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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시대 정의를 역사에서 찾은 지도자
단재 신채호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언론인, 문학가, 역사가, 최고의 항일주의자로서 나라를 빼앗겼던 암울했던 시절에 역사만이 희망임을 이야기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단재는 독립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서 역사를 선택했다. 독립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역사에서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가 역사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시기는 고대사였고, 그 무대는 만주땅이었다. 그는 만주는 우리 영토임을 강조하고 있다. 북만주의 흑룡강에서부터 양자강에 이르기까지 단재는 우리 역사의 무대를 넓혀 놓았다.
그는 당시의 고대 역사가 압록강 이남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장 많이 왜곡되었다고 봤다. 뿐만 아니라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시대를 보면 우리 선조들은 동북아시아에서 아주 막강한 민족이었고 찬란한 독자적 민족문화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1914년, 신채호는 길림성 집안에서 일년간 머물면서 고구려의 수많은 유적지들을 접하고, 고대사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고증 정리했다. 현장을 직접 발로 뛰어 다님으로써 우리 고대사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신채호는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뒤, 만주가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주장에 대해 강력히 반박하였다. 고구려의 후예인 대조영이 만주에 발해를 세우고 약 300년간 만주를 지배했으니 만주가 우리 땅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에 가서 고적답사를 하고, 사경전서를 비롯해서 많은 선진문헌을 읽었다. 진시왕의 분서갱유 이전의 책들과 문헌들까지도 읽었기 때문에 우리 책만 가지고 역사연구를 한 사람들과는 독서량 자체가 다르고, 그가 해석하는 범위도 비유가 사학과 유학사학을 아울러 훨씬 확장된 열린 해석을 할 수가 있었다. 철저한 답사와 수많은 책을 통해 얻어진 그의 새로운 역사인식은 종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우리 역사는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일본과 중국의 지배를 받은 못난 민족, 하찮은 국가라는 오명을 씻어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잃었던 나라를 찾기 위해 찾아간 만주 땅에서 역사 뒤편에 가려져 있던 강대한 우리의 역사를 확인한 그는 고대사를 통해 잃었던 우리 민족의 긍지를 되찾고자 했다. 신채호의 이런 역사 연구는 일제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된 주민들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
1880년 12월, 단재는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18대 손으로 태어나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신광식)을 여의고 할아버지(신성우) 밑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했던 단재는 아홉 살에 중국역사서 <자치통감>을 완전히 익혔고, 열세 살 때는 사서삼경을 독파해 천재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1898년 단재는 열아홉 살에 성균관에 입교했다. 당시 성균관 관장 이종원은 “너는 곧 나를 능가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뛰어난 인물로 보았다. 스물 여섯 살에 성균관 박사가 된 단재는 당대 제일의 논객, 위암 장지연의 권유를 받고, <황성신문>에서 언론인으로서의 첫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황성신문>이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사전 검열 없이 배포했다는 이유로 무기한 발행이 정지되자, 단재는 양기탁이 있는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국권을 회복하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민족의 힘이 강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역사에 대한 많은 논설을 썼다.
그는 애국심을 키우는 힘을 역사에서 찾으려고 했다. 단재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해 다양한 글들을 통해 역사를 강조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위대한 영웅으로 을지문덕과 최영.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3대 영웅전을 발표하였다. 역사 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던 그가 역사 속의 영웅에 주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행동이 없는 선비 지식인들의 행태 때문에 나라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무치(武治) 교육을 주장했다. 그런 일련의 선상에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영웅이 나와서 나라를 구하는데 적극적인 도움을 주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면 일제 군사력에 대항하는 실력이 있어야 되는데 그 핵심이 되는 것은 무력 무장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일제가 무력으로 점령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저항투쟁과 국권회복의 방략도 무장투쟁이 핵심에 놓여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단재 신채호의 지론이었다.
<독사신론>의 정신
신채호가 역사를 주목한 이유는 바로 일제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고 있다는데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역사 속의 영웅들에서 희망을 보았다. 강한 나라, 힘있는 민족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진리,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하고, 곧 무력으로만 이길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역사를 철저히 공부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이었다.
