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성곽도시
”서울”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수도”라는 뜻이다. 이 이름에는 아주 독창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자발성이라는 하찮은 장점조차 결여되어 있다. 그 단어는 순수한 조선어지만, 그 발상은 차용된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비할 데 없는 자만을 모방한 것이다.
중세 왕국의 한 사람에게는 권위나 중요성에 있어서 자신의 땅과 비교할 것이 없다. 그가 붙인 땅 이름은 그 느낌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중앙에 서있고 모든 나머지는 변방이다.
북경과 남경은 그에게 간단명료하게, 북부와 남부 수도”였는데, 그가 보기에 그 두 도시에 필적할 만한 도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풍속을 모방하는 데 있어서 조선 사람들은 그 풍물을 흉내 내도 좋다고 생각했다. 중국인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것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인들이 맹목적일 정도로 자부심 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자신의 본보기는 그들보다 명백하게 월등할 뿐이었다.
일본 사람들도 똑같이 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행동에서는 훨씬 더 터무니없이 벗어났다. 그들은 고유 의복을 따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적어도 그것은 외관상 독창적이다. ‘동부와 서부의 수도'인 도쿄와 사이코는 사상적으로 차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지명도 달리 발음된 중국어다. 그렇게, 중국만큼만 하자는 욕망은 중국보다 더 위대해 지는 것을 막았다. 그들은 명칭 모방에 만족하면서 그것을 능가할 모든 동기를 잃었다.
서울은 수도로 널리 알려진 곳이지만, 과거에 중국에 대한 지적 의존을 나타내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도시의 상황을 슬쩍 보았을 때 더 잘 설명될 것이다.
서울의 위치는 매우 특징적이다. 높은 봉우리로 이루어진 원형 경기장이 2-3마일 지름의 작은 원형 계곡을 거의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자연에 의해 세계와 단절된 이 작은 계곡에 은둔의 땅의 수도가 서 있다. 그 계곡 안 쪽으로 산들이 원을 그리 면서 솟았는데, 한쪽의 경사면은 삶의 모습을 발밑으로 보여주고, 다른 한쪽은 외부 세계의 침입에 대한 장애물을 형성한다. 낮은 지면이 어느 정도 이어지다가 산들이 상당히 갑작스럽게 솟아오르며, 그 정상에는 평평한 주위에 대비되는 바위와 봉우리들이 있다. 이 나라의 특징인 민둥땅에 자연의 장엄한 손길이 닿았으며, 초목이 거의 없는 화강암 바위들로 인해 더욱 돋보인다. 그 중 가장 높은 봉우리는 조선어로 "세 봉우리 산”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1866년 조선에 대해 무력 시위를 벌일 때,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에 그 산을 표지물로 삼았는데, 그 때 더 좋은 이름을 붙였다. 그들은 그 들쭉날쭉한 산봉우리가 떠오르는 태양빛에 붉게 상기되어 "닭 벼슬 산"이라고 불렀고, 그 이름처럼 아직도 안개 속에서 잠자고 있는 계곡에 새로운 날을 알리기 위해 세상 사람들 앞에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보였다.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측정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곡 자체는 바다와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산의 높이는 보이는 그대로일 것이다. 산 높이가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겨울에는 눈으로 덮인다. 봉우리가 너무 가팔라서 눈이 쌓일 수 있는 곳에만 있고, 회색 바위를 배경으로 은빛 줄무늬를 이뤄 여기저기 반짝인다.
비탈진 곳에는 호랑이가 있다고 전해지며, 표범은 확실히 존재한다. 구릉은 주로 일종의 모래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은 소나무 종만 자라는데 작은 만큼 드문드문하다. 이 구릉의 형성이 가장 많은 호기심을 끌었다. 구릉들은 상당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는 바닷가 모래의 능선을 닮았다. 일부는 자연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부는 빗물이 씻어낸 탓이기도 하다. 조선의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산줄기를 생각하면, 스스로 타버리고 엄청나게 웅장한 잿더미만 남긴 지구의 과거 열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도시의 더 가까운 곳에 닭벼슬산 발밑에 버팀목의 봉우리처럼 쉬고 있는 북산이 있다. 원형 경기장을 가로질러 그 맞은편에는 남산이 솟아 있다. 집 있는 곳에서부터 전자는 1,100피트, 후자는 800피트 높이다. 둘 다 정상까지 숲이 있는데, 남산은 무성하고 북악산은 성기다. 두 곳 모두 사람이 안 산다.
