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글을 읽으시고 공감하시며 올려주신 충남 서해안 주변의 방조제와 해안들을 추억하는 2002년에 쓰신 최윤환 님의 글을 읽다가, 공교롭게도 그해 가을 그 지역 가까운 해안에 대해 썼던 글이 떠올라 찾아내서 올려봅니다.
최윤환 님의 고향 사랑과 자연 사랑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 혼자만의 바다> 2002년 10월 10일
한 달쯤 전 출장길이었습니다.
태안을 거쳐 변산반도 꼭대기 부근 학암포 해수욕장 옆에 자리 잡은 태안 화력발전소에 볼일이 있어서 가던 길이었어요.
서해안 고속도로가 생기고 보니 그쪽으로 가는 시간이 예전보다 많이 줄어, 생각보다 시간 반 정도 일찍 목적지 부근에 닿았는데, 사목 해수욕장과 꾸지마을 해수욕장 이정표가 보이더군요. 점심을 먹고도 시간이 남을 것 같아서 핸들을 그쪽으로 꺾었습니다.
먼저 보이는 사목 해수욕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아는 여느 해수욕장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였어요. 민박집도 한 군데밖에 보이지 않고, 해수욕장 앞에 즐비한 횟집이나 상점들은 찾아볼 수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바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죠.
해송 숲 속에 차를 세워두고, 해변을 향해 걸어 나갔습니다. 해송 냄새를 품고 스쳐 지나가는 바다 내음은 말할 수 없이 상큼했습니다.
해송들 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서해안의 여느 바다와는 다르게 파랗게 맑아 보였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해변을 향해 걸어가다 보니, 여름 텐트를 친 자리들이 해송 사이 군데군데 보였고, 해변의 모래와 해안의 땅이 맞닿은 자리에는 바다가 토해놓은 여름철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모여있었습니다. 유일하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광경이었죠.
역시 서해라 조수간만의 차이는 있는 듯 저만치 밀려난 바다가 드러내 놓은 뱃살에는 물결들이 만들어 놓은 잔주름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길게 선을 긋고 있었습니다.
오목한 해안선을 따라 알맞게 펼쳐진 하얀 모래들을 조심조심 지나고, 물결이 닿은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축축한 모래들도 조심조심 지나니, 제 발치에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가 다가와 살랑살랑 춤을 춥니다. 그 바다가 수줍게 내미는 손을 가만히 잡아 봅니다. 물결은 좌르르륵 뒤로 몸을 사렸다가 다시 다가와 손을 내밉니다. 이번에는 제때를 맞추어 그 손을 잡습니다. 시원하고 맑은 손입니다. 파란 몸통에서 내민 투명한 손이었습니다.
고개를 들고 멀리 바다를 바라봅니다. 오목한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파란 수평선은 또 다른 파란 하늘과 분명한 경계를 긋고,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 바다 위에 갈매기 두 마리 끼룩끼룩 날고 있었습니다.
내 작은 눈으로 다 담기엔 너무나 큰 바다.
내 작은 품으로 다 안기에는 너무나 넓은 바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분명 저 자신만의 바다였습니다. 아무도 우리의 수줍은 사랑을 시샘하거나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약속만 없었다면 철벅철벅 걸어 들어가 그 바다의 품 안에 안겨보고 싶었습니다.
다시 사랑하는 이의 부끄러운 배를 밟고 걸어 나왔습니다. 나오다 돌아보니 사랑하는 이는 여전히 작은 물결 연이어 만들며 수줍은 이별을 고하고 있었습니다. 나오면서 보니 우측에 천주교구 사레지오 수련원 입간판이 보였습니다.
'안녕. 곧 다시 오마~' 손짓하며 그곳을 떠났습니다.
지난주 토요일.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놓고 아내와 저는 모처럼의 데이트를 위해 서둘렀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김밥을 상위에 차려두고, 모처럼 둘만의 데이트 길에 올랐습니다. 늘 아이들과 함께였는데 둘이서만 하는 여행이 얼마 만인지 모릅니다. 아내도 들뜬 설렘을 감추려들지 않았습니다.
아직 중1과 초2의 어린아이 둘을 돌보다 보니 병약한 아내가 늘 피곤에 지쳐 보여 마음이 쓰였었는데, 혹 조그마한 위로라도 될까 하여 나만의 바다를 아내에게 보여주기로 작심하고 나선 길이었습니다. 날이 흐린 게 옥의 티였습니다.