<독사신론>은 신채호가 쓴 논문이다. 그 첫 구절을 한번 보면, “國家의 歷史는 民族 消長盛衰의 상태를 閱할 者라. 民族을 捨하면 歷史가 無할지며, 歷史를 捨하면 民族의 其 國家에 대한 觀念이 不大할지니 嗚呼라, 歷史家의 責任이 其亦 重矣哉인저”(국가의 역사는 민족 소장성쇠의 상태를 연구하는 것이라,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으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못하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가)라고 돼 있다. 한 국가의 역사는 그 민족의 번영과 멸망을 담고 있어서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고, 그 역사를 버리면 국가라는 것도 대단한 것이 아니니 역사가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렇게 신채호는 역사와 국가, 민족을 공동운명체로 보았을 만큼,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역사가의 책임 또한 그만큼 중요하게 보고 있다. 그런데 신채호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꼽았던 사건이 하나 있다. 이른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민족 자주 역량의 기회
<고려사절요>인종 10년의 기록에는 “묘청을 저자에 내어가 목을 베라”고 돼 있고, 인종 12년의 기록에는 “묘청을 베어 하늘의 경계에 응답하고 민심을 위로하라”고까지 적고 있다. 묘청은 고려중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당대의 기록들은 하나같이 그를 반역자요, 허황된 술수를 부리는 인물로 평가했지만 신채호는 묘청에 대해 최고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12세기(고려 중기)에는 거란의 요나라와 중국의 송나라, 그리고 고려의 안정된 삼각구도는 여진족이 세운 금의 등장으로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인종 3년에 금 세력이 강해져서 고려에 대해 형제 관계에 이어 군신 관계까지 요구하자 고려조정은 분개하였다. 이 때 묘청이 등장하여 금나라 정복을 주장하며 칭제건원(稱帝建元)까지 내세우고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고려사절요>에는 서경 천도하면 천하를 얻을 것이고 금나라도 항복할 것이며, 주변의 36개국이 신하가 되어서 고려를 따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서경 천도는 개경 문벌귀족들의 거대한 세력을 벗어나 새로운 지지기반이 생기고, 새로운 정국 구상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서경은 원래 고구려의 수도였고 북진정책의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김부식 등 문벌귀족이 반대하고 나섰다. 김부식은 강력하게 급부상하는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하였고, 문벌귀족의 강한 반발에 인종은 결국 서경천도를 포기하고 말았다. 서경천도가 실패하자, 묘청은 인종 13년에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했던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진압했다.
단재는 묘청을 자주적인 정치가, 자주적인 승려이자 문인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김부식은 사대주의적이고 중국 의존적인 정치가 역사가라고 보았다. 그래서 묘청이 자주적인 힘을 길러서 궁극적으로는 만주도 회복하고 요동을 회복할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김부식이 군사를 일으켜 묘청을 쳐서 패배시켰고, <삼국사기>를 지어 압록강 이남에 만족하도록 정신교육을 시킨 것이 결국은 우리나라를 힘이 없는 나라 작은 나라로 만든 결정적인 전기가 됐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신채호는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의 내용도 거세게 비판한다. 그는 김부식의 사대주의 때문에 중국의 눈높이로 쓰여진 역사를 우리 역사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신라중심의 역사관으로 인해 가장 강대했던 우리의 고대사가 빠져버렸고 결국 대국이 소국되고, 대국민이 소국민이 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투쟁방법을 제시한 ‘조선혁명선언’
1923년 1월,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했다. 독립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조선혁명선언’에는 신채호의 역사관이 잘 드러나 있다. 단재가 의열단에게 써주었던 ‘조선혁명선언’은 독립투사들의 행동지침서로 통했다. 투쟁목표와 대상을 결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6천4백여자의 ‘조선혁명선언’은 최남선의 ‘3.1 독립선언서’와 함께 최고의 명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선언의 첫 구절은 “강도일본이 우리 국호를 없이하여,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였고, 이것이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했다. 또 조선 민족을 주체로 한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구체적인 진로로 다음 5가지를 들었다.
