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 서품 6장】 십인 일단의 단조직
대종사 앞으로 시방 세계(十方世界) 모든 사람을 두루 교화할 십인 일단(十人一團)의 단 조직 방법을 제정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법은 오직 한 스승의 가르침으로 모든 사람을 고루 훈련할 빠른 방법이니, 몇 억만의 많은 수라도 가히 지도할 수 있으나 그 공력은 항상 아홉 사람에게만 드리면 되는 간이한 조직이니라.] 하시고, 앞서 고르신 구인 제자로 이 회상 최초의 단을 조직하신 후 [이 단은 곧 시방 세계를 응하여 조직된 것이니 단장은 하늘을 응하고 중앙(中央)은 땅을 응하였으며 팔인 단원은 팔방을 응한 것이라, 펴서 말하면 이 단이 곧 시방을 대표하고 거두어 말하면 시방을 곧 한 몸에 합한 이치니라.] 하시니, 단장에 대종사, 중앙에 송규(宋奎), 단원에 이재철(李載喆), 이순순(李旬旬), 김기천(金幾千), 오창건(吳昌建), 박세철(朴世喆), 박동국(朴東局), 유건(劉巾), 김광선(金光旋)이러라.
핵심주제
십인 일단의 단조직(류성태)
모든 사람을 고루 훈련할 빠른 방법(이광정)
십인 조단의 의의(한종만)
십인 조단의 의의와 최초의 단원(신도형)
대의 강령
대종사, 시방세계를 교화할 10인 1단의 단 조직을 제정, 언급하였다.
1) 이 법은 오직 한 스승의 가르침으로서 모든 사람을 훈련할 빠른 방법이며, 몇 억만의 많은 수라도 지도할 수 있으나, 그 공력은 아홉 사람에게만 드리는 간이한 조직이다.
2) 단장에 소태산 대종사, 중앙에 정산 송규, 단원으로 일산 이재철, 이산 이순순, 삼산 김기천, 사산 오창건, 오산 박세철, 육산 박동국, 칠산 유건, 팔산 김광선이다.
주석 주해
【류성태, 대종경 풀이 上】 교화단 조직은 원불교 교화에 조직 개념이 처음으로 들어온 것으로, 교화의 효율화를 위해 조직되었다. 9인을 단원으로 하고, 단장 1인을 가하여 아홉 단원의 공부 사업을 지도 육성케 하는 10인 1단 조직이었다. 원기 6년 6월에 영광 일대에 수위단 외에 남자 1단을 시험 조직하였고, 8월에 영광, 김제, 전주 등지에서 남녀 각 1단을 조직 운영, 그 후 남녀 혼성으로 조직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원기 13년에 제자들의 조직적 훈련의 필요성에 따라 전무출신 실행단, 거진출진단, 전무출신 기성단, 보통단의 4종의 교화단이 구성되었다. ‘불법연구회통치조단규약’에서 교화단이 통치기구였으나, 원기 34년 ‘원불교 내규’ 제4장 교화단규에서는 ‘대중교화에 유능한 기관이 되기로 한다’(수위단을 종법사의 최고 자문기관으로 하고, 보통단, 중단, 2중단, 3중단 등으로 구분)라고 하였다. 원기 62년 3월 효과적인 교도관리와 훈련문제로 ‘교화단규’의 개정을 통해 출가 교화단이 결성되어 운영되었다. 원기 73년 ‘교단 3대 설계종합보고서’에 교화단을 통한 교단통치 체제라는 이단치교의 단 지도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최상위 교화단으로서 수위단회의 기능 강화를 제시했다. 원기 77년 1월에는 출가 교화단 업무가 교화부에서 수위단회로 인계되어, 총단회가 연차로 열리고 있다. 각 단회, 향단회 및 총단회 등에서 각종 의견이 수렴되기도 한다.
【이광정, 모든 사람을 고루 훈련할 빠른 방법】 6장에서는 단의 의미와 단의 원리에 입각한 최초의 남자 수위단을 조직하셨는데, 대종사님의 이러한 구상은 장차 대종사님의 포부와 경륜을 이 단을 통해서 실현하시고자 하는 교화 조직체계의 원리를 처음으로 구상해서 윤곽에 대한 의지를 굳히신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이나 원리를 다듬는 작업이 이로부터 계속되다가 원기 16년 7월에 이르러 불법연구회 통치조단규약이라고 하는 내용으로 밝혀주셨다.
【박길진, 대종경강의】 단조직은 천지를 응하여 조단하는 것이므로 그 의미가 크고 교화에 편리하다.(중략) 그 많은 군인들도 분대로써 하부 조직이 되어 운용되듯이 교화에 있어서도 분단을 조직하여 시행한다.
