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 또 한계절이 가고 오나 보다.
계절의 변화와 가을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넘쳐나니
나는 이 가을에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야 겠다. 다음에 할 수도 있지만...
혹 잊어 버릴수도 있고 또 대한민국의 장래가 불안하니..
모두들 글을 읽을 수 있을 때 어서빨리 해 버려야지..^^^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올리기가 망설여 지지만...
하루 정도 지났다가 지우든가 해야겠지.
나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족보상으로는 내 아버지 이며 혈연관계상으로는 작은 아버님이시다.
작은 아버님이 아들이 없이 돌아 가셨기 때문에 내가 족보상 아들로 옮겨 갔다.
작은 아버님 이야기를 할 때면
으례 나는 작은 어머님(wife)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가련하고 불쌍하시고 ... 전생의 업을 현생에서 다 받으시고
다음 생에는 꼭 좋은 곳으로 태어 나시길 난 언제나 기도 드린다.
작은 어머님은 19살에 시집을 오셨다.
그리고 20살에 과부가 되셨다.
채 일년도 못되어 작은 아버님이 돌아 가신 것이다.
작은 아버님은 산골에서 사셨다. 그곳에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
작은 저수지 공사를 하시던 중 위에서 떨어진 낙석에
몸을 피하지 못하고 돌아 가셨다. 추운 2월 겨울 이었다.
20살에 과부가 되었을 때 작은 어머님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다. 여자 아이였다.
이 아이는 우리 아버님 호적으로 옮겨 와서 내 동생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시집을 가서 아이들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작은 어머님이 과부가 되었을 때 우리 집안에는 또다른 과부가 있었다. 큰 어머님 이셨다.
큰 어머님 역시 19살에 시집을 오셔서 아들 하나 낳으시고 20살에 과부가 되셨다.
세상에 이런일이 하실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서른이 넘으신 큰 과부와 꽃다운 나이의 20살 과부가 한집에 살게 된 것이다.
두분 과부님들의 하루 일과는 눈물 그 자체 였다.
그것 밖에는 다른 이야기를 할 것 이 없다.
나는 두분의 눈에서 눈물이 마른 날을 본적이 없다.
한분은 아들을 낳으시고 과부가 되고 한분은 딸을 낳으시고
같은 나이에 과부가 되신 것이다.
제 아버지가 이 두분들 과부의 아들과 딸을 책임 지셨다.
제 아버님의 형제분은 3남 3녀 이시다.
세 형제분들중 형님과 동생을 먼저 보네시고 차남이신 아버님만 홀로 남으신 것이다.
공무원을 하셨기 때문에 넉넉하지는 못해도 가난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홀로 남겨진 자식들을 보살펴 줄 수 있었다.
물론 집안에서도 가장 큰 어른 이시기도 하다.
집안에서는 아버님이 중심이 되어
스무살 과부를 재가 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했다.
하지만 작은 어머님은 꿈쩍도 안했다.
딸은 어려서 부터 큰 어머니께서 키웠다.
아예 친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교육 시켰다.
같은 집안에서 사셨지만 절대로 친딸처럼
같이 방을 쓰거나 잠자리도 같이 못하게 했다.
철저하게 큰 어머니가 친 어머니인 것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어차피 재가를 할려면 어린 딸을 데려 가지 않는게 좋을 것 같아서
집안 모두가 반 강제로 두사람의 혈연 관계를 끊어 버렸다.
딸 아이가 철이 들 무렵까지는 함께 같이 살았다.
하지만 딸 아이가 철이 들 무렵이 되자
더이상 집안에서는 작은 어머님을 집안에 둘수 가 없었다.
머뭇 거릴 여유가 없었다.
작은 어머님은 죽어도 재가 안하시겠다고 버티셨다.
그래서 최후로 집안에서 강제로 친정으로 쫓아 버렸다.
