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琵琶行/白居易 朴今玉讲解
오늘은 큰 도전이라고 할 수 있는 88구절을 가진 <비파행>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외우고 기억하려 하진 마시고요.
사실 많이 인용하는 부분은 몇 군데 이기에 그 부분만 잘 익히셔도 얼마든지 이 시의 혼백을 잘 장악하셨다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많이 인용하고 감명을 주는 내용입니다
설명
1) 左迁:폄관(贬官), 강등됨. 아래 문장의 강직(迁谪)과 같은 의미. 옛날 사람들은 우측을 존중하고 좌측을 비천하다 하여 강직(降职)을 좌천(左迁)이라 함.
2) 铮铮:쟁쟁, 금속이나 옥기 등이 서로 부딛치는 소리. 京都声:당나라 경성에서 유행하는 악곡의 성조.
3) 倡女:가녀(歌女), 倡,옛날 춤, 노래하는 예술인(艺人).
4) 善才:당시에 비파 치는 사람(琵琶师)이나 혹은 악사(曲师)에 대한 통칭. ‘능수’라는 의미.
5) 委身:몸을 의탁하다. 여기에서는 시집간다는 의미. 为:하다. 贾(gǔ)人:상인
6) 命酒:하인(手下人)을 불러 술상을 차리게 하다.
7) 快:통쾌하다.
8) 漂(piāo)沦:떠돌아 다니고 쇠락하다.
9) 出官:경성의 관원(京官)이 타지로 전임하다.
10) 恬然:조용하고 담담한 모양.
11) 迁谪(zhé):관직이 강등되거나 유배되다.
12) 为(wéi):창작. 长句:칠언시를 의미한다
13) 歌:노래를 하다. 동사.
14) 凡:도합. 六百一十二:응당 “616”의 오류일 것임. 言:자.
15) 命:명명하다. 표제를 붙이다.
16) 浔阳江:고증(考证)한 바에 의하면 浔阳城을 흘러지나는 湓水이며 오늘의 장시성(今江西省) 구강시(九江市) 중의 용개하(龙开河, 이미 인공으로 매립됨)이며 湓浦口를 통해 장강(长江)에 흘러 들어간다.
17) 荻(dí)花:다녕생 초본식물이며 물가에 자라고 잎은 긴 모양이며 갈대(芦苇)와 비슷하며 가을에는 보라빛 꽃이 핀다. 瑟瑟:단풍나무, 노적(芦荻)이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의미.
18) 主人:시인 자신을 의미.
19) 回灯:다시 불빛을 돋우어 밝히다. “移灯”이라고도 함.
20) 掩抑:가리다(掩蔽),억압하다(遏抑). 思:슬픔의 감정.
21) 信手:손 가는 대로 하다. 续续弹:연속적으로 연주하다.
22) 拢:왼손 손가락으로 현을 누르고 안쪽으로(비파의 중부) 밀다. 捻(niǎn):현을 비비는 동작. 抹:아래로 튀기는 동작. 挑:뒤집어 다시 악기를 타다.
23) 霓裳(cháng):곡명,즉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임. 원래는 서역의 음악이었으나당 개원년간에 서량 절도사(西凉节度使) 杨敬述이 창작후 중원에 흘러들어옴. 六幺:대곡명,《乐世》, 《绿腰》, 《录要》이라고도 함. 가무곡(歌舞曲)임.
24) 大弦:비파위의 제일 굵은 현. 嘈嘈:소리가 무겁고 기복이 있다.
25) 小弦:비파위의 제일 가는 현. 切切:소리가 급촉하고 낮고 깨어진 듯 함.
26) 间关:의성어,여기서는 앵어(莺语, 새소리의 구성짐)를 말한다.
27) 幽咽:막혀서 통쾌하지 않다. 冰下难:샘물의 흐름이 얼음아래에서 막혀서 통하지 않음. 음악의 소리가 원활하다가 냉담하고 생기 없게 변함을 의미. 难,미끌림과 상대적으로 막힘을 의미. 수하탄(水下滩)이라고도 함.
28) 凝绝:굳어지다. 凝,“疑”라기도 한다.
29) 暗恨:마음속의 원한.
30) 迸:흩뿌려지다.
31) 曲终:악곡이 끝나다. 当心画:拔子로 비파의 중부 네개의 현을 긋는 것을 의미. 한 곡이 끝났을 때 자주 오른손으로 사용하는 기법임.
32) 帛:옛날에 견직물에 대한 총칭(总称)
33) 船:“舟”라고도 함. 舫:배.
34) 敛容:심사숙고시 슬픔과 분노와 깊은 한이 맺힌 얼굴 표정을 수렴(收敛,)하다
35) 虾(há)蟆陵:“虾”는 “蛤”와 통한다. 장안성(长安城) 동남쪽 곡강(曲江) 근처인데 그때 당시는 유명한 행락지역이었음.
36) 教坊:당나라 시 궁정악대를 관리하는 관청(官署). 第一部: 제1팀, 제1대대라고 말하는 것과 같음. 현재 탤런트를 말할 때 A급이라 하는 것과 같음.
