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거제시의 중심은 시청을 비롯한 주요 관공서가 있는 고현항 뒤의 고현동 일대이고, 대우해양조선이 있는 옥포가 그 다음쯤 될 것 같지만 전통시대의 중심지는 현재의 ‘거제면’인 것 같다. 이곳에 관아와 향교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1592년 임진왜란으로 고현성이 함락되어 1663년(현종4년) 고현에서 거제로 현아를 옮겨왔다고 한다. 이때 기성관, 질청, 향교 등 많은 유적 유물이 모두 고현에서 이건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는 꽤 많은 문화유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세진암부터 찾기로 했다. 이곳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25호 거제세진암목조여래삼존불좌상(巨濟洗塵庵木造如來三尊佛坐像)이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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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조여래삼존불좌상은 현재 세진암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삼존상 모두 각각 대좌 위에 가부좌 형식을 하고 있다. 본존은 등을 약간 구부린 채 얼굴을 다소 숙인 자세이며, 양손은 따로 만들어 제1지와 3지를 구부려 맞대고 있다. 문화재청 설명문에서는 ‘중품중생인’으로 적고 있지만 하품중생인이 맞다고 한다. 手印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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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숙인 얼굴에 가장자리가 살짝 올락 미소를 머금은 듯하여 전반적으로 단아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목은 짧은 편으로 삼도를 얇게 각인하고 있다. 법의는 두꺼운 통견식으로 대의 아래 편삼을 착의하는 이중착의법 형식이며, 대의는 목의 좌우 양측에서 반전하고 있다. 가슴 앞에 U자형으로 벌어진 법의 사이로 수평선상의 승각기(혹은 군의의 매듭)를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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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협시의 표현은 본존상과 동일하며 두부에 보관을 얹은 것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보관은 약 1.0㎝ 정도의 수평 턱을 마련하고 그 위에 얹었으나, 조성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따로 만들어 얹은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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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 아래 정면 머리카락은 성글게 음각선을 넣어 표현하였으나, 배면은 선조 처리를 하지 않고 검은 채색에 그쳤다. 정수리의 발계는 두 갈래로 말아 마무리하였고, 보발 한 가닥은 귓볼을 감고 흘러내려 어깨 위에서 원상을 이루고 다시 세 가닥으로 갈라져 흘러내리고 있다. 두 보살상은 도난을 당했으나 다행히 되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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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세진암 목조여래삼존불좌상은 50㎝ 크기의 단아한 작품으로 상호와 법의 표현이 조선후기 18세기의 전형적 양식을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복장기에 의해 조선 숙종 29년(1703)에 조성하여 고성군 하이면의 와룡산(臥龍山) 심적암(深寂庵)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어느 시기엔가 이곳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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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암과 나란히 있는 건물은 반곡서원(盤谷書院 거제면 동상리 364)이다. 이곳 거제에서도 우암 송시열 선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 바로 이곳이 우암이 유배 와서 거처한 곳이라고 한다. 숙종30년(1704년) 거제지방 유림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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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은 광무(光武) 10년(1906)에 중수(重修)하였지만 이후에도 변천이 많았던 것 같다. 현재의 건물들은 최근에 아예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포털 위성지도를 보면 2009년까지는 건물이 일부 보이는데 2010년 이후에는 다시 짓기 위해 터를 정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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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안에 그나마 오래된 것은 비각 안에 서 있는 ‘반곡서원유허비(盤谷書院遺墟碑)’다. 고종 16년 기묘에 향유의 불승모현[한자로 不勝慕賢으로 쓸 것 같은데 이런 표현도 있나 싶다.]하는 정성으로 서원의 옛터에 제단과 비를 건립하고 매년 가을에 한 번씩 단제를 봉행했다고 한다. 유허비의 총 높이는 1.6m이고 비신의 높이는 1.4m, 폭 0.49m, 두께 0.15m이고 비개의 폭은 0.75m, 두께 0.5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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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면 동상리에 있는 거제현관아(巨濟縣 官衙)는 사적 제484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현재는 객사인 기성관과 부속건물인 질청만 남아 있다. 거제현의 관아는 배산구조와 안산, 관아 배치와 진입로 구조가 시각적으로 뚜렷한 축을 형성하여 한양의 광화문-경복궁-백악산의 축과 매우 흡사한 시각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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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관아 건물인 기성관은 거제현의 객사로 중심적 역할을 하던 곳으로 단청이 화려하고 웅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록 동헌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면사무소가 들어서 있지만 부속 건물이었던 질청이 남아있고 당시 고지도 등의 관련 자료가 많아 당시 읍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유적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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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관 앞에는 모두 14기의 비석이 있다. 