용어 정의
시방(十方) 불교에서 우주에 대한 공간적인 구분. 동·서·남·북의 사방(四方)과, 동북·동남·서남·서북의 사유(四維)와, 상·하의 열가지 방향. 시간 구분인 삼세(과거, 현재, 미래)와 통칭하여 전 우주를 가리킴.
단조직 오늘의 교화단. 원불교에 조직 개념이 들어온 최초의 일이며, 교화의 효율화를 위한 십인 일단으로서 팔방이라는 하늘의 방위를 중심으로 응기(應氣)된 조직법. 교단 초기에 단기로는 팔괘기를 사용.(류성태)
상단전(上丹田) 이마의 두 눈썹 사이. 보통 말하는 단전은 하단전, 중단전은 가슴의 두 젖꼭지 사이.
불법연구회 통치조단규약(佛法硏究會 統治組團 規約) 1931년(원기 16) 7월에 발행한 초기교서의 하나. 교도들의 공부와 사업을 지도 훈련하기 위한 십인일단의 조단 규약. 총 14장 54조로 구성되어 있고, 「단원 매월매일 성적조사표」 「단원 매일 일기 조사법」 「유무념 대조표」 「신분 보고표」 등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음.
관련 법문
대종사 十인 一단을 조직하시어 친히 단장이 되신 후, 중앙위(中央位)는 비어 놓고 혹 일이 있을 때에는 오재겸으로 대리케 하시었다. 제자들이 그 연유를 여쭈었다.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그 자리에는 장차 올 사람이 있느니라."
이때에 대종사 간혹 밤 하늘에 성수(星宿) 운행함을 살피시며 말씀하시었다.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느니라." 대종사 또 말씀하시었다. "우리가 만일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 일이 이뤄지지 못하나니라."
대종사 八인으로 첫 단(團)을 조직하시며 말씀하시었다. "중앙 재목은 뒤에 먼데서 올 것이다." 그 후 三개월이 지났다. 하루는 대종사 이재풍, 오재겸을 불러 말씀하시었다. "그대들은 장성(長城)역에 가서, 체격이 작은 편이고 낯이 깨끗한 어떤 소년이 차에 내려서 갈 곳을 결정 못하고 서성거리거든 데리고 오라." 두 사람이 명을 받들고 다음 날 발정하기로 하였다. 대종사 그날 석후(夕後)에 다시 말씀하시었다. "장성 갈 일은 그만 두라. 후일 자리 잡아 앉은 뒤에 다시 데려 오리라."
하루는 대종사, 김성섭에게 말씀하시었다. "오늘은 나와 함께 저 웃녘에 가세." 김성섭이 여쭈었다. "어찌 가자 하시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내가 진작부터 항상 말하기를 우리와 만날 사람이 있다고 하였었지. 그 사람 데리러 가자는 말일세."
두 분이 보행으로 무장, 고창, 흥덕을 거쳐 정읍 화해리(花海里)에 이르렀다. 이윽고 김도일(金道一) 집을 방문하여 비로소 송도군(宋道君; 鼎山)을 만나시었다. 송도군은 여러 해를 두고 고명한 대인 한 분 만나기를 발원해 온 터라 심복지심이 흡족하였고 대종사는 기다리고 바라던 사람을 만나신지라 극히 사랑하셔서 황송하게도 대종사께서 먼저 결의형제(結義兄弟)하자고 청하시었다.
송도군이 응종(應從)하며 숙연임을 크게 깨달아 말씀드리었다. "저 역시 큰 원을 품고 수년 동안 수백리를 정처 없이 방황하여 왔사오나, 항상 마음에 무엇이 걸린 것 같아 밤낮으로 걱정하던 중 오늘에야 영겁 대사를 해결할 날이 왔나이다." 송도군이 대종사께 사배를 올리었다.
대종사 송도군의 마음을 돌리어 영광으로 데려 가시려고 二일간을 화해리 이웃집에 유련(留連)하시었다. 그러나, 도일의 모친 김해운(金海運)의 지극한 만류로 일시에 정의를 뗄 수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시었다. 두 분은 여름에 다시 중로(中路)에서 만나기로 후약(後約)을 두고 갈리시었다
원기 三년(戊午) 여름, 약속한 날짜가 되었다. 대종사의 명을 받든 김성섭은 영광에서 올라오고 송도군은 화해리에서 내려와 중로에서 두 사람이 서로 만났다. 두 사람은 은밀히 장성을 거쳐 영광 길룡리 대종사 처소에 당도하였다.
대종사 기뻐하시며 송도군에게 말씀하시었다. "이 일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느냐. 숙겁 다생에 서약한 바 컸었느니라." 대종사 송도군을 옥녀봉(玉女峰) 아래에 미리 마련한 토굴 속에 기거케 하시고 밤에만 도실에 나와 八위 단원과 함께 단란한 생활을 하게 하시었다.
