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수목사] 로마서강해 101 - 아나데마
롬9:1-3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자신의 아우슈비츠 수감시절의 경험담을 수기 형식으로 기록한 실존주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 된 99% 이상의 수감자들은 금방 그 극한의 고통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잊어버리고, 조금이라도 덜 힘들고,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고, 조금이라도 덜 배고프기 위해서 이기적인 짐승이 되고 마는데 끝까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1% 미만의 예외자들이 있더라고 그렇게 기록을 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자신의 마지막 남아 있는 빵을 건네주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에게 다가가서 따뜻한 위로의 말을 진심으로 전해주기도 하며, 그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며, 심지어는 타인을 위해서 대신 가스실에 들어가는 그런 이들이 있더라는 거예요. 재미있는 건 짐승처럼 자기의 그 자기애적 욕망을 위해서, 나는 살아야 되겠다라는 그 자기애적 욕망을 위해서 타인의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던 99%의 그 짐승 같은 유대인들이 입만 열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에 반해, 순순히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기의 마지막 남은 빵이나 아니면 자기의 생명까지도 내놓았던 사람들 중에는 이미 신을 버린, 신을 떠난 이들도 왕왕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들과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타인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만큼 그들을 그렇게 헌신하게 만든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만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사자 우리에서, 독사의 굴에서,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앞에서, 활활 타는 풀무불 앞에서 당당하고 자신 있게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래서 그렇게 했던 사람들을 추앙하고 존경하지 않습니까? 근데 타 종교인들도 심지어 하나님을 떠났다라고 하는 그런 이들, 무신론자자들 까지도 가난하고 압제 받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라 헌신을 해내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누가 준 힘이냐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 세상 인간 세상이 이구동성으로 칭송하고 칭찬하는 소위 위대한 삶, 거룩한 삶, 착하고 깨끗한 삶, 선하고 아름다운 삶. 그런 것이 기독교만의 열매나 아니면 기독교만의 지향점은 아니라는 게 분명 하죠?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도 그것을 추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해낼 능력을 어디선가 받더라는 것이죠. 그건 보편적 아담들의 공통 된 목표고 지향성이고 희망사항이기도 한 거예요. 그렇다고 진리를 배우고 깨달은 성도들이 그런 것들을 가볍고 우습게 여겨도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건 위대한 거예요. 하늘의 백성들이 인간세상에서 인간세상의 것들을 도구로 하여 하늘의 것들을 배워가야 하는 그 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그 크로노스의 시간, 그 시간 동안에는 당연히 이 아래 세상의 질서와 도덕과 윤리와 선을 행하고 가르쳐야 되요. 그건 마땅한 겁니다.
그러나 그건 신앙의 열매라기보다는 그냥 사람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사람이면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 당연히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 제가 여러분에게 경계 하라고 하는 건, 자신에게서 나오는 그러한 선한 삶이, 그렇게 거룩해 보이는 그런 위대한 삶이, 혹시 자기애적 상승 욕구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라는 거예요. 나의 만족이나 타인에 의한 나에 대한 훌륭한 평가나 이런 것들을 위해서 내가 내놓는 것은 혹시 아닌지 돌아보자는 거예요,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인간의 그런 자기애적 상승 욕망이라는 건 원자를 분해해 버릴 정도로 뜨겁습니다. 모든 것을 녹여버릴 만큼 뜨거 워요. 그건 프로이드가 리비도라고 불렀던 아담들의 생본능 같은 거예요. 진리를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역동성 있게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 바로 그겁니다. 여러분. 그런 욕망은 자기 몸에 불을 붙이고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참아낼 정도로 무섭습니다. 이를 악물고. 저는 그런 친구들 후배들을 수 없이 봐왔어요, 제 눈앞에서. 참더라니까요. 내 몸이 활활 타고 있는 순간에도 누군가 그 행위를 칭찬해주고 칭송해주면, 아니 내가 추측하기를, 그래 누군가 나의 이런 모습을 위대하게 봐 줄 거야, 가치 있게 봐 줄 거야라고 상상만 되어도, 인간은 그 힘으로 자기 몸을 불사를 수 있더라는 거예요. 그게 인간들의 자기애적 욕망이라는 거예요. 성경은 그런 행위를 vanity, 헛되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건 허망한 거라는 거예요. 신기루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가치를 높이고 세간의 멋진 평가를 획득하기 위해 내놓는 모든 행위는 그 외모가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해 보여도 그건 욕망에 불과한 것이라는 거예요. Vanity 라는 거예요. Vanity is vanity, all is vanity. 허망하고 헛것이라는 거죠. 그건 선악과를 먹어버린 모든 아담들의 본질적 속성 같은 거예요. 하나님처럼의 삶.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바로 그 거만한 욕망, 인간들의 그 vanity의 욕망을 깨부수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나의 가치는 그러한 것으로 매겨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 해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빛을 발할 수 있음을 처절하게 깨닫는 시간, 그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라는 일상인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내어놓는 헌신, 그것과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내어놓는 자기애적 상승 욕망에 의한 헌신은 천국과 지옥만큼 차이가 나는 거예요. 여러분 진리를 안다고 해서 그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그 헌신이 안 일어날 거 같으세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금 남가주 서머나교회에 담임목사가 일 년 동안 여기 떠나 있으니까 사람이 삼백 명도 안 남았어요. 그러나 그들은 저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말씀을 사모해서 그 자리 남아 있는 거거든요. 이제 알곡들, 진짜들만 남아 있는 거겠죠. 우리가 서울 서머나교회에서 지금 900명 정도가 모이는데 왔다 갔다 하는 사람 합치면 천 명 정도가 모이는데 그들의 세배 이상입니다. 그런데 헌금은 거기가 훨씬 더 많아요. 담임목사 없는 데도. 그런 것이 그들의 헌신을 끌어내고 막고 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냥 그 헌신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사도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끊어짐 이라든지, 저주라든지, 이런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는 거예요. 바울은 세상이나 다른 이웃들에게 비추어질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자신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거룩하고 가치 있고 위대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 안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진리의 복음이 제대로 전해 줄 수만 있다면 자신은 기꺼이 도구로 쓰이다가 안개처럼 사라 질 용의가 있었다 라는 그런 말입니다.
본문 1절이 ‘알레떼이아’ ‘진리’ 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9장 1절이 진리로 시작 되요. 그러니까 9장의 내용은 진리에요.
진리에 관한 내용이란 말이에요.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항상 첫 단어가 제일 중요하다 그랬죠. ‘나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아냐,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야’ 이런 말이거든요. 그냥 늘상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이것 거짓말 아니야 진짜야,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나는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참 진리를 이야기 하고 있어. 이렇게 이야기해요. ‘알레떼이아 로고스 레고’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거짓이 뭡니까? 거짓은 참을 담은 그릇이요. 근데 그 그릇을 통해서 그 안에 담긴 참이라는 내용을 보아 내지 못하면 그건 그냥 거짓이라 그랬죠. 사도바울이 8장 말미에서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위험, 적신, 칼, 사망, 생명, 천사, 사탄, 높음, 깊음, 피조물 등등의 그런 그릇들을 나열하면서 그런 것들을 그냥 표피적으로 받아버리면 그게 바로 하나님과의 끊어짐이라고 웅변을 했죠?
8장에서. 그런 것들이 절대 하나님과 우리를 끊을 수 없어, 그 말은 어떤 이들에게는 그게 끊어지면 소재로 사용된다는 뜻이니까요.
그건 진리라는 내용으로 보아야 하는 거지, 그냥 표피적으로 이해를 해 버리면 안 되는 거라는 그런 말이에요. 그러면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처럼 천사가 있네. 없네, 영생이 있네. 없네, 부활이 있네. 없네, 이 딴거 갖고 싸우다가 그냥 시간 다 허비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서 환란 곤고 핍박 위험 칼 적신 그 아래에서 수고로운 짐만 지다가 멸망의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반드시 진리라는 내용으로 보아 내야 한다는 것이죠. 만약에 그렇게 되지 못했을 때 그게 바로 거짓이 되는 거고, 심지어 그것이 거짓이 된다는 말이에요. 거짓이 되는 거고, 그 거짓에 의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건너 갈 수 없는 고랑으로 갈라지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8장을 마무리한 사도 바울이 9장의 첫 단어를 알레떼이아, 진리야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중요한 건 진리 야. 나는 진리를 말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떻게 말을 잇는가 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인데,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야, 내 안에 그리스도 가 들어 와 있어,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야. 그래서 나는 그 진리를 그 그리스도를 내 마음으로 갖고 있어. 그 말은 그리스도와 나는 연합 돼 있어 이런 말입니다. 그렇게 연합되어 있는데 내가 그토록 안타까워하고 있는 내 민족 내 혈육 내 형제, 그와 혈통으로 묶여있는 이스라엘, 물론 이거는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들의 율법적 행태를 지칭하는 거겠죠? 그죠? 그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내가 저주 받아도 괜찮아,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아니 내가 간절히 원해,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이 말이 내가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이 민족적 이스라엘이 다 구원 받기를 나는 간절히 원해~ 이런 말일까요? 여러분 구원 받았죠? 진리가 여러분 마음에 들어와 계십니다. 근데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들어요? 여러분, 여러분 영생이나 구원을 포기 할 자신 있어요? 또 다시 여러분이 나온 그 곳으로 영원토록 들어가라고 한다면 들어 가겠습니까? 내 형제들의 구원과 그걸 바꾸겠어요? 나는 안 바꾸어요. 참고로. 저는 안 바꿉니다. 그런 말 아니에요.