- 다른 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조선 고유의 것을 찾는다.
- 특권 계급을 없애고 인간 본연의 자유로운 모습을 찾는다.
- 경제 약탈 제도를 없애고 다같이 잘사는 사회를 만든다.
-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고 다같이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
- 문화적 차원에서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
한편, 혁명을 하기 위해 제거할 대상으로 조선총독과 고관, 일본군 수뇌,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부(巨富), 밀정들, 반민족적 토호 등 7개를 들었다. 이들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신채호는 무력을 선택했다.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독립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폭력으로 맞서 싸우는 길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결성되어 암살과 폭력, 파괴를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삼았던 항일 비밀 결사 단체였다.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의 의식을 한껏 고양시켰다. 1923년,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된 그 해,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을 비롯해, 1924년 김지섭의 동경 2중교 폭탄투척 사건 등 의열단의 활동은 한층 치열하게 전개됐고, 일본을 공포에 떨게 했다.
신채호의 실천과 죽음
그는 나약한 지식인들의 관념적인 독립운동보다는 강한 행동으로 나가야함을 인식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를 주창했다. 그가 지향했던 무정부주의 운동은 나라를 빼앗긴 국민 모두 함께 힘을 모아 제국주의에 대항하자는 것이다. 1928년 중국 천진에서 한국·중국·일본·대만·베트남·인도·필리핀 등 7개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참여한 대회에 참석한 신채호는 비밀결사조직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을 결성하고, 그 운동 방향을 모색했다. 당시 발표했던 선언문은 “짐승 같은 자본주의 강도 제국들이 식민지 국민들의 온갖 물건들을 다 빼앗아서 그들은 배가 터지려한다 그런 고로 식민지 국민들은 싸워서 그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천진대회에서는 북경 교외에 폭탄공장을 만들어 테러 활동을 하자, 각국으로 테러단을 보내서 고관 암살과 각 기관을 파괴하자고 결정했다. 그래서 독일인과 러시아인 폭탄 기술자를 초빙해서 기술을 전수 받고 기관지도 발행해서 아나키즘을 선전하기로 하였다. 그런 사업을 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단재는 직접 행동에 나섰다. 당시 뜻을 같이했던 대만사람 임병문과 함께 각국의 위조 어음을 이용해 막대한 자금을 만들기로 하였다. 계획은 액면 6만4천원의 외국어음 2백매를 위조해 일본, 대만, 조선 등의 우체국에 발송하고, 현지에서 다시 찾기로 하였다.
신채호는 ‘유맹원’이라는 중국인으로 변장했다. 1928년 5월 8일, 신채호는 돈을 찾기 위해 일본 고오베를 거쳐 대만 기륭항에 도착했지만 정보 유출로 인하여 체포되어 중국 대련으로 이송되어 여순감옥에 투옥됐고, 1930년 5월 ‘유가증권위조, 동행사 및 사기죄’와 ‘치안유지법 위반’의 죄목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나이 49세의 신채호는 수감생활중 병을 얻어 일제가 병 보석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대의와 지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단재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단재가 수감된 뒤, 그가 전에 썼던 글들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통해 국내에서 연재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다.
역사만이 희망이었던 신채호는 수감생활동안 노역에 동원되면서도 틈틈이 역사책을 읽으며 <대가야국천국고>, <정인홍공약전> 두 가지 역사책의 구상을 끝냈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역사에 몰두했던 신채호. 역사는 그에게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출옥을 1년 8개월 앞둔 1936년 2월 18일, 단재는 뇌일혈로 쓰러져 순국했고, 여순감옥에서 시내 쪽으로 1km 떨어진 여순시 용하서(龍河西) 삼리교(三里橋) 부근에서 화장 당하였다. 완전 독립을 원했던 단재 신채호는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56세의 나이로 눈을 감고 말았다.
단재 신채호에게 있어서 역사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었다.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고대사 연구를 통해, 좌절에 빠져있는 일반 민중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독립이 가능하리라는 것이 신채호의 생각이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그는 갔지만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다.
