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백발청년(白髮靑年)
좌혼지와 곽지산 등은 곧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청향각을 벗어났다.
배웅을 할 때 좌혼지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애틋한 데가 있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발한 후원을 지날 때 문득 곽지산이 좌혼지에게 물었다.
"어떤가? 지금 우리는 내 딸아이를 만나러 가려고 하는데 자네도 함께 가지 않겠나?"
그의 음성에는 은근히 같이 가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 있었다.
허나, 좌혼지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따님은 다음에 뵙지요."
좌혼지는 그가 말릴 사이도 없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형운비를 데리고 저만큼 멀어져 갔다.
곽지산은 우뚝 선 채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그만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여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군. 허나 여인들이 그를 놔주지 않을 테니 앞으로 한차례 여난(女難)을 피할 수 없을 것 같구나..."
그의 음성은 너무도 나직해서 한쪽에 서 있는 곽소홍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부터 제 이파 품검대회의 본선을 진행하겠소이다!"
"우와아...!"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함성이 단목세가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단목세가의 총관인 금적태세 화경홍은 중인들의 함성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우렁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본선에 진출하신 분은 무림 이십 사개 대문파의 대표 스물 네 분과 예선의 세 관문을 통과한 서른세 분을 합쳐 도합 쉰 일곱분이오. 이들을 추첨해서 상대를 골라 승부를 겨루어서 이긴 사람이 이차전에 진출하도록 하겠소."
비무대의 사방에는 일추의 여지없이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헌데도 화경홍의 음성은 그들의 머리를 타고 멀리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이것만 보아도 그의 공력이 얼마나 정심한지를 알 수 있었다.
"추첨에 앞서 이번 대회를 더욱 공정하게 진행하게 하기 위해 모신 두 분의 참관인을 소개하겠소."
황경홍은 비무대의 가장 우측에 마련된 두 개의 의자위에 앉은 인물들을 가리켰다.
"먼저 한 분은 본 세가와 함께 무림의 이대세가로 불리우는 상관세가의 가주이신 도군(刀君) 상관대연(上官大衍), 상관대협이시오."
"와아아...!"
우렁찬 환호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 개의 의자 중 우측에 앉아 있는 이목이 수려하고 탐스런 수염을 기른 황삼(黃衫)의 중년인이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향해 포권을 해보였다.
중인들은 너도나도 목을 길게 빼고 그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앞으로 몰려들었다.
도군 상관대연!
그는 검풍단목세가와 쌍벽을 이루는 도혼상관세가(刀魂上官世家)의 가주일 뿐만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제일의 도객(刀客)이었다.
알려지기로는 그가 일단 도를 발출하면 아무도 그의 삼도(三刀)를 받아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삼도무적(三刀無敵)이라는 영예로운 칭호까지 붙어 있었다.
화경홍은 다음에 상관대연의 옆에 앉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백미화상을 가리켰다.
"이 분은 너무나도 유명하신 천하제일신승(天下第一神僧) 료료대사이시오!"
"와아아아아...!"
조금 전보다 더욱 요란한 함성이 울려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점잖게 일어나서 손을 흔들어 보이는 백미의 노화상은 모든 무림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료료대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배분으로만 따지면 환우삼기보다 오히려 반 배(背)가 더 높은 그야말로 당금 무림의 최고 배분일 뿐만 아니라 무공이 측량할 수 없을만큼 심오하고 불심(佛心)이 깊어 살아있는 생불(生佛)이라고까지 불리우고 있었다.
참관인 소개가 끝나자 화경홍은 비무방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비무방법은 쓸모없는 인명손실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정했소. 즉 두 분의 참관인께서 현격한 무공격차가 있다고 인정하거나 십초 이내에 상대에게 부상을 당했을 경우 패한 것으로 간주하겠소. 물론 본인이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고 물러나거나 도전을 포기하는 경우도 포함하오."
그의 마지막 말에 중인들이 와 하고 웃었다.
어느 누가 기껏 본선까지 진출해서 싸우지도 않고 포기를 하겠는가?
화경홍도 입가에 가는 미소를 매달며 다시 낭랑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럼 지금부터 추첨을 시작하겠소."
곧 쉰 일곱 명의 본선진출자의 명단이 적힌 함이 마련되었다.