여기에서 ‘저주를 받아’ 라고 번역이 된 ‘아나데마’ 라는 말을 여러분이 잘 이해하셔야 되요. ‘아나’ 라는 말은 ‘에피’ 라는 말과 구분을 하여 공간적인 위가 아니라, 공간적이지 않은 다른 차원의 위를 이야기한다. 그랬죠. 그래서 ‘위로 난다’ 그러면 ‘아노뗀, 거듭남’ 이렇게 우리가 이해를 한다고 그랬어요. 그 ‘아나’ 라는 접두어와 ‘티데미’ 라는 동사의 합성어가 ‘아나데마’ 에요.
그러면 티데미는 뭐라 그랬어요? 이제 여러 번 들었어요. 횡적인 바로 섬, 똑바로 섬, 진리로 올바로 알면 이제 똑바로 서게 되죠.
히브리어로는 ‘쿰’. 헬라어로는 ‘이스테미’ 거기에서 ‘스타우로스’ 라는 십자가라는, 언약의 기둥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 똑바로 섬, 이스테미를 위해서 횡적으로 이렇게 진열해 놓거나 진설해 놓거나 배설해 놓은 거. 그래서 그거를 마치 무슨 만화 게임처럼 뿅뿅뿅 먹으면서 가가지고 나중에 다 먹었어. 그래 놓고 이게 뭔 줄 알아서 똑바로 서면 그게 이스테미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횡적으로 진열해 놓고 배설해 놓은 첫 번째 게 뭐에요? 성전, 율법, 호 코스모스의 세상, 심지어 성전으로 말하는 성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죠? 그것으로 이 세상에 이렇게 진열해 놓고 진설해 놓고 봐 라고 주신 그것으로 우리가 아 이거, 이 차서로 그 위의 것을 똑바로 알아, 똑바로 서버리면 그게 이스테미잖아요? 그죠? 그럼 아나데마는 뭐겠어요? 그 하늘의 것을, 위에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아래에서 그러한 것으로, 그 진리를 담은 그릇으로 내가 그렇게 사용된다 할지라도~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예수, 그 율법, 그 성전 이건 전부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서 파괴되어지죠?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렇죠? 그거는 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서 파괴되어진단 말이에요. 성전, 율법 진리로 완성이 되어야 되죠. 성전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말로 완성이 되어야지요.예수는 그리스도의 영, 진리로 완성이 되어야 되죠.
아나데마(άνάθεμα)의 삶을 살아야 되는 존재들은 전부 파괴를 함유하고 있어요. 자기의 삶 속에~ 자기의 시간 속에~ 사도 바울이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내가 진리가 되어서 너희들에게 진리를 설명하는 존재 이었으면 좋겠어.
아니 이 말은 마땅히 그렇게 될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될 거야, 그런 말이에요.
그렇게 위에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래의 존재로 존재하다가 때가 되어서 그가 담고 있는 생명이라는 내용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이 파괴를 감수하는 그 행위, 그것을 한 단어로 축약하면 아나티데미, 아나데마(άνάθεμα) 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그 모양대로 이해되어 지고 남아버리면 그게 율법이고 그게 성전이죠? 그러면 그게 저주잖아요. 그래서 아나데마를 저주라고도 번역하고...그 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죠? 그 율법 그 제사는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잖아요.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 걸 안 하는 존재로 되게 되라고 준 것이죠? 그래서 “금하다”라는 내용으로도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사전만 보고 원어를 공부한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사전만 보고 아나데마가 “금하다, 저주하다”이니까
내가 저주받아서 지옥에 갈지라도 내 민족이 구원받으면 나는 괜찮다. 이렇게 여러분이 이해해 버리면 안 돼요.
그 단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까지 올라가서 그 내용을 이해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에게 진리를 전해주기 위해 그 역할을 감수하고 싶다라는 강렬한 소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결코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도 복음만 전해지면 괜찮다 라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영생과 구원 그리고 죄와 지옥, 땅들의 세상이 어떤 것인지 진짜 알아버린 사람에게서 나올만한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게 죽음인데 그게 사망인데 ~ 어떻게 내 구원과 그 걸 바꿉니까?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그 지옥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 처절하게 경험해 본 사람이...안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건 제 자식하고도 안 바꿔요. 그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랑이며, 긍휼이며, 은혜이며 능력인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사람 하나 죽여도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려와서 안 죽어도 된다니까. 그게 그렇게 된다면~~
그러한 인본주의적이며 박애주의적인 아담들의 안경이 바울이라는 한 사람을 위대한 성자로 만들어 버리는 그러한 번역을 해 버린 거예요. 그래야 모든 인간들이 성자로서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그렇게 살았다. 우리도 그런 마음, 그런 사랑의 마음, 그런 헌신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보는 거예요 우리도요. 진리를 아는 인간이란 존재들은 이렇게 위대해~.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속에는 마땅히 우리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 라는 오만이 섞여 있는 겁니다. 하나님 흉내 내기 식의 번역인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의 구원과 그 어떤 것과도 맞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아니 구원은 하나님이거든요. 그 하나님을 무엇과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피를 토하며 내 안에 그 생명을 전해 줄 수는 있을지언정 내 목숨 수백 개 라도 줄 수 있겠어요. 이까짓 것은~ 그러나 내가 그 평안에서 끊어지고 다른 사람을 평안으로 밀어 넣고 싶다는 그런 열망은 절대로 제 안에서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 그 만큼 제게는 그 생명이 소중합니다.
바울은 지금 그런 종류의 애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진리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자기는 아쉬울 게 없어요, 이제. 그죠? 저? 아쉬울 게 없어요. 그냥 이제 지리산이나 아무데 들어가서 마누라랑 둘이 살면 돼.
아쉬운 건 여러분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저에게 자꾸 들려주세요, 들려주세요, 하는데~ 이건 어떻게 된 게 내가 부탁하면서 해야 돼요. 오늘 좀 긴데 괜찮을까요?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나는 괜찮아! 나는 그리스도와 이미 연합되어 있다. 그러나 당신들을 위해 내가 기꺼이 그 자리로 내려가, 내 삶 속에서 내가 파괴되고 내가 부정되고, 그 진리가 나로부터 설명되어 진다면 내가 그건 간절히 원하는 거란 거예요. 그리고 그와 혈통적으로 묶여 있는 민족적 이스라엘 역시 그러한 아나데마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무슨 위대하고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으로 부터 선택을 받은 게 아니라, 너희들도 아나데마, 위에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 진설되어 있는, 티데미 되어 있는 그런 존재들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설명하기 위해 너희들에게 준 그거, 양자됨이나 생명이나 제사나 율법이나 이런 것 또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너희에게 준 것이지, 그걸 근거로 너희들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이고, 우리의 열심을 하나님은 흠양하신다고 준게 아니라는 것을 꼭 알라는 거예요.
나 조차도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잘난 체 하지 말고 정신 좀 차리고 진리를 말할 테니 내 말을 들으라는 거예요.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전부 그 아나데마의 삶을 살다가 갔어요.
아담과 하와 아벨 셋 에녹 노아 셈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엘리아 엘리사 다윗 솔로몬 베드로 바울 요한 예수까지....그런 등등의 모든 이들이 하나 같이 아나데마의 삶을 살았죠?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앎니다. 그게 어떤 삶인지 앎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진리를 새겨 놓으셨어요. 아니 그들의 삶이라는 도화지에 진리라는 시나리오를 쓰십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들 자신을 교과서로 주는 겁니다. 그렇게 쓰임 받는 자들이 아나데마(άνάθεμα)의 삶인 것입니다. 그 티데미의 삶이란 말입니다. 그 말은 그들의 육적 인생이 하나님에 의해 차압당하고 몰수당했다는 말입니다.
그게 그의 발에서 ‘신을 벗은 자들의 인생’ 이었던 거예요.
지난 수요일 날 말씀드렸죠? 그 발에서 신을 벗는 게 뭔지. 하나님이 그들의 발에서 신을 벗게 하신 다음에~
‘신을 벗는다’라는 것은 '나를 당신에게 양도합니다.' 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때 당시에 그렇게 쓰였던 거예요. 그게 모형으로.
내가 당신에 내를 양도합니다, 하면 신을 벗어요. 그러면 이제 그 상대방은 그 사람의 발을 몰수해 버리고 자기가 가진 새 발을 주어야 되요. 그 안에 담긴 내용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주님이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서 당신을 그리스도 영 진리로 성령으로 두 신그 제자들의 발을 새 발로 씻기는 거예요. 신을 벗긴 다음에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길 거야. 그 때 당시에 발을 씻긴다는 것은 영접한다는 뜻이에요.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나를 양도한다는 거고, 그러니까 제자들이 신을 벗었어요, 나를 양도합니다, 내 발을 몰수해 가세요, 그러자 주님이, 그래 그 발을 영접한다, 내가 몰수한다. 그리고 새 발을 줄 거야. 물로 진리로 씻어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은 그 진리, 그걸 가진 이들은 새 발, 그 진리를 갖게 되고, 그 새 발은 내 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발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 마음대로 못 가고, 내 밖에서 띠 띄운, 그 발이 띠 띄운 그 방향으로 끌려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에요.
