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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3. 묵상글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 다 알려고 하지 마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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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다 알려고 하지 마라.
오늘 복음은 외아들이 죽어 가엾은 과부를 보고 외아들을 살리는 얘기인데
지난 태풍에 아들은 죽고 자기만 산 엄마의 사연과 겹쳐 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지난 명절 이 엄마가 얼마나 아플까 여러 차례 연민의 마음이 들어 저도
마음이 아팠는데 주님께서도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니 한편, 그러신 것이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생각되면서도 다른 한편, 여러 가지 생각으로 어지러웠습니다.
어쩌자고 그 과부의 죽은 아들은 살리셨습니까?
가엾은 마음이 드신다고 다 구하실 것입니까?
가여운 처지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다른 많은 사람에게 보이시는 당신의 침묵을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이번 태풍에 죽은 아들은 어떻게 하시고 그 엄마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런 걱정을 하며 묵상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제게 응답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꾸짖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주제넘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라!
내가 모든 것에 답변하지 않는데 왜 네가 답변하려고 하느냐?
너는 신비라는 말을 모르고, 신비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느냐?
나의 침묵이 나의 신비이고
네가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있음을 너는 받아들여야 한다.
옹기장이가 어떻게 옹기를 만들든 옹기가 따지지 못하듯
너희를 살리든 죽이든 그 이유를 내가 다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니고,
왜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게 하는지 네가 알아야 하는 것 아니다.
네가 다만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누굴 살리든 죽이든 다 사랑이라는 것이고,
네가 해야 할 것은,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이웃의 고통에 같이 슬퍼하다가
자비를 입게 되면 같이 기뻐하고, 같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뿐이다.
이유는 몰라도 사랑이라는 것만은 알고,
네가 네 이웃의 치유와 구원을 위해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라도
너는 같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슬픔과 기쁨만은 함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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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젊은이야, 일어나라.”(루카 7,14)
오늘 <복음>인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루가 8,40-56)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요한 11,17-44)와 함께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물론 죽은 이를 살리신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1열왕 17,17-24)라든지,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2열왕 4,32-37),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린 이야기(사도 9,36-43)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 이야기와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다른 이야기들은 그들이 하느님께 간청해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일어나라”는 한 마디의 말씀으로 죽은 이를 손수 살리십니다. 곧 당신의 신적 권능으로 살리시면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일 중에 가장 슬픈 일 중의 하나는 아마도 소중한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떠나보내는 일일 것입니다. 불의의 사고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슬픈 일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간 자식을 잃었을 때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는 오로지 외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가, 이제 그 외아들마저 잃었으니 그 슬픔이 오죽하였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하시며,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야, 일어나라.”(루카 7,14)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처럼,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단 한마디 ‘말씀’으로 목숨을 살리십니다. 그것은 라자로를 살리실 때처럼, 기도를 드리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처럼, 간청을 받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당신께서는 순전히 당신의 진정한 마음, 곧 ‘가엾은 마음’으로 신적인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곧 드러난 것은 신적인 권능이지만, 그 권능을 불러온 것은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상한, 아픈 마음 곧 상심이 불러온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단장의 아픔’을 그대로 받으신 예수님의 ‘심장이 찢기어지면서’ 흘러나온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아픈 가슴에 가 닿은, 그 아픔과 분리되지 않은 상한 마음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죽음을 이기는 권능을 불러왔습니다.
이는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을 이루는 힘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사랑이 목숨을 살리는 힘이요, 구원의 힘임을 말해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그렇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듯이, 우리의 사랑 역시 이웃과 자신을 구원으로 이끌어줍니다.
하오니, 주님! 저에게 아파하는 마음을 주소서!
제 마음이 당신 마음 같게 하시고, 제 마음이 상하고 찢기어지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젊은이야, 일어나라.”(루카 7,14)
주님!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이를 일으켜 세우시듯,
당신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누워 잠들어 있는
저를 일으켜 세우소서!
죽음의 길 벗어나 생명의 길 걷게 하소서!