37) 秋娘:당나라 때 가무기생들이 자주 사용하는 이름. 일반적으로 미모에 예술성이 높은 가희(歌伎)를 지칭.
38) 五陵:장안성 밖에 있으며 长陵, 安陵, 阳陵, 茂陵, 平陵 다섯 개 한나라 황제의 능묘를 의미. 당시 부자들이 사는 곳임. 缠头:비단 등의 재물로 기생에게 선물하다.옛날에 기생에게 상으로 주는 재물. 당나라에서는 帛을 사용했고 후세에는 기타 재물을 이용.
39) 绡:가볍고 아름다운 견직물. 红绡:일종의 생견직물.
40) 钿(diàn)头:양쪽에 금장식을 붙인 장식용 빗. 银篦(bì):“云篦”이라고도 함. 금이나 비취, 기타 각종 보석으로 꾸민 장신구. 击节:박자를 치다. 춤추고 노래할 때 박자를 치는데 이때 목제나 혹은 대나무로 만든 나무 판자를 사용.
41) 等闲:마음대로, 중시하지 않다.
42) 颜色故:용모가 쇠잔하다(늙다).
43) 浮梁:옛 현명(县名),당에 속하는 饶州가 다스리는 지역이었음. 지금의 장시성(今江西省) 경덕진시(景德镇市)에 속하며 찻잎이 많이 난다.
44) 去来:이별후. 来,어조사.
45) 梦啼妆泪:꿈에서 울고 분을 고르게 바른 얼굴에 눈물자국이 나다. “啼妆泪落”이라고도 한다. 红阑干:눈물이 연지와 분과 함께 얼굴에서 흐르는 모양.
46) 重:다시. 唧唧:한탄하는 소리.
47) 终岁:일년내내
48) 旦暮:조만간.
49) 呕哑:의성어,단조로운 음악의 소리를 의미. 嘲(zhāo)哳(zhā):소리가 번잡함을 의미. ‘啁哳’[zhāozhā]라고도 함.
50) 琵琶语:비파 소리,비파가 연주한 악곡(乐曲)
51) 暂:갑자기,한꺼번에
52) 却坐:원래 있던 곳으로 물러나다. 促弦:현을 팽팽하게 비틀다.
53) 向前声:금방 연주했던 단조(单调)
54) 掩泣:얼굴을 가리고 울다.
55) 青衫:당나라 8품, 9품 문관의 복색. 백거이의 당시 관직은 9품이어서 청색 관복을 입었음.
번역문
815년(원화 10년)에 나는 九江郡司马로 강등되었다. 이듬해의 가을의 어느날, 湓浦口에서 손님을 바래다가 밤에 배위에서 누군가가 비파를 타는 것을 들었다. 그 소리를 들으니 쟁쟁하고 쨍강쨍강 하는 것이 경성에서 유행하는 곡조였다. 이 사람에 대해 물어보니 원래는 장안의 가녀(가수)였고 穆, 曹 두명의 비파 대가를 모시고 배웠다. 후에 나이가 많아지면서 미모가 쇠잔해지고 상인(장사꾼)에게 시집을 갔다. 그래서 술상을 차리라 명하고 통쾌하게 몇 곡 연주하라고 했다. 다 연주하고 나서 어느 정도 울적해 하면서 본인의 어린 시절 즐거운 일과 지금은 떠돌아 다니고 기색이 초췌하며 세상에서 여기저기 유랑한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경성을 떠나 타지에 임직한 2년이래 주어진 상황에서 잘 적응하며 스스로 그 중에서 기쁨을 만끽했다. 지금은 이 사람의 말에 감명을 받아 이 날 저녁에야 강등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긴 한 수의 시를 써서 그녀에게 증정하는데 도합 612자이며 제목은 <비파행>이다.
가을의 저녁에 나는 浔阳江에 돌아가는 손님 바래러 왔는데
단풍나무와 갈대꽃에 추운 바람이 불면서 가을의 소리가 덜덜 떨게 한다.
나와 손님은 말에서 내려 배 위에서 이별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고
술잔을 들어 마셨으나 흥을 돋우어주는 음악이 없다.
