나, Arab인들이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그는 78세까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잔티움의 데오도루스(Theodorus Meliteniota of Byzantium)에 의하면, 프톨레마이오스는 Egypt의 Hella 도시 프톨레마이스(Ptolemais Hermii)에서 태어났다. 그의 중요 작품들은 Alexandria에서 A.D. 127-145년 사이에 저술한 것들인데 늦게 잡아도 151년경에 모두 다 이루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그 천문학적 저술들은 모두 사당에 소중히 안치되었는데, 그의 이 위대한 책 “헤 마테마티케 신탁키스”(He Mathematike syntaxis the Mathematical Collection 수학 집대성), 또는 “메갈레 신탁키스 마테마티케”(Megale syntaxis Mathematike)라는 저술 때문에 그는 “호 메가스 아스트로노모스”(Ho megas astronomosThe Great Astronomer 大天文學者)로 알려지게 되었다.
9세기에 와서, Roma의 文明을 이어받은 Arab의 天文學者들이 Greek어의 “위대한”이라는 형용사 “메가스”(magas)의 최상급인 “메기스테”(megiste가장 위대한)를 이 책에다가 붙인 다음, Arab語의 정관사 “알”(Al)을 더하여 “알마게스트”(Almagest)라는 존칭으로 받들어왔던 것이 오늘날까지 그 책의 이름으로 더 널리 잘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Ptolemaios는 그가 저술해 남긴 “수학 집대성”이라는 천문학 저술 때문에 “대천문학자”라는 존칭을 받게 된 것처럼 또한 그가 저술해 남긴 “4권의 책”이라는 뜻의 “테트라비블로스”(Tetrabiblos)로 더 널리 알려진 점성술의 대작 “아포텔레스마티카”(Apotelesmatica) 때문에 “大占星術師”(Ho megas astrologiasThe Great Astrologer)라는 존칭도 아울러 받았던 것이다.
Ptolemaios는 그 외에도 몇권의 책들을 더 저술했다:
① 光學(Optica5 treaties on optical phenomena);
② "아나렘나“(Analemma);
③ 지리학(Geographike hypheoesis8bks., of text and maps);
④ 화성학(Harmonica3bks., treaties on the music);
⑤ 기하학(Planisphaeriumon geometry) 등이다.
Ptolemaios의 천문학서 “수학집대성”이라는 그의 저술(Almagest)이 Hella의 천문학자 Hipparchos(146?-127 B.C.)가 Mesopotamia 사람들이 시작하고 연구한 우주의 지구 중심설 곧 天動說(the Geocentric theory)을 이어받아 계속 관찰하고 연구해서 이룩한 天文的 각종 지식(information)을 Ptolemaios가 최종적으로 총정리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4권의 책”(Tetrabiblos)이라는 그의 저술은 Hella의 천문학 비조 Eudoxus(408-355 B.C.)가 Babylonia 사람들이 최초로 꾸며서 만든 占星術을 이어받아 연구하고, 체계화하여 Hipparchos를 거쳐 내려오면서 발전시킨 것을 Ptolemaios가 최종적으로 총정리하여 펴낸 占星學的인 저작인 것이다. 그래서 천문학(Astronomy)과 占星學(Astrology占星術)은 Renaissance 시대 이후 合理主義(Rationalism)가 대두되기 이전에는 서로 구별짓지 않았던 한 學問이었다.
이 두 저술들은 약 175년 경에 Latin語로 번역된 이래, Roma 帝政時代부터 16세기의 Poland의 사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N. Copernicus, 1473-1546 A.D.)가 죽은 해에 출판한 太陽中心說“천구의 회전에 관하여”(The Heliocentric Theory)이 수립되어 學界에 알려지면서, 또 1598년에 Denmark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 Brahe, 1546-1601 A.D.)의 “신 천문 체계론”(Astronomiae Instauratae Mechanica, 1598 A.D.)이 발표되고, Italia의 천문학자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A.D.)가 1609년에 자신이 제작한 망원경을 통해 천체를 깊이 관측한 후 지동설의 확실성을 주장하여, 1633년에 Roman Catholic Church에서 설치한 종교재판을 받아 생명의 위협 때문에 취소했을지라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Epur si muove)고 천동설의 거짓됨을 증명했을 때까지, 실로 1500여년 동안 이 두 저술들은 각각 천문학과 점성술의 성서(Bible)로 받들여져서 그 권위가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나긴 중세기동안 천문학에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의학(Medicine)에서부터 Roman Catholic 神學에 이르기까지 과학, 예술, 종교, 사회 그리고 정치 등등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니, 이는 서양 문명의 “암흑시대”(the Dark Ages) 곧 “로마 천주교의 황금시대”(the Golden Ages of Roman Catholic Church)를 이끌어 온 견인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 中에서도 占星術의 大作 Tetrabiblos는 Renaissance 時代를 관통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제2차 대전 중에서도 영국과 독일이 각각 자국어로 재판했을 정도로 귀중히 여겨지고, 21세기를 바라보고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 책은 점성술의 위대한 기본 교과서처럼 높이 평가를 받고 있으니,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그 책 제1권 서두에:
“천상의 세계에서 파생된 어떤 힘이 지구의 전 대기권에 확산 침투되고 있다는 것은 모든 인간들에게 아주 분명한 일이다....”
라고 주장한 Ptolemaios의 거짓말같은 이 한마디 때문일까!
