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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 | 키워드 | 내 용 | 학년 |
1 | 1978 | 유림마을 출생. 순흥 안씨 양공공파 28대손. 음력 1월 8일 고달픈 말띠의 삶 시작. | ․경북 경주 유림마을은 내 어릴 적 좋은 풍경이다. 강과 숲 속에서 자랐다. ․족보를 자랑할 정도의 가문은 아니지만 부모님은 나를 특별하게 키우셨다. ․생일인 음력 1월 8일이 양력으로 발렌타인데이다. 초콜릿이 싫다. ․말띠지만 생일이 빨라 뱀띠들과 경쟁하며 살았다. 뱀을 정말 싫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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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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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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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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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1982 | 외갓집 일상. 오줌싸개의 당당함. | ․어릴 적 외갓집에 자주 보내졌다. 외할머니, 외숙모 모두 편하게 대해주셨다. 오줌을 싸고도 늘 당당했다. 소심해서 말도 잘 못하던 유년 시절에도 외갓집에서의 일상은 늘 부끄럼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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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1983 | 손가락 사고.
사방 약수터 사진 찍던 풍경. | ․토마토 농사 중이던 밭에 놀러 갔다가 경운기에 손가락을 넣어 오른손 중지 일부가 절단되었다. 이식수술 후 35년 가까이 지났다. 아직 손에는 흉터가 남아 있다. ․사방 약수터에 놀러 갔다가 친구와 사진을 찍었다. 포즈를 취하는 것이 너무 부끄러워 아버지는 수십 번 셔터를 눌러야했다. 사진은 자연스럽게 찍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이때 배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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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1984 | 초등학교 입학.
교정 어느 나무 밑. 친구(군인의 아들).
학교 앞 문방구.
멀기만 한 등교길.
|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동네에서 혼자 입학했다. 친구들은 모두 다음해에 입학했다. 친구인데 학교에서는 선후배로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원래부터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더 조용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학교 교정의 어느 나무 밑에서 친구와 과자를 나눠먹던 풍경이 기억난다. ․군인의 아들이었던 친구가 부러웠다. 학교 바로 옆에 있는 부대에 친구의 집이 있었다. 그 집엔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신기한 물건이 많았다. 친구 엄마가 내어주신 쥬스 컵 하나도 정갈해 보였다. ․학교 앞 문방구에는 신기한 것이 많았다. 백원이면 충분했던 여러 가지 군것질 거리와 뽑기 게임. 용돈을 따로 받지 않던 시절 그것들을 사겠다고 엄마에게 용돈을 요구했다. ․지금 걸으면 삼십분도 안 될 거리지만 당시에는 무진장 길었던 등굣길이었다. 이십대에 학교를 다시 찾았을 때는 그 높던 담도 낮아보였다. | 초1 |
8 | 1985 | 책읽기의 두려움.
시립도서관, 등하교길.
웅변학원, 시쓰기.
주산학원
| ․2학년이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큰 소리로 교과서를 읽는 것이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1학년 때, 먼발치에서 보이는 2학년 형․누나들의 책 읽는 소리가 무섭게만 느껴졌다. 2학년이 되어 책 읽는 것이 두려웠다. 막상 큰소리 책읽기는 별 것 없었다. 두려움이라는 것이 별 것 아닐 수도 있음을 알았다. ․버스를 타지 않을 경우 등하교 길이 도로, 숲, 철길로 다양했다. 숲으로 가는 길엔 시립도서관이 생겼다.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만나는 것이 마냥 좋았다. ․소극적이어서 웅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원고를 읽거나 시를 쓰기도 했다. 백지를 마주하고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돌아오던 날의 먹먹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주산학원에도 다녔다. 선생님이 “일원이요, 오월이요, 십일원이요 …”라고 외치며 산만한 리듬으로 연습하던 풍경이 재밌었다. | 초2 |
9 | 1986 | 잦은 병치레.
구구단.
수호의 죽음.
만화가.
산 넘어 눈길.
닌자 훈련. 황성공원.
비디오세대
| ․어렸을 때부터 병치레가 잦았다. 딱딱할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팔 근육이 의외로 팔배게로는 제법 포근했다. ․이학년 때 떼는 구구단을 삼학년이 되어도 잘 외우지 못했다. 그 상처 때문인지 암기 과목은 모조리 자신이 없다. ․친구 수호가 죽었다. 아버지 형제간의 불화로 몰래 고향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처음으로 친구의 사라짐을 알게 되었다. 수호의 형도 우리 형의 친구였다. 우리 집에 와서 밤새 우는 수호의 형을 보았다. 죽음이란 것을 잘 모를 때였지만 소리 없이 울었다. ․처음 가졌던 꿈은 만화가였다. 친구 집에 가서 함께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일찍 포기했다. 그림 실력도 스토리 구성력도 내겐 없었다. ․어느 겨울날 외갓집으로 가는 버스가 끊겼다. 폭설 때문이었다. 엄마랑 동생과 함께 산길을 걸어 외갓집에 갔다. 어둔 밤 눈길에 미끌어져 넘어지며 서너 시간 만에 외갓집에 도착했다. 산 속에서 꼼짝 없이 죽을 수도 있었다는 공포를 경험했다. ․황성공원에서 닌자 흉내 내다 죽을 뻔했다. ․마을에서 멀지 않았던 황성공원은 자주 놀러가던 곳이었다. 운동기구, 송림, 씨름장, 김유신 동상까지 다양한 장소가 있었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놀이가 무궁무진했다. 고등학교 때는 후배들 군기 잡으러 가기도 했다. ․친구들과 강으로 숲으로 뛰어다니며 흙을 만지며 놀았다. 어느 집에 모여서 비디오만 보던 후배들이 걱정스러웠던 시절도 있었다. | 초3 |
10 | 1987 | 머리 꿰메기.
투석사건(동생). 마당의 농기구.
일탈(학원), 우뢰매, 집에서 숨어있기.
태권도 시범.
| ․친구들과 놀다가 머리가 깨져 꿰메었다. 이때부터 어딘가에 부딪히면 피가 나는지 예민하게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동생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돌을 던졌다가 형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자다 일어나 대문 근처에 있던 화장실을 가려다 마당의 농기구를 잘못 밟았다. 어느 코미디 단막극이나 만화에서나 볼 수 있던 장면이다. 괭이 머리를 잘못 밟아 자루가 튕겨 올라 머리를 가격했다. 그 뒤로는 뭐든 조심한다. ․친구와 주산학원을 빼먹고 당시 이슈였던 우뢰매 영화를 보러갔다. 첫 일탈이었고 무서웠다. 혼날까봐 뒷마당 감나무에 숨어 있었다. 가족들이 찾기 시작했지만 끝내 못 찾을까 무섭기도 했다. ․운동회 날 태권도 시범을 했다. 품새는 어렵지 않았으나 격파 시범 중에 실패했다. 아프지 않았지만 쪽팔려서 무지하게 아픈 척 했다. | 초4 |
11 | 1988 | 짝꿍(가난과 글씨).
보리개떡, 컴퓨터.
외할아버지 장례.
철길의 추억.
연탄가스 중독.
뱀.
| ․아주 가난했던 짝꿍이 있었다. 냄새가 나는 친구였지만 글씨가 반듯했고 선생님이 그 친구를 이뻐하셨다. 보잘 것 없어 보이던 친구의 숨은 성품(?)이 고상해 보였다. 사람의 매력은 외형에 있지 않음을 처음 깨달은 것 같다. ․아버지가 약주하고 오셔서 보리개떡 먹던 시절의 어려움을 얘기하셨다. 잔병치레 많고 소심한 나를 걱정하셨다. 해보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라고 하셔서 컴퓨터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그 이후로 가끔이나마 하고 싶은 것을 말하며 살기 시작했다. ․무섭기만 했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셨던 외할아버지는 항상 엄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영정사진에서조차 밝은 표정이 없으시다. 처음 장례를 치르던 외갓집 풍경이 기억난다. ․마을 주변의 철길에서 위험천만한 놀이를 많이 했다. 우산의 살을 잘라서 철길에 올려 놓고 기차가 지나가면 칼 모양이 만들어졌다. 이웃 동네에서는 철근을 올려 놓으면 진짜 칼이 만들어질 거라고 기대하는 것을 보고 미쳤다 생각했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 왔더니 식구들이 연탄가스에 중독되었다가 겨우 회복하고 있었다. 가족을 잃을 수도 있었다는 아찔함을 처음 알았다. ․아담과 하와도 뱀의 꾀임에 당했다. 말띠로 태어나 뱀띠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도 싫었다. 세상에서 제일 징그럽고 무서운 것이 뱀이다. 하교길에 길에서 나무 조각인 줄 알고 주으려다 꿈틀 거리는 것을 보고 멈칫거렸는데 그게 뱀이었다. 너무 놀랐고 그 이후로는 먼 길을 돌아오더라도 그 길은 다시 다니지 않았다. | 초5 |
12 | 1989 | 전학생 친구와 사진관.
컴퓨터학원(프로그래밍), 독한 선생님.
| ․사진관 집 딸이 전학 왔다. 화사한 모습도 놀라웠고 사진관에 걸려 있는 웃는 모습의 사진이 참 인상적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정말 독하게 공부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선생님이 정말 독했다. 문제를 던져주고 하루고 이틀이고 혼자 해결하게 했다. 울어도 소용이 없었다. 텅 빈 학원 교실에서 혼자 끙끙거리면서 프로그래밍을 했다. 처음으로 절망감을 맛보았고 그것을 뛰어넘는 희열도 경험했다. | 초6 |
13 | 1990 | 미션스쿨.
멋.
찢어진 청바지. 사촌형의 그늘. 미모와 언변.