가는 도중에 간간이 비도 오긴 했지만 두 시간을 조금 더 걸려 무사히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여전히 혼자인 그 바다는 아내를 데려온 게 못마땅한 듯, 지난번과 같은 맑은 웃음을 건네지는 않았습니다. 약간 찌푸린 채, 흐린 얼굴로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가 거두곤 했습니다.
"아~~ 좋다~~"
해변으로 함께 걸어 나가던 아내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습니다.
"좋지? 정말 좋지? 나만의 바다야~"
아내와 새 사랑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나는 아내의 그 한마디에 갑자기 활기를 되찾고 신이 났습니다. 삐쳐서 지난번보다 저만치 더 물러나 있던 바다도 아내의 탄성에 마음이 풀렸는지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좌르륵... 쏴... 좌르륵 춤추며 손도 내밀었습니다.
수평선도 모호해진 흐린 하늘 아래에서 새 사랑이 추는 춤을 바라보며 우리는 둘의 엉덩이 간신히 걸치고 앉을 앙증맞은 자리 하나 깔았습니다. 저 멀리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 한 쌍 우리더러 이렇게 사랑하라고 본을 보여 줍니다.
자리 위에 나란히 앉아 아내와 나누어 먹는 김밥은, 예전에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아주 특별하고 맛있는 식사가 되었습니다. 물론 식사 후에 나누어 마신 커피도 마찬가지였죠.
아내는 한잔의 커피를 더 따러 마시고, 저는 아이들을 위해 해변 곳곳에 빠꼼빠꼼 집을 짓고 사는 게들을 잡아 빈 병에 담았습니다. 제 아이들과도 우리의 행복을 나누고 싶었던 거죠. 특히 초2의 아들이 기뻐할 얼굴이 떠올라 더 신나게 잡았습니다.
동네 아이들 세 명이 바닷가로 나와 노는 바람에, 기억에 남는 장소에서 멋진 뽀뽀 한번 못하고 돌아서는 아쉬움은 남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둘은 절로 행복해졌습니다. 이 행복의 여운이 오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그 바다는 저 혼자만의 바다가 아닌 우리 둘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2002. 10. 10.
첫댓글
행복해 하시는 두 분의 모습에
글을 읽는 내내 함께 즐거웠습니다.
어린시절, 집은 바다 가까이가 아니었지만,
나의 고향은 부산입니다.
사춘기가 되면서 부모님 없이도 친구들과
바다를 만나는 것은 너무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바다에 나가면, 갯내음이 좋았지요.
넓고 푸른 바닷가로 파도가 몰려오면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를 보면서
가슴이 시원해 짐을 느낍니다.
아득히 멀리 보이는 수평선은 어떻고요.
미지의 어느 곳을 그립게 해 주거던요.
지금은 화려한 곳이 되었지만,
넓고 넓은 해운대 백사장을 잊지 못합니다.
시험 끝난, 하교후는 동무들과 책가방 들고
교복입은 채로 바닷가에서 놀다 오면서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던 그 때가
님의 글을 보면서, 그리워도 합니다.
맨 아랫줄, 혼자만의 바다가 아닌
우리 둘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에
눈이 멈추었습니다.
콩꽃님 고향이 부산이라는 댓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제 어릴 때 외삼촌이 부산 범천동에 사셔서 방학이면 한번씩 들리기도 했고, 군 생활을 부산여대 밑 연산동에서 해서 부산은 아주 친숙한 곳이었지요. 수송부대 경리계를 했었는데 웃기는 일이 많았어요. 그 당시 군 하사관과 장교들 봉급이 전산으로 통장에 직접 들어갔는데, 그런 상황이 적응이 안된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저보고 그 봉급들을 다 찾아와 예전처럼 월급봉투에 넣어달라 했어요. ㅎㅎ 이 은행 저 은행에서 돈을 찾아 부대로 돌아올 때는 군용짚차를 타고 멀지않은 옛 해운대나 광안리 해변을 돌아서 오기도 했지요. ㅎㅎ.
부산에서 제가 제일 좋아했던 곳은 옛 태종대였고, 자살바위 옆 조약돌 해변에 앉자있다 오는 것을 참 즐겨 했었습니다.
그때가 많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