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신년 특집<7> : 로마서연구)
2.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느님의 구원의 방법>
죄가 왕 노릇하여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것같이,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함으로써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신다(로마5,19-21). 아담 안에서 우리에게는 절망뿐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출생했는데 어떻게 아담에게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은 죄들은 그분을 믿음으로 바로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데(법리적 구속), 아담의 DNA(원죄)에서는 어떻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주님의 보혈이 우리를 아담에게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길 수는 없다. 오늘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가 출생으로 아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오직 죽음으로서만 아담 안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의 본성(원죄)을 없애버리려면 우리의 옛 생명이 죽어야만 한다. 죄의 속박이 우리의 출생으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죄의 해방은 오직 죽음으로서만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이다. 원죄에서의 해방의 비결은 바로 우리의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오직 죽음으로서만 거기서 나올 수 있다.
로마6,2-3절은 ”2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로써 그의 죽으심의 현실 안으로 영입되어서 죄에 대하여 죽은 셈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죄와 죽음을 극복하셨기 때문에, 세례를 통하여 이 사건과 결합(연합, 일치, 하나)을 맺은 사람에게는 죄에 지배당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믿는 이들은 죄 짓는 그들의 생명을 벗어나려고 힘쓰고 노력하다가 결국 죄의 생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한탄한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옛 생명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그러나 구원의 길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죽이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우리를 처리하셨다는 것을 시인하는 데 있다.
사도 바오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우리에게 설명해 준다. 만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우리를 처리하셨다면, 그분 안에 있을 때는 하느님의 구원의 방법이 효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은 하느님이 하시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실상 우리는 우리 힘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갈 길이 없다. 또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안 되는 일을 하느님께서 이미 이루어 주셨다. 어떻게 이루셨는가?
1코린1,30절은 ”너희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말한다. ”너희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되었는가? ”하느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일은 우리가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가려고 계획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완성하신 역사이다.
히브리서 7장의 예증에서 아직 출생하지도 않은 레위를 포함하여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 안에서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다. 그들이 개별적으로 드린 것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이 드릴 때, 그들이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드림 안에 그의 모든 자손이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의 예표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 모두가 죽었다. 그때 우리가 아직 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죽음은 개별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또한 그분 안에서 죽은 것이다. 2코린5,14절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우리도 못 박혀 죽은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미 그리스도 안에 두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그리스도에게 행하신 모든 일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행해진 것이다. 우리는 그분과 같은 운명이다.
무릇 그분이 체험한 바를 우리도 체험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한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이 이미 못 박혔으므로 하느님께서 다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실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힐 때 우리도 못 박힌 것이다. 헬라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말할 때 사용된 단어는 부정 과거 시제로 되어 있다(로마6,6; 갈라2,20; 5,24; 6,14).
그분의 못 박히심이 과거의 일이라면 우리의 못 박힘은 결코 장래의 일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힐 때 우리도 못 박힌 것이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육신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도 못 박혔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그분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영원한 사실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죽고 그분의 피를 흘리심으로서 죄없는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를 속죄하시고 하느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만족케 하셨다.
오직 하느님의 아들에게만 이런 특권이 있다. 그분 외에는 구속 사업을 분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성경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피를 흘렸다는 말씀이 없다. 이는 그분만이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구속 사업을 이루실 수 있고 어느 누구도 이것에 참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은 단지 피를 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우리도 함께 죽게 하려 하심이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고 그분의 죽음 안에 당신과 내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자주 ‘대신하여 죽었다’는 말과 ‘함께 죽었다’는 말로 주님의 죽으심의 두 방면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우리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이 우리 편에서 시작된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다. 그래서 자신이 주님과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먼저 주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죽음 안에 이미 포함시킨 사실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주님의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 나를 그분과 함께 죽은 위치에 두셨다.
이 말은 당신더러 그분과 함께 죽으러 감으로써 그의 죽음 안에 포함되라는 뜻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이미 포함시킨 것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하다고 느낀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만유를 포함한다. 예수님의 부활도 만유를 포함한다. 코린도전서 1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같은 서신 끝부분에서 우리는 이 사실에 관한 더 풍성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
1코린15,45절은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한다.
1코린15,47절은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그분을 두 번째 아담이라고 부르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분을 마지막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둘째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안에 극히 중요한 진리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분을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총체이시고, 둘째 사람으로서 그분은 새로운 족속의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여기에 두 연합이 있다. 하나는 그분의 죽음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부활에 관한 것이다.
첫째는 그분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인류와 연합되셨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는 베들레헴에서 시작되어 십자가와 무덤에서 종결되었다. 그분은 아담 안의 모든 것을 그분 자신 안에서 종결시키고, 그런 다음 그것들을 심판과 사망으로 이끄셨다. 둘째로 그분은 둘째 사람으로서 우리와 연합되었는데, 이것은 부활로 시작되고 영원으로 종결된다.
그분의 죽음은 첫 사람을 제하셨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목적이 첫 사람에게서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새 족속의 머리가 되셨다. 이 새 족속에게서 하느님의 목적이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분은 마지막 아담의 신분으로 못 박히셨다. 첫 사람 아담 안의 모든 것이 그분 위에 집합되어 제해졌다.
우리는 다 그분 안에 포함되었다. 그분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옛 족속을 제하시고 둘째 사람으로서 새 족속을 이끌어 오셨다. 그분은 부활안에서 둘째 사람이 되셨고, 이 안에 우리도 포함되었다. 로마6,5절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한다.
마지막 아담 안에서 우리는 죽었고, 둘째 사람 안에서 우리는 살아났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를 아담에게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하느님의 권능이다. 우리의 옛 역사는 십자가에서 끝났고, 우리의 새 역사는 부활로부터 시작된다.
알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