그들 중 아홉 명은 일차전을 치루지 않고 부전승(不戰勝)으로 이차전에 진출하게 되어 있었고 나머지 마흔 여덟 명은 추첨을 통해 정해진 상대와 한바탕의 격전을 벌여야 했다.
그렇게 해서 서른 두 명의 이차진출자가 결정되게 되는 것이다.
추첨은 약 일각이 걸렸다.
운이 좋게도 형운비의 이름은 아홉 명의 부전승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형운비는 자신이 싸우지도 않고 이차전에 진출하게 되자 반쯤은 실망하고 반쯤은 기쁜 이상야릇한 표정이 되었다.
좌혼지는 그의 심정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
"녀석.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다른 사람들의 무공실력을 봐두는 것도 좋은 일이지."
형운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어차피 이차전에서는 싸워야 하니까 그동안이라도 좀 더 실력을 길러둬야지요."
좌혼지는 그의 머리를 툭 쳤다.
"하하... 하루만에 실력이 부쩍 는다면 그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하지만 남들이 싸우는 것을 보는 것도 훌륭한 공부가 된다."
그때, 화경홍의 음성이 귓전에 들려왔다.
"첫 대결은 섬서(陝西)의 혈검추혼(血劍追魂) 장대명(章大命)대협과 민남파(悶南派)의 청학(靑鶴) 조맹견(曺孟堅)대협이오!"
그들은 시선을 비무대로 향했다.
화경홍이 비무대 아래로 내려서자 서쪽에서 한 사람이 대 위로 날아올랐다.
날카로운 인상의 몸이 비쩍 마른 흑의중년인이었다.
그가 바로 섬서성 제일의 고수인 혈검추혼 장대명이었다.
그가 우뚝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대 위로 청영이 어른거렸다.
휙!
한줄기 청영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무려 이십여 장을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우와! 최고다!"
중인들 틈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장대명의 앞에는 어느새 청의를 입고 키가 헌칠한 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가 바로 민남파의 제일고수인 청학 조맹견이었다.
장대명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조맹견을 쏘아보다가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들었다.
창!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보기만 해도 으스스한 시뻘건 혈검이었다.
"손을 쓰겠소."
그는 혈검을 든 채 조맹견의 중단(中段)을 겨누었다.
조맹견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안에서 길이가 작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단검은 겨우 길이가 겨우 한 자 남짓해 보였는데 기이한 예기가 이글거리고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옥비(斷玉匕)라는 것이었다.
원래 민남파의 독문병기는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계조겸(鷄爪鎌)이었다.
계조겸은 익히기가 무척 어려운데 반면에 그만큼 초식이 괴이하고 악독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무림인들이 그 외문병기(外門兵器)에 목숨을 잃었는지 모른다.
허나, 이번 품검대회는 명칭 그대로 검 이외의 다른 병기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조맹견은 계조겸과 가장 흡사한 단옥비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장대명은 신중한 눈으로 조맹견과 그의 손에 들린 단옥비를 바라보고 있다가 두 눈을 번뜩이며 무섭게 달려 들었다.
"이야얍!"
날카로운 호통소리와 함께 주위가 그의 혈검의 그림자로 시뻘게졌다.
파파파팍!
그의 검세는 마치 칼날처럼 매서웠다.
조맹견은 단옥비를 바짝 움켜잡은 채 우뚝 서 있다가 장대명의 검세가 자신의 코앞으로 날아들자 슬쩍 어깨를 흔들었다.
스으으...
별다르게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장대명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쐐액!
조맹견의 손에 들린 단옥비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장대명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 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날카로웠는지 수십 년 동안 섬서를 주름잡았던 장대명조차도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허겁허겁 몸을 돌렸다.
조맹견은 바짝 그에게로 달려 연거푸 일곱 번이나 검을 휘둘렀다.
쑤와앙!
질풍같은 검영이 순식간에 장대명의 전신을 뒤엎어버렸다.
조맹견의 이 한 수는 귀양인비(歸陽人飛)라는 것으로 원래는 계조겸으로 사용하는 초식이었으나 단옥비로도 또 다른 위력이 있었다.
장대명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사력을 다해 혈검을 휘둘렀다.
채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담담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장대명은 안색이 백짓장처럼 변한 채 왼팔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왼팔은 어깻죽지부터 길게 베어져 핏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와아!"
