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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제국의 변경에서는
제5권에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벌어진 내전을 기술하고 있을 때 내 머릿속을 오간 생각 가운데 하나는 왜 속주민이 봉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두 사람이 저마다 자기 주변에 병력을 집결시켰기 때문에, 그때까지 로마에 정복당한 지방들은 군사적으로 공백상태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제패는 얼마 전에야 끝났을 뿐이고, 폼페이이우스가 동방을 제패한 것도 기껏해야 10년 전의 일이었다. 로마 세계의 동서 양쪽에는 두 사람에게 패배한 자들이 아직 건재해 있었다. 이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되찾을 마음만 있었다면, 로마인끼리 서로 싸우고 있는 이때야말로 다시없이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전이 계속된 3년 반 동안 로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속주는 하나도 없었다. 카이사르에 의해 라인강 동쪽으로 쫓겨난 게르만족도 얌전했다. 카이사르가 출현하기 전에는 집요할 정도로 라인강을 넘어오던 게르만족이 내전 중에는 라인강을 건너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로마인끼리 싸운 내전은 그것만이 아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직후부터 옥타비아누스 시절의 아우구스쿠스가 종결시킬 때까지 14년 동안 계속된 내전도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상대로 싸웠고 그 다음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맞서 싸운 이 내전은 대부분 냉전 상태였고, 열전을 벌인 것은 필리피 회전과 악티움 해전뿐이니까, 이 경우에는 비교 대상이 되기 어렵다. 서기 69년의 내전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싸운 120년 전의 내전밖에 없다.
서기 69년의 내전은 불과 1년 만에 해결되었다. 하지만 네로 황제의 결단 덕분에 좋은 관계를 맺은 동방 국경을 빼고는, 그 1년 사이에 로마인끼리 싸우고 있는 기회를 틈타 반란을 일으킨 민족이 많았다.
아직도 완전히 제패하지 못한 브리타니아에서는 로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원주민 부족을 진압하느라, 주둔군 3개 군단 가운데 1개 군단만이 본국 이탈리아로 돌아오라는 명령에 응할 수 있었다.
도나우강 방위선에서는 다키아족이 로마 영토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서쪽으로 행군하던 무키아누스가 방위선을 지키기 위해 잔류한 군단병과 함께 다키아족을 격퇴 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 라인강 방위선에서는 로마군의 보조전력인 보조병들이 주 전력인 군단병을 공격하는 로마 역사상 최초의 불상사가 일어났다. 게르만계인 이 보조병들은 라인강 동쪽 연안에 사는 게르만계 부족과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역시 로마의 속주민인 갈리아인 들까지 끌어들였다. 갈리아인들은 갈리아 제국을 건설하여 로마의 지배에서 독립하려고까지 했으니,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격돌한 3년 동안은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삼황제 시대'인 1년 동안은 왜 이렇게 변경이 시끄러웠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유명 인사였다. 로마에 대한 봉기를 이끌 수 있을 만한 신분과 힘을 가진 속주의 유력자라면 두 사람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반대로 갈바와 오토와 비텔리우스는 지명도가 아주 낮았다. 이름을 모르면, 행동을 일으킬 때 느끼는 위압감도 없다.
둘째,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동방을 제패한 인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고 게르만족을 무찌른 인물로, 그 눈부신 군사적 업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속주의 유력자들과 로마의 방위선밖에 사는 사람들은 이들 두 사람에게 완패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세 황제는 이런 점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뒤떨어진다. 갈바도 오토도 비텔리우스도 속주 총독은 지냈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은 없다. 속주민이나 변경 부족들이 전력을 다해 싸웠는데도 패배한 상대는 아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도 이 점은 마찬가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유대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세 번째 이유는 전쟁터가 어디였느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싸울 당시의 전쟁터는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스,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거쳐 마지막에는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왔으니까, 로마 세계 전역을 망라하고 있다.
반대로 서기 69년의 전쟁터는 북이탈리아에 국한되어 있었고, 그것도 두 번 다 반경 30킬로미터에 불과한 같은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수도 로마를 전쟁터에 포함시킨다 해도, 이탈리아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드넓은 로마 제국의 변경에 사는 사람들이보기에는, 제국의 중심이라 해도 머나먼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투에 불과하다.
