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당초 생각했던 '고향역'에 얽힌 사연이 부족하다고 싶어서 다시 올립니다.
출처는 '한국대중가요연구소 6000'인데 링크된 글인것 같습니다.
링크에 재링크...
출처 : https://www.cosmiannews.com/news/114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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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고향역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임종수 / 임종수 / 나훈아
추석이 다가온다.
‘5월농부 가을신선’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초여름에 땀 흘리며 농작물을 가꾸는 사람과 오곡이 무르익은 들판을 내려다보는 한가로운 사람을 말하는데, 사실은 같은 사람으로 음유함이 옳다.
농부가 신선이 되어 산 두렁에서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기는 중추(中秋)의 절기다.
이 중추의 한가운데가 음력 8월 15일, 추석이다.
이날은 가배·가배일·가위·한가위·중추절·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도 한다.
추석(秋夕)을 풀이하면 가을 저녁, 가을 달빛이 좋은 밤이라는 뜻이다.
이 말의 어원은 중추(中秋) 월석(月夕)이라는 말 중에서 추(秋)와 석(夕)을 합친 말이란다.
중국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사용했고, 삼국사기에 추석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처럼 민족 명절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는 많다.
<머나먼 고향>·<고향 무정>·<고향역>·<고향이 남쪽이랬지>·<고향 가는 기차를 타고> 등등. 그중에서 망향의 불꽃에 휘발유를 뿌리는 듯한 유행가는, 나훈아의 목청에 걸린 <고향역>이다.
향수를 부추기고, 달래고, 마음이 몸보다 먼저 고향으로 달려가게 하는 노래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이뿐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 주는 곳~.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 이뿐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코스모스 반겨 주는/ 정든 고향역/ 다정히 손잡고 고갯마루/ 넘어서 갈 때/ 흰 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
(가사 전문)
▶ https://youtu.be/IXLNOj2PubU
노랫말이 서정적이다.
몸보다 마음이 앞서 달려가는 듯 가슴팍이 콩닥거린다.
흰 머리 날리면서 동구밖에서 기다리는 엄니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고향역> 노래 속의 역(驛)은 어디일까. 나훈아의 고향이 부산이니까, 부산역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서울역이나 대전역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다분하다.
하지만 이 노래의 모티브 기차역은 익산시 황등면의 간이역, 황등역이다.
이 기찻길에 얽힌 작곡가 임종수의 눈에 아롱진 차창에 어린 모습이다.
그래서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차창에 어린 모습>이었다.
노랫말의 행간에 걸린 감흥은 작곡가 임종수의 중학교 2학년 때의 기억이다.
그 시절 임종수는 고향 임실에서 작은 형이 순경(巡警)으로 근무하고 있던 삼기를 주말마다 오가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때 철길 옆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면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떠올라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을 되살려 노랫말을 지었단다.
그 후 8년여 세월 동안 작곡 비망록에 잠재워두었다가 1970~1972년을 거치면서 나훈아의 목청을 통하여 세상에 내어놓는다.
남진(본명 김남진. 1946~. 목포 출생)이 <님과 함께> 노래를 부를 즈음이다.
이 <님과 함께> 노랫말은 남국인(1942~. 부산 출생)이 충북 옥천지역으로 낚시를 갔다가, 푸른 산기슭에 걸려있는 듯한 그림 같은 전원주택을 보고서 지은 곡임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에 살아있는 전설, 가요 황제 나훈아와 임종수의 만남은 가요계에 두고두고 회자 되는 골동품 같은 에피소드다.
나훈아는 1970년 임종수로부터 두 곡의 유행가를 받아 불렀는데, <차창에 어린 모습>과 <그 사람을 버린 죄로>가 그것이다.
하지만 두 곡은 방송 한번 타지 못한 채 묻히고 만다.
2년 뒤, 나훈아는 <차창에 어린 모습>을 제목·가사·리듬까지 바꿔 다시 녹음했다.
그것이 바로 <고향역>이다. 당시 나훈아는 25세, 임종수는 30세였다.
<고향역> 노래 발표 이전의 임종수는 임시원이라는 예명을 사용하면서 가수 활동도 했었다.