군웅들의 함성소리가 비무대를 들썩거렸다.
조맹견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단옥비를 거둔 채 장대명을 바라보았다.
장대명은 얼굴을 실룩거리다가 고개를 수그리며 힘없이 대 아래로 내려갔다.
첫판은 간단하게 민남파의 제일고수인 조맹견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형우비는 이것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자의 단검은 매우 무섭군요. 전 장대명이 이길 줄 알았는데..."
좌혼지는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맹견은 장대명이 상대할 수 없는 고수다. 그가 원래의 무기인 계조겸을 사용했다면 장대명은 일초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형운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로 차이가 나나요?"
좌혼지는 피식 웃었다.
"고수들 간의 승부는 남들이 생각한 것만큼 길지가 않다. 아주 약간의 차이로도 순식간에 승부가 날 수 있지. 두 사람이 서로 십초 이상을 겨루었다면 그들의 무공은 백지 한 장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대명이 비록 조맹견에게 이초만에 패했지만 그들의 무공은 반 수(手) 정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에게... 겨우 그 정도요?"
"그런 차이라도 그들과 같은 절정고수들과의 싸움에서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실력이 엇비슷한 고수들간의 승부는 그래서 그들의 무공보다는 임기응변과 그날의 심리적 상태, 주변 여건 등에 많이 좌우되지."
좌혼지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맹견과 장대명과의 싸움은 병기에서 차이가 났다. 조맹견은 단검을 사용했고 장대명은 장검을 사용했으니 접근하면 장대명이 절대적으로 불리하가. 그런데도 장대명은 너무 쉽게 조맹견의 접근을 허용했다. 이런 상태라면 무공의 고하(高下)를 떠나서 장대명은 결코 조맹견의 적수가 될 수 없지."
"아! 그렇다면 조맹견과 싸우는 사람은 무조건 그의 접근을 허용치 말아야겠군요?"
"무조건은 아니다. 너무 그가 접근하는 것만 견제하다보면 의외로 낭패를 볼 수가 있지."
형운비는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접근을 시킬 때 조심을 하면 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언제든지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상태에서만 접근을 허용해야 한다."
형운비는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 참 어렵군요."
"그래서 자고로 병기는 일촌장(一寸長), 일촌강(一寸强), 일촌단(一寸短), 일촌험(一寸險)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병기가 길면 유리한 점도 있지만 반대로 병기가 짧으면 상대하기가 힘이든다. 하지만 진정한 고수라면 상대의 병기가 길던 짧던 상관하지 않는다.
병기의 대소유무(大小有無)에 상관없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야만 강자라고 할 수 있지."
형운비는 그의 마지막 말을 음미하느라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 좌혼지가 빙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이제 무림제일의 쾌검을 한번 구경해보자."
형운비가 그 말에 퍼뜩 놀라 고개를 쳐드니 어느새 대 위에는 두 명의 인물이 올라와 있었다.
우측의 인물은 체구가 건장한 텁석부리 장한이었다.
그는 구대문파(九大門派) 중 점창(點蒼)에서 대표로 파견된 사일신검(射日神劍) 추양(鄒陽)이었다.
점창은 예로부터 그 검법이 날카롭고 빠르기로 유명했다.
추양은 점창에서도 제일고수로 쾌검의 달인이었다.
허나, 지금 그의 얼굴은 바짝 긴장된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한 인물이 우뚝 서서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앙상할 정도로 비쩍 마른 몸매...
힘줄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깡마른 손...
아무런 표정도 담겨있지 않은 무심한 눈길...
바로, 우내칠검 중의 일인이며 천하제일쾌검수인 일검구주섬 마립이었다.
추양의 검이 아무리 빠드라 하나 어찌 마립에 비할 것인가?
허나, 그의 두 어깨에는 점창의 명예가 걸려 있었다.
설사 패한다 할지라도 싸우기도 전에 패배를 자인하고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추양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마립의 한기가 서릴 정도로 무표정한 동공을 응시하다가 서서히 검자루를 잡아갔다.
마립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중인들은 절로 마음이 긴장해져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두 사람을 주시했다.
추양은 검자루를 잡은 채 한동안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땀이 배어나와 검자루를 잡은 손이 축축해졌다.
그래도 그는 아직 발검(拔劍)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 한 순간,
"차압!"
