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怨(춘원) -봄날의 시름-매창-
竹院春深鳥語多 죽원춘심조어다) 대숲에 봄이 깊어 새들의 지저귐이 많은데
瑤琴彈罷相思曲 요금탄파상사곡) 거문고로 <상사곡>를 뜯다가 그만두었어라
殘粧含淚捲窓紗 잔장함루권창사) 눈물에 화장도 얼룩진 채 사창을 걷었더니
花落東風燕子斜 화락동풍연자사) 새파람에 꽃도 지고 제비들만 비껴 나네.
早秋 -이른가을-梅窓-
千山萬樹葉初飛 천산만수엽초비) 산마다 나무마다 잎이 흩날리고
雁叫南天帶落暉 안규남천대락휘) 노을 속에 기러기는 남으로 울며 가네
長笛一聲何處是 장적일성하처시) 피리 소리 길게 끌며 어디서 부는 건가
楚鄕歸客淚添衣 초향귀객루첨의) 고향길 나그네는 눈물로 옷을 적시네
落暉(락휘) :노을 ,석양
閨怨 -규방 속의 원망-梅窓-
1
離懷초초掩中門 이회초초엄중문) 이별의 슬픔에 상심하여 문을 굳게 닫아 걸으니
羅袖無香滴淚痕 라수무향적루흔) 비단옷 소매에는 님의 향기는 없고 눈물 자욱만 남았네
獨處深閨人寂寂 독처심규인적적) 홀로 지내는 깊은 규방을 찾는 이도 없어 적적 하기만한데
一庭微雨鎖黃昏 일정미우쇄황혼) 가랑비는 뜨락 가득 내려 저녁놀까지 막았어라.
(心+肖 =근심할초) , 초초 :근심하여 맥이 풀린 모양,초然
鎖 (쇄):ㄱ,쇄사슬,자물쇠 ㄴ,잠그다,닫아걸다
2
相思都在不言裡 상사도재불언리) 서울에 계신 그리운 님께 속에 있는 말도 못하고
一夜心懷빈半絲 일야심회빈반사) 하룻밤 시름으로 머리는 반백이 되었어라
欲知是妾相思苦 욕지시첩상사고) 이몸의 괴로움을 알고 싶으시다면
須試金環減舊圓 수시금환감구원) 금가락지가 얼마나 이지러졌나를 한번 보세요.
(살쩍빈 :귀밑털 =긴털 드리울표部+賓)
夜坐(야좌) 梅窓
西窓竹月影婆娑(서창죽월영파사) 西窓 대나무에 달 그림자 너울 너울
風動桃園舞落花(풍동도원무낙화) 바람 불어 복사꽃 핀 뜨락에는 낙화가 춤을 추네
猶倚小欄無夢寐(유의소란무몽매) 태연히 작은 난간에 기대 앉아 잠못 이루는데
遙聞江渚採菱歌(요문강저채릉가) 멀리 강가에서 마름 따는 노래 들려 오네
風飜羅幕月窺窓(풍번라막월규창) 바람은 비단 휘장을 펄럭이고 달빛은 창 안을 엿 보는데
抱得奏箏半一강(포득주쟁반일강) 나 홀로 쟁을 안고서 연주 하다보니외로운 등잔불과 둘이서 벗이 되있네
愁倚玉欄花影裡(수의옥란화영리) 난간에 시름겹게 기대어 섰는데 꽃 그림자는 파묻히고
暗聞蓮唱響西江(암문연창향서강) 연밥 따는 노래소리 서강에 울려 퍼져 아스라이 들려 오네
*강(金+工) :등잔불
自恨(자한) 내 신세야 梅窓
東風一夜雨(동풍일야우) 새파람 불어 밤새도록 비가 오더니
柳與梅爭春(류여매쟁춘) 버들잎과 매화가 다투어 피었네
對此最難堪(대차최난감) 이럴 때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樽前惜別人(준전석별인) 술잔 앞에 놓고 임과 헤어지는 일이어라.
含情還不語(함정환불어) 마음속에 품은 정을 말도 하지 못하니
如夢復如癡(여몽복여치) 꿈꾸는 듯도 하고 바보가 된 듯도 해라
綠綺江南曲(록기강남곡) 거문고를 안고서 江南曲를 타 본다지만
無人問所思(무인문소사) 이 내 심사 들어줄 사람도 없네.