어 록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에서 발전하여 공간까지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많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투쟁이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휴식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 <조선 상고사>
“오호라! 어떻게 하면 내가 2천만 동포의 피와 눈물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뜨겁게 방울 맺히게 할까? 오직 역사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 무엇이기에 그 효능이 이처럼 신성하단 말인가. 가로되 역사라는 것은 그 나라 그 국민의 변천 성쇠의 실적이니, 역사가 있으면 그 나라가 반드시 흥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러하니 애국심이 없는 사람도 역사를 반드시 읽어야 하고, 애국심이 있는 사람도 반드시 역사를 읽어야 하느니라.” - <대한협회월보> 제3호
조선혁명선언
1.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 천택(川澤), 철도, 광산, 어장 내지 소(小)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절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 가옥세, 인구세, 가축세, 백일(百一)세, 지방세, 주초(酒草)세, 비료세, 종자세, 영업세, 청결세, 소득세,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을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웬만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 집중의 원칙하에서 멸망할 뿐이오, 대다수 인민 곧 일반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종년(終年) 소득으로 일신과 처자의 호구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 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진공하여 그 살을 찌워주는 영세의 우마(牛馬)가 될 뿐이오, 내종(乃終)에는 그 우마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 이민의 수입(輸入)이 연년(年年) 고도의 속율(速率)로 증가하여 ‘딸깍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 가 아귀(餓鬼)부터 류귀(流鬼)가 될 뿐이며,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 경찰정치를 여행(勵行)하여, 우리 민족이 촌보(寸步)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 출판, 결사(結社), 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회한이 있으면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뜬 소경이 되고, 자녀를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 하는 노예양성소-학교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무(誣)하여 소잔오존(素盞嗚尊)의 형제’라 하며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 영지’라고 일본놈들이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强盜)정치를 찬미하는 반(半)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염세 절망의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하에 감옥에 구유(拘留)되어 주리, 칼 씌우기 차꼬 채우기, 단금질, 채찍질, 전기(電氣)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수족을 달아매는, 콧구멍에 물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刑律)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서 옥문을 나온대야 종신 불구의 폐질자(廢疾者)가 될 뿐이라.
그렇지 않을지라도 발명 창작의 본능은 생활의 곤란에서 단절(斷絶)하며, 진취활발의 기상은 경우의 압박에서 소멸되어 ‘찍도 짹도’ 못하게 각 방면의 속박, 편태(鞭笞), 구박, 압제를 받아 환해(環海) 삼천리가 일개 대감옥이 되어 우리 민족은 아주 작은 인류위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 본능까지 잃어 노예부터 기계가 되어 강도 수중의 사용품이 되고 말 뿐이며,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초개로 보아 을미 이후 십삼도의 의병나던 각 지방에서 일본군대의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즉 최근 삼일 운동 이후 수원, 선천 등의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 서간도, 노령, 연해주 각처까지 도처에 주민을 도륙(屠戮)한다, 촌락을 소화(燒火)한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오욕(汚辱)한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인신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로 내어 죽인다, 아동을 악형한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을 ‘산 송장’으로 만들려 하는도다.
이상의 사실에 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 정치 곧 이족(異族) 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2.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평화’, ‘한국독립보전’ 등을 담보한 맹약이 묵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 강토를 집어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조선인민 생명 재산 자유 보호’, ‘조선인민 행복증진’ 등을 신명(申明)한 선언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이천만의 생명이 지옥에 빠지던 실제를 못보느냐? 삼일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 민원식 등 매국노 한둘을 시키어 이따위 광론을 부름이니, 이에 부화하는 자는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적(奸賊)이 아니냐.
설혹 강도 일본이 과연 막대한 도량이 있어 개연(慨然)히 차등의 요구를 허락한다 하자, 소위 내정독립을 찾고 각종 이권을 찾지 못하면 조선민족은 일반의 아귀(餓鬼)가 될 뿐이 아니냐.