휴가를 이긴 컴퓨터.
| ․중학교는 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미션스쿨이었다. 종교 수업이 있었고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수업을 진행했다. 첫 수업시간에 출석을 부르면 ‘귀합니다!’ 라고 대답하게 하셨다. 스스로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며 그렇게 가르치던 목사님의 교육이 참 인상적이었다. ․첫 국어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고등학생의 멋에 대해 말씀하셨다. 고등학생 쯤 되면 진정한 멋에 대해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등교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사촌형은 학교 내에서 알아주는 주먹이었다. 사촌 형 덕분에 든든했다. ․정말 예쁜 과학선생님이 계셨다. 그런 선생님의 말투는 최악이었다. 외모와 말의 교양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족 여행도 가지 않고 혼자 컴퓨터 프로그래밍 공부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큰 결심을 하셨다. 당시로써는 정말 비싼 컴퓨터를 사주셨다. | 중1 |
14 | 1991 | 교복.
학교폭력. 한문과 국사.
친구의 안경(졸업앨범).
교감 선생님의 격노.
기타.
| ․교복이 도입되었다. 다른 학교 교복은 멋있어 보이는데 우리 학교 교복은 인민군복 같은 것이 선정되었다. 차라리 찢어진 청바지가 좋았다. ․학교 폭력을 당한 적 있었다. 결국 형이 찾아왔고 학교에서 공론화 되고 나서야 해결되었다. ․국사 선생님이 국사 성적과 한문 성적을 비교해서 체벌했다. 한문을 좋아해서 잘했고, 국사에 별 관심이 없어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국사 선생님은 독하게 가르치는 한문 선생님 덕분에 그런 것이라 여겼다. 전교생을 그렇게 체벌했고 나는 학교에서 제일 많이 맞은 아이가 되었다. ․친구와 싸워 안경 쓴 친구의 얼굴을 때렸다. 덕분에 친구는 멍든 눈으로 졸업앨범을 찍었다. 사과 한 마디로 끝났지만 평생 미안함을 안게 되었다. ․교정의 분수대에 돌을 던지며 놀다 교감 선생님이 야단 치셔서 모두 교실로 도망 왔다. 교실로 교감 선생님이 찾아 왔고 도망갔다는 죄로 내가 대표로 심하게 맞았다.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대략 20년 가까이 쳐왔지만 악보 없이 연주하는 곡이 하나도 없다. 부모님이 노래하시는 모습을 거의 본 적 없지만 두 분은 음치시다. 형도 동생도 음치다. 나도 음치인 것 같다. 다행히 아내는 음치가 아니다. 더 다행인 것은 딸아이는 절대음감이 있다. 그렇지만 예체능은 취미였으면 좋겠다. | 중2 |
15 | 1992 | 은사님.
독서회와 학교 도서관.
문학과 자율학습. 독서실과 야간 잠행.
고입준비.
교회.
| ․글과 신앙, 삶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 은사님이 계시다. 기간제 교사이셨기 때문에 그 이후로 뵌 적이 없다. 사람 찾아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꼭 선생님 찾고 싶었다. 잘 계신지 궁금하다. ․학교 독서회 서클 회장이었다. 책 읽기는 학교에서 1등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매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오곤 했다. ․자율학습 시간에도 고전과 소설을 읽었다. 그저 좋았다. ․친구들과 공부한다고 독서실에서도 해보고 밤에 교실로 기어들어와 촛불을 켜고 공부했던 적도 있었다. 성적에 큰 도움은 되지 않았고 참 쓸데없는 공부 방법이었다. ․고입 준비가 특별할 것이 없었다. 다니던 중학교와 붙어있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일류 고등학교는 아니었다. 내 성적 수준에 맞춰 자연스럽게 고입 과정을 거쳤다. ․부끄러워 교회 나가는 것도 잘 못하다가 큰 용기를 내어 다시 가기 시작했다. 약 이백 명 가량 되던 학생들 앞에서 새로 왔다고 인사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였는지 그때 그게 너무 싫어 교회 가기를 주저했다. | 중3 |
16 | 1993 | 형산문학회. 수상이력.
버티기.
전교 석차. 마지막 승부의 불편함.
농구(자존심).
뮤지컬. | ․조동화 선생님(시조시인)께서 지도하시는 형산문학회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각종 대회에서 6개의 상을 받았다. 그대로면 졸업하기 전까지 수십 개는 수상하고 크게 성장할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글쓰기는 보잘 것이 없음을 알았다. 날고 기는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청마상, 목월상을 휩쓰는 것을 보면서 글 쓰는 것의 한계를 경험했다. ․써클 선배들은 글쓰기 외에도 서클 활동을 강압적으로 유지해 왔고 때려 치고 나갈 것인지, 버티면서 글쓰기를 계속할 것인지 고민하며 기압을 받던 때가 있었다. 결국 3년을 버텼다. 그러나 글쓰기가 획기적으로 성장하진 못했다. ․처음으로 전교 3등을 했다. 그 뒤로 전교 십 위권 안에는 다시 못 들어봤다. ․운동은 잼병이지만 형 때문에 농구를 일찍 시작했다. 굉장히 잘하는 줄 알았다. 당시 드라마 '마지막승부'의 등장으로 농구 붐이 일었다. 어느 농구장이든 사람이 많이 늘어나서 불편했다. ․옆 동네에서 농구 한 게임하자고 해서 호기롭게 응했다가 완패했다. 친구들 모두 농구의 자존심이 짓밟혔던 아픈 기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친구 중 하나는 그 학교의 농구부 주장이 되고, 또 한 친구는 체육특기생들을 다 제치고 도내 MVP에 올랐다. 지금은 다들 농구랑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 나름 잘 했는데 … ․교회에서 봤던 뮤지컬은 충격이었다. 음향과 배우들의 연기와 목소리는 온몸을 전율케 했다. | 고1 |
17 | 1994 | 산문쓰기.
편집부장.
지육부장.
깡패.
선배들의 비화.
배고픈 시인.
눈물의 기도회.
독창.
| ․시를 잘 쓰는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시로는 승부할 자신이 없어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게 화근이었을지 모르겠다. 시 써서 받지 못하던 상을 산문 쓰고서 몇 개 받았다. 평범한 일상을 글로 풀어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잘 쓰는 줄 알았다. 배우면 배울수록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수준인지 깨닫고 있다. ․써클에서 편집부장이었다. 문집을 만들고 후배들을 가르치는 중요한 자리였다. 실력이 뛰어난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저 열심히 한다는 이유로 내가 하게 되었다. 어디 가서 큰 상 하나 받지 못하던 내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자리였다. ․교회에서 지육부장이었다. 조용한 사람에게 조용히 섬기는 자리가 주어졌다. 교회 구석구석을 꾸미고 연말에 문집을 만들었던 경험은 참 적당한 일이었던 것 같다. ․교회 친구들과 밤길을 걷다 깡패들을 만났다. 가진 돈 다 빼앗기고 눈에도 퍼런 멍이 들었다. 덕분에 아버지는 교회를 못 나가게 하셨다. 그 이후엔 도서관 간다고 말씀 드리고 교회를 다녔다. 이때부터 밤 거리와 사람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써클 선배들의 비화가 재밌었다. 학교에서 공부도, 주먹도, 글쓰기도 모두 최고였다고 한다. 그래서 써클실 중에서도 가장 구석지고 넓은 자리를 차지했다고 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서 가끔 찾아오곤 했다. 그러나 글을 붙들고 사는 선배들이 별로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시를 쓰는 일은 배고픈 것이니 잘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차라리 산문이 돈이 된다는 말씀에 괜히 으슥해지기도 했다.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 가르치면서 글을 쓰고 싶었다. 대학 진학은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 지금도 글과 별로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글을 써갈 것이다. ․술을 마시면 안되는 나이에 친구들이 술을 마셨다. 한 친구가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암으로 투병 중이시며 사이비 종교 집단에 가서 무리하게 절하며 돈 쓰고 있다고 한다. 별의 별 발광을 해도 듣지 않으시는 어머님을 두고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회장이었던 친구가 교회에 가서 기도하자고 해서 교회 다니지 않던 친구들까지 모두 교회로 갔다. 회장이 다니던 교회 지하 기도실에 술 취한 고등학생 열 서너 명이 눈물 흘리며 소리 지르며 기도했다. 친구 어머님은 오래 살지 못하셨다. 시를 잘 쓰던 친구였다. 삶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작품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봤다. ․교내 독창 대회에 나갔다. 소심한 내가 독창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경험이라 생각한다. 물론 예선 탈락이었다. 세명이 예선에 나섰고 결선에 두명이 올랐다. | 고2 |
18 | 1995 | 집현전(기숙사).
라면.
콜라와 식빵.