놀라운 상황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서울은 조선의 마지막 왕조혁명의 기념물이다. 당시 지배하던 집권을 전복하면서, 성공한 반란군이 그들의 새로운 노선을 위한 수도로 세워졌다. 조선의 각 왕조는 개인 소유의 집처럼 그들만의 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빈 왕좌에 앉은 후, 찬탈자의 첫 번째 관심은 그의 왕좌를 새로운 자리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 우연히 새로운 권위를 얻었다. 그는 태조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으로, 중국인들의 많은 침략이 있을 때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이 시도가 쓸모없다고 판단해, 진중 회의를 소집하고, 적을 처리한 뒤 회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그렇게 했고, 이것은 부자연스럽지 않게 그와 왕 사이에 틈이 생기게 했고, 이는 결국 그의 왕을 폐위시키고 그의 자리에 군림하는 것으로 끝났다.
조선의 국익상, 소위 애국자의 성공은 가장 불행했다. 중국과의 전쟁의 결과에 대해 그가 내린 판단이 옳았을지는 몰라도 자국에는 재앙이었고, 그리고 그가 타협한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현명했는지는 몰라도, 그의 대대적인 중국 관습의 채택은 자살행위였다. 그는 조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지적 노예로 만들었다. 오늘날까지 이 땅을 늪에 빠뜨린 유교의 홍수 속에 휩쓸려 들어간 때가 이때였다. 수 세기 동안조선은 북경 궁정에서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를 빌려왔지만, 이제는 모든 것에 있어서 외국의 사상을 본받아야 했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결과는 태조가 기대했던 혹은 희망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했다.
중국에서 막 통치하기 시작한 왕조의 찬란함에 현혹된 그는 명나라의 위대함, 즉 ”밝음”을 외치며, 그가 선택한 이름으로 그의 무한한 존경심을 영속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 수도에 중국 추종의 첫 증표가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한양" 또는 "중국의 태양"이라고 불렀고, 사실이나 느낌 모두 그가 의도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애초에 자연이 스스로 요새화한 장소를 선택했고, 그러고 나서 그는 스스로 자연의 작품에 더 추가하도록 정했다. 산꼭대기를 따라서 그는 벽을 쌓았다. 여기서, 그의 중국 사대와는 맞지 않는 일이지만, 운명이 꼬여 그가 마지못해 타타르풍습을 따르는 일이 생겼다. 아마 그는 그것이 그런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성벽은 중국의 모든 대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성벽과 같은 종류였으며, 이른바 만리장성이 가장 유명한 예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운 추론에도 불구하고, 만리장성은 중국 것이 아니다. 도시나 나라를 성벽으로 둘러싸는 것은 중국인의 생각이 아니다. 정복하는 타타르 무리들이 가져온 관례였다. 그들에게는 북쪽의 중세 왕국을 방어하는 수백 마일의 장벽이 있다. 그들은 이 거대한 성벽들을 지어서 친족들이 그들의 전철을 밟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얻은 것을 빼앗아가지 않도록 했다.
서울의 성벽은 그 자체로 위엄이 있고, 그 위치로는 천하무적이다. 그것을 짓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무시되고, 높이는 잊혀졌다. 도시 안에서든 아니든, 여러분이 바라보는 어느 지점에서든, 그것은 가장 눈에 띄는 풍경 중 하나다. 남대문에서 꾸준한 오르막으로 정상에 올랐다가, 정상의 불규칙한 모습을 따라가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가까운 쪽의 박차뒤로 한 번 사라지더니 다시 돌출된 산등성이 위로 시야에 들어온다. 그것은 분명히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북동쪽 관문과 만나게 되고 다시 가파르게 올라 닭벼슬산의 높은 봉우리까지 내려간다. 멀리서 산과 합쳐질 때까지 그곳에서 그것은 휘감아지고,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커다란 비단뱀처럼, 할 수 있으면 산봉우리 위로, 그래야만 되면 고개를 지나 가장 높은 곳을 따라 시내를 빙 둘러 싸고 게으른 잠에 빠져 있다.
