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897년(정사생) 신라 효공왕 1년, 발해 대위대 4년, 후백제 견휜 6년, 당 소중 건녕 4년에 출생했다고 추정, 고리(려) 통일 개국공신으로 통합삼한 벽상공신(익찬공신) 대장군, 원윤(종 4품) 국가에서 충장 시호를 하사, 태조 왕건으로부터 본관을 함안으로 사관 받았음.
문중에서 춘추전국시대 조나라 무왕의 후예라고 소개를 하는데, 배경과 지명이 중원과 한반도 경남 지역이 뒤섞여서 뒤죽박죽입니다. 중국 호북성(후베이성)의 함안의 옛 명칭이 파산(巴山)이고, 함안죽해라고 귀주성의 노장죽해와 더불어 대표적인 대나무 산지입니다. 무한(우한)시가 호북성의 성도이고, 함안이 덕안 옆입니다. [대파산맥(다바산맥:大巴山脈)은 사천성(쓰촨성)과 섬서성(산시성), 호북성(후베이성)의 경계에 걸쳐 있는 산맥.]
고리(려)사 기록을 보면 고리(려)는 일본을 비롯한 38개국에서 조공을 받는 국가이고, 천자의 나라 황제국을 자처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고리(려)숙종의 딸 복녕공주의 묘지명에 천자의 딸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리는 개국을 서경에서 했다고 나옵니다. 서경은 지금의 북경(북평)을 포함한 지역입니다.
북경에는 지금도 고리라는 명칭이 들어간 지명이 고리영(군영) 등 상당히 많습니다.
25사 기록을 보면 황하 이북 북평(북경)은 고구리(려)의 영토였고, 백제(황하 동부 이남) 근초고왕 때 고구리 북평을
공격해서 점령하고 북평, 진평 등 중원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 교과서에는 근초고왕이 평양을 공격해서 고구리 고국원태왕이 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나오는데,
그 평양을 북한의 평양으로 가르칩니다. 25사 기록과 비교하면 당시 고구리 평양은 북평(북경)입니다.
당시 북한 평양은 한성입니다. (지금의 서울은 당시 남천) 그리고 평양은 서울처럼 수도를 일컫는
명사라서 고구리 평양은 여러차례 옮겨서 바뀝니다.
시조, 본관의 유래에 후당, 신라말 중원의 전란을 피해서 본류의 대거 환국이라고 소개를 했는데,
대륙에서 당과 7년 전쟁에서 대승을 한 신라의 영토가 한반도에만 있었다는 건 식민 강단사학에
의한 왜곡, 날조로 보이고, 신라를 복속한 고리(려)의 영토가 역성국인 조선이 들어선 초기까지
한반도로 축소되질 않았다는 게 고리(려)사 139권의 기록에 너무도 많이 나옵니다.
대륙의 동부 지역 전체를 영토로 가졌던 신라를 복속한 고리(려)는 송나라로부터 해동강국, 동쪽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국가로 지칭되었습니다. 지금의 동중국해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동해입니다.
당은 제나라 이정기에 낙양이 점령 당하고 불에 타서 왕이 도성을 버리고 피신할 정도로 강성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대륙 통일을 당나라가 했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고구리, 신라, 백제, 가야, 왜, 우산은 대륙에 존재했었고, 고리(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대륙 동부 지역을 중화인들에게 빼았긴 적이 없습니다.
고리(려)에 일본, 유구(류쿠)가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고리사에 나오는데, 왜가 신라를 공격하고,
고리(려)에 노략질한 기록도 나옵니다. 왜가 고리를 노락질한 기록 그건 백제, 신라가 망한 이후에도
왜가 대륙에 존재했었다는 방증입니다.
삼국사(기), 신당서, 후당서에는 작은 일본(후백제)이 큰 왜(열도)를 속여서 차지했다고 나옵니다.
일본이 대륙에서 밀려난 후백제 세력으로 추정하는 겁니다.
의자왕의 항복, 계백의 황산벌 전투, 백제+왜와 신라+당의 백강 전투(호남성 기양시 상강)
모두 대륙의 산동, 하남, 하북, 호남 등의 지역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각설하고 ' 시조, 본관의 유래에 후당, 신라말 중원의 전란을 피해서 본류의 대거 환국'이라고
소개한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됩니다.
과연 고리(려) 태조 왕건이 사관한 본관 함안이 정말 경남 함안일까요?
아니면 대륙의 호북성 함안일까요?
우리 함안 조 씨를 파산(巴山) 조 씨라고도 부르죠?
의문이 많습니다.
과거에 몰랐던 부분인데, 함양 조 씨도 시조인 조지수의 후손인 조선의 개국공신 조온, 조연, 조인옥이
한양으로 이주하면서 한양 조 씨로 본관을 바꿨지요. 한양 조 씨 시조인 조지수(趙之壽)는 고리(려) 중기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