공로상. 농구. 들장미의 가시. 진학고민. | ․고3 시절은 기숙사에서 살았다. 그리 공부 잘하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반에서 세 명씩 선발해서 꾸려진 기숙사였다. 정규 수업 시간만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나머지 모든 일과는 기숙사에서 지냈다. 그렇게 공부해도 좋은 대학에 가진 못했다. ․친구와 학교 앞 분식집에 라면을 먹으러 자주 갔다. 라면 위에 놓여진 만두를 모두 걷어내 내게 얹어주던 친구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분식집을 해서 만두를 안 먹는다고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먹어왔던 토마토를 먹지 않는다. 아내는 과수원집 딸이라 사과를 먹지 않는다. 그 만두, 토마토, 사과를 팔아 우리를 먹이고 공부시켰는데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른다. ․기숙사에서 주말에는 밥이 제공되지 않았다. 학교 앞 매점에서 가끔 콜라와 식빵을 사 먹었다. 특별할 것 없는 콜라와 식빵이 아직도 좋다. ․졸업하면서 문예 부분 공로상을 받았다. 글쓰는 재주를 길렀어야 하는데 상만 받고 졸업했다. ․고3 시절에도 땀 흘리며 농구했다. 공부나 글쓰기를 그리 열심히 했으면 조금 달랐을지 모르겠다. ․기숙사 앞에 있던 들장미를 꺾으려다 가시에 찔려 고생했다. 줄기도 질겨 꺾질 못했다. 잎이 붉게 타오르기 위해 겨울 내내 시린 땅바닥이 견뎠다. 줄기는 험한 풍파를 견디도록 질기디 질긴 삶이 되었다. 화려한 꽃 잎 아래에 숨겨진 가시가 우리 네 삶을 보여주는 것 같다. ․담임선생님과 진학 상담이 이뤄졌고 신문방송학과를 추천하셨다. 문학과 기사는 다른 건데 같은 글쓰기니 잘해 보라고 하셨다. 특차 전형에 덜컥 합격해 버렸다. 먼 길을 돌아오게 되었다. | 고3 |
19 | 1996 | 전공.
방황.
동기모임과 IVF.
대학 기숙사.
군대 결정.
철학과의 싸움.
입학식/학생운동.
교회 형의 죽음.
| ․학부제도, 학과군 제도라는 기이한 제도의 피해자다. 내가 입학한 학교에서는 학부제도도 아닌 학과군 제도를 운영했다. 내가 속한 학과군은 철학‧사학‧신문방송학과군이었다. 이 무슨 연결도 안 될 전공을 묶어 놓았는지 당황스러웠다. ․대학교 1학년은 방황의 시기였다. 그렇다고 술 마시며 허랑방탕하게 살 위인은 못되었다. 그냥 삶이 무기력했다. ․교회를 다니지 않던 고등학교 동창이 대학 와서 IVF라는 선교단체에 가입했다. 궁금해서 동기모임에 따라 갔다가 참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저 편하고 따듯했다. 그 덕분에 IVF 선교 단체에서 4년간 활동했다. ․지방에 있던 대학이라 기숙사가 컸다. 학생 유치를 위해 기숙사를 하나의 유인책으로 정한 것 같다. 딱 한 학기 자취해 보고 기숙사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았다. 그 한 학기를 제외하고 일곱학기 내내 기숙사에서 살았다. 심지어 방학 때 고향에도 가지 않고 기숙사에서 살았다. 때론 집보다 더 편했다. ․생일이 빨라 징병검사를 받지 않았지만 군대를 어찌할지 고민해야했다. 전공 때문에 방황하던 것을 알았던 지라 재수를 허락받았지만 하지 않았다. 재수를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군은 평생 나약하게 살았으니 조금 강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만용으로 장교가 되어보기로 결심했다. ․1학년 때 전공기초로 철학수업을 들었다. 서양철학사 수업은 졸음과의 싸움이었다. 무슨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이야기를 2학기 내내 들었다. 이름도 못 외울 수많은 철학자와 그들의 이야기는 끔찍했다. 최근에 글 공부하면서 철학도 필요하다고 조금 살펴보았지만 그 시절의 악몽이 되살아 난다. 책 보면서 잠들기를 반복한다. 철학은 깊이 공부하면 안 되는 것 같다. 대충 어떤 학파인지 뭘 주장했는지 정도만 이해하고 그런 시각으로 보려는 시도 정도만 해보면 되는 것 같다. ․학교 측에서 마련한 입학식이 운동장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학생회에서 주관하는 입학식이 학생회관 앞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학교와 학생회가 따로 놀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입학식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어느 선배가 와서 우리를 데리고 학생회관 앞으로 갔다. 학생회가 준비한 입학식은 요란하고 불편했다. 그냥 기숙사로 올라갔다. ․교회 형이 사망했다. 교통사고였다. 뇌사상태로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 희망이 남아있던 상태였는데 형의 아버지께서는 결단을 내리셨다. 장기를 모두 기증하고 형은 세상을 떠났다. 똑똑하고 착한 형이었다. 공부를 잘해 서울의 좋은 대학에 갔던 형이다. 안타까운 죽음이다. 아버지로서 어찌 그런 결단을 내리셨는지 알 수 없다. 형의 친구들은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다.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은 하지만 그래도 헤아리기 어려운 밤이었다. | 대1 |
20 | 1997 | 사라진 선배들.
식중독.
담당자.
국문학 복수전공. MBTI.
도종환 시집.
서양문화사.
| ․아침 모임을 위해 동아리방으로 갔는데 동아리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선배들이 사라졌다. 그 선배들은 오후에 나타났다. 들어보니 밤 사이에 경찰이 들이닥쳐 학생회관에 있던 모든 학생을 연행해 갔다고 한다. 연세대에서 있었던 학생 운동(경찰이 학교로 들어와 진압하였고 한총련과 관련해 제법 큰 사고였다.)을 거론하며 참가했었는지 동조했는지 등을 물었고 집요한 심리 끝에 풀려나서 돌아왔다고 했다. ․개학 전날 식중독에 걸렸다. 먹을 걸 다 토하고 위액까지 토하고서야 병원에 갔고 식중독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입원해서 생애 첫 내시경 검사를 했고 정말 가혹했다. 다시는 내시경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 마음 먹고 지냈다. 최근 수면 내시경의 신세계를 경험했다. ․맡은 역할이 많았다. 동아리 전체 모임 담당자이기도 했고 후배들을 가르치고 배워야하는 일들이 많아서 부담이 많았던 시기였다. ․국문학 복수전공을 시작했다. 영문학 부전공이 필수였으나 선택으로 바뀐 것을 확인하고 바로 국문학을 복수전공하기로 했다. ․MBTI 검사를 처음 해봤다.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는데, 나와 친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얻었다. ․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후배가 도종환 시집을 선물해 줬다. 아직도 서재에 잘 꽂혀 있다. 이후에도 종종 책 선물을 받곤 했다. 그게 시간이 지나도 제일 가치 있는 선물인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주변에 간단히 선물할 일이 있으면 책 선물을 하는 편이다. ․석좌교수님께서 서양문화사 수업을 했다. 시험 답안은 반 이상을 원어로 쓰기 원하셨다. 시험 칠 때는 연필로 초안을 작성하고 볼펜으로 고쳐 쓰면서 원어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은 원어로 바꾸느라 바쁘게 시험을 쳤다. 구라파가 유럽이라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 대2 |
21 | 1998 | 시창작론.
한국어전산처리.
고향과 눈.
불편했던 선배.
간사님 서재(같은 책)
. | ․수업 듣는 동안 십여 편의 시를 썼다. 돌아가면서 낭송을 하고 합평하는 시간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썼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별다른 칭찬을 듣지 못했다. 시는 역시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전산 시스템에서 한국어의 사용에 대한 수업을 들었다. 온라인으로 이것저것 해보고 각종 프로그램에서 한글 구현의 문제점 등을 공부했다. 문장의 바른 표현을 더 많이 배운 것 같다. 운영체제나 각종 프로그램 대부분이 국산이 아닌 가운데 한글이 IT 분야에서는 어렵게 쓰이고 있고 언젠가는 한글이 외면 받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땐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2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혼자 걱정은 하고 있다. ․눈이 많이 내렸다. 오르막길이 많은 학교에 차가 다니지 못했다. 쌓인 눈을 보면서 부산에서 온 친구는 눈이 쌓인 풍경을 처음 본다고 했다. 눈싸움이나 눈사람 만들기를 해본 적 없다는 부산 출신의 친구가 불쌍했다. 고향에는 눈이 쌓이면 할 게 많았는데 향수의 의미도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복학생 선배와 사이가 좋질 않았다. 그냥 학과 활동 잘 안한다는 게 이유다. 대학생이 되어도 불편한 선배는 있었다. ․동아리 지도 간사님 집 서재에는 같은 책이 2권씩 꽂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같은 선교단체에서 만나 결혼하신 사이라, 사모님이 결혼 전에 보던 책을 함께 모아 두어서 그런 것이었다. 간사님 댁에 놀러 가면 그런 책 얻어오는 재미가 있었다. | 대3 |
22 | 1999 | DPM 담당자.
연구회.
Net IVY.
논문.
소설.
멘토링.
농구대회 우승.
| ․매일 아침 기도 모임 담당자가 되었다. 무엇이든지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일을 굉장히 부담스러워 했는데 매일아침 기도 모임을 담당했다. 전날 콘티를 다 짜고 일찍 자고 정해진 자리를 지키는 고된 일을 일 년간 잘 해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인문학부에서 컴퓨터 좀 다를 줄 안다는 사람들이 모여 연구회를 만들었다. 인문학과 전산학의 만남이라고 나름 자부심을 갖고 모임을 했지만 기존 멤버 외에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연구회 멤버들 중에 너무 사업가의 눈에 띈 멤버들이 회사를 꾸렸다. 멤버 중 일부는 관련된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인문학 전공자가 전산 관련 일을 더 잘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관심 있는 일이 직업이 되는 게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학부 졸업하면서 논문을 쓰게 되었다. 남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한국어의 위기에 대해 쓰면서 공격도 많이 받았지만 그래도 쓰고 졸업했다. ․단편 소설을 한편 썼다. 소설창작론 수업을 들으면서 기말 과제가 단편 소설 한편을 써서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게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이다. 다시 소설 쓰게 될 날이 없을 것 같다. ․대학 졸업하면서 아끼던 후배가 있어서 평생 멘토링의 관계를 맺기로 했다. 졸업하고 2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니 1년에 한번 연락이 닿을까 말까 한다. 코로나 상황이 되니 더 어렵게 살고 있을 것 같아 연락하기가 미안하다. ․교내 체육대회에서 농구로 우승을 했다. 공과대, 이과대 다 제치고 인문대에서 우승을 했다. 내가 주전이긴 했지만 정말 농굴 잘하던 선배 셋이 복학하면서 일궈낸 결과다. 그래도 운동으로 우승이라는 것도 해본 게 있다니 다행이다. | 대4 |
23 | 2000 | 졸업풍경.
