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H2O인가?>
- 장하석 (김영사, 2021)
1장 물과 화학혁명
- 고대 이래 원소로 여기던 물이 화합물이라는 것이 최초 밝혀진 것은 18세기 후반 화학혁명을 통해서였다. 나는 수정주의적 입장에서 그 중대한 사건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다.
- 체계적 평가에서 드러나듯이, 과거의 플로지스톤주의 화학 시스템은 라봐지에의 산소주의 화학 시스템보다 명확히 열등하지 않았다. 실제로 라봐지에의 시스템은 당대에 이미 알려진 중요한 경험적 이론적 문제들에 시달렸으며,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과 산소주의 시스템 사이에는 상당한 방법론적 비정합성이 있었다.
- 라봐지에주의자들의 효과적이고 무자비한 캠페인도 역할을 했지만, 플로지스톤이 종말을 맞은 것은 무엇보다도 합성주의(compositionism)가 화학의 지배적 경향으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플로지스톤주의의 관행은 합성주의와 쉽게 들어맞지 않았다.
- 플로지스톤이 종말을 맞으면서 값진 지식의 요소들이 많이 소실되었다. 그것들은 나중에 다른 개념들(퍼텐셜에너지, 전자)의 도움으로 사실상 복구되어 발전되었다.
- 나는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이 계속 존속할 수 있었다면 과학을 위하여 더 나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결론은 과학에서의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더 일반적인 주장을 선취하는 것이기도 하다.
1.1 요절한 플로지스톤
- 오늘날 우리는 물이 원소가 아니라 화합물이며 산소와 수소로 이루어졌음을 안다. 이 장은 200여 년 전에 일어난 화학혁명의 결과로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들려준다. 이것은 이미 많이 거론된 이야기로, 왜 내가 또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많이 거론된 그 이야기들이 대부분 틀렸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상황에 관한 오류가 있거나, 중요한 과학적 논증들을 누락했거나, 심층적인 오해에 기초하여 판단을 내렸거나, 철학적으로 지나치게 순박하고 단순하다는 뜻이다.
1.1.1 조지프 프리스틀리
- 18세기 아마추어 과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1733~1804). 공영 양조장과 붙어 있는 주택에 거주하는 행운, 발효 통 안에 축적되는 것으로 밝혀진 ‘고정 공기’(이산화탄소)를 가지고 실험하는 과정에서 인공 탄산수를 만들어내는 방법 발견해 유럽 전체에서 유명.
- 프리스틀리는 새로운 공기들을 가장 많이 발견하고 생산한 인물. 그의 연구 이후, 평범한 공기는 최소한 2가지 성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화학반응에 의해 여러 유형의 공기가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정착.
- 그는 오늘날 우리가 ‘산소’라고 부르는 기체를 생산하여 병에 담고 그 기체에 대한 이야기를 세계에 들려준 최초의 인물. 그가 전성기에 다녔던 교회 건물 벽에는 “산소의 발견자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1767년부터 1773년까지 이곳의 목사였다.”라는 문구가 표지판에 적혀있음. 이런 기념 문구를 프리스틀리가 보았다면 짜증을 냈을 것.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새로운 기체를 ‘산소’라고 부르지 않았고, ‘탈플로지스톤 공기’(dephlogisticated air)라는 명칭을 사용했기 때문. 이는 언어적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그는 평범한 공기에 섞여 있는 ‘플로지스톤’을 제거하고 남은 공기를 가리키기 위하여 그 문구를 사용했다.
- 플로지스톤 : 가연성의 요소. 여기서 ‘요소’란 영어로 ‘principle’인데, 현대적 어법에서는 ‘원리’를 뜻하지만, 이 경우에는 다른 물질들과 결합하여 자신의 고유한 속성들을 그 물질들에 부여하는 어떤 근본적인 물질을 뜻했다. 플로지스톤은 가연성 물질들에 가연성을 전달해주는 요소였다. 가연성 물질은 플로지스톤을 풍부하게 보유한 물질이었고, 연소할 때 자신이 보유한 플로지스톤을 방출했다. 이 방출은 연소할 때 생겨나는 불꽃을 통해 드러났다.