참정권은 획득한다 하자, 자국의 무산계급의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 강도국의 식민지 인민이 되어 몇몇 노예대의사(奴隸代議士)의 선출로 어찌 아사의 화를 구하겠느냐.
자치를 얻는다 하자, 그 가종의 자치임을 물문(勿問)하고 일본이 그 강도적 침략주의의 간판인 ‘제국’이란 명칭이 존재한 이상에는 그 부속하에 있는 조선인민이 어찌 구구한 자치의 허명(虛名)으로써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겠느냐.
설혹 강도 일본이 돌연히 불보살이 되어 일조(一朝)에 총독부를 철폐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환부(還付)하며, 내정외교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와 경찰을 일시에 철환(撤還)하며, 일본의 이주민을 일시에 소환하고 다만 허명의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전멸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봉대(奉戴)한다 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하지니라.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는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전’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이 있으랴.
쇠망한 인도족, 유태족도 문화가 있다 하지만 일(一)은 금전의 힘으로 그 선조의 종교적 유업을 계속함이며, 일(一)은 그 토지의 넓음과 인구의 많음으로 상고(上古)의 자유발달한 그 여택(餘澤)을 지키고 보존함이니, 어디 모기와 등에같이, 승냥이와 이리같이 인혈을 빨다가 골수까지 깨무는 강도 일본의 입에 물린 조선같은데서 문화를 발전 혹 보존한 전례가 있더냐? 검열, 압수 모든 압박 중에 몇몇 신문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자오(自嗚)하며,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이상의 이유에 거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자(내정독립, 자치, 참정권논자)나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자(문화운동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3. 강도 일본의 구축(驅逐)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아래와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제일은 외교론이다.
이조 오백년 문약(文弱)정치가 ‘외교’로써 호국의 장책(長策)을 삼아 더욱 그 말기에 더욱 심하여 갑신 이래 유신당, 수구당의 성쇠가 거의 외원(外援)의 유무에서 판결되었다. 위정자의 정책은 오직 갑국(甲國)을 끌어들여 을국(乙國)을 제함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 의존의 습성이 일반 정치 사회에 전염되었다. 즉 갑오, 갑신 양 전역에 일본이 누십만의 생명과 누억만의 재산을 희생하여 청, 노 양국을 물리고 조선에 대하여 강도적 침략주의를 관철하려 하는데 우리 조선의 '조국을 사랑한다, 민족을 건지려 한다'하는 이들은 일검(一劍) 일탄(一彈)을 우매하고 탐욕스러우며 난폭한 한 관리나 국적(國賊)에게 던지지 못하고 공함(公函)이나 열국(列國) 공관에 던지며 장서(長書)나 일본 정부에 보내어 국세의 고약(孤弱)을 애소하여 국가존망, 민족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이 처분,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 그래서 ‘을사조약’ ‘경술합병’ 곧 ‘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뒤 몇천 년만의 처음 당하던 치욕에 조선 민족의 분노적 표시가 겨우 하얼빈(哈爾賓)의 총, 종현(鐘峴)의 칼, 산림유생의 의병이 되고 말았도다.
아! 과거 수십 년 역사야말로 용자(勇者)로 보면 침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인자로 보면 상심할 역사가 될 뿐이다. 그리고도 망국이후 해외로 나아가는 모모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일미(日美)전쟁, 일로(日露)전쟁 등 기회(機會)가 거의 천편일률의 문장이었었고, 최근 삼일운동에 일반인사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過信)의 선전이 도리어 이천만 민중의 분용(奮勇)전진의 의기를 타소(打消)하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제2는 준비론이니, 을미조약의 당시에 열국공관에 빗발듣듯하던 종이쪽으로 넘어가는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정미년의 해아밀사도 독립회복의 복음을 안고 오지 못하매 이에 차차 외교에 대하여 의문이 되고 전쟁아니면 안되겠다는 판단이 생기었다. 그러나 군인도 없고 무기도 없이 무엇으로써 전쟁하겠느냐? 산림유생들은 춘추대의에 성패를 불계(不計)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아관대의(峨冠大衣)로 지휘의 대장이 되며, 산양포수의 화승대(火繩隊)를 몰아가지고 조일전쟁의 전선에 나섰지만 신문쪽이나 본 이들은 - 곧 시세를 짐작한다는 이들은 그리할 용기가 아니난다. 이에 ‘금일 금시로 곧 일본과 전쟁한다는 것은 망발이다. 총도 장만하고 돈도 장만하고 대포도 장만하고 장관이나 사졸감까지라도 다 장만한 뒤에야 일본과 전쟁한다’ 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준비론 곧 독립전쟁을 준비하자 함이다.
