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키프로스 섬에 피그말리온이란 사내가 살고 있었다. 당시 키프로스 섬의 여인들은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아 몸을 파는 신세가 되어, 온갖 퇴폐적이고 부도덕한 생활을 했다. 이를 지켜본 피그말리온은 여인들에게 깊은 혐오감을 느껴 그녀들을 멀리하고 혼자 살아가기로 작정한다.
대신 그는 조각의 달인이라 상아로 여인의 모습을 조각하게 된다. 자신이 창조한 여인의 모습이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워서 그만 그 조각상과 사랑에 빠져 갈라테이아라는 이름도 지어준다. 그녀를 쓰다듬고, 껴안고, 입을 맞추고, 예쁜 옷도 입혀 보고, 온갖 장신구로 몸을 치장해 주면서 그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 가지만, 그러나 늘 돌아오는 건 조각상의 싸늘한 감촉과 허전함뿐이었다.
아프로디테의 제전이 있는 날이면 키프로스에서는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축제가 있는 날 피그말리온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신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신들이시여, 저에게 상아 처녀와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이 말을 들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그의 애절함에 감동하여 소원을 들어주었다.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으레 그렇듯, 갈라테이아를 먼저 살펴보았다. 조각상에 입을 맞추자 그날따라 입술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깜짝 놀란 피그말리온은 손으로 처녀 상의 몸을 쓰다듬으니 그 딱딱했던 조각상이 점차 부드러워지고, 숨을 쉬고 피가 돌아 두 뺨도 빨그스름해졌다. 감격에 겨워 정열의 열기를 참지 못한 피그말리온은 다시 처녀에게 입을 맞추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살아 숨 쉬는 존재, 즉 갈라테이아는 이제 생명을 가진 인간이었다.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고, 두 사람은 여신의 축복 속에서 마침내 결혼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양 예술에 있어서 그리스․로마 신화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문학, 음악, 조각, 그림, 영화 등 그 밑바탕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그리스․로마 신화가 버티고 있다. 피그말리온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조각품, 그림, 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또 우리에게 ‘피그말리온 효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즉, 간절히 원하면 꿈을 이루게 되고, 또는 자기 암시의 예언적 효과를 통해 긍정적인 생각이 좋은 영향을 준다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약간 비켜난 시각에서 접근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꿈의 실현이라는 의미보다는 사랑에 초점을 맞춰서 말이다. 인간에게 사랑만큼 절대적인 단어는 없을 것 같다. 사전적 의미로 사랑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대상을 아끼고 위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 의미로는 왠지 미진한 감이 있다. 생명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 해 보려 한다. ‘생명을 불어넣는 힘’, ‘살게 하는 힘’이라고 말이다. 피그말리온이 신의 힘을 동원했든, 어쨌든 결과적으로 갈라테이아에게 숨을 쉬게 했고, 피가 흐르도록 했고, 그 결과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은 것인데 적어도 이 정도쯤은 돼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타인에게든 자신에게든 말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말 중에 사랑은 가장 고귀성을 가진 단어임에도, 지금은 그 힘을 점차 잃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나마 남녀관계의 연애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자애로의 감정이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요즘 여러 가지 살벌해진 사건들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이것에도 자신이 없다. 사랑이란 말이 마치 좁은 벽장 속에 갇혀 답답해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인간관계에서 그 의미가 끝없이 확장되어야 하는데, 갈수록 그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생기마저 잃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나를 넘어 타자로까지 향하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아끼는 등의 감정으로써 말이다. 이 사랑이라는 말속에는 항상 나 아닌 다른 사람 또는 다른 것이 내재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종교적인 의미로서의 넓은 사랑의 의미까지 확장하고 싶지는 않다. 나라는 전제하에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사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나의 경우는 그렇다. 사랑하면 약간의 주춤거림이 있다. 즉,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사랑해야 하고, 애써 노력해야 하는 사랑은 때론 심리적인 압박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물론 무한 반복으로 ‘사랑’, ‘사랑’하다 보면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또 부자연스럽기도 하고 거부감이 들 때도 있다. 약간 극단적인 예일 수는 있겠지만 “고객님 사랑합니다.”와 같은 말처럼 말이다.
의식의 변화는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보다는, 자발적이거나 자연스러움을 동반할 때 가장 큰 힘을 발할 수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사랑!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사랑! 그래서 그 기운이 뭉쳐 거대한 에너지가 되어 세상을 밝히고 맑히는 사랑, 이런 사랑을 위해서는 내가 먼저 생의 기운이 충전되어야 하고 사랑이 충만해져만 가능할 것 같다. 그래야만 나눌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즉,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바로 ‘사랑의 결정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사랑을 ‘생명을 불어넣는 힘’ 또는 ‘살게 하는 힘’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 또는 회복하는 것, 즉 우리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고, 심장에서는 설렘이 일고, 반짝이는 눈빛과 밝고 환한 얼굴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결정체가 아닐까? 마치 피그말리온이라는 사랑의 결정체가 싸늘한 조각상을 갈라테이아라는 생명을 가진 존재로 탄생시킨 것처럼 말이다.