고현에서 거제로 현아를 옮긴 이후 250여년 동안 세워진 많은 송덕비가 있었으나 세월의 변천에 따라 많이 없어지고 향교입구와 동상리, 서정리 등에 흩어져 있던 비석 14기를 현재의 기성관내에 옮겨 비군을 만들었다. 이중 쇠로 만든 비석이 6기 있는데 알려진 바로는 가장 많은 철비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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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관 길 건너편에 있는 질청(秩廳)은 문이 닫혀 있었다. 질청은 길청의 다른 말로 ‘군아(郡衙)에서 구실아치가 일을 보던 곳’이로 풀이된다. 구실아치는 조선 시대에, 각 관아의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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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관 바로 뒤에 있는 거제초등학교 본관이 등록문화재(제356호)라기에 잠시 외관만 살폈다. 이 건물은 거제시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 기관인 거제초등학교 본관이다. 정면은 대칭형으로, 박공형으로 장식한 현관을 중심으로 교실을 배치하였다. 외관은 당시 인근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던 화강석을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쌓는 등 근대기 학교 건물의 전형적인 형식을 취하였다. 석재 채석과 가공, 적벽돌 생산과 운반 등에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등 교사 건립에 지역공동체가 참여하여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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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6호 거제향교(巨濟鄕校)는 조선 세종 14년(1432) 고현에 처음 세워졌으나 현종 5년(1664)에 거제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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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재가 앞에 있고 사당인 대성전과 동·서무가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명륜당의 서쪽에 서재가 없고, 대성전의 규모가 명륜당에 비해 매우 큰 것이 특이하다. 다른 향교에 비해 영역이 넓으며 전체에 토속적인 돌담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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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면을 벗어나기 전 오수리 바닷가 죽림마을로 향한다. 거제도는 제주도 다음으로 넓은 섬이어서 섬에 들어온 뒤 제대로 바다를 보지 못했다. 물론 내 걸음이 바닷가 풍광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문화유적을 만나러 다니는 길이기에 그렇지만. 아무튼 죽림마을 할매미륵을 찾아가는 길에 거제도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포구에 닿게 되었다. 포구 역시 치열한 삶의 현장임을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지만 평소 이런 곳을 찾을 일이 없는 나그네의 가슴을 살짝 뛰게 하는 정도의 신선함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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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다녀오신 분들의 글을 보고 찾아가는 길이지만 정확한 지번은 알 수 없었다. 바닷가를 계속 가다보면 나오겠거니 하면서 진행하지만 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현장에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지도로 확인해보면 오수리는 자그마한 반도 형태이며 북쪽에 작은 포구가 있고, 동쪽에 보다 큰 포구가 있으며, 남쪽에는 해수욕장이 있다. 다녀온 지금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동쪽 포구 끝, ‘거제면 오수리 1097-5번지’에 죽림리할매미륵을 모시고 있는 미륵당이 있는 것 같다. 해변에서 큰 나무를 찾는 것이 빠르고, 나무 아래 작은 시멘트 건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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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당(彌勒堂)은 누구의 손으로 세워진 것인 지는 확실치 않으며 다만 바다 속으로부터 떠오른 미륵불을 모셔둔 당이라 한다. 본래는 기와지붕이었는데 허물어져 마을 청년회에서 시멘트로 지어 놓았다고 한다. 현재는 알루미늄 새시로 문을 만들어 놓았고, ‘미륵당’이라는 현판도 없이 위쪽에 매직으로 ‘할매미륵~~~神~~’이라고 써놓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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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당 주위의 바닷물이 빠지면 북쪽편에 누워 있는 다른 미륵불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머리는 없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3년에 1번씩 마을의 평안을 비는 굿을 이 미륵당에서 행한다고 전한다. 미륵불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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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크지도 않은 미륵불은 현재 상태로는 얼굴 부분이 전체의 반 정도나 될 정도로 균형이 맞지 않다. 물론 하부가 땅에 묻혀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흐릿하여 형상을 잘 알아볼 수 없다. 그나마 얼굴 부분은 조금 선명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겨우 무엇인가 표현했구나 하는 정도다. 하긴 뭐 그런 게 중요할까? 민초들의 마음에 미륵으로 모셔졌다면 그걸로 족한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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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설명문 출처: 문화재청, 전국문화유적총람, 현장설명판]
첫댓글 봄이군요. 그 날이 싱숭생숭하게 다가오는 내마음은...
거제에서 가슴 설레는 일이 있으셨던가 봅니다^^
질청의 대청마루입니다. 질청 출입문은 요령껏 하면 열 수 있는데...
잠긴 문 앞에 주민들이 앉아 있어서 아예 시도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때 거제 땅을 받을 걸 그랬어.....
가지 않은 길이 아쉽지 않을 수야 없지만 다시 기회가 오리라고 믿습니다^^
할매미륵은 다시 봐도 정겹네요.^^
그렇지요? 이미 하늘사랑님께서 충분히 보여주셨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