그리고 두번다시 대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쫓겨 나신 작은 어머님은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 오셨지만
그분의 울음과 눈물을 집안은 외면 했다. 그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두사람의 과부를 집안에 둘수 없다는게 모두의 중론 이었다.
큰 어머님은 어차피 큰 어른이시니 재가는 본인의 결심이었지만
작은 어머님 조차 혼자 늙게 놔두시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친청으로 가신 작은 어머님은 서른살이 넘어도 재가를 하지 않으셨다.
명절이나 재삿날에는 어김없이 찾아 오셨지만
한번도 대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작은 어머님은 대문 앞에서 하루종일 울면서
대문을 열어 달라고 하셨지만 집안은 끝내 응답을 안 했다.
작은 어머님의 행복을 위해서도
그리고 앞으로 남은 세월을 위해서도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모두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바람결에 작은 어머님의 소식이 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35살 되는해에 작은 어머님 집안에서 연락이 왔다.
재가를 하신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안은 총 출동을 했다.
약 70여명 가까이 작은 어머님 재가를 축하하기 위해서 결혼식장으로 몰려 갔다.
결혼식장에 간 친딸은 재가를 하시는
작은 어머님이 친 어머니라는 것을 몰랐다.
작은 어머님은 잠시 시간을 내어 친 딸을 가슴에 끌어 안고 그저 눈물만 흘리셨다.
그러나 집안 어른들께서는 냉정하게 친딸을 떼어 놓으시고
더 이상의 만남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작은 어머님은 친딸이 무사히 잘 자라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식이었다.
작은 어머님 얼굴에서 웃음이 살폿이 피어나는 것을 모두다 알 수 있었다.
재가를 하지 않으신 큰 어머님 밑에서 친 엄마 처럼 알고 자라던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피로 아이는 크게 방황하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모두다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얼마가 지난다음 이미 재가한 친 어머니와의 만남도 몰래 주선 되었다.
두 모녀가 만나서 얼마나 울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아마도 밤새 울었을 것이다.
모든 사실을 안 뒤에는 오히려
큰 어머니를 예전보다 더 친어머니처럼 대했다
잘 키워 준것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 했다.
시집을 가서도 큰 어머님을 친 어머니 이상으로 모시면서 효도를 다했다.
올해 큰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누구보다 슬피 울었다.
물론 친 어머니와도 소식을 주고 받고 있다.
내가 직장을 잡고 안정이 되자
재사는 자연스럽게 내가 모시게 되었다. 이곳으로 올 때에도 모셔왔다.
이곳으로 제사를 모셔올 때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 항상 머리에 남아 있다.
" 이놈아... 이제 네 자식이 해외로 간다...
비록 머나먼 해외이지만
그곳에 가서 자식 잘되게 보살펴 주고 또 제삿상도 받도록 해라...
살아서 해외 구경 한번 못하더니만
죽어서 비행기도 타보고 해외구경 하는구나..."
아주 오래전 제사상 이야기를 카페글에서 한 기억이 있다.
그때도 이야기를 하였지만
나는 이곳에서 작은 아버님 제삿상을 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서 모신다.
더운 여름날씨라 오래 보관하지도 못할 음식이지만 제삿상 하나로는 모자라
두개의 상을 붙여 놓고 고기며 생선이며 온갖 과일이며 모두다 올려 드린다.
결혼 하신지 일년도 안되어 돌아가신 작은 아버님.
산골에서 제대로 호위호식도 못하신 작은 아버님이 불쌍해서 이다.
망고/파파야/바나나/패션 후르츠/파인애플/망고스틱/코코넛등등...
모두다 살아 생전 먹어 보시지 못한 과일 들이다.
많이 드시고 배탈이 난다 하더라도
나는 기일과 명절 제삿날이면 어김없이
두개의 상차림도 부족하듯 제삿상을 올려 드린다.
첫댓글 사유수..정률스님..지심귀명례에 올렸습니다
"내가슴속에 램프" 카페 태그없는 글방 에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