翠暗籠烟柳(취암농연류) 버들엔 푸르스름 안개가 끼고
紅迷霧壓花(홍미무압화) 꽃잎도 붉으스름 안개에 압도 되었네
山歌遙響處(산가요향처) 나뭇꾼의 노래는 멀리서 메아리쳐 오고
漁笛夕陽斜(어적석양사) 고기잡이의 피리소리는 저녁놀 속에 스러지네.
綠綺江南曲 :초록빛 비단치마 폭 안에 거문고을 안고 (강남곡)를 탄다는 의미.
綺 :비단기
故人(고인) 옛님 梅窓
松栢芳盟日(송백방맹일)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늘 향기롭자 맹세했던 날
恩情與海深(은정여해심) 우리의 사랑은 바닷속처럼 깊기만 했는데
江南靑鳥斷(강남청조단) 강남으로 떠난 파랑새 소식은 끊어 졌으니 (멀리 떠난 님 소식 끊어 졌으니)
中夜獨傷心(중야독상심) 한 밤중 이 아픈 마음을 나홀로 어이할꺼나
秋夜 梅窓
露濕靑空星散天(로습청공성산천) 이슬 내리는 하늘엔 별들이 흩어지고
一聲叫雁塞雲邊(일성규안새운변) 기러기는 울면서 구름 끝을 날으네
梅梢淡月移欄檻(매초담월이란함) 매화가지에 걸린 맑은달이 난간끝으로 오니
彈罷瑤箏眠未眠(탄파요쟁면미면) 옥쟁 타는걸 그만 두지만 잠은 오지 않아라.
*塞(새) :1.변방(塞翁之馬 ;새옹지마) ,2.(색)막다(塞源 ;색원
欄(란) :난간(欄杆) ,테두리(空欄) ,檻(함) :1.우리 , 함거 . 2.난간 :欄檻(란함)
梢(초) :나무끝 (梢頭 :초두) ,끝초 (末梢神經
閨中怨 梅窓
瓊花梨花杜宇啼(경화이화두우제) 옥빛 배꽃 눈부시게 피고 두견새 우는밤
滿庭蟾影更悽悽(만정섬영갱처처) 뜰에 가득 달빛 어려 더욱 서러워라
相思欲夢還無寐(상사욕몽환무매) 그리운 님 꿈에나 만날려해도 잠마져 오지 않고
起倚梅窓聽五鷄(기의매창청오계) 일어나 매화 핀 창가에 기대니 새벽닭이 울어라
竹院春深曙色遲(죽원춘심서색지) 대숲엔 봄이 깊고 날 밝기는 멀었는데
小庭人寂落花飛(소정인적낙화비) 인적없는 작은 뜨락엔 꽃잎만 흩날리네
瑤箏彈罷江南曲(요쟁탄파강남곡) 옥쟁으로 타던 江南曲을 그만두니
萬斛愁懷一片詩(만곡수회일편시) 끝없는 시름으로 가슴엔 한편의 시를 품었어라
*蟾(섬) :두꺼비 ,달(옛날 중국인들은 달에 두꺼비와 옥토끼가 산다는 전설에서 유래함)
名技 梅窓(매창)의 사랑..
1) 유희경,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 매창의 마음 사로잡다.
매창은 부안 출생의 기생으로 시와 거문고에 능했으며
여느 기생과는 달리 절개가 곧았다.
그러한 매창이 한눈에 반해 정을 준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천민 시인 유희경.
경남 용문사에 전해지는 유희경의 <촌은집>을 보면
그들의 만남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贈癸랑(女+良)
曾聞南國癸랑名(증문남국계랑명) 남국의 계량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글재주 노래 솜씨 서울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오늘에서 참 모습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 하여라
이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유희경과 매창이 만날 당시
매창은 이미 유명한 기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름을 떨친 정도는 유희경도 마찬가지로
유희경도 당시 시인으로 큰 명성을 얻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그들은
천민과 기생이라는 사회적 신분에 대한 동병상련을 느끼고
시를 통해 사랑에 깊이를 더해간다.
하지만 1592년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의병으로 나선 유희경은
매창과 기약 없는 작별을 한다.
2) 천민 유희경, 어떻게 한성부윤까지 올랐나?
허균의 <성소부부고>를 보면 유희경이 천민임을 밝혀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촌은집>에 따르면 유희경이 살아생전 종2품에 해당하는 가의대부를 지냈고,
사후에는 한성부윤까지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유몽인 전>에는 그가 시작 기량이 뛰어났다는 내용도 있다.
