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옥 - (실연의 노래)(1934)
유도순(범오) 작사 / 김준영 작곡)
1.♬)
말 못할 이 사정을 뉘게 말하며
안타까운 이 가슴 뉘게 보이나
넘어가는 저 달도 원망스러워
몸부림 이 한밤을 눈물로 새네
2.♬)
풀 언덕 마주앉아 부르던 노래
어스름한 달 아래 속살거린다
잊어야 할 눈물의 기억이던가
한 때의 한나절에 낮꿈이런가
3.♬)
상처진 옛 기억을 잊으려 하나
잠 못 자는 밤만이 깊어가누나
귀뚜라미 울음이 문틈에 드니
창포밭 옛 노래가 다시 그립다.
배우와 가수를 겸했던 전옥
영화배우 전옥은 1911년 함흥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전덕례(全德禮)이지요.
함흥 영생중학교 2학년 때 가세가 기울자 집에서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배우가 되고싶어 극단을 기웃거렸던 그는 부모를 설득해 오빠 전두옥(全斗玉)과
함께 서울로 내려갔습니다.전옥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스타로 있던 토월회 문을 두드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습니다.
당시 16세의 전옥은 사슴 같은 눈에 콧날이 오뚝하여 이목구비가 뚜렷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토월회(土月會) 무대에 섰고 <낙원을 찾는 무리들>
(황운 연출·1927)에서 주연을 맡은 경험도 있었습니다.<잘 있거라>에 출연한 그는
돈에 팔려 부호에 시집가는 황순녀 역을 능숙하게 잘 해냈습니다.
예명을 전옥으로 쓰게 된 것은 오빠의 이름 전두옥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전옥은 곧 신일선을 대신해 나운규 프로덕션의 대표 여배우가 되었고, 연이어
<옥녀> (1928), <사랑을 찾아서>(1928)에서 주연을 맡으며 스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성공의 기회가 꼭 한번은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전옥에게도 드디어
그러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25년 토월회 창립 2주년 기념공연으로 작품 <여직공 정옥>이 광무대에서 상연되던
어느 날 그 연극에서 주인공으로 연기하던 석금성이 관객이 던진 사과에 배를
맞았습니다. 임신 중이던 석금성은 졸도했고 그녀를 대신하여 전옥이
무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전옥은 토월회 무대에서 착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이후 극단이 해산하게
되면서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오빠를 따라 무대를 떠나 영화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맨 처음에는 나운규와의 인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28년 17세의 전옥은 오빠의
전문학교 시절 친구이자 가수,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강홍식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 강홍식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노래를
생방송했고 방송극에도 출연했습니다. 1929년에는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으나 이내 토월회가 문을 닫자 지두환이 세운 조선연극사의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드는 독백으로 유명했으며 비극의 여인 역을 잘 해
'비극의 여왕',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1930년대 전옥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많은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발매된 그녀의
음반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발표한 여러 노래들과 <항구의 일야(一夜)>로 대표되는,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을 레코드에 담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중 1934년 남편
강홍식이 발표한 <처녀총각>은 10만장이라는 엄청난 양이 팔렸습니다. 큰돈을 번
강홍식은 한 일본여자와 바람이 나서 가정을 떠났고 해방 후 월북했습니다.&
그녀는 라미라가 극단에서 나운규의 <아리랑>을 다시 각색한 <아리랑>(1943)을
비롯해 많은 가극을 공연했습니다. 가극에 출연하면서 그녀는 다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대 일제가 철저히 통제했던 영화계는 친일적인 시국영화만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지만리>(1941), <망루의 결사대>(1943), <병정님>
(1944)이 당시 그녀가 출연했던 군국영화입니다.
해방 후 전옥은 전국순회공연을 하던 남해위문대를 백조가극단(白鳥歌劇團)으로
개칭하여 악극을 공연했습니다. 당시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1부에 전옥이 나오는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가 공연됐고, 2부에는 버라이어티쇼로 고복수, 황금심 같은
유명 가수들의 무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수많은 악극단이 명멸했던 그 당시, 전옥의
백조가극단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으며 공연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즈음 전옥은 극단의 살림을 맡던 일본 유학출신 최일(崔一)과 재혼했습니다.
50년대 중반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전옥은 다시 영화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1957), <눈 나리는 밤>(1958), <목포의 눈물>(1958)
등을 영화로 만듭니다. 60년대 이후 전옥은 무대와 다른 모습으로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소년시절 제가 대구극장에서 보았던 것이 바로
<눈 나리는 밤>이었지요.
1969년 10월 전옥은 고혈압과 뇌혈전 폐쇄증이 일어나 5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
었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남과 북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영화배우 최민수의 모친인 배우 강효실과 북한의 대표적인 배우 강효선이 그의 딸입니다.
가수로서의 전옥은 영화의 선전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제가나 관련되는 곡들을 직접
부른 경우가 많습니다. <실연의 노래>(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 천지방웅 편곡,
1934)는 1930년대 초반 당시 유행하던 풍조 중의 하나인 자유연애 사상을
한껏 고취시켜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