쪼개어 나누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상처도 축복이 되게 하시고
아픔도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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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기적을 낳는다
때때로 하느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좀 더 확실히 보여주면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또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 생활을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기적을 보여주면 오히려 두려움을 느낄까요? 어찌 되었든 당장 내가 요구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기적을 행하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지니셨지만, 그분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어디에서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면 기어이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현상을 보고 믿음이 성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때뿐입니다. 열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기적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알맹이에는 관심이 없고 기이한 현상에만 눈길이 머물러있습니다. 그들은 실천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기적이 믿음을 성장시키기보다는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을 보거들랑 하느님께 대한 합당한 두려움으로 죄를 피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새롭게 눈뜨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루카7,13).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괴로움을 겪고 있는 백성을 차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죽은 젊은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파하는 당신 백성을 보시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슬픔을 없애 주십니다. 우리도 제대로 보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거지에게 동냥을 줘봤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예’라고 대답하면, 나는 ‘당신은 동냥을 줄 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나요? 아니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주었나요? ’라고 되묻습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야 그들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단지 돈만 던져주고 가버리거든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의 필요를 채워주었듯이 우리도“보고”마음의 공명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에 찬 말씀으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머물면 능력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4,14).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에페3,7)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힘입어 주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믿음으로 그들을 챙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행동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비한 현상은 어디에나 있어도 믿음은 어디에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길이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께로 모아지길 바랍니다. 은총 덩어리보다 은총의 주관자를 만나는 기쁨에 감사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사랑을 외치는 예언자이셨듯이 우리도 세상의 예언자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40,31).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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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창모임을 다니면서 우리가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먼저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새벽형인 저는 4시면 일어나서 움직이는 편입니다. 그런 저의 모습이 다른 동창들에게는 약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음주에 대해서도 저는 식사를 하면 반주를 즐겨하는 편입니다. 술을 하지 않는 동창들에게 저는 약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저는 여행을 다닐 때도 옷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는 편입니다.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제가 동창들에게는 약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오랜 만에 만난 동창들에게서 제게는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동창은 음식을 뚝딱 금세 만들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동창은 국내 정치상황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동창은 손재주가 좋았습니다. 만지면 문제가 해결되곤 하였습니다. 저는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동창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였습니다. 지루할 것 같은 시간들이 즐거운 시간으로 변했습니다. 저는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배가 산으로 가지 않았던 것은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을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례행렬을 보셨습니다. 슬픔에 찬 가족들을 보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둠에 빛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며칠 전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음식을 주문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종업원은 주문이 잘못 전달되었다고 곧 갖다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조금 있으니 주인이 왔습니다. 주인은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주문 한 것 이외의 음식을 더 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다른 것으로 보상을 해 주었습니다. 자칫 기분이 나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솔직한 사과를 받은 후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주인은 모든 테이블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이상한 느낌이 들어도 곧 와서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습니다. 음식도 맛이 있었지만 주인의 그런 세심한 배려가 있기에 손님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모든 신경이 아이에게 향해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배고 고픈지, 옷에 실례를 했는지, 자고 싶은지 알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저는 아이가 왜 우는지 모릅니다. 엄마만큼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병든 이, 헐벗은 이, 외로운 이, 슬픔 중에 있는 이들에게 모든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자비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는 나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교만함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많은 죄악들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심을 먼저 생각한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열등감입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등감은 우리를 영성생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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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누가 사람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앵’하고 태어나, ‘휙’하고 살다가, ‘억’하고 죽더라.”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인생이 긴 것 같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얼마 전에 서울 신학교 동창 신부가 강화에 찾아왔습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옛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신학교 다닐 때의 사건 사고를 이야기했고, 또 재미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실컷 웃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3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에 하늘 같았던 교수 신부님들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지금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기다릴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돈? 명예? 권력?
그 모든 것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일한 것이 기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기억을 많이 간직하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의연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최후의 순간에 어떤 기억을 떠올릴 것 같습니까?
고을 성문에서 두 행렬이 마주쳤습니다. 하나는 마을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일행이었고, 또 하나는 마을에서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이었습니다. 죽은 이는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 과부는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를 바라보며 유일한 희망을 걸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제 그 아들마저 잃은 이 여인의 처지는 어떠했을까요? 당시는 여자 혼자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던 것입니다.
외아들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죽음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 죽음 앞에서 힘든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서 있는 외아들의 어머니를 가엾이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울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구원의 행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께 대한 사랑의 기억을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기억만을 만들면, 결국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삶이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주님께 대한 기억이 구원의 큰 선물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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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살아 있는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천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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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느님
-생명, 일치, 찬양-
강론 쓰기전 우선 생각하는 것이 강론 주제를 나타내는 제목입니다. 방금 읽은 오늘 복음을 요약하는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이 은혜롭습니다. “우리 가운데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바로 여기서 착안한 강론 제목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느님’입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이현주 역)은 유대인 랍비 신비주의자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의 작품으로 제가 오랜동안 밑줄치며 메모하며, 열광하며 읽었던 책명이기도 합니다. 읽을 때 마다 늘 새로운 가르침과 깨우침을 얻었던 책입니다.
