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골로새서 3:12~17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택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녀들은 그 신분에 합당한 성품을 가져야 한다고 사도 바울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과 용서와 사랑과 평화의 성품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매우 강조하여 가르친 성품과 삶의 열매를 말씀하는데, 그것이 바로 감사하는 삶입니다. 15절 하반절에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절 하반절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17절에서 다시 이르기를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반복적으로 감사하는 삶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백성들은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추수 감사절을 맞아 오늘 우리는 왜 우리가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묵상하도록 합시다.
첫째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늘 감사 생활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 1:21 말씀에 이르기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두고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사도는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요 세상 만사의 대주재자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속자이시거늘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비록 지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그 마음이 미련하여져서 하나님 대신에 우상과 잡신을 들여놓고 그것들에게 경배하며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인가 아닌가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선민 이스라엘일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이 없는 종교 행위를 두고서 하나님께서 아주 불쾌하게 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편 50:7 이하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 50:7~15,23)
이 말씀에서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교훈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많은 양의 제물을 바친다 해도 거기에 감사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제물의 피를 즐겁게 마시거나 제물의 기름을 태워서 나오는 기름 연기를 하나님께서 맡는 것이 아니라, 그 제물과 함께 드리는 하나님 백성의 감사의 마음을 받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편의 수많은 찬송시들은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고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시편 136편에서는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하면서 그 시편 내에서 우리 말 성경으로 25번에 걸쳐 감사한다는 고백과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또 시편 100편 4절 한 절만 읽어드리면,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핵심 역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삶 속에서 받은 은혜와 도우심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 이것이 곧 예배의 가장 중요한 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평생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감사함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풍성한 감사의 생활은 신앙의 성숙의 표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 생활을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6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사도 바울은 신앙을 나무로 비유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믿음이 뿌리를 박고 주님의 교훈과 사도들의 교훈을 받으면서 점점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될 때에 그 대표적인 열매가 감사인데 나무 뿌리가 주님께 깊이 박히며 나무가 잘 성장하면 열매가 풍성히 맺듯이 감사함의 열매가 풍성히 맺는 것이 신앙인의 궁극적인 성장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건강하고 온전한 성화의 단계를 오르게 되면 그 만큼 그 사람은 감사함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깊어지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함이 깊어질수록 그의 삶 속에서 감사하는 삶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믿음 안에서 장성해져서 형통할 때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형들의 질투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그의 신앙이 점점 성장하고 그 인품이 점점 성숙해지니까 그는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에 보복하려 하지 않고 용서해줄 뿐 아니라 형들이 자기를 애굽에 팔아넘긴 것이 만민의 생명과 가족의 생명을 건지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함인 줄 알고 감사하면서 그 형들에게 보복당할 것을 염려 말라고 다독이며 형들과 그 자녀들을 봉양하는 큰 형님 역할을 잘 감당하지 않았습니까? 이렇듯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풍성한 감사의 삶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교회에 연세가 많으신 할아버지 신자가 있었는데 무슨 일에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감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 ‘감사 할아버지’가 한번은 거리에 나가서 고기를 한 근 사오다가 그만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고기가 땅 바닥에 떨어져서 굴렀습니다. 마침 어떤 개 한 마리가 지나가다가 그 고기를 물고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나이많은 할아버지가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어요?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지막 하는 말이 “감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젊은이 하나가 지나가다가 “아니, 할아버지지, 고기를 개한테 다 잃어버리고 뭐가 감사하단 말입니까?”라고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이 사람아, 고기는 잃어버렸어도 내 입맛은 그냥 있구먼.”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는 예기치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내게 없는 것만을 찾으면 마음에 불평이 들고 섭섭함이 들고 다른 사람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 기쁨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살다가 잃어버린 것이 있어도 여전히 내게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고, 손해 본 일이 있지만 그 손해봄으로써 내게 이익 되는 것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젊은 시절에 사업을 시작해서 연거푸 큰 실패를 경험했다 합시다. 쓰라린 실패 때문에 큰 시련을 겪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합시다. 그런데 이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주 나이가 들어서 큰 실패를 겪으면 회복되기 어려운데, 젊어서 실패를 겪어서 그래서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한번만 실패한 것 아니라 두 번 세 번이나 실패한 것도 꼭 손해만은 아닌 것이 그로 인하여 실패의 이유를 분명히 깨닫게 되고 자신의 한계도 확실히 알게 되고 그로 인하여 다시 또 실패할 것을 확실히 방지할 수 있게 되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한 해라도 더 젊은 시절에 실패와 반복된 손해가 오히려 크게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넘치는 감사 생활은 성숙한 신앙의 표지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은혜를 더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말씀 중에 큰 부자 농부의 비유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누가복음 12:16~21)