술을 통쾌하게 마시지 못하고 이별할 것을 생각하니 더욱 상심했는데
이별할 즈음에 밤은 아득하고 강물엔 명월이 거꾸로 비춰져 있다
갑자기 강 위에서 비파의 쟁쟁한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돌아감을 잊었고 손님도 출발하려고 하지 않았다
소리를 따라 비파 타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비파소리는 멈춰지고 오래동안 기척이 없었다
우리는 배를 이동시켜 그녀가 나와 만나기를 요청했고
하인에게 술을 추가하고 불을 다시 돋우고 술자리를 다시 벌여 놓았다
천만번 불러서야 천천히 걸어 나왔고
품에는 비파를 안고 절반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현을 몇번 뜯어 보면서 시험을 해 보는데
아직 곡조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그 모습으로만도 이미 아주 정이 넘쳤다
현마다 애처롭고 슬픈 소리가 깊은 그리움을 내포하고 울렸고
그녀의 평생동안 뜻을 펼치지 못함을 하소연하는 듯 했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알아서 연속적으로 몇 곡 끊임없이 연주했고
악기의 소리로 마음속의 무한한 옛일을 다 쏟아내였다
가볍게 어루만지고 천천히 문지르고 비비고 위로 들어 올리며
처음에는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타다가 이어서 다시 육요(六幺)를 타니
큰 현은 웅장하고 소리가 오래 가며 조조(嘈嘈)하는 소리가 폭풍우 같으며
작은 현은 천천히 가는 소리가 나면서 절절(切切)하기를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다
조조하는 소리와 절절하는 소리가 서로 뒤섞여 연주되니
큰 진주알과 작은 진주알이 하나하나 옥쟁반에 떨어지는 듯하다
청아하기를 꾀꼬리가 꽃숲에서 구성지게 노래하는 듯 하고
유유함은 맑은 샘물이 모래톱 아래에서 흐르는 것 같다.
샘물이 차고 막히는 듯이 비파소리가 응결되더니
응결되고 막힘없는 소리가 점점 중단된다.
다른 일종의 애수의 한이 암암리에 서리더니
이때에는 묵묵하게 소리가 없는 것이 소리가 있는 것보다 더 심금을 울린다
갑자기 은병이 깨지고 물이 사방으로 튀는 듯 하더니
또 철갑기병이 서로 싸우고 칼과 창이 함께 우는 듯 하다
한 곡조가 끝나고 그녀가 현 중간을 그으니
네개의 현은 굉음을 내면서 포백이 찢어 지는 듯하다
여러 배의 사람들이 다 조용하게 들으니
강물위에만 하얀 가을의 달빛 그림자가 떠있다.
그녀는 망설이면서 현 가운데 拨片을 꼽아 놓고
의상을 정리하면서 여전히 정중한 용모를 보인다
그녀는 원래 경성의 명성이 있는 가녀(가수)라고 하며
고향은 장안성 동남쪽의 虾蟆陵이라 한다
비파를 연주하는 기법은 13세에 이미 다 배웠고
교방 악단중 제1팀에는 이미 내 이름이 있었다
연주하는 곡마다 예술대가들을 탄복하게 하고
매번 화장을 다하고 나면 같은 업계 가녀(歌妓)들의 질투를 자아냈다
경성의 부자집 자제들도 앞을 다투어 선물을 주었고
한 곡 끝내면 받아온 홍초(红绡)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금장식을 한 은빗으로 박자를 치다가 자주 끊어지고 깨어지며
붉은 비단 치마에 술 흔적이 남아있어도 후회하지 않는다
한해 또 한해 즐거움속에 지내다가
가을이 가고 봄이 오면서 아름다운 시절을 헛되이 소모했다
형제는 군대에 갔고 자매는 죽었고 집안은 이미 쇠락했으며
저녁이 가고 아침이 오니 나도 점점 나이 들고 색은 쇠해졌다
문앞에 마차는 줄어들고 손님은 있을락 말락해지고
청춘은 이미 가고 나는 상인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다
상인은 이익을 중요시하고 정을 중하게 여기지 안ㄶ아 쉽게 이별을 하니
저번 달에 浮梁에 찻잎 장사를 하러 갔다
그는 가고 나를 홀로 강에 남겨두니 혼자 빈 배를 지키고 있다
가을 달빛은 나와 함께 하며 배를 감도는 가을의 물은 차갑기만 하다
밤이 깊어질 때면 소년시대에 즐기던 시절을 꿈꾼다
꿈속에서 울다가 깨어나 눈물이 화장을 한 얼굴을 어지럽힌다
나는 비파의 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이미 머리를 흔들며 탄식했는데
또 그녀의 이러한 하소연을 들으니 더더욱 처량해진다
우리 둘은 모두 하늘아래의 윤락한 슬픈 사람이거늘
오늘 만났으면 예전에 서로 알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작년에 번화한 장안성을 떠나고 나서
강등되고나서 浔阳강가에서 자주 병으로 드러 누워있다
浔阳 이 지역은 황량하고 외딴 곳이라 음악이 없으며
일년내내 관현의 악기소리를 듣지 못한다
湓江이라는 습한 저지대에 살고 있으려면
가옥 주변에 갈대와 고죽(苦竹)이 에워싸고 무더기로 자라있다
여기에서 아침저녁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두견새와 원숭이의 처량한 울음소리 뿐이다
봄 강변의 꽃과 가을 강의 달밝은 밤과 같은 그런 좋은 풍경이라도
어쩔 수 없이 술을 가져와 혼자 마신다.
여기는 산가(山歌)나 마을의 피리소리(村笛)는 없단 말인가?