Tetrabiblos는 그 명칭대로 모두 4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 2권은 地勢占星術(Astrological Chorography)과 氣象占星術(Astrometeorology)을 비롯해서 天體들의 영향력이 地上의 物理現像에 어떻게 미치는가하는 占星術의 基本原理와 天下諸國들의 흥망성쇠에 이르는 대 파노라마적 運命과 그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제3, 4권은 天體들이 人間事에 영향을 끼치고있는 출생당시에 나타난 별자리에 따라 인간 개개인의 운명이 예측된다는 Horoscope 즉 출생천궁도를 자세히 풀이했다. 나까야마 시게루는 그의 저술에서:
“Tetrabiblos의 첫머리에서 Ptolemaios는 이렇게 前提하고 있다.:
日, 月과 여러 行星(惑星)을 논하는 天文學 自體는 第一의 科學이고, 그 自體가 독립된 것이다. 이에 반하여 天上의 現像의 地上에 대한 영향을 論하는 占星術은 二流의 科學이다. 그러나 영원한 하늘의 에테르(aither)에서 나오는 어떤 힘이 地上에 널리 퍼져 있으므로 그 영향력을 論한다는 것은 學問으로 가능하다. 또한 예보에 의하여 사전에 피해방지책을 강구하면 人生諸般事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古代에는 自身의 신변을 위해 점성술사를 고용할 수 있는 王과 귀족들 그리고 몇몇의 사제들의 전유물로 해서 이 점성학은 일명 “帝王의 學”이라고 불렸다.
Ptolemaios가 설명하는 占星術의 基本은 “太陽과 달”(the Sun and Moon) 곧 日, 月을 필두로 해서 火, 水, 木, 金 그리고 土星까지 일곱개의 惑星이 황도 즉 그들이 말하는 “태양이 다니는 길”에 매 30도씩 위치한 12성좌 곧 “황도 12궁”과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이들 천체들의 다양한 현상을 가지고 점을 친다는 것이다. 칼 세이건(Carl Sagan)은 그의 저술 코스모스(Conmos)에서:
“Ptolemaios 시대의 대표적인 점성술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파피루스에 그리스어로 쓴 서기 150여년에 태어난 소녀의 별점(占星)이다.
‘귀여운 딸 Philoe 탄생, Antoninus Caesar 황제 10년, Phamenoth월의 15일에서 16일에 걸친 밤의 제1시, 태양은 쌍어궁(Pisces)에있고, 목성과 수성은 백양궁(Aries)에, 토성은 거해궁(Cancer)에, 화성은 사자궁(Leo)에, 금성과 달은 수병궁(Aquarius)에 있었다. 이 아이의 horoscopus는 마갈궁(Capricorn)이다.’”
“궁”(sign宮)과 “별자리”(Constellation座)의 차이점은 “궁”이 춘분, 하지, 추분 그리고 동지를 포함한 24절기에 따라 황도 360°를 춘분점에서부터 정확히 30°씩 12등분한 것이고 “좌”는 우리가 보는 하늘에 박혀있는 별자리를 지칭한 것이다. 그래서 궁이라는 것은 좌에서부터 생긴 것이다. Ptolemaios가 말하는 별자리와 궁은:
“춘분점에서(at the spring equinox) 상승궁(the sign rising)부터 시작하는 열두 성좌들(the twelve constellations)은 양좌(the RamKrion, Aries백양궁), 황소좌(the BullTauros, Taurus금우궁), 쌍둥이좌(the TwinsDidumoi, Gemini쌍자궁), 게좌(the CrabKarkinos, Cancer거해궁), 사자좌(the LionLeon, Leo사자궁), 처녀좌(the VerginPartheon, Virgo처녀궁), 천칭좌(the ScalesZugos, Libra천평궁), 전갈좌(the Scorpionsskorpios, Scorpio전갈궁), 사수좌(the ArcherToxotes, Sagittarius인마궁), 염소좌(the GoatAigokeros, Capricorn마갈궁), 물병좌(the WaterbearerHudrochoos, Aquarius수병궁) 그리고 물고기좌(the FishesIchthues, Pisces쌍어궁)이다.
황도 12궁들은 또 다시 그들의 용모(form)와 성(sex)과 기질(quality cold, warm, wet, or dry) 그리고 그것들이 속하는 원소(elements)에 따라 삼각형(triangles)으로 그룹지어진다.
백양궁(Aries)과 사자궁(Leo) 그리고 인마궁(Sagittarius)는 불 삼각형(the fire triangle)을 구성하고; 금우궁(Taurus)과 처녀궁(Virgo) 그리고 마갈궁(Capricon)을 흙 삼각형(the earth triangle)을; 쌍자궁(Gemini)과 천평궁(Libra) 그리고 수병궁(Aquarius)은 공기 삼각형(the air triangle)을; 마지막으로 거해궁(Cancer)과 전갈궁(Scorpio) 그리고 쌍어궁(Pisces)은 물 삼각형(the water triangle)을 구성한다.
360°의 원(cycle)에서 12궁들(the twelve signs)은 각각 30°씩을 차지한다. 또 각 궁마다 10°씩으로 나뉜 세개의 ‘데건들’(decansdekanoi)로 구분된다. 그것들은 때때로 독자적인 것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리고 매 궁(sign)에게 그의 성분(elements)과 기질(quality), 성(sex)과 모양(shape) 그리고 그 위치(position)에 따라서 고유의 용상들(features)이 지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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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설의 체계(the geocentric system)에 따르면, 지구에서부터의 거리와 1회전의 기간 길이에 따라서 그 순렬이 정해진 일곱개의 혹성이 있는데 그것들은 달(the Moon), 수성(Mercory), 금성(Venus), 태양(the Sun), 화성(Mars), 목성(Jupiter) 그리고 토성(Saturn)이다. 이 혹성들은 성(sex)과 기질(quality)에 따라서 등급지어졌다. 화성(Mars)과 토성(Saturn)은 Babylonia의 점성술에서부터 각별히 이어받은 용상(feature)은 흉성(凶星, malefics)으로 지목되었다....