입대, 사관후보생.
임관. 전방체험.
소대장, 81미리 자부심.
스파게티.
갈증과 수박.
| ․졸업식은 학사모 쓰고 가족들과 간단하게 사진 한 번 찍고 마무리했다. 동아리 사람들과 졸업 예배를 드리고 동기들과 웃으며 찍은 사진 한 장 남았다. ․4월 6일 입대했다. 육군 제3사관학교에서 사관후보생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딱 죽기 않을 만큼 훈련 받았고, 강인해졌다. 육체적 단련과 더불어 심적 훈련도 부단히 해야 했다. 동기들이 포기하고 돌아서기도 했다. 군인이 되고 장교가 되었다. ․정훈 장교가 되고 싶었으나 전공 특성상 보병장교로 임관했다. ․전방 체험을 위해 15사단과 7사단을 다녀왔다. 병사들의 일상을 보면서 더 강인한 군인이 되어야 했다. ․강원도 화천의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81미리 박격포 소대장이었다. 병사들이 박격포에 대한 자부심과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부소대장은 병사들 괴롭히는 게 일과였고 중대장은 내가 약해 보여 걱정을 많이 했었다. 그저 진심으로 병사들 대하고 맡은 바 임무 완수하며 열심히 살았다. 오직 명령에 따르는 삶이 많은 것을 배우게 했다. ․자대에 가기 전에 서울에서 만났던 후배가 치즈오픈스파게티를 사주었다. 군에서 먹을 수 없는 특별한 맛이었다. 자대 배치 이후 주말에 부대 밖에서 식사할 기회가 있으면 선배들은 매운 짬뽕을 먹으러 가고 나는 혼자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다. 혼자 식사하는 것이 진짜 싫어했었지만 스파게티는 혼자 먹으러 갈 용기를 내었다. ․후보생 때 진지 구축 실습을 하면서 땡볕에서 다들 갈증에 허덕일 때가 있었다. 나는 물을 아껴 먹는 편이어서 수통에 물이 많이 남아 있는 반면 동기들 대부분 수통이 텅 비어 있었다. 아끼던 물을 나눠주면서 그들의 고마움이 오히려 불편했다. 엄마에게 먹을거리 부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해 여름에는 휴가 때 수박 먹고 싶다 얘기했던 기억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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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2001 | 철책.
통문장.
크레모아.
911테러.
사라진 실탄.
책. 샘터.
진급 국가대표 축구선수.
비와 눈.
| ․소대장 부임 후 석달 만에 최전방 철책에 투입되었다. 실탄과 수류탄을 들고 내게 맡겨진 철책을 책임져야 했다. 걱정이 많았지만 다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병사들만 괴롭히던 부소대장이 전방 투입 이후에는 소초 살림을 도맡아서 해줬다. 사람이 다 쓰임새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소초는 통문도 담당했다. 우리 철책 앞에 있던 GP 보급과 DMZ 작전인력, 방문 인력으로 통문 작전도 잦은 편이었다. 칠성대라고 적힌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대기포도 운영했다. 우리는 철책과 통문, 대기포를 운영하는 삼중고를 겪었다. ․소초원 중에 한명이 경계초소에서 크레모아를 실수로 터트렸다. 병사들은 다치지 않았다. 중대장이 급하게 올라와서 오만가지 욕설을 쏟아냈다. 나는 다치지 않은 병사들이 고마웠지만 중대장의 저 질책에 마음이 다쳐 극단적 선택은 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대대장에게 상황 보고하니, 다친 사람이 없고 비무장지대에 불이 난 게 없고, 철책이 무너진 게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면 됐다 하시면서 전화를 끊었다. 나머지는 대대장이 알아서 하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어쩌면 나머지는 대대장이 책임지겠다는 의미였던 것도 같다. 중대장은 죽일 듯이 욕을 하고 대대장은 그럼 됐다고 한 마디도 더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지휘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간 근무 중에 911 테러 소식을 들었다. 병사들이 미국의 심장부가 뚫렸다고 호들갑이었다. 우리의 일상에는 변화가 없었다. 철책은 그 이전도 그 이후도 ‘근무 중 이상무’였다. ․일일 탄약결산을 하는데 실탄 한발이 비었다. 실탄 한발이 여러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것이라 부대가 온통 난리였다. 매일 나와 병사들은 수면 시간을 줄여가며 수색을 했지만 못 찾았다. 누군가 고의로 숨겼고 조만간 사고가 터질 것이라며 연대 인사과장, 대대 참모, 중대장이 수시로 교대로 상주했다. 쌓인 눈이 녹고 따뜻한 봄바람이 불던 날, 통문 입구에서 잃어버렸던 실탄을 찾았다. 실탄을 찾지 전까지 모두가 병사들을 의심했었다.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하지 않았지만 힘없는 소초장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봄날의 따뜻한 햇살 아래 반짝이던 실탄 한 발이 그렇게 찬란할 수 없었다. ․야간 철책 경계 중에는 순찰시간을 제외하면 대기초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철을 따라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책을 읽었다. 여기서 샘터를 만나고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를 접했다. 장영희 교수의 단행본을 모두 읽고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글 한편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메아리가 될 수 있다. ․중위로 진급 ․상무 체육부대 병사들이 전방 체험으로 소초에 왔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다녀갔다. 축구에 관심이 없어 얼마나 유명한 선수인지 몰랐는데 중대장이 와서 싸인을 받아 갔다. 운동 세계에서 선후배, 군에서 선후배로 얽힌 그들의 이야기가 재밌었다. 이후 한일 월드컵에서 종종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축구는 잘 모르겠다. ․전방에서 맞이하는 비와 눈은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여름철 폭우는 정말 무서웠다. 보급로가 계곡물에 한 순간 쓸려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다른 소초는 철책 일부가 유실되어 복구 작업으로 고생을 하기도 했다. 겨울철 눈은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었다. 높은 곳에 서서 온 천지가 하얗게 변해 눈부시게 찬란한 풍경을 본 것은 분명 다시 맞을 수 없는 경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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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2002 | 수방사. 월드컵경계작전.
아카시아. 동원훈련.
BOQ 보안.
연평해전.
사진동호회.
놀라던 대대장.
| ․인사명령으로 수방사 예하 부대로 이동했다. ․2002 한일 월드컵 때 상암경기장에 대한 경호경계작전에 참가했다. 경기 이틀전 투입해서 경기 종료 한 시간 뒤에 철수했다. 산에서 경계하는 동안 벼락이 떨어져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지만 경계 작전은 무사히 잘 마쳤다. 그 결과로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했고 문화부의 월드컵 기장이 수여되었다. ․훈련 중에 나무 그늘에 앉아 ‘아카시아’ 시를 썼다. ․예비군 동원훈련을 여러 번 치뤘다. 열 명 남짓 되는 병사들이 백명도 넘는 예비군들 훈련시키고 통제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독신장교숙소(BOQ)에서 작전계획 편집 작업을 하다가 보안감사에서 걸렸다. 그저 열심히 해볼 거라고 숙소까지 자료를 들고 왔던 것이 큰 잘못이었다. 숙소도 부대 내부였지만 규정 위반으로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다행히 3개월 경고에 그쳤다. ․토요일 오후 택시를 타고 우체국으로 가던 중에 연평해전 소식을 들었다. 후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연평해전 소식은 분하고 아픈 소식이었다. ․사진을 배우고 싶어 사진 동호회 활동을 했다. 전쟁기념과, 담양, 경주로 출사 여행도 다녀왔다. 함께 같은 곳에서 사진을 찍지만 누구는 작품을 누구는 그냥 사진을 담아온다. 그래도 배우긴 많이 배웠다. ․처음 전입신고를 했을 때 대대장은 서울 왔으니 놀라고 했다. 의아했지만 금세 이해했다. 잘 놀기 위해서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 둬야 놀 수 있는 것이라는 무서운 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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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2003 | 석사 시작.
익숙하지 않았던 서울. 뚜벅이 삶.
서오릉.
돈까스 혼식.
심야버스.
전출과 전입.
민원.
오만함.
| ․선배들의 권유로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국어교육이나 교육학을 했어야하는데 엉뚱한 정보통신공학을 전공했다. 차도 없었던 터라 학교 가기가 여의치 않아서 원격으로 수업하고 출석 수업이 적은 과정을 찾다보니 정보통신공학을 택했다. ․서울의 생활은 익숙하지 않았던 것들이 많았다. 부대 안에서나 외출시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부대는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지점에 있었다. 교통이 불편한 위치여서 외출을 위해서는 상당시간 걸어 다니는 것을 감안해야 했다. 걷는 것이 귀찮아 부대에 머무를 때가 많았다. ․서오릉이 가까웠다. 장희빈 묘와 서오릉은 부대를 지나야 접근이 가능 부분이 있어 민간인이 거의 오지 않았다. 가끔 들렀던 장희빈 묘 주변은 사진 찍기에 참 좋은 풍경이었다. 병사들 사진을 종종 찍어주곤 했다. ․소대장 때 스파게티를 먹으러 다니던 것처럼 서울에서는 치즈 돈까스를 혼자 먹으러 다니곤 했다. 선배들은 애들 입맛이라고 같이 가지 않았다. ․휴가를 받아 경주를 가려면 종종 심야버스를 타야했다. 사람도 많지 않고 조용히 이동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인사명령을 받고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짐을 보내고 부대마크를 바꾸고 번거로운 일이 많았다. 새롭게 마음을 다잡는 것도 새로운 선배들의 서열을 익히는 것도 모두 어려운 일이었다. 정들었던 부대를 뒤로하고 고등군사반 교육으로 또 낯선 환경으로 가야했다. ․동원훈련에 참여했던 예비군이 훈련이 끝나고 민원을 넣었다. 다행히 훈련 잘 받고 아이들 고생했다고 칭찬해 주라는 민원이었다. 별다른 포상은 없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고참 중위 시절에 중대장 보직을 부여 받았다. 자대 경험이 많은 때였다. 선배가 고등군사반 교육을 받고 부임해 왔지만 잘 몰라 가르쳐 주는 일이 많았다. 단지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선배한테 건방지게 행동했다고 무지하게 혼났다. 나도 오만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 석1 |
27 | 2004 | 첫만남(경주.순두부.어깨손.책).
