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와 도조 히데끼
오후 2시 50분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사마 사마 레스토랑(Sama-Sama Retaurant)에 갔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식당이라서 그런지 1층 요리실 창틀에 와카(和歌)를 적은 액자 2개가 있고, 청동 불두도 보인다. 이 집의 주방장이 타카바시 라-멘을 잘 요리하는가 보다.
時代に逆らう三連釜
京の都の麵喰いに
わがままとおす
たかばしら-めん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세 가마솥
쿄토의 면
내 멋대로 주문하는
타카바시 라-멘
(成貞愛 옮김)
2층에 올라가 다리를 밑으로 내리고 앉는 일본식 자리에 앉아 샤브샤브와 오리 불고기를 먹었다. 학교에서 발리 문자를 배워서 읽고 쓸 수 있는 가이드 디까님에게 ‘계림의 역사기행’, ‘옴 스와스띠아스뚜’, 우리 가족 이름을 발리 문자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빈자리의 식탁에 앉아서 디까 님이 나의 한글 옆에 알파벳을 먼저 쓰고 발리 문자로 써 주었다. ‘계림의 역사기행’을 ‘계림역사기행’으로 줄여서 써주었다. 발리 문자 체계에서 우리말 ‘의’는 표기할 수 없는가 보다.
화장실에 가니 남녀 두 청소년이 종업원으로 고용되어 청소를 하다 내가 가니 겸연쩍은 듯 미소를 짓는다. 화장실에서 나와 계단 벽면에 걸린 흑백 사진을 보니 태평양 전쟁의 전범 재판정에 서 있는 일본인 도조 히데키(東條 英機, 1884-1948)이다. 누군가 사진에 ‘战犯’(전범)이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식당 화장실에 왜 하필이면 에이급 전범이 재판받는 장면의 사진을 걸어 놓았을까? ‘전범’이라고 낙서를 한 사람은 중국인 관광객일까?
도조 히데끼는 군국주의 일본을 만든 장본인으로 육군대신, 육군참모총장, 총리대신이 되었다. 관동군 장교로서 1937년 중일전쟁의 확대를 주장했다. 도조 히데끼 군국주의 내각은 1941년 진주만을 공습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선전포고를 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와 싱가포르를 함락하고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고 자바를 점령하고 발리에도 3년 반 동안 군정을 시행하였다. 식민지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드는 정책을 하여 징병제와 학도병제를 시행하고 조선 청년들을 징용하고, 조선의 어린 여성들을 전쟁터의 일본군 성노예로 끌고 갔다.
일본인들에게 도조 히데끼는 한 때 영웅이었지만, 중국과 한국 사람들에게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다를 바 없는 전범이다. 전선의 일본군들에게 '적국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훈시를 내렸던 도조 히데키는 권총으로 자결을 시도했지만 죽지 않았고,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교수형을 받고 화장되어 한 줌의 재가 되어 태평양 바다에 뿌려졌던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욕계의 이승을 떠나 오늘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로 간다.‘ 고 하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골 일부를 빼돌려 무덤이 만들어졌다.
올해 92세이신 장인어른은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고 영국령 말레이반도의 싱가폴을 함락하고 인도네시아를 차지한 도조 히데키 내각 시절에 전승 축하 선물로 고무공을 하나씩 선물 받고, 일본 경찰과 조선 사람들이 어울려 전승 축하 퍼레이드를 벌렸던 어린 날의 기억을 들려주셨다.
2차 세계대전 뒤에 형성된 냉전체제로 미국과 일본은 밀월관계를 맞이하고, 연합국 합동 전범 재판은 미국에게 임상 실험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731부대의 책임자도 난징 대학살의 주범도 기소조차 하지 않고 흐지부지 끝났다. 미소에 의해 한반도가 분할 점령되고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 세력을 기용하고 반공을 내세워 반민특위를 경찰을 동원하여 탄압하고 해산시킨 것과 다르지 않다. 양칠성처럼 연합국 포로감시원으로 징용됐던 조선 청년들도 전범으로 재판에 회부됐고 뒤에 도조 히데키 등과 같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合祀)됐다.
일본인들은 한때 일본이 점령했던 동남아시아 지역을 관광하러 많이 다녔다. 이런 시기에 발리에 와서 식당을 경영하는 일본인 주인이 이 사진을 액자에 넣어 걸어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다음에 중국인과 한국인이 발리를 많이 찾아오고, 일본인에게는 영웅인 도조히데키 전범 재판정 사진에 낙서를 했을 것이다.