추양의 오른 손이 거의 보이지도 않게 움직였다.
파앗!
동시에, 한줄기 빛살 같은 섬광이 그의 허리춤에서 피어올라 마립의 목덜미로 쏘아져 갔다. 그것은 사일검법(射一劍法) 중의 최절초인 후예만궁(后峠彎弓)이었다.
중인들의 눈에 마립의 길다란 몸이 추양의 장검에 꿰뚫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
번쩍!
마치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섬광이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추양은 검을 앞으로 쑥 내민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목에는 어느새 마립의 장검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아..."
중인들 틈에서 누군가의 답답한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립의 쾌검!
그것은 그야말로 거의 환상과도 같았다.
털썩!
추량의 몸은 차가운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제야 중인들은 정신을 차리고 손바닥이 부서져라 박수를 쳤다.
"우와아아..."
"최고다... 과연 고금제일 쾌검수답다!"
주위가 온통 중인들이 내지르는 함성에 파묻혀 버렸다.
형운비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손뼉을 쳤다.
"굉장하군요... 정말 굉장해요... 그렇지 않아요, 사부님?"
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좌혼지를 바라보았다.
좌혼지는 눈을 빛낸 채 마립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저 자의 쾌검은 확실히 빠르군."
형운비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물었다.
"저 사람의 쾌검보다 빠른 검이 있을까요?"
좌혼지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빠르다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생각인 것이다. 따라서 최상이란 존재하지 않지. 지금은 저 자의 검이 가장 빠르지만 언제고 저 자보다 더 빠른 검수가 나올 것이다. 어쩌면 벌써 나와 있는지도 모르고..."
그의 말에는 묘한 여운이 담겨져 있었다.
형운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마립은 이미 내려가고 추양의 시체도 이미 치워졌다.
추양은 이번 품검대회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지만 아무도 그를 더 이상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목숨보다 승리가 더욱 소중하게 기억되는 곳!
그것이 바로 무림인 것이다.
곧이어 비무대위로 한 사람이 올라왔다.
그는 체격이 당당하고 준수하게 생긴 황삼인이었다.
등에는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로 커다란 장검을 둘러메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중인들 틈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패천검이다!"
"영웅회의 제일고수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눈에 불을 켜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칠척의 거구를 자랑하는 황삼인은 우내칠검 중의 일인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후기지수, 패천검 위지천승이었던 것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재수 옴 붙었군 그래. 첫판에 위지천승과 맞붙다니..."
"그러게 말일세. 그 자야말로 이번 대회의 최고 불운아(不運兒)로군..."
사람들은 이런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만큼 위지천승의 지금까지의 행적은 찬란했다.
"패천검 위지대협과 겨룰 분은 사천(四川)에서 오신 마검(魔劍) 유장령(柳長靈)소협이시오."
대 아래에서 화경홍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한 사람이 위로 천천히 걸어 올라왔다.
그는 짙은 회의를 입은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얄팍한 입술에 매부리코를 가져 차가운 인상이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머리카락이 온통 새하얀 백발이었다.
아니 비단 머리카락 뿐만 아니라 눈썹마저 눈부시게 하얗다.
얼굴은 분명 이십대의 청년이건만 전신의 털이 새하얀 모습은 왠지 기이함을 넘어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헌데 그가 나타난 순간,
"음..."
좌혼지의 눈빛이 더 이상 강할 수 없을만큼 강렬해졌다.
그 눈빛이 어찌나 강했던지 옆에 있던 형운비가 무언가 서늘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을 정도였다. 그때는 이미 좌혼지의 눈빛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허나, 그의 시선은 백발청년의 얼굴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위지천승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백발청년을 바라보았다.
백발청년의 전신에서 어딘지 모르게 사이(邪異)한 기운이 풍겨왔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에게서는 털끝만큼도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단지 머리카락이 하얗다는 것 외에는 누가 뭐래도 그는 준수한 청년이었다.
위지천승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몸을 우뚝 세웠다.
"조심하시오. 본인의 검은 무겁소."
그는 정파의 제일기재답게 솔직하게 자신의 장점에 대해서 말했다.