요컨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싸움은 아프리카의 대초원 전역을 무대로 벌어지는 거대한 코끼리들의 격전이라고 해도 좋다. 여는 코끼리보다 더욱 거대한 수코끼리가 이끄는 어마어마한 코끼리떼가 대초원도 비좁다는 듯이 지축을 울리며 정면으로 격돌한 것과 같은 느낌이다. 백수의 왕 사자조차도 겁을 먹고 초원 한구석에 웅크린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섣불리 초원 한복판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는 종횡무진으로 질주하는 코끼리 떼에 자칫 밟혀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백수의 왕 사자도 이럴진대, 평소에는 무리를 지어 사자한테도 대담하게 맞서는 하이에나라 해도 숨을 죽이고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기 69년에는 대초원 중앙의 한 곳에서 암사자를 차지하기 위해 수사자끼리 싸운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동물들이 꼼짝도 못할 만한 충격을 주는 격투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원전 1세기의 내전은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로 계속 가느냐, 아니면 새로운 정치체제인 제정을 선택하느냐를 놓고, 말하자면 국가의 기틀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하면, 제정을 선택한 지 100년이 지난 서기 1세기의 내전은 누가 제정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불과했다. 따라서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대초원 주변에서는 각 동물들이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비텔리우스의 죽음으로 전쟁 상태는 끝났지만 그것이 곧 평화 회복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타키투스의 말은 옳다. 사자끼리는 승부가 끝났지만, 대초원의 다른 곳에서는 무질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오른팔인 무키아누스의 과제였다.
속주병 반란
오늘날 네덜란드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각양각색으로 아름답게 핀 튤립이고, 해수면보다 낮은 땅을 엄청난 노력 끝에 인간이살 수 있는 땅으로 바꾸어놓은 근면한 민족의 이미지다. 네덜란드인은 월드컵에서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여 전 세계를 경탄시킨 민족이기도 하다. 인종 혼합에 너그러운 나라여서 오늘날에는 흑인네덜란드의 백인 축구선수를 떠올리면 된다. 로마인들은 이 네덜란드인의 선조를 바타비족이라고 불렀다.
라인강 어귀 근처에 살고 있던 이 게르만계 부족은 로마의 속주민이 아니다. 속주민이 아니니까 속주세를 낼 의무도 없다. 하지만 로마인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달인이기도 하다. 속주로 삼아 로마 영토에 편입시키지는 않았지만, 동맹관계는 맺고 있었다. 바타비족이 로마에 병력을 제공하는 대신, 로마는 그것을 격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협약이다. 이 같은 관계는 라인강을 북쪽 방위선으로 생각한 최초의 인물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시작되었다.
카이사르가 라인강을 방위선으로 삼을 작정이었던 것은 다음 몇 가지 사실로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첫째, 그가 갈리아를 제패했을 때 이미 라인강 서쪽에 정착해 있던 게르만족은 그 땅에서 그대로 살도록 허락했다. 나중에 저지 게르마니와 고지게르마니아의 두 속주로 분리된 라인강 서안 일대, 그러니까 오늘날의 네덜란드 남부와 독일 서부, 벨기에 동부와 스위스는, 카이사르가 오기 전에는 라인강을 건너 서쪽의 갈리아로 이주한 게르만족의 주거지였다. 바꿔 말하면 이 지방 주민은 갈리아인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오늘날의 프랑스에 거주한 갈라아인과는 다른 게르만계 갈리아인이었다.
둘째, 카이사르는 강 동쪽에 살면서 로마와 항상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던 게르만계 우비족에게 라인강 서쪽으로 이주할 것을 권하고, 후세에 퀄른을 이들의 근거지로 내주었다. 이것은 라인강이라는 로마의 방위선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다른 갈라이인들에게 그랬듯이 이들 게르만계 갈리아인에게도 자신의 씨족 이름인 ‘율리우스'를 주어, 그들과도 ‘클리엔데스'(영어로는 클라이언트) 관계를 맸었다.
현대식으로 생각하면 본가와 분가의 관계나 두목과 부하의 관계, 또는 후원회 체제와 비슷하다. 말하자면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공동운명체를 구축한 것이다. 카이사르가 이들 부족의 유력자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준 것이 그 증거다. 로마 시민권은 세습권이니까, 이들은 자손 대대로 로마 시민이 된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로마의 패권 밑에 들어온 갈리아인이나 게르만계 갈리아인 외에도 이 방식을 적용했다. 이는 로마의 패권이 미치지 않는 라인강 동쪽의 부족들을 회유하기 위한 방책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 결과 라인강 어귀의 북쪽, 오늘날의 암스테르담 주변에 살고 있던 바타비족의 부족장과 그 친족들도 로마 시민이 되어 ‘율리우스'를 씨족 이름으로 삼게 되었다.
이 방식이 실시되었을 당시에는 키케로와 소카토와 브루투스도 자기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책략이라고 카이사르를 비난했지만, 이런 비난은 근시안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씨족 이름을 하사한 것은 그것이 그 상황에서는 가장 손쉬운 방책이었기 때문일 뿐이다. 카이사르가 죽고 그의 혈통을 이어받은 ‘율리우스-클라디우스 왕조' 가 무너진 뒤에도 ‘율리우스'들과 로마의 공동운명체적 관계가 지속된 것이 그 증거다. 카이사르는 이들과 자신의 ‘클리엔테스' 관계가 이들의 자손과 로마 제국의 ‘클리엔테스' 관계로 계승되어 가리라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런 방책이야말로 백년대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는 100년이 아니라 적어도 400년은 계속되었지만.
