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신축 공사 중인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1970년대 중반, 국회의사당 이외에는 아무것도존재하지 않았던 여의도에 핵심 기관들이 속속 입주하기 시작합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1973년), 국회의사당(1975년 완공), 우체국(1975년), 한국노총회관(1975년), KBS(1976년), 한국화재보험협회(1977년), 한국교직원공제회(1978년), 전국경제인연합회(1979년), TBC(1980년), MBC(1982년), SBS(1990년) 등 공기업과 방송사들이 여의도로 모여들었으며 대법원과 종합병원 부지로 점찍어 두었던 동쪽 끝 부지에는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63빌딩(1985년)이 들어서게 됩니다.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은 1978년 화재보험협회빌딩에 자리잡았고,
증권거래소는 동양 최대 입회장을 갖춘 사옥을 준공하며 1979년 7월부터 여의도로 자리를옮깁니다.
주로 명동에 자리를 잡고 있던 증권사들은 이때부터 서울대교(현 마포대교)를 오가며 업무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증권사들이 곧바로 감독원과 거래소를 따라 본사를 여의도로 이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20년 경성주신현물취인소가 들어선 이후 금융중심지 역할을 맡아온 명동에서의 증권거래 주문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여의도를 능가했으니 기업들로서는 이전을 검토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1979년 증권거래소 별관에 입주하는 방식으로 일찌감치 본점이나 지점을 낸 국일(현 KB), 신흥(현 현대차) 등 중소형 증권사들은 '식당도 없고 정보도 얻기 힘든 고도(孤島)'라고 투덜거렸다고 하네요.
여전히 많은 이용객들이 명동을 찾았고 여의도는 돈을 모으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라는 풍수지리적 해석이 더해지면서 기업주들은 여의도로의 이전을 꺼렸습니다.
당시 증권사 사이에서는 '금새 허물어질 수 있는 모래밭에 바람도 센 땅이라 돈을 모으기에는 부적절하다'는 풍수적 해석과 '주색(酒色)의 기운이 강해 망신살을 경계해야 한다'는 명리학적 해석이 떠돌았습니다.
이런 해석때문인지는 몰라도 여의도로 이전한 뒤 주인이 바뀌거나 슬럼프에 빠진 기업도 적지 않습니다.
NH투자증권(LG투자증권-우리투자증권-NH투자증권), 신한금융투자(쌍용증권-외국계-신한금융투자)는주인이 자주 바뀌었고,
유안타증권의 전신인 동양증권은 동양사태(사기성 CP발행으로 수많은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로 존폐위기를 맞으면서 여의도 사옥을 팔고 명동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일찌감치 여의도에 자리잡은 국회는 여의도로 이주하려는 기업에 텃세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입지와 주변 경관을 중시한 국회는 주변에 사옥을 지으려는 기업들에게 의사당보다 낮은 층고를 강요했습니다.
오늘날 여의도가 여의도공원을 경계로 '동고서저'의 형태를 띄게 된 데에는 국회의 간섭 때문이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