대위, 고군반.
면허 취득.
낙향의 느낌.
선이라는 것.
| ․아내를 처음 만났다. 경주 터미널에서 만났다. 식사하러 걸어가면서 차도를 피해 걸으라고 어깨에 손을 올렸던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이 작은 행동이 아내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했다고 하니, 작은 행동 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이며 살아야겠다. 눈치 없이 순두부찌개로 점심을 골랐다. 학생 때 읽었던 책을 선물로 사주었다. 결혼 후에 물어보니 읽었다고는 하는데 내용은 모른다. ․대위로 진급하고 고등군사반 훈련을 들어갔다. 부대를 벗어나 육군보병학교에서 동기들과 선후배들과 함께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스물 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운전면허를 따러 다녔다. 전라도 어느 이름 모를 시골에 위치한 학원까지 부지런히 다녔다. 다행히 고등군사반 수료 전에 면허가 나왔다.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고등군사반 입교를 위해 짐을 싸서 서울을 떠나던 순간, 낙향하는 사람들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싶은 심정이 들었다. ․동기들 사이에서 선으로 결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선이라는 것이 중매쟁이가 중간에 있기 때문에 아무나 연결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조건이 어느 정도 맞는 맞선 상대를 연결해 주기 때문이다. 맞선 상대가 마음에만 들면 되는 일인데, 그 마음에만 들면 되는 그 일이 그렇게 어렵다고들 했다. | 석2 |
28 | 2005 | 홍천대대.
중대장, 겸직(군수).
첫차.
장거리 연애.
학생이던 아내.
전화기.
신독일인의 사랑.
| ․마지막 부임지는 강원도 홍천에 위치한 대대였다. 두 번째 대대의 두 번째 중대장이었다. 소대장 이후 강원도 다시 올 줄 몰랐지만 그나마 최전방 지역이 아닌 것에 감사했다. ․중대장이지만 대대 참모를 겸직해야 했다. 대대 군수장교를 보직을 겸직했다. 아이들은 바쁜 중대장 신경 쓰지 않게 자기들끼리 알아서 할 줄 아는 분위기였다. 다른 중대장들도 소소한 배려가 있었다. 진심으로 일하고 손해보면 주변에서도 함께 배려하고 움직인다는 것을 배웠다. ․면허 취득 이후 첫차를 구매했다. 대구 이모 친구분께서 성서 중고차 매매단지를 하고 계셔서 부탁 드렸다. 가용한 예산에서 엄두도 못내었던 차를 바로 계약했다. 아내(당시는 결혼 전)는 차를 맘에 들어 했다. 다만 처음 집에 까지 차를 운전해 올 자신이 없어서 처남(이때도 아직 처남이 아니던 때이다.)이 경주까지 차를 옮겨 주고 버스를 타고 돌아갔다. ․아내는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나는 강원도 홍천에 있었다. 자주 내려오진 못하고 한달에 한번 정도 내려오면서 장거리 연애를 했다. 한번 내려오면 홍천에서 경주로 부산으로 청도(아내의 고향)으로 참 열심히 달렸다. 2박 3일 일정으로 내려오면 1.5일은 길에서 시간을 보냈다. ․학생이던 아내 뒷바라지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멀리 있었지만 한 번씩 피자 같은 간식 주문을 넣어 응원하고, 한번 내려가면 친구들과 같이 밥 사 주는 정도면 족했다. 홍천에서 옥수수나 감자떡을 잔뜩 사서 처갓집과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휴대 전화 요금이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을 때 무제한 통화가 가능한 커플폰을 이용했다. 밤새 통화하고 통화하다 잠들기도 했다. ․마침 강원도로 경찰이 되어 인근 경찰서로 배치된 후배가 책을 선물했다. 신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책인데 아직도 읽지 않았다. | 석3 |
29 | 2006 | 겸직(동원).
자주 아프던 동훈.
서바이벌 훈련장비.
컴퓨터 게임.
| ․대대 군수장교가 충원되어 겸직이었던 보직을 제외하고 중대장만 하면 되던 시기에 대대 동원과장이 공석이 되어버렸다. 네 명의 중대장 중에 그간 1년 넘게 군수 업무를 겸직했으니 당연히 다른 중대장 중에서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협의가 잘 되지 않았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 기혼자였다. 대대장님과의 마지막 독대에서 겸직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명령에는 복종하는 것이었지만 나와서 후배 중대장들에게 엄청 욕했다. 결혼한 것이 임무 수행과 무슨 상관이냐고 앞으로 행동들 잘 하라고 소리쳤다. 지금 생각해도 열 받는다. 그렇게 동원과장으로 겸직하다 후임 중대장이 와서 동원과장으로 근무하다 전역했다. 순종과 복종, 지휘와 통솔. 군에서 그렇게 배우던 단어를 생각하던 시기였다. ․중대장 시절 자주 아프던 병사가 있었다. 아픈 손가락 같은 아이였다. 심장 판막 기형이라 외형상으로는 그 증세를 살피기도 어려웠고 예방법이 없었다. 후송이나 입원 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닌 특이한 병이었다. 그저 조심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던 아이였다. 매일이 살얼음이었다. 자다가도 이 녀석이 이상하다고 하면 일어나서 아산병원 응급실로 데려가곤 했다. 전역 때까지 부모님과 가족들과 부단히 연락하며 애썼다. 내 손으로 전역시키지는 못하고 내가 먼저 전역했다. 후에 잘 전역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지금은 어찌 지내는지 모르겠다. ․동원과장일 때 서바이벌 장비가 들어왔다. 훈련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서바이벌 장비로 훈련을 하게 했다. 탄소 가스를 충전해서 사용하고 수성 페인트탄이 들어가는 장비였다. 훈련용 소총 100정, 가스, 보호복, 보호마스크, 페인트 탄 등 갑자기 관리 장비 소요가 늘었다. 서바이벌 장비라고 우습게 여길 게 아니라 실제 소총처럼 관리하고 교육했다. 타 부대에서 서바이벌 장비 오발로 실명하는 등 여러 사고가 보고되었다. 재미와 긴장의 연속이었다. ․컴퓨터 게임에 미쳐 있는 후배 장교가 있었다. 시간이 나도 어디 나가는 것을 거의 본 적 없을 정도로 BOQ에 쳐 박혀 살았다. 그의 방에서는 항상 매캐한 담배 연기와 PC 게임 소리가 났다. 무슨 게임인지 잘 모르겠지만 게임에 그렇게 미쳐 있는 인간은 처음 봤다. 후에 병사들에게 PC 게임의 세계에 대해 들었다. 게이머들에게 PC 게임은 전부라고 했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대부분 쏟아 부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숨 걸고 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몇 달을 공들여 성장시켜 놓은 캐릭터가 죽거나 못 쓰게 되는 경우에 겪게 되는 정신적 충격은 경험한 사람만이 안다고 했다. 그래서 게임 아이템 거래하다가 현실에서 싸우거나 죽이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알려줬다. PC 게임에 재능이 없었음이 감사했다. | 중퇴 |
30 | 2007 | 결혼.
전역.
공부.
포항.
이사.
법원 조정.
도서관 공부.
나도 모르는 위축.