어떻게 천민인 그가 시를 지을 수 있었으며 나아가 벼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그 연유는 유희경이 그의 아버지 3년 상을 치른 것에서 비롯된다.
천민에 불과한 유희경이 3년상을 치른 것은
당대 최고의 학자 남언경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남언경은 유희경이야말로 효자라고 생각하고 제자로 받아들여 朱子家禮를 가르친다.
남언경으로부터 주자가례를 배운 유희경은 장례를 주도하는 경사를 업으로 살아간다.
그 무렵 유희경은 또 한명의 대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시의 대가 박순이다.
유희경은 독서당을 드나들면서 박순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박순은 유희경의 재능을 알아보고 크게 칭찬하고 이를 계기로 시를 가르친다.
3) 침류대의 주인은 천민시인 유희경.
유몽인의 <유희경전>이나 이수광의 <침류대기>를 보면
하나같이 침류대를 무릉도원에 비교하며 최고의 문화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많은 사대부들이 최고의 문화공간으로 꼽으며 즐겨 찾았던 침류대는 대체 어떤 곳일까?
침류대는 바로 유희경의 거처로 그가 자신의 집을 스스로 침류대라 부른 것이다.
유희경의 뛰어난 시작 기량과 더불어 그가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세운 공으로
면천한 것을 계기로 많은 문인들이 침류대로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개방적인 성향의 문화교류는
침류대를 최대의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는 남언경과 박순이 유희경을 제자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언경과 박순은 화담 서경덕의 문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스승의 개방적이고 실리적인 성향을 이어받아
천민인 유희경을 제자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4) 조선 중인문학의 터전을 연 풍월향도
풍월향도란 유희경과 백대붕을 중심으로 글을 알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기는 천민들의 문학모임이다.
유희경은 그의 젊은 시절을 풍월향도에서 보낸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유희경이 면천하게 되면서 풍월향도는 쇠퇴기를 맞는다.
그 이후 시를 즐기는 천민들의 모임은 유희경의 제자격인 최기남을 중심으로 한
삼청시사가 그 맥을 유지한다.
이렇게 양반이하 계층의 문학인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이들을 통칭해 위항문학인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풍월향도와 삼청시사에서 시작된 위항문학인들의 활동은
인왕산을 중심으로 그 활동이 활발해진다.
그 중 가장 큰 두각을 보인 것은 千壽慶(천수경)이 이끈 옥계시사이다.
위항문학인들의 모임은 그 활동이 점차 확대되면서
순수한 문학활동을 즐기기 위한 것에서 신분상승운동의 한 흐름으로까지 이어진다.
5) 이별, 15년만의 재회, 그리고 이별...
임진왜란을 맞아 이별했던 매창과 유희경.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15년 후이다.
이들은 무슨 연유로 15년이란 기나긴 공백을 가져야 했던 것일까?
뒤늦게 부안을 찾은 유희경은 열흘간 머물며 시를 논하자던 매창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노라 말할 뿐이다.
그리곤 잠시 머물다 영원한 이별을 고하고 서울로 돌아간다.
천민의 신분으로 태어나 침류대의 주인으로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지냈던 유희경.
그리고 그 곁에는 평생 그를 사랑한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 매창이 있었다.
매창의 관한 약력
매창(梅窓)
1573(선조 6)∼1610(광해군 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하며,
계랑(癸娘·桂娘)이라고도 하였다.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인데,
1513년(중종 8)에 나서 1550년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연대가 정확한 것으로,
그는 37세에 요절하였다.
유희경의 시에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편 있으며,
《가곡원류》 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흣날닐제 울며 잡고 이별(離別)한 님”으로 시작되는 계생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어 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 惺所覆#부41稿》에도 계생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하며,
계생의 죽음을 전해듣고 애도하는 시와 함께 계생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을 덧붙였다.
계생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여성적 정서를 읊은 〈추사 秋思〉·〈춘원 春怨〉·〈견회 遣懷〉·〈증취객 贈醉客〉·〈부안회고 扶安懷古〉·〈자한 自恨〉 등이 유명하며,
가무·현금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부안의 묘에 비석이 전하며, 1974년 그 고장 서림공원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매창이 지은 시조나 그녀와 관련된 시조 및 편지를 소개한다.
- 대표적 작품만 소개합니다.
→ ‘지봉 이수광’은 매창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계랑은 부안의 천한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의 소문을 듣고는, 시를 지어서 집적대었다.
계랑이 곧 그 운을 받아서 응답하였다.