그게 아나데마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저게 저주지 복 된 삶이냐 이렇게 생각한다니까요. 그게 그냥 껍데기로 보이면 그 사람들에게는 그냥 저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아나데마(άνάθεμα)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 아나데마, 그 저주의 삶을 산다 할지라도 너희들에게 진리가 전해졌으면 좋겠어, 라고 말합니다. 나 지옥 가도 상관없어 그 말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경 안에서 증거를 하나 대 드리겠습니다. 지금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육적 이스라엘을 진리 설명용 도구로 사용 하고 있습니다. 그죠? 자기의 혈통적 이스라엘을 진리 설명용 도구로 쓰고 있잖아요. 유대인이라고도 불리죠?
유대인이란 이름이 어디서 나온 거예요? 유다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북이스라엘 남유다에요. 유다와 이스라엘은 같이 말이예요, 그러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 설명용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은 야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해요,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생이 당연히 오버랩이 되어야 되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첫째 둘째 나가리, 셋째 레위는 성전에서 일해야 되니까, 넷째, 그죠? 하나님은 그 유다의 후손, 유다의 씨로 메시아를 보내겠다 라고 야곱의 유언을 통해 언약을 하세요. 그죠? 이스라엘이라는, 그 유다라는 존재는(물론 영적 이스라엘 우리 이야기 하는 거예요)
반드시 그리스도를 씨로 가져야 된다. 진리라는 것을 씨로 가져야 된다 라는 것을 선언해 버린 거예요. 언약해 버린 거란 말입니다.
그 유다의 후손, 그 유다의 후손의 모형으로 먼저 왔던 사람이 다윗이에요. 그래서 그가 기름 부음을 받고, 씨를 낳는데 샬롬, 솔로몬이라는 아들을 낳는 거예요. 이해가 가세요? 그러니까 반드시 이스라엘, 유다는 그 씨를 가져야 되요. 아들을 그 안에 가져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다윗이 후손이라고도 부르는 거예요. 주님의 모형으로 먼저 살다간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우리의 모형으로 먼저 살다간 거예요. 그것이.
창세기 49장 8절 보세요.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너의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한다, 이거는 요셉에게 일어난 일이잖아요. 보세요.
요셉과 유다와 이스라엘 야곱의 삶,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삶이 정확히 오버랩이 되어야 되요.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창49: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창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마치 유다를 하나님이 장자로 책봉하시는 것처럼 보여요. 맞지요. 이스라엘 그 유다 그 장자를 오게 하라 그러잖아요.
당연히 장자여야 되요. 그런데 어떤 과정을 거쳐 장자가 되는 지를 설명해주는 게 성경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시작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공부하는 로마서 9장 10장의 그 이스라엘, 그 유대인들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 된 그 유다, 그 이스라엘, 그 요셉, 그 야곱이란 말입니다. 나중에 확실히 이해가 가실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역대기 상으로 가면 그 장자의 명분이 분명히 요셉에게 있다고 얘기를 해줍니다. 그래서 유다에게 일어난, 주어진 이 예언이 요셉에게서 그대로 성취가 되는 거예요.
역대상 5장 2절을 보세요.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과 요셉은, 이스라엘이 유다니까, 유다와 요셉은 반드시 장자를 그려내는 같은 삶을 공유해야 되죠. 그래서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되고, 창세기 39장에서 그 이야기가 전개가 되거든요. 창세기 38장을 쏙 빼버리면 딱 연결이 되요. 근데 그 요셉의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하면서, 이 이야기가 전개되기 바로 전에 유다의 이야기가,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가 창세기 38장에 삽입으로 딱 들어가 있어요. 그 말은 이 요셉의 이야기를 유다의 이야기로 보라는 거예요.
요셉이 여기는 어떻게 시작됩니까?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그러죠? 야곱의 삶이라는 건 이런 거야. 어떤 야곱? 얍복강을 건넌 야곱, 이스라엘이잖아요. 그 사람은. 이스라엘의 삶이라는 건 이런 거야 하면서 요셉의 이야기를 펼친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그 요셉의 이야기는 유다의 이야기로 봐야지 하면서 38장에 유다의 이야기를 끼어 놓는 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야곱,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유다의 이야기와 요셉의 이야기는 정확히 같은 이야기여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영적 이스라엘, 영적 장자인 우리들의 이야기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9장 10장을 우리의 이야기로 보지 않고, 저 육적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보면 여러분, 성경을 엉터리로 보게 되는 거예요. 성경은 한 맥으로 연결되어 있다니까요. 뚝뚝 끊어져서 여기선 이 이야기, 저기선 다른 이야기, 이렇게 하고 있지 않다 말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라니까요. 다 꽉곽 눌러서 꾹꾹 짜 보면은 그거 하나에요.
그게 뭔진 아시죠? ㅎㅎ 유다 즉, 그 이스라엘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제가 창세기 38장을 간략히 설명해 드릴게요.
바울이 왜 내가 알레떼이야 진리를 말한다 라고 하면서, 그 아나데마 라는 그 단어를 그 진리를 내용으로 끌어다 썼는지 잘 한번 보시라는 말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부 그 삶을 살았어요. 유다는 메시아를 씨로, 아들로 나와야 하는 하나님 백성 전체의 모형이에요. 그럼 그 후손에서 반드시 그 씨가 나와야 되요. 그래서 유다의 후손으로 다윗도 오고, 그 후손으로 예수가 오는 거예요. 우리가 바로 거기에서, 그 라인에서 그 족보의 한 인물로 우리가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이야기란 말입니다.
근데 유다의 이야기는요, 며느리와 통간을 해서 쌍둥이를 낳은 이야기 이외에 별로 특이한 이야기가 없어요.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야기를 성경에서 빼도 될 뻔 했다, 이렇게 써놓았더라니까요. 진짜로. 아니 그거 빼면 안 되는 거예요. 그에게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이 자손을 생산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안 되죠. 반드시 여기서 그 씨가 와야 되거든요. 유대 사람들에게는 형사취수제라는게 있어서, 첫째가 자손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으면, 그 형수는 둘째에게 줘야 되요. 그래서 거기서 반드시 아들을 나아야 되요. 거기서 아들을 낳으면 그 첫째 아들은 형의 족보에 입적이 되고, 그 둘째부터 그 둘째의 아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둘째 오난에게 그 형수를 주었는데 이 오난이 그게 싫었던 거예요. 그래서 땅에다 설정했다, 그래요. 성경이요. 땅에 씨가 설정되어 버리면 그게 멸망이에요. 씨는 반드시 네케바 여자 안으로 들어가 아들로 맺혀야 되요. 그런데 그가 그 씨를 땅에다가, 하늘의 씨를 땅에다 설정하면 죽는 거예요. 마스터베이션 하지 마라 이런 말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둘째까지 죽여 버립니다. 씨를 못가지면 죽는 거라는 뜻이에요. 하나님 말 안 들어서 죽였다는 게 아니라. 셋째가 남았어요, 그런데 유다가 그 셋째 아들마저 저 며느리가 잡아먹을까 봐 안 줍니다. 그리고는 다 클 때까지 기다려라. 아직 너무 어리다. 그래서 친정으로 보내지요? 철떡 같이 믿고 갑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유다의 아내가 죽었어요. 그 즈음에 유다가 딤나로 양털을 깎으러 갑니다. 마누라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근데 그 소식을 듣고서 다말이 보니까 셋째가 다 컸어. 근데 아직도 안 주는 거예요. 그래서 창녀로 변장을 합니다. 그리고는 시아버지를 유혹하죠. 그리고 담보물을 받아놔요. 그 담보물이 도장과 지팡이입니다. 끈은 도장에 달린 거예요. 도장과 지팡이에요. 원래 유다가 다말의 몸값으로 주기로 한 게 염소 이었어요. 제물입니다. 근데 다말이 그것을 받지 않고, 도장과 지팡이만 갖고 사라져요.
이런 글 읽으면서 야 마누라 죽은 지 며칠 되었다고 창녀하고. 그런 거는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요지가 아닌 거예요.
남자들 잡지 마세요. 괜히. 얼마 후에 유다의 귀에 자신의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죽어야 하는 일이에요. 이거는요.
유다는 이때다 싶어서 다말을 대려다가 불살라 죽여버릴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다말이 자기 배속에 있는 아이의 그 아비의 담보물을 내놓아요. 아비가 죽이려고, 너 그 배에 들은 게 그게 뭐야 라고 묻자, 그 여자가 그 아비의 담보물을 내놓는 거예요. 그게 도장과 지팡이였어요. 그렇게 해서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나고 마태복음 1장의 예수의 족보에 그들이 턱 하니 올라가 있습니다.