| ․아내 덕분에 결혼을 했다. 전적으로 아내 덕분이다. 아내는 교대를 졸업하고 갓 임용한 초등교사였다. 나는 강원도 홍천에서 군 복무 중이었지만 7월이면 실업자의 삶이 예정되어 있었다. 내일 모레 실업자가 예정된 30살 노총각을 아내가 구원했다. 아내는 나를 믿고 결혼해도 될 사람 지금 당장 가진 것이 많지 않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 여겼다고 한다. 무엇보다 포항으로 발령 받아 혼자 사는 것이 너무 싫어서 결혼을 서둘렀고 그렇게 장인, 장모님을 설득했다. 3월에 상견례를 하고 4월 말에 결혼했다. 한 달 후에 있을 결혼 소식을 두고 사고 쳤냐는 질문을 제일 많이 했다. 사고 친 건 아니었고 5월이면 과수 농사 일로 바빠지니 그 전에 식을 치르자는 장인어른의 뜻에 따른 것뿐이었다. ․6월 30일부로 7년간의 군 복무를 마무리했다. 군에서 많이 성장하고 많이 배웠고 많이 단련 되었다. 장교의 삶은 잃은 것도 얻은 것도 많았다. 다만 내 자식이 장교가 되겠다면 말릴 것이다. ․전역 후 군무원 시험 공부를 했다. 전역 전에 수행했던 동원과장 업무와 관련된 일이 경쟁률이나 수험 준비 면에서 수월할 것 같았다. 시험에서 불합격했고 그 이후에는 시험을 보지 않았다. 자세한 기록을 남길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더 준비할 수 없었다. 이후 포항에서 직장을 구했다. ․아내의 첫 발령지가 포항이었고 곧 전역하던 터라 포항에 신혼집을 꾸렸다. 구룡포, 죽도시장이 아직도 아주 가끔 가게 되는 또 다른 고향 같은 곳이 되었다. ․전역하면서 짐을 한 차 가득 싣고 내려왔다. 고향 집 창고에 들어 있던 짐들도 신혼집으로 모았다. 고향 집 창고에 들어가 있던 책 중에서 훼손된 책이 많았던 것이 안타까웠다. ․결혼 전 아내가 혼자 전세로 살던 작은 아파트에서 신혼집으로 이사를 나왔지만 집 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장모님은 빨리 받아오길 바라셨고 여기 저기 알아보고 법원에 조정 신청을 했다. 집 주인은 화장실 문에 나 있는 손바닥 크기의 파손 흔적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가 사는 동안은 그런 일 없었다고 했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기간의 이자와 그 문의 수리비용을 서로 상쇄하는 선에서 합의를 봤다. 태어나 처음으로 법원에 서류를 제출하고 처리하는 과정을 거쳤다. 판사 앞에서 조정하며 법이 있어 다행인 부분도 억울한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역 후 군무원 시험 공부를 하는 동안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집 주변에 공공도서관이 많았다. 시설도 좋았다. 주변에 많은 시설도 이용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공부하는 동안 많이 위축되어 보였다고 한다. 아내는 매일 출근을 하는데 혼자 남아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러 다니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목표가 있고 그간 일했던 세월이 있으니 이 정도 공부는 할 수 있다 생각했다. 아내는 그 시절의 내가 위축되어 보였다는 말을 한참이 지난 후에 얘기해줬다. 마음이 편치 않다는 정도의 느낌도 충분히 위축되어 보일 수 있다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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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2008 | 입사(대림) 초기, 어색한 차림새.
이직(울산대).
집구하기.
홍어삼합.
카메라.
| ․공부를 접고 급하게 직장을 구했다. 서류를 서른 군데 정도 넣어본 것 같다. 면접은 서너군데에서 불렀다. 최종 합격한 곳은 태양광 충전 장비와 LED 조명을 만드는 회사였다. 처음 간 민간 기업은 모든 것이 생소했다. 사무직이지만 작업복을 입고 출근했다. 처음에는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익혀야 한다고 공장 설비가 있는 곳에서 정리 작업을 도왔다. 하루 종일 먼지를 덮어 쓰고 돌아오면 이런 게 사회생활인가 싶었다. 2주차부터는 정장 차림으로 출근했지만 작업복 만큼이나 정장도 어색했다. 지금이야 정장이 편해졌다. ․1년 정도 지나갈 즈음 이직해야겠다 결심했다. 나와 회사의 성장을 놓고 생각할 때 나도 회사도 더 성장할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울산대 산학협력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포항에서 울산으로의 고된 출퇴근이 시작되었다. ․아내가 경주로 이동하게 되었고 마침 울산과 제일 가까운 모화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울산 북구 쪽에 집을 구했다. 당시는 전세 매물이 많지 않았다. 24평에 살다가 36평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달랑 두 식구가 넓은 집에 사는 것이 죄스러웠다. 지금은 세 식구가 29평에 사니 그렇게 무거운 마음은 아니다. ․홍어 삼합을 나이 서른이 넘어서 처음 먹어보았다. 처음 한 점을 먹고는 그 뒤로는 일부러 먹진 않았다. 지금은 주면 주는 대로 먹는다. ․결혼 하고 나서는 카메라에 투자할 여유가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아내를 두고 개인적인 취미활동을 할 수 없었다. 민간 회사에 취업하고 처음 월급을 받았던 날 아내를 졸라 카메라 렌즈를 하나 샀다. 그 렌즈는 13년째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앞으로도 한 10년은 더 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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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2009 | WISE 센터.
스마트폰.
업무는 잔머리.
심리상담2급. 집단 상담.
꿈이란.
| ․울산대 WISE 센터 팀장으로 근무했다. 이공계로 진출할 여학생을 돕는 교과부 사업을 담당했다. 대학에 있는 인적, 물적 자산을 활용해 초중고 학생들에게 보여주고나 체험하게 해서 이공계로 진출할 기회를 만들어 주자는 취지였다. 아이들에게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주고 체험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의미에서 굉장한 보람이 되는 일이었다. ․스마트폰이 등장했다. 아이폰과 삼성 옴니아 폰. 이후 갤럭시의 등장까지 초반 혼전세였다. 그 와중에 윈도우 모바일로 직업 커스터마이징하는 폰을 쓸 거라고 별짓을 다해 가면서 나만의 폰을 만들어 사용했다. 아주 작은 폰에 여러 기능이 가능하다는 자부심으로 들고 다녔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이후에는 나도 그만 귀찮아져 삼성 갤럭시 노트 시리즈를 줄곧 쓰고 있다. ․센터 업무를 총괄하다 보니 실무도 관리 업무도 병행해야 했다. 단순 반복 업무는 메일머지, 매크로 같은 걸 이용했다. 어떤 일이든 잔머리를 쓰면서 일했다. 덕분에 일에 여유가 생겼다. 팀원들에게도 인턴 직원에게 잔머리 쓰면서 일하기를 당부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 틀린 거 하나 없다고 꼰대짓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평생교육원에서 심리상담 2급 과정을 이수했다. 대학 때부터 막연하게 관심만 있던 것을 한번 배워보고 싶었다. 6개월 기간 동안 조금 고생스럽기도 했다. 배우고 깨달은 바가 많은 시간이었다. 중간에 집단 상담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WISE 업무를 하면서 꿈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가 많았다. 내 어릴 적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던 것이나 선생님이 되겠다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대학 친구들 중에 끝까지 고고학을 공부하고 발굴 다니던 친구가 공공 연구기관에 연구위원이 되고 그런 선배가 연구소로 가는 것을 보았다. 뜻이 있으면 더디 가도 어지간하면 가는 것이라 생각 되었다. 아이들에게 그런 뜻을 찾으려 애써 보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을 돕는 일을 하는 것이 참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 즈음 안철수/박경철/김제동의 강연이 그런 면에서 큰 반향이 되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나만 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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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2010 | 입사(울산TP). 임신.
나린이 출산.
정도를 사용하는 것.
석사 졸업.
간사님의 부고.
| ․지금 근무하는 울산테크노파크로 자리를 옮겼다. ․아내가 어렵게 임신을 했다. 태아의 심장 박동소리를 듣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 모든 것이 감사해 태명을 ‘땡큐’로 지었다. ․성이 안씨여서 이름 짓기가 어려웠다. 소망, 사랑 이런 것들은 모두 부정어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국문학도였는데 순우리말로 이름 짓고 싶었다. 임신 초기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출산 일주일 전에 이름을 ‘나린’으로 정했다. ‘나리다’의 변형으로 정했다. 성에 붙여도 크게 어색하지 않고 맘에 들었다. 그렇게 나린이는 건강하게 우리 곁으로 왔다. ․처음 회사에 와서 공문을 뒤지다가 ‘정도’라는 말이 거슬렸다. 금액은 000원정으로 분명하게 써야할텐데 000원 정도라고 쓴 공문이 종종 눈에 뜨인다. 품의서 쓸 때는 사용 예상 금액이 정확하지 않을 때 조금 여유 있게 품의하기 위해서 그리 한다고 배웠다. 살면서 딱 맞춰서 사는 것과 조금의 여유를 두고 사는 것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군복무 중에 시작했던 석사 과정이 휴직으로 이어지다가 제적 처리가 되었었다. 2009년에 재입학하고 남은 학점 이수하고 졸업했다. 3년 과정을 8년 만에 마무리했다. ․대학 때 동아리 간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달려갔다. 갓난 아기였던 간사님의 아들이 제법 커서 사모님 곁을 지키는 것이 듬직했다. 가까운 사람이 떠나는 것은 슬픈 일지만 그를 기리고 함께 슬퍼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 감사했다. | 석3 |
34 | 2011 | 팀조정.
. 부서 살림꾼. 삼총사.
| ․일 년 동안의 업무는 제자리걸음이었다. 팀의 명칭은 사업기획팀이었지만 단순 반복 업무 같은 것들이었다. 부서장을 가까이서 보좌한다는 의미에서 문서를 세련되게 작성하고 다듬는 실력은 늘었을지 모르겠다. 입사 동기가 새로운 사업을 척척 해나가는 것을 보고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용기를 내어 업무 조정을 요청했다. 이것이 부서 내의 큰 분란을 일으켰다. 선배들이 이기적이라고 야단치기도 했다. 그저 변화 없이 퇴보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후회하지 않았다. 퇴사를 각오했던 일이다. 다행히 업무가 조정되었고 다른 사업을 하게 되었다. ․부서에서 갖은 잡무를 다하다 보니 살림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집안 살림을 잘해야 하는데 엉뚱한 별명을 얻었다. ․회사 내에서 친하게 지내던 삼총사가 있었다. 친하다고 해봐야 점심을 주로 같이 먹는 사이일 뿐인데 엄청 친하다 생각했다. 가족들도 함께 식사하고 차 한 잔씩 나누며 지내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다른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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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2012 | 과학 기술업무.
창업사업 서포트.
두 번째차(백두산).
울산시장표창.