平生 學食東家 (떠돌며 밥 얻어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獨愛寒梅映月斜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時人不識幽閑意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指點行人枉自多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 매창 시비에 적힌 시조
매창의 시비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
醉客執羅衫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 허경진 역 -
→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 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贈癸娘’ 허경진 역>
→ 매창이 유희경을 떠나보내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조.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自恨, 허경진 역'>
→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懷癸娘, 허경진 역'>
‘허균’은 다음과 같이 매창을 평가했다.
계생은 부안의 기생이라. 詩(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 매창을 그리워 하는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이다.
계랑에게
계랑이 달을 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새'의 노래를 불렀다니,
어찌 그윽하고 한적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부윤의 비석 앞에서 불러 남들의 놀림거리가 되셨소.
석 자 비석 앞에서 시를 더럽혔다니, 이는 낭의 잘못이오.
그 놀림이 곧 나에게 돌아왔으니 정말 억울하외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그리움이 몹시 사무칩니다.
- 기유년(1609) 정월 허균
→ 이 편지는 연인으로서가 아닌 진정한 친구로서 우정을 간직한 허균의 마음을 담은 편지이다.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젠 진회해(秦淮海)를 아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으리까.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 기유년(1609) 9월 허균
→ 매창의 죽음을 애도한 허균의 시조
哀桂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堪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竊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 서해의 낙조를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월명암 낙조대에도 올랐다.
그녀가 월명암에 올라 쓴 시가 있다 : 개암사(開岩寺)
하늘에 올라 절간을 지었기에
풍경소리 맑게 울려 하늘을 꿰뚫네
나그네 마음도 도솔천에나 올라온 듯
황정경을 읽고 나서 적송자를 뵈오리라
→ 한(恨)
봄새라 치위는 가시지 않아 /
볕드는 창가에서 옷을 깁노니
숙인 머리에 눈물이 떨어져 /
옮기는 실귀가 말없이 넞는다 (신석정 역)
→ 산수(山水)를 찾아서
먼 산은 사뭇 아스므라한데 /
언덕엔 버들이 안개에 묻혀
잔 들어 시름은 풀 곳이 없고 /
고깃배 가는 곳에 살구꽃 핀다
→ 등잔불 그무러 갈 제~~
등잔불 그무러 갈 제 창(窓) 앞 짚고 드는 님과
오경종(五更鐘) 나리올 제 다시 안고 눕는 님을
아무리 백골이 진토(塵土) 된들 잊을줄이 있으리
→ 내 가슴 흐르는 피로~~
내 가슴 흐르는 피로 님의 얼굴 그려내어
내 자는 방안에 족자 삼아 걸어두고
살뜰히 님 생각날 제면 족자나 볼까 하노라
→‘백운사’ 이매창(10세 때 쓴 시)
백운사 절에 올라와 봤어요 (步上白雲寺)
절은 이름 그대로 흰구름 사이에 있군요 (寺在白雲間)
스님, 흰구름을 쓸어 버리지 마세요 (百雲僧莫掃)
내 마음이 흰구름 보면 한가로워져요. (心與白雲閑)
-최 향 옮김-
→ 매창이 간지 35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이곳을 찾아온 한 시인은 그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 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羅衫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첫댓글은 행복드 선인들의 좋은글에 열어갑니니다.찡긋
휴일아침
우싸 신나는 날 되세여 아자 아자
옛 선인들의 문향이 흠뻑 젖어 봅니다
일일이 요케댓글을 주시니 이뽀욤
품은 뜻이 대단하네요, 꾹하고 모셔갑니다
넵야생들 님열정향기님 되심을 진심으로 합니당....
감사합니다^^ 합니당에 클릭해도 숫자 안 나옴 이미 했습니다만 ..)
정아님
(
맞아여 오늘은 숫자가 흑흑 지두안 되더라구여 나중에 나오더라구여
잘보겠습니다~~~
점심은 드셨는지요` 지는 아,점으로
옛 선인들의 귀한 문향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귀한 걸음으로 다녀가셨군요
항상 귀한 말씀으로 고마움을 전해 봅니다...^^*
한시 잘봅니다 감사
고운 걸음 감사합니다. ㅎ
잘봅니다 마음에 감사 드립니다
밀린 숙제하시느라~~ 수고 많으십니다. 행복한 날 되시길요. ㅎ
우리 선인들의 풍류속을 잠시 거닐어 봅니다.
멋진 댓글에 감사를 보냅니다. ㅎ
너무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귀부인 님~! 편안한 밤 보내시길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