콩가루 족보에요. 기생 라합도 있고, 거기에는. 근데 그게 메시아의 족보에요. 그리고는 다시 요셉의 이야기가 이어진단 말이에요.
도대체 야곱, 이스라엘의 그 약전을 설명한다 라고 성경이 이야기 하면서 요셉의 이야기를 등장 시키는데 그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왜 이 지저분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냐 말이에요. 어떤 이들이 이건 빼 버려야 된다 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무서운 이야기 아닙니까?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내 놓아야 할 담보물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는 에피소드인 거예요. 도장 이라는 건, 인을 이야기하죠. 성경에 무수히 등장하는 그 인. 인을 말하는 거고.
지팡이는 다름 아닌 진리의 말씀, 라메드라는 말 자체가 ‘가르치다’ 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거라고 그랬어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그 자칼과 네케바의 ‘자칼’ 이라는 단어가 ‘인치다’ ‘표하다’ 그래서 ‘기억하다’ 이런 단어에요. 자칼이란 단어 자체가. 그러니까 그 네케바라는 존재가 그릇이란 뜻이라고 그랬죠. 홈, 그릇, 어떤 걸 담는 그 그릇. 그 네케바가 자칼을 자기의 반쪽으로 이렇게 담아서 딱 갖고 연합이 되게 되면, 요철처럼 이렇게 하나가 되게 되면, 그게 바로 하느님의 인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인친 그 자만을 기억한다 라고 해서, 자칼을 기억하다 표하다 인 친다 이런 단어로 쓴단 말입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가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전부 인이 쳐져 있는 거예요.
그건 뭐 인두로 지져 놓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들어 있으면 그걸 인 쳤다 라고 해요 성경이.
그 자칼, 그 진리, 그 기름을 그가 갖고 있는가? 그러면 인친자에요. 그 인이라는 개념이 어디에서 나왔냐면,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들이 두건을 쓰죠? 그게 터번 같은 거예요. 관. 거기에다가, 이마에다가 인을 새기는데 어떻게 세기냐면 도장 새기듯 세 기라고 그래요. 성경을 보면은. 여호와께 성별, 이렇게 되요. 저건 내가 인친 거야. 도장 찍은 거야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이마에 인친다고 하는 거예요. 여기다 뭘 찍는 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그 인, 그 도장을 갖고 있으면 이 씨가 뭐야 라고 묻는, 만일에 대답 못하면 죽는 겁니다, 그에게 ‘이건데요’ 라고 내놓을 수 있는 담보물이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그 도장이. 그래서 성경은요, 그 인을 기름부음이라고도 이야기해요. 기름은 항상 하나님의 그 진리, 그리고 구약 시대 때 기름이라는 것은 올리브기름 밖에 없어요. 감람나무, 올리브나무는 항상 하나님을 상징하는 나무였어요. 그 하나님의 말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그 기름으로 항상 빛나야 되는 게 촛대였잖아요. 그래서 그 인을 기름부음이라고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기름은 또 성령이라고도 하잖아요. 찾아 드릴게요.
요한일서 2장 20~27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하신 자는 하나님이시죠. 예수 그리스도에요)
모든 것을 아느니라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내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죠.)
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한다는 말은 한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하나로 말하지 않는다. 왜 두 가지로 말하나 이런 말이죠.)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버지와 아들의 말을 한 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걸 두 말로 말하면 그게 적그리스도라는 것에요. 아버지의 말이라는 것은 율법이죠? 하나님의 말씀. 아들의 말이라는 건 진리로 해석 된, 그 아들의 말씀이잖아요. 그건 원래 같은 말이었다 라고 모르면 그게 적그리스도라는 것에요. 왜? 이 아버지의 말은 명령이 될 거고, 이것도 엉뚱한 말이 될 것이거든요.)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아들과 똑 같은 말을 하는 자에게는 그에게 아버지가 있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아브 라는 말이 성전이라는 뜻이잖아요? 그죠? 아버지가. 내가 내 안에 그 진리를 갖고 있으면 그게 아버지잖아요. 그 진리가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니까. 그리고 내가 그걸 누군가에게 전해주어서 그가 아들로 탄생되면 내 안에 있는 그 말, 그 진리가, 나는 아니지만, 그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도 하나가 되는 거고.)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 아르케 라는 말이 베레시트라는 말이니까, 그 아버지의 일곱 언약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걸 너희 마음으로 가져라 이런 말이에요. 율법 성경을 마음으로 가져라, 간직해라. 그걸 그냥 행위로 도덕과 윤리로 받아 들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건 아파르, 티끌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그 진리가 약속이고 약속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래요. 그걸 가지고 있으면 여러분은 산거예요. 그게 영원한 생명입니다.)
26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이 기름부음이라는 뜻이 헬라어로 ‘크리스마’ 에요. 크리스마에 에스 붙이면 크리스마스거든요. 그거를 ‘크리스마’ 에다가 오미클론 시그마를 붙이면 존재가 되지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렇죠? 그래서 크리스토스가 되면, 그리스도면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되는 거예요).
너희 안에 거하나니
(그러면, 그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거하면, 그것이 내 안에 거하면, 그것이 그리스도 이니까, 크리스토 이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예요.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스도인.)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그렇게 내가 그걸 가지면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더 이상. 그걸 마음으로 가지면 그 때부터는 성경의 구약의 레위기의 수많은 율법 조항이라든지, 이해도 안 가는 묵시서의 그 내용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그냥 진리로 이해되어지는 거예요. 왜? 그게 내 안에 있어요. 이제 볼 눈이 생겼어요. 내 안에. 안경이 생겼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누가 더 이상 ‘그건 이거야’ 라고 자꾸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 더 이상 성경 말씀 안 읽어도 된다, 설교를 안 들어도 된다, 이런 말이 아니라, 더 이상 이게 진리잖아 라고 입증할 그 과정을 이제 안 통과해도 된다 라는 거예요. 여기서 이야기 해 주면, 당연히 그런 거죠, 마땅히 그렇죠 라고 내 안에 있는 그것이, 그 인이, 그 기름부음이 나를 그렇게 깨닫게 해준다 라는 말이에요.)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이게 진리란 말이죠. 알레떼이아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럼 우리 안에 인으로 들어 와 있는 게 뭐에요. 도장으로 들어와 있는 게. 기름이지요? 기름부음입니다.
그게 뭐에요? 그리스도입니다. 그 그리스도는 진리죠? 그 진리가 우리를 가르친다 그러죠? 가르치는 건 뭐? 지팡이.
그러면 인과 지팡이를 내가 담보물로 갖고 있다는 건, 그 성령, 그 진리를 내가 내 안에 마음으로 갖고 있다는 거죠? 그러면은 산다 라는 거예요. 아들을 시인한다는 건, 아들과 같은 말을 한다 라는 거고, 다른 말을 하면 그게 ‘아르네오마이’ 에요. ‘부인하다’ 라는 말이에요. 그 아들의 말을 그냥 율법으로 이야기 해 버리면, 그게 부인하는 거예요. 아들과 아버지를 부인하는 거.
두 증인은 아버지와 아들이거든요. 근데 아버지와 아들은 한 말을 해야 올바른 증인이 되는 거잖아요.
율법과 그 신약의 그 진리는 하나에요 하나. 근데 아버지의 말 다르고, 신약의 말 다르고, 그러면 이 증인이 안 되잖아요.
엇갈린 증인이 되면, 그렇게 만들어 버리면, 적 그리스도 라는 거예요. 왜 아버지와 아들을 둘로 나누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인데.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요한복음 17장의 이야기가 전부 그거 아니에요.
아버지와 나는 하나, 너희와 나도 하나, 아버지와 너희도 하나, 두 증인은 항상 같은 말을 해야 되요.
그 위에 것과 아래 것은 항상 하나로 연합되어 이해가 되어 져야 되는 거예요. 그게 진리라니까요. 그게 복음이라니까요.
성경은 그 기름 부음을 처음부터 들은 아버지의 말이라고 그러고, 말씀이잖아요? 그죠? 일곱 말, 그게 생명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것이 지팡이가 되는 것이다. 그 것만 갖게 해주면 다음부터는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대단한 성경 지식이나, 무슨 조직신학적 이해, 이런 거 없어도 되요, 괜찮아요. 지금 제 말이 어떤 말인지 이게 이해만 가시면, 아무 것도 몰라도 된다니깐요. 그 다음부터는 그거 버려도 되요. 그것만 안에 갖고 있으면 돼, 알맹이만.
여러분들이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은 전부 껍데기잖아요. 사람의 말이고. 그리고 여러분이 갖고 있는 성경 또한 여러분의 이 아래의 말로 준 거 잖아요. 써준 거잖아요. 그리고 그거는 소리로 읽으라고 준 것도 아닙니다. 그죠?
모음이 없어줬는데 어떻게 읽냐구요. 소리를 내면 그 즉시 그건 그 진리가 아닌 거예요. 그런데 제가 소리로 가르치고 있고, 아래의 말로 가르치는데 여러분이 그것을 마음으로 갖는다면, 헬라어고 히브리어고, 수메르어, 라틴어, 아무 것도 몰라도 된다니까요. 괜히 그 진리는 별로 올바로 깨닫지도 못하면서 그런 거에 욕심을 부리는 게 지적 허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왜 알아야 해요? 그걸.