Ptolemaios는 말하기를 惑星들(the planets)은 두가지 종류의 “座相”(aspect視座)이 있다고 했다. 그 하나는 황도대(the zodiac) 내에서 그 혹성들의 위치에 의해 정해지면서 동시에 혹성들 상호 비교에 의해서만 정해지는 좌상이다.
첫번째 좌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은 소위 ‘이디오프로소포스’(idioprosopos)라고하는 위치인데, 이 위치에 있는 혹성은 태양(the Sun)과 달(the Moon)에서부터의 동일한 원주형 거리에 놓였을 때 그 위치가 태양과 달의 ‘집’(domiciles)에서부터 있는 위치다. 그 ‘집’들은 각 혹성들에 의해 궁(sign)이 지배를 받는다.
태양과 달은 각각 오직 하나의 궁만을 지배한다. 사자궁(Leo)과 거해궁(Cancer)은 각기 별도이고, 그밖에, 혹성들은 각각 두개의 궁들을 지배한다.
수성(Mercury)은 쌍자궁(Gemini)과 처녀궁(Virgo)를 지배하고;
금성(Venus)은 금우궁(Taurus)과 천평궁(Libra)을;
화성(Mars)은 백양궁(Aries)과 전갈궁(Scorpio)을;
목성(Jupiter)은 인마궁(Sagittarius)과 쌍어궁(Pisces)을;
그리고 토성(Saturn)은 마갈궁(Capricorn)과 수병궁(Aquarius)을 지배한다.
집(domiciles)에 대해서 좀 더 첨가해서 말한다면, 각기 혹성들은 한개의 궁 안에서 특수한 곳에서는 ‘신체 기능의 이상 항진’(exaltation)이라는 힘을 가지게 된다....
두번째의 座相에 관하여 Ptolemaios는 말하기를 오직 두개의 위치(position)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즉 ‘접근’(the sunaphe or contact 또는 Kollesis) 또는 ‘들어붙는’(stickingcontactus, coniunctio, applicatio, or glutinatio) 위치 즉 두 혹성들이 동일 자오선상(meridian)에서 만났을 때 발생하는 위치다. 이 회합(conjunction)은 이탈(separationaporroia, defuxio)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궁들(signs), 데건들(decans) 그리고 혹성들(planets)이 지대(zones of the earth)와 인체(the human body) 둘 다 지배한다고 한다. 그것들 사이의 대응(the correspondence)은 地勢占星術(astrological chorography)또는 ‘오이코우메네’적 별의 영향(the sidereal infulences of the oikoumene)의 분포와 그리고 멜로데시(melothesy)또는 별들과 인체 사이의 대응의 원리에 따라서 분류된다. 세가지류의 ‘멜로데시’가 있다. 즉 궁들의 영향, 데건들의 영향 그리고 혹성들의 영향을 각기 고려하는 것들이다. 일곱개의 혹성들이 금속(melals), 돌(stones), 식물(plants), 그리고 동물(animals)과 대응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런 것들이 점성의술(astrological medicine)에 사용되었다....”
Roma 고전 문헌 작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Roma 사람들이 남긴 문헌들을 살필 때, 비록 그들의 작품들이 대부분 상실되어 어떤 것들은 단편적으로 전해오고 있지만, 그들의 사상은 Hella 사람들이 전해준 철학적 감화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알게 된다. 동시에 Hella 사람들은 Babylonia 사람들의 점성술의 감화가 지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서양 철학사에서는 Hella 철학자 Pythagoras, Platon 등등의 철학이 Posidonius를 통해 Roma에서 다시 꽃피게 되었을 때 그것을 가리켜 신-피타고라스 사상(Neo-Pythagorasism)이니, 신-플라톤 사상(Neo-platonism)이니 신-스토아 사상(Neo-Stoicism)이니 한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 입장에서 볼 때, 매우 경악스러운 것은 그 사상들이 소위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신학(또는 교부철학)에서 만개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Christianity)에 첨가된 것들이 많았는데, 심각한 것은 태양신 숭배일인 일요일(Dies Solissunday) 신성설과 영혼불멸설이다. Platon이 전해준 “Socrates의 변명과 국가론”을 위시해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록파이돈” 그리고 플라톤의 우주론 “티마이오스”(τιμαίος) ‧‧‧ 등등이 현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키케로가 라틴어로 번역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영국의 대석학 B. 럿셀(Bertrand Russell)이 Platon의 “티마이오스”에 대하여 서술한 것을 여기에 다시 간추려 본다.
“Platon의 우주론(cosmogony)인 ‘티마이오스’(τιμαίος)를 Cicero가 Latin어로 ‘티매우스’(Timaeus)로 번역하였다. 중세기 유럽에 알려진 Platon의 유일한 대화록(the dialogues)이었다. 그래서 이 Timaeus는 중세기나 그 이전의 Neo-Platonism 시대의 Platon의 그 어느 작품보다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Platon의 그 어느 작품보다 어리석은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상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이 작품은 철학으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가장 영향이 컸으므로 우리는 이 작품을 어느정도 상세히 고찰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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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영혼(the soul)에게 지능(intelligence)를 넣어주었다. 그리고 육신(the body)에 영혼을 넣어 주었다. 그는 전 세계(the world as a whole)를 영혼과 지능을 가진 하나의 생물체(a living creature)로 만들었다....