1967년 작곡가 나화랑(1921~1983. 김천 출생. 본명 조광환)으로부터 받은 <호반의 등불>이 그의 데뷔곡이다.
1968년 어느 날, 임종수는 나훈아가 전속된 사무실 앞에서 기다렸다.
“저는 무명 작곡가 임종수라고 하는데, 나훈아 님을 만나려고 3개월 동안 기다렸습니다.
훈아 님께 주고 싶은 곡이 있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2절까지 부르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두 곡을 1절씩만 부르겠습니다. 5분이면 충분합니다. 딱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인연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엮어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때 처음으로 녹음된 노래가 <차창에 어린 모습>.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그 후 다시 만난 두 사람의 의기투합 사연도 <고향역>이 품고 있는 에피소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1971년 12월 말 임종수가 오아시스레코드사에 들렀다가 나훈아를 우연히 만났다.
이때 나훈아가 제안을 한다.
‘선생님, <차창에 어린 모습>이 너무 아깝심니더.
어차피 방송도 안 되었으니, 슬픈 가사를 띠 내고(떼어 내고) 건전하게 고쳐 주이소.
리듬도 트로트에서 고고로 바꿔 주시고 예. 고고로 바꾸면 경쾌하게 들리지 않겠어예.’
그렇게 해서 1972년 2월 8일, 나훈아는 <고향역>을 다시 녹음했다.
대박이 났다.
나훈아는 신비주의적인 예술가다.
본인은 현실주의자라고 얘기를 하지만, 베일에 가린 면면이 많음은 사실이 아닌가.
그는 라이브 무대에만 선다.
돈을 받고 공연을 하는, 세칭 행사라고 하는 비즈니스 무대에는 선 적이 없다.
작년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한 언텍트 공연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2020> 무대도 무료로 공연을 하였다.
서양음악의 대가, 악성(樂聖)으로 불리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독일 음악가)이 사례금을 받는 귀족들의 초청 행사에 응하지 않았던 것과 유사하다.
이 또한 예술가의 철학적 르네상스가 아니련가.
나훈아는 본명 최홍기, 1947년 부산 초량에서 무역상을 하던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1965년 가수의 꿈을 품고 대학생이던 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서라벌고등학교에 진학하였으며, 오아시스레코드사 사환(使喚)으로 가요계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66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천리길>로 데뷔하여 오늘날 국민가수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였다.
나훈아는 결혼을 세 번 하고, 이혼을 세 번 하였다.
첫 결혼은 1973년 고은아의 4촌인 이숙희와 결혼했다가 2년 후 이혼하였으며, 1976년 7세 연상의 여인 김지미와 결혼하였으며, 이때가 나훈아는 두 번째 김지미는 세 번째였다.
특히 김지미는 최고의 주가로 인기 절정일 때에 배우 최무룡과의 간통(姦通)으로 지탄을 받았었는데, 결혼식도 하지 않고 나훈아와의 동거를 선언하여 당시 연예계를 발칵 뒤집었었다.
1982년 이혼을 한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추겼다.
나훈아는 ‘김지미는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 여인’으로, 김지미는 ‘나훈아를 진정 남편으로 믿고 의지할 남자였다’고.
그리고 1년 뒤 나훈아는 또 아빠가 됐다는 폭탄을 선언한다.
14세 연하 가수 정수경과의 사이에 아기가 태어난 것이다.
이들은 1985년에 결혼식을 올렸으며, 2010년 전후로 파경설이 나돌았다.
이후 2016년 수원지방법원 여주지원의 판결로 법정 이혼했다.
<고향역>은 임종수의 68번째 곡, 이 곡이 대중들의 인기를 받으면서 임종수의 이름에도 깃발이 달린다.
고졸(이리 남성고) 출신으로 충청대학 실용음악과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2021년 추석, 고향을 그득하게 품으시길 기원드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빈다.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유차영 519444@hanmail.net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9.16 08:04 수정 2021.09.16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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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방송 중입니다만, 하도 심심해서요~~~
첫댓글 명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십년이 흘러도
한결같은곡이라고 할까요
아무렴요...
나훈아 씨의 3대 명곡 중 한곡쯤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