단지 그 소리는 조잡하고 갈린 듯 해 정말 듣기 싫다
오늘 저녁 나는 그대가 비파를 연주하면서 마음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말을 듣고
신선의 음악을 들은 것처럼 눈도 밝아지고 귀도 밝아진다
거절하지 말고 앉아서 다시 한 곡 연주해 주시오
나는 그대를 위해 새로운 시 <비파행> 한 수를 지어 드리리다
나의 말에 감동을 받고 그녀는 오래동안 서 있더니
다시 돌아앉아 현을 팽팽히 가다듬으며 급한 소리를 튕긴다
애절한 소리가 금방 그러한 소리 같지 않고
앉아 있던 사람들은 다시 들으면서 얼굴을 가리고 울기를 그치지 않는다
앉아있는 사람중에 그 누가 흘린 눈물이 제일 많은지 물어본다면
나 강주사마(江州司马)의 눈물이 청색 옷을 다 적셨다고만 말하련다.
작품소개
장편서사시. 이 시는 비파를 치는 여인의 높은 연주기교와 불행한 경력의 서술로 봉건사회 관료의 부패, 민생의 어려움, 인재의 매몰 등 불합리현상을 폭로했으며 시인이 여인에 대한 깊은 동정을 나타냈으며 동시에 무고하게 강등당한 시인의 불만도 토로함. 서사와 서정을 긴밀하게 결합시켜 선명한 인물형상을 부각해 냈으며 언어가 아름답고 조화로움. 특히 비파의 연주에 대한 비유는 사실에 가깝고 선명한 음악형상을 드러냄.
작품분류: 칠언가행(七言歌行)
* 칠언가행(七言歌行)
고대 악부에서 나옴. 첫 창작은 위문제(魏文帝) 조비(曹丕)의 《燕歌行》임. 당나라 때에 흥성해짐. 시가중 “歌” 혹은 “行”이라 불리는 작품은 곡조를 붙여 노래할 수 있는 시가형태임. 일반적으로 글자 수는 확정되지 않고 매구절도 고정적이지 않음. 삼언, 오언 구절도 있으나 주로 칠언을 위주로 함.
백거이 白居易
(772-846년, 74세), 원적지는 산시성 태원(山西太原)이고 헌난성(河南新郑)에서
태어남. 당대 3대 시인중의 한 사람, 元禛과
함께 산악부운동(新乐府运动)을 선도함.
772년 중소관료 가정에서 태어남. 태어난지 얼마 안 돼 전쟁이 일어남. 9살 쯤 하여 숙주(宿州)로 이사함. 총명하고 글 읽기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입구창이 나고 손에 굳은살이 생기며 젊은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다 될 정도로 열심이었다 함. 35세에 진사시험관(进士考官)으로 임명되고 한림학사(翰林学士)로 수여됨. 36세에 좌습유(左拾遗)로 임명됨. 백거이는 문학을 좋아하는 황제의 발탁을 받았다고 여겨 언관의 직책(言官之职责)을 다해 보답하려 해 빈번하게 상서를 올림. 또한 대량으로 사회현실을 반영한 시가를 써서 시사정치에 대한 보조역할을 하려고 함. 심지어 황제의 실수를 당면에 지적하기도 함. 백거이의 상서문이 많은 부분 받아들여 졌으나 직선적이라 당헌종(唐宪宗)이 불쾌해 다른 관료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함.
43세때 승상이 자객을 만나 사망했는데 백거이는 엄하게 살인자를 다스려야 한다 상서를 올렸는데 월권행위로 여겨고 후에 헐뜯음을 당했음. 게다가 어머니가 꽃구경을 하다가 우물에 빠져 돌아가셨는데 백거이의 시문에 ‘꽃구경’, ‘새 우물’ 이라는 내용이 있어 유교의 명분에 해롭다고 여겨짐. 이러한 이유들로 장시성 강주(江州, 오늘의 江西九江)사마(司马)로 강등됨. 강등된 이유는 아무래도 풍자하는 작품을 써서 기득권자들을 득죄한 가능성이 높음.
그 후 그의 성향은 점점 자기 혼만의 선을 꾀하고(独善其身) 백성에게 관심 가지는 마음은 있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서는 옛날의 불꽃을 찾아볼 수 없었음.
50세때 항주자사(杭州刺史)로 있을 때 여섯 개의 우물이 오래돼 수리복구가 필요했음. 이것으로 항주사람들의 물 마시는 문제 해결. 서호(西湖)의 진흙으로 인한 막힘현상을 해결하고 주의사항을 적어두어 항주의 호수를 치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침. 떠나기 전에 어느 정도의 관봉(官俸)을 치수기금으로 남겨두어 항주의 관원들이 우선 자금집행을 하고 다시 채워넣고 했음.
비피행 《琵琶行》과 장한가《长恨歌》는 제일 성공적인 작품임. 예술적 표현의 돌출된 특점이라면 서정요소의 강화임. 비록 서술, 묘사로 사건을 표현했지만 사건을 간사화해서 표현했고 하나의 중심사건과 두세명의 주요 인물로 전편을 구조화했음.