바타비족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었을 때 그들은 로마에 병력을 제공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로마인의지휘를 받다, 로마군의 주전력인 군단병을 보조하는 ‘보조병'으로서 보조부대에 복무하는 것이다. 로마인이 병력을 제공받는 것은 단순히 병력 확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고용을 보장해주는 의미도 있었다. 생활이 안정되면 인간은 보수적이 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보수적이 되면, 로마에 반대하여 일어나는 과격한 행위에 호소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보조병을 활용하는 이런 제도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군제를 확립한 뒤에는 로마군의정식 편제로 정착했다. 복무기간도 25년으로 명확하게 정해졌고, 만기 제대할 때는 로마시민권이 주어졌으니까, 바타비족 중에도 로마시민이 급증했을 것이다. 하지만 ‘율리우스'라는 씨족 이름을 가질 권리는 부족장급에 한정되어 있었다.제3대 황제 칼리굴라까지는 율리우스 씨족 출신이다. 황제와 같은 씨족 이름을 갖는 것은 같은 부족에 속하는 다른 남자들과의 차이를 나타내는 특권으로서도 효용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카이사르는 매사에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율리우스'라는 이름을 하사한 목적도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 특권을 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속주민이나 로마의 동맹국 백성으로 구성되는 보조부대는 같은 지방이나 같은 부족 출신끼리 부대를 만든다. 이 부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은 병사들이 속해 있는 부족의 족장급이 맡는 게 보통이었다. 로마 시민만으로 편성되는 군단의 지휘관을 등용할 때는 철저하게 실력제일주의를 채택한 서기 1세기에도 보조부대의 지휘관을 등용할 때는 권위를 먼저 앞세운 것도 흥미롭다. 합리적 사고와 문명도는 비례 관계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거야 어쨌든, 서기 69년 당시 8천 명으로 구성된 바타비족 부대를 통솔하고 있던 지휘관의 이름은 율리우스 키빌리스였다. 물론로마 시민권 소유자다. 그리고 이 ‘율리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로마인끼리 싸우고 있는 틈을 노려, 라인강 하류 일대에서 로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 사건은 결국 1년도 지나기 전에 해결되지만, 거기에 대해 서술하기 전에 한 가지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서술에는 이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씨족 이름이 번거로울 정도로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여느 때라면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되도록이면 개인 이름(프라이노멘), 씨족 이름(노멘), 가문 이름(코그노멘)을 셋 다 쓰지 않고 가문 이름만 쓰는데(예컨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경우 카이사르라고만 쓰는 것처럼). 여기서 씨족 이름까지 덧붙여 쓰는 데에는 다른 목적이 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나 율리우스 클라시쿠스처럼 씨족 이름과 가문 이름을 둘 다 쓰는 것은 이들이 120년 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씨족 이름을 받은 자들의 후손임을 느끼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 이게 뭐야.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몽땅 카이사르가 뿌린 씨잖아. 정말로 그렇다. 어이가 없을 만큼 모두 ‘율리우스'다. 그렇다면 ‘영웅전'의 저자인 플루타르코스가 아무리 칭찬해도 카이사르의 피정복민 동화정책은 결국 실패한 정책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율리우스'를 씨족 이름으로 가진 비로마인은 반란 주모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속주병 반란으로 시작하여 갈리아 제국 건설까지 시도한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계획이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갈리아의 다른 ‘율리우스'들이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건 관계자 외에도 많은 ‘율리우스'가 존재했고, 로마 제국에 대한 그들의 공헌은 몇 사람의 이름만 들어보아도 분명하다.
유대인 출신으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적극 협력한 이집트 장관의 이름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다. 이 시기에 그는 티투스를 도와서 예루살렘 공략전을 펴고 있었다.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수도 연구서를 쓰고, 서기 69년 당시에는 수도 로마의 법무관이었던 사람의 이름은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원로원회의 소집권은 집정관과 법무관만 갖고 있다.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를 집정관에 선출하여 질서 회복에 박차를 가하려 한 무키아누스도, 법무관 프론티누스의 협력이 없었다면 그 생각을 실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은 역사가 타키투스의 장인이며 브리타니아 제패를 완성한 율리우스 아그리콜라다.
이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120년 전에 카이사르가 뿌린 씨는 당당한 거목으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일을 할 때는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몇 가지 위험이 있었다 해도, 그것으로 그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카이사르의 동화정책을 로마 황제들이 아무도 고치려 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다. 속주병 반란을 해결하고 제국 재건에 착수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도 이 정책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카이사르적 사고방식의 효용성에 의심을 품은 통치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카이사르의 동화정책에 수반된 위험은, 반란 주모자로 ‘율리우스'가 등장할 때마다 이 사람도 ‘율리우스'인가 하고 웃어넘기면 될 정도의 위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드러난 ‘율리우스' 이외의 문제는 후세의 역사가 몸젠이 유례없는 불상사로 단죄할 만큼 심각했다. 그것은 내전의 폐해가 다른 방면에도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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