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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나리꽃 속에 묻힌 영산 만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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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해마다 봄이 오면 나도 모르게 몸살이 난다. 삭신이 쑤시는 그런 몸살이 아니라 무작정 어디론가로 떠나고 싶은, 그리하여 나 자신에게도 낯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그런 지독한 몸살이 난다. 어느 해 봄부터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무슨 까닭으로 방랑기 심한 그런 몸살이 나는지도 잘 모르겠다.
해마다 개나리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시작하면 천천히 시작되는 그 몸살은 봄이 깊어질수록 더욱 심해진다.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집을 나선다. 그리하여 내 앞에 놓여져 있는 길을 하염없이 따라가다가 언뜻 눈에 띄는 곳이 있으면 그 곳에 내려 막걸리 한사발을 마시며 나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방랑기를 다스린다.
지난 주말에 갔던 비사벌(창녕)도 그렇게 지독한 몸살을 일주일 내내 앓다가 훌쩍 떠난 길이었다. 그리고 넋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비사벌 여기저기를 헤집다가 영산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는 남산호국공원 앞에서 정말 우연찮게 만난 무지개 다리가 바로 보물 제564호로 지정된 '만년교'였다.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가느다란 실개천 위에 떠 있는 만년교는 언뜻 보기에 개나리꽃 사이에 걸린 무지개처럼 보였다. 그 아름다운 무지개 속에는 마치 지구의 출구처럼 보이는 동그란 원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개나리는 그 동그란 원 속에서도 노오란 웃음을 날리며 나를 어지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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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살 어린 소년이 썼다는 만년교 앞의 석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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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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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년교 위에는 흙이 덮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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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그래. 어쩌면 저 동그라미는 몸과 마음을 이어주는 문인지도 모른다. 실개천 위에 또렷하게 걸린 저 반원은 사람의 몸이자 살아가는 현실이요, 실개천 속에 잠긴 저 반원은 사람의 마음처럼 다가서면 이내 잔물결로 흩어지다가 물러서면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내는 일종의 환상 같은 게 아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만년교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만년교의 몸 위에 서서 만년교의 마음을 엿보았다. 만년교의 마음 속에 내가 비치고 있었다. 만년교의 마음 속에 내 마음이 들어 있었다. 나는 부드러운 봄바람에 잘게 부서지는 내 마음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만년교를 오가곤 했다.
내 어릴 적 고향의 시내에 놓여 있던 돌다리처럼 정겹기만 한 만년교. 아무리 바라보아도 결코 지겹지가 않은 만년교.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다리를 놓았단 말인가. 누구를 향한 애타는 그리움이 이 만년교로 태어났을까. 견우와 직녀처럼 이 가느다란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못내 그리워하는 님이라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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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년교를 밟으며 만년 동안 이어갈 소원 하나 빌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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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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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예는 화강암 석재로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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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원님이 다리를 고쳐 주었다 하여 '원다리'라고도 불리는 만년교. 만년교는 선암사 승선교(昇仙橋, 보물 제400호)와 흥국사 홍교(虹橋, 보물 제563호), 벌교 홍교(虹橋, 보물 제304호)와 더불어 조선 후기 남부 지방의 홍예교 구축 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는 다리로서 학술적 가치 또한 매우 크다고 전해진다.
13세 소년이 썼다는 석교비에 따르면 조선 정조 4년, 서기 1780년 석수쟁이 백진기가 처음 이 다리를 만들었으나 정축년 대홍수 때 그만 떠내려가고 말았단다. 그리하여 고종 29년, 서기 1892년에 현감 신관조가 석수쟁이 김내경을 시켜 남천석교를 중건하면서 이 다리가 만년을 갈 것이다 하여 만년교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영산향토지>에 따르면 홍수로 다리가 떠내려간 뒤, 그러니까 지금의 만년교를 만들기 이전에는 이곳에 나무다리를 걸쳐놓고 사람들이 오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나무다리는 남부에서 영산 읍내를 통하는 하나밖에 없는 관문 역할을 톡톡히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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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년교 위에 보이는 잡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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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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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나리꽃 속에 뜬 무지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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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하지만 그 나무다리는 홍수가 날 때마다 자주 떠내려가는 탓에 지금의 무지개 형태의 석교인 만년교를 놓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때부터 만년교는 이름 그대로 긴 세월의 흐름에도 끄덕없이 그때 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실개천이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라고도 불리운다.
화강암 석재로 홍예를 만든 만년교는 너비 3m에 길이 13.5m, 홍예 높이 5m이다. 만년교의 양 쪽에 놓인 다리벽은 자연 잡석을 쌓아 메꾸었으나 홍예 머리돌 위에는 제법 큰 정형의 각석을 배열했다. 또한 홍예 석축 위에는 사람이 지나다기에 완만한 흙으로 덮혀 있다.
마치 무지개를 타고 오르듯이 만년교를 건너면 이 고장 사람들이 성지라 여기고 있는 남산호국공원이 나온다. 남산호국공원은 3·1 독립운동 때 영산의 24인 결사대가 독립만세를 외친 곳이며 한국전쟁 때에는 적군의 침공을 막은 최후의 보루였다고 전해진다. 남산호국공원에는 3·1운동 기념비와 봉화대, 6·25 전승탑 등이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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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조상들의 탁월한 솜씨를 누가 감히 흉내라도 낼 수 있단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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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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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개 다리 만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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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종찬 |
| 꽃이란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는 봄날, 꽃구경도 하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보고 싶다면 창녕 영산에 있는 만년교에 가보자. 가서 노오란 개나리꽃 사이에 걸려있는 무지개를 밟으며 만년 동안 이어갈 간절한 소원 하나 빌어 보자. 행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다면 소원을 빌기에 더욱 좋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