기생을 기르고 즐기는 풍속은 동진(东晋)시대에 시작해 당나라 때에는 비교적 보편적이었음. 인생의 번뇌를 씻어내리기 위해 백거이는 기생과 시와 술로 방종하며 즐겼는데 그의 시에서 유명한 기생은 10여명이 됨. 60여세때 반신마비가 되어 좋은 말을 팔아 노래를 제일 잘하는 기생 樊素를 떠나도록 해서 시집가도록 함. 樊素는 가지 않겠다고 거절했으나 70세 때에 춤을 제일 잘 추는 기생 小蛮과 함께 떠남.
만년에 궁하면 자기만의 선을 꾀하는(穷则独善其身) 인생철학을 관철했음.
대표작: 장한가《长恨歌》, 《卖炭翁》, 비파행 《琵琶行》 등.
작품감상
<비파행>의 내용은 부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장안에서 구강으로 강등된 기간에 배에서 장안의 기녀가 연주하는 비파 음악을 들으면서 신세를 하소연하는 상황을 적었다. 서사장시로서 구조가 엄밀하고 줄거리가 곡절이 많고 파란만장하다.
첫 부분에서 저녁에 강가에서 손님을 바래다가 ‘비파를 안고 절반 얼굴을 가린’ 모습까지는 이별연에서 음악이 없는 유감을 드러냈다. 상인의 아내에게 비파연주를 부탁하고 비파음악의 소리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비파녀의 이미지를 생동하게 부각했다. “枫叶荻花秋瑟瑟”라는 구절에서는 분위기를 조성해 가을저녁에 손님을 바래주는 소슬하고 외로운 느낌을 두드러지게 했다. 이런 분위기여야 술잔을 들어 마시려 하는데 음악이 없는 유감이 더욱 강조되는 거다. 음악이 없음(无管弦)이 뒤의 일년내내 음악을 들을 수 없음(终岁不闻丝竹声)과 호응을 하면서 비파녀의 나타남과 비파 연주에 복선을 깔아놓는다. 음악이 없음으로 취해서 즐기지 못하고 참담하게 이별을 해야 하는(醉不成欢惨将别) 결과로 이어지는데 복선은 이미 아주유력해진다. 게다가 이별은 망망하고 강물이 달을 적시는(别时茫茫江浸月) 데에서 진일보의 분위기 조성을 해 강렬한 압박감을 구성한다. 그런데 갑자기 물 위에서 비파소리가 들리니(忽闻水上琵琶声) 이 소리는 빈 골자끼에 퍼지는 소리처럼 아래의 문장에 전환점을 준비해준다. 이런 우여곡적이 있기에 비파녀는 불런기 위한 천번만번의 부름(千呼万唤)이 있을 수 있다. 요청해 만나려 하지만(邀相见) 그리 쉬운 일은 아니고 천만번 불러야 겨우 나오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세상에서 윤락한 한이 있는 사람으로 대놓고 말하기 어렵고 사람을 만나기도 원하지 않는 모습을 시인을 꽉 잡고 비파소리는 멈췄으나 말하려 하나 말이 나오지 않고(琵琶声停欲语迟) 여전히 비파를 안고 절반 얼굴을 가린(犹抱琵琶半遮面) 인물에 대한 묘사로 그녀의 말하기 어려운 아픔을 표현했다. 이 비파녀가 나타나는 과정의 묘사는 생생하며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먼저 비파 소리가 들렸고 그녀가 말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이미 마음속의 숨겨진 아픔을 어느정도 보인 점은 뒤의 이야기 발전을 위해 많은 서스펜스를 조성해준다.
제2부분은 현을 두세번 타는(转轴拨弦三两声) 부분에서 부터 단지 강물에 가을 달빛의 으스름한 그림자만 보이는(唯见江心秋月白) 부분까지이다. 여기서는 비파녀 및 연주한 비파곡을 쓰고 있다. 구체적이고 생동하게 비파녀의 심리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우선 곡조가 이뤄지지도 않았는데 이미 정을 느끼게 하는(未成曲调先有情) 부분에서 ‘정(情)’을 돌출히 했다. 아래 여섯 구절은 처음에는 霓裳곡을 타다가 후에 六幺곡을 연주하는 과정을 쓰면서 연주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특히 평생의 뜻을 이루지 못함을 하소연(似诉平生不得志)하는 부분과 마음속 무한한 일을 다 말하는(说尽心中无限事) 부분은 비파녀가 음악을 빌어 사상감정을 토로하는 것을 개괄했다. 이후의 열네 구절은 언어의 음운으로 음악을 묘사하면서 각종 생동한 비유로 그 형상성을 강화했다. 급하게 내리는 비소리로 형상화했고 진주가 옥쟁반에 떨어지는 청아한 소리를 듣는 듯하며 시각적 형상도 부각해 눈부시고 귀는 호강을 끊임없이 하는 듯 한 상상에 빠지게 한다. 또한 소리는 매끄럽게 진행되다가 막히는 듯한 소리로 엇바뀌며 나타나고 목이 메인 듯 꽉 막히다가 뻥 뚫리기도 한다. 소리가 점차 작아지다가 완전히 없어지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소리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낫다(此时无声胜有声)고 하며 여운이 마음속에 남아있는 시간과 공간의 비여있음에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여기까지 연주하니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무궁한 힘을 모았다가 은병이 깨지는 듯하고 물이 세차게 흐르는 듯하고 철갑기병이 갑자기 나타나는 듯, 칼과 창이 큰 소리를 내는 듯 응결됐던 소리가 갑자기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한 곡조가 끝났으나 깊은 여운이 오장육부를 감돌고 혼을 쏙 빼놓는 음악적 매력은 결코 가시어 지지 않는다. 시인은 여기저기 배들에서 아무 말 없고(东船西舫悄无言) 단지 강물에 가을 달빛만이 으스름하게 비추(唯见江心秋月白)는 환경묘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무한 되새김의 공간을 남겨놓는다. 그 어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에서 李白도 《黄鹤楼送孟浩然之广陵》에서 친구를 떠나 보내고 슬프고 아픈 마음을 단지 장강만 하늘가로 흘러간다(唯见长江天际流)로 표현했고 辛弃疾도 《书博山道中壁》에서 말하려다 말고 갑자기 뜬금없이 날씨가 선선하니 참으로 가을이 좋구나(欲说还休,却道天凉好个秋) 하는 생판 다른 이야기로 슬픈 감정을 애써 새겨보려 했다.