- 몇몇 실험들은 금속들도 플로지스톤을 풍부하게 보유했으며 반짝이는 광택, 가단성, 연성, 전기 전도성 같은 금속 특유의 속성들이 플로지스톤에서 유래함을 시사하는 듯했다. 금속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하면, 금속은 금속의 핵심 속성들을 잃고 ‘금속회’(calx)라는(오늘날 녹이나 산화물로 판정하는) 흙과 유사한 물질이 되었다.
- 이 모든 이야기는 현대인들의 귀에 너무 심한 상상으로 들린다. 그러니 우리가 플로지스톤 이론가에게 상식을 일깨울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만일 금속회가 플로지스톤을 잃은 금속이라면, 금속회에 다시 플로지스톤을 제공함으로써 그것을 금속으로 되돌릴 수 있어야 할 것. “그렇게 되돌릴 수 있나요?”라고 우리가 물으면, 플로지스톤 이론가는 “당연히 되돌릴 수 있죠”라고 대답한다. 수천 년 전부터 용광로가 해온 일이 바로 그것이다. 금속을 함유한 광석은 순수한 금속이 아니라 금속회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런 광석을 숯처럼 플로지스톤이 풍부하게 함유된 물질과 혼합하라. 이어서 그 혼합물을 강하게 가열하여 플로지스톤이 숯에서 금속회로 이동하게 만들어라. 그러면 반짝이는 금속이 나온다.
- 독일 의사 겸 화학자 게오르크 에른스트 슈탈(1659~1734)은 황과 황산 사이에서 이와 유사하게 일어나는 상호변환을 연구했는데, 그 연구는 플로지스톤 화학의 주춧돌이 된 실험들 중 하나였다. 플리스틀리가 산소를 생산한 방법도 그가 생각하기에 슈탈의 실험과 유사했다. 수은 금속회가 공기로부터 플로지스톤을 흡수하여 “생기를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공기를 “탈플로지스톤화”함으로써 산소(탈플로지스톤 공기)를 생산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탈플로지스톤 공기는 연소를 특별히 잘 뒷받침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런 공기는 플로지스톤을 아주 왕성하게 재흡수할 테니까 말이다.
- 프리스틀리가 프랑스혁명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1791년에 반동적인 군중이 그의 집과 실험실을 약탈했다. 그 후 그는 런던 생활을 시도했지만 미국으로 도피해야 했다. 젊고 세련되었으며 재능과 야망을 겸비한 라봐지에가 일으킨 과학적 진보의 물결이 프리스틀리의 연구를 쓸어낸 것은 슬프지만 불가피하고 옳은 일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라봐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실험들과 관찰들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다. 연소는 녹슮과 마찬가지로 산소와의 결합이었다. 프리스틀리가 탈플로지스톤화를 본 곳에서 라봐지에는 산화를 보았다. 라봐지에가 비춘 빛을 보고난 화학자들은 다시는 플로지스톤을 돌아보지 않았다.
1.1.2 물
- 산소 이론과 플로지스톤 이론의 경쟁에서 결정적인 대목 하나는, 물은 전혀 원소가 아니며 산소와 수소의 화합물이라는 라봐지에의 주장이었다. 당시에 산소를 만드는 방법을 가장 잘 알았던 인물은 프리스틀리였고, 수소는 플로지스톤주의 동료인 헨리 캐븐디시(1731-1810)에 의해 1766년에 발견되고 연구된 바 있었다. 캐븐디시의 수소 생산 방법은 금속 조각을 산에 담기는 것이었다. 캐븐디시는 또한 그 두 공기(산소와 수소)를 폭발시켜 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발견했고, 프리스틀리는 그 실험을 성공적으로 재현했다. 이 작업 방법을 라봐지에에게 가르쳐준 사람은 프리스틀리와 캐븐디시였다. 그럼에도 통상적 이야기에 따르면, 이 기체들이 무엇이고 서로 반응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옳게 해석한 인물은 라봐지에였다.