하루는 송도군이 대종사 앞에 꿇어 엎디어 사뢰었다. "제가 전날에 분부를 받들어 결의 형제하와 스승님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극히 황송하오니 지금부터는 형제의 분의(分義)는 해제하옵고 부자의 분의를 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네 마음 좋을 대로 하라."
그 후 대종사 송도군으로 하여금 중앙 위(位)에 오르게 하시고 수기(授記)를 주시사 제반 사무를 대행케 하시었다. 八위와 일반 대중은 十九세의 연소한 분이나 장형같이 숭배하며 받들었다.
【대종경선외록 5. 사제제우장 2절~12절】
상황법문 : 십인일단
대종사 40명의 제자 중 8명의 제자를 고르실 때(원기 원년 겨울) 단조직법을 구상하였다.
그 후 원기 2년 9월 12일(음 7.26) 대종사는 교화법으로 단 조직법을 제정하게 된다. 단 조직법을 제정한 다음 앞서 고르신 9인 제자로 최초의 단을 제정하게 되는데 이때의 법문이 서품 6장이다.
처음에는 8명의 제자를 고르시고 중앙은 비워 두시었다. 중앙은 앞으로 사람이 올 것이라 하시며 공석인 중앙 자리는 오창건이 대행하게 하고 그 후 송규를 맞아들여 중앙에 임명하였다.
예비로 선정할 때는 오내진이라는 사람이 오른 적이 있으나 차차 신심이 약해지고 생활이 방탕하게 되므로 제자에서 빠지게 되고 길용리 사는 박경문(박세철)으로 바뀌게 되었다.
법문에서 시방(十方)이란 사방(四方) 사유(四維) 상하(上下)를 통털어 말한다. 그러므로 단원들의 칭호는 시방의 방위를 따라 정하였다. 건(乾)은 서북쪽, 감(坎)은 북쪽, 간(艮)은 동북쪽, 진(震)은 동쪽, 손(巽)은 동남쪽, 이(離)는 남쪽, 곤(坤)은 남서쪽, 태(兌)는 서쪽으로 팔방이며, 중앙은 땅(下)을 응하였고, 단장은 하늘(上)을 응하였다.
그리하여 단장에 대종사, 중앙에 송규, 건방단원 이재철, 감방단원 이순순, 간방단원 김기천, 진방단원 박경문, 이방단원 박동국, 곤방단원 유건, 태방단원 김광선으로 10인 1단이 최초로 조직되었다.
한편, 정산 송규가 중앙위에 오르게 된 것은 이러하다.
송규는 경상도 성주사람으로 도에 뜻을 두고 도를 구하던 중 스승 찾아 전라도로 오게 되었다. 강증산 계열의 제자를 만났으나 만나고자 했던 인물이 아닌 바 김제 모악산 대원사에서 겨울 석달을 나게 되었다. 이 때 김해운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집 화해리(정읍군 북면 화해리)에 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뒷동산에 올라 기도를 올리며 공부하여 큰 원을 품고 이루지 못함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 때 영광의 대종사는 간혹 밤 하늘에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시며,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우리가 만일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 일이 이뤄지지 못해.” 하였다.
대종사 하루는 김성섭을 불러 오늘 나와 웃녘에 가자고 하시며 우리와 만날 사람을 데리러 가자 하시었다. 두 사람은 무장, 고창, 흥덕을 거쳐 정읍 화해리에 이르러 김해운의 집을 방문하여 송도군(송규)을 만났다. 여기에서 대종사와 송도군은 결의형제를 맺고 도군은 큰절을 롤렸다. 송도군은 대종사를 따라 가려 했으나, 김해운의 지극한 만류로 대종사는 이틀간 이웃에서 머물고 7월(음력 6월)에 중로(中路) 고창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해 7월 약속한 날짜에 대종사의 명을 받고 김성섭이 나가 송도군과 만나 영광 길룡리로 왔다. 대종사는 송도군을 맞아 대단히 기뻐하며 “이 일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느냐. 숙겁 다생에 서약한 바가 컸느니라.” 하였다.
이로써 송도군은 9인의 중앙에 오르게 된다.
대종사는 옥녀봉 아래 미리 마련한 토굴에 송도군을 기거케 하며 밤에만 여덟 방위의 단원들과 함께 생활하게 하였다. 토굴에 기거하게 한 이유는 남다른 방언공사를 하므로 경찰의 취체가 심하였고, 경상도 말씨의 낯선 얼굴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피하기 위함이며, 다년간 수양적공으로 신통 묘술의 잘못된 공부를 피하기 위함도 그 이유였다.
송도군은 화해리에서 결의형제 했던 것을 부자의 분의로 정하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여 그렇게 하였다. 이때 송도군의 나이는 단원 중 가장 연소인 19세였으나 모두 장형같이 믿고 받들었다.
위 내용은 【서문성(1996), 마음을 보는 지혜-대종경 상황법문, 25~28】, 【류성태(2008), 대종경 풀이 上, 48~57】, 【원불교 용어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