제가 집에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우리 집사람은 관심이 없어. 히브리어 제가 이렇게 성경, 구약성경 전체를 노트에다가 제가 한 줄 한 줄 이렇게 다 붙여 갖고, 제 개인 주석을 만들고 있거든요. 한자 한자 파자 해 갖고, 관련 성구도 찾고 해가지고, 나중에 그거 갖고 다니면 되잖아요. 혼자 하기 힘들어서 제가 프린트 아웃을 해서 히브리어 한절 한절씩 우리 집사람에게 주어 노트에다가 붙여 달라고 하고, 계속 프린트 아웃을 하는데 뒤집어서 붙여 놓았어요. 어디가 위인지 아래 인지 모르는 거예요. ㅎㅎ
모르면 어때요? 제 말을 잘 이해하고 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지금 그 히브리어를 국어로 쓰고 있는 그 사람들이 몇 프로 예수를 믿습니까?
그 헬라어를 국어로 쓰고 있는 그리스 사람들의 기독교인의 퍼센트가 얼마나 되는 줄 아세요? 그게 왜 중요하냐고요?
다말이 자기 뱃속에 씨를 잉태했어요. 그 아이의 아버지가 와서 묻습니다.
너 어떻게 그렇게 됐어? 말 못하면 죽는다. 그것도 불에 태워서 죽는다. 너 말 못 하면 지옥이야.
그 때 그 씨를 잉태한 여자가 도장과 지팡이를 내놓습니다. 그랬더니 심판이 지나갔어요. 아버지가 심판을 못해요.
만일 다말이 시아버지가 보낸 염소를 맡아 놓고 그거를 줘버렸어. 이건 아무 가치 없는 거니까.
그리고 그 아버지가 와서 물었을 때 염소를 내놓으면서, 이거 당신이 나에게 준거 아니에요? 그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었어요. 염소는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어요. 제물이지요, 그게. 희생제사의 제물이에요.
그런데 도장과 지팡이는 그 사람 거예요. 당신이 나에게 준 게 이거잖아요. 이거 밖에 없어요 라고 내놓으면
그 아버지는 그 여자를 심판할 수 가 없어요. 내가 준거가 맞거든요. 내 씨가 맞거든요.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진리의 씨를 담고 있다고 다들 자부하실 거예요. 내 안에 진리가 있다고, 나는 복음을 이해했다고. 그런데 그 씨가 율법의 씨 일수도 있고, 진리의 씨 일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담고 있는 씨가 율법의 씨라면, 여러분은 그 남편에게 염소 새끼를 내놓을 수밖에 없어요. 열심히 희생제사만 드리는 자기애적 자기 헌신의 열정 같은 거겠죠. 그게 희생 제사니까. 성전 안에서 드리는 희생제사. 그걸 염소라고 그래요.
주님께서 심판대 앞에서 자기 왼편의 염소들에게 뭐라고 그럽니까? 니들은 밖으로 나가서 슬피 이를 갈아라 그래요.
염소들이 뭐라 그랬는데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냈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 행했고, 주의 이름으로 그렇게 착하게 살았는데 왜 나를 모른다고 그럽니까 그랬다니까요. 그래 그게 희생제사 아니냐? 그게 염소잖아?
나는 너희를 처음부터 알지 못했다고 그래요. 나는 너희를 처음부터 안 적이 없다고 그런다니까요?
양들에게 뭐라 그럽니까? 그 양들이 주님에게 ‘주님 우리가 언제 그런 거 했습니까?’
니들이 저 불쌍한 소자 하나에게, 진리를 알지 못해 이제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소자에게, 네 안에 있는 그걸 주었으면 그게 나에게 한 거야라고 이야기해요. 그게 인과 지팡이를 가진 사람들인 거예요. 어쭙잖게 염소라는 제물 내놓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진리, 그 분의 것, 그 분이 나에게 준 그거.
아우슈비츠에서 나머지 빵, 하나 남은 빵, 내 목숨, 이런 거 내놓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을 진짜 살릴 수 있는 거. 내가 그 사람 대신 가스실에 들어간다고 그 사람들은 안 죽습니까? 곧 죽어요, 곧. 그럼 그 과정에서 생긴 건 뭡니까? 먼저 죽은 사람의 가치, 만족, 이거 밖에 없다니까요. 인간들이 생산해 낼 수 있는 건 그거 밖에 없어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다 할지라도 그 사람도 죽는다니까요. 하나님은 그걸 주라고 한 게 아니에요. 네 목숨 백 개 주어도 그거는 내가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가 진짜 살 수 있는 그걸 주어야지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게 아나데마의 삶인 거예요.
겉만 번드르 하게 네 평판도 챙겨 갖고, 네 만족도 챙겨 갖고, 칭찬도 챙겨 갖고, 찬송도 챙겨 갖고, 그러면서 ‘잘했죠’, 이런 거 하지 말란 거예요. 진짜 진리가 되어서 하는 그런 일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진짜. 그런데 그것도 모르면서 그냥 그 일만 하는 것을 제가 경계하라고 하는 거예요. 서신서로 가면 그 담보물이 뭔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고린도후서 5장 4절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온고지신’ 이예요. 옛날 것이 나쁜 게 아니에요. 거짓은 그걸 새것으로 볼 수 있으면 그게 진리인 거예요.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럼요. 생명이 죽을 것을 삼키면 되는 거예요.
고후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담보물이죠? 뭐예요? 인과 지팡이가 성령이라고 그러지요.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죠.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 인이 성령 맞네요. 그걸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네요. 복음이라고 하네요. 그건 믿어야 되는 거네요.행해야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율법을 우리에게 명령으로 주신 게 참 지혜로운 거예요. 진리를 알지 못한 이들은 그 명령을 행해버리고, 진리를 아는 자들은 그 명령을 마음으로 가져버려요. 심판은 거기에서 일어납니다.
엡1: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보증 이예요. 보증. 그 인, 그 성령, 그 말씀. 그래서 열처녀의 비유에서도 지혜로운 처녀들이 기름, 그 인, 그 보증 그걸 준비하고 있었던 거예요. 신랑이 왔습니다. ‘너 내가 가지고 있으라는 거 가지고 있어?’ 기름 쑥 내놓았더니, 쑥 끌어 들여서 문을 닫아 버렸어요. 열처녀죠? 여러분 성경에서 처녀는 굉장히 부정한 겁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면 그 존재는 여자로 죽어야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여자예요. 여자인데 반드시 하나님, 그 그리스도라는, 어린양이라는 그 남편을 내 남자로 맞아 신부가 되어야 되요.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집 안으로 들어가서 신부가 되고, 나머지는 처녀가 되어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르고 그냥 죽는 거예요. 근데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그 남편, 그 기름, 그 인, 그 담보물을 갖고 있어야 되요. 하나님이 준 담보물.
그게 도장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가진 이가 이스라엘의 그 완성으로 등장하는 요셉이라는 말이에요.
그 남편이 주신 그 진리라는 담보물을 가지고, 이 꿈에 불과한 세상의 실체를 분별해 내는 이로 사는 거예요.
그 남편의 인과 지팡이는 껍데기 안의 내용을 보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담보물이더라는 거예요.
성경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때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라는 내용을 단 한 줄도 적고 있지 않습니다. 요셉의 이야기 중에 하나님이 요셉에게 나타났다는 대목이 어디 있어요? 없지요? 차별대우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쫓아다니면서 참견하세요. 근데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나타나지 않아요. 그건 그가 이미 진리라는 가르침을 마음으로 갖고 산 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에요. 그가 이 보증을 가진 자다 그걸 내가 그리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그 야곱이 이스라엘로 된 이후의 삶은 없죠? 성경에. 그래서 그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을 때 그가 어떻게 살게 되냐면 이 요셉처럼 사는 거야. 그러니까 그 요셉은 야곱이에요. 야곱은 유다고. 물론 진리를 안 상태에. 그 이야기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는 세상의 실체를 이렇게 봤습니다. 풍성한 진리의 제물인 그 살찐 소 일곱, 살찐 소는 제물이잖아요. 그거는 실제로 하나님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거잖아요. 제물이라는 거는. 그죠? 진리잖아요. 그래서 풍성한 살찐 소. 그리고 율법의 제물인 마른 소, 흉측한 소, 가짜소, 그 둘은 일곱으로 동시에 이 땅에 주어지는 거예요. 이게 왔다가 나중에 이게 오는 게 아니고.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지금 보세요. 여러분 지금 풍년의 때입니까? 흉년의 때 입니까?
여러분에게는 풍년이에요. 왜? 예수가 죽고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이 진리로 왔거든요.
누군가 에게는 풍년의 때라니까요. 그 먹이가 마음으로 양식을 들어갈 수 있는 때에, 어떤 이들에게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흉년의 때에요. 어떤 이들에게는 칠의 풍년의 때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칠의 흉년의 때라니까요. 둘은 같이 오는 거예요.
