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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를 올린 지가 제법 되었다.
게으른 탓도 있고 몇 번 올랐던 산에 갔던 탓도 있고...
아무튼, 다시 주흘산을 찾아 간다.
그러고보니 마지막으로 주흘산을 오른지 벌써 7년이나 지났네!
당시, 호텔 입구쪽에서 올라가 관봉과 주봉, 그리고 영봉을 거쳐 내려왔지만 이번에는 그냥 1관문을 지나서 여궁폭포와 혜국사를 들르고 주봉과 영봉을 거쳐 2관문으로 내려오는 일정을 잡았다.
제2주차장에서 출발한다.
몇 몇은 관봉 방향으로 가고 나머지는 그냥 1관문으로 간다. 1관문까지는 제법 걸어가야 한다.
길 한 쪽에 자리잡은 선비상.
문경새재 초입에 건립된 선비상은 전통사회의 구심점을 이루었던 지성과 인격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미래를 창조하는 아름다운 한국인을 상징한다. 선비상을 중심축으로 하여 전면에 둥근 광장을 조성하고 둥근 광장 좌우면 6면의 부조는 선비와 관련된 전통시를 함께 설치하였다.
단풍터널을 다니는 노약자를 위한 전기차도 보이고...
제1관 주흘관.
문경새재는 조선의 옛길을 대표하는 관도로,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며,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의 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새들도 쉬어 넘는 힘든 고개'라는 뜻의 '조령(鳥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태종 14년(1414)에 문경새재 계곡을 따라 제3관문까지 650m에 이르는 고갯 마루를 닦았다. 이로써 문경에서 괴산, 연풍을 잇는 대로가 개통되었다. 조선시대 영남대로에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 기능을 했다. 문경새재는 산성을 쌓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등 3개의 관문과 국립 여관에 해당하는 원터 등 주요 관방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정자, 주막터, 성황당 그리고 각종 비석 등이 옛길을 따라 남아 있다.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길로서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높은 조선 최고의 옛길이다.
당시 한양 과거보러 가는 길이 3군데 있었는데 추풍령과 이화령, 그리고 조령이 그곳인데 당시 선비들은 주로 이길로 다녔다고 한다(추풍령은 추풍낙옆처럼 떨어진다 해서, 그리고 이화령은 죽죽 미끄러진다고 해서 피하고 이곳 조령만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鳥嶺)',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草岾)',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의 고개', '새(新)로 만든 고개' 등의 뜻이 담겨 있다.
임진왜란 후 세 개의 관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 나그네의 숙소 조령원터, 신길원현감 충렬비, 산불됴심비 등의 유적과 빼어난 자연 경관을 두루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과 신립장군, 새재성황신과 최명길, 문경새재아리랑과 같은 설화와 민요도 널리 전승되고 있다.
1관문을 지나 우측으로 접어드는데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쭉쭉 뻗은 소나무숲길이 정겹다.
무척 맑은 계곡물이 땀을 식혀주는 듯...
사위질빵.
등로는 너덜길로 바뀌고...
여궁폭포.
높이 20여m의 이 폭포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노송의 멋, 기암절벽의 풍치 등과 조화를 이루어 그 경관이 수려하매 옛날 7선녀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곳으로 그 형상이 마치 여인의 하반신과 같다하여 여궁폭포(일명 여심폭포)라 불려지고 있다. 폭포의 소는 파랑소라고 불린다.
폭포를 건너 잠시 내려가는 듯하다 우측으로 돌아 올라가게 된다.
휴계소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류하고 우측으로 올라간다.
수목들을 거느린 우람한 바위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한층 운치를 더해주고...
며칠 전에 비가 내린 덕에 수량도 제법 되고 무척 맑아 바닥이 훤히 보이는데 그냥 뛰어들고싶은 생각이 절로 난다.
혜국사 입구.
우측은 정상 가는 길.
혜국사.
혜국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8년(846)에 보조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당시에는 법흥사라 하였다. 이 절은 현재 조령산성 안에 있다. 고려 말 홍건적의 난 때는 공민왕이 이곳으로 피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청허, 송운, 기허 3대사가 이곳에서 왜란의 위기를 구제할 방책을 세워 나라에 조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찰의 이름을 혜국사라고 바꾸었으며, 명실공히 두각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고종 3년(1866)에 화재로 사찰이 불에 타 없어졌으나, 그 뒤 주승 최송봉이 경상도관찰사 이삼현의 도움을 받아 대웅전과 사찰의 일부를 중건하였다. 1926년 봄에는 주지승 고만허와 김룡사 승려 정문흠의 노력으로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7개월 만에 중건하였다. 현재는 대웅전, 산신각, 관음전, 요사 등이 남아 있다.
