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티 씨 부부의 도움으로 서울에 무료병원을 세우는 등 소년의 집 사업이 부산과 서울에서 안정기에 접어들자 알로이시오 신부는 1984년부터 생명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에서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을 그가 처음 했고 혼자 했다.
당시 한국은, 지금도 비슷하지만 교회와 세상의 무관심 속에 연간150만 명, 하루 4천5백 명의 생명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와 의사로부터 끔직한 죽임을 당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낙태 수술의 위험성과 비윤리성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하고,「이성의 소멸」,「침묵의 절규」라는 낙태 과정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판권을 미국에서 구입한 뒤 한국어 버전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2만여 개를 제작해 가톨릭 교회는 물론 개신교, 불교, 학교, 공장, 산부인과 병원으로 보냈다.
「이성의 소멸」과「침묵의 절규」는 3~5개월 된 태아가 철제 수술 기구로 팔다리가 무자비하게 뜯겨 나가는 동안 소리 없이 절규하는 수술 장면을 보여주는 20분짜리 영상이었다.
그렇다고 알로이시오 신부가 낙태와 인공피임을 무조건 반대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대안으로 교회가 권장하는 여성의 건강도 해치지 않는 자연 피임법을 소개하는 25분짜리 영상도 보급 했는데, 이른바 ‘빌링스 점액 관찰법’이었다.
무분별한 인공 피임을 방지하기 위해 빌링스 박사가 연구한 자연 피임법인 ‘빌링스 점액 관찰법’ 역시 판권을 구입한 뒤 한국어 버전으로 만들어 비디오테이프를 제작했다. 그러고는 전국 700개 이상의 산부인과를 직접 방문해 의사와 간호사,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산부인과 의사들에게는 낙태 수술을 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구호병원과 도티병원으로 보내주도록 부탁하기도 했다. 산부인과 병원에서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지만, 혹시라도 수술 후에도 살아 있는 아기가 있다면 꼭 수녀원으로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어이없는 부탁이 현실화된 적도 있다. 1989년 5월이었다.
부산의 어느 산부인과 간호사가 구호병원으로 전화를 해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녀님 급해요! 살아 있는 아기가 있어요. 빨리 데려가 주세요.!”
수녀들은 위치를 확인한 뒤 구호병원 간호사와 함께 급히 그 병원을 찾아갔다. 아기를 포기한 산모가 7개월 반 된 태아를 수술 했는데, 수술후에도 아기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아기를 도저히 적출물 통에 넣을 수 없었던 간호사가 의사 몰래 아기를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의사에게 들키고 말았는데, 의사는 보호자도 없는 아기이고 소생할 가능성도 없다며 빨리 꺼내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 간호사는 끝가지 버텼다. 구호병원 간호사와 수녀들이 병원에 도착 했을 때 그 간호사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수녀들은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듯 아기를 안고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가까운 거리인줄 알았으나 제법 먼 거리였고, 산소호흡기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새파랗게 질린 아기는 막 숨이 넘어갈듯했다.수녀들은 다급하게 운전기사에게 속도를 낼 것을 주문했고, 기사는 사고가 나지 않을 만한 범위에서 최대 속도로 달렸다.
부산 시내 한 복판에서 위험한 과속을 하자 경찰이 세 번이나 제지했다. 그래도 기사는 무시하고 구호병원으로 달렸다. 그 와중에 수녀들은 끊임없이 기도했고 간호사는 계속해서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아기가 구호병원에 도착하자 신생아실에는 비상이 걸렸다. 모든 의료진이 총동원되어 아기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그러자 마침내 아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손을 빨기도 하고 손발을 오므렸다 펴기도 하며 온갖 재롱을 떨었다. 한 간호사의 용기 있는 행동이 어린 생명 하나를 살렸던 것이다. 이런일은 그 뒤에도 여러 번 있었다. 물론 병원으로 오는 도중에 죽은 아기들도 있고, 무사히 살아 잘 성장한 아기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