- 그러나 실제로 물의 합성은 플로지스톤 이론의 놀라운 설득력을 예증하는 사례다. 캐븐디시와 프리스틀리는 한동안 수소(그들 용어로 ‘가연성 공기’)를 산의 작용으로 금속에서 추출된 순수 플로지스톤으로 여겼다. 금속회를 산에 집어넣으면, 금속회는 가연성 공기를 산출하지 않으면서 용해되었다. 왜냐면 금속회는 플로지스톤을 함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캐번디시와 프리스틀리에게 가연성 공기는 ‘과플로지스톤 물’, 즉 플로지스톤을 과다 함유한 물이었다. 한편 ‘탈플로지스톤 공기’, 산소는 ‘탈플로지스톤 물’이었다. 과플로지스톤 물과 탈플로지스톤 물이 서로 결합하면, 플로지스톤 과다와 결핍이 상쇄되어 평범한 물이 산출되었다.
- 물의 합성에 관하여 2개의 경쟁하는 견해들이 있었으며, 두 견해 모두 설득력과 일관성이 있었다.
(1) 수소 + 산소 -> 물
(2) 과플로지스톤 물 + 탈플로지스톤 물 -> 물
- 역사에 밝은 철학자들은 프리스틀리의 견해에서 틀린 점이 정확히 무엇인지 지적하기 위해 애써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틀렸음을 안다. 왜냐하면 플로지스톤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우리는 억눌러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말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는 질문을 유발할 따름이니까 말이다.
- 순수한 형태의 플로지스톤을 분리해 낼 수 없었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없다. 우리가 그런 물질적 분리 가능성을 항상 요구한다면, 과학의 모습은 영 달라졌을 것이다. 퀴크, 에너지, 칼로릭을 비롯한 폭넓은 개념들을 모두 포기해야 할 테니까.
- 플로지스톤은 관찰 불가능했으므로 과학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개념이었다는 말도 소용이 없다. ‘관찰 가능성’을 어떻게 정의하건 간에, 오늘날의 과학은 관찰 불가능하지만 이론적 필수성 때문에 상정된 대상들(암흑물질, 초끈)로 가득 차 있다. 또한 플로지스톤이 관찰 불가능했는지도 불분명하다.
1.1.3 라봐지에 이론의 난점들
- 프리스틀리는 자신의 플로지스톤 이론을 고수할 만했다.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실제로 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왜 프리스틀리를 뺀 나머지 거의 모두가 라봐지에의 편이 되었고 왜 그의 이론을 계속 지지했는가, 하는 것이다.
- 화학혁명에 대한 판에 박힌 오래된 이야기로부터 우리 생각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나는 우선 현대 화학과 물리학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라봐지에가 얼마나 틀렸는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존 매커보이의 말마따나, 이미 “18세기 말에 이르렀을 때, 라봐지에가 산소의 본성과 기능에 관하여 제기한 주요 이론적 주장이 거의 모두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로버트 시그프리드는 “그의 연구에서 그토록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끈 핵심 전제들이 틀렸다는 점이 늦어도 1815년경에 실험적으로 밝혀졌다”라고 말했다.
- 라봐지에 화학 시스템의 주요 기둥 3개는 기존 화학과의 명백한 결별을 상징했다. 산(acid) 이론, 연소 이론, 칼로릭 이론. 이 모든 이론들은 틀렸다. 현대 화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하고, 심지어 19세기 화학의 관점에서 볼 때도 그러하다.
- 산 이론: 모든 산이 산소를 함유한다고 주장. 염산이나 시안화수소산을 비롯한 몇몇 산에 산소가 들어있다는 증거가 없음을 라봐지에주의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 연소 이론: 연소에서 열이 산출되는 것에 대한 라봐지에의 설명은, 산소 기체로부터 칼로릭 유체가 방출된다는 것이었다. 애당초 산소는 그 칼로릭 유체를 보유한 탓에 기체 상태라고 라봐지에는 덧붙였다. 토머스 톰슨은 <화학 시스템>이란 저서에서, 기체 상태의 산소가 개입하지 않는 연소의 사례들(화약 폭발 등)을 요약하면서, 라봐지에의 이론은 연소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다고 지적. 칼로릭 이론도 문제...
- 과학철학자들과 과학사학자들이 그 두 이론을 둘러싼 논쟁이 단순히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채고서, 왜 대다수의 화학자들이 라봐지에의 편을 들었는지 설명하는 과제에 도전해왔다.