세계는 하나의 보이는 동물(one visible animal)이다. 그리고 그 속에 다른 모든 동물들(all other animals)을 포함하고 있다....
4원소인 불(fire), 공기(air), 물(water) 그리고 흙(earth)은 각각 수(number)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것들은 상호간에 영속적인 비례관계가 성립된다. 예로, 불이 공기에 대한 비례나 공기가 물에 대한 비례나 또 물이 흙에 대한 비례로 다 동일한 것이다..... 신은 먼저 영혼을 만들고 나서 육신을 만들었다(God made first the soul, then the bo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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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천체들은 동시에 생겨났다(Time and the heavens came into exietence at the same instant). 신은 그 피조물로 하여금 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하려고 태양(the sun)을 만들어 놓았다. 낮과 밤의 계기(the succession of days and nights)가 없으면 인간은 수(numbers)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으리라고 여겼다. 우리는 낮과 밤, 달(months)과 해(years)를 보고 수에 대한 지식을 얻어서 시간(time)의 관념을 주었으며, 이 때부터 철학이 생기게 되었다....
세계 전체는 하나의 동물이지만, 그 밖에도 네 종류의 동물들이 있다. 신들(gods), 새들(birds), 물고기들(fishes) 그리고 육상동물들(land animals)이다. 신들이란 주로 불(fire)이며, 항성들(the fixed stars)은 신적이며 영원한 동물들(divine and eternal animal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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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the Creator)는 모든 별들에게(each star) 각각 영혼을 하나씩(one soul) 주었다. 영혼은 감각(sensation), 사랑(love), 공포(fear) 그리고 분노(anger)를 갖고 있는데, 이것들의 극복 여부가 의롭게 살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훌륭하게 살면, 죽어서 그의 별 속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after dead, to live happily for ever in his star), 그러나 만일 악하게 살면, 저 세계에 가서 여자(a woman)가 될 것이며, 만일 거기서도 여전히 악하게 살면, 그때에는 짐승(a brute)이 되고 ‧‧‧ 신은 어떤 영혼은 땅위에 두고 어떤 영혼은 달, 그리고 어떤 영혼은 다른 혹성들과 별들에 두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의 육신들은 신들(gods)이 만들도록 놔두었다....”
플라톤의 이 “티마이오스”는 로마 제정시대에 로마 사람들에게 여러 면에서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 중 하나는 점성의술에 영향을 끼친 것인데, 의사 Galenos는 이 “티마이오스”를 의학적으로 주석 하여 책을 펴내어, 점성의술에 지대한 공을 남겼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교 신앙(Christianity)에 오늘날까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 교의 중 가장 거짓된 것으로 중요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즉 “영혼불멸설”은 플라톤의 저술 “파이돈” “국가론”과 함께 이 “티마이오스”의 감화에서 온 것이다. 1972년 대한기독교 서회에서 펴낸 “그리스도교대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논설했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순간을 서술하기 위해 쓴 대화편이다. 여기서 그는 죽음의 문제를 취급하였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침착성은 영혼불멸에 대한 플라톤의 신앙과 관련되어있다. 이 장면은 후기 그리스도교 교리로 될 많은 교리를 저술하고 이다. 바울이나 교부들의 신학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여기서 유도되었다고 볼 수 있으리만큼 영향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영혼과 육신의 분리를 죽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철학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영한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생이 죽음을 생성하듯이, 또한 죽음 은 생을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영혼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때도 영원성, 불멸성, 불변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에 접하게 된다. 실제의 현상 이데아와 감각적인 대상, 이성과 지각, 영혼과 육신 등의 이원론이다. 이 쌍방은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자가 후자의 경우보다 우월하다. 그런데 철학자는 다만 후자의 상태에서 해방된다고 보았다. 특히 철학자의 영혼은 사후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갈 것이며, 신들과 더불어 축복 가운데서 살 것이다. 그러나 육체를 사랑하던 사람의 영혼은 묘지를 왕래하는 귀신이 되어 이리와 독수리와 같은 신체 속에 들어갈 것이다. 참다운 철학자만이 죽어서 하늘로 간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어서 선한 영혼은 천국에, 악한 영혼은 지옥에, 그리고 중간적 영혼은 연옥에 간다고 결론지었다.”
프로페리티우스의 엘레게이아
프로페리티우스(Sextus Properitius, B.C. 50-16?)는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아씨시(Assisi, Umbria in Italy) 출신으로 고대 로마의 삼대 서정 시인들(갈루스 B.C. 70-??, Albius Tibullus, B.C. 54?-18?) 중 최연소자로서 가장 위대한 시인(The greastist elegiac poet of ancient Rome)이였다. 그는 Augustus 황제의 총신인 메케나스(Meccenas)의 애호를 받았으며, 간장을 애끓듯한 열정적이고도 짐심을 실토하는 시를 펴내 유명해졌다.
4권으로 된 그의 서정시 ‘엘레게이아’(4 books of Elegeia)는 B.C. 29년에 출판한 것인데 이것은 킨디아(Cynthia-본명은 Hostia) 부인에 대한 연정과 실연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프로페리티우스는 이 책 제4권에서 당시 로마사람들의 숙명론적 점성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이득을 보려고 신들을 회전시킨다네.
그래서 神 Jupiter도 그들의 그 금(gold) 때문에 멍청이로 저락되고 말았다네.
덕을 보려는 그 사람들은 갸우둥 기울어진 그 12궁의 별자리 원판을 몇번이고 자세히 살피면서 돌려댄다네.