AtoZ/스폰지(별명).
| ․새로운 팀에서 과학기술 문화확산 사업을 주로 담당했다. 울산대에서 했던 업무와 연결된 일이었다. 교육청과 시청 사이에서 눈치 보며 일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회사에서 중기청으로부터 처음으로 창업지원 사업을 수주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좌충우돌 어려움이 많았다. 나보다 열 살 가량 많은 신입 사원을 서포트했지만 모두 퇴사했다. 결국 내 사업도 아닌데 일 년 내내 서포트했다. ․정들었던 첫 차를 보내고 하얀색 투싼을 샀다. 아직 내 형편이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면 과분한 차라 생각했다. 하얀색 투싼이라 백두산이라 불렀다. ․과학기술 지원 업무로 울산광역시장 표창을 받았다. 군에서는 그렇게 상을 많이 받았는데 사회 나와서 처음 받은 상이었다. 서재 방에 잘 모셔두었다.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일을 하면 A에서 Z까지 모두 알고 대비된 사람이라고 후배가 추켜 세우며 붙여준 별명이다. 나쁘지 않은 의미라 적어두었다. 외부 행사 진행하던 용역 업체 대표님이 스폰지라고 했다. 뭐든지 다 흡수해서 감당하는 사람이란다. 이것도 의미가 좋아 적어두었다. 평생의 별명만 모아도 글 한편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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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2013 | 정규직.
인력양성, 원전해체. 안수집사. 외할머니 장례.
MBTI이수(초급)
| ․회사에 정규직 공개채용이 있어 도전했다. 그 간 이곳저곳 도전해 왔는데 일하던 회사에서 채용되어 멀리 가지 않고 정규직이 되었다. 나보다 처갓집에서 더 좋아하셨다. ․인력양성사업과 원전해체 기술지원사업을 담당했다. ․교회에서 안수집사가 되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릴 때 그렇게 아껴주셨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사흘 내내 장례식장을 지켰다. 외손자인 내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모든 손님을 맞이하고 음식을 하루 종일 옮겼다. 무릎이 아파도 계속했다. 외할머니 장례를 정성스레 섬기고 싶었다. 엄마와 이모들이 울고 나도 울었다. 입관하면서 메마른 할머니를 뵈었다. 마지막 뵈었을 때보다 더 야위셨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가 몸에 삽입되어있던 관이 빠져서 다시 연결하기 위해서 요양병원에서 대학병원으로 모시고 갔을 때다. 살아계실 때 자주 찾아 뵙고 딸내미 자주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많이 아팠다. 태어나 처음으로 입관에서부터 화장, 안치까지 모든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늘 현명하게 살길 바라셨다. 외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뵙고 싶다. ․MBTI 초급 교육을 받았다. 대학 때 처음 검사하고 큰 도움이 되었던 터라 교육을 받고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다. 역시나 큰 도움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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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2014 | 40억 인력양성, 가지 많은 나무(팀구성).
불륜의충격.
마녀 이야기(만우절).
| ․5명으로 구성된 팀이 40억 규모의 인력양성 사업을 담당했다. 참여기관 사업비와 시설 구축 비용을 제외해도 20억 가까운 규모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결국 2명을 더 충원했지만 사람이 많아지면 더 시끄러웠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 틀린 게 아니었다.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직원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그저 동료로만 알았는데 불륜을 저지르는 그녀가 불편했다. ․같은 팀원 중에 똑부러지는 직원이 있었다. 인력양성 사업을 수년간 담당해 왔던 직원이라 해당 사업의 교육 실행은 믿고 맡겨도 되는 친구였다. 교육 진행은 그 친구가 사업계획서와 관련된 각종 보고서와 대응은 내가 다 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지역의 좋은 대학에 스카웃 제의를 받았고 다음 주면 간다고 했다. 계약직이었던 그 친구가 더 좋은 자리로 간다면 당연히 축하할 일인데 당장 그 친구가 하던 업무는 어쩌나 하던 생각이 스쳤다. 축하한다 잘 가라는 인사보다 잘 생각해 보라는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금방 후회했다. 그가 말한 스카웃은 만우절 장난이었다. 축하한다, 얼른 가라고 말해 줄 걸 그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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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2015 | 문학광장 신인상.
독일 출장.
제주도.
| ․글 쓰는 것이 그저 미련이라 뭐라도 해야겠다 생각했다. 대학 때 써두었던 단편 소설을 꺼내 어느 계간지 신인문학상에 투고했다. 당선이란다. 등단의 기회를 준다고 한다. 등단에 필요한 비용이 조금 있지만 책으로 준다고 한다. 순간 혹했다. 하필 분야가 소설이어서 마음을 접었다. 그게 시나 수필이었으면 덜컥 응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글은 계속 써야겠다 마음을 다잡는 기회는 되었다. ․오 년만에 출장길에 올랐다. 독일 뮌헨 주변. 학센이라는 돼지 허벅지살 음식. DM 쇼핑. 백조의 성 호수, 하이델베르크성. 낯선 풍경이 기억 난다. 나린이 선물은 호텔에 로비에 전시되어 있던 독일 전통의상 인형 세트. ․여름에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기대했던 에코랜드 방문은 비로 망쳤다. 대학 친구였던 대현이네 집에 가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대로 즐거운 수다를 떨다가 왔다. 체험이 중요한 줄 알고 박물관 참 많이 돌아다녔다. 아쉬운 게 많아 몇 년 후에 다시 제주도를 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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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2016 | 인사업무.
이직기회.
회사 벚꽃길.
미니MBA.
심리상담1급. MBTI 이수(보수).
| ․인사부서로 발령 났다. 부서를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발령이 나고 부서 실장, 팀장은 거의 배신자 취급이었다. 인사 업무 힘들었다. 사업만 하다 보니 관련 규정을 이해하고 업무를 습득해 가는 것이 버거웠다. 업무도 업무지만 회사 직원들과의 수시 통화는 업무를 마비시켰다. 도망가고 싶은 심정의 연속이었다. ․이직 기회가 닿았다. 포항에 있는 어느 연구기관이었다. 이직 준비를 끝내고 마지막 출근 전날 밤, 아내가 이직을 만류했다. 이제 아이도 커서 이사하기도 어렵다, 먼 거리 오가는 게 걱정 많이 될 것 같다, 힘들어도 옮기지 좋겠다고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더 이상 이직을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 ․회사 입구에 벚꽃길이 장관이다. 회사 입구는 다른 길로 이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도 아니다. 덕분에 회사 앞 벚꽃 구경이 그리 나쁘지 않다. 멀지 않고 사람 많지 않고 벚꽃은 화사한 곳이다. 아침 출근 때마다 벚꽃이 흩날리는 게 서글펐다. 주말에 아이와 회사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그해 벚꽃 놀이를 대신했다. 가까운 곳에 귀한 것이 많다. ․회사의 지원으로 미니MBA 과정을 이수했다. 일하면서 틈틈이 이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연말에 자격증 하나 나오니 흐뭇했다. ․심리상담 1급 자격 취득 ․MBTI 보수 과정을 이수했다. MBTI 검사지를 활용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검사지 구매가 가능하고 다른 사람을 상대로 검사하고 해석해 줄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 가까운 사람들과 좀 더 배려가 있는 관계를 맺어갈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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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2017 | 경영기획팀장.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출장.
나린시장상.
안동여행.
감사실장.
종합검진.
| ․경영기획팀장이 되었다. 회사 내에서 선임부서, 선임실, 선임팀장 자리다. 팀장들 중에서는 막내인데 말이다. 그래도 보직이 가지는 권한이 좋아 열심히 일했다. ․스마트시티 관련 출장길에 올랐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둘러보고 왔다. 파리는 정말 볼 것이 많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벨기에도 특별할 것 없이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네덜란드 풍차 마을의 풍경이 참 아늑했다. 유럽 도시들의 관련 기술력은 보잘 것 없었다. 다만 그들이 그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민관이 머리를 맞대고 유용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충격이었다. 더디 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적당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정확하고 빠른 방향이 아니라 적당한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유럽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광장. 그것이 유럽 문화의 핵심이라고 늘 말씀하시던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나린이 선물은 네덜란드 전통 나막신을 신은 인형. 벨기에에서는 스머프 인형. 프랑스에서는 에펠탑이 그려진 티셔츠. ․안전체험행사에 참가했다. 행사 중에 안전체험 글짓기 대회가 있었고 딸내미가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울산광역시장상이다. 초등학교 1학년이 시장상을 받아왔다. 내가 신춘문예 당선된 듯이 기뻤다. 딸아이도 글을 썼으면 싶어서 가르쳐 보려고도 하고 얘기도 해보지만 배울 생각은 없다. 다행히 책 읽기는 엄청 좋아한다. 아빠가 책보고 글 쓴다고 앉아 있는 모습을 자주 봐서 그런지 가끔 시도 쓴다. 노트북에 딸아이가 써 놓은 시가 제법 된다. 언제 동시 쓰시는 선생님께 한번 검토라도 받아 봐야겠다. ․추석 연휴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2일간 안동여행을 다녀왔다. 말로만 듣던 안동 여행은 처음이었다. 권정생 생가, 권정생 동화나라, 부용대, 하회마을, 민속박물관, 안동댐, 월영교 모두 값지고 재미난 여행이었다. ․감사기간에 감사실장님께 호되게 혼났다. 그동안 교회 다니고 열심히 산다고 칭찬해 주셨던 분인데 감사 기간 중에 큰 잘못을 저질렀다.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종합검진을 처음 받아보았다. 간에 특이소견이 있다고 해서 CT를 추가로 찍어봤다. 평생 간이 이상할 거라는 생각은 못해봤다. 간수치가 높은 편이라 늘 조심하는 편이고 술도 마시지 않는다. CT 검사결과 특이 소견은 아니고 모양이 조금 특이한 편이니 추적 관찰하면 될 것 같다고 확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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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2018 | 박사 시작.
산업기획실.
랜섬웨어.
경주 여행.