정상을 향하여 쉬엄쉬엄 올라간다.
정상 밑의 긴 계단인 줄 알았는데 조금 더 가야 했다.
고추나무.
미나리냉이.
대궐터샘.
물이 무척 시원했다.
정상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계단.
산철쭉이 예쁘게 피었다.
연달래라고도 하던데...
정상 도착.
관봉으로 간 팀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정상에서 바라다 보이는 조망이 그리 좋지 않다.
대미산 방향.
관봉과 백화산.
풀솜대.
그늘사초가 너무 멋있어서...
영봉으로 향한다.
좌측에 월악산, 우측으로 만수봉 그리고 앞에 포암산도 보인다.
영봉.
주봉보다 30m정도 더 높은데 주봉의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벌깨덩굴.
영봉에서 2관문 방향으로 하산을 하는데 내리막길이 꽤 가파르다.
계곡을 만나 잠시 씻고...
마치 주라기시대를 연상케 하는 관중.
꽃밭서덜.
제2관문(조곡관)에서 주흘산 등산로 4km 지점에 위치한 이 곳은 진달래꽃과 문경새재의 토착수종인 물박달나무 군락지로 주변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긴 돌을 세워놓고 그 위에 작고 넓적한 돌을 얹어 소원성취를 기원한 수백개의 돌탑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이 이곳에 돌탑을 쌓아 기원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전해 진다고...
내려가면서 바라 본 부봉의 모습.
수 차례 계곡을 왔다갔다 건너고...
엄청난 바위 위에 어쩌면 이렇게 얌전히 앉아 있을까!
조곡골.
우뚝 선 우람한 바위.
2관문(조곡관)에 도착했다.
사적 제147호인 이 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 선조 25년(1592)에 왜란이 일어난 후에 충주 사람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숙종 34년(1708)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중성을 삼아 관문을 조동문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시설은 그 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편안하게 내려간다.
바닥에 황토와 모래를 깔아놓아 맨발로 다니는 사람도 있다.
조령 산불됴심 표석.
표석의 설치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적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된 순수 한글비석이다. 현재 문화재 위치는 처음 세워질 당시의 장소로 보여지며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산불예방과 주흘산의 자연에 대한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국내에 고어로 된 한글비석은 모두 4점이나 '조령 산불됴심 표석'을 제외하곤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국내 유일의 순수 한글 비석이라 할 수 있다.
꾸구리바위.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있어 바위에 앉아 있으면 물속의 꾸구리가 움직여 바위가 움직였다고 한다. 특히 아가씨나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하였다고 한다.
대하드라마에서 궁예가 마지막을 맞이한 암반.
궁예(870~918)는 신라왕족으로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왕이 되었으며, 911년에 국호를 태봉으로 개칭하면서 연호를 수덕만세라 하였다.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는 등 폭군으로 전락하여 결국 부하 장수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자 쫓겨나 평강에서 피살되었다.
용추.
제1관문과 제2관문 중간 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소를 이루었는데 이를 용추라 한다. 이곳은 새재 옛길의 백미로 꼽히며, 용추 글씨를 새긴 사람은 구지정이다. 구지정은 본이 능성이고, 현종 7년(1666)에 사미시에 급제하였으며 공주와 황주목사를 지냈다. 바위 면에 용추( 龍湫)라는 글씨가 각자되어 있다는데 보이지 않았다.
교귀정(交龜亭)과 소나무.
교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계인수 하던 교인처로 1470년경(성종초)에 건립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3월(건양 1년) 의병전쟁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폐허로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교귀정 소나무는 경상감사 교인식이 이루어진 교귀정의 역사와 함께한 나무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나무의 뿌리가 교귀정 방향인 북쪽으로 뻗어있고 줄기는 길손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남쪽으로 향해 있으며, 마치 여인이 춤을 추는 듯하여 새재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보면 볼수록 특이한 형태와 수형으로 그 신비감을 더해준다.
용추약수.