오 가련해진 목성(the blessed star of Jove)이,
탐욕스런 별 화성(the greedy star of Mar)이,
한 두 사람 또는 모두에게 재난을 안겨다 줄 토성의 징후(the sign of Saturn that brings woe to one and all)가,
물고기 궁의 취향과 사자궁의 흉포스런 별자리와 그리고 서녘의 바다물에서(in the water of the West) 목욕한 염소궁이 빙글빙글 돌아가네”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
지금까지 世界最古의 小說로 알려진 ‘사티리콘’(Satyricon)이라는 작픔이 전해오고 있는데, 대부분의 고전학자들은 이것을 페트로니우스(Gaius Petronius, ?-66 A.D.)의 것으로 돌리고 있다. 페트로니우스는 특별한 총애를 받아 궁중에서 근무하면서 황제의 말벗이 되어주었다. 그는 나중에 지방총독으로 명을 받아 외지 생활도 했었던 Roma 제정 시대의 문인이요, 작가로 널리 정평난 관리였다. 페트로니우스의 저작으로 공인된 그의 이 풍자 소설 ‘사티리콘’은 현재 제15권과 제16권만 전해 오고있는데, 이 소설의 내용은 당시 한없이 퇴폐하고 문란했던 사회상을 묘사하고, 그 어지러운 세태와 사회 풍조를 냉혹한 조소로 비평한 작품으로써, 현존한 世界最古의 小說이다. 그런데 이 작품 속에 이런 글귀가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끈다:
“두개의 Calendar가 양 문설주에 박혀 있었다. 하나는 들어가면서, 내 기억으로는 오른 쪽에 ‘우리 주인 C씨는 12月 30日과 31日에 만찬을 하려고 애쓰신다.’(Our master C is out to supper on December the 30th and 31st)라고 쓰였고, 다른 쪽에는 달(Moon)이 자신의 운행코스를 일곱 별들(the sevsn stars)의 그것들과 같은 식의 운행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뿐아니라 거기에 길한 날과 불길한 날(Lucky and unlucky day)이 명확히 표시되어 있었다.”
유베날리스의 풍자시
“아직도 점성술의 편람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여자들을 멀리할찌어다.”
이 글은 Roma의 Domitianus황제 시대의 잔인무도한 정부와 귀족들의 무절제한 호화스러운 사치와 일반 시민들의 안일한 생활과 범죄의 다발 그리고 그 시대의 여성들의 무덕한 생활상 등을 풍자한 16편의 풍자시를 남긴 유베날리스(Decimus Junius Juvenalis, 60?-140?A.D.)의 것으로 여자들의 무덕을 풍자한 시편(bk. 6, lines 553-568)속에 담겨져 있다.
그의 시대에 Roma 여성들이 유난히 이 점성술에 커다란 흥미를 나타내고, 지나치게 관심을 쏟고있는 것을 격렬한 비난조로 풍자한 시 구절이었다. 부유층의 여성들은 가락지 모양으로 된 “링 카렌다”(Ring Calendar-이것은 일, 월, 화, 수, 목, 금, 토의 혹성 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매일 돌려서 그 날이 무슨 혹성 신의 날인가 하는 것을 늘 알게 한 장신구였다.)와 “Stick Calendar”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고고학적 증언들-유적지와 유물들
Julius Caesar 역
고대의 Rome Calendar 는 매우 불완전했다.
“기원전 750년경에는 1년을 304일로 하는 10개월이었고 세수는 춘분 경이었다. 즉 마르티우스(Martius)로 시작하여, 31일의 4개월, 그후는 30일이 6개월인데, 디셈베르(December)로 끝난다.... 기원전 710년경 누마왕 시대는 1년을 355일로 하고 2개월을 추가하였다.
야누알리스(Janualis, 門의 신) ‧‧‧‧‧‧‧ January
페브루알리스(Februalis, 재계의 달) ‧‧‧‧‧‧‧ Febru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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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1년 355일로 하면 1태양 년보다 10일이나 단축되었으므로 역과 계절과는 차이가 크다. 따라서 기원전 400년경부터 격년으로 23일 또는 22일의 윤년을 더함으로써 평년을 355일, 윤년을 377일 또는 378일로 하는 불완전한 태양력을 썼다....”
이것은 윤월의 길이가 너무 짧고 또는 1년의 길이의 장단이 심하여 Julius Caersar때는 계절과 너무 차가 심했다. 그래서, 그가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Sosigenes의 도움을 받아 개정하기에 이르렀다.
“케사르는 기원전 47년에 춘분 날을 로마의 제2대 누마(Numa Pompillius, BC. 715-673)왕 시대의 춘분날인 3월 23일로 하기 위하여 당연히 두어야 할 23일의 윤월에 다시 장월 2개월에 해당하는 67일을 붙여 445일의 1년을 만들었”다.
새로 제정하게 된 새 달력에 대해서 독일의 저명한 법학자로써, 고전학자이기도 했던 베를린 대학교 역사학 교수 몸젠(Theodor Mommosen, 1817-1903 AD.)은 로마의 고대 관습과 풍속에 관한 저술을 펴냈었는데, 아래와 같이 증언하여 일곱 혹성신 명칭으로 불리는 별의 칼랜다 즉 주일(week)도 병합했음을 보여주었다.