세상이 지금 아나데마의 모습으로 그렇게 지금 구조 되어져 있다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 숨소리, 여러분의 몸, 세포 하나하나까지 다 진리를 이야기 하는데 우리가 그걸 모르는 거예요.
모르고 그 말을 하고, 모르고 그 인생을 살면, 그걸 거짓이라고 그래요. 그러나 그 내용은, 진짜 그 내용은 진리니까요.
이 세상 어떤 것도 말씀으로 지어지지 않는 게 없다면서요. 그러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다 진리라는 이야기인데 그걸 모르고 말하고, 모르고 살아 버리면 그게 거짓인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살찐 소 일곱, 그 진리가 흉측한 거에게 먹혀 있는 이런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 한다 할지라도 그걸 그 안의 살찐 소 일곱으로 받아먹으면 되는 거예요. 이 역설을 한 번 보세요. 이 역사도 그렇게 끝날 거예요.
진리를 아는 이들이 몇 되지 않지만, 나중에는 하나도 없는 때가 올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 때는 비진리가 왕인 세상이 되는 거예요. 잠시 풀려난다고 그러지요? 잠시지만, 그 때에는 진리가 완전히 망한 것처럼 어두운 세상이 온다니까요. 그 누구도 이 진리를 이야기 하지 않는. 지금 현재 세상이 그런 상태라는 거예요. 그쪽이 너무 커. 그래서 여기에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이 이야기는 그들에게 먹혀버리는 이야기 밖에 안 돼요. 그래서 이렇게 우리는 그냥 커튼까지 쳐놓고, 뭔 꼴이야, 창문도 못 열고. 그냥 이러고 있는 거예요.
칠 년의 풍년, 그 엄청난 추수, 알곡의 추수, 진리라는 알곡이 그 흉측한 가라지에게 먹혀 있는 꼴, 이게 역사에요.
그러나 우리는 그걸 알곡으로, 식량으로 받아먹으면 되는 거예요.
야곱은 그 칠칠을 그냥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살았는데 요셉은 이 칠을 이 칠로 이해를 하고 깨달으면 그게 바로 진리다.
인과 지팡이를 가진 거다 라고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세상이야. 그래서 그 꿈을 꾼 놈도 바로고, 다니엘서에서 자기가 무슨 꿈을 꾼지도 모르는 그 인간도 바빌론의 왕이에요. 항상 세상의 왕들이 꿈을 꾸고, 그 꿈을 해석해 주는 건 진리를 아는 이들이라니까요. 이 인생이 뭔지도 몰라요. 자기들이 왜 살아야 되는지도 모른다니까요. 그리고 이게 꿈이라는 것도 몰라.
그런데 인과 지팡이를 가진 이들은 그 안에 그 지팡이가, 그 도장이, 그 기름이 나를 가르치기 때문에 그 세상을 아는 거예요.
좌우, 상하, 어둡고 밝은 거, 이게 다 그게 가능하구나 이렇게 알아버리는 거예요. 그럼 그게 자유인 겁니다.
그게 아나데마의 모습이에요. 위에 것을 담고 있는 아래의 티데미 되어 있는 것들. 이 세상의 선과 악, 죄와 의, 어두움과 밝음, 위와 아래, 좌와 우, 그런 것들을 갖고 그게 뭔지를 깨닫고 말 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인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가진 자들 이예요.
그 담보물이라는 말 자체가 ‘파라클레토스’ 잖아요. 보혜사. 성령. 그걸 여러분에게 담보로 주었다니까요, 보증으로 주었다니까요.
그들은 악과 죄와 어두움과 아래와 바다와 좌, 이걸 갖고 심판하러 오실 하나님 앞에서 담보물을 들이대면서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그냥 아래의 것들 아닙니까 라고 내가 알아버리면, 그 담보물로 이게 다 그거 아닙니까 가르침으로 우리가 그렇게 알아 버리면, 그렇지 너는 아는구나! 하나님이 심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 9절
출32: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금소를 만들어 버렸어요. 금송아지도 아니고 금으로 만든 소도 아닙니다. 금으로 만든 걸 어떻게 불에 녹여서 가루로 만듭니까? 뭐 하러 녹여요. 다 금인데. 아피스의 소처럼 틀 실한 소를 하나 만들어 놓고, 그걸 금으로 치장한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 놨더니 하나님이 저 봐라, 얘들이 저 소를 ‘나’라고 한다. 하나님을 소라고 하는 거 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어요. 죽어야죠? 심판입니다.
출32: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심판, 너 어떻게 그렇게 되었어? 아버지가 옵니다.
출32:11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출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하였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그렇게 이들의 죄로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이런 말이에요.
‘하나님은 그렇게 하려고 이 죄를 그들에게 허락하신 분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당신은 분명 이들에게 약속을 주었습니다’.
출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이스라엘은 야곱이지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창세기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모세가 창세기를 들먹거리는 거예요.
하나님, 당신은 창세기에 그 내용을 진리를 주셨는데 우리가 못 알아먹으니까 지금 출애굽기를 쓰고 계신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잖아요? 그 말씀이 뭔지 몰라서 율법으로 다시 주신 거거든요.
그러니까 창세기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안에서 다 해석이 되요. 그래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잘 공부하면 창세기를 다 이해할 수 있어요. 모세가 그러는 거예요. 그 조상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 있잖아요.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들이대면서 하느님이 이들을 반드시 하늘의 별로 만드신 다고 그랬습니다.
누구에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우리 조상에게, 이스라엘에게 약속 하셨잖아요.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룰 건데 그 길에 이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그걸 이루기 위해 그들에게 허락하신 것 아닙니까 라고 인과 지팡이로 명확하게 그 언약을 짚어내자, ‘그렇지 그러면 내가 심판을 못하는 거야’ 이게 출애굽이고, 이게 구원이다를 보여 주는 거예요.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하려 애굽으로 가려고 할 때 하나님의 갑자기 나타나더니 길에서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게 뭔 짓입니까? 그랬더니 모세가 뭘 내놓습니까? 아들의 할례를 내놓는 거예요. 그게 인이에요.
그게 복음의 진수 아닙니까? 이들의 죽음으로 나는 사는 거예요. 그게 출애굽이야. ‘가~~’
그걸 내놓아야 된다니까요. 그 아버지의 것을. 땅의 행위가 아니라, 땅의 열매가 아니라.
이게 바로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인 것이고, 요셉의 이야기인 것이고, 이스라엘의 이야기인 거예요,
그리고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인 거예요. 죄를 물을 때 그게 뭔지, 또 왜 주어진 것인지 정확하게 제시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너는 죄와 무관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 십자가는 여러분의 과거의 죄, 미래의 죄, 현재의 모든 죄를 다 대속한 거라면서요. 없이 한 거라면서요.
그럼 과거의 죄도 없고, 현재의 죄도 없고, 미래의 죄도 없으면, 죄는 없는 거네요. 여러분에게는. 무관한 거네요.
그런데 왜 매주 와서 용서해 달라고 그래요? 뭐를. 그 죄와 무관한 자로 만들어 주는 걸 대속이라고 그래요.
여러분의 몇 가지 죄를 없이 해 주는 게 아니라니까요. 아~~ 그게 죄가 아닌 거구나 라고 깨달아 알면, 아~~그 선악과는 생명나무로 우리에게 주신 거구나 라고 알면, 그 선악과, 그 죄, 그 어두움, 그 아래의 물, 그 성전, 그 율법, 그것이 왜 문제가 되냐고요. 우리에게. 그게 인과 지팡이를 가진 자의 당당함인 것입니다. 하나님, 이게 이거잖아요 라고 내놓았을 때, 하나님이 그렇지 내가 너를 어찌 심판하니. Pass over, 유월. 넘어가는 거예요. 죽음의 심판이.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명확히 이해해서 죄와 세상을 설명하고, 하나님 그런 거잖아요, 라고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 하는 거,
내가 원합니다. 아나데마 되어서라도 저들이 그걸 깨달아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이걸 기도라고 해요. 이걸 중보라고 해요.
그리고 그 내용을 그대로 흘려주는 것, 이 모든 걸 프로슈코마이, 기도라고 하는 거예요.
옆집 순이 엄마 암, 꼭 낫게 해 주세요 같이 기도해 주는 게 중보기도가 아니라.
그게 이스라엘이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유다가 말씀을 율법으로만 이해하고 그 율법을 열심히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는 엉뚱한 열심에만 머물러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얘기 하는 거예요.
내가 요셉처럼 유다처럼 다말처럼 우리 믿음의 조상들처럼 그 아나데마의 삶을 살며, 내 골육 친척들에게 진리를 전해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싶다는 거예요. 내가 간절히 원한다는 거예요.
아니 마땅히 그렇게 될 거고 당연히 필연적으로 그것은 이루어질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도 빨리 그 껍데기에서 벗어나라는 거예요. 그 어쭙잖은 선민의식, 그리고 너희가 받았다고 하는 예배, 율법, 천사, 이런 것들 너희들의 구원의 근거로 내놓지 말라는 거예요. 내용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통해서 진리를 그려내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깊은 뜻을 깨닫고, 아~~우리가 뭐가 잘 나서, 우리가 열심히 제사 드려서,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게 아니구나 라고 이스라엘 스스로 자기를 부인해야 했어요. 그래야 영적 이스라엘로 합류 되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삶 아닙니까?