제3부분은 비파녀의 신세를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소녀로부터 상인의 아내까지 된 경력을 서술했다. 여기서는 비파녀가 말하려 하나 머뭇거리는 내면의 모순을 그리면서 옷깃을 여미거나 얼굴표정을 가다듬는 일련의 동작과 표정을 통해 모순을 극복하고 말이라도 시원스럽게 하려는 심리를 표현했다. 비파녀의 지난 반평생을 한 곡의 심금을 울리는 슬픈 노래(悲歌)로 만들었으며 여주인공의 형상을 부각해냈다. 이미 형상은 생동하고 진실하며 고도의 전형성을 띤다. 이 형상을 통해 봉건사회에서 모욕당하고 손해를 입은 기녀들, 예술인(艺人)들의 비참한 운명을 드러냈다.
제4부분은 마지막 구절까지 시인의 감개무량함을 적으면서 비파녀와의 동병상련의 정을 토로했다. 시인은 비파녀의 운명에서 야기된 감정의 파도로부터 자아형상을 드러냈다. 작년에 황제가 있는 경성을 떠나 浔阳城에 병으로 드러 누워 있었는데 폭정을 없애고 인정을 펼칠 것을 요구하다가 타격을 받고 장안에서 구강(九江)으로 강등되어 굉장히 고통스러워 했다. 비파녀가 애원의 악곡을 통해 마음속 이야기를 드러낼 때 이미 그의 심금은 울리기 시작했고 깊고 긴 탄식소리를 내었다. 신세한탄을 하며 눈물이 얼굴의 화장을 어지럽혔을 때에는 더더욱 감정의 공명을 자아냈고 결국은 클라이막스인 같은 하늘아래 윤락한 사람이거늘 만나면 무엇하려 예전에 알았어야 했겠는가(同是天涯沦落人,相逢何必曾相识) 라는 소리를 낸다. 동병상련하면서 본인이 당했던 일들을 쏟아낸다. 비파녀의 신세는 예전 것은 상세하고 현재의 것은 간략하나 본인의 처지는 강등된 이전의 일을 아예 언급하지도 않는다. 비파녀가 예전에 경성에서 질투를 당했을 만큼 잘 나가던 시절은 시인이 강등되기 전 상황과 비슷한 면이 있다. 마찬가지로 강등된 이후의 처지는 비파녀가 상인의 아내로 시집간 이후의 처지와 역시 유사한 면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하늘아래 윤락한 사람이라는 탄식소리가 나올 수 없다. 시인의 하소연은 다시 비파녀에게 되돌아가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은 더더욱 애간장이 터지게 해 다시 시인의 감정을 북돋아주었고 결국은 눈물이 터져 옷섶을 다 적시게 되었다.
이는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현실주의 걸작으로서 인물은 실마리로 비파녀의 신세도 쓰고 시인의 감수도 썼다. 그 다음 “同是天涯沦落人”이라는 두 구절에서 만난다. 예술인인 가녀의 비참한 처지는 구체적으로 썼고 이는 밝은 실마리(明线)이다. 시인의 감정은 구구절절에 스며들어 비파녀의 곡과 신세의 변화와 함께 넘실거리는 파도를 일으키는데 이는 숨은 실마리(暗线)라 할 수 있다. 이 드러난 실마리와 숨겨진 실마리는 허허실실하면서 줄거리의 기복을 만들어낸다. 그가 서술해 낸 이야기는 곡절이 많고 감동적이며 토로한 정감은 사람의 공명을 자아내고 언어는 아름다우면서도 실속이 있고 화려하지 않다. 내용은 삶에 가까우면서도 광활한 사회성을 가져 우아한 사람이나 저속한 속인이 모두 감상할 만하다(雅俗共赏).