Ⅱ
난 이와 똑같은 현상이 한 트롯 가수의 팬카페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즉 갈라테이아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현상 말이다. 이 가수의 팬층 6~70% 이상이 60대 이상의 연령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의 팬카페 활동을 보면 마치 어시장에 온 것 같은 분위기를 방불케 한다. 그만큼 생기발랄하다는 것이다. 이 가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마치 어쩌다 거물에 걸려 퍼덕거림을 멈추지 않는 물고기처럼 어디서 그런 왕성한 에너지들이 나오는지 10~20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지 않다. 동 서주를 마다하지 않고,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오직 그 가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의 눈으로 살피고 찾아다니는 모습이 20대로 다시 돌아간 소녀들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 즉, 왜 지금에 와서 트롯이 우리 가요계를 휩쓸고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주도해 온 핵심 단어는 성장과 성공이었다. 즉 국가적으로는 ‘성장’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성공’이었다. 우리나라가 지금과 같은 경제 대국이 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것에 대한 목표와 욕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이 성장과 성공의 주체는 누굴까? 바로 50대 이후 세대다. 그동안 쉴 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다 어느 시점에서 누구는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또 누구는 이것에 대한 허기와 한계를 느끼면서 그동안 억눌려 왔던 감정을 달래거나 표출하는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세대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가장 유연한 연령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어려움과 성장을 동시에 경험했기에 어떤 내외적인 바람에도 탄력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또 자녀부양에 대한 책임도 다소 빗겨나 있으며, 경제적인 여유도 어느 정도 갖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자기의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 또한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동안 트롯을 부르는 가수들 대부분 이 세대와 비슷한 연령층이 주를 이루었다면, 최근에 와서는 자신만의 특출한 재능과 개성을 뽐내는 젊은 가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들은 트롯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중장년층의 억눌러있던 감정을 자극함은 물론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50대 이후 세대는 이러한 젊고 발랄한 트롯 가수들을 통해 과거 자신의 가장 화려했던 때를 회상하거나 대리만족하게 되면서 트롯 열풍에 편승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주도 세력으로까지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많은 트롯 가수 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한 가수가 있다. 자칭 ‘전통가요지킴이’라고 하는 데뷔 3년 차에 접어든 23살의 조명섭이다. 모 방송국의 트롯 경선프로그램에서 우승하면서 가수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그의 외양이나 노래는 여느 가수와는 딴판이었다. 마치 개화기의 젊은 신사가 100년 만에 귀환하여 당시의 말투와 노래를 재현하는 듯한데, 이것에 걸맞게 그가 여기에서 불렀던 노래도 우리의 옛 가요인 현인의 ‘신라의 달밤’과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었다.
20대 초반의 새파란 청년이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곱게 빗어 올리고, 물 찬 제비처럼 흐트러짐 없는 양복 차림에 나비넥타이를 맨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반세기 훨씬 전의 중후하고 멋스러운 신사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게다가 중저음의 깊고도 깊은 목소리는 폐부 깊숙이 스며들게 하여 그동안 메말라가던 마음 자락을 단비 내리듯 촉촉이 적셔 주는데, 이것은 세상의 맛을 어느 정도 안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얼핏 언급했듯이 조명섭 가수의 팬층은 6~7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요즘 가수 중에 가장 고령층의 팬들이 포진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이들이 지금 조명섭을 앞세우고 생의 한가운데로 귀환하고 있다. 그동안 생의 후반기라고 스스로 한정 지으며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무력감에 빠져 있던 차에, 조명섭이 혜성처럼 나타나 이들을 까르르 웃게 하고, 수다로 꽃피우게 하고, 노래 부르게 하면서 심장에서는 맥박이 다시 용솟음치고, 흐리멍덩해가던 눈빛은 다시 빛을 발하고, 굳어가던 몸과 핏기 없던 뺨은 다시 부드러워지고 홍조를 일게 함으로써 이들을 점차 갈라테이아로 변모시키고 있다.