내가 뭐가 잘나서 하나님 구원한 게 아니구나, 라고 해야 내가 진짜 이스라엘이 되는 거라고요.
그게 로마서 9장 10장의 이야기라니까요.
그런데 제사나 열심히 지내고, 율법이나 열심히 지키면서, 우리만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선택 된 민족이라는
어리석은 행위에 머물러 있는 거, 이게 율법주의지 뭐예요.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해. 우리는 이렇게 헌금 많이 해. 우리는 이렇게 선교 열심히 해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할 거야.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게 바로 모든 보편적 아담들의 일반적 사고인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자 같은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었습니다. 그건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이름 모를 어떤 사람들도 행할 수 있는 그런 거예요. 지금도 우간다나 아마존이나 동남아시아의 오지에 가서 자기의 목숨을 바쳐가며 열심히 봉사하고 선교하고 있는 타종교인도 하는 거예요. 우리도 진리를 알고 그렇게 하자니까요. 나쁜 게 아니라. 그들 보다 더 열심히 하자니까요.
우물도 파주고, 학교도 짓고, 유치원도 짓고, 진짜로 하자니까요. 그런데 알지 못하고 섣불리 뛰지 말자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조물과 하나님의 차이가 무엇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우리와 하나가 되시겠다 라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잘 깨달아서 피조물의 한계와 무지와 무능이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이구나, 그것이 바로 용서이며, 그것이 구원이며, 그것을 아는 게 생명이구나, 이거를 알라고 하는 거예요.
그 때 그래 네 안에 진짜 내가 있구나. 너희들이 율법 안 지키고 도적 적으로 윤리적으로 잘 안 살면 그냥 확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그런 오해 된 하나님이 아니라, 진짜 나 그 사랑을 속성으로 갖고 있는, 그 사랑의 본체인 내가 네 안에 있구나. 그게 인이지. 그게 지팡이지. 그게 요셉의 삶이고, 그게 이스라엘의 삶이고, 그게 유다의 삶이고. 너희들이 그 인과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면 너희들 눈도 그렇게 열려야 되는 것 아니냐,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렇게 먼저 희생하시고, 먼저 헌신하시는 분이에요. 먼저 제사의 제물로 드려지는 분이에요. 그분이 우리를 섬기는 거예요. 내가 너희를 섬기러 왔지 섬김을 받으러 왔니 그러잖아요.
그 희생과 헌신의 의미가 뭔지를 잘 깨달아 알면, 하나님이 그걸 네 인과 지팡이다 이렇게 이야기 해 주시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아주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사건이었던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인 것처럼. 아래에는 그거 밖에 없거든요, 그게 뭔지를 알아야 생명이니까.
가인은 땅의 열매,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고 그래요. 땅의 소산으로 드리면 안 됩니다.
아벨은 첫 새끼와 기름이라 그래요. 첫 새끼는 장자라는 뜻입니다. 기름은 진리예요. 말씀입니다.
그렇게 장자, 원문으로 보면 그 장자, 첫 새끼와 기름으로 그 아벨이 하나님께 드려졌다 그래요.
그러면 그가 장자로, 진리로, 하나님이 흠양하시는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누구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하나님은 그 제사만 받아요. 그걸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이 산제사라 그래요.
그 거룩한 산제사, 그걸 영적 예배라고 하는데 산제사라는 말은 제물이란 뜻이에요, 거기서.
영적 예배가 뭐냐면 ‘라트레이아’ 라는 단어를 써요. 거기서. 그 ‘라트레이아’가 뭐냐면, 진리로 소통하는 예배를 이야기해요.
여러분과 제가 ‘세바조마이’ 의 그 상태가 되면, 그게 뭐냐면 진리로 내 마음을 가져 내 자체, 내 삶이 예배가 되는 상태를 ‘세바조마이’라고 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 그러냐면, 그러면 이제 성령과 진리로, 신령과 진정으로 그렇게 번역 되어 있는데, 성령과 진리로 프로슈큐네오, 예배를 해라 그래요. 그때가 온데요. 어느 때? 너희들이 세바조마이의 상태가 되면, 너희들 자체가 제물이 되고 예배가 되면, 너희들에게는 이제 신령과 진리로 프로슈큐네오 하는 화답 예배가 요구 될 거라는 거예요. 당연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모여서 이 화답의 예배를 하기 위해 저한테 성경을 배우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배우는 데에만 집중을 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는 건, 그게 지적 허영을 만족시키는 영지주의에 머무르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 자유를 가지고 이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서 이렇게 내가 진리를 이야기하고 여러분이 거기에 화답하는 이 소통을 라트레이아 라고 그래요. 영적 예배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을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거를 요구하신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벨이 그렇게 드렸다고 그래요. 기름, 그 말씀과 그 장자로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다는데 가인이 그럼 내가 드리는 이 제물은 뭐야? 이거 하나님이 원하는 거 아냐? 이거? 이 염소 이거?
아벨은 인과 지팡이를 내놓고, 가인은 염소를 내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드리는 그 제물이 뭔지를 모르니까 내가 드리는 이 제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나 말고 다른 제물을 드리는 그를 죽여야지요. 이게 하나님 살해 사건이에요. 인간들의. 예수 살해사건. 괜찮아요. 당연히 우리는 그 예수를 죽이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마땅히 그 진리를 알면, 그 예수를 마땅히 죽여야 되요. 그래야 우리는 그 예수를 섬기지 않고 내 안에 마음으로 가진다니까요. 진리로 가진다니까요. 그런데 내가 그 아벨을 죽인 게 도대체 왜 나는 저 아벨과 다른 제물을 여태까지 드리고 있었으며, 나는 그 제물을 지키기 위해 왜 저 하나님을 살해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내가 깨달아 알지 못하면, 나는 살인자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살인자를 마귀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비진리 라는 거예요. 그래서 유다가 예수를 팔아버리는 그림이 신약에 등장하는 거예요.
유다 가인 요셉 야곱 그 유다가 그 유다에요. 유다가, 여러분 얘기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 유다에요.
모든 아담들이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그 하나님을 넘기게 되어 있어요. ‘
팔다’ 라고 번역이 된 ‘파라디도미’ 는 ‘넘겨주다’ 라는 뜻이에요. 넘겨주다. 팔긴 뭘 팔아요?
유다가 안 팔면은 사람들이 그 예수 얼굴 몰랐나요? 다 알았어요. 그럼 무슨 이야기냐고요? 그게. 넘겨주는 거예요.
다른 제자들은 안 넘겨주었나요? 저주하며 넘겨주었습니다. 부인했어요.
그러면 내가 왜 그 예수를 넘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죽음의 넘길 수밖에 없었는지, 내가 알면 돼요.
내가 왜 그를 죽음으로 저렇게 몰아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내가 알면 돼요.
제자들은 오순절날 성령이 불에 혀처럼 임함과 동시에 자기들이 그렇게 완벽하게 세 번이나 철저하게 그 분을 부인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니까요. 유다는 그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오기 전에 죽어 버렸어요. 그건 유다가 자살했기 때문에 마귀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 성령이 와서 그 유다가 다른 열 한 명의 제자들처럼 그게 뭔지를 알았으면 그 유다나 그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야, 같은 거예요.
그런데 그 유다는 그 진리의 성령을 인으로 못 받고 죽었다니까요.
그러니까 진짜 복은 뭔지 아세요? 여러분. 진리를 알고 죽는 거예요.
행복, 조경수 노래 있잖아요?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복은 여러분이 뭔지 아시죠? 하나님의 그 제물 되심에 의해서, 이게 제단이니까. 그렇죠?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한 곳, 이 밭, 에덴동산, 하나님의 성전에서 함께 사는 것을 복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어떤 게 복이냐면, 이 ‘행’ 자가 뭐냐면 어려서 죽지 않는다 이런 말이에요.
어려서 죽는다는 게 애기 때 죽지 않는 게 복이다 이런 말이 아니라, 진리를 아는 자를 어른이라고 그래요.
진리를 못 듣고 그게 뭔지 모르는 상태를 젖 먹는 어린아이라 그러지요? 그 어린아이로 죽어 버리면 그게 불행이고요.
그 어린 아이 때 죽지 않고 진리를 알고, 장로, 진리를 안자가 되어 죽으면 그게 복이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반드시 우리는 그걸 알아야 되요. 유다가 그걸 모르고 죽어서 마귀라는 소리를 들은 거예요. 하나님에게.
저놈은 마귀다. 왜? 성령이 오기 전에, 그 일을 깨닫기 전에, 죽을 거거든.
우리 조상들이 아나데마의 삶을 살면서 그 삶을 진리로 깨달아서 하늘의 별들로 살았습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 조상들이 그 인, 그 지팡이, 그걸 하나님한테 선물 받아 하늘의 별들이 되었다.