창작배경
당헌종(唐宪宗) 원화 10년(元和十年, 815년)에 당나라 번진세력이 자객을 보내 장안거리에서 재상 武元衡을 사망하게 함. 백거이는 이때 상소를 해서 엄격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직분을 월권했다는 혐의에 평소에 풍자야유시를 많이 썻다는 이유로 권력자들을 득죄해 강주사마(江州司马)로 강등됨. 사마는 자사(刺史)의 어시스턴트임. 중당시기에는 전문적으로 ‘범죄’한 관원을 안치(安置)했는데 이는 변형된 귀양살이었다. 이 일은 백거이한테 아주 큰 영향을 끼쳤고 그의 사상변화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조기에 투쟁하려던 날카로움은 점차 무디어지고 소극적인 정서가 점차 많아졌다. 816년 가을 백거이는 浔阳江에서 손님을 바래 주었는데 우연히 비파 치는 장안 기녀를 만나 이것을 주제로 서사시 <비파행>을 창작했다.
* 신악부운동(新乐府运动) the new yuefu movement
시가의 혁신운동. 당나라 시인 白居易, 元稹, 张籍, 李绅 등이 선도. 고대의 采诗制度를 회복하고 《诗经》과 한위악부의 시사를 풍유(讽喻时事)하는 전통을 빛내고 시가로 하여금 시사정치를 보조하고 감찰(补察时政)하는 역할을 하며 인정을 인도(泄导人情)하며 새로운 악부 제목으로 시사를 쓸 것을 강조함. 신악부는 고대악부에 상대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붙여진 것임. 신악부라 함은 당나라의 새로운 노래라 생각하면 됨.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생각에 새롭게 노래 곡조를 만든 것.
* 한림학사(翰林学士)
고대 관직명. 학사는 남북조에 설립되기 시작. 당나라 초기에는 조서 초안을 스는 사람으로 명칭이 따로 없었음. 당현종(唐玄宗) 때 한림학사는 황제의 심복이 되었으며 자주 재상으로 승진하기도 함.
* 좌습유(左拾遗)
고대 관직이름. 주로 황제가 누락한 것(정책의 결정에 관련된 실수)을 줍고 직간(谏诤)기구(사간원 (司諫院))에 귀속이 됨. 급여를 지급하고 간의대부(谏议大夫), 습유(拾遗), 보궐(补阙), 정언(正言), 사간(司谏) 등이라 직급이 나뉘어져 있었음. 감사원과 유사함. 백거이, 두보는 좌습유를 한 적 있음. 좌는 우보다 큰 편임. 당송시기에 좌관은 우관에 비해 높음. 그때의 좌우대신(仆射 [púyè]), 좌우승상, 좌우승은 모두 좌관이 더 높다. 품계(官阶)는 7, 8품임.
* 사마(司马)
고대 관직 이름. 말은 중국 고대 전쟁중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 춘추이전의 직업화군대는 주로 귀족출신의 자제들로 구성됨. 전쟁방식은 전차의 대열 대 대열 사이의 돌격이었고 고대의 전차는 말이 끌기에 말의 지위가 중요한 것임. 어느 나라 군사력이 강성함을 나타내려면 천승지국(千乘之国), 만승지국(万乘之国) 등으로 불렸는데 이러한 관계때문에 사마는 사실 전문적으로 말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아주 중요한 군대의 직무였다.
정치중심에서의 사마
은나라 때부터 설치하기 시작. 위치는 三公 다음임. 6경(六卿)에 상당한데,사도(司徒),사공(司空), 사사(司士), 사구(司寇)와 함께 5관(五官)이라 불림. 军政과 军赋를 장악. 춘추전국시는 그대로 따라서 시행. 한무제 때에 대사마(大司马)를 설치,대장군의 별칭으로 사용. 후에 표기장군(骠骑将军)에 이 명칭을 사용,수당이후에는 병부상서(兵部尚书)의 별칭으로 사용.
* 표기장군(骠骑将军)
(piào qí jiāng jūn), 한무제 때인 BC121년에 설치하기 시작. 霍去病장군부터 金印紫绶, 위치는 3공과 같음. 후한 때에는 때로는 ‘대’자를 추가하기도 함. 표기장군은 2품 혹은 종1품이었고 일반적으로 대장군보다 낮음.
* 삼공(三公)
중국 진나라에서 지위가 제일 존귀한 세 관직의 합칭. 진나라 이후는 대부분 명의상 관직이었음. 주나라대 이미 이 명칭이 존재. 《尚书大传》, 《礼记》에서 삼공은 사마(司马), 사도(司徒), 사공(司空)임. 《周礼》에서는 태사(太师), 태부(太傅), 태보(太保)라 여김.