우리 수도자를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정의하는데, ‘하느님을 찾는 사람’만 있는게 아니라, 반대로 ‘사람을 찾는 하느님’도 있습니다. 사람을 찾아오신 하느님이기에 비로소 하느님을 찾는 삶이 가능해졌습니다. 바로 이를 노래한 제 예전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그러니 하느님을 찾는 고단한 구도求道의 삶을 잠시 멈추고 하늘을 담는 호수처럼, 찾아오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관상적 휴식을 즐기자는 요지의 시입니다. 찾아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요 성령님이요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환대하여 마음속 깊이 모시는 참으로 복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기도하듯이 “오소서 예수여”, “오소서 성령님”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 이 마음에 오소서.”(성가153)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맘에 오소서.”(성가142)
'오소서, 주 예수님' '오소서, 성령님' 바로 제가 호흡에 맞춰 기도하는 성구(만트라)입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를 호흡하며 사는 삶이 실현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는 일화입니다. 복음의 청중들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역시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오로지 희망을 걸었던 외아들의 죽음은 과부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슬픔이었을까요!
오늘 복음 장면이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죽음의 대열과 생명의 대열이 조우遭遇합니다. 그대로 파스카의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생명과 빛, 희망의 대열을 상징하는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과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죽음과 어둠, 절망의 대열을 상징하는 과부 일행의 극적인 만남입니다.
우연이 아닌 분명 과부의 울부짖음이 하느님께 도달되어 마침내 예수님이 찾아오셨으니 그대로 섭리의 은총입니다. 다음 그림처럼 선명한 감동적인 대목은 그대로 예수님을 통한 자비로운 하느님의 개입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얼마나 멋진 예수님이신지요! 바로 하느님은 이런분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파스카 신비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순간 죽음은 생명으로, 어둠은 빛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입증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신 하느님의 세 특성이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납니다. ‘가까이 계심(closeness)’, ‘연민(compassion)’, 그리고 ‘부드러움(tenderness)’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예수님처럼 우리도 연민과 부드러움, 겸손과 지혜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우리 모두의 소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오늘 복음의 핵심 말마디이며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일어나라’는 말마디는 부활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살아있다 하나 실상 영혼은 시들어 죽어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이런 우리들을 영적 죽음으로부터 살려내는 말씀입니다. 흡사 나자로를 살려낼 때 “라자로야 나오너라”(요한11,43)는 장면을, 회당장의 딸을 살리실 때 “탈리타 쿰, 소녀야 일어나라”(마르5,41)는 은혜로운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무기력, 무의욕, 무감각한 마음이 들 때, 좌절감이나 자포자기 절망감이나 원망, 실망하는 마음이 되어 영혼이 시들어 죽어간다 생각될 때 지체없이 “젊은이야, 일어나라.” 주님의 말씀을 연상하여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젊은이’이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대죄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이렇게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영적탄력도 영적감성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우울증이나 치매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곤경에 처할 때 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시기에 이런 파스카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듯이 우리 하나하나를 살리시고, 이어 공동체에 일치와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나인 몸과 여러 지체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에 대해, 또 교회의 다양한 은사에 대해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실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적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로 만들어 주시며 공동체의 세가지 특징은 일치성, 다양성, 연대성입니다. 이런 상호보완의 일치와 평화의 공동체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이어지는 공동체 형제들의 받은 은사가 모두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신의 한 수’와도 같은 주님의 선물들로 이뤄진 여기 우리 수도공동체입니다. 살아갈수록 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고마움도 날로 커집니다. 그리하여 변함없는 제 고백이 지금도 여전히 게시판에 붙어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똑같은 부활과 생명의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공동체에 일치와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응답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를,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주님을 뵌 군중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했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찬양과 찬미를, 영광을 드립니다. 바로 우리의 마땅한 응답이요, 그리하여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은 동방 4대 교부들(아타나시오, 바실리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나지안죠의 그레고리오)중 하나인 개혁가이자 예언자이자 교회학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학자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전폭적으로 신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파란만장한 삶에 탁월한 설교로 ‘황금의 입’이라 금구金口라는 불리는 성인으로 설교자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수차례의 유배중 마지막 유배시 임종때의 일화도 감동적입니다. 전설적인 신비스런 일화를 소개합니다. 마지막 임종처는 순교자 바실리쿠스(+311) 작은 경당입니다.
임종하던 날 밤, 순교 성인 바실리쿠스가 꿈에 요한 크리소스토모에게 나타나 “마음을 편히 가지시오. 요한 형제, 아침이면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오.” 말했다 하며, 이 꿈에 앞서 바실리쿠스 경당 사제에게도 꿈에 나타나 “요한 형제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게. 그가 오고 있네.”라고 말했다 합니다. 새삼 우연은 없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섭리하에 있는 믿는 이들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임종시 장면입니다.
요한은 흰 수의를 덮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기 옷은 그가 감격스럽게 읽었던 위대한 은수자 안토니오를 본받아 둘러서 있는 사람들에게 선사합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임종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
또는 이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결국은 같은 내용입니다. 평생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 영광을 돌렸던 삶의 요약과도 같은 임종어는 흡사 수도원 정문의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이란 성규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강요된 고통으로 사망할 당시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나이는 대략 58세였다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새 생명과 일치, 평화를 선물하시며, 우리는 주님께 감사의 찬양으로 응답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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