“케사르는 결국 헬라의 수학자 소시게네스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의 Eudoxus Calender에 따라, 이탈리아의 농민 역년(the Italian farmer's year)에다가 적절한 윤년제(a rational system of intercation)를 삽입하므로써 그 오점을 제거해 종교용과 관제용(religious and official use)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바로 이 시점에서 폐기된 구 달력의 3월 1일이 해의 시작이 되도록 해서 그 날이 1월 1일로 했다. 이 결과로 애당초 일반 시민 생활 속에 오랫동안 널리 이행해왔던 최고 행정관(시장, 지사) 임기의 교체를 위하여 정착되었던(1월1일)-이 또한 역시 해(the year)가 시작하는 칼렌다 기간으로 채택되었다. 두 가지 변경이 A.U.C. (Ab Urbe Condita-로마 도성 건설한 해부터 기산하여) 709년 정월 1일에 실시되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그 권위에 의하여 소위 율리우스 역(Julian Calander)의 사용이, Caser 독재가 몰락된 이후 오랫동안, 민주화된 세계의 정규적인 표준(regulation standard)으로, 그리고 대체적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집트인의 천문학적 관찰(astronomical observation)에서 유래된 혹성력(a star calender)이-확실하지 않으나 매우 섬세하게-Italy에 전승되었는데 그것은 칼렌다 날짜에 따라서 떠올랐다 지는 별들을 정돈한 혹성력에 대해 상세한 설명으로 된 포고령이 동시에 첨가되었다.”
이전 Calender에 없었던 이 별에 대한 Caesar의 칙령은 몇몇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로마의 유명한 전기작가 플루다아크(Plutarch, 46-119 AD.)은 저술 “황제열전”(DeVita Caesarum)에서:
“어찌되었던, 이 칙령은 케자르를 시기하고 그의 권력을 싫어하는 자들이게 비난할 호기를 주었다. 어느 한 사람이 이 칙령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리라’(Lyra거문고 성좌)가 내일 떠오를 것입니다라고 한 마디 소견을 말했을 때 웅변가 Cicero는 케자르가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이 제도를 수용토록 했다는 것을 넌지시 비치면서 대꾸하기를 ‘네, 그렇군요, 이 포고령으로’(Yes, by decree) 했다.”
우리는 이 율리우스 케자르의 새로 개정한 달력의 모형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 당시에 사용했던 것으로 학자들이 생각하는 돌로 만든 한 칼렌다 단편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칼렌다를 “사빈네 칼렌다”라 부른다.
Sabine Calendar
Odom은 그의 논문에서:
“1795년에 중부 이탈리의 한 지역에서, Sabine Calendar(Fasti Sabini)로 알려진 놀라운 한 단편 조각이 발견되었다. 이 조각들은 율리우스 칼렌다의 9월과 10월을 재차 보여주고 있다. (이 Sabine calender도 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1863 ed.,vol.1, part2, 302에 수록되어 있다) 고고학적 발견 물들 중에서 이런 표본(type)을 감정했던 한 전문가는 이것을 Augustus Caesar치세 기간의 것으로 판명했다. 즉 이것은 B.C. 19-A.D. 14년 사이에 (로마 도시 건국 735-757년 사이)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조상(figures)에 기록된 첫 번째 단(the first column)은 그 달의 날짜의 숫자가 순서대로 표시되었고, 둘째 번 단은 A, B, C, D, E, F, G와 같이 대문자로 주일의 칠일(the sevendays of the week)을 나타내 보였다. 셋째 단은 순열항목으로써 A, B, C, D, E, F, G 그리고 H의 글자가 ‘눈디나에’(Nundinae)라 불리우는 장날의 순환주기(the recurrence of the market days)로 표시되었다.....”
Roman Catholic 저술의 권위자로 널리 정평난 Herbert Thurston은 이 Sabine Calender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진술로 매우 명쾌하게 해설했다.
“동방의 칠일 기간(seven days period),또는 주일(week)이 황제 Augustus의 치세시 소개되었을 때(nundinae를 위해 쓰였던 것처럼) 같은 방법으로 처음에는 알파벳의 일곱 글자가 시간의 새로운 구분을 나타내기 위해 채용되었다. 사실에 있어서, 눈디나에를 나타내는 A에서 H까지의 여덟 글자로 된 주기(cycle)와 또 주일(week)을 나타내는 A에서 G까지의 일곱 글자로 된 주기가 나란히 함께 쓰여진 칼렌다의 단편 조각이 오늘날까지 소실되지 않고 남아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 2d ed., I, 220. The Philocalian Calender of A.D. 356[354], Ibid., 256에 나타난 같은 항목을 보라) 이 칼렌다의 고안(device)을 그리스도인들이 모방해서 만든 그들의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의 연월일 달력(calendars the days of the year from 1 January to 30 December)도 A, B, C, D, E, F, G 의 일곱 글자들이 반복적 순환주기로 기표되었다.”
로마의 Titus 황제의 욕실
로마 황제 티투스(Titus Flavius, 39-81 A.D.)가 토목공사로 남긴 것은 선황이 시작한 “콜로세움”(Colosseum)과 그 근처에 자신을 위해 만든 화려한 욕장(Titus’ Baths)이였다. 티투스의 욕실은 현재 파괴되어 Roma에는 없다. 본래는 콜로세움과 황제 트라자누스의 욕실(Trajanus’ Baths) 중간에 세워졌던 것인데 필자가 Roma에 가보니 콜로세움 경기장 주변 도로 확장으로 그 흔적마저 없어졌다.
그러나 매우 다행스럽게도, 190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독일의 19세기 최대의 고전 사학자인 동시에, 법률가이며 언어학자인 데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 1817-1903 A.D.)의 활약으로 문서로나마 오늘날까지 소상하게 전해오고 있다.