여기에 보면 이 큰 부자는 한 해 농사가 잘 되어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풍성한 햇빛과 비를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전혀 없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그 모든 것들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자기 자신의 미래가 그 물질의 풍성한 소유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안일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의 주인이시며 각 사람의 삶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공급자이시기에, 그 부자는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더 의존하고 풍성한 수확을 자기만을 위하여 쓰지 않고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함께 즐거할 마음을 가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감사치 아니하고 욕심만 부린 결과로 이 부자는 그 영혼이 그 날 밤에 하나님께 도로 올라가고 그 풍성한 소출과 쌓아놓은 곡식은 다른 사람들이 누리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하여만 쌓고 감사치 아니하는 자는 있는 것조차 빼앗겨버리는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 갈멜 지방에서 많은 양떼를 가진 나발이라는 사람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발의 종들이 들판에서 양을 칠 때면 다윗의 부하들이 그들을 보호하여 다른 산적들과 약탈자들로부터 나발의 종들을 안전하게 지켜줌으로써 그들이 양떼들을 잘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발은 자기 종들이 양떼를 돌볼 때에 의지가 되어주고 울타리가 되어준 다윗과 그 부하들의 은공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 보답하는 마음을 가졌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양털을 깎는 날 곧 큰 잔치의 날에 다윗이 그 부하들을 보내어 음식들을 좀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였더니, 나발은 그 부하들 앞에서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라고 말하면서, 다윗과 그 부하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고 고기 한 점 주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그 결과 돌아간 부하들의 말을 들은 다윗이 크게 분노하여 군사 사백 명을 거느리고 칼을 차고 그 집의 남자들을 다 죽이려고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나발의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이 한 종의 급한 보고를 듣고서 서둘러 떡 이백덩이, 포도주 두 가죽부대, 양 다섯 마리의 요리, 볶은 곡식 다섯 세아, 건포도 백송이, 무화과뭉치 이백 개를 준비하여 앞서 보내고, 본인도 나귀를 타고 다윗이 오는 쪽으로 달려가다가 도중에 다윗을 만나 진실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말로 다윗을 달래서 간신히 집안 사람들이 다 죽는 화는 면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술에서 깨어난 나발에게 그 부인 아비가일이 어제 다윗이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왔던 일을 얘기하니 나발은 그제야 자기가 한 언행이 이처럼 큰 화를 불러올 뻔한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고 말을 못하다가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자를 모욕한 일로 노하시어 그를 치니 열흘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감사하지 아니한 자들은 이처럼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복과 은혜를 더해주십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보게 되자, 자기들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여주라고 명하셨으니, 이는 율법에 문둥병자가 나으면 제사장이 진찰하여 그 병의 완치를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듣고 그들이 길을 가던 중에 열명이 다 깨끗이 문둥병이 낫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만이 예수님께서 치유해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뜨거운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리고는 다시 그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그 열 사람이 고침받은 후에 열 명이 다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맞게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한 이 사람을 인하여 예수님께서 마음이 기뻐서 그에게 축복을 더해주셨으니 곧 구원의 축복을 더해주신 것입니다. 이 구원이 그 문둥병의 치유가 완전하고 확정적임을 선언한 것일 수 있으며, 동시에 그 문병병자의 영혼의 구원의 은총을 선언해주신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사마리아 사람이 병을 고쳐주신 주님께 돌아와 감사함으로써 그가 더 풍성한 복과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 말씀에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고 하셨는데, 이 말씀도 동일한 취지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풍성한 은혜와 복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넷째로, 일상에서도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에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 말씀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뜻은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고, 어떤 상황, 어떤 사람에게도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삶에 있어서 항상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현실적인 도움을 늘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매일 일상이 가능한 것은 전기, 가스,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기름 수입이 안 되면 우리의 일상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원유 수입은 주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 이라크, 이란, 아랍에미리트연합 등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슬람입니다. 우리는 중동의 산유국들에게도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는 옷도 정유공장에서 만들고 우리가 직접 만들어 입는 옷은 하나도 없습니다. 차량도 고장나곤 하는데 우리가 스스로 고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습니다. 병원의 의사, 간호사, 약사들을 통하여 우리들은 모든 크고 작은 병들을 고침을 받고 있습니다. 군인들을 통하여 국가의 안전이 보장되고 있고, 경찰들을 통하여 우리가 안전한 일상이 가능합니다. 농부, 목축업자, 어부들과 유통업자들의 수고를 통하여 우리의 식탁에 각종 야채와 과일과 곡식과 소고기와 돼지고기, 고등어, 갈치 등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은 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로 인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톱니바퀴와 같은 긴밀한 도움을 통하여 우리들은 하루 하루 먹고 마시며 직장에 다니고 우리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아플 때 병원에 가고 운동도 하며 핸드폰으로 연락하며 티비도 보면서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협조와 수고를 통하여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뿐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그 사랑의 도움을 받을 때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당연히 내 돈을 주고 차를 타고, 돈을 주고 마켓에서 먹거리를 사고, 내 돈을 주고 아이들을 학교나 학원에 보내지만, 돈 자체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돈을 매개로 하여 우리는 사람들의 도움과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삶을 살아감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돈을 주면 내 할 일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돈을 주면서 택시 내릴 때에도, 생선을 사면서 값을 지불하면서도, 항상 운전자에게, 파는 상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마음을 담아 입술로 표현하십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2023년도 한 해가 이렇게 무르익고 벌써 추수감사절이 찾아왔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셨고 가정을 지켜주셨고 우리의 신앙을 붙들어주셨고 우리의 가장님과 성도님들과 자녀들을 큰 고난 없이 지켜주셨습니다. 우리 나라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켜주셨습니다. 코로나 때에는 학교도, 교회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는데, 그래도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큰 염려 없이 교회와 학교 출석도, 친척 모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할 거리들입니다. 아마도 성도님들 개인마다 올해 남들은 모르지만 정말 뜨겁게 감사할 큰 건들도 한두 개가 있을 줄 압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정말 감사한 한 해였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우리를 돌보아 지켜주신 주님의 성실하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고난이 있을 때 함께해주고 위로해주고 기도로써 서로 붙들어주신 여러 교우님들 모두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늘 돕고 섬긴 우리의 수많은 이웃들과 모든 분들에게도 뜨거운 감사를 드립시다. 한 해 동안 귀한 나라와 훌륭한 지도자들과 군인, 경찰, 공무원, 선생님들, 의사, 간호사, 성도님들이 섬기는 회사를 일군 지도자들 모두에게 주님께서 크신 축복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