나도 너희들에게 그런 아나데마의 존재가 되어서 너희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너희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고,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 아래의 것들과 아래의 개념들을 위에 것으로 깨달아 알면 그게 구원이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에게 모형으로 주어진 양자,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이런 것들을 너희들의 자랑을 많이 삼고 있으면서, 그리고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천사가 뭔지 부활이 뭔지 이렇게 그런 걸로 싸우고만 있으면서 그게 구원이니, 영생이니, 나는 구원 받았느니, 이러고 있으니 내가 어찌 안타갑지 않겠느냐, 내가 전하는 그 내용이 바로 알레떼이아, 진리야,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라 이런 말이에요. 내 말을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여러분 이 세상은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잠시 있다 사라지는 꿈같은 거예요. 환상 같은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있죠, 크로노스의 이 세상, 여기를 꿈이라 그래요.
환상이라 그래요. 꿈이나 환상은 지속 되지 않는 걸 꿈이라 그러잖아요. 중간에 깨 버리는 거. 그렇죠?
꿈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는 거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거 꿈이죠. 당연히 환상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꿈 꿔 봐서 알지요? 꿈속에서 여러분이 정말 먹고 싶은 것을 배 터지게 먹어 본 적이 있죠?
깨어났더니 계속 배가 불러요? 너무 너무 목이 마를 때 시원하게 해갈을 했습니다. 계속 물 마셔야 되요.
꿈속에서 먹은 건 우리 현실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아요.
꿈속에서 여러분이 너무 너무 선한 일 착한 일을 많이 했어요. 깨어나서 보니까 서울시장이 불러서 표창장 주던가요?
여러분이 꿈속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청와대 가서 내가 어저께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문을 열어 주시오, 감옥 문이 열립니다. 꿈에서 한 일, 꿈에서 먹은 것, 꿈에서 되어진 것, 현실에서 아무 소용없어요.
여러분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관계, 그토록 상처 많이 받는 그 인간관계, 마찬가지에요. 왜 그렇게 사람들은 일관성이 없고, 왜 그렇게 사람들은 배신을 일삼고 험담을 일삼고, 그러는가? 당연해요. 인간은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경으로 들어가서 진짜 여러분의 하늘 친구들을 찾아보세요. 그들은 그 자리에 늘 거기에 있어요.
변치 않는 내 친구들은 그 안에 다 있다니까요. 성도의 인간관계는 그렇게 맺어지는 거예요.
여기서 상처받고 여기에서 무슨 뭐 오해 받고, 그런 거에 너무 개의치마세요.
꿈이라니까요.
이사야서 29장 8절 보세요.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
그런데 오늘 날 생명의 양식을 전해 준다고 하는 예배당의 설교가 전부 인간의 육신과 그들의 욕심과 이 세상일에 관한, 도덕, 윤리,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 이런 것들이에요. 그러니 꿈같은 세상에서 필요한 그 꿈 얘기만 하고 있으니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거라,
그러니까 돌아서면 또 배고파, 돌아서면 또 목말라. 그러니까 밀려 밀려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까?
여기서는 그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라니깐요. 어떻게 하면 여러분의 인생을 남들도 존경하는 그런 훌륭한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하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그냥 아나티데미, 아래의 것, 그것으로 위의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 하나님이 잠시 허락하신 거니까 이게 뭔지를 잘 알고 가는 거예요. 하도 그렇게 헛소리들만 하니까 예전에 로만 카톨릭이 얼마 전에 라틴어 미사를 없앴죠. 그전까지는 전부가 다, 온 세상 있는 다 성당이 전부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습니다.
아무도 못 알아듣고, 설교도 교황청에서 일괄적으로 내려주는 라틴어 설교를 읽어 주었어요. 그런데 다들 은혜 받았습니다. 여러분
헌금도 도에 지나치게 내고. 그런데 어느 날 이게 아닌가 벼 해서 각자 너희 말로 해라라고 해 갖고, 각 교구에서 자기 나라 말로 이제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더니 사람들이 내놓은 첫 번째 반응이 뭔지 아세요?
그냥 옛날처럼 못 알아 듣게 라틴어로 하자 그랬어요. 그 때가 훨씬 은혜로 와. 사람의 말로 들으니까 배가 고파.
그냥 그건 그런 거겠거니 하고 추측할 때가 훨씬 은혜롭다는 거예요.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아무리 해 봐야 배고파 죽겠는 거예요.
이 배가 채워지지가 않아.
여러분의 현실은 이 크로노스의 세상이 아니에요. 영원입니다.
그 영원이라는 현실 속에서 이 이생의 꿈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았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그 영생, 영원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영원도 이 현실의 어떤 연장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어요.
그 영원의 세계도 그냥 이 세상 것들로 막연히 그려내고 있어요.
우리가 좋아하는 그런 것들이 많이 풍성히 제공되는 곳, 이렇게.
그러니까 이 유한의 세계 것들로 그 무한 세계 것을 쟁취해 보겠다고 부산을 떨고 있는 거예요.
그건 이 유한 세계의 그 어떤 것, 이 꿈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로도 쟁취할 수 없는 거예요. 얻어낼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하늘의 겁니다.
우리의 육신과 이 세상은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부정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아~~그 이스라엘, 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그 민족적 이스라엘, 그게 아니었구나.
그 때는 그밖에는 다 이방인, 그 안에는 하나님의 백성, 이렇게 우리에게 아니티데미, 아나데마, 아래 것으로 설명해주는 거였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 영적 이스라엘을 설명하는 거였구나 라고 알면
그 이스라엘이 부정되는 거잖아요. 그런 것으로 다 주어진 거란 말이에요.
우리 육신도 마찬가집니다. 그게 부정 되는 거예요. 그래야 그 안에 보물인 진리의 하나님이 영광으로 나타나시게 되는 거예요.
아나데마! 하늘을 그려내는 그 도구로서의 그 삶. 그리고 모든 것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눈. 그러면 그 인과 지팡이로 그게 뭔지를 설명해 줄 수 있잖아요.
하나님은 스스로 나는 너희들이 그걸 알면 너희들이 이 꿈속에서 행한 그 일은 못 본 걸로 해 줄게 그러셨다니까요.
여러분이 지금 불안해하고, 여러분이 지금 힘들어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들이 지금 여러분이 그 동안 살아 온 그 시간들과
그 동안 여러분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 또 내가 원하고 원하는 그런 것들인데 되어지지 않는 그런 것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여러분이 돌아가다가 지금 무슨 사고를 당해서 기억상실증에 걸렸어요.
인제 앞으로 내가 살 시간 밖에 나는 몰라.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르고. 그랬을 때 여러분이 지금처럼 아파할까요?
근데 하나님은 그걸 다 잊었다고 하고, 너희들도 잊으라고 그래요. 왜? 너를 용서하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근데 우리만 그걸 새록새록 기억해 내고 앉아 있는 거지요.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모든 게 해결되면 그건 여러분과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그런 애기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쓰인 시나리오에 위해 우리의 인생이 이 꿈속에서 그렇게 진행되어져 갔는데 그 시나리오 속에서, 너 왜 거기서 조폭 했니? 아니 신세계 영화에서 황정민에게 너 왜 거기서 깡패 짓 했어? 지금 여기서 만났다고 쳐봐요. 그런데 우리가 만나가지고 너 왜 조폭 했어? 어디서요? 영화 안에서. 그거 미친 놈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아나데마의 삶으로 끌고 가신다고 했으면서, 우리가 그걸 알아 버렸는데 하나님이 그 역할을 갖고 너 옛날에 왜 그랬니 라고 하겠냐 말이에요.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이 어떻게 이제는 내 맘대로 살아야지, 어떻게 이리로 갑니까? 어떻게 그 진리를, 그 복음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그 일, 그 더러운 거, 그 지저분한 거, 그것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데 그걸 가져다 쓰냐고요. 그 귀한 걸. 이게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뭘 던져도, 진리를 던져도, 복음을 던져도, 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그걸 끌어다 그냥 그걸 사용해 먹으니, 이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원한 것처럼 저도 간절히 원합니다. 제발 그걸 올바로 알아먹고 그 자유와 그 기쁨, 그 평안으로 열심히 사세요.
사람답게 사는 것 그 이상으로 더 성실하게 사시라니까요. 누가 막 살아도 된다고 했어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화지입니다.
그 역할 잘 하고 가서 그 인, 지팡이 내놓으면서, 하나님 잘 봤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저는 이런 존재이고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하면 그게 영원입니다. 완성입니다. 기도겠습니다.
|
첫댓글 "다말이 자기 뱃속에 씨를 잉태했어요. 그 아이의 아버지가 와서 묻습니다.
너 어떻게 그렇게 됐어? 말 못하면 죽는다. 그것도 불에 태워서 죽는다. 너 말 못 하면 지옥이야.
그 때 그 씨를 잉태한 여자가 도장과 지팡이를 내놓습니다. 그랬더니 심판이 지나갔어요. 아버지가 심판을 못해요."
다말에게 무슨 자랑이나 보탬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심판하려, 정죄하려 모인 사람들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와서 그저 그 은혜의 언약만 내놓을 수 밖에 없었던 다말의 모습.
이른 아침 그 다말의 모습이 그 고백이 저의 마음을 먹먹하게 하였습니다.
성도가 내놓을 고백은 오직 그 은혜의 언약외에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