용추샘은 바닥돌을 파고 깎아 샘을 만든 뒤, 반듯한 천정석과 큰바위를 층층이 쌓아 만들었다. 규모와 형태로 보아 옛 길손은 물론 성내 군사용으로 요긴하게 쓰이던 샘으로 조곡관(제2관문) 축성 당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 강점기에 새재 길을 확장하면서 토석에 묻혀 오랜 세월 세간에 잊혀 있던 것을 2003년 10월 복원하였다고 한다.
현감 이인면의 애휼비와 선정비.
주막.
새재는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던 가장 큰 길로서, 이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던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우리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 잔의 술로써 여독을 풀면서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 가던 곳이다.
문경새재 과거길(옛길).
영남에서 한양을 다닌 수 있는 길은 조령(문경새재)과 죽령 및 추풍령을 경유하는 세 갈래가 있는데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는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왕래하였으며,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기쁜소식을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길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길이다.
일제 말기 왜놈들이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소나무에 낸 상처.
보면 볼수록 속이 상한다.
조령원터(鳥嶺院址).
주흘산 조령관문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위치한 조령원터는 고려와 조선조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이다. 문경새재는 과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던 길목에 위치하여 수 많은 길손들이 오고가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역과 원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새재 내에만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 등 3곳의 원터가 전해지고 있다. 조령원터의 전체면적은 600평이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돌담은 너비 2.8m~3.0m, 높이 2.9m 내외이고, 동쪽 57.6m, 서쪽 53m, 남쪽 38.9m, 북쪽 37.7m의 대칭변 길이가 모두 다른 남북으로 길게 쌓여진 장방형이다. 서쪽 돌담 중간에 문지가 남아 있는데 돌담을 성벽의 육축모양으로 마무리하고 그 사이에 2매의 방형 석주를 문설주로 세웠다. 문경시에서는 조령원터 복원을 위해 1977년과 1997년 2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건물의 터가 두 개 층에 걸쳐 발견되었는데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상단의 건물지에서 고려시대의 온돌유지와 부엌시설 일부가 드러났다. 또한 이를 비롯하여 와편,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철제 화살촉, 마구류 들이 출토되었다.
지름틀바우.
기름을 짜는 도구인 기름틀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지름틀'은 기름틀의 경상도 사투리이다. 참깨, 들깨, 콩 등을 볶아 보자기에 싼 떡밥을 지렛대의 힘으로 눌러서 짠다. 기름틀은 받침틀과 누름틀로 구성되는데 받침틀 위에 볶은 깨를 올려놓고 두터운 누름틀을 덮어 누르면 기름이 흘러내리게 된다.
조산(造山)과 조게정(鳥憩亭).
조산은 말 그대로 인위적으로 조성한 산을 일컫는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공허하거나 취약한 지점에 조산을 만듦으로써 그곳을 보강하고자 하는 의식이 담겨있다. 문경지역에서는 골맥이 서낭당으로 불리며 마을 입구나 경계지점에 세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한 곳이다.
드라마 대조영 촬영세트가 있는 곳.
발 담그는 곳.
산행 또는 트래킹 종료 후 지친 발을 위로 하는 곳.
1관문으로 돌아왔다.
주차장 가는 길.
주차장에 도착하며 산행을 종료한다.
도상거리 16km, 6시간정도 걸렸다.
느긋하게 한 산행이라 그리 힘들지는 않고, 오랜만에 여궁폭포와 혜국사를 둘러 볼 수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아직 활짝 핀 연달래를 비롯 야생화들을 찾아보는 즐거움도 겸했고...
들깨국수 및 수육과 더불어 한 하산주는 산행의 또 하나의 즐거움이 아니랴.
맛집답게 정말 추천할 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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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즈넉한 곳다녀오셨네요~~~~^^
예. 오랜만에 다녀왔는데 꽤 좋았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산행기를 읽다보면 같이 있는듯 합니다
안녕하세요?
골드윈님의 산행 일지도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이제는 장거리가 조금 힘이 드는 것 같아서 절제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건강하십시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맞집 소개 역시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문경세재의 주흘산 더운데 고생하셨습니다!
여름 산행은 항상 힘이 들지요.
산행 거리를 조금 줄여볼까 생각 중입니다.
건강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기행문 잘~ 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정성스레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자주
입구에서 3관문 까지
마라톤 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나서
덕분에
좋은 하루를 시작 합니다 ~^^
3관문까지 거리가 약 6km정도가 되는데 왕복에 시간이 크게 걸리지도 않고 걷기가 좋아서 산책코스로는 멋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