밖에서 보면 성벽은 충분히 무시무시해 보인다. 단단한 석조 덩어리로 보인다. 사실, 이 모든 벽들처럼, 그것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화강암 덩어리의 껍데기다. 지면이 평탄한 곳이라면 외곽 난간을 제외한 높이는 양쪽이 같다. 그러나 가파른 내리막길에서는 지반이 경사진 것을 이용하고, 벽은 안쪽의 불필요한 높이만큼 외벽의 높이가 높아진다.
난간 외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총 쏘는 구멍이 있고, 먼 거리 총구멍과 짧은 거리 총구멍에 약간의 거리를 두어, 성벽은 현대적 시각으로 긴 열차의 모습이다. 난간 뒤편에는 넓은 통로가 펼쳐져 있어,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책로가 펼쳐져 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벽은 안타깝게도 수리가 안 되었고, 그림에서 보이는 그 강건함을 매년 잃어 간다. 성곽 위를 걷다보면, 안 쪽 가장자리로, 지나가기에 방해가 되는 깊은 틈새가 보이는데 벽돌로 길을 내어 비가 왔을 때 마을 쪽으로 배수한다.
이웃 정원의 큰 나무들은 담 위로 고개를 쳐들고, 나뭇가지를 뻗어 햇빛을 가린다. 바깥쪽 벽은 아직 훼손이 안 되었는데 사람이 지나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성곽길은 여기서 오르막, 저기서 내리막이고, 여기서 왼쪽으로 꺾이고, 저기서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오른 쪽으로 꺾이는 등, 벽을 따라가면서 끝없이 구불구불하고 돌아나간다. 성 아래로 한 쪽에는 도시가 펼쳐지고, 다른 한 쪽은 가파른 내리막길에 이은 평야다.
불규칙한 간격으로 8개의 관문이 있다. 이론적으로 그들은 가장 중요한 지점과 그 사이 중간 지점에 있다. 실제로, 그 문들은 있을 만한 곳에 있다. 그것들은 중요한 만큼 위풍당당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도시 밖에 있다고 주장되지 않는 한, 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건물들 중의 하나다. 각각은 비록 성과 연결되어 있지만, 사실, 건물 그 자체다. 그것들은 땅을 많이 파고 세운 집들과 닮았다. 정말이지, 성의 위에서 접근하면 당신이 상상하는 것처럼 평지를 걸어가다가 부잣집을 마주한 격이다. 한쪽에서 계속 들어 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다시 빠져 나가는 토해내는 군중을 내려다보기 전에는 당신 밑에 단단한 돌덩어리로 아치형 문이 있다는 걸 거의 잊는다. 위에서 보면 터널처럼 보이는 이 아치에는 4인치 두께의 거대한 철갑 나무문이 맞추어져 있다.
이 관문들은 중요성과 일치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서문은 "밝은 친근감의 문”, 남문은 ”높은 예식의 문”, 동문은 ”높은 어짐의 문”으로 불린다. 동문과 남문은 크기가 서로 다른데, 그 규모는 매우 크다. 일부 작은 관문은 특정 용도로만 사용된다. 남서문은 범죄자의 문이고 남동문은 시체들의 문이다. 참수형을 선고받은 범죄자는 사형집행을 위해 항상 시 외곽으로 끌려가며, 행렬은 변함없이 남서문을 통해 지나간다. 다른 문으로 나가는 건 그 문을 더럽히는 것이다.
사망자를 위한 남동문도 마찬가지다. 죽은 왕의 시신만이 다른 어떤 문도 통과할 수 있다. 이 문은 ”배수문”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옆에 강이 흐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북문은 닭벼슬산위에 높이 세워져 있다. 왕을 위한 탈출 수단으로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닫혀 있다. 이런 목적으로만 사용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