몸젠이 Italia 유학시절(1844-1847)에 이탈리아 전역에 남아있는 비명들(Incriptions)을 탐구하고, 고대사적 유물들(Antiquity on stone, iron and others)을 수집 연구하여;
1852년에 “네아폴리의 라틴어 비명들”(Inscriptiones regni Neapolitioni Latinae)을 위시하여
1863년부터 시작한 “라틴어 비명의 법령집”(Corpus Inscritionum Latinarum)을 출간하였고
1854-1856년에 “로마사”(Romische Geschichte, 3vols.)를;
1844년에는 5권으로 된 “로마제국 지방사”(the History of Roman Provinces, 5vols.)를;
1971-1888년에 “로마 헌법”(Romisches Staatsrecht)을;
1899년에는 “로마 기본법”(Romisches Strafsrecht)을;
1902년에는 언어학(Epigraphy)과 고고학(Archeology)에 관한 저술들을 출판했으며 그 외에 다수의 논문들을 발표한 바 있었다.
몸젠 경은 또 1848년부터 독일 Leipzig에서 법학과 고대사 교수를 시작해서, 1852년부터 Zurich에서; 1854년부터 Breslau에서; 그리고 1858년부터 다년간 Berlin 대학에서 교수로 활약했었다.
그는 그의 논문에서 Titus 황제의 욕실 내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로마의 Titus황제 욕실 벽면에서, 혹성 요일(planetary week)에 사용된 것으로 기대되는 아주 완벽한 星學的 公式칼렌다(the astronomical public calender)가 발견되었다(Guattani, Memorie Enciclopedie Sulle Antichita and Belle Artidi Rome, vol.6 (1816), Rome, 1817, 160 ff.; Le Anthiche Camere Esquiline dethe Comunemente delle Terme di Tito dis. ed ill. da Ant. de Romanis, Rome 1822 fol., 12, 21, 59). 그 정사각형 구조의 벽면에서, 윗줄에 일곱 혹성들이 하나씩 차례로 토성(손상되었음)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손상), 금성이 보였다. 이것들 아래에 백양궁(Aries-백양좌 Ram)의 像부호들(characters)부터 시작해서 금우궁(Taurus-황소자 Bull), 쌍자궁(Gemini-쌍둥이좌 Twins좌), 거해궁(Cancer-게좌 Crab), 사자궁(Leo-사자좌 Lion), 처녀궁(Virgo-처녀좌 Virgin), 천평궁(Libra-천칭 Scales), 전갈궁(Scorpio-전갈좌 Scorpions), 인마궁(Capricorn-염소좌 Goat), 수병궁(Aquarius-물병좌 Waterbearer), 쌍어궁(Piscis-물고기 Fish)의 원형을 이룬 황도 십이궁(the twelve signs of the 20diacina cirele)이 있다. 이것들 옆에 오른쪽으로 Ⅰ일부터 ⅩⅤ일까지, 좌편에 ⅩⅥ일부터 ⅩⅩⅩ일까지의 날들이 보였다. 요일과 열두 별자리와 그리고 날들 월 30일에 각각 구멍(hole)이 있는데 그 구명 속에 작은 손잡이가 발견되었다. 이 손잡이들을 가지고 위치를 이동하면, 달들과 날들 그리고 요일들이 표시되었다.”
Putoli에서 출토된 한 조각 칼렌다 단편
“이탈리아의 Naples에 있는 박물관 안에 A.D. 1세기에 속한 것으로 전해지는 한 돌 칼렌다(a stone calender) 단편이 보전되어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황제 네로 앞에 서기 위해 사슬에 매인 체 있었을 때 복음의 씨를 뿌렸던 로마의 항구도시 Puteoli의 한 지역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세줄로 새겨진 조각품 카렌다 명문(the calender inscription)이 그 한 조각의 돌에 보전되어 있었다. 그 첫째 줄에는 라틴어 “DIES”디에스“날”만이 나타나 있다. 둘째 줄에는 숫자로 보이는 ⅩⅥ, ⅩⅦ, ⅩⅧ, 그리고 X(Ⅸ)인데, 이것들은 루나르 달(Lunar month)의 30일중 16일, 17일,18일 그리고 19일이다.
셋째 줄에는 혹성의 이름들이 소유격 형태인 “(MERCU)RI”(메르쿠)리 "수성의”, “IOVIS”요비스 “목성의” 그리고 “VENERIS”베네리스 “금성의”로 쓰여졌다. 이것들은 혹성주일(the planetary week) 중 세 날들을 나타낸 것이며, 매우 자연스런 배열로 나타나 보인다.”
발견된 사실
영어에 “디즈아스터”(disaster)라는 명사형 낱말과 “디즈아스트러스”(disastrous)라는 형용사형 낱말이 있다. 이 두 단어들은 모두 한결같이 “재해”, “천재”, “재난”, “참사”, “흉사”, “큰 불행” 그리고 “비참한”, “불길한”, “흉악한”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낱말들은 “별”(star)을 의미하는 Latin語의 “aster”나 “astro”에다가 “非”, “無”, “분리” 그리고 “반대” 등으로 부정의 뜻을 강하게 강조할 때 사용되는 “dis”와 合成語로서 “별의 불길한 배치”(a bad configuration of the star) 즉 “나쁜 별”(a bad star)이라는 語原에서 온 것들이다.
그리고 또 영어의 “컨시더”(consider)라는 동사형 단어가 있다.