- 라봐지에의 새로운 화학은 관찰에 기초한 귀납을 통해 확립되지 않았다. 금속이 산화할 때(녹슬 때) 금속의 무게가 증가하는 것과 같은 사실들에 의해 플로지스톤 이론이 간단히 반증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틀린 얘기다. 라봐지에의 이론이 승리한 것은 그 이론이 플로지스톤 이론보다 더 단순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호소력 강할지 몰라도 마찬가지로 오류다.
- 라봐지에를 편드는 합의의 합리성을 옹호하려는 이 모든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흔히 2가지 방향이 추구되는데, 하나는 좀 복잡한 방식의 단순주의에 의지하여 화학혁명이 합리적이었다는 전제를 방어하는 것, 다른 하나는 사회적 설명들을 모색함으로써 합리성에 대한 전통적 철학적 관심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1.1.4 물이 원소일 수 있을까?
- 플로지스톤 이론이 때 이르게 살해되었다, 라는 결론의 함의
- 내가 그 이론이 이르게 버려졌다고 믿는다면, 나는 만약에 그 이론이 존속했다면 무엇이 성취될 수 있었을지 숙고해야 한다. 나의 주요 목표는 ‘만약에... 였다면’을 내세우는 가상적 역사 서술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더 활동가적인 유형의 학문 활동을 옹호한다.
- 질문 제기
(1) 과학자들이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을 거부함으로써 상실한 지식이 혹시 있었을까?
(2) 플로지스톤 시스템이 존속했다면 발전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 이론의 때 이른 죽음 때문에 발전이 지체되거나 가로막힌 지식이 혹시 있었을까?
(3)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과 산소주의 시스템이 둘 다 있었을 때, 두 시스템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 이로운 결과들이 있었을까?
(4) 만약에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이 존속했다면, 산소주의 시스템과 이로운 상호작용이 계속되었을까?
- 화학혁명에 대한 나의 특이한 견해는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것이다. 플로지스톤 이론에 대한 거부가 성급하고 근거가 없었다면, 물이 원소라는 생각에 대한 거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물은 확실히 원소가 아니지 않는가? 당신이 물이 원소라는 생각과 같은 기이한 것들을 믿는다면, 현대 과학의 무게 전체가 당신을 짓누를 것이다.
- 하지만 물을 원소로 간주하는 합리적 과학 시스템이 정녕 존재할 수 없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존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이름은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이었다.” 혹은 실은 화학혁명 이전의 모든 과학 시스템들이 물을 원소로 간주했다.
- 더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물을 원소로 간주하는 시스템을 우리의 현시점에서 타당하다고 믿을 수 있거나 최소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숙고할 때에도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한다. “당연히 우리는 이제 물이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임을 안다. 어떤 이론이든지 이와 다른 말을 한다면 틀린 이론이며 숙고할 가치가 없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물은 화합물이라는 것 등의 전제들에 기초한 과학적 세계관의 포로들이기 때문이다.
- 진정한 다원주의적 도전은, 우리가 그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물이 화합물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 또 다른 세계관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런 세계관이 존재한다면, 그 세계관을 발전시켜 얻을 만한 혜택이 있을까 묻는 것이다. 이언 해킹의 뒤를 이어 레나 솔레가 말하듯이, 일반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잘 확립된 과학적 결과들은 필연적일까, 아니면 우연적일까? 우리의 과학만큼 성공적이고 진보적이지만 내용이 근본적으로 다른 과학이 존재할 수 있을까?
1.2 플로지스톤이 살아남았어야 하는 이유
- 플로지스톤 이론을 버리고 라봐지에의 이론을 채택할 이유를 제공하는 결정적 증거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화학자들은 그런 정당화되지 않은 선택을 했을까? 당대의 화학자들이 라봐지에를 옹호하는 합의에 실은 간단하고 신속하고 보편적으로 도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확실한 다수가 결국 플로지스톤을 버렸음을 인정하면서, 그런 집단적 결론이 내려진 이유는 화학혁명의 바탕에 깔린 더 크고 장기적인 경향, ‘합성주의’의 도래일 것이다.