괌/대마도 여행.
미국출장.
전략기획실.
| ․박사 학위 공부를 시작했다. 과학기술정책전공. 회사 동료가 추천해 줘서 시작했다. 요즘은 가끔씩 왜 시작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글공부를 조금 더 일찍 시작하고 더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산업기획실로 자리를 옮겼다. 예전에 봐왔던 산업기획실은 정말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제는 나 같은 사람도 같이 일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나 보다 싶어서 씁쓸하다. 그래도 진짜 기획이라는 업무를 배우고 시작하는 것 같아서 좋았다. ․랜섬웨어에 감염되었다. 1년간 해왔던 업무 관련 자료가 몽땅 날아갔다. 전자결제와 메일에 관련 흔적이라도 찾아서 자료를 정리하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신종 랜섬웨어는 복구도 어렵다고 했다. 해커에게 수백 만원의 대금을 지불하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하진 않다고 했다. 이후로는 이중 삼중으로 백업한다. ․추석 연휴에 경주 스탬프 투어를 다녀봤다. 고향이 경주지만 결혼 이후에는 본가를 들르는 것 외에 경주를 둘러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딸아이 교육 차원에서도 한번 둘러보고 싶었다. 스탬프 투어로 가볼 곳이 마흔 곳이 넘었다. 꼬박 이틀을 돌아다녔지만 반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평소 알거나 듣지 못했던 수많은 곳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고등학생일 때 화랑교육원 가서 그렇게 배웠는데도 아직 모르는 데가 더 많다는 것이 신기했다. ․여름 휴가는 괌으로 다녀왔다. 딸아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물놀이. 집사람에게는 쇼핑의 기회를 주고 나는 신발 두 켤레 얻어왔다. 대마도는 징검다리 휴일을 이용해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미국 출장을 다녀왔다. 처음 밟는 미국 땅은 입국 심사에서부터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ESTA를 미리 발급 받았지만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미리하고 서류도 준비해 가며 대응하고 입국이 허락되었다. 미국으로 가던 아시아나 항공 비행기에서 대학 동아리 선배 누나를 만났다. 스튜어디스로 취직했던 누나를 이십년 만에 처음 만났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누나를 만난 것이 동기들 사이에서도 대박 사건으로 통했다. 씨애틀도 볼 것과 배울 것이 많은 도시였다. 미국 출장은 실용주의 느낌이었다. 애버릿의 보잉팩토리는 비행기를 만드는 정말 큰 공장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함이 없었다. 무언가 최첨단일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열심히 망치와 드라이버로 작업하고 있었다. 볼트 하나 빼먹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될 정도였다. ․회사 조직이 개편되었다. 산업기획실에서 전략기획실을 분리시켜 나왔다. 어떤 일은 떼 주고 어떤 일은 더 하게 되었다. 여전히 기획은 재밌고도 어려운 일이다. | 박1 |
42 | 2019 | 휴직.
임직. 칠순.
화상.
글바위.
선생님.
선배.
대만접음.
제주도.
전기차.
기술거래사. 행정사. 장학금.
| ․휴직을 결심했다. 회사 창립 이래로 남자의 1년 휴직은 처음이다. 안될 줄 알았다. 허락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결국 실행했다. ․교회 장로가 되었다. ․아버지 칠순 잔치를 치뤘다. 아버지 친구분들이 많으시다. 유림마을이 외형은 사라졌지만 아버지 세대의 향수는 오롯이 남아 있다. 마을 회관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손님을 치뤘다. 수고해 준 아내가 고마웠다. 아버지 만수 무강하셔요. 엄마 칠순 잔치는 그냥 여행 다녀오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딸아이가 화상을 입었다. 부산의 화상전문병원에서 두달 가까이 입원 치료를 받았다. 칼로덤으로 수술도 했다. 화상은 끔찍하고 잔인한 사고다. 화상 사고를 통해 깨닫고 얻은 것이 많다. 심재성 이도 화상이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이 많다. 우리 딸 건강하게 자라자. ․선바위 도서관에서 수필을 배우기 시작했다. 생애 첫 수필 공부였다. 선생님께서 글공부는 같이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일러주셨고 같이 수업 듣던 사람들과 팀을 이뤄 격주 단위로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선바위에서 만난 인연이라 ‘글바위’라고 이름을 정했다. 함께 공부하는 것이 참 감사하다. ․처음으로 수필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계신다.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수필에 대해 무지했다. 아직도 수필을 함부로 정의할 줄 모르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선생님 덕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바쁜 선생님을 졸라 많이 배우고 많은 은혜를 입었다. 그 덕분에 오영수 문학관 수업도 듣게 되었다. 선생님만 생각하면 늘 감사한 마음뿐이다. ․선생님과 얘기하다 고등학교 형산문학회 선배 한분이 지역에서 시조시인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같이 만나 인사하고 조언을 많이 들었다. 시조에 뜻을 정하면 가르쳐주겠다고 하셨다. 수필 써야할 것 같다. ․대만 여행을 준비했다. 비행기도 숙소도 모두 정했고 일정도 다 짰으나, 아이의 화상 사고로 여름 휴가는 병원에서 보냈다. ․두 번째 제주도 여행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전기차를 렌트했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마라도 갈 때 풍랑이 심해 우울한 여행이었다. 우도 여행은 모든 것이 행복했다. 풍경도 볼 거리도 먹을 거리도 풍성했다. 어린 줄만 알았던 나린이도 새벽녘 성산일출봉 등반에 성공했다. 다만 구름이 많아 일출을 보진 못했다. ․제주도 여행 이후로 전기차가 자꾸 눈에 밟혔다. 결국 사고치는 심정으로 전기차를 구매했다. 전기차가 너무 좋다. 덤으로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기술거래사 자격증 획득 ․행정사 자격등록 ․박사과정 첫 학기 석차가 9등이었다. 다음 학기 2등. 이번 학기에 1등을 해봤다. 박사과정 1등한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 그래도 뿌듯하다. | 박2 |
43 | 2020 | 상해.
부산대병원.
하나문학회.
수료.
낙동강.
글품.
복직예정. 난계창작교실.
코로나. 온라인 수업.
아버지.
연보작성.
| ․아이 치과 수술이 예정되어 있어 그 일정을 피해 급하게 알아보고 갔던 상해여행. 천만 다행이었다. 다녀온 직후부터 우한폐렴 소식이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코로나-19 세상이 되어 버렸다. 임시정부청사, 황포강유람선, 디즈니랜드가 기억에 남았다. 그들의 일상에서 놀라운 발견이 조금 있었다. 오토바이, 핀테크. 전통과 첨단의 새로운 공존. ․아이의 아래 영구치 중 하나가 턱 방향으로 거꾸로 자라고 있어 제거 수술을 했다. 부산대 치과병원에서 마취하고 수술했다. 수술하는 동안 기도하가 잠들었다. 수슬은 잘 되었지만 피가 고여 하루 더 늦게 퇴원했고 봉합도 다시 했다. 그래도 마취에서 잘 깨어나 준 딸이 고맙다. ․선생님께서 하나문학회 가입을 추천해 주셔서 등록했다. 아직은 배울 것 밖에 없는 초보지만 언젠가는 도움이 되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모두 훌륭하고 좋은 분들이라 배울 게 많은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의 수업이 모두 끝났다. 외국어 시험과 졸업시험도 모두 끝났다. 졸업 논문이 언제 완성될지 모르지만 일단은 수료생이 되었다. 그동안의 수고가 감사하면서도 아쉽다. 그나저나 논문은 언제 끝낼지 ……. ․실력도 안 되면서 낙동강 수필공모전에 도전했다. 우수상이란다. 내심 기대는 했지만 상을 받게 되니 더 부끄럽기도 하고 더 감사하기도 하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써야겠다. 공모전에 입상을 해보니 이미 입상한 글은 더 손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결과 발표 전날 밤 다시 읽어보고 마무리 부분이 어색해서 힘들겠구나 싶었는데 덜컥 입상해 버렸다. 앞으로는 어느 공모전에 도전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정성들여 다듬고 도전해야겠다.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다른 도서관 수업에도 동참했다. 오래 공부해 오신 분들이고 등단하신 분들도 계신다. 환대해 주시고 옆 자리를 내어주셔서 감사하다. ․이제 8월이면 복직이다. 요즘 하루 하루 심란하다. 정말 복직하기 싫다. ․선생님 소개로 오영수 문학관에서 난계수출창작교실 수업을 듣고 있다. 말씀으로만 듣던 홍억선 교수님의 직강을 듣는다. 수필의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마음으로 수업을 듣고 있다. 이 수업이 분명이 성장의 기회와 디딤돌이 될 것 같다. ․코로나 덕분에 잃어버린 시간이 너무 많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와야 한다. ․온라인으로 수업이 이뤄지고 있다. 화상회의나 온라인 수업에 많이 쓰이는 ZOOM이라는 프로그램이 중국산이라고 한다. 안타깝다. 중국에서 십년 가량 공부하고 오신 교수님이 중국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올 초에 다녀온 상해의 경험과 더불어 중국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 이야기도 글로 쓸게 조금 되는 것 같다. ․수필 수업 덕분에 아버지에 대한 글을 써보았다. 집에서는 침묵수행하는 부자지간에 특별한 것이 없을 줄 알았다. 글을 쓰려고 되짚어 보니, 눈물이 난다. 나는 아버지만큼 딸에게 못할 것 같다. ․수필은 경험의 문학이다. 조용하게 자라 특별할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늘 걱정이었다. 수필 수업 덕분에 연보를 작성해 보았다. 특별한 것들이 아니어도 사소한 일상이 제법 된다. 이 사소한 것들이 언젠가는 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제법 큰 위안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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