이들은 또 그의 노래를 즐겨듣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여느 젊은 팬 못지않게 조명섭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타나 함성을 지르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하기도 한다. 조명섭을 응원하기 위해 팬카페에 올린 글을 보면 처음에는 다소 서툴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특히, 응원에 필요하다면 뭐든 마다하지 않는 열정과 도전정신은 혀를 내두를 정도인데, 디지털 기기의 빠른 습득 능력은 매일 이러한 기기를 접하고 있는 필자마저도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조명섭은 이들에게 두 세대의 삶을 동시에 살게 한다. 무대에서 장년의 모습으로 분한 그의 외양과 노래를 통해 이들은 예전의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추억 하나하나를 건져 올리게 되고, 현실에서는 20대 초반인 그의 젊음과 동일시함으로써 삶의 활기를 되찾음은 물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한 설렘과 흥분을 경험하고 있다. 즉 마음은 자신의 젊은 시절로 몸은 지금의 조명섭의 나이대로, 하여 이들의 마음과 몸은 나이들 여유 없이 점점 더 젊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보면서 여기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치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떤 대상을 열렬히 좋아하고 응원하는 만큼 사람을 활기차게 하는 것도 드물다.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것은 이제 젊은 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것은 최근의 트롯 열풍이 가져온 가장 긍정적인 효과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지금 장년층들에게 크게 사랑받고 있는 트롯과 트롯 가수들은 의사들 못지않게 노인들의 건강과 치매 예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렇게도 바꿀 수도 있겠다. ‘사랑은 그 사람(그것)을 통해 나를 깨우고, 그리고 또 다른 나를 끄집어내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요즘에 와서는 더더욱 삶이 흥미롭고 신비롭다. 불과 얼마 사이 삶의 방향이 확 달라진 느낌도 든다. 나 또한 조명섭 가수의 열렬한 팬이다. 나의 글쓰기는 그를 응원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명섭 가수를 통해 나는 나를 다시 발견하게 된 셈인데, 그런 의미에서 그는 나의 피그말리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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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포근님~ 오늘 글도 무척 의미깊게 다가오네요^^ 저 또한 갈라테이아가 되어 다시 온 몸에 피가 돌며 생기를 느끼는 기적을 맛보고 싶네요ㅎㅎ
에밀스 여사에서 에밀스 소녀가 되어가는 기적~~
오늘 아침엔 아파트 댄스를 따라추며 텐션업~~ㅎㅎ 오늘도 포근하고 행복한 하루되세요~❤️
나미님! 꼭 그리되리라 믿고 또 그렇게 되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ㅎ.
좋은 아침 좋은글 너무 감동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현모님!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포근님 의 길고 좋은글 에서 많은 동감을 느낍니다
저도 지금나이 84 세입니다 언제 나를위해 살아본 시간이 있었나 싶네요 ~
조명섭 우리가수님 만남이 이렇게 많은 변화를 맏고 남은 나의삶을 소중한 시간으로 가수님 바라보며 즐겁게 막바지 인생을 살고있답니다
가수님은 분명 큰사명을 갖고 오신 우리 인간에게 크나큰 선물입니다~
오늘도 가수님께 고마워 하며 나를위해 노래를 들으며 소중한 시간을 살고있답니다~~^^
토끼님! 너무 멋지십니다.
우리 가수님! 에밀스!의 나이를 반토막으로 만들어 버리거든요.~ㅎ
감사합니다.
생명력이 소진되어가는 세대 맘껏 즐길 여력이 없었던 세대에 활력을 불어준 트로트 경연들 속에 많이들 빠져 들었지만 좀처럼 동화 되지않던 저에게 어느날
혜성처럼 나타난
우리가수님 덕분에 새로운 삶을 누리고 있네요
우리가수님 너무도 소중한분
아끼고 사랑 해야지요
포근님 글 감사합니다
베티님! 우리 가수님! 사랑의 밧데리죠~ㅎ
감사합니다.
포근님 글 잘읽었습니다
너무도공감합니다
평생연예인 관심없던 저도
울가수님 한데 푹빠져 시간가는게 참 안타갑습니다
가수님 만나 매일같이 즐겁습니다 콘서트 기다리는
재미도 큰기쁨이더군요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송님! 찌푸린 인상도 순식간에 활짝 펴게 해요. ㅎ
감사합니다.
포근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저의 피그말리온도 조명섭 가수,
늘 응원합니다.
조명섭 & 에밀스 파이팅!!!♡
초록향기님!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피그말리온 효과를
설명 하시느라
장문의 논문을
쓰셨네요
매우매우 공감하는
명 논문 입니다
에밀스는 가수님의
피그말리온 격이지요
대단 하세요
존경 합니다.
가을님! 너무 긴 글인데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포근님의 장문의 글이
저를 포근하게 합니다
조명섭 가수님이
에밀스에게 생명과 사랑의
힘을 불어 넣어 주는군요
공감합니다
에밀스를 열정 가득한
청춘으로 되돌려 놓는 능력을
갖춘 명보스를 사랑합니다
수준 높은 칼럼글에
박수 보냅니다
로빙화님!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오늘도 나는 갈라테이아가 되서 조명섭가수님께 푹 빠져 콘서트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익한글 수고 하신 포근님 응원합니다🙆
꽃길님! 이제 세 밤만 자면 되네요 ㅎ
감사합니다.
살아숨쉴수있게
날마다좋은노래 불러주시는 가수님
또이렇게 우리에밀스의
과거 현제 미래까지의 꿈같은행복한 시간들을
잘 정의해주시는 포근님을
포함한 우리카페 작가님들
모두모두 우리의 보배이십니다
행복합니다
그리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화박색깔님!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포근님 늦게 글 봤습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를 자세히 설명하셔서 에밀스의 정체성에 대해
기초개념을 잘 정립해 놓으셨군요
전 개인적으로 긴글을 마다하지 않는 편입니다.
긴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많아야 사회가 발전한다고 들었어요
이해와 성찰의 용량이 그만큼 증가한다는 뜻이죠. 한 줄짜리 글에 몰두하는 사회는 얕고 비참하다 하더이다
긴 글 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글도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