1.2.1 플로지스톤 대 산소
-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과 산소주의 시스템은 공유한 문제들 중 대다수에 대하여 전혀 다른 해답들을 내놓았으며, 누가 그 문제들에 대하여 전혀 다른 해답들을 내놓았으며, 누가 그 문제들에 대해 더 나은 해답을 내놓았는가에 대한 판단에서 견해가 엇갈렸다.
-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순성과 완전성의 대립이었다. 산소주의자들, 특히 라봐지에 본인은 단순성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특히 우아함이라고 할 만한 유형의 단순성이 중시되었다. 플로지스톤주의자들, 특히 프리스틀리는 완전성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주어진 문제 영역에 속한 모든 관찰된 현상들과 그것들의 모든 관찰된 측면들을 설명하기를 원했다.
- 플로지스톤을 옹호하는 많은 논증들의 동기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 라봐지에주의의 교조주의에 맛선 다원주의였다. 이것은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이 맹목적으로 독단에 빠져 있었다는 통상적인 견해와 정반대다.
1.2.2 화학혁명은 정말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 산소주의 시스템과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은 제각각 고유한 장점들과 난점들을 지녔었고, 어느 한쪽이 경험적 증거에 의해 더 잘 뒷받침되었다고 판단할 기준들은 다양했던 것이 명백해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증거의 뒷받침이 이론과 관찰 사이의 단순명료한 논리적 혹은 확률론적 연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서로 어긋나고 맥락적일 수 있는 인식적 가치들에 의해 매개되는 복잡한 관계라는 점을 암시하는 단서에 불과하다.
- 화학혁명의 진면목은 무엇이었나? 상당수의 화학자들이 적어도 한동안 라봐지에 화학으로 완전히 개종했으며 그 화학이 교과서들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는 것은 여전히 인정해야한다. 그러나 또한 부분적이거나 미지근한 개종 사례들도 흔했으며 그 사례들 중 다수는 플로지스톤 유지를 포함했다.
혁명은 급작스럽고 경계가 명확한 사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면적인 투쟁이었으며, 그 귀결은 만장일치의 합의도 아니었고 어떤 확고한 정통 교설의 확립도 아니었다.
1.2.3 무게, 합성, 화학적 실천
- 산소가 플로지스톤을 누르고 승리한 것은 훨씬 더 큰 변화, 곧 ‘합성주의’의 점진적 부상의 한 부분이었다.
- 화학에서 무게 계산 관행은 내가 합성주의(compositionism)라고 부르는 화학 지식의 전통 안에서 발생했다. 합성주의는 플로지스톤주의 교설의 바탕에 깔린 요소주의(principlism)와 대비된다. 합성주의를 향한 경향이 강화되면서 산소주의 시스템에는 대체로 우호적이고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에는 뚜렷이 불리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 합성주의 시스템-유형의 근본적인 인식활동 하나는 화학물질을 원소로서, 혹은 원소들로서 이루어진 화합물로서 기술하는 것이었다. 화합물을 원소들로 분해하기, 그 원소들로부터 그 화합물을 재합성하기. 분해와 재합성을 둘 다 할 수 있을 경우, 그것은 해당 물질의 조성에 관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최고의 증명으로 간주되었다. 이 실천들은 성분들이 화학반응 내내 보존되는 안정적 단위들이라는 전제를 필요.
- 18세기에 합성주의 화학의 주요 경쟁자는 요소주의였다. 요소주의는 요소 개념, 곧 특정 속성들을 다른 물질들에 주는 근본 물질의 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하나의 시스템-유형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인식활동들은 관찰 가능한 속성들에 따라 물질들을 분류하기, 요소들을 지목함으로써 물질의 속성들을 설명하기, 요소들을 추가함(혹은 빼냄)으로써 물질들을 변환하기였다.
요소주의 존재론에서 요소들과 요소들에 의해 변환되는 기타 물질들 사이의 비대칭성을 전제했다는 점이다. 요소들은 능동적이었고, 기타 물질들은 수동적이었다. 요소주의에는 과거의 잔향들이 남아 있다. 원소들이 요소들의 영향으로 달라진다는 과거의 형이상학, 심지어 물질이 형상을 부여받는다는 과거의 형이상학이 남아 있다.