* 자사(刺史)
자(刺)는 점검하고 일에 대해 물어본다는 의미. 즉 감찰의 직무. 사(史)는 어사(御史)라는 의미. 진나라의 제도, 군마다 어사를 두고 감찰의 직분을 감당하며 감어사(监御史)라 부름. 한나라 초기에 다시 설치. 한무제 원봉 5년(BC105년)에 전국을 13개 주로 나누고 각 주에 자사 한명을 두었다. 당나라 때에 군(郡)을 주(州)로 바꾸고 태수(太守)를 자사(刺史)로 변경하였다. 현대 중국으로 말하면 성장(省長)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 达则兼济天下,穷则独善其身
출처: 《孟子》의 《尽心章句上》(第九), 원래의 구절은 “穷则独善其身,达则兼善天下”이며 의미는 뜻을 이루지 못할 때에는 본인의 도덕수양을 잘 쌓아야 하며 뜻을 이뤘을 때에는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
역사적 배경
772년은 당나라 여덟 번째 황제인 당대종(唐代宗)이 다스린지 10년 되던 해였음. 백거이가 7세때 당대종이 붕어.
780년에 당나라 아홉 번째 황제인 당덕종(唐德宗)이 등극해 805년까지 통치.
805년에 당나라 열 번째 황제 당순종(唐顺宗)이 등극했으나 변법을 함으로 환관과 절도사의 이익을 건드려 압박에 의해 태자에게 선위(禅位)함.
805년에 당나라 열한 번째 황제 당헌종(唐宪宗)이 등극. 820년까지 통치. 백거이가 33세때는 당헌종 통치시기가 시작되는 해이며 48세까지 통치.
820년에 당나라 열두 번째 황제 당목종(唐穆宗)이 등극해 4년 통치. 백거이가 52세 될 때까지 통치.
824년에 당나라 열세 번째 황제 당경종(唐敬宗)이 등극해 826년에 환관 등에게 사살당함. 백거이는 54세.
826년 12월에 당나라 열네 번째 황제 당문종(唐文宗)이 등극. 840년에 우울증으로 붕어. 백거이는 68세.
840년에 당나라 열다섯 번째 황제 당무종(唐武宗)이 등극. 6년동안 통치. 백거이가 74세일 때 통치기간 끝남.
* 당나라 3대 시인
두보-(712-770, 58세), 오언고시, 칠언고시, 오언율시, 칠언율시에 모두 능함. 당시 사상예술을 집대성한 자. 후세에 대한 영향이 거대. 한유, 백거이, 소식 등 문학대가들은 다 두보의 영향을 받음.
이백-(701—762, 61세), 붓이 종이위에 날리니 비바람을 놀라게 하고 시가 만들어지니 귀신이 운다(“笔落惊风雨,诗成泣鬼神”)라고 평가받는 이백의 시는 후세 사람들이 모방하기 아주 어려움.
백거이-(772—846, 74세), 두보와 같이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 신악부운동을 선도함. 주제가 광범위하고 형식이 다양하며 언어가 평이롭고 통속적임. 하지만 고대에 백거이의 평가는 높지 않음. 스타일상 노인도 다 이해할 만큼 쉽게 써서 그런 거 같음. 만년에 쓴 시는 저속한 면이 있어 명성에 영향을 끼침. 하지만 근대에 명성이 하루아침에 높아져 3대 시인중 한명으로 인정받음.
생각해보기:
1) 고대 시사를 배우는 데서 제일 어렵고 힘든 점은 어떤 것인가?
2) 백거이는 왜 이런 명작은 써 낼 수 있었는가?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3) 3대 시인중에 1번이 왜 두보인가? 이백이 아니고?
비파로 치는 음악이 도대체 얼마나 아름답길래 이렇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까요? 비파곡 몇 곡 들어보시면 조금은 알 수 있을까요?
나가기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디테일하게 다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역사적배경과 작품강상 포인트는 시간을 들여서 계속 정리해서 다시 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몇 부분으로 끊어서 올린 것은 작품의 흐름상 변화를 보이는 부분을 이해하시라고 끊었습니다. 옛 시를 너무 아름답게 곡을 붙여 새 노래로 만들어 2018년에 발표한 노래들도 아주 들을만 하니 감상 잘 하시고요. 여기서는 관련된 정보를 전반적으로 다 준비해 놓도록 제가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가져갈 능력 되시는 만큼 가져 가시고 본인 것으로 소화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에 시를 배우면서 어렵다고 느낀 점은 저는 옛날 관직 명에 대한 생소함과 다양함이 한몫 한 거 같습니다. 가능한 한 언급된 관직명을 찾아서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당나라때 유명했던 비파곡 <六幺>도 찾아서 올렸고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은 양귀비가 직접 춤을 췄다는 유명한 서역에서 들여온 곡입니다. 관련 동영상이 많이 있어서 그중에서 골라서 올렸습니다. 볼거리가 많은 내용이었네요. 앞에서 소개한 작품들이 다 대작이어서 이제 어떤 작품으로 이어가야 하나 고민이 되기도 하는데요. 다음 주 작품은 이별시의 절창으로 불리는 王维의 칠언절구인 《送元二使安西》 로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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