이 낱말은 “숙고하다”, “진지하게 생각하다”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낱말 역시 “함께” 있다는 Latin語의 “콘”(con)과 “별”(star)의 뜻인 “시데르”(sider)의 合成語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별과 함께” 있다는 의미인데, 이는 Roma 사람들 대부분이 별들의 位相 또는 용상(혹은 좌상)들을 하나 하나 자세히 살피고나서, 깊이 고려한 다음에야 행동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A.D. 321년에 “일요일 휴업령”(Sunday Rest Law)을 공포했던 Constantinus(재위, 306-337 A.D.) 대제 시대 전후의 Roma 사람들 대다수가 실제로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생활했었다는 사실을 A.D. 4세기에, 후기 로마제국(the later Roman Empire)의 역사를 기록해 남긴 Roma의 마지막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 b.c. 330-d. 395 A.D.)가 기록해 남긴 그의 저서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A.D. 330년경에 Syria의 Antioch에서 Greece 名門家의 자녀로 출생한 로마 최후의 중요한 歷史家(the last major Roman historian)로서 A.D. 378년에 이르기까지의 Roma 帝國의 歷史를 서술했다. 그는 콘스탄티우스 2세(Constantius Ⅱ, 337-361 A.D.) 통치 때 군복무 중 Gaul과 Persia 전쟁에 참전했었고, Antioch에서 제대한 후 Egypt와 Greece 전역을 여행하고, 드디어 Roma에 와서야 정주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Roma 황제 네르바(Nerva, 69-98 A.D.)에서부터 시작하여 황제 발렌스(Valens, 364-378 A.D.)의 죽음까지의 Roma帝國史를 Latin語로 저술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Roma의 위대한 역사가 다키투스(Cornelius Tacitus, b.c. 56-d.c. 120 A.D.)의 업적을 뒤어어 받아 Roma帝國史 저술 사업을 계승하게 된 셈이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역사서 “레룸 게스타룸 리브리”(Rerum Gestarum libri-the Chronicles of Events)는 본래 모두 31권으로 구성되었는데, 현재는 그 중에서 연대의 표제가 “353-378년”이라고 표기된 후반부의 18권만이 전해오고 있다.”
일찍부터 미국의 Havard 大學校 출판부에서 그리이스-로마(Græco-Roman)의 古文書들을 영역하여 “Loeb Classical Librory”라는 표제아래 해마다 Sieres로 출간해 왔었는데 이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역사서는 1935년에 출간했었다. 이것을 Daniel J. Boorstin이 “the Discoverers”라는 저술에서 인용한 것을 필자가 간접 인용하게 된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그의 로마 역사서에서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
“‧‧‧ 아직도 [Roma의] 많은 사람들이 점성술의 규률(the rules of astrology)에 따라, 水星의 位相(the situation of Mercury)과 달의 座相(the aspect of the moon)을 곰곰히 살피고 나서야 목욕을 하거나 식사를 하고, 또 公席에 나타난다. 심지어는 天體의 權勢의 存在(the existence of a celestial power)를 불경스럽게도 의심하거나 부정하던 저 세속적인 회의론자들(the profane sceptics) 사이에서도 이 허망한 믿음(this vain credulity)을 자주 발견하게 되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들 중 대다수가 이러한 점성술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루 24시간을 1시, 2시, 3시, ‧‧‧ 대신에 토시, 목시, 화시, 일시, 금시, 수시, 월시, 토시, 목시, 화시, ‧‧‧라는 개념으로 시간을 셈하는 이는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현재의 주일(week) 명칭이 점성술에서 사용했던 “태양신의 날” 곧 일요일(Sun-day)에서부터 시작하여 월, 화, 수, 목, 금 그리고 “토성신의 날”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조차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요일을 “태양신의 날”(the Day of Sun-god)로 생각하고, 이 날을 “길일”(吉日-the Lucky Day)이요 “성일”(聖日-Holy-Day)로 받아들였던 옛 Roma 사람들은-특히 고관직에 있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화요일” 곧 “화성신의 날”(the day of Mars)은 몸 조심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화요일”의 “화시”라든가 “토시”는 몹시 마음이 쓰이는 시간이었으므로 그날 그 시간의 “화성”(Mars)의 좌상(aspect) 또는 위상 곧 “황도 십이궁”에서의 위가 어떻한가를 유심히 살펴야 했다. 그런데, “화성의 날”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날이 있었다. 그 날은 “토성신의 날”(dies saturnius)이다. 이 토요일은 “흉일”(凶日-“dies nefasta” 또는 “dies nefatus”-an evil day)이기 때문이다. 특히 토요일의 토시나, 화시는 매우 조심해야 했다. 그래서 “화성”뿐만 아니라 “금성”(Venus)의 위상, “수성”(Mercury)의 위상도 이모 저모로 따져보고, 곰곰히 생각한 다음에서 나들이를 하거나, 공석에도 나간다.
현대인들이 듣기에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웃기는 일이지만, 독자가 만일, 영어의 “재난”(disaster)이나 “깊이 생각하다”(consider)라는 낱말들의 語原(etymology)과 그 유래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면, 그런 낱말들이 조성되어 가던 당시의 Roma 사람들의 점성술(astrology)에 대한 의식과 그리고 그러한 풍속으로 인하여,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the Sabbath-Day)이 흉일이었던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고초와 당하는 괴로움이 그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을 짐작하게 될 것이다. 그것 때문에 핍박을 받게 된 초기 로마의 그리스도교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곧 생존을 위하여, 어떤 명분으로라도 예배일을 “안식일에서 일요일에로”(from Sabbath to Sunday) 변경하려고 몸부림쳤던 상황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