사실, 그의 등 뒤에 매어있는 패천검은 무게가 무려 칠십 근이나 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천부의 신력(神力)을 지닌 그가 이 장검을 한번 휘두르기만 하면 누구도 감히 정면으로 맞받지 못했다. 아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데, 백발청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단지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묵묵히 위지천승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위지천승의 눈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기분 나쁜 자로군.)
그는 천천히 검자루를 잡아갔다.
"나는 손을 쓰겠소. 유형은 검을 뽑으시오."
그래도 백발청년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어디에도 검을 차고 있는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위지천승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힘주어 검자루를 잡았다.
(무례한 자로군.)
그는 서서히 노화가 끓어오름을 느끼며 검을 뽑았다.
스르릉!
마치, 용이 울부짖는 듯한 검명과 함께 눈부신 검광이 피어올랐다.
"손을 쓰겠소. 조심하시오."
검광 속에서 위지천승의 중후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파파파파팍!
사방이 질풍노도같은 검풍에 휩싸여 버렸다.
반경 수십여 장에 달하는 드넓은 비무대가 온통 검광에 휘감기며 대 전체가 흔들거렸다. 중인들은 이 엄청난 위력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백발청년의 모습은 검광에 가려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허나, 좌혼지는 검광이 몸에 닿기 직전 백발청년이 처음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알았다. 백발청년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검광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의 쌍수가 기이하게 휘둘러졌다.
순간,
콰콰콰쾅!
엄청난 폭음이 비무대를 송두리때 무너뜨릴 듯 터져나왔다.
대 근처에서 구경하고 있던 중인들은 불어닥치는 강풍을 피해 허겁지겁 몸을 날려야만 했다.
"크윽!"
미친 듯이 회오리치는 강풍 속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중인들은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노려보았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눈앞에 실로 너무도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던 것이다.
위지천승의 거구는 십여 장이나 밀려나 거의 대의 한쪽 귀퉁이에 닿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했던 그의 모습은 처참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두건은 흐트러져 헝클어진 머리가 허리춤까지 내려와 있었고 황의는 여기저기가 찢겨져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게다가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수중에 들고 있던 패천검도 가운데가 뚝 부러져 있었다.
패천검!
무게 칠십 근에 달하는 만년강철로 만들어진 희대의 보검이 어이없게도 상대의 가벼운 손짓에 부러지고 만 것이다.
위지천승은 후들거리는 몸을 억지로 세워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웩!"
그는 시커먼 핏덩이를 한사발이나 토해냈다.
그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는 경악과 고통이 가득한 떨리는 눈으로 백발청년을 바라보았다.
백발청년은 언제 손을 썼느냐 싶게 처음의 자세 그대로 우뚝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어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문득 생전 열릴 것 같지 않던 백발청년의 얄팍한 입술이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살짝 열렸다. 동시에 도저히 인간의 음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일장(一掌)을 받고도 쓰러지지 않다니 기초가 잘 되어있는 놈이로군. 허나 다음에도 내 앞에 뻣뻣이 서 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맘을 마치자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대 아래로 내려갔다.
중인들은 경이와 두려움에 찬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크윽!"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던 위지천승이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하며 거구를 휘청거렸다.
"형님!"
중인들 틈에서 한마디 외침과 함께 두 개의 인영이 대 위로 날아왔다.
그들은 육웅중의 쾌도번천 종후와 환영신창 양홍이었다.
그들은 급히 금시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위지천승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들의 안색은 걱정과 비탄이 가득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피땀 흘려 쌓아올린 위지천승의 명성은 이것으로 하루 아침에 허물어지게 된 것이다.
위지천승은 입가로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그들의 부축을 뿌리치고 스스로의 힘으로 비무대를 내려갔다.
종후와 양홍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의 뒷모습이 유달리 처져 보였다.
중인들은 한 영웅의 비참한 말로(末路)를 지켜보는 듯한 야릇한 비애를 느끼며 대 아래로 사라져가는 위지천승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비한 백발청년!
사천에서 왔으며 마검 유장령이 그의 이름이라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는 이 신비한 인물은 혜성처럼 품검대회에 나타나 천하를 뒤흔들어 놓았다.
아무도 그의 정체나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단 한번이라도 그를 보았던 사람이 없었다.
그는 마치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내린 것처럼 너무도 돌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마검 유장령!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패천검을 단 일수에 박살내버리는 그의 무공은 과연 어떤 것인가?
좌혼지의 눈빛은 이상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