외세의 침입이 더할수록 우리의 부족한 것이 자꾸 감각(感覺)되어, 그 준비론의 범위가 전쟁이외까지 확장되어 교육도 진흥해야겠다, 상공업도 발전해야겠다, 기타 무엇 무엇 일체가 모두 준비론의 부분이 되었었다.
경술국치 이후 각 지사들이 혹 서북간도의 삼림을 더듬으며, 혹 시베리아의 찬바람에 배부르며, 혹 남북경으로 돌아다니며, 혹 미주나 하와이로 돌아가며, 혹 경향(京鄕)에 출몰하여 십여년 내외각지에서 목이 터질만치 ‘준비! 준비!’를 불렀지만 그 소득이 몇 개 불완전한 학교와 실력없는 회(會)뿐이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력(誠力)의 부족이 아니라 실은 그 주장의 착오이다. 강도 일본이 정치 경제 양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의식(衣食)의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 전투력의 백분지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 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4.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구축(驅逐)할지며, 강도 일본을 구축하자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구축할 방법이 없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종사하려면 어느 방면부터 착수하겠느뇨? 구 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다시 말하면 곧 을의 특수세력으로 갑의 특수세력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인민은 혁명에 대하여 다만 갑을 양 세력, 곧 신구 양 상전 중 누가 어질고 누가 난폭한지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를 보아 그 향배를 정할 뿐이오, 직접의 관계가 없었다. 그리하여 ‘주기군이조기민(誅其君而弔其民)’이 혁명의 유일종지(宗旨)가 되고, ‘단식대장이영왕사(簞食壺漿以迎王師)’가 혁명사의 유일미담이 되었었다. 그러나,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 직접의 혁명인 고로 그 비등 팽창의 열기가 숫자상 강약 비교의 관념을 타파하며, 그 결과의 성패가 매양 전쟁학상의 정궤(定軌)에 벗어나 무전무병(無錢無兵)한 민중으로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며 외구(外寇)도 구축하나니,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각오(覺悟)의 요구니라.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느뇨?
민중은 신인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 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오,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그런 열규(熱叫)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 부자연, 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 하는 유일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선각한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先驅)가 됨이 민중 각오의 제1로(路)니라.
일반 민중이 기(飢), 한(寒), 곤(困), 고(苦), 처호(妻呼) 아제(兒啼), 세납(稅納)의 독봉(督棒)에, 사채(私債)의 독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이다. 이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主因)되는 강도정치의 실시자인 강도들을 격폐(擊斃)하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에 전하며 모든이가 동정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그 ‘아사(餓死)’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란 일로(一路)가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자는 그 의분에 못이기어, 약자는 그 고통에 못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널리 전파하여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되면 간활잔폭(奸猾殘暴)한 강도 일본이 필경 구축되는 날이라. 그러므로 우리의 민중을 불러 일깨워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養兵) 십만이 일척(一擲)의 작탄(炸彈)만 못하며 억천장(億千張) 신문잡지가 일회 폭행만 못할지니라.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발생치 아니하면 끝이려니와, 이미 발생한 이상에는 마치 벼랑끝에서 굴리는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아니하면 정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이전 경과로 말하면 갑신정변은 특수세력이 특수세력과 싸우던 궁중 일시의 활극이 될 뿐이며, 경술 전후의 의병들은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대의로 격기(激起)한 독서계급의 사상이며, 안중근, 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熱烈)하였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으며, 삼일운동의 만세소리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잠시 드러났지만 또한 폭력의 중심을 가지지 못하였도다. ‘민중, 폭력’ 양자 중 하나만 빠지면 비록 굉열장쾌(轟列壯快)한 거동이라도 또한 천둥같이 끝나는도다.