- 합성주의 화학은 그 기원이 적어도 17세기의 기계론 철학자들까지 거슬러 오르며 늦어도 18세기 후반에는 완전하게 작동하게 되었다. 합성주의의 기원은 다채로웠으며, 합성주의의 우세는 빙하의 속도처럼 느리게 발생한 다양한 실천들이 합성주의에 편입된 결과였다.
요소주의적 사고는 합성주의의 블록 존재론과 불화화면서 차츰 매력을 잃었다. 그 존재론에서는 모든 물질 조각들이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를 지녔다. 18세기의 친화성 교설 덕분에 화학에서 합성주의가 확고히 정착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합성주의적 틀에서는 화합물들을 파괴 불가능한 부분들의 조합으로, 화학반응을 그 부분들의 재배열로 설명했다.
- 우리가 화학혁명을 합성주의의 매우 점진적인 확립이라는 커다란 물결 위에 올라탄 잔물결로 간주할 때, 화학혁명은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워진다. 우리가 화학혁명을 ‘현대 화학’을 낳은 사건으로 간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사건을 합성주의 혁명으로 규정하는 로버트 시그프리드와 베티 조 돕스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합성주의 혁명의 종착점은 라봐지에가 아니라 돌튼이었다.
1.2.4 플로지스톤은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
- 플로지스톤주의적 설명은, 모든 금속은 자유전자들의 바다를 보유했기 때문에 금속의 속성들을 공유한다는 현대적 견해와 실제로 매우 유사하다. 그 개념이 존속했더라면, 화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은 화학적 변환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며 특히 금속에 풍부하게 들어있는 그 미지의 물질(전자)을 더 쉽게 이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 플로지스톤이 존속했더라면, 화학반응이 무게 측정에 의거하여 식별된 블록들의 결집과 재결집에 불과하지 않음을 계속 상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플로지스톤은 화학적 퍼텐셜에너지의 표현으로서 구실했다. 산소주의 시스템의 무게에 기반한 합성주의는 화학적 퍼텐셜에너지를 완전히 간과했다.
- 플로지스톤을 죽이는 선택의 역효과는, 몇몇 소중한 과학적 문제와 그에 대한 해답이 버려진 것이고, 미래 과학을 위한 몇몇 이론적 실험적 연구 방향이 봉쇄된 것이다.
1.3 선택, 합리성, 대안
1.3.5 반사실적 역사
- 반사실적인 것들은 소설가에게는 흥미로운 영역일지 몰라도 역사학자들이 진지하게 다뤄야 할 주제는 아니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런 회의론에 맞서서 그렉 레딕과 공동저자들은 근래 <아이시스Isis>의 ‘포커스’ 섹션으로 나온 논문집에서 ‘반사실적 추론과 과학사학자’에 관한 가치 있는 고찰들이 다양하게 제시함으로써 소중한 공헌을 했다.
- 개인적으로 3가지 구체적 이유 때문에 반사실적 역사를 연구.
(1) 인과론적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나는 반사실적 추론이 역사에 대한 인과론적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제프 호손의 주장에 동의한다. 이 장의 논의에 대해 말하면, 나는 플로지스톤의 요절이 과학의 발전을 지체시켰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2) 반사실적 추론의 둘째 목적은 우리의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적당량의 반사실적 추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사고를 개방시켜주는 이점이 있다. 과학철학자가 행복한 반사실적 상황을 상상하는 능력을 보유한다면, 그 능력은 과학의 실제 과거와 현재를 찬양하는 한없이 낙관적인 경향을 완화하는 유용한 해독제일 것이다. 그런 찬양은 국외 여행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자국을 세계에서 가능한 최고의 장소로 확신하는 것과 유사하다. 반사실적 상상은 우리의 규범적 자기만족을 깨뜨리고 과학의 실제 발전에 대한 더 철저하고 면밀한 평가를 우리에게 강제할 수 있다.
(3) 나는 실제 역사가 선택하지 않은 경로들을 단지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 보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 방향에서 나의 주요 목표는 더 많고 우수한 과학 지식을 실제로 얻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나의 ‘상보적 과학’ 프로그램의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