19-20세기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과 산업 문명의 역사는 인류에게 어리석음과 어리석음에서 비롯하는 탐욕과 성냄에서 벗어나 평화와 생태 문명을 세우라는 교훈과 지침을 보여준다. 21세기에 접어든 우리시대에는 산업 문명이 낳은 지구온난화로 가뭄과 홍수와 태풍이 빈발하고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빠르게 녹으며 백곰이 굶어주고 해수면이 상승하여 섬과 바닷가 저지대가 물에 잠긴다. 호주의 산불로 코알라 같은 동물이 1억 마리가 타죽었다. 아마존의 밀림이 불태워지고, 동물과 식물이 대멸종을 당하고 구제역이나 코로나바이러스19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고 사이비 종교가 혹세무민하는 시대에 인류는 문명을 어떻게 운영하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미증유의 역사가 전개되는 이 시대, 문명사적 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시대 사람들에게 역사는 그 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어린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돛단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도널드 트럼프 같은 탐욕스러운 기성세대에게 미래 세대의 생존권을 뺏지 말라고 '눌함(吶喊)'을 토하는 이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로 역사에 기록될 것인가?
골든 레빗츠 커피(Golden Rabbits Coffee) 면세점에 갔다. 한국말을 잘하는 여자가 나와 커피 한 잔씩을 맛보이며 ’남자 커피‘, ’여자 커피‘를 설명하면서 커피 판매 홍보를 한다. 동물 학대라는 지탄을 받는 루왁 커피는 비싸서 살 엄두가 나지 않고, 커피를 먹으면 잠이 오지 않는 나는 커피에 넣은 사탕수수 누런 설탕이 맛있어서 몇 숟가락 먹었다. 형형색색의 커피잔들이 예뻤지만 여행 중에 이미 커피를 많이 쌌기 때문에 그냥 나왔다.
버스가 웅우라 라이 공항 앞에 서고 정들었던 가이드 디까(Dewa Dika) 님과 악수를 하며 작별을 하였다. 공항 구내에서 줄을 길게 서서 출국 검색대를 통과했다.
3번 게이트에서 기다리며 벽에 걸린 발리 풍경을 담은 그림들을 촬영하였다. 발리 사람들의 농촌과 어촌의 삶을 그린 그림이 각 12장씩이었다. 그림들은 모두 ’영 아티스트 양식‘이다. 그림들은 벼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발리의 농촌과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어촌의 모습을 잘 담고 있는 소중한 이미지 기록이다. 발리가 네덜란드 식민 정부 시절에 관광지화되고 발리의 문화가 관광 상품이 되었기에 이 그림들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인도네시아 독립 후 1956년 네덜란드 화가 앙리 스밋과 호주의 화가 도널드 프렌드가 우붇 서쪽의 뻐너스타난(Penestanan)에 세운 ‘영 아티스트 스쿨’에서 양성된 청년들이 1960년대 발리의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상 풍경을 전통 우붇 양식과는 다른 수법으로 그렸다. 원색을 많이 쓴 밝은 색조와 윤곽을 강조한 화면구성으로 표현한 ‘영 아티스트 양식’의 이 그림들은 발리 회화사의 한 페이지를 잘 보여준다.
뿌라 울은 다누 브라딴의 힌두교 제례를 표현한 것으로 보임
촌장님 부부와 같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데 다리 뻗고 앉은 계림샘과 이야기를 하는 관유 회장님의 파우치에서 비행기 티켓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아무말하지 않고 일어나 티켓을 주워 드렸다. 재인샘은 좀 골려 먹다가 주지 않고 바로 주는 나를 보고 교사가 천직이라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가루라 항공사의 비행기 너머로 지는 해가 발리의 서녘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인다. 오후 6시 15분에 말레이 항공사의 엠에이치(MH) 0852편 비행기에 올랐다. 21씨(C)좌석에 아내와 함께 앉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으로 비행했다. 옴 스와스띠아스뚜 발리!
우리 겨레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말 큰 사전 편찬 사업을 비밀리에 하던 일을 시나리오로 하는 영화 ‘말모이’를 보고 나니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도착했다. 자카르타 갈 때 탔던 공항 전철을 탔다. 말레이항공사의 엠에이치(MH)0066편 비행기에 밤 10시 15분에 탑승했다. 30디(D) 좌석에 앉았다.
2020년 1월 19일 아침 6시 30분에 인천공항에 착륙했다. 대기하고 있는 경주행 버스를 타고 포항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