조선 안에 강도 일본의 제조한 혁명 원인이 산같이 쌓이었다. 언제든지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개시되어 ‘독립을 못하면 살지 않으리라’, ‘일본을 구축(驅逐)하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구호를 가지고 계속 전진하면 목적을 관철하고야 말지니, 이는 경찰의 칼이나 군대의 총이나 간활(奸猾)한 정치가의 수단으로도 막지 못하리라. 혁명의 기록은 자연히 참절장절(慘絶壯絶)한 기록이 되리라. 그러나 물러서면 그 후면에는 흑암(黑暗)한 함정이오, 나아가면 그 전면에는 광명한 활로니, 우리 조선 민족은 그 참절장절한 기록을 그리면서 나아갈 뿐이니라.
이제 폭력 - 암살, 파괴, 폭동 - 의 목적물을 대략 열거하건대,
1) 조선총독 및 각 관(官) 관리
2) 일본천황 및 각 관 관리
3) 정탐노(偵探奴), 매국적(賣國賊)
4) 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紳士)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적 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지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완화하고 중상(中傷)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서 갚을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강도 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로 구축할지니라.
5.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에서 보아 구별될 뿐이요. 정신상에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 폭력을 파괴하려는 것은 제1은 이족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이란 그 위에 ‘일본’이란 이족 그것이 전제(專制)하여 있으니, 이족전제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적 조선이 아니니 고유한 조선을 발현하기 위하여 이족통치를 파괴함이니라.
제2는 특권계급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민중’이란 그 위에 총독이니 무엇이니 하는 강도단의 특권계급이 압박하여 있으니, 특권계급의 압박 밑에 있는 조선민중은 자유로운 조선민중이 아니니, 자유로운 조선민중을 발견 하기 위하여 특권계급을 타파함이니라.
제3은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탈제도 밑에 있는 경제는 민중 자신이 생활하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가 아니오, 곧 민중을 잡아먹으려는 강도의 살을 찌우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니, 민중생활이 발전하기 위하여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함이니라.
제4는 사회적 불균형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자위에 강자가 있고 천자(賤者)위에 귀자(貴子)가 있어 모든 불균형을 가진 사회는 서로 약탈, 서로 박삭(剝削), 서로 질투 구시(仇視)하는 사회가 되어 처음에는 소수 행복을 위하여 다수의 민중을 잔해(殘害)하다가 말경에는 또 소수끼리 서로 잔해하여 민중 전체의 행복이 필경 숫자상의 영이 되고 말뿐이니, 민중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함이니라.
제5는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유래하던 문화사상의 종교, 윤리, 문학, 미술, 풍속, 습관, 그 어느 무엇이 강자가 제조하여 강자를 옹호하던 것이 아니더냐. 강자의 오락에 공급하던 도구들이 아니더냐. 일반 민중을 노예화하던 마취제가 아니더냐. 소수계급은 강자가 되고 다수 민중은 도리어 약자가 되어 불의의 압제에 반항치 못함은 전적으로 노예적 문화사상의 속박을 받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만일 민중적 문화를 제창하여 그 속박의 철쇄(鐵鎖)를 끊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은 권리사상이 박약하며 자유향상의 흥미가 결핍하여 노예의 운명 속에서 윤회할 뿐이라. 그러므로 민주문화를 제창하기 위하여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함이니라. 다시 말하자면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족 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균의 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파타함이니라.
그런즉 파괴적 정신이 곧 건설적 주장이라. 나아가면 파괴의 ‘칼’이 되고 들어오면 건설의 ‘기(旗)’가 될지니,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할 치상(癡想)만 있다하면 오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이오 둘이 아닌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줄 알진대, 현재 조선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민중이 한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아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다리 위'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이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携手)하여
불절(不絶)하는 폭력 -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문> 단재 신채호가 대한민국의 역사와 국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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